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로 아들을 보내었더니 (막12:1-12)
본문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이 땅에서 지속되는 한 이 성경이라는 책은 인류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종종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도 이 성경이라는 책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이면서도 가장 읽혀지지 않는 책은 아닐까 하는 심각한 의문이 있습니다. 가장 익숙한 책이면서도 가장 생소한 책. 그것이 바로 성경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 성경에는 뭐가 들어있을까요 그 떄 한 꼬마가 손을 번쩍들더니 대답하기를 네. 우리 형 성경 안에는 애인 사진이 들어 있어요. 이런 대답을 하더랍니다. 성경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요 성경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저는 이 성경이라는 책을 간단한 단어로 우리가 성경책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면 성경은 관계의 책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관계의 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관계의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규티를 할 때 아침마다 일어나서 성경보고 묵상할 때, 큐티를 할 때 우리들의 묵상에 있어서 두 가지 피할 수 없는 빼놓아서 안 될 두 가지 주제가 있다면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사람이죠. 이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둘째는 이 본문이 사람에 대해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반드시 두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가 있다면 하나님, 인간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열어 보면 우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고장이 생겼다, 문제가 생겼다, 이 성경이 누누이 강조하는 진리죠. 그것이 바로 죕니다. 죄!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찾아오신 화목자요, 중보자로 찾아오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 초점입니다. 소위 Ultimate Focus다! 궁극적인 초점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흔히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 불려지던가, 그렇지 않으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라고 일컬어집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본문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린 성경의 주제별 접근이 가능합니다. 성경의 가장 위대한 주제 세 가지 뭐라 그랬어요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인간, 그리고 세째는 예수 그리스도. 자, 우리가 본문의 비유를 이렇게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얘기해 주고 있을까요 본문의 비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자, 본문이 시작되는 마가복음 12장 1절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12장 1절 다같이요. 시작!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네, 여기에 한 사람이 등장하죠. 한 사람! 이것이 저는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그리고 농부들에게 이 포도원을, 아름다운 포도원을 세로 주고 먼 타국으로 떠났다! 저는 바로 이 한 사람의 역할 행동 속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하시는 분이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나님의 소위, 속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첫째로, 이 비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 그 분은 아주 관대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관대하신 하나님. 자, 여기 포도원을 만들었어요. 아마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이 주인은 여러가지로 애를 썼을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포도원을 잘 아름답게 만든 후에 그것을 거의 선물로 주었습니다. 물론 여기 세로 주었다고 했습니다만은 2절에 보면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얼마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 단어에서 소량 지극히 적은 얼마라는 뜻이예요. 그래서 이건 꼭 뭐 돈이 필요해서 받은 것이라기 보다는 이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냐 소위 ownership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적인 것이고 이 포도원은 거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포도원은 우리의 삶의 마당, 삶의 조건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아름다운 삶의 조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우리가 야고보서 1장 17절에 보시면 각양 좋은 은사와 그리고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왔다. 다시 말하면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졌다. 우리의 생명, 또 아름다운 공기, 하늘, 우리가 숨쉴 수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 다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였습니다. 우리가 창세기에 읽어보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이 온 우주를, 만물을 창조할 때 인간은 몇째 날 지어졌습니까 너무 유치한 질문이라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자, 인간은 몇 째날 지어졌어요 제 6일 엿새 날 지어졌습니다. 만약 사람이
둘째 날이나,
셋째 날이나,
넷째 날쯤 지어졌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우선 거의 생존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불편한 생존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맨 나중에 하나님이 모든 다른 만물들을 지어 놓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눈을 뜨고 기지개를 펴고 에덴의 동산에서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메시지가 뭐예요.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Gift로,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예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포도원, 우리 삶에 마당을 준비하고 그것을 선물로 주신 주인 같으신 하나님, 여기 관대한 주인 같으신 하나님, 옛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그 당시에도 유대인 가운데도 아주 부유한 상인들 가운데 파이어니어 스리핏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바다 건너편으로 무역을 위해 진출하고 있었어요.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농장을 거의 무료로 자기가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의뢰하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런 사람들 처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를 믿어 주시고 이 모든 삶의 조건을 선물로 주셨다. 여러분 믿지 않는다면 맡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지 않는 대상에게 어떻게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종종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가지는 콤플렉스 중에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믿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 하십시요.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나를 믿고 계셔요. 