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마5:1-12)
본문
사람의 사람됨은 그 소유에 의해서 평가 될 수 없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고 못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결코 천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의 지식에 의해서 평가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많이 안다고 그 사람이 높은 인격의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흔히 불학무식하다고 해도 그 사람은 사람대로 높은 격의 사람임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지위에 의해서도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을 사람으로 평가하게되는 평가 기준은 극단적으로 둘이 있다고 늘 생각됩니다. 하나는 그가 무엇을 즐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쁨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게첫째고둘째는 어떠한 성격의 고난을 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의해서 사람은 평가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욕구 충족에 불과하는 그런 생리학적 기쁨을 추구하는 그런 정도의 인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동물성을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물은 아닙니다. 동물적 욕구 충족 그것만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기울이는 그러한 인간을 흔히 저질 인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게 생리학적 인간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실현의 세계에서 기쁨을 얻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적 기쁨입니다. 공부하는 기쁨, 깨닫는 기쁨 그리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며 그 합리적인 진리 속에서 기쁨을 얻는 이러한 철학적 인간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신학적 기쁨을 즐기는 그러한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적어도 그의 생각과 뜻과 이상과 꿈은 항상 하나님의 세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 하나님의 뜻 그 나라와 그 의를 생각하며 그 속에 있는 나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를 기뻐하는 겁니다. 계속 하나님의 역사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나 된 것을 계속 깨달아 가면서 기뻐하는 이런 신학적 기쁨에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어차피 고난을 당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난은 필수입니다. 필연입니다. 문제는 그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흔히 페러독스, 역설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세요.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이건 역설적인 겁니다. 핍박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복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어째서 핍박 없는 세계가 복이 있는 것이지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얘깁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운명이요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핍박이라는 말은 원문대로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이것은 천재가 아닙니다. 인재(人災)를 말하는 겁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 그걸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진이 났다 전쟁이 났다 그거 핍박 아닙니다. 핍박은 어디까지나 인재요 또 하나는 자기 잘못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통을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잘못 없이 참으로 100%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 이것이 핍박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 핍박은 과거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점점 죄어드는 고통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겁니다. 심령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겁니다. 이러한 고통, 계속되는 고통, 이걸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복되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가 복되다. 왜요 여기서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한 번 분석하면은 베드로전서 2장 18절 이하에 분명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다. 그래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다우리라, 다른 말로 은혜롭다고 했습니다. 애매한 고난이 뭡니까 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는 부당한 고난입니다. 내 잘못도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당한 결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그러한 고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가령 옆집사람이 불조심하지 하지 않아서 내 집이 불타버리는 거예요. 그 애매한 거죠. 나는 잘못이 없는데 저 집에서 잘못하므로 내 집까지 타 버릴 때 이거 애매한 거 아닙니까 여러분 운전하시다가 가끔 애매한 일 당하죠. 나는 정당하게 운전했는데 이 정신 빠진 사람 때문에 내 차가 찌그러지잖아요. 아 이거 속상합니다. 더구나 새 차면 더 마음이 아픕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이거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뉘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물어 보겠습니까. 도대체 이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차 찌그러진 다음에 무슨 복을 줄렵니까 말 됩니까 이게 애매한 고난이라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면 은혜가 됩니다. 또 하나는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내가 잘못해서 내가 당하는 고난, 어쩌면 모든 고난이 대부분 이런 것이지요. 아니라고 변명하지만은 깊이 생각해 보면 원인은 내게 있었습니다. 내 잘못으로 내가 고난 당합니다. 내가 잘못해서 내가 병듭니다. 내가 잘못해서 사업이 잘못됐습니다.
