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의 복 (마5:1-12)
본문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가난을 어느 정도 경험했습니까 배고픈 경험을 어디까지 했습니까 사람은 배가 고프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슬퍼지는 것입니다. 배고픈 자의 코는 예민합니다. 배고플 때 길거리를 지나가면, 그 음식점에서, 멀리서 풍기는 냄새까지도 그렇게 사람을 못 견디게 합니다. 속된 말로 미칠 지경입니다. 배고픈데 음식냄새까지 나면은 더 배고픕니다. 아주 절박합니다. 배고픈 자의 생각은 단순합니다. 보는 것도 전부 먹는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전부가 먹을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도 먹고 싶은 생각 외에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절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이야기를 읽어보아도 '사십일을 금식한 후에 주리신지라.' 주렸다. 그러죠. 배고팠어요. '그때에 예수님이 마귀가 와서 시험하는 시험을 받으셨다.' 그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만은 그저 일단 한번 심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시험이 되었을 겁니다. 마귀가 시험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는 배고픈 것으로 인하여 시험을 당합니다. 지극히 실제적이고 인간적입니다. 광야에 놓여있는 돌덩어리가 있습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을 보면서 '저 돌이 떡이었으면 좋겠다.' 돌이 떡으로 보이더란 말이요. 돌덩어리가 떡덩어리로 보인단 말입니다. 미칠 지경입니다. 그리고 속에서 끓어 오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서 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볼까 그래서 배고픔을 면할까 이런 절박한 시험이 예수에게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면 유명한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비유가 있습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도 탕자비유는 다 압니다. 그래 설교학에 그런 말이 있어요. 탕자비유로 설교하지 말라고, 너무 많이 아니깐. 너무 많은 사람이 했으니깐, 그러나 오늘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이유가 뭡니까 집으로 돌아온 동기가 어디 있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요 내 경험이 아니니까. 내가 그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쩍 지나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배고파 죽겠다는……굶어 죽을 지경이 되니까 정신이 없어요. 여러분 제가 그 본문을 다시 한번 읽으려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보면,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나는 배고파 굶어 죽는구나' 이때 정신을 차린 겁니다. 정신이 맑아집니다. 이제 체면이고 명예고 무슨 뭐 자존심이고 그까짓 건 뭐 문제가 되질 않아요.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뭐 어떻게 내가 지내 왔느냐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뭐 조금만이라도 그가 성공했더라면 집으로 안 돌아옵니다. 굶어 죽을 지경만 안 되었더라도 아버지 집으로 안 돌아옵니다. 꼭 죽게 됐기 때문에 돌아 온 거예요. 기생들과 술집에서 지내던 거 이제 다 쓸데 없는 짓이고 그 동안에 헛된 친구들을 사귀었던 것도 다 소용없어요. 오로지 생각 나는 것은 밥 한 그릇이예요. 그래서 그는 '나는 죽는구나' 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니다.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 것이 배고팠기 때문이에요. 아버지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절박한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2000년사를 연구해 보면은 어디를 보던지 가난과 질병을 통하지 않고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진 역사가 없습니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나라건 마찬가집니다. 이게 나타나지 아니하고는 복음이 전파된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도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 다 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안 나온 사람들 배불러서 안 나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난이라는 것은 사람을 단순하게 합니다. 언젠가 제 교우께서 내게 "청빈의 사상"이라고 하는 일본사람 나가노 고지가(中野孝次)가 쓴 책 한 권을 보내줘서 오랜만에 잊어버렸던 일본말을 생각해 나가면서 더듬어서 일본말 책을 한번 오랜만에 읽어 봤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득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 때 그는 행복할 수 있다. 청빈을 자기 철학으로 삶을 수 있을 때, 청빈의 철학을 터득할 때 그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하는 얘깁니다. "돈이 있다고 돈에 미쳐서 노예 되지 말고 돈이 없다고 뭐 비굴해 지지도 말고 '청빈낙도' 툭툭 털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더라. 