그 증거가 뭐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거예요. 내 목숨도 맡겨 주시고, 내 재능도 맡겨 주시고, 내 탤런트도 맡겨 주시고 내 삶의 조건도 맡겨 주셨다. 그만큼 하나님은 나를 신뢰하고 내 인생을 내게 맡겨 주신 하나님, 그토록 관대하신 하나님, 그래서 이 가스펠송의 찬양의 의미는 옳습니다. God is so good!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인 것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 관대하신 하나님,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의 비유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예요. 인내하시는 하나님. 자, 타국으로 떠난 이 주인은 때가 이르렀을 때 농부들에게 소출 얼마를, 소량의 소출의 이익을 받고져 종을 보냈습니다. 자, 그랬더니 자, 이것은 어떤 이익을 위해서라기 보다도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오너쉽의 확인이다. 소유주가,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일종의 행위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이 포도원을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3절 다같이 시작!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네, 저희가 종을 잡아서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겠어요 네, 나 같으면 이 순간에 어떤 강력한 조처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 보시면 또 어떻게 했어요, 이 주인은. 다시 4절에,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이번에는 또 다시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절에 보시면 주인은 또 어떻게 했습니까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여러분 이 주인의 인내심을 보십시오. 이 주인의 Patient! 이 주인의 인내, 이 주인의 오래참으심. 이 주인의 엄청나게 오래참을 수 있는 인내심. 여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선물들을 사용해서 주의 뜻을 이뤄가며 살도록. 그러나 나는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혹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또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또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이런 하나님의 뜻을 촉구하기 위해서 보내신 종들의 메시지 앞에 귀를 막고 때로는 그 종들을 핍박한 우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 다른 종을 보내어 계속적으로 나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토록 인내하시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해서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기만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는 참아요. 그는 인내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의 인내는 무한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어느 날 그의 인내가 종결에 도달하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하십니다. 9절의 말씀 9절. 우리 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6절 이하에 보면 마지막에는 자기의 아들마저 보내었지만 그 아들까지 죽여버린 이 사람들. 9절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포도원 주인이라면 이럴 땐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지 않겠느냐 진멸의 순간, 진노의 순간, 마침내 심판의 순간은 도래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시고, 그리고 이 선물을 통해서 복된 삶을 누리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창조주의 기대를 저버리고 우리의 역할, 우리의 반응, 우리의 응답이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일 때 우리는 마침내 엄정한 그의 심판 앞에 직면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심판을 준비하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본문의 비유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자, 우리가 본문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첫번째 질문을 던졌어요. 본문의 비유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자, 이제 두번째 큰 질문. 본문의 비유 속에서 사람은 어떤 존잴까요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우선 인간은 매우 이기적인, 그리고 너무나 이기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 하나님은 이 포도원을 포함해서 이 모든 것을 선물로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들는 맡은 자에 불과합니다. 맡은 자. 옛날 말로는 청지기예요. 스튜어드! 요즘 현대적으로 말하면 매니저! 매니저, 우리는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그 얘기는,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누구실까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나에게 생명도 맡겨 주셨고,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맡겨 주시고, 내 재능도 맡겨 주시고 돈도 맡겨 주시고 시간도 맡겨 주시고. 나는 맡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청지기의 탈선, 매니저의 탈선은 언제부터 시작이 됩니까 그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음모를 시작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 이것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나타나 있는 장면이 바로 7절입니다. 7절 우리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에 7절. 다같이 읽어요. 시작!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거기다 언더라인 해주세요. 우리 것이 되리라 누구꺼 우리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것이 우리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끊임없이 내 것으로 착각하고 싶어하는 것. 아니 알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선포하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예요.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유명한 가르침, 비유가 바로 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나세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자, 어떤 농부가 부자농부가 봄에 씨를 뿌렸어요. 열심히 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땀을 흘려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자 가을이 가까워집니다. 그 해 가을소출이 풍성할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농부는 어떻게 했어요 야, 현재 가지고 있는 이 곡간으로는 이 곡식을 다 수용할 수 없겠다. 그래서 곡간을 넓히는 개조작업을 착수했습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드디어 그는 넓혀놓은 곡간마다 곡식을 가득가득 채워놓은 다음에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이런 독백을 시작합니다. 내가 내 물건을 어디다 쌓아 둘꼬. 내 곡식을 어떻게 할꼬. 맞다. 내가 넓혀 놓은 곡간마다 내 물건을 가득가득 쌓아두리라. 그리고 나는 내 영혼에게 이르기를 내 영혼아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여러분,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세요 이 부자의 독백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부자의 독백가운데 제일 많이 강조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무슨 단어일까요 나라는 단어예요. 1인칭 대명사예요. 