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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오셔야 합니다 (막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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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독일, 현재 독일은 프러시아 제국이라고 불리워졌죠 프러시아 제국의 프레드릭이라는 대왕이 어느날 시골길을 행차 하셨습니다. 왕의 행차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한 노인이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경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먼저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자기를 몰라보는 이 노인이 궁금해서 노인은 도대체 누구시요 노인은 도대체 누구시요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노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왕이요. 그렇단 말이죠. 나는 왕이요. 그래서 어느 나라 왕이시요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 자신의 왕국의 왕이요. 나는 나 자신의 왕국의 왕이요. 그때서야 알아차림 대왕이 빙그레 웃으며 다시 질문하기를 그래 나라살림은 잘 되시는지요 그래서 노인이 대답하기를 그것이 문제요. 이때 대왕께서 또 말하기를 노인장이나 나나 꼭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는 로마에서부터 임명 받은 팔레스타인의 소위 분봉왕이라고 일컬어지던 헤롯 대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소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일 때는 헤롯 필립1세가 그 땅을 통치하고 있었고 또 그 당시 로마에는 매우 강력하고 현명한 군주였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강력한 통치자들의 통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민중들은 아직도 새로운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왕과 같은 자로 오시리라고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 였습니다.
구약 예레미야 23장 5절에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잘 들어 보십시오.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 이렇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그들을 통치하는 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 그들에게 진실로 공평과 정의를 약속할 수 있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던 그날 이른 아침부터 예루살렘 성에는 커다란 흥분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기대는 결코 잘 못된 것은 아니 였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절과 5절에 보시면 똑 같은 오늘 본문의 기사가 마태복음에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인 것을 말하면서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한다라고 선포되고 있습니다. 평화와 그리고 진정한 의를 약속할 수 있는 왕에 대한 기대 이 기대는 바람직한 기대였고 이것은 오늘 우리도 그런 기대를 안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세상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또 우리의 살림살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지도자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도정을 맡으신 지사님도 여기 앉아 계시지 만은 이러한 지도자의 존재는 매우 소중한 것이고 성경은 언제나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를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는 한번도 무정부적인 그러한 주의를 지지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또 다른 왕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통치자와는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들이 외면적인 살림살이를 다스리는 왕이라면 성경에 약속된 왕은 우리의 내면까지, 우리의 존재를 다스릴 수 있는 왕, 그것은 일시적인 통치자가 아니라 영원한 통치자, 부분적인 통치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통치자로써의 왕, 즉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정말 뒤바뀌고 그리고 개인의 삶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되고 또 우리의 역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안목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의 권위 앞에 굴복하고 그리고 그분을 왕 중의 왕으로 King of Kings. 그리고 내 내면과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왕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때 개인도 바뀌고 사회도 바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나라로 바뀌고 내 안의 삶도 그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내게 왕으로 오시는 그분을 왕으로 영접할 수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질문의 대답을 찾기 위해서 이천년 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맞이했으며 또 어떤 태도로 맞이 했어야 했었는가를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게 오셔야 할 왕, 이리 민족 가운데 오셔야 할 왕, 그분을 어떻게 영접하고 맞이해야만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왕의 계획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이신 그 분의 계획 계획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자,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우리가 성경 속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우연한 행진의 한 결과가 아니라 이것은 계획된 하늘의 섭리의 행진이 였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다라고 말합니다. 옛날 구약의 유월절에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었던 어린양과 같은 존재로 그는 세상의 죄를 구속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더라고 약속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 하신 때가 정확하게 유월절을 앞둔 엿새 전에 그 분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때를 Gods timing, 그 하나님의 타이밍을 그때를 기다렸다가 정확한 그 때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입성하시기 위해서 그는 먼저 감람산 쪽의 산을 오르십니다. 이 산 마루에는 두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벳바게, 또 하나는 베다니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감람산의 등선에서 불과 100m 떨어진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다. 