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한 증인, 스데반 (행7:54-60)
본문
사람은 그가 현재에 얼마를 가졌는지, 또 얼마나 알고 있는지, 혹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어떤 직분을 맡았는지 뭐 이런 것에 의해서 평가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소원, 그것이 문제입니다. 비록 이루지 못한 소원이라도 간절한 소원, 그리고 그가 가진 행복관 이것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닙니다. 미래를 향한 그의 간절한 소원, 그것이 뭐냐에 따라서 평가됩니다. 쾌감과 행복은 같은 게 아닙니다. 쾌감이란 오감을 만족케하는 충족에서 오는 것이고 행복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 관계에서 오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은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먹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다 그러합니다. 먹어야 사니까. 특별히 이 강아지를 키워보면 강아지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아직 눈도 뜨기 전에 냄새를 맡고 어머니의 젖을 가서 물고 빠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갖다 대고 못 빠는데 이것들은 눈도 안 뜨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가서 젖은 빱니다. 거기에 생명력이 있고 생명적 본능이 거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먹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무엇을 먹느냐 어떻게 먹느냐 그것이 문젭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만나보면 특별히 연세가 높은 분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 치아가 다 빠져서 틀니를 하고 보니까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맛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틀니를 가지고 먹으니까 영 음식 맛이 없다. 그러니깐 사는 재미가 없다. 그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야 말로 구제할 길이 없는 겁니다. 어쨌든 먹는다는 게 중요하고 먹는 재미가 중요합니다. 어떤 때는 이것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그 수준의 사람이니까요. 또 하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 성취감이올시다. 그래서 무엇을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 그런 말하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다. 그래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 묻고 싶어요. 그것이 바로 당신의 가치와 수준을 결정하니까요. 또 하나는 만나고 싶은 거예요. 만나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고 그런 마음이요. 누구를 만나고 싶어하느냐, 누구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냐, 이런 것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또는 가지고 싶은게 많아요.
소유욕! 이것을 위하여 몸부림을 치며 사는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가지고 싶어하는가, 또 어떻게 가지고 싶으냐 뭐 이런 문제가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올시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서 내 진실이 인정받고 내 충성이 인정받고 나 사람됨이, 또는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혹은 존경을 받으면서 인정받고 싶 그런 것, 이 욕망에 끌려 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가장 위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있습니까 여기에 나의 나됨이 있는 겁니다. 난 한 평생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델을 찾습니다. 표본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을 부러워하고 살았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적인 인물이든 주변의 사람이든 간에 '나는 아무도 존경할 수 없다. 아무도 믿을 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제불능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올시다. 내가 존경하고 모방하고 싶고, 흠모하고, 사모하고,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저 사람처럼 됐으면 좋겠다'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우러러 보며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능하면 그의 주변에서 그와 함께 하며 살 수 있다면 더더욱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점점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 몹시도 부럽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의 그 모든 것을 보면서 가까이 살았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굽니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성서적으로 볼 때 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좋은 점 또 실수한 점도 많이 있어요. 나름대로 모두 특징이 있습니다만은 제가 개인적으로는 스데반을 제일 높이 존경하고 모델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에 보면 '천사의 얼굴 같더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천사를 본 일은 없지만은 그 말의 뜻은 알 것 같습니다. 천사의 얼굴! 천사의 마음이 있었기에 천사의 얼굴로 비춰집니다. 얼마나 훌륭한 인격입니까.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혹은 속성에 의해서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딜 가든지 증인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교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부활 생명의 증인이요 부활 신앙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순교로 그 신앙을 증거하게 됩니다. 어디 가나 우리는 증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간혹 이렇게 여행을 할 때, 저는 부득이 정장을 하고 나섭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에 맞이하는 분들 가운데는 그래요. 아 이거 열세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깐 좀 비행기 안에서 캐쥬얼하게 입고 그렇게 입고 내려올 줄로 알았대요.