혹은 소유 대명사, 내 물건, 내 곡식, 내 곡간, 내 물건을 내 곡식을 어떻게 할꼬. 그리고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기를 my soul!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기를. 계속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날 밤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이 부자에게 제일성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나 같으면 어리석은 놈아! 그럴텐데요. 하나님은 참 신사적으로 어리석은 자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오늘밤에 네가 네 거라고 주장하는 네 영혼을 내가 가져가리니 그러면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이 비유 속에 핵심은 뭐예요 비유의 핵심은 뭡니까 이것은 오너쉽의 문제예요. 오너쉽! 소유권의 문제예요. 누구 거냐. 누구 거냐. 여러분의 목숨 누구 거라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의 남편 아내 누구 겁니까 자녀 여러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재산 여러분 거라고 생각하세요 한순간에 날라가 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만 이 세상 떠나라 그러면 빈손들고 와야 해요. 하나도 내 것이 없어요. 우린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종종 이 오너쉽을 소유권을 확인하기 위해서 당신의 종을 보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를 내라. 그게 뭔 줄 아세요 세가 그것이 헌금이예요. 여러분 교회 강단에서 종종 축복의 메시지가 선포되면 우린 얼마나 흥분합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고자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축복 받고 싶지 않으신가 보네요.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괜찮아요. 아멘 한다고 하등에 잘못 없어요. 그 축복을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아멘 하는 자는 받아 누릴지어다. 아멘.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제가 만약 메시지를 바꾸어서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의 반응은 어떨까요. 나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것을 축복했으니 이제 네 자신을 나에게 주겠느냐 헌신의 문제예요. 헌신! 네 몸뚱아리 내 것이다, 내게 드려라. 네 시간 내 것이다 이젠 나의 일을 위해서 나의 영광을 위해서 좀 드려라. 우리는 헌신까지는 어느정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헌신이라는 것도 심각한 문제예요.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줄 모르니깐 헌신까지는 별로 괜찮은데 갑자기 목사가 강단에서 헌금을 말하면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교인이 있어요. 사실 저는 뭐 헌금 설교 별로 안하는 사람입니다만은 여러분도 들으시다시피 어쩌다가 한마디하면 괜히 흥분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성경이 헌금을 강조할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오너쉽의 문제예요. 십일조, 십일조에 대한 가장 무서운 착각은 십분의 일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께 드려야 한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오해예요. 아닙니다. 십분의 일만 주님의 것 아니예요. 십분의 십 다 주님의 것이예요. 다 주님의 건데 그 중에 십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드림으로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제가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그 고백이예요. 그 고백.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주일날은 열심히 참석합니다. 내 피곤한 스케줄 가운데도 주일날 아침에 와서 한 번 드리는 예배 목사님 얼마나 힘든 건 줄 아십니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헌금도 합니다. 요새는 십일조도 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 목사님 이만큼 하면 됐으니깐 여기까지만 좀. 여기까지만 봐 주시고 더 이상은 요구하지 마십시요. 이것이 아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맨탈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이 모습 뒤에 숨겨진 우리들의 이기심. 이것이 하나님의 것임에 분명하고도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이기심의 정체를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이기적인 존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비유는 인간이 단순히 이기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더 나아가서 사람이 반역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반역적인 존재 자, 적은 소량의 세를 받기 위해서 보내어진 이 종들을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3절 다같이 읽어보세요. 3절 다같이 시작!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네,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또 4절엔 어떻게 했습니까 4절,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여러분 이것이 반역이 아니예요 반역. 주인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더라. 여기서 반역은 극점에 도달합니다. 점점 더해져요. 3절엔 때렸다가 4절엔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가 점점 더 크레센도 자꾸만 올라가. 계속. 핍박의 도를 더하고 있는 능욕의 도를 계속하고 있는 이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요.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언제.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만물의 창조의 주님이시요, 구원의 주님이신 그 하나님을 인생들이 바라보도록 보내주신 메신저를 대하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요.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복음의 메신저를 대접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전 세계 도처에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쓰는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열어보면 히브리서는 그래서 이런 말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옛적에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권고하셨습니다. 이 수많은 종들을 보내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고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반역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반역의 무서운 음모는 우리 안에도 도사리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 반역적인 존재, 이것이 죄를 범한 우리 안에 숨어있는 죄성의 정체인 것을 아십시요.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적인 존재의 모습. 이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그러나 세번째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비유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살펴 보았습니다. 비유 속에 나타난 사람을 살펴 보았습니다. 세번째
