당신의 인생의 가치는 얼마쯤 될까 (눅15:1-10)
본문
눅15장에는 유명한 3개의 비유가 나온다. 공통주제는 “잃었다가 되찾은 물건”이다. 잃었던 양,잃었던 동전, 잃었던 아들이라는 비유는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본문에는 3가지의 관점이 제시되었다.
첫째, 예수의 행동을 비난하는 종교주의자들(바리새인,서기관) 분명 종교의 본분은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행동이 자신들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이라는 종교의 본질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제도화된 종교의 문제점과 그 소속집단의 불합리성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얼마든지 범할 수있는 문제점들이다.
우리는 이들의 행동을 통하여 나는 어떤가를 살펴야 한다. “호교”라는 미명하에 불법을 자행한적은 없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은 과연 정도를 이탈한 유대인들의 호교행위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그들의 행위를 기특한다고 하실까 아니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하시며 호되게 책망하실까 이와 유사한 사례가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다.
어느 목회자가 교회없는 시골동리에 개척을 하려고 뜻을 정했다. 그리고 대상지역의 주민들을 만났더니 그중에도 멀리 떨어진 교회를 나가는 몇명의 신자가 있었다. 바로 이점이 문제거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리에서 개척하려는 목회자가 자신들이 소속된 교회의 교파와 다르다는 이유로 갖은 수단을 동원해 타교파의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결국은 막아냈다. 과연 이것이 승리일까 이들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들의 동리에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10리이상 떨어진 먼 곳으로 지금도 힘든 교회출석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한 무익한 “호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실수를 거듭거듭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상대에게 내가 믿는 기독교에 대하여 그릇된 인상을 심어주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따금 불교인들의 편협성을 경험한다. 기독교보다 먼저 들어온 종교라는 점에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많이 박해했고 지금도 강한 라이벌의식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 역시 신사적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점도 놓치지 말고 생각해보자.
두번째, 잃은 것을 찾고있는 목자와 여인(예수님).
주님은 모든 기회를 잃은 영혼 되찾는 일에 투자하셨다. 때로는 인자한 목자가 되셔서 잃어버린 “한마리”를 다시 찾으시려고 온 밤을 지새우기도 하셨다. 작은 것 하나에 까지 큰 가치부여를 하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끝끝내는 원하시는 것을 찾아내고야 마는 강인한 사랑의 목자이시다. 주위의 누가 뭐라하든 개의치 않으신다.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찾는 비유를 통하여 “찾을 때까지”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엿보게 된다.
영혼을 사랑하는 구도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바로 예수님의 구령열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일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교역자와 장로와 집사를 세우셨다. 교역자는 당연히 성도에게 이러한 구령의 열정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자신이 이러한 구령의 열정에 불타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바울처럼 구령열에 불타는데도 불구하고 일부의 교회들이 바울에 대하여 불신앙적인 행동을 보이듯 오늘날 현대의 교회들도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가 원만치 못한 경우가 있다.
직분은 결코 목회자를 감시하라고 준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발목이나 붙잡고 늘어지라고 준것이 아님에도 일부 교회에서는 평신도지도자들이 담임목사의 목회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가슴아픈 경우를 보게된다. 모두다 구령열에 불타는 주님을 생각하며 회개하자. 그리고 어떤 기회가 주어지든 그 모든 기회를 잃은 양 되찾는데 전념하자. 직장도 잃은 양 되찾는 곳이요, 사업의 현장도 잃은 양을 만나는 접촉장소여야 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통하여 내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영혼임을 깨닫자.
세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찾아진 존재”들이다.(되찮은 양,은전)
얼마전 서울에서는 서울올림픽 4주년 기념 육상대회가 있었다.
