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이제는 내가 주를 보나이다 (욥42:1-6)

본문

몇 일 전에 조선일보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존 글렌이라고 하는 미국의 전 상원의원이 계십니다. 현재 나이 78세 입니다. 그러나 그는 작년에 최고 고령자로서 우주 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신실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귀한 간증을 해주고 있습니다. 설명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은 몇 가지 우리가 귀담아 들을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달력에 맞추어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아주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노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삶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삶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우주 경험은 신앙을 강화시킵니다." 지구에서 보는 지구와 지구 밖에서 보는 지구는 다릅니다. 우주에 나가서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사실 우리는 얇은 공기 필름, 공기 막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크신 지혜를 몸으로 경험하면서 그는 지구를 바라보며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서 조금 더 벗어나서 나와 내 현실을 한번 관조해보는 그런 시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듣는다는 것과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듣는 것은 결국은 간접적 지식입니다. 보는 것은 직접적인 지식입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남의 경험을 내가 들을 수 있어요. 그러나 내가 경험하면서 배웁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내가 보고 내가 경험하고 그리고 아는 확실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갔을 때, 저는 시간이 많지 않고 그래서 단독안내원을 구했습니다. 히브리 대학 교수로 있던 분이에요.
그런데 차를 사 가지고 운전하면서 운전사 겸 안내를 합니다. 그분하고 같이 다니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거는 어떤 곳이고 여기는 어떻고 여기는 어떻고 설명을 합니다. 설명 다 한 다음에 내가 또 보충 설명을 합니다. "그건 사실은 이런 내용이고, 역사적으로는 이렇고……."하고 얘길 했더니, "How do you know"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그래서 "책 봤지요 책을. 난 여기 오기 위해서 미리 오늘 아침에도 여기 올 것을 알고 내가 책을 보고 왔노라."그랬어요. 그럼 나 안내 안하겠다고, "아니 당신이 본 걸 말해주시오. 나는 내가 보고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까." 여러분 이게 지식이라는 겁니다. 들어서 아는 것은 책을 통해 아는 거예요. 아무리 많이 알아도 그건 참 지식이 아니에요. 내가 직접 부딪쳐서 몸으로 경험하고 몸으로 깨닫습니다. 눈으로 봅니다. 눈으로 봅니다. 그건 확실한 지식입니다. 이건 이론이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의 반대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내 지식입니다. 내가 깨달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욥이 말합니다 "전에는 듣기만 하더니 이제는 보았습니다." 보다 더 확실한 지식을 알게 되었다 하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한평생 공부하는 겁니다. 계속 공부하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커리큘럼을 가지고, 하나님이 만들어준 교과서를 통해서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는 교육을 받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공부라는 것은 언제나 정도에 맞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때때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은 요새는 너무 젊은 사람들이 어른이 알아야 할 것을 미리 알아 버려요. 소화를 못해요. 조금 더 있다 보아도 되는데 너무 미리 보아서 그래서 일이 어려워집니다. 그러니까 자기 수준에 맞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또 그렇게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너무 조바심을 내서 오히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아이작 뉴튼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만원경을 통하여 수백만 마일 저 밖에 있는 많은 우주의 세계를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면은 전체는 물론 우주는 물론 하나님 나라의 세계까지 내 영으로 내 마음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또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본다는 것은 눈으로만 보는게 아닙니다. 마음으로 보고 영의 눈을 들어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그런 때를 심리적으로 연구해보면, '우주의 중심은 나다'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어머니는 왜 존재하느냐, 나를 위해 존재한다. 어머니 젓이 왜 둘이냐, 하나는 먹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거다. 거 누구도 장난하면, 다치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은 내 마음 대로요. 내가 울면 다 들어줍니다.