원인은 분명 내게 있습니다. 자 이럴 때 이거야말로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깊이 생각할 문젭니다. 이런 따위의 고난이 있고 또 하나는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꼭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자원적이요 자발적이요 선택적이란 겁니다. 피해가다가 도망가다가 어떻게 하든간 면해보려고 요리저리 몸부림치다가 할 수 없이 당하는 거 그건 아니요. 약해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몰라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어서 당하는 게 아닙니다. 일부러 스스로 자취하는 그러한 고난의 성격을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 아무래도 이것을 위해서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뭐 모든 고난이 다 그러했습니다만은 결정적으로 십자가 사건 하나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건 뭐냐하면 십자가의 고난은 불가피 한 게 아니라는 거죠. 그것은 억지로 당한 게 아니라는 거죠. 얼마든지 아니 당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원해서 스스로 자취해서 당했다는 것을 성경은 강하게 강하게 거듭거듭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에 자기를 죽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 알고 계십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만 않았더라도 십자가를 면할 수 있구요, 또 하나,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했습니다. 늘 출입하는 성전 그 더러워진 거 늘 보았습니다만은 오늘 따라 와서 그것을 정면적으로 충돌하면서 성전을 깨끗이 합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어찌하여 강도의 굴을 만드느냐 이렇게 대결했는데요 이 사건만 없었더라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수 있을 겁니다. 또요, 빌라도 재판 앞에서 지금 재판을 받으시는데 보세요. 빌라도는 어쨌든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또 특별히 능력이 있고 인기도 높은 분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무죄 석방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모색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거짓말도 아니요 사실, 진실된 말 한 마디만 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를 안 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제사장과 바리새교인 저 사람들이 나를 질투해서 여기에 끌고 온 겁니다. 거 사실이 그래요. 이 한 마디만 하셨더라도 예수는 십자가를 안 지실 수 있었는데 침묵합니다. 입을 딱 다물고 그대로 십자가를 질 생각을 합니다. 빌라도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이 사람을 보라." 그 유명한 말 아닙니까 "Behold this man" 이 사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서른 세살에 왜 죽으려고 하느냐, 능력도 많고 인기도 많고, 아 이런데 서른세살 젊은이가 왜 억울하게 죽으려고 하느냐는 거죠.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남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 만이 아시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올시다. 바로 이런 고난이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고난 당한다 당하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성격이 문제요, 그 의미의 문제요,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시며 무슨 목적으로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느냐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복된 자가 될 수도 있고 저주받은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떤 복입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에게 왜 복이 있다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악으로부터 핍박당함으로써 내가 의롭다는 것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잘살면 그 사람 옳은 사람 아닙니다. 악인으로부터 칭찬 받으면 그 사람 결코 선한 사람 아닙니다. 이같이 불의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면서 손해 안 볼 수 없어요. 의롭게 살면서 핍박 없을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핍박은 당연한 것이에요. 어쩌면 핍박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내가 옳고 내가 바르게 살고 개가 진실함을 증명하게 되는 것에요. 악한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으려고 해선 안됩니다. 가끔 우리의 마음을 좀 섭섭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요새 이 현대에 와서 너무 여론에 치우쳐요. 여론이 어떻고 몇 %가 어떻고 몇 %가 어떻고… 언제부터 여론 듣고 합니까 지도자란 여론에 끌리는 것이 아니에요. 유명한 지도자 처칠이 말한 것이 있습니다. "백성으로부터의 칭찬은 2년 후에 받도록 하라" 지금 당장 백성들에게 "자 이럴까요 저럴까요" 물어가면서 할 것입니까 여러분 아시는대로 한때 군사 독재자라고 그렇게 성토를 하고 온 백성이 욕을 하더니 이제는 일등 대통령이라며 그 분이 잘한 것이지요.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오늘 와서 이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있잖아요. 지도자란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당석에서 지지받고 아우성 치고 만세 불렀다고 그런 소리나 듣기를 원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되요. 당연히. 어쩌면 핍박을 받아야 영웅이에요. 뿐만 아니라 유명한 문학가 유명한 예술가 유명한 철학가들 보세요. 당대에 지지받은 사람이 없어요. 제가 실례가 되서 어느 철학가라고 말은 안합니다만은 저 60년대의 그 철학가가 온 세상의 많은 학생들이 열심히 읽는 책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느 책을 보다보니까 그분이요, 당대에는요 미친놈이라는 말을 들었대요. 정신병자라는 말을 들었대요. 그런데 오늘은 그 책이 불후의 명작이 되더라구요. 이것이 당연한 것이에요. 