그런데 대회를마친 관게자들에게 골치아픈 문제가 발생했다. 참가선수중 에티오피아의 한 선수가 대열을 이탈해 망명을 요청했기 때문인데, 별로 장래성이 없어서 받아주려고 않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육상협회에서는 그 선수의 보호자인 에티오피아의 임원들이 한심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책임져야 할 선수가 없어졌는데도 찾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으니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세계의 매정함을 깨닫게 된다.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일까 아마 내가 없어졌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처음에는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찾느냐가 문제다. 얼마동안 찾다가 없으면 결국은 단념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겠다는 분이 계시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찾고 찾으셔서 끝끝내 찾아진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의 결과로 찾아진 존재들이다. 주님은 나를 구하시려고 갖은 모욕도 사양치 않으셨다. 때로는 비굴해보이시기도 했지만 그것도 참으셨다. 우리는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의 귀한 존재다.
그래서 누구의 말처럼 우리는 “하늘나라의 V
IP”이다. 우리는 여기서 점검해야 할 일이 있다.
1)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이토록 나를 귀하게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하여 지금 현재도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이 은혜를 찬양하자.
2)만일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었고 감격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면 겸손히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악을 회개해야 한다.그러면 하나님은 내 안에 넘치는 기쁨을 주신다.
3)내 자신이 이토록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면 이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토록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나는 누구인가 “나”를 알아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자기를 몰랐기 때문에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다.
2)예수님을 따르기 원했던 세리나 죄인과 같은 존재다.
3)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냥 구경꾼일 뿐이다.
우리는 셋중의 하나여야 한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내 자신이 나의 존재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생각을 갖든 상관없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현대인들은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미친듯이 돈을 좇아가기도 한다. 명예를 위해 뛰어가고 있다. 술, 담배라는 기호식품과 마약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잊어보려고도 한다. 다른 사람과의 차등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우월함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이도 역시 못난이들의 열등의식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끝내 고백해야할 한마디가 있다. “나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고백이다. “나는 어느 여인이 애지중지하다가 잃어버린 동전”이라는 고백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아니라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에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고 계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사실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울안에 있는 99마리 보다 길잃은 한 마리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계십니다. 한 드라크마라는 동전을 찾기 위해서 온 밤을 투자해가면서 찾을 때까지 비로 쓸면서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는 3가지의 관점이 제시되었다.
첫째, 예수의 행동을 비난하는 종교주의자들(바리새인,서기관) 분명 종교의 본분은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행동이 자신들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이라는 종교의 본질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제도화된 종교의 문제점과 그 소속집단의 불합리성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얼마든지 범할 수있는 문제점들이다.
우리는 이들의 행동을 통하여 나는 어떤가를 살펴야 한다. “호교”라는 미명하에 불법을 자행한적은 없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은 과연 정도를 이탈한 유대인들의 호교행위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그들의 행위를 기특한다고 하실까 아니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하시며 호되게 책망하실까 이와 유사한 사례가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있다.
어느 목회자가 교회없는 시골동리에 개척을 하려고 뜻을 정했다. 그리고 대상지역의 주민들을 만났더니 그중에도 멀리 떨어진 교회를 나가는 몇명의 신자가 있었다. 바로 이점이 문제거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리에서 개척하려는 목회자가 자신들이 소속된 교회의 교파와 다르다는 이유로 갖은 수단을 동원해 타교파의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결국은 막아냈다. 과연 이것이 승리일까 이들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들의 동리에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10리이상 떨어진 먼 곳으로 지금도 힘든 교회출석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한 무익한 “호교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실수를 거듭거듭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타종교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상대에게 내가 믿는 기독교에 대하여 그릇된 인상을 심어주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따금 불교인들의 편협성을 경험한다. 기독교보다 먼저 들어온 종교라는 점에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많이 박해했고 지금도 강한 라이벌의식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기독교의 대응 역시 신사적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점도 놓치지 말고 생각해보자.
두번째, 잃은 것을 찾고있는 목자와 여인(예수님).