그런데 조금 크면서 생각이 달라집니다. 나 외에 형님이 있다는 걸 압니다. 나만이 아니고 나 외에 형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것은 굉장한 충격입니다. 조금 크면 또 동생이 태어납니다. 이거는 아주 혁명적 충격입니다, 이거는요. 나 혼자인줄 알았는데 웬 것이 또 태어나가지고 말썽이냐 이거야. 이거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때 잘못하면은 성격 파탄이 옵니다. 이렇게 자기 세계관이 깨져 나가는 경험을 합니다. 조금 더 크면은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예요. 아버지 마음대로 해요. 나는 어머니 명령을 따라야 되요. 바로 이렇게 바뀌어 들어갈 때 그 충격은 대단합니다. 조금 있다가 친구가 있지요, 또 이성인 애인이 있지요, 가정이 있지요, 이렇게 나아가다가 세계가 넓은 것을 알고. 이제 중요한 공부는 장년이 넘어서면서 안 될 것이 있다는 걸 알기 시작을 합니다. 하면 된다고 했지만 안 될 건 안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건 안 되는 거야. 내가 뭘 잘한다고 뭐 한다고, 뭐 한다고 해봤지만 이제 보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면은 이제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다. 아무리 벌고 아무리 수고하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아니요. 잠시 후에 떠나야 한데요. 이렇게 우리는 한평생 계속 공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순간적인 것에서부터 영원한 것으로 물질적인 것에서 신령한 것으로 자기 중심적인 세계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구분적인 것에서 종합적인 것으로 물질적인 것에서 인격적인 세계로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계속 공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욥기 마지막 부분입니다. 욥기의 결론입니다. 42장되는 이 욥기에 그 많은 고난의 수난사가 있습니다. 이 한 순간을 위하여 이 성숙한 인격을 위하여 이 많은 사건들은 있어야 했습니다. 이 시나리오와 이 작품의 결론이 목표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전에는 듣기만 하더니 이제는 보았습니다. 바로 보여주기 위해서.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이 많은 수난사는 전개되어야 했던 겁니다. 첫 번째 단계를 보십시다. 기본적인 단계가 바로 물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물질이 중요한 줄 알지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열해 놓고 그 중에 가치 평가를 해보세요. 가장 가치가 낮은 것이 무엇입니까 뭐하고도 바꿀 수 없다고 하지만 가장 싸구려가 물질입니다. 건강하고 비교하겠습니까, 명예하고 비교하겠습니까, 가족하고 비교하겠습니까. 무엇과도 비교가 안되고 가장 낮은 가치의 것이 물질이에요.
그런데 욥은 동방의 부자였답니다. 양이 칠 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겨리요, 암 나귀가 오백이요, 그리고 많은 종들이 있었다. 당대의 동방의 유명한 부자였다 이 얘기예요. 그런데 이 물질이 하루아침에, 그것도 천천히 없어진게 아니에요. 하루아침에 망해서 딴 나라 사람들이 와서 다 죽이고 빼앗아 가버렸어요. 다 없어 졌어요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그는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이시라고. 나는 내 노력, 내 수고로 재산이 늘어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니 그냥 빈손이 되더라구요. 하루아침에…….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 십니다. 미디안 사람들이 가져갔고,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져갔고, 어느 강도가 빼앗아갔지만, 아니요. 하나님이 주셨듯이 하나님 가져가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거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로는 그가 가정을 잃어버립니다. 7남 3녀 좋은 가정이요. 할 수만 있으면 자식이야 많을수록 좋지요. 그리고 특별히 자식들이 형제들이 화목해서 형의 생일날이 되면은 다 모여서 잔치를 하고, 몇 일 동안 잔치를 하고, 아버지 되는 입장에서는 즐겁고 기쁘고, 혹시나 잔치하면서 범죄 했을까봐 뒤에 제사를 드렸다는 거 아닙니까 경건한 가정이고 화목된 식구들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잔치를 하는 중에 집이 무너져서 열 형제가 다 죽어 버렸어요. 여러분 이 기가 막힌 사실. 그 순간 그는 또 깨닫습니다. 본래 성을 깨닫습니다. 1장 21절에서 실존적 존재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적신으로 나왔으니 또한 적신으로 돌아갈찌라. 내가 세상에 날 때 혼자였고, 앞으로 갈 때도 혼자예요. 근본적으로 혼자라는 걸 잊지 마세요. 