있으나 없는 듯 없으나 있는 듯. 이 물질적 욕망과 관계를 끊은 그 사람들만이 자유와 행복을 누렸더라" 하는 그런 자본주의에 관한 경고의 글이었습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는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필요한 것의 뿌리는 돈입니다. 오직 그거 하나입니다. 여러분 가난하고 보면 눌린 자의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신분도 낮아집니다. 양반이 소용 있습니까 배고픈 양반 아무 소용없습니다. 가난한 지성인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발이 통하질 않습니다. 자기도 압니다. 스스로 천한 자로 느낄 수밖에 없고 천대받음, 절박하게 느낍니다. 이것을 소외감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잘살고 못살고 명예가 있고 없고 지위가 어떻고 다 배부른 흥정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뭐 예술이니 예술성이니다 배부른 얘기예요. 우리 나라에도 화가들이 있는데요. 아주 유능한 화가들, 며칠 전에도 이중섭씨 거기에 갔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화가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한때는 다 부자였어요. 배부르니깐 화가니 뭐니 했지 배고픈 자가, 처음부터 배고픈 자가 그림을 그린 일은 없더라구요. 그것도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배고픈 자가 오직 사느냐 죽느냐에 관심뿐이지 무슨 예술감각이고, 뭐 그런 얘기는 다 배부른 사람들의 얘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바칩니다. 북한에 있는 내 조카들에게 제가 텔레비젼을 하나씩 다 사줬어요. 그 다음에 물어 보니까 다 팔아 먹었대요. 그건 봐서 뭘 합니까 먹는 게 중요한데, 먹는 거……그만큼 먹는다는 것은 절박한 것이에요. 심지어는 창조주가 내게 준 소중한 자유, 양심의 자유까지도 반납하고 밥 한 그릇 얻어먹는 거예요. 노예면 어떻고 굴욕이면 어떻습니까. 먹고야 볼 거지. 그것이 바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이요, 배고픔이라고 하는 절대 필요의 조건입니다. 또한 가난은 사람을 아주 겸손하게 만듭니다. 지식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자기 의도 포기합니다. 왜요 가난한 자의 지식 인정 안해요. 안다고 하는데, 지 밥벌이도 못하면서 알길 뭘 그 말이죠. 나는 의롭다 그것도 밥 먹고 하는 얘기지, 가난하고 배고픈 자의 의를 누가 인정을 합니까 그 주제에 그러면 끝나는 거지. 가난이 이렇게 절박한 것이에요. 그리고 가난한 자는 사실로, 먹는 거 빵 하나로 만족합니다.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만족도 1호 입니다. 정말로 배고팠던 사람은 한 끼의 밥으로 다 만족합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해 보셨습니까 한 끼의 밥을 놓고 "아 참 기가 막히다." 그 행복과 만족함이란……저는 피난 시절에 혈혈단신, 혼자 나와 가지고 이리저리 참 힘들더라구요. 그 남의 신세도 어쩌다 지지 그 어떻게 피난민들이 가진 걸 얹혀서 먹겠습니까, 이 젊은 사람이. 그래 뭐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그러던 중에 뭐 몇 끼를 굶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고구마 구워서 파는 데가 있어요. 그 앞을 지나가는데 그 냄새가 기가 막힙니다. 그 앞에 서서 제가 가지고 있던 시계를 풀어 줬습니다. 시계는요, 그 당시는 한마을에 하나 있을지 말지 한 거예요. 지금처럼 시계가 흔한 게 아닙니다. 나도 웬만큼 부잣집 아들이라서 그 시계가 있지 보통 시계가 있는 게 아닌데, 그 팔뚝 시계가 하나 있어 가지고 그거 하나 딱 풀어주고 고구마 다섯 개를 얻었습니다. 그 조그만 고구마 손에 쥐어서 따끈따끈한데 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때에 눈물이 뚝뚝뚝뚝뚝 떨어지는데요, 이 감사, 그 감격과 그 행복은요 지금 내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만나도 그때 같은, 그때 같은 맛은 없어요. 참으로 이 가난한 자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 가난한 자만이 있는 거예요. 또한 우리는 빵 하나를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과거의 그것 다 버립니다. 때로는 미래에 대한 소망까지, 기대감까지도 몽땅 털어 버리고 오직 한끼의 밥을 생각합니다. 그만큼 배고픈 자라는 건 절박한 거예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거지는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좀 실례지만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는 그 옛날 60년대 초반일 때에는요 거지가 많았어요. 늘 집에 와서 얻어먹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 얻어먹는 사람들보고 늘 얘기를 했어요. 정월 초하루, 팔월 추석 이런 날은 남의 집 문간에 들어서는 거 별로 좋아 안 한다. 그럴 때는 우리 집으로 오라. 그래서 추석이나 정월 초하루 날은 우리 집에서 거지잔치를 했습니다. 상을 쭉 차려놓고 아이들하고 같이 먹습니다. 흘리면서 먹는 사람도 있고 몸이 좀 이렇게 비틀어진 사람도 있죠, 아무튼 같이 먹는데 좌우간 얼마나 먹어대는지 줘도 줘도 자꾸만 먹는데.'아휴! 내가 좋은 일 하고 사람하나 죽이는 거 아닌가 저렇게 하고도 소화할 수 있나' 걱정을 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거지는 소화불량 없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소화가 되는 거예요. 