는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본문의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네, 저는 본문의 클라이막스, 절정이라고 생각해요. 13귀절, 6절입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6절시작!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아주 극적인 표현은 이런 부분이죠. 오늘 말씀의 제목인데요. 최후로 아들을 보내며 최후로 아들을 보내었다.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최후로 아들을 보내었더니. 저는 이 비유 속에서 예수는 다른 종들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종이 아니라 그 분은 아들이시다.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종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질은 종하고는 구별됩니다. 그는 아들이십니다.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 받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30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지내시다가 공적 생애를 시작하실 때 그는 요한에게 나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오셨습니다. 그가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이런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뭐라구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그 분은 사랑받는 아들이예요. 이슬람교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선지자와 같은 차원에서 또 하나의 선지자로만 보고 있습니다. 종으로만 보고 있는 거예요. 아니예요. No! 그 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비유 속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받는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할 사실이 오늘 예언 돼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되어 있어요 7절과 8절에 말씀이죠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7절, 8절 다같이.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여러분 지금 이 얘기 누가하고 계세요 예수님. 그리고 이 얘길 하신 시점은 이제 십자가를 얼마 며칠 앞에 둔 그런 시점이였습니다. 이 말씀을 말씀하시던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세요. 예수님의 심정. 자, 이 비유를 말하면서 예수님은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잘 들어보세요. 자, 농부들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저가 상속자니 저 아들을 죽이자. 그래야만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차지하겠다. 8절, 이에 잡아서 그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버렸느니라. 이 말씀을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였을까요 틀림없이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는 며칠후에 자기 자신이 포도원 바깥에 성문 밖 저 골고다의 언덕 갈보리에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던질 그 광경을 보시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고난을 모르고 당할 때는 그냥 모르고 어느 정도 경험할 수가 있어요. 정말 힘든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그 고통을 알고 경험할 때, 내 앞에 닥쳐올 고통의 그 예리한 아픔을 내가 친히 알았을 때, 그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침뱉음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그리고 슬픔의 길 그 비하톨로사이의 고통의 길을 그가 쓰러지시고 일어서시고 다시 쓰러지면서 걸어가야 할 그 분의 모습. 그리고 양 손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그가 못 박히시고 신음하실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 이 말씀을 말씀하시던 주님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셨을까. 그는 이 고난을 알았습니다. 고난의 무게를 알았고 고난의 깊이를 알았고 이 고난의 예리함을 알았고 그 상처의 아픔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고난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실 분. 이것이 비유 속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이십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걸 더 나아가서 그 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분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예언되어 있습니까 마지막 두 구절. 10절과 11절. 같이 읽어볼까요 10절과 11절 다같이 시작!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아멘. 여기 놀라운 예언이 있어요. 놀라운 예언.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누구 가리키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 마치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버림을 당하실 그 분. 십자가의 버림을 당하실 그 분. 그러나 그 분은 버려지는 분으로 거절당하는 분으로 그 분의 인생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이번에는 무슨 돌이 된다구요 모퉁이 돌이 된다. 코너스톤, 한 지붕을 한 건물을 견고하게 세우는 모퉁이 돌, 역사를 세우고 구원 받은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우는 위대한 기초가 되기 위해서 다시 부활하신 그 분, 새로운 생명을 주고 사람들을 용서하고 인생을 다시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다시 부활하시고 찾아오신 놀라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여기서 보여 줍니다.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11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뭐가 기이하겠어요 죽은 줄 알았던 그 분이 다시 부활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놀라운 주님으로 나타나실 그 분 이것은 실로 기이하도다. 부활의 놀라움, 부활의 신비, 그 부활의 미스터리, 부활의 Wonder, 그 놀라움이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선포되고 있는 이 모습을 보십시요, 이것은 정말 기이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예언의 성취일까요 시편 말씀의 인용이죠. 시편 118편 22절과 23절의 예언의 성췹니다. 한번 직접 오리지날 말씀을 한번 읽어보세요. 시편 118편 22절입니다. 시편 118편 22절입니다. 시편 118편 22절 자 찾으신 분은 찾을 희망이 없는 분들은 그냥 그대로 계시고 시편 118편 22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인한 바로다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이예요. 지금 근데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정말 중요한 것은 24절입니다. 그 다음 절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예요. 다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 날은 어떤 날일까요 부활의 날. Easter Sunday. 부활의 날. 그 부활의 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날에 다시 일어나시고 부활하시사 우리의 부활 우리의 구원이 되신 놀라우신 그 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세 할렐루야 이 위대한 부활이 이 예언 속에 나타나고 있는 장면을 보십시요. 드디어 오순절날 주님은 오셨고 그리고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의 현장에서 사도들은 바로 정확하게 이 말씀을 또한 번 인용합니다. 우리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찾아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을 찾아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 11절입니다. 같이 읽을까요. 사도행전 4장 11절 다같이 시작.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자 드디어 사도들은 여기서 이 건축자의 버린 돌 그리고 모퉁이 돌이 되신 그 분이 누구인가는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무슨 말로 시작되었어요. 이 예수는 이 예수가 예수가 버린 돌이셨으나 이제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아 이 예수가 네 그러면서 그 다음에 12절에 우리가 잘아는 놀라운 말씀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12절 다같이 한 번 읽어봐요. 