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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낙원의 이유 (창3:6-13)

본문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그 결과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그 에덴 동산에 살았으면 농사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쫓겨 나가지고 고생을 하게 되나…. 원인은 아담과 이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제다 이거.' 늘 이렇게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이 좀 지나쳤어요. 목사님이 이말 저말로 설명을 해 봤지만은 영 들어먹지가 않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녁 만찬을 청했는데 음식을 잘 차려놓고 식사 기도를 하고 막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서 이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자 우리 기도도 다 했으니깐 식사를 먼저 하십시오. 다 같이 식사를 하세요. 그건데 요 가운데 있는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건 그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가 이것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참고 다른 것만 다른 모든 것만 잡수십시오." 그랬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갔어요. 식사하는데 이 장로님이 그것이 궁금해 못 견디겠거든. 그것이 무어냐 이거에요. 마침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 새 한 마리를 잡아 넣으셨어요. "푸릉" 하고 날아올랐는데 아 이걸 잡을 재간이 있어야죠. 목사님 들어오시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어넣어야겠는데 잡을 길이 없어요. 이리 저리 쫓아 다니는데 먼지가 자욱합니다. 이제 목사님이 들어 왔습니다. "아니 여기 많은 음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열어 보았습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랬어요.
여러분 에덴 동산, 분명히 낙원입니다. 이 낙원을 우리는 왜 잃게 되었습니까 왜 낙원에서 쫓겨났습니까 왜 실낙원에 살아야 합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신학적인 용어로서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라는 말은 '죄의 뿌리가 되는 죄' 그런 말입니다. 죄의 원인이 되는 죄, 어떤 죄가 여기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죄라고 하는 사건 하나에 집착합니다 만은 알고 보면 보이지 않는 원인이 있어요. 보다 더 깊은 곳에 뿌리가 있어요. 그것이 여기에 와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인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원인은 언제나 과거 상황입니다. 지나갔지요. 그러나 거기에 원인이 있었고 원인은 언제나 깊은 곳에 있어서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야 말로 마음에 있는 것이고 내 성품에 있는 것이고 내 피 속에 있는 것이고 내가 가진 좋지 않은 이런 나쁜 전 이해 혹은 잠재 의식 속에 있는 거예요. 자 이런 그 원인 그걸 우리가 알아야지요.
왜냐하면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원인을 알아야하고 원인을 깨달아야하고 원인을 발취해야하고 원인을 끊어 버려야 됩니다. 그래야 해결이 해야 되는 거지 원인을 그대로 놓아두고는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고 또 더 큰 죄 더 큰 사건 더 큰 실수로 확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실수도 하고 실패합니다만은 그 실패나 실수라고 하는 사건을 너무 그렇게 괴로워 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깊은 원인만 알면 이 사건 때문에 내가 미처 몰랐던 원인을 알게 되어서 그 원인을 바로 찾아서 해결할 수만 있다면 내가 당한 실수는 오히려 보다 더 밝은 미래를 위해서 좋은 지혜가 되고 밑거름이 되고 창조적 삶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을 잃어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낙원이라고 하는 것, 이 에덴이라고 하는 낙원은 정말 낙원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은 넉넉하고 행복한 낙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금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세계요. 이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 된 위치에서 행복해야 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세요. 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아니다 그랬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에게 엄청난 자유가 주어졌지만은 그 자유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어진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 속에 우리의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다 가지는 게 아니요 다 먹는 것도 아니요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이 제한성 스스로 제한하고 제한된 가운데서 그 속에 있는 자유를 극대화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단의 열매 있는 그대로의 낙원, 거기에 행복의 근원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버린 것이요. 깊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 가지려고 하지 말 것 이예요. 한계성 안에서 행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족함이라는 것은 다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요. 만족이라는 말은 다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꼭 필요한 것을 충분히 가졌다는 뜻입니다. 충분함과 만족은 같은게 아니에요.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행복하지 못한 사람, 내가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불행하면서 남을 행복하게 하겠다고 뭐 희생하면서 행복하게 하겠다고 거 반갑지 않은 소리요. 