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을 넘어서려면 (막9:17-24)
본문
자신의 힘이나 지혜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상황, 환경,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가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가능은 없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척정신에 투철한 사람, 매우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문제 앞에 부딪쳐보자 라고 도전을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인생의 많은 역경과 시련이 극복되고 그리고 문제들이 해결되는 그런 놀라운 장면들을 우리는 자주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에서 정말 어떤 불가능도 존재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불가능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서 죽음의 문제,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도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죽음을 연장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또 죽음을 가져왔던 원인인 이 죄 문제를 우리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개선할 수는 있습니다. 좀 더 죄를 덜 짓는 사회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는 본질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죄에서 파생된 질병의 문제 우리는 좀더 병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병이 없는 사회, 병이 없는 환경이란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어떤 불가능을 인정해야 합니다. 불가능을 끝까지 거절해 버리면 그것은 우리가 신이 되려는 행위라고 밖에는 우리가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 때문에 사람은 사람됨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불가능은 없다라는 신념만을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때때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마지막 불가능 앞에서 주저 앉아 버릴 때 그 좌절은 더 비참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실제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 말고 정 반대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그만 어려움이 생겨도 도전하지도 않고 포기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너무 쉽게 수용해 버리고 한계를 낮추어 버리고 인간의 역경 앞에서 스스로 삶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해요. 벼룩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우리가 벼룩 그러면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려지지만, 제가 자라날 때만 해도 이와 벼룩들과 더불어 함께 살았습니다. 아주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이따금씩 이와 벼룩을 잡는 것이 취미 중에 하나였습니다. 생각나시죠 여기.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다 그 세월이 생생하게 기억이 될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여러 개의 벼룩을 가지고 벼룩이 얼마나 높이 뛸 수 있나 실험을 해보았어요. 한 20 센티는 대부분 다 뛸 수가 있고, 어떤 벼룩들은 30 센티를 무려 뛸 수가 있는 것을 발견을 했어요. 벼룩들을 모아 놓고 그 벼룩 위에다 유리컵을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벼룩들이 계속 뛰죠. 그러나 유리컵의 한계 때문에 이제 부딪칩니다. 10센티미터도 이제 못뛰죠. 7-8 센티. 유리컵이 딱 제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벼룩들이 뛰지 못합니다. 한 두 시간이 지난 후에 유리컵을 이렇게 벗겨나 보십시오. 그 이상 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벼룩들은 이제 나는 그 이상 뛸 수가 없다. 이 7-8 센티, 10센티 유리컵의 한계가 내 한계다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만 뛰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 낸 유명한 우리말이 있쟎아요 벼룩이 뛰어봤자 얼마나 뛰겠느냐 말이죠. 이 벼룩 같은 자세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자기의 한계를 너무 낮게 낮추어 버리고 쉽게 인생의 어떤 난제 앞에서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러한 소위 불가능성의 한계 앞에 도전하는 그리스도인들 그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인간됨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했을때 우리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이 불가능을 극복할 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자, 내가 삶의 장에서 부딪쳐 오는 이러한 불가능의 난제와 그리고 사건들 앞에 서서 불가능을 넘어서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가 던지고 있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 간질병에 들린 어린아이를 어떤 아버지가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치유를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이 물론 열심히 노력을 했겠지요. 그러나 이 아이의 병이 도무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산 위에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내려오신 거예요. 세 제자와 함께 올라 가셨다가 내려오신 거예요. 예수님을 발견한 순간 이 아버지나 무리들에게는 새로운 소망, 어쩌면 마지막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자, 예수님이 이 불가능의 병, 간질병은 지금도 치유하기 힘든 병입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더욱 난치의 병이 아니었겠습니까 자, 이 병을 예수께서 치유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불가능을 넘어서는 인생의 상당한 불가능의 한계들을 돌파할 수 있는 그 삶의 비밀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자, 불가능을 넘어서려면 우리가 배워야할 삶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배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1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여기 19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된 단어는 내게로 라는 단어예요. 내게로, 내게로 데려오라.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자, 이 아버지는 먼저 자기의 아이를 이끌고 이 난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누구를 찾아 왔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 왔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찾다가 예수님이 없으니까 제자들에게 왔을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어디에 올라가셨습니까 이것이 연속 시리즈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디에 올라가 계셨어요 변화산상에 계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마도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못 고친단 말이죠. 우리가 종종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이런 접근방법을 사용합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 빠진 사람들,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에 한번 나와 보세요. 하나님 의지하시면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저는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말해야 할 줄로 생각을 합니다. 자,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문제에 대한 해결의 희망을 안고 초청 받은대로 전도 받은대로 교회에 나옵니다. 그들이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그렇지 않죠.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압니다. 저는 그들이 물론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그들이 참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는 것은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님 한 분이 자기 어린 자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올때 교회가자 이렇게 말씀을 안하고 항상 이렇게 말씀을 했대요. ‘야, 우리 하나님 집에 가자.' 그래서 그날도 주일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 집에 가자 그랬더니 그날 따라 그 집 꼬마들이, 꼬마 중에 하나가 이런 대답을 하더래요. ‘나 안가요.’ 그래서 ‘왜 안가니’ 그랬더니 ‘밤낮 가봐야 집에 안계시데요.’ 하나님, 이 꼬마는 당연히 하나님을 찾을 것을 기대하고 둘러보았지만 하나님이 안보인단 말이예요. 아주 솔직한 말이죠. 저는 교회의 책임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예배를 왜 드립니까 성경 공부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험케 하는 것이예요. 우리가 말씀 공부의 중요한 목적이 어떤 단순한 지식을 취득한다가 아닙니다. 성경공부의 촛점을 단순한 지식의 획득, 정보의 획득에 두는 것은 성경공부를 가장 나쁜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주님 만나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단순한 빌딩이 아니예요. 이 빌딩이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빌딩 안에 들어 왔다고 해서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 드리는 그곳에 두세 사람 이상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 그리고 주의 이름을 높이는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거든요. 예수님을 만나는 거에요.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되요.