그런데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하고 나서니까 "아 불편한데 어떻게 그렇게 하고 오십니까" 그렇게 인사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래 제가 대답을 합니다. "어디 가나 소망 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망 교인 앞에 바르게,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나려고 합니다. 불편하지만 잠을 자도 넥타이를 매고 자야됩니다." 왜요 그게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자나, 깨나, 먹으나, 가나, 오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스데반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하여,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이예요. 그래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한번 보십시다. 먼저는 그가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를 갊니다. 당장 돌을 들어 치려고 하는 그 무서운 사람들 앞에서도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요 앞으로 가야 할 곳이니까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올시다. 우러러 볼 때에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좀 어려울 때 사람을 봅니다. 세상을 봅니다. 물질을 봅니다. 그리고 낙심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보며 나도 미워하고 그러다가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것이 필요합니다. 자 이제 보세요. 이렇게 우러러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스데반을 본 사도바울이 먼 훗날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골로새 3장 1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을, 보는 것을 본 그 증거를 본 사도바울이 뒤에 그것을 그대로 바울이 메시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를 보라!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를 생각하라 위를 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위를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오늘 본문에 보니 "인자가"라고 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지칭하는 칭호가 '인자'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해서 예수님을 향하여 부른 호칭이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올시다. 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신학적인 긴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말은 가장 높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역사 끝에 하나님 친히 계시자로 임하는 바로 그 분에 대한 칭호가 인자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재판 받으실 때에도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고 명백하게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백 번 이상이나 인자, 인자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을 통하여 "당신은 인자입니다. 인자여"라고 부른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직 스데반이 딱 한 번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내가 바라본다"고 인자라는 말이 제자의 입을 통해서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놀라운 얘깁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실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모세의 이야기를 좀 하면은 그가 여러 번 실수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위를 보지 못하고 백성을 보았기 때문이요. 백성들이 원망할 때 원망하는 백성을 보다 보니까 원망하는 백성을 원망하며 망령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때도 위를 보았더라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텐데 위를 보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땅을 보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세상을 보았어요. 그만 실수하게 됩니다. 여러분, 단 순간도 위를 보는 그 마음과 시선을 하늘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에서 잠깐도 흐트러져서는 안됩니다. 또한가지는 이 스데반은 가장 큰 위대한 장점은 용서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자기를 죽이겠다고 지금 소리를 지르는 이 사람들이 바로 옛 친구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베드로가 죽지 않고 스데반이 죽습니까 그는 지성인이요, 학자이기 때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하나가 예수를 믿게될 때에 많은 유대사람들과 유대교회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이 사람을 죽이려 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모여서 스데반을 죽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바로 그 사람들이, 바로 엊그제까지 자기의 친구입니다. 동료들입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만 그는 저들을 용서했습니다. 저들은 저를 향하여 이를 갈고 미워했지만 저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처럼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제자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언젠가라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사랑의 극치가 아닙니다. 이건 기본적인 것이올시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도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했어요. 원수 사랑이요. 그리스도인이 베풀어야 할 사랑의 기본적인 사랑도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적어도 아무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합니다. 깨끗이 용서해야합니다. 특별히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 의인을 죽이는 죄,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이 무서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모르기 때문이요. 저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돌리라는 겁니까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좀더 기회를 가지고 좀더 온유하게 잘 설득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격한 행동이 폭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들이 발악하며 돌을 던지는 것에 상당부분의 잘못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여러분 어떤 허물, 어떤 잘못도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게 돌렸어요. 그 잘못이 내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자유인이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또 좀더 나아가서는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생을 위탁했습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내 생명을 받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여러분 제가 63년에 처음으로 미국 유학을 갔을 때,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자가용 문화가 없을 때입니다. 가서 목사님의 차를 탔는데, 이거 자기가 허리띠를 매면서 벨트를 날보고 매라고 하더라고요. 이거 생전 처음 매니까 이상하더라고요 이거 비틀어 매는 게. 그리고 이 분은 운전대 앞에서 벨트를 딱 맨 다음에는 잠깐 기도해요. 그래서 나도 따라서 기도하다가 언제 한 번 물었습니다. 워 샤인이라고 하는 목사님인데 묻기를 "나는 식사기도도 배웠고 잠자리 기도도 배웠습니다마는 벨트 매는 기도를 못 배웠는데 이 벨트 매고는 뭐라고 기도하는 거요." 거 좀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했더니,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지.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지. 가다가 언제사고 날지 모르니까, 꽝하면 안되니까 미리 기도하고 떠나는 거지." 그저 우리 생각 같아서는 무사히 가게 해주시고, 잘 가게 해주시고, 돌아오게 해주시고……. 자기 마음대로 그건 아니요. 설사 어느 시간에 '꽝' 하더라도 "하나님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도 사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녁기도가 뭔지 아십니까 우리는 잠자리 기도할 때도 "잠 잘 자게 해주시고……." 우리 집 아이들도 기도하는 걸 보면 "무서운 꿈꾸지 않게 해주시고, 건강하게 내일 아침 일어나서 또 활동하게……." 