문제는 나 스스로 행복해야 비로소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또한 지금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내일도 불행합니다. 사람은 오늘 내가 취하는, 내가 만든 습관, 내가 만든 생활 철학과 가치관만큼의 내일을 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불행한 사람은 내일도 불행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하구요 또, 지금 내가 처한 이 환경과 처지에서 행복할 줄 모르면 환경이 바뀌어서 다른 처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잘 알지 않습니까 행복한 사람은 어디에 갔다 놓아도 행복해요. 불행한 사람은 아무리 장소를 옮기고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별 짓 다 해봐도 안됩니다. 직장을 해마다 바꾸어도 그는 영영 불행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이 에덴 동산 이대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왜 불만이 있고 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불신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뱀이 찾아와서 아담이 아닌 이브를 찾습니다. 그쪽에 헛점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브에게 말을 합니다. "다 먹지 말라더냐아니, 다 먹으라는데 하나는 아니라더라." 이때부터 이 여자는 고 먹지 말라고 하는 금단의 열매, 거기다가 집착을 합니다. 바로 이게 망조예요. 왜 그 아름다운 세상을 다 보지 못합니까 왜 먹지 말라는 그것에만 마음을 씁니까 그래서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도 하고 소담하고 이리 쳐다보다가 실수하는 거예요. 여러분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전혀 기억하질 못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보세요. 뱀이 와서 "다 먹지 말라더냐" 할 때에 "고건 먹지 말랬다." 해 놓고 그만입니다. 그 뒤에 한 마디 더 했어야 합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다." 그 말이 빠졌어요.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먹으면 죽으리라는 말을 왜 그는 잊어버린 겁니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죠. 자기 욕망이 우선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도 않았고 기억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의 양심의 문제예요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아 여기서 유감된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늘 이 유감돼요. 자 이브가 어쨌든 실수를 해서, 보고 따먹고 남편에게 줍니다. 그 남편에게 주었을 때 제가 바라는 것은 그 남편이 이 실과를 들고 깜짝 놀라는 얘기가 없어요. "어쩌자고 이걸 손을 댔느냐" 왜 이 말이 없는지…. 참 예나 오늘이나 남자들이 멍청해요. 이게 무슨 짓이요.
그런데 전설에는 말이예요, 이건 전설입니다. 성경에 없는 전설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열매를 자기가 먹고 남편에게 주었을 때 남편이 "어쩌자고 그걸 땄느냐" 하고 물었거든요. "이거 먹으면 죽는다는데…" 그러니까 그 이브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그래요. 나는 먹었으니 죽을 겁니다. 당신은 딴 여자하고 행복하게 사세요."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그래 그래 우리 먹고 같이 죽자." 그러고 먹었답니다. 아 멍청하기는 예나 오늘이나… 이게 원죄적인 멍청이요 이게. 자 왜 이렇게 됐느냔 말입니다. 이 두 사람 대화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도 않아요. 아주 편안하게 썼지요, "먹고 남편에게 주었더니 남편도 먹었더라" 그게 끝이요. 이런 유감이 어디에 있습니까 또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는 진실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먹은 것을 알고 하나님이 그를 찾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얼마나 중요한 시간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이 시간에 말이요 "하나님, 금단의 열매를 제가 먹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더라면 제가 믿기는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자. 다시는 그러지마라" 라고 말씀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런데 오늘 여기 보면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내가 여기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묻는 것은 장소를 묻는 게 아니에요.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에요. 그 상태를 묻는 거에요. 내 영혼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 내 양심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내 믿음의 상태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건데 "내가 숨었나이다" 이게 대답입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소통이 끊어졌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에 바로 대답할 수도 없었어요. 참으로 유감된 시간입니다.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몹시 두려워했습니다만은 회개는 없습니다. 이게 문제죠. 사건은 있는데 진실이 없습니다. 벌벌 떨기는 하는데 회개는 없습니다. 여기서 벌써 낙원을 잃어버린 것이올시다. 그리고는 본문에 보는대로 변명에 급급합니다. 책임 전가를 합니다. 참으로 유감 됩니다. 왜 "내가 먹었습니다" 라고 얘기를 못하고 책임을 어디로 돌리고 있는 겁니까 그런 얘기가 있어요. 운동을 하는 사람들, 요새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많이 하는데, 요 운동을 해 보면 같이 운동을 하면 한 번만 운동을 해 보아도 그 사람이 어떤 인격의 사람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운동을 해 보면 꼭 진실형과 정직한 사람과 그리고 Proactivity, 주도성이 있는 사람과 또 어떤 사람은 변명형의 사람이 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이 운동하러 가서 지금 운동하려고 준비하는 시간에 벌써 미리 변명이 나옵니다. 요새 내가 감기 기운이 있어서 잘 안 될 거 같다고… 뭐 언젠 잘 됐나 그런 소리하잖아. 이게 벌써 빗나간 인간이에요. 뭐 운동 무슨 그거 해 가지고 국제선수 되겠나 잘 하든 못 하든 그런 거지. 