그런데 빌딩만 보고 가면 빌딩 안에 들어왔다 나간다 해서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로 인도한다. 거기서 끝나면 안되요.
교회에 나왔다. 이것은 좋은 스탭입니다. 중요한 스탭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셨다 이것은 굉장히 참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교회 문턱 하나 넘어 들어오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아주 중요한 일을 하셨어요. 큰 단계를 밟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무엇이 중요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어떤 문제의 해결을 기도할 때 또 흔히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기대 가운데 하나는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을 기대합니다. 저는 그것도 나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종종 우리 교인들에게 부탁을 받습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교인들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잘하는 일이고 해야 될 일이고 그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 병든 자들아 교회의 장로들을 즉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하라 그리고 지도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면서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은 당연한 일이예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병을 고칠까요 아닙니다. 지도자는 도구에 불과하고 매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궁극적인 치유자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서 고치실 수가 있어요. 그러나 고치신 분은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니거든요. 근데 마치 사람이 고치는 것처럼 그렇게 설명을 한다든지 그렇게 제시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의 정도에서 빗나간 것입니다. 제가 어제 황당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어제 교우 집을 불시에 심방을 했습니다. 어제 오후에 잠시 그냥 지나가다가 그 집에서 깜짝 놀랬지요. 근데 거기에 어떤 한 네살, 다섯살 먹은 꼬마가 저를 딱 보자마자 우리 교회에 나와서 저를 봤으니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하나님 오셨다.' 그러는거예요. 얼마나 황당해요 제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웃었죠, 물론. 제가 그러나 좋아했다면 제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예요. 제가 그랬습니다 '야, 네 엄마 불러와라' '네 엄마 불러와.' 그리고 그 엄마보고 그랬습니다. 나를 이단의 교주로 만들기로 작정을 했습니까 어떻게 자식 교육을 그렇게 시켰습니까 그리고 그 꼬마한테 제가 연습을 시켰어요. 하나님 오셨다가 아니야, 하나님의 종이 오셨다. 따라서 해봐. 하나님의 종. 그러니까 하나님의 쫑. 따라서 하더라구.
요즘 우리 신문지상에 보면 1999년이 되니까 그 이단들이, 사이비 종교들이 다시 부활하고 부흥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금년에 달을 거듭할수록 더 심해질 거예요. 보세요. 영락없이 11월, 12월 달은 아마 클라이막스예요. 이단들의 활동에 클라이막스에 도달할 것입니다. 벌써 우리 주변에 건강한 기독교를 가장한 어떤 단체에서도 벌써 잘못되어가는 그런 소문들이 무성하게 우리의 귓전에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사이비교주와 건강한 영적 지도자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 구분이 뭐예요 만약 어떤 지도자가 계속해서 촛점을 자기에게 맞춘다면 내가 메시아라고 말을 한다든지 혹은 그렇게 말하진 않아도 그런 암시를 한다든지 자기가 메시아라든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자기가 구세주라는 선포를 하든지 암시를 하든지 그리고 계솟해서 촛점을 자기에게 모은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집단이다. 그런 집단은 불건전한 집단이다 여러분이 쉽게 이렇게 구별하면 되는 것이예요. 어떤 사람이 설교를 들었을 때 그 설교의 촛점이 뭐냐 자기를 높이느냐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설교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 임한 신비체험만 간증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정말 높임을 받느냐 하나님이 정말 선포가 되느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해결자가 하나님이라면 성도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보십시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영적 지도자를 목자라고 부르는 것, 괜챦지만, 그렇게 불러도 괜챦지만, 때때로는 그 목자가 양들을 인도할 때 그 목자들 자신이 인도할 수도 있지만 그 개들을 데리고 같이 인도하는 때도 있습니다.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을 해요. 내 역할은 단순히 개의 역할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정말 진정한 목자되신 주님 앞으로 달려가도록, 그 주님을 볼 수 있도록, 주님을 의존할 수 있도록 주님을 가르치고 주님을 지향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특별한 그런 촛점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모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영적 지도자의 책임은 끊임없이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메시지로, 교육으로, 훈련으로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길이요, 그가 진리요, 그가 생명이십니다. 그분이 홀로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 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앞에 나오세요. 내가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는 순간까지도 하나님, 하나님이 이 종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대해야지, 그 종이 어떤 능력을 가진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 때에만 우리는 문제를 넘어서서 불가능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움의 삶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올 줄을 아십시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아올 때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를 고칠 수가 있다. 예수님을 신뢰하셔야 합니다. 자, 제자들이 축사에 실패한 이후에, 귀신 쫓아내고 병 고치는 일에 실패한 이후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의 28절에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여기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조용히 물었어요. 크게 묻기에 창피했을지도 모르지요. 실패한 후 이니까. 어떤 자존심 때문에 주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어찌하여 실패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 실패의 원인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아이가 고쳐지지 않은 이유,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제자들의 기도가 실패한 이유, 도대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자, 우리가 다시 19절을 읽어보시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원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지금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이 아이의 병이 고쳐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믿음이 없는 세대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그리고 본문과 똑같은 기사를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보면 이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 주변에 있던 무리들에게 먼저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믿음이 없는 세대여!"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좀 달라요. 자, 지금 그 아이가 아파 있는 현장, 아직도 고침받지 못하고 있었던, 누워있던 그 현장에 둘러싸고 있는 막연한 구경꾼, 그 무리들 전체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오늘 이 세상이, 이 세대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곳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당신의 임재를 계시하시고, 당신의 손길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여!' 자,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예수님을 향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없었겠습니까 어느 정도의 믿음 있었겠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니예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정도의 믿음은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 가운데. 그래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주님앞에 가까이 나와서 봉사도 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겠어요 여러분들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믿음이 없으십니까 하면 과히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그대들이 실패한 이유,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그것은 믿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들에게 믿음이 적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 현장에서만은 주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을 온전히 엑서사이즈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 우리가 믿음, 믿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그 단어 자체가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챤 사이언스라는 기독교 이단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별로 시원치 않지만 외국에는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는 크리스챤 사이언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따금씩 여행을 하다 보면 국제 공항 같은 데에 크리스챤 사이언스라는 리딩룸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기독교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독교가 아니예요. 