부잣집 사람들 죽 쑤어 놓고도 껄껄하고 앉았어요. 생각해 보세요 누가 더 행복한가. 거지는 소화불량 없다니까요. 먹어도 먹어도 그냥 배만 고픈 거예요. 맛이 있는 거예요. 그래 예수님 말씀이 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 원문대로는 "토이푸토코이토푸니오마티" 라고 하는 "푸니마"라고 하는 말은 영적이라는 말이죠, 그래 영적인 것에 대하여. 영적인 것이라는 건 신령한 것 영원한 것 하나님의 말씀, 진리, 이런 것이 영적인 거예요. 영적인 그쪽으로 가난한 사람, 가난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 복이 있다 그런 말씀이올시다. 그래 가만히 보면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면서도 영적으로는 교만한 사람이 있어요. 배부른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말씀을 받아 영접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물질로는 부하지만은 영적으로는 아주 가난해요. 그 가난한 사람들이 열심히 나오는 거 아닙니까 영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낮에 나오고, 저녁에 나오고, 새벽에 나오고……안 믿는 사람은 "저 사람이 저거 좀 돌았나. 예수를 믿어도 이상하게 믿누만. 뭐 저렇게 자 꾸만 나가나" 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니깐요. 그것이 영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이에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배고픈 거예요. 얼마든지 가난한 것이지요. 그걸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여러분이 압니다. 한 사람이 남의 밭을 갈다가 감춰진 보화를 발견했다. 집에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 바로 그것이 가난이에요. 저걸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바치겠다 이 얘기예요. 그런 마음이죠. 이것이 심령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또한 지식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시원치 않은 사람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다 잘 안다 그러고, 참으로 유식한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또 탐구하는 거 아닙니까 지식에 대한 가난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다. 인격적으로 교만한 사람 배부른 사람 이건 구제 불능입니다. 그래서 한 평생 성경을 가르치던 칼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만한 자에게 진리를 가리키는 것은 당나귀에게 음악을 가리키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요, 그건 못하는 일입니다. 그 교만한 사람 바리새교인 다 안다고 떠드는 사두개 교인, 다 안다고 하는 서기관. 예수님도 저들을 가리킬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오실 이가 당신이오리까, 누구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리까" 결정적인 시간입니다. 내가 누구냐의 정체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딱 한 마디로, "눈 먼 자가 눈을 뜨며,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죽은 자가 살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끝이예요. 복음은 만방에 전해지고 있지만, 오로지 가난한 자만이 복음을 받아들이더라, 그런 줄 알아라. 이것이 정체요, 이것이 진리요, 이것이 내가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말씀 하실 수 밖에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너희들은 가난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마음이 더 가난한 자 되길. 그 사람 자체가 복이다." 랍비 셈 토프라고하는 분이 제자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선생님 진리는 아무데나 있다면서요그렇지, 진리는 어디에나 있는 거지.선생님 그러면 진리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갈돌처럼 있는 겁니까아, 그럼 자갈돌처럼 널려진 게 진리다.그러면 사람들은 왜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아 그거 간단하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서. 조금만 허리를 굽히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가난해질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은 진리를 영접할 수 없는 것이란다." 이 말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벌써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주었습니다.
