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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시작 (마2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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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어떤 날 아침 일찍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초등학교 정도 되는 두 형제가 장난하면서 따라오고 또 그리고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대통령은 주머니에서 호두 다섯 개를 꺼내서 그 동생에게 주면서 형과 나누어 먹어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이 내가 받은 거니까 나는 세 개를 갖고 두 개는 형이 갖으라고 그랬는데 형은 말하기를 내가 형이니까 셋을 갖고 네가 둘을 가져야 옳지 않느냐 이래 가지고 아웅다웅 싸우는 겁니다. 이걸 보고 대통령은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뒤따라가던 비서실장이 물었습니다. "애들이 왜 싸우는 겁니까"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개 문제로 싸웁니다.아니 애들이 무슨 세계 문제라니요" 이 세계가 별 문제가 아니라고 그저 다 고루고루 똑같이 나누어 가지면 좋을 텐데 어떤 이유로든지 나는 더 가져야 된다 너는 덜 가져라, 안 된다 뭐 서로 이래가지고 싸우는 거 아니냐고 세 개 문제가 애들 싸움에 다 있는 거라고 이렇게 해박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난 삼천년 동안에 역사가의 조사한 대로는 삼천 삼백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는 싸움의 역사로 점철되고 있습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계속적인 싸움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패자만 있을 뿐이지 승자는 없습니다. 미국과 구 소련이 만들어 놓은 소위 핵무기라고 하는 핵탄을 합해보면 지구를 마흔 한 번 날려 버릴 수 있는 양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에 두 나라가 싸우던가 해서 이게 터지는 날이면은 그냥 지구라고 하는 흙덩어리는 그대로 공중분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사는 겁니다. 이것이 하루하루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에게는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일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이제는 온 세계에 영원한 평화가 오는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 2차 대전이 터집니다.
여기에 2차 대전에 가담했던 분이 많이 있습니다만은 2차 대전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들끓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는 때에 이제야 말로 세계에 평화가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한 달 동안 일도 하지 않고 온 동네 온 시민이 축제로만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도, 잠깐 바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로 인해서 이 냉전 시대가 오는데 더 무서운 전쟁을 계속 치르며 세계, 전 세계가 적화되지 않는가 하는 그런 위험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구 소련 공산주의 종주국 무너질 때,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순간에 자 이제야 말로 평화가 온다. 이제는 더 이상 싸움이 없을 것이 아닌가 했는데 왠걸요 더 싸움이 많습니다. 민족간에 종교간에 집단간에 그 많은 싸움이 오늘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언제나 평화가 있겠습니까 전쟁이 끝난 다음에 오는 평화를 기다린다면 전쟁이 끝나지 않으니 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랬습니다. 역사의 끝이 가까울수록 점점 더 무서운 전쟁이 있을 거라고 주님은 예고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평화주의적 그러한 평화에 대한 기대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이고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래서 어떻게 전쟁을 대처해야 하나, 전쟁을 이해해야 하나 하는 문제는 우리의 큰 수수께끼가 되고 있습니다. 예일대학 교수 롤란드 에이취 베이튼(Roland H. Bation) 이라고 하는 교수님께서 "Christian Attitude toward War and Peace"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전쟁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왔는가하는 것을 잘 정리해준 그런 책입니다.