당대의 여론에 끌려서 뭐 칭찬들으려고 눈치보는 이거는 아니에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다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내가 의로움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함인 줄을 알라"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욕을 당할 때 나보다 먼저 예수님이 욕당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그런고로 예수의 제자는 당연히 핍박을 받고 손해를 받아야 되요. 그런 거예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이걸 당연하게 받아 들여야 되요. 이상할 거 하나 없어요. 그래서 유명한 요절이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안에 경건하게 살고저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리스도 안에 경건하게 살자고 하면 핍박을 받아요. 가정에서도 핍박받아요 내외간에도 핍박을 받아요 친구에게도 핍박을 받아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바로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이요. 슬퍼할 것도 탄식할 것도 나약해 질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긍지가 있고 자랑이 있는 것이올시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핍박을 받으면서 우리는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악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거 이상한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 점점 더 의로워지고 의가 강해지는 겁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그래서 핍박받는 자에게는 유혹이 없습니다. 시험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순교사에 보면 어떤 사람이 순교하게 되는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그 재판관이 저놈을 화평에 처하라고 소리를 지르니깐요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재판장님 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 화형에 처하면 순교자가 된다고 좋아합니다아 그래, 그러면 매질을 좀 해라" 그러니까 "재판장님 저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매맞는다고 더 좋아합니다아 그럼 정배보내라정배보내면 조용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시간 얻었다고 더 좋아합니다그럼 어떻하면 좋으냐정말로 저 사람을 핍박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돈을 많이 주고 예쁜 여자들을 줘 가지고 타락시키시오. 저 사람들은 타락되는 거 외에는 무서워하는 게 없습니다" 그래요. 그리스도인들 초대교회에 더욱 그랬어요. 핍박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해지고 더 순수해졌어요. 그 당연한 것이에요. 강해집니다. 좀 미안한 말씀입니다만은 제가 중학교 다닐 때에 얘깁니다. 이 공산당들이 들어 와 가지고 저희 마을을 전부 이제 공산화 해 나갈려고 할 때에 이 중학생들 뭘 안다고 이걸 꼭 주일날만 되면 소집을 합니다.
그런데 갔다 온 아이들 얘기 들어보니까 마당 한번 쓴 것 밖에 없데요. 그냥 마당에서 놀다 왔대요. 그래도 저희 마을이 한 60%가 교인이거든요. 좌우간 5일장을 서도 주일날이면 장이 스질 않아요. 이 정도로 교인이 많으니까 이걸 교회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주일날은 학교 오라 이겁니다. 그래 부릅니다. 소집을 해요. 난 안 갔지요. 안 가고 나면 월요일날 가서 계속 벌섭니다. 때로는 매도 맞습니다. 욕도 당합니다. 또 어떤 때는 파출소 그 뭐예요 구치소에다가 집어넣기도 하고 뭐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매 월요일마다 그 고생을 합니다. 그 주일날은 하루종일 교회에서 놉니다. 자 그런데 내가 얼마간 나가면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이게 내가 신앙적으로 하는건가 재미로 하는 건가 그 말을 생각하니깐 그거 내 딴에는 거 어리지만은 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요만큼 핍박을 받는다 하는 게 말이에요 굉장히 신바람 나는 일이더라구요 이게. 그래서 아 이거 나는 주일날마다 이렇게 교회에 나오고 월요일날 가서 기합 받고 했더니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더라구요. 내가 꼭 그걸 신앙적인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들이 자꾸 핍박하니까 나는 점점 강해지는 거예요. 마지막엔 '죽일 테면 죽여라' 거기까지 나가는 거예요. 아 그래서 이게 참 묘한 거다 그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철없는 얘기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또한 가지는 핍박을 당하게 되면 내가 믿는 바가 확실해 집니다. 이것을 신학화라고 합니다. 복음을 변증하면서 내가 믿는바가 점점 더 분명해 집니다. 핍박이 없으면 믿기는 믿어도 내가 뭘 믿는지 안 믿는지 믿는지 희미합니다. 핍박 속에서 내 믿는 바가 확실해 지고 체계화되고요. 또 있습니다. 지혜가 생기지요. 더 큰 것은 핍박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듣습니다. 긴 기도가 필요 없어요. 하나님 아버지라고만 불러도 벌써 하나님의 응답이 가까이 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핍박 속에 있을 때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교회에서 찬송 한 절만 불러도 하나님이 가까이 가까이 말씀하시는 것을 체험 할 수가 있어요. 이게 핍박받는 자들의 복이요. 또 뿐만 아니라 성경도 핍박 중에 읽게 되면은 그 성경의 엄청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보세요 건강 할 때 읽는 성경과 병들었을 때에 읽는 성경이 달라요. 평안할 때에 읽는 성경과 핍박 중에서 환난 중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엄청난 것을 내게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그래 빌립보 감옥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됐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찬송을 부르며 이렇게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깊은 뜻을 거기서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된 것이에요. 자 이것이 핍박을 통한 핍박자의 복이요. 