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의 행로 (민14:20-25)
본문
어떠한 조류학자가 깊은 산 속에서 그의 조류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며 또 현지를 답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깊은 산 속에서 앵무새 둥지 하나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 학자는 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앵무새 그 새끼 한 마리를 새장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서 자기 집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침마다 앵무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앵무새 먹이를 주면서 키웠는데 며칠 후에 앵무새 어미가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새장 속에 갇혀있는 새끼를 위해서 어미가 부지런히 모이를 물어다 먹이는 겁니다. 그걸 보고 "참 잘 됐다. 내가 모이 줄 것도 없고 이젠 어미 새가 모이를 날라다 먹이니깐 그저 나는 두고 보기만 하면 되고 앵무새 소리만 즐기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며칠 후에 보니까 새장에 있는 앵무새 새끼가 죽었습니다. 웬일인가 해서 그는 조류학자로서 전문가적으로 깊이 연구하고 사인을 살펴보았더니 어미 앵무새가 새끼에게 독이 있는 그 독 과일을 먹인 겁니다. 그러니까 어미새가 새장 속에 있는 새끼를 일부러 죽인 겁니다. 그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겠죠. "네가 그 속에 갇혀서 한평생 고생하느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래서 어미 새는 새장 속에 있는 자기 새끼를 독 과일을 먹여서 죽인 것이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자유를 외친 사람들이 많은데 앵무새는 이것을 벌써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 땅에서 많은 고생을 합니다. 담부지역을 하는 그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400년의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큰 기적으로. 여러분 아시는 대로 열가지 재앙을 내려가면서 애굽을 치고 이스라엘을 건졌습니다. 완악하고 강팍한 바로의 마음을 꺾어서 기어이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 했습니다. 더더욱 홍해를 가르는 큰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건졌습니다. 홍해를 건너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감격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유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온 백성이 함께 천지가 진동하게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감된 것은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렇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태반이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었습니다.
얼마나 유감된 일입니까 이스라엘은, 남은 이스라엘은 다시 이제 요단강만 건너가면 가나안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회전하라"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다시 광야에서 40년을 훈련시킵니다. 그 다음에야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물리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자유,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명한 자유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이 경제적 자유를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 명언을 했습니다. 사실로 절대 빈곤에 빠진 사람, 이 빵 하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고 하겠다고 하는 그런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 자유가 없습니다. 창조주가 주신 그 소중한 자유를 아무에게나 헐값에 팔아 넘기고 그리고 다시 노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이 경제적 자유를 소중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이건 도덕적 자유를 말합니다.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서 형사에게 쫓기는 사람, 내 손가방에 몇 억의 돈이 있어도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 하늘아래 어디 가도 그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도덕적 자유, 양심의 자유, 예배의 자유, 이 자유가 기본적으로 자유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건 정치적 자유입니다. 정치적으로 한 번 잘못되기 시작하면 이 구조적인 악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구 러시아가 그랬고 중국이 그랬고 세계가 그랬고 공산주의 지하에서 고생하던 민족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아차 하는 가운데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먹혀들어 갔다는 거죠. 속았다는 거죠. 한 번 끌려 들어간 다음에 헤어날 수가 없어서 수 십년 동안을 이렇게 억압 속에 시달려야 했고, 지금도 정치적 억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민족들,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정치적 자유가 아주 소중합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와 자유인의 문제입니다. 