이건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는 사십년 목회 했습니다만은 아무리 전도하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것가지고 않되더라고요.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도 안됩니다. 언젠가는 주께서 직접 역사하셔야 되요. 쉬운 말로 말하면 손을 좀 봐야돼요. 하나님이 손을 좀 봐야 그때 가서 가난해지고, 가난해져야 그때 가서 말씀을 영접하더라구요. 저희 교회에 어떤 장로님 한 분이 시애틀에 있는 자기 친구가 있는데 젊은 사람이에요. 아는 사람인데 아주 과학자예요. 돈도 많고, 아 저 사람이 예수 믿으면 참 좋은 일을 하겠는데 싶어서 카세트 테이프를 매주일 정성껏 기도하며 삼년을 보냈다는 거 아닙니까 받아 놓기만하고, 그 친구가 보내는 거니까 받아놓기만 하고 듣진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사업이 꽝하고 무너지면서 자살직전으로 갔습니다. 아 이거 큰일났어요. 마음이 너무 고민하고 울적하더랍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서 '친구가 보내준 저걸 좀 보면 어떨까' 그리고 보기 시작했어요. 그 카세트 테이프를 듣기 시작했어요. 며칠동안 다 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새 사람이 되어 가지고 큰 일을 하시는데 일부러 제사무실에 들어와서 그 이야기를 쭉 해주실 때, 자신도 함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마음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복음이 복음될 수가 없어요. 진리가 진리될 수도 없어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지도 못합니다. 그런고로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다. 그리하여 소중한 겸손의 복을 주시고, 믿음의 복을 주시고, 순종의 복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복을 주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 사람이 바로 복이 있다. 왜요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보면,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나는 배고파 굶어 죽는구나' 이때 정신을 차린 겁니다. 정신이 맑아집니다. 이제 체면이고 명예고 무슨 뭐 자존심이고 그까짓 건 뭐 문제가 되질 않아요.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 뭐 어떻게 내가 지내 왔느냐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뭐 조금만이라도 그가 성공했더라면 집으로 안 돌아옵니다. 굶어 죽을 지경만 안 되었더라도 아버지 집으로 안 돌아옵니다. 꼭 죽게 됐기 때문에 돌아 온 거예요. 기생들과 술집에서 지내던 거 이제 다 쓸데 없는 짓이고 그 동안에 헛된 친구들을 사귀었던 것도 다 소용없어요. 오로지 생각 나는 것은 밥 한 그릇이예요. 그래서 그는 '나는 죽는구나' 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니다.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 것이 배고팠기 때문이에요. 아버지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절박한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2000년사를 연구해 보면은 어디를 보던지 가난과 질병을 통하지 않고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진 역사가 없습니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나라건 마찬가집니다. 이게 나타나지 아니하고는 복음이 전파된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도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 다 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안 나온 사람들 배불러서 안 나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난이라는 것은 사람을 단순하게 합니다. 언젠가 제 교우께서 내게 "청빈의 사상"이라고 하는 일본사람 나가노 고지가(中野孝次)가 쓴 책 한 권을 보내줘서 오랜만에 잊어버렸던 일본말을 생각해 나가면서 더듬어서 일본말 책을 한번 오랜만에 읽어 봤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소득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을 때 그는 행복할 수 있다. 청빈을 자기 철학으로 삶을 수 있을 때, 청빈의 철학을 터득할 때 그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하는 얘깁니다. "돈이 있다고 돈에 미쳐서 노예 되지 말고 돈이 없다고 뭐 비굴해 지지도 말고 '청빈낙도' 툭툭 털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더라. 있으나 없는 듯 없으나 있는 듯. 이 물질적 욕망과 관계를 끊은 그 사람들만이 자유와 행복을 누렸더라" 하는 그런 자본주의에 관한 경고의 글이었습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는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필요한 것의 뿌리는 돈입니다. 오직 그거 하나입니다. 여러분 가난하고 보면 눌린 자의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신분도 낮아집니다. 양반이 소용 있습니까 배고픈 양반 아무 소용없습니다. 가난한 지성인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발이 통하질 않습니다. 자기도 압니다. 스스로 천한 자로 느낄 수밖에 없고 천대받음, 절박하게 느낍니다. 이것을 소외감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잘살고 못살고 명예가 있고 없고 지위가 어떻고 다 배부른 흥정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뭐 예술이니 예술성이니다 배부른 얘기예요. 우리 나라에도 화가들이 있는데요. 아주 유능한 화가들, 며칠 전에도 이중섭씨 거기에 갔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화가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한때는 다 부자였어요. 