그 뿐만 아니라 핍박을 받을 때는 세계가 나 중심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빌립보 1장 12절에 보면 내게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되고 내가 여기 있음으로 해서 친위대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조용히 조용히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는 여기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게 핍박당하는 자의 복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를 통해서 나의 이 적은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엄청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가지 핍박당하는 자는 결과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업을 하나 공부를 하나 뭘 하나 이게 잘 되는 걸까 자 결혼을 해도 이게 잘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장차는 어떻게 되는 건까 우리 모든 행위에 대해서 다음 스테이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다음 후속 결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핍박당하는 바로 이 시간에는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죽습니다. 하나님 맘대로 하십시오. 나는 여기서 핍박을 당합니다.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내 마음은 완전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 행복은 누구도 모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는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고 마음은 깨끗합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은 천국이 저희 것이다. 물론 죽어 하나님 나라에 가지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고로 종말론적 종말적 축복이 있고 오늘도 순교자가 누리는 영광을 누립니다. 오늘 현재에도 기쁨과 자유로 충만합니다. 자기 양심이 자기를 칭찬하고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엄청난 행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 칼빈 선생은 세상 떠날 때 마지막으로 성경 요절을 외웠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컨대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요절을 열여섯번 외우다가 마지막 못 외우고 세상을 갔다고 합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 비교할 수 없도다. 떠나는 세상이 아쉬운 게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거기에 흡수되면서 만족한 기쁨으로 사선을 넘습니다. 이것이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의 복입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어떤 성격의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그에게만 주시는 엄청난 축복이 영광이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복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어째서 핍박 없는 세계가 복이 있는 것이지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얘깁니까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그리스도인의 운명이요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핍박이라는 말은 원문대로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이것은 천재가 아닙니다. 인재(人災)를 말하는 겁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 그걸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진이 났다 전쟁이 났다 그거 핍박 아닙니다. 핍박은 어디까지나 인재요 또 하나는 자기 잘못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통을 핍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잘못 없이 참으로 100%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 이것이 핍박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 핍박은 과거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점점 죄어드는 고통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겁니다. 심령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겁니다. 이러한 고통, 계속되는 고통, 이걸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복되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가 복되다. 왜요 여기서 한 번 분석해 봅시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한 번 분석하면은 베드로전서 2장 18절 이하에 분명하게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다. 그래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다우리라, 다른 말로 은혜롭다고 했습니다. 애매한 고난이 뭡니까 왜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는 부당한 고난입니다. 내 잘못도 없이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을 당한 결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그러한 고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가령 옆집사람이 불조심하지 하지 않아서 내 집이 불타버리는 거예요. 그 애매한 거죠. 나는 잘못이 없는데 저 집에서 잘못하므로 내 집까지 타 버릴 때 이거 애매한 거 아닙니까 여러분 운전하시다가 가끔 애매한 일 당하죠. 나는 정당하게 운전했는데 이 정신 빠진 사람 때문에 내 차가 찌그러지잖아요. 아 이거 속상합니다. 더구나 새 차면 더 마음이 아픕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이거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뉘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물어 보겠습니까. 도대체 이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 차 찌그러진 다음에 무슨 복을 줄렵니까 말 됩니까 이게 애매한 고난이라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래도 잘 참고 견디면 은혜가 됩니다. 또 하나는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 내가 잘못해서 내가 당하는 고난, 어쩌면 모든 고난이 대부분 이런 것이지요. 아니라고 변명하지만은 깊이 생각해 보면 원인은 내게 있었습니다. 내 잘못으로 내가 고난 당합니다. 내가 잘못해서 내가 병듭니다. 내가 잘못해서 사업이 잘못됐습니다.