이 사람들이 믿음을 강조하지만 '믿음'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예요. 자기자신을 믿으라 이 말 이예요. 우리가 자신을 믿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얼마나 많은 오늘날 이런 운동들이 우리 주변에 다가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단순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믿음은 항상 믿음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있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한계를 압니다. 나의 좌절을 압니다. 나의 절망을 압니다. 나의 죄를 압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구세주요,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앞에 나와 엎드렸고, 그 분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고, 신뢰했고, 그 분을 따라가는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휴머니즘, 인본주의와 기독교와 결정적이고도 본질적인 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신뢰하십니까 우리는 주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기독교인들조차도 은근히 사실은 나를 믿고 있는 경우들이 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믿는다는 단어를 전세계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한국 교인들처럼 대표적으로 강조를 잘 하는 민족이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저 주님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잘 아시네요. 믿씁니다, 시옷자에 강조해서 말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 사실은 주님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제자들의 경험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 지금 제자들이 왜 이 축사에 실패하고, 이 아이의 병을 고치는데 왜 실패를 했을까요 저는 제자들이 과거에는 성공을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열 두제자, 70명의 제자들에게 전도하러 내어 보낼 때 권세를 주어서 내보냅니다.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어서 그들을 내어 보냈습니다. 자, 돌아와서 보고할 때 어떤 보고를 했습니다. 선생님, 굉장하데요. 우리가 기도해 보니까 병자가 낫고 그리고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성공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또 성공할 줄 알았어요. 더욱이 저는 이 본문의 상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 제자들의 아주 미묘한 심리적 상태를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자, 지금 여기 이 병든 아이와 씨름하고 있는 제자들은 아홉명입니다. 자, 제자들이 모두 몇 명이에요 열 두명. 세 명은 어디 갔습니까 지금 산에 올라간 거에요.
예수님과 함께. 그런데 세명의 제자이름이 누구입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다시 말해서 제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제자, 그 중에서도 제일 두목 제자는 누구였습니까 수제자는 베드로였지요 그런데 세명의 대표적인 제자가 없어진거예요. 아홉명만 남아 있었을때 그 아이를 데리고 그 아버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홉명의 제자가 다른 세 명의 제자가 없는 것을 잘됐다고 생각했을까요 잘못됐다고 생각했을까요 물론 정답은 없어요. 본문에 없으니까. 그런데 제 추측에는 이 아홉명이 아주 신이 났을 것 같아요. 항상 대표 제자들이 있으면 틀림없이 대표로 누가 기도했습니까 베드로가 기도할 것이 뻔하지요 야고보가 하던지, 요한이 하던지. 그러니까 세 명이 없으니까 우리도 한 번 뭔가를 보여주자. 베드로 너만 병 고칠 수 있느냐 나도 할 수가 있다. 딱 폼을 잡고 염려 없다고 데려 오라고 우리가 고쳐 주겠다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갈지어다. 귀신이 안 나가! 이렇게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 안 고쳐지는 거예요. 실패한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왜 실패했느냐 저는 다분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기도한다고 말하고, 신앙적인 내용과 틀을 사용하면서도 그러나 이 아홉제자의 마음의 밑바탕에서는 자기과시, 우리도 뭔가를 할 수 있다. 그 순간이 크리스챤들이 실패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가장 강하고 생각할 때, 사실은 실패합니다. 신앙의 역설은 이것입니다. 내가 약함을 느끼는 순간,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는 순간,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약할 때가 내가 강한 순간입니다. 나의 무력을 느끼고 나의 좌절을 느끼고, 그래서 하나님, 정말 하나님 없이는 못 살구요, 주님 없이는 할 수가 없구요.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임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순간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실패의 원인이 거기에 있어요. 자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제자들이면서도 순간적으로 그 주님을 신뢰하기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도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그 순간 제자들은 보기 좋은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한해에 우리 인생의 길을 살아갈 때 우리 앞에 수다한 문제들이 그리고난제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 기억하십시오. 문제를 주 앞에 가져 나오시길 바랍니다. 나는 도울 수가 없어요. 나는 형제와 자매를 도울 수가 없어요.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형제를 도와주시기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 이제는 문제를 어디로 가지고 나와요 예수님 앞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할 일이 뭐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셔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근데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신뢰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어떻게 증가시킬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방법. 저는 그것이 기도의 방법이라 생각해요. 기도는 우리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방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돼요. 기도 안 할수록 자기생각, 자기의지 그리고 자기의 계획, 자기의 잔꾀 그리고 자기만 의지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자, 기도할 때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첫 번째 말이 뭐예요. 하나님 아버지. 자비로우신 나의 주님. 자,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죠. 우리 이번 청지기 세미나를 할 때 첫 번째 오신 강사님이 되게 강조한 것 중에 하나가, 왜 기도하지 않는가. 교만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저는 동감합니다. 왜 기도 안 합니까. 교만하기 때문에.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 절망을 느낄 때, 자기의 한계를 느낄 때. 오 하나님. 아니 자기 절망을 느끼지 않을 때에라도 주님이 나보다 더 잘 아신다. 주님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다. 주님의 지혜만이 최선의 지혜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서 그리고 어떤 난제의 일이 내 앞에 버티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무릎을 꿇어 기도할 줄로 믿습니다. 교만하면 기도하지 못하거든요. 자, 왜 이 제자들은 쫓아 낼 수가 없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어떤 대답이었어요 마지막 절에 대답을 읽어보세요. 자, 마지막 29절입니다. 29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9절 시작.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기도가 방법이다. 기도가 바로 이런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것을 비교하면 재미있어요. 똑같은 기사가 마태복음에도 취급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17장 21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마태복음 17장 21절입니다. 웃는 사람은 빨리 찾은 사람이에요. 왜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17장 21절을 딱 찾아보면 뭐가 나왔습니까. '없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없음' 하하. 그러나 어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은 다 사본인데 카피한 것인데, 어떤 사본에 보면 마태복음 17장 21절 없음 그러고난 외 주로 바깥에다 코멘트를 해 놨어요. 뭐라고 썼습니까. 기도가, 어떤 사본에 의하면, 기도와 금식이 아니고서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기도와 함께 뭘 강조했습니까. 금식. 기도만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금식까지 강조하신 것으로 되어있어요. 금식은 무엇입니까. 기도의 가장 강렬한 형태가 금식입니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 하루를 살면서 절대로 빼놓지 않는 것, 그것은 먹는 일이죠. 그러나 그 식사시간까지 단절하고 하나님께 매달린다. 기도의 가장 강렬한 형태가 바로 금식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이런일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이 종종 '목사님 저도 어려운 많아서 기도해 봤어요.