첫째가 평화주의입니다. 'Pacifism' 이라고 해서 무조건 전쟁은 안 된다. 전쟁 반대주의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 된다. 청교도나 재세례파가 이런 유에 속합니다. 그런가하면 'Just War'라고요 의로운 전쟁을 생각합니다. 악을 저거하기 위해서 의로운 전쟁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루터교나 혹은 국교를 믿는 그런 나라들의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십자군 이념이올시다. 'Crusade', 십자군이념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명하는 대로 거룩한 전쟁이 필요하다. 전쟁을 교회가 정당화하는 하나님을 의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평화를 정착케하기 위해서 거룩한 전쟁은 있어야 한다 라고 전쟁 지지론을 펴는 그러한 기독교적 이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전쟁에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는, 거룩한 전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개혁 교회적의 견해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말로 얘기해 봐도 중요한 것은 그 전쟁으로 해서 평화가 왔느냐 하는 겁니다. 십자군 전쟁이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 많은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을 해 봤지만은 평화는 없었습니다. 역시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은 악일 뿐입니다. 선으로 악을 갚을 때만이 선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지요. 악한 방법으로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평화는 이 땅에 있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전쟁의 원인과 동기의 문제입니다.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이기주의입니다.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이기주의올시다. 다 함께 살자는 생각이 아닙니다. 나는 특별하다, 나 중심적 이기주의가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하나는 지나친 욕심입니다. 그렇게 많이 가질 필요가 없는데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의 Heroism 입니다. 영웅주의요 특권주의가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하나는 증오입니다. 미움과 증오가 증폭될 때 전쟁을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깃들 때까지는 전쟁은 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큰 전쟁을 일으키고 있을 때 타임즈에 크게 커버에 실린 그런 내용을 제가 본 것을 잊지 못합니다. 아랍에 어느 어머니의 세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습니다. 세 아들의 시체가 함께 돌아왔습니다. 이 장례를 치를 때에 기자가 물어봅니다. "얼마나 망극합니까, 얼마나 슬픕니까" 그 어머니는 눈물을 딱 거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열 네 살 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얘가 빨리 커야 전쟁에 나가겠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내 세 아들이 죽었으니까 다시 이 아들을 키워서 복수하겠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복수심에 불타있는 동안 형식적인 전쟁이야 있건 없건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의 신학적 의미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경륜적 사역을 불신하는 겁니다. 못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고로 인간적 방법을 씁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기 때문에 내가 손을 대야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른척하고 외면하기 때문에 내가 심판을 내야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결단을 내야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불신앙이 세계에 전쟁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이올시다. 하나님의 방법 그 방법만이 평화이건만 사람의 방법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키며 이 세계를 어지럽혀 왔던 것이올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세상 끝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다른 말로 말하면 장차 어떤 일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높은 차원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난리의 소문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여러분 직접적으로는 우리 나라에는 50년 전에 전쟁이 있었으나,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에도 온 세계에, 잘 아시지 않습니까. 월남이다 코스보다 어디다 계속 전쟁, 걸프전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폭탄을 퍼부었습니까 난리의 소문을 듣습니다. 이게 남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눈앞에 적이 있습니다. 언제 어떤 일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대로 터져 나건데, 자 보세요. 이 위험한 가운데 난리의 소문, 위기. 절박한 소문의 위기를 너희가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왜요 있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것이 있을 뿐이다. 당연히 있을 일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전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에 지는 곳에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나 하나님은 이 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죄인과 의인을 나누어 놓으시고, 의와 불의를 갈라놓으시고, 선과 악을 분별하시고, 특별히 하나님이 심판하시고자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동시에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십니다. 놀라운 신비적인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쟁이 나고, 지진이 나고, 재난이 나고, 많은 일이 있겠으나, 그러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니라." 재난의 시작이라고 주님 재림하기 직전에 가서는 엄청난 일들이 있을 거라고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극한 상황인 전쟁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크거나 작거나 싸움은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싸움, 많은 싸움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지적한대로 보면 미혹케하는 자가 많겠다. 이것은 영적 싸움이 있겠고 서로 미워하겠다. 도덕적 싸움이 있겠고 사랑이 식어지리라. 종교적인 싸움들이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다. 전쟁 속에서 온유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전쟁 없는 평화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 평화는 전쟁 속에 있습니다. 놀랍게도 전쟁 속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소설가나 작가들이 대개 보면 전쟁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거기서 인도주의를 말하고 거기서 인간을 말하고 인간의 본성을 말하고 인간의 구원을 말합니다. 여러분, "전쟁과 평화"라고 하는 책을 보셨겠지요 저는 어렸을 때 전쟁과 평화, "아! 여기는 무슨 진짜 평화가 있는가 보다."하고 열심히 읽었더니 아무리 뒤져봐도 평화는 없어요. 그는 말합니다. 전쟁 속에 평화가 있다고, 이십오시를 보던지 모든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이런 유명한 소설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전쟁이 끝나고 전쟁 없는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전쟁 속에서 신비로운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전쟁을 통해서 이기심이 무너집니다. 나만이 생각하던 생각, 무너집니다. 전쟁을 통해서 인간성이 살아나고요 인도주의가 살아납니다. 비로소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참 사랑이 거기서 나타납니다. 표출됩니다. 신비롭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돌아오는 귀중한 역사도 이루어집니다. 요한 웨슬레의 가정은 식구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요한 웨슬레가 어렸을 때 집에 불이 났습니다. 이층집이 벌겋게 타오릅니다. 아이들이 많은 집이라서 전부 점검해 보았더니 일곱형제가 다 무사합니다.