가끔 우리 교인들 가운데는 "자식이 너무 귀해서 애가 유학을 간다고 내가 사업 다 때려 치고 거기 가서 시중을 하면서 뭐 지내고 싶습니다."그래요. 그래서 내가 정신 나갔냐고. 냅둬! 저들은 자기 길을 가게하고 당신은 당신 일이나 하라. 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세게 말하죠 제가. 세상에 자식 키우러 태어난 사람 없어요. 그저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야하고 나는 혼자예요. 쓸데없이 거기에 의존하고 눈물방울이나 흘리고 그러지 마세요. 난 더 우스운 것은 뭐 군대간다고 할 때우는 어머니들, 한심한 어머니들야. "아 제가 제 갈 길 가는데 뭘 울고 앉아있어장하다!"그러구 끝났지. 그거 안 그래요 왜 이렇게 감상적이고 시원치 않은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혼자요. 처음부터 혼자였고 앞으로도 혼자요. 자식이 있다고 당신이 당신 아닌 게 아니에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과 의미를 맞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내게서 떠나는 거예요. 떠나야 마땅합니다. 나는 혼자요. 그뿐 아니라 1장 9절에 보면 좀 기막힌 얘기가 있어요. 그래도 동반자 아내가 있는데. 사실 성경이 이상한 것이 이렇게 부자면 옛날에 마누라도 여럿이 있을 거 같은데 하나밖에 없어요. 욥의 아내가 이 어려운 처참한 시간에, 정말 같이 있어야 할 시간인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당신이 자기의 순결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고 도망갑니다. 이 사람 참 이상한 사람이예요. 무슨 마누라가 이래요. 다시 말하면 욥의 고난, 욥의 그 절실한 고통 이 어려운 고통에 또한 거기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데 그 믿음을 아내가 이해하지 못했어요.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는 가출을 해버립니다. 여기서 그는 깨닫습니다. 인생은 처음부터 고독한 것이었다고.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한다고 하지. 그러나 진정으로 당신의 깊은 실존적 고민을 누가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건강을 잃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보루가 건강인데 그는 몸이 병듭니다. 썩었어요. 너무 가려워요. 이거 가려운 고통은요 쑤시는 고통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걸 긁고 기왓장으로 긁고 잿더미에 뒹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고통하고 구더기가 나고 썩어 갑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 그는 여기서 깨닫습니다. "아 이렇게 인생은 죽는구나." 내세를 바라보게 됩니다. "육체 밖에서 주를 뵈오니라. 주께서 외인처럼 대하지 아니할거라."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 몸이 아프십니까 어디가 뜨끔뜨끔 거립니까 이제 가까이 온다는 걸 잊지 마세요. 병원에 입원했습니까 병은 죽는 연습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병 낫게 해주세요."라고 어리석은 기도하지 마세요. 그보다는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이렇게 아프다가 이렇게 가는가 봅니다. 그래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 죽어도 아름답게 갈 수 있도록 그렇게 넉넉히 준비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 기도부터 먼저 드리세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간혹 의사들이 수고 많이했는데, 의사 선생님이 여기 우리 교회에 사백명이나 됩니다만은 미안하지만 의사 거 말짱 헛거요. 왜요 아무리 수고했댔자 마지막엔 영안실에서 끝나는 거라요. 안 그렇습니까 괜히 들락날락 하다가 가는 거지. 그런고로 병들었다 하면은 죽을 준비부터 하세요. 안 죽으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욥이 이렇게 어려운 고통에 몸이 썩어올 때, "하나님 육체 밖에서 주를 뵈오리다." 탁 준비했습니다 벌써.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걸 깨달으라고 병들게 하는 건데 쓸데없는 소리만 하고 있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죽는 준비를 해야 하죠. 또 친구들이 비방을 합니다. 어느 친구 하나 욥의 마음을 참으로 위로 한 자가 없어요. 세 친구가 와서 뭐 위로한다고 하는 소리가, "잘 생각해 보라, 숨겨둔 죄가 있는가 보다. 죄 없이 당하는 자가 있더냐" 아주 입방아를 찧는데 아주 힘든 거예요. 마지막에 "입 좀 다물어라 너 같은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쓸데없는 의원이다. 너희들은 내게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제 나는 홀로 하나님 앞에 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에 욥이 당한 고난 중에 아마 절정적인 고난이 있습니다. 