그런데 안돼데요' 제가 가끔 반문합니다. 금식까지 해 보셨습니까. 한 두 번의 기도가 아니라 정말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 기도의 가장 간절한 형태가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금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거기에서 너희는 아무것,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무것과 모든 것이란 단어가 비교되고 있어요. 영어로 읽어보면 더 재밌는데 anything, anything 염려하지 말고, everything 기도와 간구라. 이 두 단어가 재미있죠 anything, everything 하는 두 개의 단어가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염려처럼 비생산적인 것은 없습니다. 염려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더 깊은 염려 속에 빠질 것입니다. 염려를 중단하라. 그리고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라. 그렇습니다. 염려할 일이 생기셨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셨다. 염려를 붙들고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염려할 모든 것을 기도할 모든 것으로 바꾸어라.
그런데 기도만 강조된 것이 아니예요. 거기에 잘 보면 뭐라고 그랬습니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간구예요. 기도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간구하라. 더 간절히 기도하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결국에 여기에 도달할 수밖에 없어요. 금식까지 하게 됩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어떤 때 우리는 금식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금년 연말 연초를 보내면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금식의 도전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금년 한해 내 개인적인 내 영성 계발의 목표중의 하나가, 금년에는 금식을 좀 많이 하자. 그래서 한달에 적어도 하루 온전히 하루 이상을 금식하는데 바치자 이렇게 결심했어요. 저는 저와 함께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금식의 체험과 금식의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불가능의 문제들이 있어요. 우리의 힘, 우리의 지혜, 우리의 생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런 난제들을 뚫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경험하기 위해서 주 앞에 엎드리는 교회. 주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 초대교회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초대교회의 능력. 기도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초대교회가 굉장히 이상적이 교회라 지금 현대교회 보다 굉장히 우수한 어떤 교회라는 상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똑같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교인 숫자도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당대의 세계에 그 세계를 흔들 수 있는 영향력과 충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 어디에 있었느냐. 금식에 있었어요. 금식에. 사도행전에 페이지마다 우리는 기도와 금식의 장이 없이 사도 행전의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기도가 세계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글랙롤이라는 미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젊은 전도자의 책을 읽고 있는데 사도행전 강해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몇일전에 책을 읽고 있다가 아주 충격적인 도전 한가지를 받았어요. 사도행전에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사도 행전에 교회들은 회의보다 기도를 더 많이 했다. 회의보다 기도를 더 많이 했다. 그들은 만약 한시간 회의를 한다면 초대교회는 틀림없이 두시간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구요.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아마 두시간 회의를 했다면 한시간 정도 밖에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에 아니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두 시간 회의를 했다면 한 시간이 아니라 단10분도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형편이 아닐까. 제가 찔렸어요. 우리교회 보고하는 이야기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보고 하는 얘기로구나. 제가 이런 찔림을 받았습니다. 아, 내가 정말 기도하지 못했구나. 우리가, 우리 교회회의부터 좀 회의구조를 바꿔야겠구나.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30분 회의를 했다면 적어도 30분 이상 기도하고, 우리가 1시간 회의를 했다면 1시간 이상 그보다 훨씬 더 엎드려서 하나님 우리가 의논한 이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이 도와 주시구요,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구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구요,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구요. 이런 엎드림이 있다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그리고 제 생각은 오래 전 제가 영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보았던 한 교회의 생각이 갑자기 났어요. 오래 전에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에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에 많이 보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은 제 마음속에 제일 보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뭐 같아요 여러분, 비행장에 어떤 선교사님이 저를 pick up하러 나왔는데, "이 목사님 런던에서 뭘 보고 싶으세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한 대답은 이런 대답이었습니다. "나 스펄젼 목사님 교회를 보고 싶어요" 제가 설교자라 그런지, 설교의 prince, 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이 스펄젼 목사님이 사역하던 교회는 어떤 형태일까 궁금해서 그리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 봤어요. 주일날 가봤습니다. 한 200명도 안 모여요. 찬양도 힘이 없었고 무력해진 회중. 설교도 큰 감동이 되지 못했어요. 저는 슬폈습니다. 저는 뒤에 앉아 계속 울었습니다. 어째서 스펄젼 목사님의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때 6,000명 이상의 회중들이 꽉꽉 자리를 채우던 이 교회, 아니 많이 모일 때는 10,000명 이상씩, 어떤 때는 20,000명까지 모여서 성령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으로 불타오르던 이 교회. 스펄젼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스펼전 교회와 목사님을 방문하면 목사님은 항상 이 방문객을 데리고 교회 본당이 아니라 교회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데요. 그 아래층에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목회의 비밀은 바로 여기 기도하는 이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나의 힘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발전소입니다. 저들의 기도 때문에 오늘 우리의 교회는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단순히 스펄젼 목사님의 탁월한 설교만을 하나님이 쓰신 것이 아니라, 그 기도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그들은 한때 그 교회의 황금기를 누리고 영국을 변형시키는 변혁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펄젼 목사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어떤 전기 하나를 읽어보니까 제 눈에 갑자기 최근에 그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다시 그 전기를 읽어보았어요. 