자, 거기에 오르신 예수님은 이제 한 마리의 나귀를 찾고 계십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왜 하필이면 여기서 나귀 새끼가 등장했을까요 이것은 구약 예언 즉,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였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520년 전 구약성경의 스가랴서 9장 9절에 보면 예수님의 이 사건이 있기 520년 전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찌어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바로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타셔야 할 나귀가 정확하게 어디 있었는지 예수님은 알고 계셨어요. 이 간단한 에피소드속에서 그의 범상한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알고 있었습니다. 자, 3절에 보시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그러니까 나귀 끌고 오너라 하니깐,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면 어떻게 해요 그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바로 그 분 자신이 나귀의 주인 그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한가롭게 놀고 있었던 나귀한 마리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나귀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그는 인생의 주인,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과 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인 그리고 심판의 주인이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4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느냐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말대로 하매 뭐라 그랬을까요 주가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이라니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분이 메시아요 약속된 메시아요 그 주인이 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것은 하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인 것임을 주목해 보십시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귀 한 마리를 쓰실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이라면 그분이 만물의 영장인 여러분과 저를 향한 계획이 없겠어요 우리의 삶이 하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 지는 보람찬 인생을 살려면 내 인생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인생의 길을 가게 된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다니다가 오늘 이런 인생의 길에서 서있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을 갖고 오늘 이 땅에 나를 보내셨고 나는 여기서 살고 있다. 인생의 성패는 단순히 세속적인 어떤 성공 다른 사람보다 더 잘되는 그 정도의 인생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계획, 그 계획 속에서 오늘 하루 하루의 삶이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왕 되신 하나님 내 인생에 왕이라고 선포하신 하나님 그 분의 의도대로 내 인생이 쓰여지고 그리고 내 삶이 다하는 날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그 중요한 첫번째 Step은 예수를 왕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왕은 나를 향해서 Plan을 갖고 계시다!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다! 내가 온 것은 내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니라 그 분은 내 삶이 허무와 갈등에 가득 찬 고뇌에 찬 인생을 허우적거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왕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바뀌고 새로워지는 첫번째 step인 것입니다. 둘째는 왕의 구원을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왕의 계획을 믿으시고 둘째론 그 왕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구원, 그 구원의 뜻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종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 이였습니다. 그를 왕으로 기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자, 본문의 9절 마가복음 11장 9절을 다시 다같이 읽겠습니다. 11장 9절 시작,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아마도 이 찬송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들의 입술에서 먼저 순수한 아이들에 입에서 이 찬송이 터졌을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히브리말로는 이것을 호시안나! 호시안나! 한번 해 보십시다. 호시안나! 원어 그대로 말하면 호시안나! 뜻은 구하옵나니 기도하옵나니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영어로 Safe us now! 바로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요. 이것이 바로 호시안나라는 단어의 뜻이 였습니다. 우리는 이 찬양 속에서 이 말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에 대한 메시아로서의 기대 그 구원에 대한 기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들은 구원을 기대했고 그리고 그들이 구원을 기대한 것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그들이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구원에는 다소간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을 경험하기 해서는 성경이 제공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구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에게 걸었던 메시아로서의 기대는 영적인 메시아 보다도 다분히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아는 로마정권을 때려부수고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인 자유, 이것은 정치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기대한 그 자체를 우리는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걸어야 할 기대는 단순한 정치적인 자유 이상의 것 이였습니다. 사실 예수가 붙잡히고 체포되고 십자가로 갔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높이기 시작했을 때 그 당시에 그 땅에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사람들은 정치적인 갈등을 느끼고 예수에게서 정치적인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저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우리의 입지는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분은 체포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왔던 나사렛 예수 그러나 그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런 유명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염려마시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관련이 없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의 나라는 세속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휠씬 더 중요한 나라입니다. 휠씬 더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나라입니다.