다같이 시작.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모퉁이 돌이 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 분이 살아 나셨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바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그가 사셨으므로 우리도 살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고난의 골짜기 같은 인생을 승리롭게 지금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고난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분을 따라 가보십시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사람이죠. 이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둘째는 이 본문이 사람에 대해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반드시 두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가 있다면 하나님, 인간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열어 보면 우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고장이 생겼다, 문제가 생겼다, 이 성경이 누누이 강조하는 진리죠. 그것이 바로 죕니다. 죄!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찾아오신 화목자요, 중보자로 찾아오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 초점입니다. 소위 Ultimate Focus다! 궁극적인 초점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흔히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라고 불려지던가, 그렇지 않으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라고 일컬어집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본문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린 성경의 주제별 접근이 가능합니다. 성경의 가장 위대한 주제 세 가지 뭐라 그랬어요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인간, 그리고 세째는 예수 그리스도. 자, 우리가 본문의 비유를 이렇게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얘기해 주고 있을까요 본문의 비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자, 본문이 시작되는 마가복음 12장 1절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12장 1절 다같이요. 시작!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네, 여기에 한 사람이 등장하죠. 한 사람! 이것이 저는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그리고 농부들에게 이 포도원을, 아름다운 포도원을 세로 주고 먼 타국으로 떠났다! 저는 바로 이 한 사람의 역할 행동 속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일을 하시는 분이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하나님의 소위, 속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첫째로, 이 비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 그 분은 아주 관대하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주 관대하신 하나님. 자, 여기 포도원을 만들었어요. 아마 포도원을 만들기 위해서 이 주인은 여러가지로 애를 썼을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포도원을 잘 아름답게 만든 후에 그것을 거의 선물로 주었습니다. 물론 여기 세로 주었다고 했습니다만은 2절에 보면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얼마라는 단어는 본래 희랍어 단어에서 소량 지극히 적은 얼마라는 뜻이예요. 그래서 이건 꼭 뭐 돈이 필요해서 받은 것이라기 보다는 이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냐 소위 ownership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적인 것이고 이 포도원은 거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포도원은 우리의 삶의 마당, 삶의 조건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아름다운 삶의 조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우리가 야고보서 1장 17절에 보시면 각양 좋은 은사와 그리고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왔다. 다시 말하면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졌다. 우리의 생명, 또 아름다운 공기, 하늘, 우리가 숨쉴 수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 다 선물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였습니다. 우리가 창세기에 읽어보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이 온 우주를, 만물을 창조할 때 인간은 몇째 날 지어졌습니까 너무 유치한 질문이라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십니까 자, 인간은 몇 째날 지어졌어요 제 6일 엿새 날 지어졌습니다. 만약 사람이
둘째 날이나,
셋째 날이나,
넷째 날쯤 지어졌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우선 거의 생존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불편한 생존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맨 나중에 하나님이 모든 다른 만물들을 지어 놓으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지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눈을 뜨고 기지개를 펴고 에덴의 동산에서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메시지가 뭐예요.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Gift로,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예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포도원, 우리 삶에 마당을 준비하고 그것을 선물로 주신 주인 같으신 하나님, 여기 관대한 주인 같으신 하나님, 옛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그 당시에도 유대인 가운데도 아주 부유한 상인들 가운데 파이어니어 스리핏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바다 건너편으로 무역을 위해 진출하고 있었어요.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농장을 거의 무료로 자기가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의뢰하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런 사람들 처럼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 주시고, 우리를 믿어 주시고 이 모든 삶의 조건을 선물로 주셨다. 여러분 믿지 않는다면 맡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지 않는 대상에게 어떻게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종종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가지는 콤플렉스 중에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믿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 하십시요.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나를 믿고 계셔요. 그 증거가 뭐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거예요. 내 목숨도 맡겨 주시고, 내 재능도 맡겨 주시고, 내 탤런트도 맡겨 주시고 내 삶의 조건도 맡겨 주셨다. 그만큼 하나님은 나를 신뢰하고 내 인생을 내게 맡겨 주신 하나님, 그토록 관대하신 하나님, 그래서 이 가스펠송의 찬양의 의미는 옳습니다. God is so good!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인 것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 관대하신 하나님,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의 비유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예요. 