그건 영적 고난입니다. 의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욥기 13장 23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부족함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원수처럼 생각하시는 겁니까. 영적으로 도대체 내 죄가 얼마나 많기에 주는 내게서 얼굴을 돌리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는 순간 이렇게 괴로워합니다. 영적 고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는 깨닫습니다. "나의 운명은 당신이 아십니다. 나의 의도 당신이 아십니다.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리고 구속자가 나와 함께 있다."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다." 23장 10절에서 말하고, "내게 작정하신 것을 그가 이루실 것이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과 능력을 생각하며 그 앞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늘 외우지 않습니까 합동하여 선을 이운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제 비로소 여기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배의 선원이었는데 삼백명이 탄 배가 파손되는데 다 죽고 이 하나가 널쪽을 타고 표류해서 무인도에 도착을 합니다. 처음에는 바닷가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삼백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죽을 때, 나 하나가 이렇게 살아 남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긴 기도를 드리고 돌아보니까 조그마한 섬인데 무인도예요. 짐승들만 왔다갔다 해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수평선 저 쪽에 지나가는 배를 보니까 장대 끝에다가 옷을 찢어서 깃발을 만들어 가지고 그냥 하루종일 흔들어도 배가 지나가면서도 이쪽을 보지 못해요. 너무너무 속이 상해요. 겨울이 가까워 올 때 할 수 없이 그는 나뭇가지를 많이 꺾어다가 움막을 지었어요. 겨울을 나야겠기 때문에. 움막을 이렇게 집이라고 하나 지어놨는데 돌을 갈아서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불씨를 보관하는데 그 불씨를 잘못 보관해 가지고 저녁 노을에 바람이 일면서 그만 그 움막집이 홀랑 불타버렸어요. 이때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다 죽을 때 꼴깍하고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 왜 나를 살려줘 가지고 이렇게 애타게 고생하게 하는 겁니까 내가 움막 지어 놓은 것까지 홀랑 불태워 버리고 이럴 수가 있습니까" 원망하다가 그만 기가 빠져서 잠들었어요. 큰 배가 부웅하고 가까이 옵니다. 나가서 맞이하면서 선장에게 어떻게 내가 있는 줄 알고 왔냐고 감사하다고 그러니까 "알 거 뭐요. 연기가 나서 '왠일인가'하고 왔지." 여러분 내가 지어 놓은 이 움막집이 불타버려야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어요. 우리 또한 그래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불타버려야 소망의 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회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매 맞으면서 어렵고 고달플 때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잘못했다고. 그러나 이보다 더 큰 회개는 모든 일이 다 잘될 때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때 가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동안에 원망한 것 잘못했고 불평한 것 잘못했습니다.
미련했던 것 용서하세요. 이 참회가 참으로 높은 가치의 참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욥은 말합니다. 이 많은 고통 속에서 전에는 듣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이것은 고난 중에 하는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해서 부자가 되고 다시 건강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배나 복을 주실 때 그때 가서 비로소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회개하게 됩니다. 아는 지식이 있고 깨닫는 지식이 있습니다. 욥은 그 많은 시련 속에서 깨닫고 깨닫고 성숙하고 높은 수준에 올라가서 이제서 회개와 감사, 감사와 회개를 함께 합니다. 이것이 참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36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