그게 뭐 거기다가 사소한 거에 목숨을 걸어 그럴 필요가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벌써 변명하기 시작하죠. 일이 잘 안되면 날씨가 어떻고, 뭐 신발이 어떻고 뭐 옷이 어떻고 또 옆의 사람이 뭐 분위기를 잘 뭐 뭐 어떻고…. 뭐 너무 말이 많아. 도대체가 말이 많습니다. 마지막엔 일이 잘 안되고 집에 돌아오면 집에 와서 또 마누라와 싸웁니다. 니가 오늘 내가 아침에 나갈 때 잔소리를 하고 바가지를 긁어서 하루종일 재수가 없었다 이거야. 거기다 책임을 돌립니다. 이런 인간은 구제불능이요. 어디 가서나 꼭 자기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건 누구 때문이요 이건 누구 때문이요 누구 때문이요… 뭘 누구 때문이야 자기 때문이지. 안 그래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근데 오늘 이거는요 뿌리 깊은 죄입니다. 원죄적인 죄라는 말입니다. 보세요. "아담! 어찌하여 먹었느냐" 하나님이 문책할 때, "제가 먹었습니다" 하지 못하고 "이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아내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더욱이 이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어서 함께 하게 한 이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하나님 책임이에요. 왜 이 여자를 나에게 주었습니까 어떤 때에는 너무 좋아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미치게 좋아하더니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 여자 때문에 망조가 들었습니다. 자고로 여자 때문에 망하지. 옛날 이야기 아니에요. 에덴 동산부터 그랬어. 이거 보세요. 이 여자로 인하여 이렇게 될 때 이걸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고 있어요. 이게 어떻게 여자의 일입니까 먹은 건 누군데 문제는 내가 먹었잖아요. 이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만일에 이 책임을 여자에게 돌린다면 이제 그 다음에 꼭 제가 거기 괄호하고 집어넣고 싶은 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씀이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그냥 지나갑니다만은 저는 꼭 한 마디 하겠습니다. 하나님 대신 "
그렇다면 너는 누구냐 너라는 인간은 뭐냐" 이 말이요. 또 여자에게 말하기를 "넌 왜 먹었냐" 그러니까 "뱀이 먹으래서그러면 너는 누구냐 뱀의 말이나 듣고 휘청 휘청하는 도대체 너라는 존재의 주체는 뭐냐 네 정체는 뭐냐" 고 묻습니다. 안그렇습니까 먹으란다고 먹을 것입니까 가란다고 가겠습니까
마지막 선택의 결정은 내게 있는 거요. 그러면 내가 한 거지 어떻게 남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까 저는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이때에 "하나님, 모든 것은 제 잘못입니다. 제가 먹었습니다." 아담이 이렇게 말했더라면 실낙원 되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낙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 가정이 다 낙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주었습니다. 우리 지금 다 넉넉합니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오히려 가난하고 어려울 때보다도 우리의 마음속에 낙원이 없습니다. 에덴의 동쪽에 살고 있습니다. 실낙원 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신과 공포와 거짓과 변명과 책임전가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 많은 날 공청회를 해 보았지만 하나도 밝혀진 일은 없습니다. 여론은 많습니다만은 진실은 숨겨지고 있습니다. 그 깊은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뿌리를 뽑기 전에는 내가 낙원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실락원이 낙원에서 추방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낙원을 버린 것입니다. 복락원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낙원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얼마 전에 센프란시스코에 갔다가 거기엔 히피족도 많고 에이즈 환자도 많습니다. 거기에 가서 제가 눈으로 보고 거기서 들은 얘기입니다. 어떤 아버지는 에이즈 환자로 인해서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휠체어에 태워 가지고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에이즈 환자를 사랑합시다." 그러고 혼자서 데모하는 걸 봤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들은 얘기입니다. 어떤 부인이 여자 의사였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의사 일을 열심히 하노라고 병원을 살리면서 그만 가정 생활을 등한히 했습니다. 남편은 혼자서 이리 저리 방황하다가 그저 술도 먹어보고 아편도 해보고 이리 저리 밖으로 나돌다가 마침내 에이즈 환자가 됐습니다. 시커멓게 썩어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기가 막힙니다. 바로 이 순간입니다. 아내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내가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아내 구실을 안 해서 내가 할 도리를 하지 않았고 내가 병원 일만 하느라고 돌아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해서 당신이 이렇게 된거요. 이것은 당신 책임 이전에 내 책임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병들게 했는데 당신이 이대로 죽어간다면 내가 혼자 살아서 그 가책과 괴로움 속에서 무슨 낙이 있겠느냐"고 "나도 당신하고 같이 갈 거" 라고. 오랫동안 멀어졌던 사이인데 다시, 그 때부터 부부관계를 계속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 여자는 절대로 에이즈가 감염되지 않는 겁니다. 얼마 지내가면서 보니까 남편도 병이 나았어요. 뜨거운 사랑은 에이즈 균도 죽이는 거예요. 이런 기적이 있었어요. 사실입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어디에 살던지 지금 복락원 되어 사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낙원, 슬퍼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처지, 내 가정, 이 현실 속에 복락원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락원 하고 사는 사람이 되야 내일의 하나님 나라도 소유할 수가 있는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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