인내하시는 하나님. 자, 타국으로 떠난 이 주인은 때가 이르렀을 때 농부들에게 소출 얼마를, 소량의 소출의 이익을 받고져 종을 보냈습니다. 자, 그랬더니 자, 이것은 어떤 이익을 위해서라기 보다도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오너쉽의 확인이다. 소유주가,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일종의 행위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이 포도원을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3절 다같이 시작!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네, 저희가 종을 잡아서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겠어요 네, 나 같으면 이 순간에 어떤 강력한 조처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 보시면 또 어떻게 했어요, 이 주인은. 다시 4절에,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이번에는 또 다시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절에 보시면 주인은 또 어떻게 했습니까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여러분 이 주인의 인내심을 보십시오. 이 주인의 Patient! 이 주인의 인내, 이 주인의 오래참으심. 이 주인의 엄청나게 오래참을 수 있는 인내심. 여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선물들을 사용해서 주의 뜻을 이뤄가며 살도록. 그러나 나는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혹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또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또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이런 하나님의 뜻을 촉구하기 위해서 보내신 종들의 메시지 앞에 귀를 막고 때로는 그 종들을 핍박한 우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또 다른 종을 보내어 계속적으로 나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토록 인내하시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해서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기만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는 참아요. 그는 인내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의 인내는 무한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어느 날 그의 인내가 종결에 도달하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하십니다. 9절의 말씀 9절. 우리 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6절 이하에 보면 마지막에는 자기의 아들마저 보내었지만 그 아들까지 죽여버린 이 사람들. 9절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포도원 주인이라면 이럴 땐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지 않겠느냐 진멸의 순간, 진노의 순간, 마침내 심판의 순간은 도래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시고, 그리고 이 선물을 통해서 복된 삶을 누리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창조주의 기대를 저버리고 우리의 역할, 우리의 반응, 우리의 응답이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일 때 우리는 마침내 엄정한 그의 심판 앞에 직면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심판을 준비하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본문의 비유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십니다. 자, 우리가 본문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첫번째 질문을 던졌어요. 본문의 비유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자, 이제 두번째 큰 질문. 본문의 비유 속에서 사람은 어떤 존잴까요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우선 인간은 매우 이기적인, 그리고 너무나 이기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 하나님은 이 포도원을 포함해서 이 모든 것을 선물로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들는 맡은 자에 불과합니다. 맡은 자. 옛날 말로는 청지기예요. 스튜어드! 요즘 현대적으로 말하면 매니저! 매니저, 우리는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그 얘기는,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누구실까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나에게 생명도 맡겨 주셨고,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맡겨 주시고, 내 재능도 맡겨 주시고 돈도 맡겨 주시고 시간도 맡겨 주시고. 나는 맡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청지기의 탈선, 매니저의 탈선은 언제부터 시작이 됩니까 그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음모를 시작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 이것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나타나 있는 장면이 바로 7절입니다. 7절 우리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에 7절. 다같이 읽어요. 시작!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거기다 언더라인 해주세요. 우리 것이 되리라 누구꺼 우리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것이 우리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끊임없이 내 것으로 착각하고 싶어하는 것. 아니 알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선포하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예요.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유명한 가르침, 비유가 바로 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생각나세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자, 어떤 농부가 부자농부가 봄에 씨를 뿌렸어요. 열심히 농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땀을 흘려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자 가을이 가까워집니다. 그 해 가을소출이 풍성할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농부는 어떻게 했어요 야, 현재 가지고 있는 이 곡간으로는 이 곡식을 다 수용할 수 없겠다. 그래서 곡간을 넓히는 개조작업을 착수했습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드디어 그는 넓혀놓은 곡간마다 곡식을 가득가득 채워놓은 다음에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이런 독백을 시작합니다. 내가 내 물건을 어디다 쌓아 둘꼬. 내 곡식을 어떻게 할꼬. 맞다. 내가 넓혀 놓은 곡간마다 내 물건을 가득가득 쌓아두리라. 그리고 나는 내 영혼에게 이르기를 내 영혼아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여러분,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세요 이 부자의 독백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부자의 독백가운데 제일 많이 강조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무슨 단어일까요 나라는 단어예요. 1인칭 대명사예요. 혹은 소유 대명사, 내 물건, 내 곡식, 내 곡간, 내 물건을 내 곡식을 어떻게 할꼬. 그리고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기를 my soul!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기를. 계속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날 밤에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이 부자에게 제일성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리석은 자여! 나 같으면 어리석은 놈아! 그럴텐데요. 