원인은 분명 내게 있습니다. 자 이럴 때 이거야말로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깊이 생각할 문젭니다. 이런 따위의 고난이 있고 또 하나는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것은 꼭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자원적이요 자발적이요 선택적이란 겁니다. 피해가다가 도망가다가 어떻게 하든간 면해보려고 요리저리 몸부림치다가 할 수 없이 당하는 거 그건 아니요. 약해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몰라서 당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어서 당하는 게 아닙니다. 일부러 스스로 자취하는 그러한 고난의 성격을 말합니다.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 아무래도 이것을 위해서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뭐 모든 고난이 다 그러했습니다만은 결정적으로 십자가 사건 하나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건 뭐냐하면 십자가의 고난은 불가피 한 게 아니라는 거죠. 그것은 억지로 당한 게 아니라는 거죠. 얼마든지 아니 당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겁니다. 원해서 스스로 자취해서 당했다는 것을 성경은 강하게 강하게 거듭거듭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에 자기를 죽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 알고 계십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만 않았더라도 십자가를 면할 수 있구요, 또 하나,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했습니다. 늘 출입하는 성전 그 더러워진 거 늘 보았습니다만은 오늘 따라 와서 그것을 정면적으로 충돌하면서 성전을 깨끗이 합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어찌하여 강도의 굴을 만드느냐 이렇게 대결했는데요 이 사건만 없었더라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수 있을 겁니다. 또요, 빌라도 재판 앞에서 지금 재판을 받으시는데 보세요. 빌라도는 어쨌든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또 특별히 능력이 있고 인기도 높은 분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무죄 석방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모색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거짓말도 아니요 사실, 진실된 말 한 마디만 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를 안 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제사장과 바리새교인 저 사람들이 나를 질투해서 여기에 끌고 온 겁니다. 거 사실이 그래요. 이 한 마디만 하셨더라도 예수는 십자가를 안 지실 수 있었는데 침묵합니다. 입을 딱 다물고 그대로 십자가를 질 생각을 합니다. 빌라도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이 사람을 보라." 그 유명한 말 아닙니까 "Behold this man" 이 사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서른 세살에 왜 죽으려고 하느냐, 능력도 많고 인기도 많고, 아 이런데 서른세살 젊은이가 왜 억울하게 죽으려고 하느냐는 거죠.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남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 만이 아시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올시다. 바로 이런 고난이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고난 당한다 당하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성격이 문제요, 그 의미의 문제요,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시며 무슨 목적으로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느냐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거기에 따라서 복된 자가 될 수도 있고 저주받은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고난 없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떤 복입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에게 왜 복이 있다는 겁니까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악으로부터 핍박당함으로써 내가 의롭다는 것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에 살면서 잘살면 그 사람 옳은 사람 아닙니다. 악인으로부터 칭찬 받으면 그 사람 결코 선한 사람 아닙니다. 이같이 불의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면서 손해 안 볼 수 없어요. 