스펄젼 목사님이 떠나간 후에 교회는 비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심상치 않은 변화중의 하나가 기도하는 운동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기도하는 그룹이 없어졌어요. 저는 만약 기도하는 성도들이 기도로 지켰더라면 그 교회는 지금도 능력 있는 사역을 계속 하리라고 믿습니다. 기도가 사라질 때 하나님은 영광을 그 교회에서 거두신 것입니다. 저는 금년 한해동안 저와 더불어 함께 사역할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 그리고 특별히 제직들이 먼저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따금씩 이와 벼룩을 잡는 것이 취미 중에 하나였습니다. 생각나시죠 여기.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은 다 그 세월이 생생하게 기억이 될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여러 개의 벼룩을 가지고 벼룩이 얼마나 높이 뛸 수 있나 실험을 해보았어요. 한 20 센티는 대부분 다 뛸 수가 있고, 어떤 벼룩들은 30 센티를 무려 뛸 수가 있는 것을 발견을 했어요. 벼룩들을 모아 놓고 그 벼룩 위에다 유리컵을 덮었습니다. 그러니까 벼룩들이 계속 뛰죠. 그러나 유리컵의 한계 때문에 이제 부딪칩니다. 10센티미터도 이제 못뛰죠. 7-8 센티. 유리컵이 딱 제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벼룩들이 뛰지 못합니다. 한 두 시간이 지난 후에 유리컵을 이렇게 벗겨나 보십시오. 그 이상 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벼룩들은 이제 나는 그 이상 뛸 수가 없다. 이 7-8 센티, 10센티 유리컵의 한계가 내 한계다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만 뛰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 낸 유명한 우리말이 있쟎아요 벼룩이 뛰어봤자 얼마나 뛰겠느냐 말이죠. 이 벼룩 같은 자세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자기의 한계를 너무 낮게 낮추어 버리고 쉽게 인생의 어떤 난제 앞에서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러한 소위 불가능성의 한계 앞에 도전하는 그리스도인들 그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인간됨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했을때 우리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이 불가능을 극복할 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자, 내가 삶의 장에서 부딪쳐 오는 이러한 불가능의 난제와 그리고 사건들 앞에 서서 불가능을 넘어서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가 던지고 있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 간질병에 들린 어린아이를 어떤 아버지가 데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치유를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이 물론 열심히 노력을 했겠지요. 그러나 이 아이의 병이 도무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때 바로 그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산 위에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내려오신 거예요. 세 제자와 함께 올라 가셨다가 내려오신 거예요. 예수님을 발견한 순간 이 아버지나 무리들에게는 새로운 소망, 어쩌면 마지막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도와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자, 예수님이 이 불가능의 병, 간질병은 지금도 치유하기 힘든 병입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더욱 난치의 병이 아니었겠습니까 자, 이 병을 예수께서 치유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불가능을 넘어서는 인생의 상당한 불가능의 한계들을 돌파할 수 있는 그 삶의 비밀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자, 불가능을 넘어서려면 우리가 배워야할 삶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배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1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여기 19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된 단어는 내게로 라는 단어예요. 내게로, 내게로 데려오라.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자, 이 아버지는 먼저 자기의 아이를 이끌고 이 난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누구를 찾아 왔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 왔습니다. 아마 예수님을 찾다가 예수님이 없으니까 제자들에게 왔을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어디에 올라가셨습니까 이것이 연속 시리즈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디에 올라가 계셨어요 변화산상에 계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마도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못 고친단 말이죠. 우리가 종종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이런 접근방법을 사용합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 빠진 사람들,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에 한번 나와 보세요. 하나님 의지하시면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저는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그렇게 말해야 할 줄로 생각을 합니다. 자,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문제에 대한 해결의 희망을 안고 초청 받은대로 전도 받은대로 교회에 나옵니다. 그들이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그렇지 않죠.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압니다. 저는 그들이 물론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그들이 참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는 것은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님 한 분이 자기 어린 자녀를 데리고 교회에 나올때 교회가자 이렇게 말씀을 안하고 항상 이렇게 말씀을 했대요. ‘야, 우리 하나님 집에 가자.' 그래서 그날도 주일이 되어서 우리 하나님 집에 가자 그랬더니 그날 따라 그 집 꼬마들이, 꼬마 중에 하나가 이런 대답을 하더래요. ‘나 안가요.’ 그래서 ‘왜 안가니’ 그랬더니 ‘밤낮 가봐야 집에 안계시데요.’ 하나님, 이 꼬마는 당연히 하나님을 찾을 것을 기대하고 둘러보았지만 하나님이 안보인단 말이예요. 아주 솔직한 말이죠. 저는 교회의 책임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예배를 왜 드립니까 성경 공부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험케 하는 것이예요. 우리가 말씀 공부의 중요한 목적이 어떤 단순한 지식을 취득한다가 아닙니다. 성경공부의 촛점을 단순한 지식의 획득, 정보의 획득에 두는 것은 성경공부를 가장 나쁜 방법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주님 만나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단순한 빌딩이 아니예요. 이 빌딩이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빌딩 안에 들어 왔다고 해서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 드리는 그곳에 두세 사람 이상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 그리고 주의 이름을 높이는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하거든요. 예수님을 만나는 거에요.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되요.
그런데 빌딩만 보고 가면 빌딩 안에 들어왔다 나간다 해서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기는 것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로 인도한다. 거기서 끝나면 안되요.