자유가 주어졌다고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인이 되어야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주어졌다는 한 가지만 가지고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 자유인이 된 다음에, 자유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써 자유가 자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인이 되기까지는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인이라고 하는 자기 존재가 그 정체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은 우리 다 같이 느끼는 일이기에 오늘은 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한 때 군사정권을 대항해서 무진하게 싸워왔습니다. 군사정권, 독재. 독재를 반대해서 많은 학생들이 대모를 했고 지성인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 많은 세월 군사 독재로부터 벗어나 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외치고 감옥이 메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끌려가서 수욕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억에 아직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문민정부를 세웠습니다. 요새는 국민정부를 세웠답니다. 지내보니 어떻습니까 그래 문민정부, 국민정부 세우니까 자유가 있습디까 무엇이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오죽 답답한 얘기입니까 많은 사람들 많은 지성인들이 말합니다. 차라리 그 때가 좋았다고……. 그래서 설문조사를 해 보니까 우리가 지금 이 젊은이들까지 제일 존경하는 정치적인 지도자가 박정희 대통령이랍니다. 이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그래 오늘 좀 어렵다고 해서 다시 "차라리 군사 정권이 났지", "독재 정권이 났지", "막 밀어붙이는 그 때가 더 좋았다" 이렇게 꼭 말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사실입니까 여기에 우리의 혼란이 있는 것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참 자유! 말 한 마디만 삐꺽해도 감옥에 들어가던 그 때, 어찌 그 때를 지금 동경하고 있는 겁니까 비록 어렵긴 하지만은 말입니다. 그 때는 많이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얼마의 자유를 얻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유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 그 은총적 계획이, 자유케 하시는 목적, 그 숭고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자유케하신 그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거는 결코 자유인일 수가 없습니다. 노예적인 세계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식민지적 잠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리고 돈 좀 벌었다고 우리가 민주주의적 투표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참 절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여러분 갈라디아 5장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원망은 자유가 아닙니다. 말이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원망하는 자의 마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자유로울 자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모처럼 나와서 가나안에 못 들어간 죄목이 있다면, 한 마디로 말하라면 원망죄입니다. 그 원망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그 귀중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그리 조그마한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열 번도 더 넘게 많은 권능을, 권능을, 엄청난 능력을 눈으로 보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또 하나는 어떤 원망이든지 원망 뒤에는 무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가려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내가 못 사는 건 저 사람 때문이고, 내가 잘못된 것도 누구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 어떤 짓궂은 사람은 남편하고 아내하고 다투다가 남편이 하도 벌컥벌컥 화를 내니까 아내가 조용히 말하기를 "왜 당신은 요새 와서 그렇게 자꾸 화를 내는 거요" 그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다." 저 성격 나빠진 거 제 탓이지 그게 누구 탓입니까 여러분 바로 이런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요. 벌써 자기 자유를 남에게 반납해 버린 사람이에요. 아내가 움직이는 대로 내가 따라간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이 아닙니까 이런 시시한 인간에겐 자유가 없는 거예요.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니에요. 내 책임은 내가 지는 거예요. 자유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것이요,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까지 내가 질 때, 나라고 하는 존재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지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그런 미련한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벌써 노예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북녘 땅에서 남쪽으로 참 구사일생 어려운 가운데서 탈출해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여기 저기 보니까 뭐 음식점도 많이 생겼고 요 바로 앞에도 옥류관이 생기고 뭐 그랬더라고요. 평양에서 옥류관 제가 몇 번 가보았는데 여기 거기 그림으로 딱 붙였더만요 옥류관을. 뭐 어쨌든 이 분들 사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은 상당수가 불평이 많습니다. 못살겠답니다. 차라리 북쪽으로 가는 게 났겠답니다. 아 거기서는 어름어름 그저 위에서 하라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러면 되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벌어먹어야지, 자기가 교육비를 해야지, 자기가 뭐 해야지……. 책임이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 그래요. 