의롭게 살면서 핍박 없을 수가 없어요. 그런고로 핍박은 당연한 것이에요. 어쩌면 핍박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내가 옳고 내가 바르게 살고 개가 진실함을 증명하게 되는 것에요. 악한 세상으로부터 칭찬 받으려고 해선 안됩니다. 가끔 우리의 마음을 좀 섭섭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요새 이 현대에 와서 너무 여론에 치우쳐요. 여론이 어떻고 몇 %가 어떻고 몇 %가 어떻고… 언제부터 여론 듣고 합니까 지도자란 여론에 끌리는 것이 아니에요. 유명한 지도자 처칠이 말한 것이 있습니다. "백성으로부터의 칭찬은 2년 후에 받도록 하라" 지금 당장 백성들에게 "자 이럴까요 저럴까요" 물어가면서 할 것입니까 여러분 아시는대로 한때 군사 독재자라고 그렇게 성토를 하고 온 백성이 욕을 하더니 이제는 일등 대통령이라며 그 분이 잘한 것이지요.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오늘 와서 이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고 있잖아요. 지도자란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당석에서 지지받고 아우성 치고 만세 불렀다고 그런 소리나 듣기를 원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되요. 당연히. 어쩌면 핍박을 받아야 영웅이에요. 뿐만 아니라 유명한 문학가 유명한 예술가 유명한 철학가들 보세요. 당대에 지지받은 사람이 없어요. 제가 실례가 되서 어느 철학가라고 말은 안합니다만은 저 60년대의 그 철학가가 온 세상의 많은 학생들이 열심히 읽는 책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느 책을 보다보니까 그분이요, 당대에는요 미친놈이라는 말을 들었대요. 정신병자라는 말을 들었대요. 그런데 오늘은 그 책이 불후의 명작이 되더라구요. 이것이 당연한 것이에요. 당대의 여론에 끌려서 뭐 칭찬들으려고 눈치보는 이거는 아니에요.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다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내가 의로움을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8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함인 줄을 알라"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욕을 당할 때 나보다 먼저 예수님이 욕당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그런고로 예수의 제자는 당연히 핍박을 받고 손해를 받아야 되요. 그런 거예요. 그게 당연한 거예요. 이걸 당연하게 받아 들여야 되요. 이상할 거 하나 없어요. 그래서 유명한 요절이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안에 경건하게 살고저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리스도 안에 경건하게 살자고 하면 핍박을 받아요. 가정에서도 핍박받아요 내외간에도 핍박을 받아요 친구에게도 핍박을 받아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바로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이요. 슬퍼할 것도 탄식할 것도 나약해 질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긍지가 있고 자랑이 있는 것이올시다. 또한 중요한 것은 핍박을 받으면서 우리는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악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거 이상한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면 점점 더 의로워지고 의가 강해지는 겁니다. 그걸 알아야 되요. 그래서 핍박받는 자에게는 유혹이 없습니다. 시험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 순교사에 보면 어떤 사람이 순교하게 되는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을 죽이게 되는데 그 재판관이 저놈을 화평에 처하라고 소리를 지르니깐요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재판장님 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 화형에 처하면 순교자가 된다고 좋아합니다아 그래, 그러면 매질을 좀 해라" 그러니까 "재판장님 저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매맞는다고 더 좋아합니다아 그럼 정배보내라정배보내면 조용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시간 얻었다고 더 좋아합니다그럼 어떻하면 좋으냐정말로 저 사람을 핍박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돈을 많이 주고 예쁜 여자들을 줘 가지고 타락시키시오. 저 사람들은 타락되는 거 외에는 무서워하는 게 없습니다" 그래요. 그리스도인들 초대교회에 더욱 그랬어요. 핍박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해지고 더 순수해졌어요. 그 당연한 것이에요. 강해집니다. 좀 미안한 말씀입니다만은 제가 중학교 다닐 때에 얘깁니다. 이 공산당들이 들어 와 가지고 저희 마을을 전부 이제 공산화 해 나갈려고 할 때에 이 중학생들 뭘 안다고 이걸 꼭 주일날만 되면 소집을 합니다.