거 얘기가 많습니다. 장황한데.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같이 자보니까 코고는데 심하게 골 때는 꼭 죽는 것 같더라고요. 드렁드렁하다가 또 잠깐 멈추었다가, 아이구 죽었는가 하면, 또 살아나고 하더라구요. 아 그 힘들대요. 그 코고는 사람들이요. 그런데 이 언제 죽을는지 알아요 뚝하면 가는 거예요. 뭘 그 일어나서……. 언제 제대로 살았다고 그런 기도합니까 그저 잠자리 기도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아버지여, 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자다가 가더라도 아버지께 가게 해주세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드린 그 기도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평상시에 드리는 잠자리 기도입니다. 그게. 이렇게 기도하다가 마지막 떠나는 날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기도하며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걸 알아야돼요. 모든 생명, 모든 운명, 모든 되어지는 일을 Totally Commit, Commitment 하나님께 완전히 위탁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스데반은 죽어갑니다마는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어요. 왜 그 마음이 천사니까. 이렇게 죽어감으로 해서 스데반은 죽어서 큰 영광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이것을 지켜본 사도 바울은 이제다시 그의 뒤를 따라 한 평생 수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상한 것은 제가 신학대학에서 바울 신학을 강의 해보았지만, 여러 해 강의하면서 자세히 연구해보니까요 사도 바울의 신학이라는 것은 스데반이 마지막 죽기 전에 설교한 그 내용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Christianized the Old Testament, 구약성경을 신약화하고, 구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증거하고, 교회를 증거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놀라운 신학적 기초가 됩니다. 그러고 보면 바울은 스데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한 평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 만나고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행복했던 것은 그가 참 그리스도인을 먼저, 증인된 그리스도인을 먼저 만났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후계자를 남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5월 31일자 타임지에서 "A Surge of Teen Spirit" 라고 하는 제목 하에 중요한 기사가 났었습니다. '10대의 심령 부흥'이라는 제목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4월 20일날 있었던 콜로라도의 덴버라고 하는 곳에서 거기 고등학교에서 젊은 청년들이 총으로 난사해서 많은 사람, 수십 명이 죽은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죽은 사람 가운데 하나. 여학생이, 캐시버넬(Cassie Bernall)이라는 학생이 죽기 전에 총을 들이대고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에 애가 총구 앞에서 "There is a God, and you need to follow along God's path.나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너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총을 쏩니다. 이 여학생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지켜본 많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 캐시를 '적은 순교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깃대 앞에 보였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영적 운동이 온 전국에 퍼져서 10대의 젊은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말합니다. "Cassie was born for this.내 딸 캐시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놀라운 얘기가 아닙니까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라고 하는 분이 교수형을 당하게 될 때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옆에 바울이 서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고 죽었고 바울은 뒤에 회개하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바울과 스데반이 만나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죽지만은 당신이 언젠가 회개하고 하늘나라에서 형제와 같이 반갑게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러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얘기입니까 여러분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죽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승리란 자기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원수를 이길 때, 거기에 참 승리가 있는 겁니다. 승리와 성공과 참 행복의 원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순교적 증인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때 그 앞에 영광이 있을 것이고 사나 죽으나 그는 승리자로 가장 위대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소유욕! 이것을 위하여 몸부림을 치며 사는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가지고 싶어하는가, 또 어떻게 가지고 싶으냐 뭐 이런 문제가 사람됨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올시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서 내 진실이 인정받고 내 충성이 인정받고 나 사람됨이, 또는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혹은 존경을 받으면서 인정받고 싶 그런 것, 이 욕망에 끌려 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가장 위에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되고 싶은 욕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있습니까 여기에 나의 나됨이 있는 겁니다. 난 한 평생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모델을 찾습니다. 표본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을 부러워하고 살았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적인 인물이든 주변의 사람이든 간에 '나는 아무도 존경할 수 없다. 아무도 믿을 수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구제불능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올시다. 내가 존경하고 모방하고 싶고, 흠모하고, 사모하고,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저 사람처럼 됐으면 좋겠다'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우러러 보며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능하면 그의 주변에서 그와 함께 하며 살 수 있다면 더더욱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점점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주변에 있던 제자들이 몹시도 부럽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의 그 모든 것을 보면서 가까이 살았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굽니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성서적으로 볼 때 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좋은 점 또 실수한 점도 많이 있어요. 나름대로 모두 특징이 있습니다만은 제가 개인적으로는 스데반을 제일 높이 존경하고 모델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에 보면 '천사의 얼굴 같더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천사를 본 일은 없지만은 그 말의 뜻은 알 것 같습니다. 천사의 얼굴! 천사의 마음이 있었기에 천사의 얼굴로 비춰집니다. 얼마나 훌륭한 인격입니까.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혹은 속성에 의해서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딜 가든지 증인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교리를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부활 생명의 증인이요 부활 신앙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순교로 그 신앙을 증거하게 됩니다. 어디 가나 우리는 증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간혹 이렇게 여행을 할 때, 저는 부득이 정장을 하고 나섭니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에 맞이하는 분들 가운데는 그래요. 아 이거 열세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깐 좀 비행기 안에서 캐쥬얼하게 입고 그렇게 입고 내려올 줄로 알았대요.