배부르니깐 화가니 뭐니 했지 배고픈 자가, 처음부터 배고픈 자가 그림을 그린 일은 없더라구요. 그것도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배고픈 자가 오직 사느냐 죽느냐에 관심뿐이지 무슨 예술감각이고, 뭐 그런 얘기는 다 배부른 사람들의 얘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바칩니다. 북한에 있는 내 조카들에게 제가 텔레비젼을 하나씩 다 사줬어요. 그 다음에 물어 보니까 다 팔아 먹었대요. 그건 봐서 뭘 합니까 먹는 게 중요한데, 먹는 거……그만큼 먹는다는 것은 절박한 것이에요. 심지어는 창조주가 내게 준 소중한 자유, 양심의 자유까지도 반납하고 밥 한 그릇 얻어먹는 거예요. 노예면 어떻고 굴욕이면 어떻습니까. 먹고야 볼 거지. 그것이 바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이요, 배고픔이라고 하는 절대 필요의 조건입니다. 또한 가난은 사람을 아주 겸손하게 만듭니다. 지식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자기 의도 포기합니다. 왜요 가난한 자의 지식 인정 안해요. 안다고 하는데, 지 밥벌이도 못하면서 알길 뭘 그 말이죠. 나는 의롭다 그것도 밥 먹고 하는 얘기지, 가난하고 배고픈 자의 의를 누가 인정을 합니까 그 주제에 그러면 끝나는 거지. 가난이 이렇게 절박한 것이에요. 그리고 가난한 자는 사실로, 먹는 거 빵 하나로 만족합니다.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만족도 1호 입니다. 정말로 배고팠던 사람은 한 끼의 밥으로 다 만족합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해 보셨습니까 한 끼의 밥을 놓고 "아 참 기가 막히다." 그 행복과 만족함이란……저는 피난 시절에 혈혈단신, 혼자 나와 가지고 이리저리 참 힘들더라구요. 그 남의 신세도 어쩌다 지지 그 어떻게 피난민들이 가진 걸 얹혀서 먹겠습니까, 이 젊은 사람이. 그래 뭐 어떻게 할 길이 없어요. 그러던 중에 뭐 몇 끼를 굶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고구마 구워서 파는 데가 있어요. 그 앞을 지나가는데 그 냄새가 기가 막힙니다. 그 앞에 서서 제가 가지고 있던 시계를 풀어 줬습니다. 시계는요, 그 당시는 한마을에 하나 있을지 말지 한 거예요. 지금처럼 시계가 흔한 게 아닙니다. 나도 웬만큼 부잣집 아들이라서 그 시계가 있지 보통 시계가 있는 게 아닌데, 그 팔뚝 시계가 하나 있어 가지고 그거 하나 딱 풀어주고 고구마 다섯 개를 얻었습니다. 그 조그만 고구마 손에 쥐어서 따끈따끈한데 서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때에 눈물이 뚝뚝뚝뚝뚝 떨어지는데요, 이 감사, 그 감격과 그 행복은요 지금 내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만나도 그때 같은, 그때 같은 맛은 없어요. 참으로 이 가난한 자의 행복이라는 것은 그 가난한 자만이 있는 거예요. 또한 우리는 빵 하나를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과거의 그것 다 버립니다. 때로는 미래에 대한 소망까지, 기대감까지도 몽땅 털어 버리고 오직 한끼의 밥을 생각합니다. 그만큼 배고픈 자라는 건 절박한 거예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거지는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좀 실례지만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는 그 옛날 60년대 초반일 때에는요 거지가 많았어요. 늘 집에 와서 얻어먹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 얻어먹는 사람들보고 늘 얘기를 했어요. 정월 초하루, 팔월 추석 이런 날은 남의 집 문간에 들어서는 거 별로 좋아 안 한다. 그럴 때는 우리 집으로 오라. 그래서 추석이나 정월 초하루 날은 우리 집에서 거지잔치를 했습니다. 상을 쭉 차려놓고 아이들하고 같이 먹습니다. 흘리면서 먹는 사람도 있고 몸이 좀 이렇게 비틀어진 사람도 있죠, 아무튼 같이 먹는데 좌우간 얼마나 먹어대는지 줘도 줘도 자꾸만 먹는데.'아휴! 내가 좋은 일 하고 사람하나 죽이는 거 아닌가 저렇게 하고도 소화할 수 있나' 걱정을 했어요. 그러나 여러분 거지는 소화불량 없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소화가 되는 거예요. 부잣집 사람들 죽 쑤어 놓고도 껄껄하고 앉았어요. 생각해 보세요 누가 더 행복한가. 거지는 소화불량 없다니까요. 먹어도 먹어도 그냥 배만 고픈 거예요. 맛이 있는 거예요. 그래 예수님 말씀이 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 원문대로는 "토이푸토코이토푸니오마티" 라고 하는 "푸니마"라고 하는 말은 영적이라는 말이죠, 그래 영적인 것에 대하여. 영적인 것이라는 건 신령한 것 영원한 것 하나님의 말씀, 진리, 이런 것이 영적인 거예요. 영적인 그쪽으로 가난한 사람, 가난을 느끼는 사람, 그 사람 복이 있다 그런 말씀이올시다. 그래 가만히 보면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면서도 영적으로는 교만한 사람이 있어요. 배부른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말씀을 받아 영접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물질로는 부하지만은 영적으로는 아주 가난해요. 그 가난한 사람들이 열심히 나오는 거 아닙니까 영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낮에 나오고, 저녁에 나오고, 새벽에 나오고……안 믿는 사람은 "저 사람이 저거 좀 돌았나. 예수를 믿어도 이상하게 믿누만. 뭐 저렇게 자 꾸만 나가나" 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니깐요. 그것이 영적으로 건강하기 때문이에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배고픈 거예요. 얼마든지 가난한 것이지요. 