그럴 거예요. 처음부터 자유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죠. 자유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죠. 자유는 곧 책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좀 오늘 현재 조금 어렵다고 해서 곧 하는 말이 "그 옛날에 애굽에서 비록 노예생활을 하긴 했지만은 고기가마 옆에 앉아서 갈고리로 끌어서 도적질해서 먹고서 그 때가 좋았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제대로 말을 한다면 "거기서 배불리 먹기보다는 여기서 굶어 죽는 게 났다."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니요. 어째서 인간들이 이 모양이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이 자유를 하찮은 물질에, 하찮은 정욕에 빼앗기겠다는 겁니까 더구나 우리 과거에 있었던 일, 참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핏하면 모세를 죽이겠대요. 아 여보세요,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람들 애굽에서 나올 때, 물론 모세가 나오자고 했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다들 나갑시다 하긴 했지만은 그걸 따르고 좋게 여기면서 여기까지 나온 건 자기가 선택한 거지 이제 와서 고생스러우니까 한다는 소리가 "모세 너 왜 우리들 데리고 나와서……. 애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더냐 왜 여기까지 데리고 나와서 죽이려느냐" 원망하면서도 그 사람들 농담을 잘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요 예 내가 선택해서 내가 온 것이지 그래 모세가 오래서 왔어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것을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고 모세를 때려죽인다고 해결이 되는 겁니까 바로 이 원망의 극치가 하나님 앞에 큰 진노를 산 것이에요. 모세를 죽이겠다고 하기 때문에. 무책임한 소리요. 과거, 깨끗이 청산되어야 하는데 노예적 과거, 노예적 상처, 노예적 성격, 노예적 세계관, 깨끗이 씻지를 못했기 때문에 오늘도 번번이 이렇게 어리석은 원망을 하게 됐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자유인은 자유의 가치를 압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압니다. 현재가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가 있는 한 그건 소중한 것입니다. 노예적인 번영보다 자유적인 가난이 좋은 겁니다. 죄와 더불어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의와 함께 가난과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찬송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기뻐할 줄 아는 자만이, 자유를 기뻐할 줄 하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과거에 되어졌던 일,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고 앞으로 되어질 운명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것이요. 그런고로 믿고 오늘은 어떤 고난 속에 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나리오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 속에 있음을 알고 감사하게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에요. 그리고 순종하는 것이에요. 서로 돕는 것이에요. 이것이 자유인이요 자유인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복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라고 하는 유명한 작가의 '스칼렛 레터(Scarlet Letter)' 라고 하는 '주홍글씨' 라고 하는 소설은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 주홍글씨 내용 가운데 헤스터 프린이라고 하는 여자가 어떤 날 특별한 분과의 관계에서 간음을 합니다. 이 간음함으로 인해서 그가 아이를 가집니다. 이제 이로 인하여 재판을 받게 되나 내가 누구와 관계했고 누구의 아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아버지의 이름을 대지 못하면 그 마을에서는 그를 아주 허술한 여자, 창녀 취급을 합니다. 그 때 간음죄가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재판을 하고 너는 간음한 여자다 해서 앞과 뒤에, 가슴과 등에다가 A자를 크게 붉은 글자로 써서 붙이게 됐습니다. Adultery, 간음이란 뜻입니다. 간음한 여자다 그래서 A자를 앞과 뒤에 이렇게 항상 붙이고 다니게 돼있습니다. 그는 괴로웠습니다 만은 그는 자유로웠습니다. '나는 죄인 되어서 죄인이란 말을 듣는데 그게 뭘 잘못이냐.'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유로웠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를 재판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만은 그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딸을 낳아 가지고 귀하게 키웁니다. 갖은 비난을 다 받으면서도, 조롱 속에서도 그저 자유롭습니다. 다 드러낸 처지에서 평안하게 그저 갖은 비방을 다 받아가며 아이를 잘 키워서 10년이 됐습니다. 또 돈을 벌리는 대로 불쌍한 사람들,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들 많이 구제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했습니다. 착한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10년 후에 동네 아이들이 자기 엄마보고 물어봅니다. "엄마, 엄마 저 옆집에 있는 아주머니는 그 예쁜 딸하고 사는데 왜 이상하게 옷에 앞과 뒤에 A자를 새겨 가지고 있는데 그거 무슨 뜻입니까“ 그 어머니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그거 모르겠냐 그건 엔젤(Angel), 천사란 뜻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누가 자유인입니까 어떤 자유를 원하십니까 바로 이 사람은 자유인이요, 자유로 승리한 것입니다. 