그런데 갔다 온 아이들 얘기 들어보니까 마당 한번 쓴 것 밖에 없데요. 그냥 마당에서 놀다 왔대요. 그래도 저희 마을이 한 60%가 교인이거든요. 좌우간 5일장을 서도 주일날이면 장이 스질 않아요. 이 정도로 교인이 많으니까 이걸 교회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주일날은 학교 오라 이겁니다. 그래 부릅니다. 소집을 해요. 난 안 갔지요. 안 가고 나면 월요일날 가서 계속 벌섭니다. 때로는 매도 맞습니다. 욕도 당합니다. 또 어떤 때는 파출소 그 뭐예요 구치소에다가 집어넣기도 하고 뭐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매 월요일마다 그 고생을 합니다. 그 주일날은 하루종일 교회에서 놉니다. 자 그런데 내가 얼마간 나가면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이게 내가 신앙적으로 하는건가 재미로 하는 건가 그 말을 생각하니깐 그거 내 딴에는 거 어리지만은 이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요만큼 핍박을 받는다 하는 게 말이에요 굉장히 신바람 나는 일이더라구요 이게. 그래서 아 이거 나는 주일날마다 이렇게 교회에 나오고 월요일날 가서 기합 받고 했더니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더라구요. 내가 꼭 그걸 신앙적인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저들이 자꾸 핍박하니까 나는 점점 강해지는 거예요. 마지막엔 '죽일 테면 죽여라' 거기까지 나가는 거예요. 아 그래서 이게 참 묘한 거다 그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철없는 얘기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또한 가지는 핍박을 당하게 되면 내가 믿는 바가 확실해 집니다. 이것을 신학화라고 합니다. 복음을 변증하면서 내가 믿는바가 점점 더 분명해 집니다. 핍박이 없으면 믿기는 믿어도 내가 뭘 믿는지 안 믿는지 믿는지 희미합니다. 핍박 속에서 내 믿는 바가 확실해 지고 체계화되고요. 또 있습니다. 지혜가 생기지요. 더 큰 것은 핍박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듣습니다. 긴 기도가 필요 없어요. 하나님 아버지라고만 불러도 벌써 하나님의 응답이 가까이 옵니다. 저는 기억합니다. 핍박 속에 있을 때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교회에서 찬송 한 절만 불러도 하나님이 가까이 가까이 말씀하시는 것을 체험 할 수가 있어요. 이게 핍박받는 자들의 복이요. 또 뿐만 아니라 성경도 핍박 중에 읽게 되면은 그 성경의 엄청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보세요 건강 할 때 읽는 성경과 병들었을 때에 읽는 성경이 달라요. 평안할 때에 읽는 성경과 핍박 중에서 환난 중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엄청난 것을 내게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그래 빌립보 감옥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됐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찬송을 부르며 이렇게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깊은 뜻을 거기서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된 것이에요. 자 이것이 핍박을 통한 핍박자의 복이요. 그 뿐만 아니라 핍박을 받을 때는 세계가 나 중심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빌립보 1장 12절에 보면 내게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되고 내가 여기 있음으로 해서 친위대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조용히 조용히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는 여기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게 핍박당하는 자의 복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를 통해서 나의 이 적은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엄청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가지 핍박당하는 자는 결과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업을 하나 공부를 하나 뭘 하나 이게 잘 되는 걸까 자 결혼을 해도 이게 잘하는 걸까 못하는 걸까 장차는 어떻게 되는 건까 우리 모든 행위에 대해서 다음 스테이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다음 후속 결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핍박당하는 바로 이 시간에는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죽습니다. 하나님 맘대로 하십시오. 나는 여기서 핍박을 당합니다. 다음 일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내 마음은 완전히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 행복은 누구도 모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는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다 맡기고 마음은 깨끗합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은 천국이 저희 것이다. 물론 죽어 하나님 나라에 가지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고로 종말론적 종말적 축복이 있고 오늘도 순교자가 누리는 영광을 누립니다. 오늘 현재에도 기쁨과 자유로 충만합니다. 자기 양심이 자기를 칭찬하고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엄청난 행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 칼빈 선생은 세상 떠날 때 마지막으로 성경 요절을 외웠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 "생각컨대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요절을 열여섯번 외우다가 마지막 못 외우고 세상을 갔다고 합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 비교할 수 없도다. 떠나는 세상이 아쉬운 게 아니라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거기에 흡수되면서 만족한 기쁨으로 사선을 넘습니다. 이것이 의를 위하여 핍박당하는 자의 복입니다. 여러분 내가 지금 어떤 성격의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그에게만 주시는 엄청난 축복이 영광이 항상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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