그런데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하고 나서니까 "아 불편한데 어떻게 그렇게 하고 오십니까" 그렇게 인사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래 제가 대답을 합니다. "어디 가나 소망 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망 교인 앞에 바르게, 단정한 모습으로 나타나려고 합니다. 불편하지만 잠을 자도 넥타이를 매고 자야됩니다." 왜요 그게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자나, 깨나, 먹으나, 가나, 오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스데반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하여,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이예요. 그래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한번 보십시다. 먼저는 그가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를 갊니다. 당장 돌을 들어 치려고 하는 그 무서운 사람들 앞에서도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요 앞으로 가야 할 곳이니까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올시다. 우러러 볼 때에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좀 어려울 때 사람을 봅니다. 세상을 봅니다. 물질을 봅니다. 그리고 낙심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보며 나도 미워하고 그러다가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것이 필요합니다. 자 이제 보세요. 이렇게 우러러보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스데반을 본 사도바울이 먼 훗날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골로새 3장 1절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을, 보는 것을 본 그 증거를 본 사도바울이 뒤에 그것을 그대로 바울이 메시지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를 보라!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를 생각하라 위를 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위를 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오늘 본문에 보니 "인자가"라고 한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지칭하는 칭호가 '인자'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해서 예수님을 향하여 부른 호칭이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올시다. 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신학적인 긴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인자라고 하는 말은 가장 높은 이름입니다. 그리고 역사 끝에 하나님 친히 계시자로 임하는 바로 그 분에 대한 칭호가 인자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재판 받으실 때에도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라'고 명백하게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백 번 이상이나 인자, 인자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을 통하여 "당신은 인자입니다. 인자여"라고 부른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직 스데반이 딱 한 번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내가 바라본다"고 인자라는 말이 제자의 입을 통해서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놀라운 얘깁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실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모세의 이야기를 좀 하면은 그가 여러 번 실수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위를 보지 못하고 백성을 보았기 때문이요. 백성들이 원망할 때 원망하는 백성을 보다 보니까 원망하는 백성을 원망하며 망령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때도 위를 보았더라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을 텐데 위를 보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땅을 보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세상을 보았어요. 그만 실수하게 됩니다. 여러분, 단 순간도 위를 보는 그 마음과 시선을 하늘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에서 잠깐도 흐트러져서는 안됩니다. 또한가지는 이 스데반은 가장 큰 위대한 장점은 용서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자기를 죽이겠다고 지금 소리를 지르는 이 사람들이 바로 옛 친구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왜 베드로가 죽지 않고 스데반이 죽습니까 그는 지성인이요, 학자이기 때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하나가 예수를 믿게될 때에 많은 유대사람들과 유대교회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이 사람을 죽이려 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모여서 스데반을 죽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이를 갈고, 돌을 던지는 바로 그 사람들이, 바로 엊그제까지 자기의 친구입니다. 동료들입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만 그는 저들을 용서했습니다. 저들은 저를 향하여 이를 갈고 미워했지만 저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처럼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제자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언젠가라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야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사랑의 극치가 아닙니다. 이건 기본적인 것이올시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도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했어요. 원수 사랑이요. 그리스도인이 베풀어야 할 사랑의 기본적인 사랑도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적어도 아무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합니다. 깨끗이 용서해야합니다. 특별히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 의인을 죽이는 죄,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이 무서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모르기 때문이요. 저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돌리라는 겁니까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좀더 기회를 가지고 좀더 온유하게 잘 설득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격한 행동이 폭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들이 발악하며 돌을 던지는 것에 상당부분의 잘못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여러분 어떤 허물, 어떤 잘못도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게 돌렸어요. 그 잘못이 내게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주세요.