신앙에 동기가 많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겠다고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복 달라고 비는 사람, 이 두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 자유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믿고 신뢰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에 그가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어떻게 대하시든지 나는 하나님의 뜻을 즐겨 따라갑니다. 여러분 인간은 무의식 속에 욕망이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욕망 속에 노예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자유로워지면서도 한편으로 노예가 되고 싶어해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분에게 자기 자신을 다 맡겨버려. 생각도, 지혜도, 판단도, 운명도 다 맡겨버리고 그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노예 되어 살고 싶어요. 사랑의 노예가 되어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요. 우리는 이제 하나님,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자유의 노예가 될 때 내 자유를 다 반납해 버리고 자유의 노예가 되는 순간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생각합시다. 나는 얼마의 자유를 누리고있습니까 나는 얼마 더 광야 생활을 해야 자유인이 될 것입니까 얼마나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깨끗한 자유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유감된 일입니까 이스라엘은, 남은 이스라엘은 다시 이제 요단강만 건너가면 가나안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회전하라"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다시 광야에서 40년을 훈련시킵니다. 그 다음에야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물리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자유,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명한 자유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이 경제적 자유를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 명언을 했습니다. 사실로 절대 빈곤에 빠진 사람, 이 빵 하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고 하겠다고 하는 그런 비참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사실 자유가 없습니다. 창조주가 주신 그 소중한 자유를 아무에게나 헐값에 팔아 넘기고 그리고 다시 노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이 경제적 자유를 소중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이건 도덕적 자유를 말합니다.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서 형사에게 쫓기는 사람, 내 손가방에 몇 억의 돈이 있어도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 하늘아래 어디 가도 그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도덕적 자유, 양심의 자유, 예배의 자유, 이 자유가 기본적으로 자유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건 정치적 자유입니다. 정치적으로 한 번 잘못되기 시작하면 이 구조적인 악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구 러시아가 그랬고 중국이 그랬고 세계가 그랬고 공산주의 지하에서 고생하던 민족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아차 하는 가운데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먹혀들어 갔다는 거죠. 속았다는 거죠. 한 번 끌려 들어간 다음에 헤어날 수가 없어서 수 십년 동안을 이렇게 억압 속에 시달려야 했고, 지금도 정치적 억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민족들,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정치적 자유가 아주 소중합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와 자유인의 문제입니다. 자유가 주어졌다고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인이 되어야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주어졌다는 한 가지만 가지고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 자유인이 된 다음에, 자유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써 자유가 자유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도 자유인이 되기까지는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인이라고 하는 자기 존재가 그 정체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될 수 있는 대로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은 우리 다 같이 느끼는 일이기에 오늘은 한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한 때 군사정권을 대항해서 무진하게 싸워왔습니다. 군사정권, 독재. 독재를 반대해서 많은 학생들이 대모를 했고 지성인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 많은 세월 군사 독재로부터 벗어나 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외치고 감옥이 메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끌려가서 수욕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억에 아직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문민정부를 세웠습니다. 요새는 국민정부를 세웠답니다. 지내보니 어떻습니까 그래 문민정부, 국민정부 세우니까 자유가 있습디까 무엇이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오죽 답답한 얘기입니까 많은 사람들 많은 지성인들이 말합니다. 차라리 그 때가 좋았다고……. 그래서 설문조사를 해 보니까 우리가 지금 이 젊은이들까지 제일 존경하는 정치적인 지도자가 박정희 대통령이랍니다. 