주님은 모든 기회를 잃은 영혼 되찾는 일에 투자하셨다. 때로는 인자한 목자가 되셔서 잃어버린 “한마리”를 다시 찾으시려고 온 밤을 지새우기도 하셨다. 작은 것 하나에 까지 큰 가치부여를 하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끝끝내는 원하시는 것을 찾아내고야 마는 강인한 사랑의 목자이시다. 주위의 누가 뭐라하든 개의치 않으신다.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찾는 비유를 통하여 “찾을 때까지”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엿보게 된다.
영혼을 사랑하는 구도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바로 예수님의 구령열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일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교역자와 장로와 집사를 세우셨다. 교역자는 당연히 성도에게 이러한 구령의 열정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자신이 이러한 구령의 열정에 불타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목회자는 바울처럼 구령열에 불타는데도 불구하고 일부의 교회들이 바울에 대하여 불신앙적인 행동을 보이듯 오늘날 현대의 교회들도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가 원만치 못한 경우가 있다.
직분은 결코 목회자를 감시하라고 준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발목이나 붙잡고 늘어지라고 준것이 아님에도 일부 교회에서는 평신도지도자들이 담임목사의 목회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가슴아픈 경우를 보게된다. 모두다 구령열에 불타는 주님을 생각하며 회개하자. 그리고 어떤 기회가 주어지든 그 모든 기회를 잃은 양 되찾는데 전념하자. 직장도 잃은 양 되찾는 곳이요, 사업의 현장도 잃은 양을 만나는 접촉장소여야 한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통하여 내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영혼임을 깨닫자.
세번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찾아진 존재”들이다.(되찮은 양,은전)
얼마전 서울에서는 서울올림픽 4주년 기념 육상대회가 있었다.
그런데 대회를마친 관게자들에게 골치아픈 문제가 발생했다. 참가선수중 에티오피아의 한 선수가 대열을 이탈해 망명을 요청했기 때문인데, 별로 장래성이 없어서 받아주려고 않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육상협회에서는 그 선수의 보호자인 에티오피아의 임원들이 한심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책임져야 할 선수가 없어졌는데도 찾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으니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세계의 매정함을 깨닫게 된다. 과연 나는 어떤 존재일까 아마 내가 없어졌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처음에는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찾느냐가 문제다. 얼마동안 찾다가 없으면 결국은 단념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겠다는 분이 계시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찾고 찾으셔서 끝끝내 찾아진 존재가 있다.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의 결과로 찾아진 존재들이다. 주님은 나를 구하시려고 갖은 모욕도 사양치 않으셨다. 때로는 비굴해보이시기도 했지만 그것도 참으셨다. 우리는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의 귀한 존재다.
그래서 누구의 말처럼 우리는 “하늘나라의 V
IP”이다. 우리는 여기서 점검해야 할 일이 있다.
1)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이토록 나를 귀하게 여기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하여 지금 현재도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이 은혜를 찬양하자.
2)만일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었고 감격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면 겸손히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악을 회개해야 한다.그러면 하나님은 내 안에 넘치는 기쁨을 주신다.
3)내 자신이 이토록 하나님 앞에서 귀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면 이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토록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나는 누구인가 “나”를 알아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몰랐다. 자기를 몰랐기 때문에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다.
2)예수님을 따르기 원했던 세리나 죄인과 같은 존재다.
3)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냥 구경꾼일 뿐이다.
우리는 셋중의 하나여야 한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내 자신이 나의 존재를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어떤 생각을 갖든 상관없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현대인들은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미친듯이 돈을 좇아가기도 한다. 명예를 위해 뛰어가고 있다. 술, 담배라는 기호식품과 마약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 사실을 잊어보려고도 한다. 다른 사람과의 차등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우월함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이도 역시 못난이들의 열등의식이 빚어낸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끝내 고백해야할 한마디가 있다. “나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고백이다. “나는 어느 여인이 애지중지하다가 잃어버린 동전”이라는 고백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아니라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기에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고 계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사실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울안에 있는 99마리 보다 길잃은 한 마리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계십니다. 한 드라크마라는 동전을 찾기 위해서 온 밤을 투자해가면서 찾을 때까지 비로 쓸면서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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