즉, 살림의 외부, 표면적인 것만을 다스리는 그 분이 아니라 그 분은 인간의 존재의 내면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왕들의 마음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왕 그래서 그분은 왕 중의 왕 King of kings. 그 분은 어떤 정치나 경제나 외적인 상황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깊숙한 것 우리의 의식,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내 좌절과, 내 부조리와, 내 절망을 아시고 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바꾸어 주실수가 있는 분. 인간의 내면의 깊은 것으로 시작해서 이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왕. 그래서 온 세계의 모든 나라들 속에서 높임과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왕. 왕 중의 왕.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예수님의 말의 뜻을 빌라도나 그 당시의 사람들, 민중들이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질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그 분이 오시면 당장에 로마를 박살 낼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정치적인 메사야로 오셨다면 그 분은 탱크와 군마를 거느리고 타고 당당하게 이성에 입성해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성하시는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종의 코미디예요. 코미디. 나귀 타고 들어오시는 모습 Ducky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그들이 일상생활에 쓰면서도 그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동물이 나귀였습니다. 그것은 나귀 중에서도 건장한 나귀가 아니라 뭐예요 나귀 새끼, 새끼 나귀. 이 새끼 한 마리, 나귀 타고 터덜 터덜 들어오시는 예수상을 한 번 연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코미디 중에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 주엔 어떤 의미가 있을 까요. 자, 나귀를 타신 이유를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것이다. 그는 겸손한 왕, 그래서 예루살렘 도성에 뛰어 노는 가장 어린아이 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무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권위가 있는 사람도 권세가 없는 사람도 지식 있는 Intelligentsia도 무식한 사람도 누구나 쉽게 친근히 다가설 수 있는 겸손한 예수.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신 예수. 누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희망을 약속하는 예수. 그는 단순히 정치적인 압박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아니라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 가운데 본질적인 문제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그렇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압박에서 우리를 자유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보다 더 깊숙한 인간의 문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약속된 구세주 그래서 그 분이 마리아에게서 잉태 되었을 때 천사는 그 분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Jesus! 예수와, Jesus! 예수와. 예수란 말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오늘 나를 방황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 내 인생의 방황, 내 인생의 수수께끼 같은 어려움, 갈등 내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삶의 존재의 갈등 그것은 결국 죄 때문입니다. 이 죄로부터 나를 해방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는 분. 바로 그분은 예수.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그 분만이 죄로부터 우릴 용서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다. 여러분 성경이 약속하는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감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왕의 구원을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왕 되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뒤바뀌기 위해서는 세번째로 왕의 눈물을 이해할 수가 있으셔야 합니다. 왕의 눈물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자, 오늘 마가복음 11장은 자 호산나 찬송 속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 이런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직전에 한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에피소드가 마가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본문의 사건의 계속되는 진행을 이젠 누가복음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9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9장입니다. 그리고 41절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 41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자, 누가복음 19장 41절 직전에는 마가복음과 동일한 사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이 누가복음 19장 예를 들어 38절에 보시면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호산나 찬송의 내용이 여기에도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1절에 보시면 그런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사건 직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일어났던 한 에피소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41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네 가까이 오시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 아마도 이것은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일 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찬송하는데 왕으로서 그 분을 환영하는데 예수님은 이상하게 우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여러분 이해하십니까 자, 예루살렘 성에 다가오시면서 그가 우시는 모습 속에 정치적 메시야의 기대를 걸고 흥분한 군중들의 환호성 호산나! 호시안나! 호시안나! 찬양하는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감람나무 이 감람산 입구를 돌아서시면서 예수님은 아마도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그 다음절을 보십시요. 42절에보시면, 누가복음 19장42절. 다같이 한 번 읽어요.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는 숨기웠도다.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부수고 그리고 그들을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줄 수 있는 예수상을 예수에게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폭력의 힘을 가지고 오신 예수가 아니라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너희들이 평화의 의미를 알았더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지금 너희들의 눈에는 내가 숨기워 져있다. 