교회에 나왔다. 이것은 좋은 스탭입니다. 중요한 스탭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셨다 이것은 굉장히 참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교회 문턱 하나 넘어 들어오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아주 중요한 일을 하셨어요. 큰 단계를 밟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무엇이 중요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어떤 문제의 해결을 기도할 때 또 흔히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기대 가운데 하나는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을 기대합니다. 저는 그것도 나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종종 우리 교인들에게 부탁을 받습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교인들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잘하는 일이고 해야 될 일이고 그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 병든 자들아 교회의 장로들을 즉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하라 그리고 지도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면서 위해서 기도하라 '이것은 당연한 일이예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병을 고칠까요 아닙니다. 지도자는 도구에 불과하고 매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궁극적인 치유자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서 고치실 수가 있어요. 그러나 고치신 분은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니거든요. 근데 마치 사람이 고치는 것처럼 그렇게 설명을 한다든지 그렇게 제시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의 정도에서 빗나간 것입니다. 제가 어제 황당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어제 교우 집을 불시에 심방을 했습니다. 어제 오후에 잠시 그냥 지나가다가 그 집에서 깜짝 놀랬지요. 근데 거기에 어떤 한 네살, 다섯살 먹은 꼬마가 저를 딱 보자마자 우리 교회에 나와서 저를 봤으니까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하나님 오셨다.' 그러는거예요. 얼마나 황당해요 제가 뭐라고 그랬을까요 웃었죠, 물론. 제가 그러나 좋아했다면 제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예요. 제가 그랬습니다 '야, 네 엄마 불러와라' '네 엄마 불러와.' 그리고 그 엄마보고 그랬습니다. 나를 이단의 교주로 만들기로 작정을 했습니까 어떻게 자식 교육을 그렇게 시켰습니까 그리고 그 꼬마한테 제가 연습을 시켰어요. 하나님 오셨다가 아니야, 하나님의 종이 오셨다. 따라서 해봐. 하나님의 종. 그러니까 하나님의 쫑. 따라서 하더라구.
요즘 우리 신문지상에 보면 1999년이 되니까 그 이단들이, 사이비 종교들이 다시 부활하고 부흥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금년에 달을 거듭할수록 더 심해질 거예요. 보세요. 영락없이 11월, 12월 달은 아마 클라이막스예요. 이단들의 활동에 클라이막스에 도달할 것입니다. 벌써 우리 주변에 건강한 기독교를 가장한 어떤 단체에서도 벌써 잘못되어가는 그런 소문들이 무성하게 우리의 귓전에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사이비교주와 건강한 영적 지도자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 구분이 뭐예요 만약 어떤 지도자가 계속해서 촛점을 자기에게 맞춘다면 내가 메시아라고 말을 한다든지 혹은 그렇게 말하진 않아도 그런 암시를 한다든지 자기가 메시아라든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자기가 구세주라는 선포를 하든지 암시를 하든지 그리고 계솟해서 촛점을 자기에게 모은다면 이것은 매우 잘못된 집단이다. 그런 집단은 불건전한 집단이다 여러분이 쉽게 이렇게 구별하면 되는 것이예요. 어떤 사람이 설교를 들었을 때 그 설교의 촛점이 뭐냐 자기를 높이느냐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설교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에게 임한 신비체험만 간증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정말 높임을 받느냐 하나님이 정말 선포가 되느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해결자가 하나님이라면 성도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보십시오. 저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영적 지도자를 목자라고 부르는 것, 괜챦지만, 그렇게 불러도 괜챦지만, 때때로는 그 목자가 양들을 인도할 때 그 목자들 자신이 인도할 수도 있지만 그 개들을 데리고 같이 인도하는 때도 있습니다. 나는 때때로 이렇게 생각을 해요. 내 역할은 단순히 개의 역할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정말 진정한 목자되신 주님 앞으로 달려가도록, 그 주님을 볼 수 있도록, 주님을 의존할 수 있도록 주님을 가르치고 주님을 지향하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특별한 그런 촛점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모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영적 지도자의 책임은 끊임없이 사람들이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메시지로, 교육으로, 훈련으로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길이요, 그가 진리요, 그가 생명이십니다. 그분이 홀로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 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앞에 나오세요. 내가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는 순간까지도 하나님, 하나님이 이 종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대해야지, 그 종이 어떤 능력을 가진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 때에만 우리는 문제를 넘어서서 불가능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움의 삶을 경험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올 줄을 아십시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아올 때 예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를 고칠 수가 있다. 예수님을 신뢰하셔야 합니다. 자, 제자들이 축사에 실패한 이후에, 귀신 쫓아내고 병 고치는 일에 실패한 이후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의 28절에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여기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조용히 물었어요. 크게 묻기에 창피했을지도 모르지요. 실패한 후 이니까. 어떤 자존심 때문에 주님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어찌하여 실패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 실패의 원인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아이가 고쳐지지 않은 이유,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제자들의 기도가 실패한 이유, 도대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자, 우리가 다시 19절을 읽어보시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원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지금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이 아이의 병이 고쳐지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믿음이 없는 세대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그리고 본문과 똑같은 기사를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보면 이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 주변에 있던 무리들에게 먼저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믿음이 없는 세대여!" 그러나 그 다음에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좀 달라요. 자, 지금 그 아이가 아파 있는 현장, 아직도 고침받지 못하고 있었던, 누워있던 그 현장에 둘러싸고 있는 막연한 구경꾼, 그 무리들 전체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오늘 이 세상이, 이 세대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곳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당신의 임재를 계시하시고, 당신의 손길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여!' 자,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예수님을 향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없었겠습니까 어느 정도의 믿음 있었겠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니예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정도의 믿음은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 가운데. 그래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주님앞에 가까이 나와서 봉사도 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겠어요 여러분들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믿음이 없으십니까 하면 과히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그대들이 실패한 이유,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그것은 믿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들에게 믿음이 적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 현장에서만은 주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을 온전히 엑서사이즈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음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 우리가 믿음, 믿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그 단어 자체가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크리스챤 사이언스라는 기독교 이단이 있습니다. 한국에는 별로 시원치 않지만 외국에는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는 크리스챤 사이언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따금씩 여행을 하다 보면 국제 공항 같은 데에 크리스챤 사이언스라는 리딩룸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기독교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기독교가 아니예요. 이 사람들이 믿음을 강조하지만 '믿음'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예요. 자기자신을 믿으라 이 말 이예요. 우리가 자신을 믿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얼마나 많은 오늘날 이런 운동들이 우리 주변에 다가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단순한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믿음은 항상 믿음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믿음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있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한계를 압니다. 나의 좌절을 압니다. 나의 절망을 압니다. 나의 죄를 압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구세주요,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앞에 나와 엎드렸고, 그 분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고, 신뢰했고, 그 분을 따라가는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휴머니즘, 인본주의와 기독교와 결정적이고도 본질적인 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을 신뢰하십니까 우리는 주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기독교인들조차도 은근히 사실은 나를 믿고 있는 경우들이 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믿는다는 단어를 전세계의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한국 교인들처럼 대표적으로 강조를 잘 하는 민족이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저 주님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합니까 잘 아시네요. 믿씁니다, 시옷자에 강조해서 말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 사실은 주님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제자들의 경험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 지금 제자들이 왜 이 축사에 실패하고, 이 아이의 병을 고치는데 왜 실패를 했을까요 저는 제자들이 과거에는 성공을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열 두제자, 70명의 제자들에게 전도하러 내어 보낼 때 권세를 주어서 내보냅니다.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어서 그들을 내어 보냈습니다. 자, 돌아와서 보고할 때 어떤 보고를 했습니다. 선생님, 굉장하데요. 우리가 기도해 보니까 병자가 낫고 그리고 귀신들도 항복하더이다.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성공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또 성공할 줄 알았어요. 더욱이 저는 이 본문의 상황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 제자들의 아주 미묘한 심리적 상태를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자, 지금 여기 이 병든 아이와 씨름하고 있는 제자들은 아홉명입니다. 자, 제자들이 모두 몇 명이에요 열 두명. 세 명은 어디 갔습니까 지금 산에 올라간 거에요.