그런데 존 요한 웨슬레 하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몸이 달았습니다. 애가 어디 있나 하고 온통 뒤져보는데 벌써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불이 나버렸어요. 올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2층 저 구석에서 애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창문으로 내다봅니다. 이제 어떡하면 좋겠어요. 올라 갈 길이 없어요. 사다리를 구해야겠는데 사다리를 어디서 구해 가져 올 시간도 없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와서 애를 쓰고 하다 결국은 동네 사람들이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서 사람 위에 사람, 사람 위에 사람 어깨 위에 또 어깨 올라가서 마침내 이 아이를 건져내게 됩니다. 어렸을 때지만은 요한 웨슬레는 많이 생각했습니다. 이웃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 몰랐습니다. 어려운 극한적인 상황을 통해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평범할 때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세상이 망했는지 썩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 전쟁상황 속에서 보면은 인간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은 고귀합니다. 아름답고 귀한 일들이 거기서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다시 우리는 오늘 성경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예수님은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고 식어지고 어려운 일 있겠다 그러나 이런 일이 다 있은 다음에, 그러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 전쟁 때문에 끝이 오는 게 아니에요. 천지 개벽 때문에 끝이 오는 게 아니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고 그리고 끝이 옵니다. 복음적, 선교 중심적 역사의식, 종말론을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전쟁을 어떻게 이해하든 신비롭게도 전쟁을 통해서,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는 확실해 집니다.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하나를 구원하십니다. 사람 되게 만듭니다. 깨닫게 만듭니다. 끊어야 될 것 못 끊는 것 끊게 만듭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하나 알아요. 위장병에다가 신경통까지 있어서 지팡이 짚고 절룩절룩 하면서 아무 일도 못했어요. 그러던 사람인데요 전쟁이 꽝하고 터지니까요 피난민 대열에 끼여서 나오는데 지팡이도 없고요 소화 불량도 없고요 깨끗해졌더라고요. 언제 이 사람이 아팠더냐 싶더라고요. 그 몇 년 고생했어요 신통하게 나았더만요. 여러분 이게 다 뭔가 나사가 풀려 가지고 멍청해 가지고 이러는 모양이지. 정신을 차리게! 어떤 때, 전쟁 상황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하나 하나를 깨닫게 하고 훈련하고 건강하게 하고 신령한 사람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복음이 땅 끝까지, 땅 끝가지 전해질 것이라 그리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상하게도 우리가 생각하는 안정과 평화는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세속적인 인간으로 만듭니다. 더러운 인간으로 만듭니다. 구제 받을 수 없는 세상으로 만듭니다. 어쩌면 자랑과 전쟁을 통해서 신비로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 선교적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인간 우상을 만들어 놓았던 인간들을 이제 모든 과학적 우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1차 대전, 2차 대전 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이성을 끝까지 자랑했는데 인간의 이성이란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역사가는 말합니다. 참 사랑, 겸손한 사랑,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역사가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 계시는데 아주 신앙생활 잘 해요. 봉사도 열심히 해요 그만하면 괜찮으나 본인은 늘 가책을 느껴요.
왜냐하면요 625 전쟁 때, 그가 포복을 하는데 뒤에서 총알이 비오듯하는데요 옷이 찢어질 정도로 총알을 맞았는데 자기 몸은 무사했어요. 그 자리에 엎드려 가지고 "하나님 이제 살려 주었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겠다"고 맹세, 맹세했대요. 가끔 그 장면이 꿈에 보이는데 그런 생각이던데요. 내가 지금 어디 있냐 너 지금 무엇하고 있냐 그렇게 느낀다고 합니다. 그 전쟁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하나님과 만났던 그 아름다운 인간은 어디 가고 이 모양, 이 시원치 않은 인간만 허접이 같은 것 걸어다니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깨달아야겠습니다. 전쟁 소식을 들으며 깨달아야겠습니다. 여러분 북한은 전쟁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저는 여러 번 들었습니다. "우리는 완료했습니다. 장군님 명령 한 마디만 떨어지면은 우리는 꽝 합니다." 그러더라고요. 이렇게 호언장담하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어디론가 인도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이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깊이 깨닫고, 믿고, 듣고, 겸손히 받아들이고 두려움 없이 주님 인도하시는 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Be stilll know that I am God",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 되시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안타깝게 우리를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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