하나님은 참 신사적으로 어리석은 자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오늘밤에 네가 네 거라고 주장하는 네 영혼을 내가 가져가리니 그러면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이 비유 속에 핵심은 뭐예요 비유의 핵심은 뭡니까 이것은 오너쉽의 문제예요. 오너쉽! 소유권의 문제예요. 누구 거냐. 누구 거냐. 여러분의 목숨 누구 거라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의 남편 아내 누구 겁니까 자녀 여러분 거라고 생각하세요 재산 여러분 거라고 생각하세요 한순간에 날라가 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만 이 세상 떠나라 그러면 빈손들고 와야 해요. 하나도 내 것이 없어요. 우린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종종 이 오너쉽을 소유권을 확인하기 위해서 당신의 종을 보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를 내라. 그게 뭔 줄 아세요 세가 그것이 헌금이예요. 여러분 교회 강단에서 종종 축복의 메시지가 선포되면 우린 얼마나 흥분합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고자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축복 받고 싶지 않으신가 보네요.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괜찮아요. 아멘 한다고 하등에 잘못 없어요. 그 축복을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아멘. 아멘 하는 자는 받아 누릴지어다. 아멘.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제가 만약 메시지를 바꾸어서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의 반응은 어떨까요. 나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것을 축복했으니 이제 네 자신을 나에게 주겠느냐 헌신의 문제예요. 헌신! 네 몸뚱아리 내 것이다, 내게 드려라. 네 시간 내 것이다 이젠 나의 일을 위해서 나의 영광을 위해서 좀 드려라. 우리는 헌신까지는 어느정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헌신이라는 것도 심각한 문제예요.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줄 모르니깐 헌신까지는 별로 괜찮은데 갑자기 목사가 강단에서 헌금을 말하면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교인이 있어요. 사실 저는 뭐 헌금 설교 별로 안하는 사람입니다만은 여러분도 들으시다시피 어쩌다가 한마디하면 괜히 흥분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성경이 헌금을 강조할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오너쉽의 문제예요. 십일조, 십일조에 대한 가장 무서운 착각은 십분의 일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께 드려야 한다. 그것이 가장 무서운 오해예요. 아닙니다. 십분의 일만 주님의 것 아니예요. 십분의 십 다 주님의 것이예요. 다 주님의 건데 그 중에 십분의 일을 구체적으로 드림으로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제가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그 고백이예요. 그 고백.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주일날은 열심히 참석합니다. 내 피곤한 스케줄 가운데도 주일날 아침에 와서 한 번 드리는 예배 목사님 얼마나 힘든 건 줄 아십니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헌금도 합니다. 요새는 십일조도 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 목사님 이만큼 하면 됐으니깐 여기까지만 좀. 여기까지만 봐 주시고 더 이상은 요구하지 마십시요. 이것이 아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맨탈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이 모습 뒤에 숨겨진 우리들의 이기심. 이것이 하나님의 것임에 분명하고도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이기심의 정체를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이기적인 존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비유는 인간이 단순히 이기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더 나아가서 사람이 반역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반역적인 존재 자, 적은 소량의 세를 받기 위해서 보내어진 이 종들을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3절 다같이 읽어보세요. 3절 다같이 시작!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네,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또 4절엔 어떻게 했습니까 4절,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여러분 이것이 반역이 아니예요 반역. 주인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더라. 여기서 반역은 극점에 도달합니다. 점점 더해져요. 3절엔 때렸다가 4절엔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가 점점 더 크레센도 자꾸만 올라가. 계속. 핍박의 도를 더하고 있는 능욕의 도를 계속하고 있는 이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요.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언제.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 만물의 창조의 주님이시요, 구원의 주님이신 그 하나님을 인생들이 바라보도록 보내주신 메신저를 대하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요.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종들, 그리고 복음의 메신저를 대접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전 세계 도처에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애쓰는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열어보면 히브리서는 그래서 이런 말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옛적에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권고하셨습니다. 이 수많은 종들을 보내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고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반역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반역의 무서운 음모는 우리 안에도 도사리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 반역적인 존재, 이것이 죄를 범한 우리 안에 숨어있는 죄성의 정체인 것을 아십시요. 하나님을 향해서 반역적인 존재의 모습. 이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그러나 세번째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비유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살펴 보았습니다. 비유 속에 나타난 사람을 살펴 보았습니다. 세번째
는 뭘까요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 본문의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고 있을까요 네, 저는 본문의 클라이막스, 절정이라고 생각해요. 13귀절, 6절입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6절시작!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아주 극적인 표현은 이런 부분이죠. 오늘 말씀의 제목인데요. 최후로 아들을 보내며 최후로 아들을 보내었다. 한번 따라서 하십시다. 최후로 아들을 보내었더니. 저는 이 비유 속에서 예수는 다른 종들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종이 아니라 그 분은 아들이시다. 오해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종의 역할을 감당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질은 종하고는 구별됩니다. 그는 아들이십니다.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 받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30년 동안 개인적인 삶을 지내시다가 공적 생애를 시작하실 때 그는 요한에게 나가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오셨습니다. 그가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이런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뭐라구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 그 분은 사랑받는 아들이예요. 