예수님과 함께. 그런데 세명의 제자이름이 누구입니까 베드로, 야고보, 요한-다시 말해서 제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제자, 그 중에서도 제일 두목 제자는 누구였습니까 수제자는 베드로였지요 그런데 세명의 대표적인 제자가 없어진거예요. 아홉명만 남아 있었을때 그 아이를 데리고 그 아버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홉명의 제자가 다른 세 명의 제자가 없는 것을 잘됐다고 생각했을까요 잘못됐다고 생각했을까요 물론 정답은 없어요. 본문에 없으니까. 그런데 제 추측에는 이 아홉명이 아주 신이 났을 것 같아요. 항상 대표 제자들이 있으면 틀림없이 대표로 누가 기도했습니까 베드로가 기도할 것이 뻔하지요 야고보가 하던지, 요한이 하던지. 그러니까 세 명이 없으니까 우리도 한 번 뭔가를 보여주자. 베드로 너만 병 고칠 수 있느냐 나도 할 수가 있다. 딱 폼을 잡고 염려 없다고 데려 오라고 우리가 고쳐 주겠다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갈지어다. 귀신이 안 나가! 이렇게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 안 고쳐지는 거예요. 실패한 거란 말이지요. 그런데 왜 실패했느냐 저는 다분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기도한다고 말하고, 신앙적인 내용과 틀을 사용하면서도 그러나 이 아홉제자의 마음의 밑바탕에서는 자기과시, 우리도 뭔가를 할 수 있다. 그 순간이 크리스챤들이 실패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가장 강하고 생각할 때, 사실은 실패합니다. 신앙의 역설은 이것입니다. 내가 약함을 느끼는 순간,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는 순간,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약할 때가 내가 강한 순간입니다. 나의 무력을 느끼고 나의 좌절을 느끼고, 그래서 하나님, 정말 하나님 없이는 못 살구요, 주님 없이는 할 수가 없구요.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임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시는 순간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실패의 원인이 거기에 있어요. 자기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제자들이면서도 순간적으로 그 주님을 신뢰하기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도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그 순간 제자들은 보기 좋은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한해에 우리 인생의 길을 살아갈 때 우리 앞에 수다한 문제들이 그리고난제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 기억하십시오. 문제를 주 앞에 가져 나오시길 바랍니다. 나는 도울 수가 없어요. 나는 형제와 자매를 도울 수가 없어요.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형제를 도와주시기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 이제는 문제를 어디로 가지고 나와요 예수님 앞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 할 일이 뭐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셔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근데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신뢰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어떻게 증가시킬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방법. 저는 그것이 기도의 방법이라 생각해요. 기도는 우리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방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돼요. 기도 안 할수록 자기생각, 자기의지 그리고 자기의 계획, 자기의 잔꾀 그리고 자기만 의지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자, 기도할 때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첫 번째 말이 뭐예요. 하나님 아버지. 자비로우신 나의 주님. 자,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죠. 우리 이번 청지기 세미나를 할 때 첫 번째 오신 강사님이 되게 강조한 것 중에 하나가, 왜 기도하지 않는가. 교만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저는 동감합니다. 왜 기도 안 합니까. 교만하기 때문에.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 절망을 느낄 때, 자기의 한계를 느낄 때. 오 하나님. 아니 자기 절망을 느끼지 않을 때에라도 주님이 나보다 더 잘 아신다. 주님의 방법이 최선의 방법이다. 주님의 지혜만이 최선의 지혜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서 그리고 어떤 난제의 일이 내 앞에 버티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무릎을 꿇어 기도할 줄로 믿습니다. 교만하면 기도하지 못하거든요. 자, 왜 이 제자들은 쫓아 낼 수가 없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어떤 대답이었어요 마지막 절에 대답을 읽어보세요. 자, 마지막 29절입니다. 29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29절 시작. 이르시되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기도가 방법이다. 기도가 바로 이런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것을 비교하면 재미있어요. 똑같은 기사가 마태복음에도 취급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17장 21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한번 찾아보세요. 마태복음 17장 21절입니다. 웃는 사람은 빨리 찾은 사람이에요. 왜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마태복음 17장 21절을 딱 찾아보면 뭐가 나왔습니까. '없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없음' 하하. 그러나 어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은 다 사본인데 카피한 것인데, 어떤 사본에 보면 마태복음 17장 21절 없음 그러고난 외 주로 바깥에다 코멘트를 해 놨어요. 뭐라고 썼습니까. 기도가, 어떤 사본에 의하면, 기도와 금식이 아니고서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기도와 함께 뭘 강조했습니까. 금식. 기도만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금식까지 강조하신 것으로 되어있어요. 금식은 무엇입니까. 기도의 가장 강렬한 형태가 금식입니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 하루를 살면서 절대로 빼놓지 않는 것, 그것은 먹는 일이죠. 그러나 그 식사시간까지 단절하고 하나님께 매달린다. 기도의 가장 강렬한 형태가 바로 금식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이런일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이 종종 '목사님 저도 어려운 많아서 기도해 봤어요.