예수를 예수로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민중들. 그리고 그 분이 정말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참된 평화, 정치적인 자유이상의 본질적인 자유, 인간 존재의 자유, 실존의 자유, 나를 참으로 자유케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이런 놀라운 샬롬의 주님, 평강의 주님, 내가 너희들의 눈에는 내가 가리워져 있구나. 예수상. 참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 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다음절에 보시면 43절에 날이 이를지라 한 날이 올 것이다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부터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다가올 운명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자, 지금은 예수를 환영하고 있는 군중들 예수에게서 지금 이땅에서의 당장의 어떤 이득과 이해관계를 기대하면서 환영하고 있는 그 군중들의 모습속에서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맞지않는 예수임을 알았을떄 불과 닷새후에 엿새후에 호시안나! 찬양하던 이 군중들이 예수를 향해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이렇게 폭도로 돌변할 군중들의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거절한 이 백성들, 그리고 예수를 거절한 예루살렘 도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A.D 70년 로마의 타이토스 티도 장군과 황제가 영도하고 있는 로마의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언한 그대로 예루살렘의 도성을 잔인하게 파괴했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돌 하나 돌 위에 남기지 않고 완전히 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에언은 적중했습니다. 이 다가올 심판 왕 되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구원을 거절하고 멸망할 도시의 운명. 그리고 이 도시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호시안나! 이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그 분의 눈물을 만나게 됩니다. 얼마후에 잠시 후에 그는 겟사마네 동산에 들어가서 내일 아침이면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그 분은 또한번 우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사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을 그가 심한 통곡으로 우셨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한 통곡 통곡의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다가올 십자가의 고통이 괴로워서 흘리신 눈물이 아닙니다. 자, 예수 믿지 못하고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그 운명을 슬퍼하시며 그는 우십니다. 구원 받아야 할 영혼 예수 앞에 돌아와서 새로운 삶을 살고 하늘의 평화를 맛보고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할 그 민중들의 운명을 내다보시면서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을 향해서 흘리는 애타는 눈물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십니까 그 눈물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두고 흘리셨던 그 눈물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우리를 곤고히 여기시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시던 예수님의 눈물 그 눈물 떄문에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분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길 바랍니다. 그의 눈물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그의 눈물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입니다. 그의 눈물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였습니다.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눈물을 흘릴 차례입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고통 속에 사는 이유 아직도 우리가 충분한 눈물을 흘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을 위해서 충분히 눈물을 흘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의 민중들의 고통의 행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 한 분이 꽤 괞찮은 목사님이신데 쫒겨나셨어요. 쫒겨 난 이유가 뭐냐하면 이 분이 지나치게 설교가 기독교의 초보적인 메시지 예수, 복음, 십자가 이런 초보적인 메시지만 주일마다 계속한다 아주 피곤하다 듣기싫다. Sick and tired! 그래서 목사님을 쫒아냈어요. 나도 쫒겨날지 모르죠. 자, 그런데 얼마후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해서 오셨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새로오신 목사님도 전임 목사님과 거의 비슷한 예수, 십자가, 복음, 똑같은 메시지를 증거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쫒겨 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상한 사실 이였습니다. 옆에서 이 사실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교회 교인들을 붙들고 이런 질문을 했대요. 난 당신교회 사람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오. 당신들이 옛날 목사님을 사직시킨, 사임시킨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기독교의 초보 예수 복음 십자가 그 메시지를 증거한다고 해서 사임 시켰는데 보시오. 새로 오신 목사님도 똑같은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그 교회 교인 하나가 이러한 대답을 했어요. 맞습니다. 새로 오신 목사님도 꼭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더군요.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가 달라요 새로 오신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를 전하면서 우시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우리는그 분의 눈물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눈물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물이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울어야 할 시간입니다. 아직도 안타까운 민족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아직도 예수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거리 속에 수많은 우리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우리가 울면 민족이 살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거두리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주변의 안타까운 우리 가족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신 때가 언제 였습니까 이 시대는 우리의 눈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눈물에 대한 감격 속에서 내 눈에 눈물이 흘려지는 날 우리 민족은 치유될 것입니다. 새로워 질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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