이슬람교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선지자와 같은 차원에서 또 하나의 선지자로만 보고 있습니다. 종으로만 보고 있는 거예요. 아니예요. No! 그 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비유 속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받는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할 사실이 오늘 예언 돼 있습니다. 어떻게 표현되어 있어요 7절과 8절에 말씀이죠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7절, 8절 다같이.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여러분 지금 이 얘기 누가하고 계세요 예수님. 그리고 이 얘길 하신 시점은 이제 십자가를 얼마 며칠 앞에 둔 그런 시점이였습니다. 이 말씀을 말씀하시던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세요. 예수님의 심정. 자, 이 비유를 말하면서 예수님은 뭘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잘 들어보세요. 자, 농부들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저가 상속자니 저 아들을 죽이자. 그래야만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차지하겠다. 8절, 이에 잡아서 그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버렸느니라. 이 말씀을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였을까요 틀림없이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는 며칠후에 자기 자신이 포도원 바깥에 성문 밖 저 골고다의 언덕 갈보리에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던질 그 광경을 보시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고난을 모르고 당할 때는 그냥 모르고 어느 정도 경험할 수가 있어요. 정말 힘든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그 고통을 알고 경험할 때, 내 앞에 닥쳐올 고통의 그 예리한 아픔을 내가 친히 알았을 때, 그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침뱉음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그리고 슬픔의 길 그 비하톨로사이의 고통의 길을 그가 쓰러지시고 일어서시고 다시 쓰러지면서 걸어가야 할 그 분의 모습. 그리고 양 손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그가 못 박히시고 신음하실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 이 말씀을 말씀하시던 주님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셨을까. 그는 이 고난을 알았습니다. 고난의 무게를 알았고 고난의 깊이를 알았고 이 고난의 예리함을 알았고 그 상처의 아픔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고난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실 분. 이것이 비유 속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이십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걸 더 나아가서 그 분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실 분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어디에 예언되어 있습니까 마지막 두 구절. 10절과 11절. 같이 읽어볼까요 10절과 11절 다같이 시작!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아멘. 여기 놀라운 예언이 있어요. 놀라운 예언.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누구 가리키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 마치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버림을 당하실 그 분. 십자가의 버림을 당하실 그 분. 그러나 그 분은 버려지는 분으로 거절당하는 분으로 그 분의 인생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이번에는 무슨 돌이 된다구요 모퉁이 돌이 된다. 코너스톤, 한 지붕을 한 건물을 견고하게 세우는 모퉁이 돌, 역사를 세우고 구원 받은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우는 위대한 기초가 되기 위해서 다시 부활하신 그 분, 새로운 생명을 주고 사람들을 용서하고 인생을 다시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다시 부활하시고 찾아오신 놀라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여기서 보여 줍니다. 모퉁이 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11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뭐가 기이하겠어요 죽은 줄 알았던 그 분이 다시 부활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놀라운 주님으로 나타나실 그 분 이것은 실로 기이하도다. 부활의 놀라움, 부활의 신비, 그 부활의 미스터리, 부활의 Wonder, 그 놀라움이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선포되고 있는 이 모습을 보십시요, 이것은 정말 기이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예언의 성취일까요 시편 말씀의 인용이죠. 시편 118편 22절과 23절의 예언의 성췹니다. 한번 직접 오리지날 말씀을 한번 읽어보세요. 시편 118편 22절입니다. 시편 118편 22절입니다. 시편 118편 22절 자 찾으신 분은 찾을 희망이 없는 분들은 그냥 그대로 계시고 시편 118편 22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인한 바로다 그것이 성취되는 순간이예요. 지금 근데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정말 중요한 것은 24절입니다. 그 다음 절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예요. 다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이 날은 어떤 날일까요 부활의 날. Easter Sunday. 부활의 날. 그 부활의 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날에 다시 일어나시고 부활하시사 우리의 부활 우리의 구원이 되신 놀라우신 그 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세 할렐루야 이 위대한 부활이 이 예언 속에 나타나고 있는 장면을 보십시요. 드디어 오순절날 주님은 오셨고 그리고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는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의 현장에서 사도들은 바로 정확하게 이 말씀을 또한 번 인용합니다. 우리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찾아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입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을 찾아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 11절입니다. 같이 읽을까요. 사도행전 4장 11절 다같이 시작.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자 드디어 사도들은 여기서 이 건축자의 버린 돌 그리고 모퉁이 돌이 되신 그 분이 누구인가는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무슨 말로 시작되었어요. 이 예수는 이 예수가 예수가 버린 돌이셨으나 이제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아 이 예수가 네 그러면서 그 다음에 12절에 우리가 잘아는 놀라운 말씀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12절 다같이 한 번 읽어봐요. 다같이 시작.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모퉁이 돌이 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 분이 살아 나셨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바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그가 사셨으므로 우리도 살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고난의 골짜기 같은 인생을 승리롭게 지금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고난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분을 따라 가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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