이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그래 오늘 좀 어렵다고 해서 다시 "차라리 군사 정권이 났지", "독재 정권이 났지", "막 밀어붙이는 그 때가 더 좋았다" 이렇게 꼭 말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사실입니까 여기에 우리의 혼란이 있는 것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참 자유! 말 한 마디만 삐꺽해도 감옥에 들어가던 그 때, 어찌 그 때를 지금 동경하고 있는 겁니까 비록 어렵긴 하지만은 말입니다. 그 때는 많이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얼마의 자유를 얻어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유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 그 은총적 계획이, 자유케 하시는 목적, 그 숭고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자유케하신 그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거는 결코 자유인일 수가 없습니다. 노예적인 세계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식민지적 잠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리고 돈 좀 벌었다고 우리가 민주주의적 투표를 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도바울은 참 절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하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 여러분 갈라디아 5장에서 읽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원망은 자유가 아닙니다. 말이야 무슨 말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원망하는 자의 마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자유로울 자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모처럼 나와서 가나안에 못 들어간 죄목이 있다면, 한 마디로 말하라면 원망죄입니다. 그 원망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이 엄청난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그 귀중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그리 조그마한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열 번도 더 넘게 많은 권능을, 권능을, 엄청난 능력을 눈으로 보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또 하나는 어떤 원망이든지 원망 뒤에는 무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가려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죠. 내가 못 사는 건 저 사람 때문이고, 내가 잘못된 것도 누구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 어떤 짓궂은 사람은 남편하고 아내하고 다투다가 남편이 하도 벌컥벌컥 화를 내니까 아내가 조용히 말하기를 "왜 당신은 요새 와서 그렇게 자꾸 화를 내는 거요" 그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다." 저 성격 나빠진 거 제 탓이지 그게 누구 탓입니까 여러분 바로 이런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요. 벌써 자기 자유를 남에게 반납해 버린 사람이에요. 아내가 움직이는 대로 내가 따라간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렇게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이 아닙니까 이런 시시한 인간에겐 자유가 없는 거예요.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니에요. 내 책임은 내가 지는 거예요. 자유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것이요,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까지 내가 질 때, 나라고 하는 존재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지는 거예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그런 미련한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벌써 노예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북녘 땅에서 남쪽으로 참 구사일생 어려운 가운데서 탈출해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여기 저기 보니까 뭐 음식점도 많이 생겼고 요 바로 앞에도 옥류관이 생기고 뭐 그랬더라고요. 평양에서 옥류관 제가 몇 번 가보았는데 여기 거기 그림으로 딱 붙였더만요 옥류관을. 뭐 어쨌든 이 분들 사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은 상당수가 불평이 많습니다. 못살겠답니다. 차라리 북쪽으로 가는 게 났겠답니다. 아 거기서는 어름어름 그저 위에서 하라는 대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러면 되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벌어먹어야지, 자기가 교육비를 해야지, 자기가 뭐 해야지……. 책임이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 그래요. 그럴 거예요. 처음부터 자유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이죠. 자유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죠. 자유는 곧 책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좀 오늘 현재 조금 어렵다고 해서 곧 하는 말이 "그 옛날에 애굽에서 비록 노예생활을 하긴 했지만은 고기가마 옆에 앉아서 갈고리로 끌어서 도적질해서 먹고서 그 때가 좋았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제대로 말을 한다면 "거기서 배불리 먹기보다는 여기서 굶어 죽는 게 났다."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니요. 어째서 인간들이 이 모양이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이 자유를 하찮은 물질에, 하찮은 정욕에 빼앗기겠다는 겁니까 더구나 우리 과거에 있었던 일, 참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걸핏하면 모세를 죽이겠대요. 아 여보세요,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람들 애굽에서 나올 때, 물론 모세가 나오자고 했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다들 나갑시다 하긴 했지만은 그걸 따르고 좋게 여기면서 여기까지 나온 건 자기가 선택한 거지 이제 와서 고생스러우니까 한다는 소리가 "모세 너 왜 우리들 데리고 나와서……. 