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자유인이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또 좀더 나아가서는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생을 위탁했습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내 생명을 받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여러분 제가 63년에 처음으로 미국 유학을 갔을 때,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자가용 문화가 없을 때입니다. 가서 목사님의 차를 탔는데, 이거 자기가 허리띠를 매면서 벨트를 날보고 매라고 하더라고요. 이거 생전 처음 매니까 이상하더라고요 이거 비틀어 매는 게. 그리고 이 분은 운전대 앞에서 벨트를 딱 맨 다음에는 잠깐 기도해요. 그래서 나도 따라서 기도하다가 언제 한 번 물었습니다. 워 샤인이라고 하는 목사님인데 묻기를 "나는 식사기도도 배웠고 잠자리 기도도 배웠습니다마는 벨트 매는 기도를 못 배웠는데 이 벨트 매고는 뭐라고 기도하는 거요." 거 좀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했더니,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지.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지. 가다가 언제사고 날지 모르니까, 꽝하면 안되니까 미리 기도하고 떠나는 거지." 그저 우리 생각 같아서는 무사히 가게 해주시고, 잘 가게 해주시고, 돌아오게 해주시고……. 자기 마음대로 그건 아니요. 설사 어느 시간에 '꽝' 하더라도 "하나님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도 사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녁기도가 뭔지 아십니까 우리는 잠자리 기도할 때도 "잠 잘 자게 해주시고……." 우리 집 아이들도 기도하는 걸 보면 "무서운 꿈꾸지 않게 해주시고, 건강하게 내일 아침 일어나서 또 활동하게……." 거 얘기가 많습니다. 장황한데.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같이 자보니까 코고는데 심하게 골 때는 꼭 죽는 것 같더라고요. 드렁드렁하다가 또 잠깐 멈추었다가, 아이구 죽었는가 하면, 또 살아나고 하더라구요. 아 그 힘들대요. 그 코고는 사람들이요. 그런데 이 언제 죽을는지 알아요 뚝하면 가는 거예요. 뭘 그 일어나서……. 언제 제대로 살았다고 그런 기도합니까 그저 잠자리 기도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아버지여, 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자다가 가더라도 아버지께 가게 해주세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드린 그 기도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평상시에 드리는 잠자리 기도입니다. 그게. 이렇게 기도하다가 마지막 떠나는 날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기도하며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걸 알아야돼요. 모든 생명, 모든 운명, 모든 되어지는 일을 Totally Commit, Commitment 하나님께 완전히 위탁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스데반은 죽어갑니다마는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어요. 왜 그 마음이 천사니까. 이렇게 죽어감으로 해서 스데반은 죽어서 큰 영광을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이것을 지켜본 사도 바울은 이제다시 그의 뒤를 따라 한 평생 수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상한 것은 제가 신학대학에서 바울 신학을 강의 해보았지만, 여러 해 강의하면서 자세히 연구해보니까요 사도 바울의 신학이라는 것은 스데반이 마지막 죽기 전에 설교한 그 내용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Christianized the Old Testament, 구약성경을 신약화하고, 구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증거하고, 교회를 증거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놀라운 신학적 기초가 됩니다. 그러고 보면 바울은 스데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한 평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 만나고야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행복했던 것은 그가 참 그리스도인을 먼저, 증인된 그리스도인을 먼저 만났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후계자를 남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5월 31일자 타임지에서 "A Surge of Teen Spirit" 라고 하는 제목 하에 중요한 기사가 났었습니다. '10대의 심령 부흥'이라는 제목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4월 20일날 있었던 콜로라도의 덴버라고 하는 곳에서 거기 고등학교에서 젊은 청년들이 총으로 난사해서 많은 사람, 수십 명이 죽은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죽은 사람 가운데 하나. 여학생이, 캐시버넬(Cassie Bernall)이라는 학생이 죽기 전에 총을 들이대고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에 애가 총구 앞에서 "There is a God, and you need to follow along God's path.나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너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총을 쏩니다. 이 여학생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지켜본 많은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이 캐시를 '적은 순교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깃대 앞에 보였습니다. 그냥 무릎을 꿇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영적 운동이 온 전국에 퍼져서 10대의 젊은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말합니다. "Cassie was born for this.내 딸 캐시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놀라운 얘기가 아닙니까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라고 하는 분이 교수형을 당하게 될 때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증거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옆에 바울이 서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고 죽었고 바울은 뒤에 회개하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바울과 스데반이 만나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죽지만은 당신이 언젠가 회개하고 하늘나라에서 형제와 같이 반갑게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러고 죽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얘기입니까 여러분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죽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승리란 자기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원수를 이길 때, 거기에 참 승리가 있는 겁니다. 승리와 성공과 참 행복의 원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순교적 증인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때 그 앞에 영광이 있을 것이고 사나 죽으나 그는 승리자로 가장 위대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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