그런데 안돼데요' 제가 가끔 반문합니다. 금식까지 해 보셨습니까. 한 두 번의 기도가 아니라 정말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 기도의 가장 간절한 형태가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금식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 거기에서 너희는 아무것,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무것과 모든 것이란 단어가 비교되고 있어요. 영어로 읽어보면 더 재밌는데 anything, anything 염려하지 말고, everything 기도와 간구라. 이 두 단어가 재미있죠 anything, everything 하는 두 개의 단어가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염려처럼 비생산적인 것은 없습니다. 염려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더 깊은 염려 속에 빠질 것입니다. 염려를 중단하라. 그리고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라. 그렇습니다. 염려할 일이 생기셨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셨다. 염려를 붙들고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염려할 모든 것을 기도할 모든 것으로 바꾸어라.
그런데 기도만 강조된 것이 아니예요. 거기에 잘 보면 뭐라고 그랬습니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간구예요. 기도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간구하라. 더 간절히 기도하라.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결국에 여기에 도달할 수밖에 없어요. 금식까지 하게 됩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어떤 때 우리는 금식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금년 연말 연초를 보내면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금식의 도전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금년 한해 내 개인적인 내 영성 계발의 목표중의 하나가, 금년에는 금식을 좀 많이 하자. 그래서 한달에 적어도 하루 온전히 하루 이상을 금식하는데 바치자 이렇게 결심했어요. 저는 저와 함께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금식의 체험과 금식의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불가능의 문제들이 있어요. 우리의 힘, 우리의 지혜, 우리의 생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런 난제들을 뚫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경험하기 위해서 주 앞에 엎드리는 교회. 주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 초대교회의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초대교회의 능력. 기도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초대교회가 굉장히 이상적이 교회라 지금 현대교회 보다 굉장히 우수한 어떤 교회라는 상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똑같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교인 숫자도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당대의 세계에 그 세계를 흔들 수 있는 영향력과 충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 어디에 있었느냐. 금식에 있었어요. 금식에. 사도행전에 페이지마다 우리는 기도와 금식의 장이 없이 사도 행전의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기도가 세계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글랙롤이라는 미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젊은 전도자의 책을 읽고 있는데 사도행전 강해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몇일전에 책을 읽고 있다가 아주 충격적인 도전 한가지를 받았어요. 사도행전에 교회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사도 행전에 교회들은 회의보다 기도를 더 많이 했다. 회의보다 기도를 더 많이 했다. 그들은 만약 한시간 회의를 한다면 초대교회는 틀림없이 두시간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이런 얘기가 나오더라구요.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아마 두시간 회의를 했다면 한시간 정도 밖에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에 아니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두 시간 회의를 했다면 한 시간이 아니라 단10분도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형편이 아닐까. 제가 찔렸어요. 우리교회 보고하는 이야기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보고 하는 얘기로구나. 제가 이런 찔림을 받았습니다. 아, 내가 정말 기도하지 못했구나. 우리가, 우리 교회회의부터 좀 회의구조를 바꿔야겠구나.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30분 회의를 했다면 적어도 30분 이상 기도하고, 우리가 1시간 회의를 했다면 1시간 이상 그보다 훨씬 더 엎드려서 하나님 우리가 의논한 이 문제들 가운데 하나님이 도와 주시구요,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구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구요,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구요. 이런 엎드림이 있다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그리고 제 생각은 오래 전 제가 영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보았던 한 교회의 생각이 갑자기 났어요. 오래 전에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에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에 많이 보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은 제 마음속에 제일 보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뭐 같아요 여러분, 비행장에 어떤 선교사님이 저를 pick up하러 나왔는데, "이 목사님 런던에서 뭘 보고 싶으세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먼저 한 대답은 이런 대답이었습니다. "나 스펄젼 목사님 교회를 보고 싶어요" 제가 설교자라 그런지, 설교의 prince, 왕자라고 일컬어지는 이 스펄젼 목사님이 사역하던 교회는 어떤 형태일까 궁금해서 그리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 봤어요. 주일날 가봤습니다. 한 200명도 안 모여요. 찬양도 힘이 없었고 무력해진 회중. 설교도 큰 감동이 되지 못했어요. 저는 슬폈습니다. 저는 뒤에 앉아 계속 울었습니다. 어째서 스펄젼 목사님의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때 6,000명 이상의 회중들이 꽉꽉 자리를 채우던 이 교회, 아니 많이 모일 때는 10,000명 이상씩, 어떤 때는 20,000명까지 모여서 성령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으로 불타오르던 이 교회. 스펄젼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스펼전 교회와 목사님을 방문하면 목사님은 항상 이 방문객을 데리고 교회 본당이 아니라 교회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데요. 그 아래층에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랑스럽게 보여주면서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 목회의 비밀은 바로 여기 기도하는 이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나의 힘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 교회의 발전소입니다. 저들의 기도 때문에 오늘 우리의 교회는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단순히 스펄젼 목사님의 탁월한 설교만을 하나님이 쓰신 것이 아니라, 그 기도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그들은 한때 그 교회의 황금기를 누리고 영국을 변형시키는 변혁의 초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펄젼 목사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어떤 전기 하나를 읽어보니까 제 눈에 갑자기 최근에 그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다시 그 전기를 읽어보았어요. 스펄젼 목사님이 떠나간 후에 교회는 비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심상치 않은 변화중의 하나가 기도하는 운동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기도하는 그룹이 없어졌어요. 저는 만약 기도하는 성도들이 기도로 지켰더라면 그 교회는 지금도 능력 있는 사역을 계속 하리라고 믿습니다. 기도가 사라질 때 하나님은 영광을 그 교회에서 거두신 것입니다. 저는 금년 한해동안 저와 더불어 함께 사역할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 그리고 특별히 제직들이 먼저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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