애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더냐 왜 여기까지 데리고 나와서 죽이려느냐" 원망하면서도 그 사람들 농담을 잘하더라고요. 이게 무슨 소리요 예 내가 선택해서 내가 온 것이지 그래 모세가 오래서 왔어요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것을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고 모세를 때려죽인다고 해결이 되는 겁니까 바로 이 원망의 극치가 하나님 앞에 큰 진노를 산 것이에요. 모세를 죽이겠다고 하기 때문에. 무책임한 소리요. 과거, 깨끗이 청산되어야 하는데 노예적 과거, 노예적 상처, 노예적 성격, 노예적 세계관, 깨끗이 씻지를 못했기 때문에 오늘도 번번이 이렇게 어리석은 원망을 하게 됐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자유인은 자유의 가치를 압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압니다. 현재가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가 있는 한 그건 소중한 것입니다. 노예적인 번영보다 자유적인 가난이 좋은 겁니다. 죄와 더불어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의와 함께 가난과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찬송하는 자만이 자유인이요, 기뻐할 줄 아는 자만이, 자유를 기뻐할 줄 하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과거에 되어졌던 일,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고 앞으로 되어질 운명은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는 것이요. 그런고로 믿고 오늘은 어떤 고난 속에 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시나리오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 속에 있음을 알고 감사하게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에요. 그리고 순종하는 것이에요. 서로 돕는 것이에요. 이것이 자유인이요 자유인의 수준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 복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이라고 하는 유명한 작가의 '스칼렛 레터(Scarlet Letter)' 라고 하는 '주홍글씨' 라고 하는 소설은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 주홍글씨 내용 가운데 헤스터 프린이라고 하는 여자가 어떤 날 특별한 분과의 관계에서 간음을 합니다. 이 간음함으로 인해서 그가 아이를 가집니다. 이제 이로 인하여 재판을 받게 되나 내가 누구와 관계했고 누구의 아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아버지의 이름을 대지 못하면 그 마을에서는 그를 아주 허술한 여자, 창녀 취급을 합니다. 그 때 간음죄가 성립이 됩니다. 그래서 재판을 하고 너는 간음한 여자다 해서 앞과 뒤에, 가슴과 등에다가 A자를 크게 붉은 글자로 써서 붙이게 됐습니다. Adultery, 간음이란 뜻입니다. 간음한 여자다 그래서 A자를 앞과 뒤에 이렇게 항상 붙이고 다니게 돼있습니다. 그는 괴로웠습니다 만은 그는 자유로웠습니다. '나는 죄인 되어서 죄인이란 말을 듣는데 그게 뭘 잘못이냐.'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유로웠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그를 재판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만은 그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이제 이 여자는 딸을 낳아 가지고 귀하게 키웁니다. 갖은 비난을 다 받으면서도, 조롱 속에서도 그저 자유롭습니다. 다 드러낸 처지에서 평안하게 그저 갖은 비방을 다 받아가며 아이를 잘 키워서 10년이 됐습니다. 또 돈을 벌리는 대로 불쌍한 사람들,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들 많이 구제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했습니다. 착한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10년 후에 동네 아이들이 자기 엄마보고 물어봅니다. "엄마, 엄마 저 옆집에 있는 아주머니는 그 예쁜 딸하고 사는데 왜 이상하게 옷에 앞과 뒤에 A자를 새겨 가지고 있는데 그거 무슨 뜻입니까“ 그 어머니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그거 모르겠냐 그건 엔젤(Angel), 천사란 뜻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누가 자유인입니까 어떤 자유를 원하십니까 바로 이 사람은 자유인이요, 자유로 승리한 것입니다. 신앙에 동기가 많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겠다고 기복적인 신앙을 가지고 복 달라고 비는 사람, 이 두 사람은 어떤 이유에서 자유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믿고 신뢰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에 그가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어떻게 대하시든지 나는 하나님의 뜻을 즐겨 따라갑니다. 여러분 인간은 무의식 속에 욕망이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욕망 속에 노예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자유로워지면서도 한편으로 노예가 되고 싶어해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분에게 자기 자신을 다 맡겨버려. 생각도, 지혜도, 판단도, 운명도 다 맡겨버리고 그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노예 되어 살고 싶어요. 사랑의 노예가 되어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요. 우리는 이제 하나님,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자유의 노예가 될 때 내 자유를 다 반납해 버리고 자유의 노예가 되는 순간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생각합시다. 나는 얼마의 자유를 누리고있습니까 나는 얼마 더 광야 생활을 해야 자유인이 될 것입니까 얼마나 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깨끗한 자유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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