그걸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를 여러분이 압니다. 한 사람이 남의 밭을 갈다가 감춰진 보화를 발견했다. 집에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 바로 그것이 가난이에요. 저걸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바치겠다 이 얘기예요. 그런 마음이죠. 이것이 심령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또한 지식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시원치 않은 사람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다 잘 안다 그러고, 참으로 유식한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또 탐구하는 거 아닙니까 지식에 대한 가난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다. 인격적으로 교만한 사람 배부른 사람 이건 구제 불능입니다. 그래서 한 평생 성경을 가르치던 칼빈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만한 자에게 진리를 가리키는 것은 당나귀에게 음악을 가리키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요, 그건 못하는 일입니다. 그 교만한 사람 바리새교인 다 안다고 떠드는 사두개 교인, 다 안다고 하는 서기관. 예수님도 저들을 가리킬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오실 이가 당신이오리까, 누구 다른 사람을 기다리오리까" 결정적인 시간입니다. 내가 누구냐의 정체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딱 한 마디로, "눈 먼 자가 눈을 뜨며,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죽은 자가 살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끝이예요. 복음은 만방에 전해지고 있지만, 오로지 가난한 자만이 복음을 받아들이더라, 그런 줄 알아라. 이것이 정체요, 이것이 진리요, 이것이 내가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말씀 하실 수 밖에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너희들은 가난하여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마음이 더 가난한 자 되길. 그 사람 자체가 복이다." 랍비 셈 토프라고하는 분이 제자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선생님 진리는 아무데나 있다면서요그렇지, 진리는 어디에나 있는 거지.선생님 그러면 진리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갈돌처럼 있는 겁니까아, 그럼 자갈돌처럼 널려진 게 진리다.그러면 사람들은 왜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아 그거 간단하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서. 조금만 허리를 굽히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가난해질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은 진리를 영접할 수 없는 것이란다." 이 말씀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벌써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주었습니다.
이건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저는 사십년 목회 했습니다만은 아무리 전도하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것가지고 않되더라고요.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도 안됩니다. 언젠가는 주께서 직접 역사하셔야 되요. 쉬운 말로 말하면 손을 좀 봐야돼요. 하나님이 손을 좀 봐야 그때 가서 가난해지고, 가난해져야 그때 가서 말씀을 영접하더라구요. 저희 교회에 어떤 장로님 한 분이 시애틀에 있는 자기 친구가 있는데 젊은 사람이에요. 아는 사람인데 아주 과학자예요. 돈도 많고, 아 저 사람이 예수 믿으면 참 좋은 일을 하겠는데 싶어서 카세트 테이프를 매주일 정성껏 기도하며 삼년을 보냈다는 거 아닙니까 받아 놓기만하고, 그 친구가 보내는 거니까 받아놓기만 하고 듣진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사업이 꽝하고 무너지면서 자살직전으로 갔습니다. 아 이거 큰일났어요. 마음이 너무 고민하고 울적하더랍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서 '친구가 보내준 저걸 좀 보면 어떨까' 그리고 보기 시작했어요. 그 카세트 테이프를 듣기 시작했어요. 며칠동안 다 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새 사람이 되어 가지고 큰 일을 하시는데 일부러 제사무실에 들어와서 그 이야기를 쭉 해주실 때, 자신도 함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마음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복음이 복음될 수가 없어요. 진리가 진리될 수도 없어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지도 못합니다. 그런고로 마음이 가난한 자 복이 있다. 그리하여 소중한 겸손의 복을 주시고, 믿음의 복을 주시고, 순종의 복을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복을 주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 사람이 바로 복이 있다. 왜요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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