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선택 (막15:1-15)
본문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선택을 되풀이 합니다. 이 선택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교회 나오시기 전에 여러 가지 선택을 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옷을 입고 나오느냐 날이 더운데 넥타이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또 1부 예배 참석할 것인가 2부 예배 참석할 것인가 3부에 참석할 것인가 선택이죠 이런 선택들은 비교적 커다란 영향이 없는 경미한 선택 사항에 속합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우리 평생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선택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배우자와 결혼할 것인가 또 나는 어떤 직업을 선택하여 한평생을 살 것인가 이것은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선택들이죠. 그러나 이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일생 뿐만 아니라 영원을 좌우하는 영원한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선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영원한 운명의 귀로에 서서 그릇된 선택의 결정을 내렸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선택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시면 그는 재판의 자리에서 재판관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이런 외침을 토해 냅니다. 너희들이 유태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자를 내가 어떻게 하랴 내가 이 자를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같은 본문이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결론을 잘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편에 서지 못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변호하지도 못 했고 그리스도를 증거하지도 못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바로 그의 이러한 선택과 결정 때문에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이 사람은 크리스챤의 입술에서 영원히 비극적으로 회자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많은 교회서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 가운데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렇게 회자되는 인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빌라도의 선택 어떤 선택이었을까요 우리는 그의 선택에서 경고 받아야 할 그릇된 선택의 렛슨을 역설적으로 교훈 받을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선택 어떤 선택일까요.
첫째로 그의 선택은 군중심리적 선택이었습니다. 군중심리에 근거한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15절은 본문의 사건에 대한 일종의 결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결론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15절인데요. 다 같이 읽겠습니다. 15절 시작. 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내 주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단했다.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에서 빌라도의 선택의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결단을 했다. 많은 무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무리들에게 편승하기 위해서 결단했다. 그의 선택과 그의 결단은 자기 확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군중들의 반응 군중들의 pressure 압력에 따라 간 결단이었습니다. 자기 확신과는 정 반대의 결단을 그는 내리고 만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말하니까 나도 그렇게 말하고 세상이 이렇게 행동하니까 나도 그렇게 행동하고 세상이 이런 옷들을 입도록 요구하니까 나도 맹목적으로 유행에 따라가고 세상에 편승하는 삶. 세상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때때로 이 세상은 잘못된 방향으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는 위험한 가치관의 함정을 가진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를 가르칠 때 잘 아는 로마서 12장 2절에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 초대교회 시절에 콘스탄티노플의 초대교회의 유명한 설교자요 교부였던 크리소스텀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교회에서 중대한 한 가지 결정을 내렸을 때 주변사회가 그 당시의 세상이 아주 들끓면서 교회의 결정을 반대한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자기의 참모가 이 보고를 올렸을 때 크리소스텀은 이런 유명한 말을 한 것으로 전해 내려 옵니다. 온 세상이 반대한다고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해야지.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리라. 이 흔들릴 수 없는 확신. 확신.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너무나 쉽게 너무나 빨리 우리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기독교적 가치관을 쉽게 포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는 자문을 던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양육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가장 어려운 때가 틴에이저 시절이라고 생각이 돼요. 틴에이저 시절의 우리 자녀가 왜 힘드냐 하면은 가장 힘든 그들의 문제 제1호는 소위 Fear Pressure입니다. Fear Pressure. 친구들에게서부터 오는 압력. 친구를 모방하지 않고는 친구들 세계에서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친구들을 본 따게 됩니다. 다행히 주변에 좋은 친구가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때 쉽게 감정에 빠져 드는 것이 우리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만약 어려서부터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세워 줄 수가 있다면 그들은 좀 더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틴에이저 문제만 아니예요. 우리 어른들도 하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교회 나온다는 사실만 빼놓고 주일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 빼놓고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정말 우리는 다를까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우리도 너무나 쉽게 세상을 모방하고 또 세상을 따라가고 또 세상 속에게 오히려 삶을 우리가 배우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세상을 카피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교회는 나와 있지만 별 수 없는 세상의 사람은 아닌지 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모어가 생긴 것 같아요. 최근의 사오정 시리즈에 보니까 이런 유모어가 있더라구요. 사오정이 취직시험 할 때마다 계속 떨어져요.
그런데 손오공은 취직시험 할 때마다 붙어요. 그래서 사오정이 손오공에게서 도움을 청했어요. 면접을 어떻게 잘 하는가. 그랬더니 손오공이 내가 면접할 때 잘 보고 고대로 따라서 하라고. 그래서 한 번 가서 봤습니다. 손오공이 어떻게 입사시험에 면접을 하나. 시험관이 질문을 던집니다. 손오공에게.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누구요 전에는 차범근이었으나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열심히 뒤에서 외웠습니다. 전에는 차범근이었으나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시험관이 고개를 끄떡끄떡하더니 또 둘째 질문을 던집니다. 박찬호 선수는 몇 번이오 손오공이 싹 웃으면서 61. 그러니까 시험관이 고개를 끄떡끄떡 거렸습니다. 61 두 번째 대답은 61이었죠 61. 열심히 외웠습니다. 카피를 했습니다. 세 번째로 또 시험관이 손오공에게 질문을 던지기를 당신은 UFO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손오공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다고 시험관이 대답을 참 잘 했다고. 손오공이 패스하는 모습을 보고 사오정이 잘 배웠습니다. 시험을 끝낸 손오공이 봤지 나처럼 하면 돼. 내가 하는 그대로 카피하면 돼. 내가 형님이 하는 그대로 배웠다고 사오정이 이번에 가서 면접을 하게 되었어요 시험관이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뭐요 전에는 차범근이었으나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당신의 나이는 몇 살이요 61입니다. 당신 귀는 잘 들립니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남을 카피하는 일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가 있는가라는 일종의 휴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이 그렇게 사니까 우리도 카피하는 거예요. 우리는 삶을 성경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배우지 않아요. 이웃들에게서 세상에서 배우고 세상을 그대로 카피하고 세상의 무리들처럼 우리도 그 흐름 속에 우리를 인생을 맡기고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요. 군중심리에 의한 삶. 그것이 빌라도의 삶이었고 그것이 빌라도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빌라도의 선택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빌라도의 선택은 출세지향적 선택이었습니다. 출세지향적인 선택. 왜 빌라도가 무리를 맹목적으로 따라 갔느냐. 빌라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군중을 따라 가는 것이 자기의 삶을 안전하게 만들고 자기의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빌라도의 가치관이 있었다면 그의 가치관 제 1호는 출세였을 것입니다. 출세하는 것. 오늘 본문의 사건에 보면 빌라도가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에게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빌라도가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기사는 본문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4복음서에 다 이 빌라도의 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빌라도가 많은 질문을 해요. 그것이 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질문을 하는 것이라면 그 질문은 필요한 것이고 진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본문을 들여다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앞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빌라도가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27장 24절에 보시면 바라바 대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리는 이유를 마태는 설명하기를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빌라도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민중의 난이 일어 나면 예수를 놓아 줬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면 유대를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내 입지가 불리해지지 않겠느냐 그것이 빌라도의 계산이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에 보다 확실하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 한 번 찾아 보세요. 요한복음 19장 12절 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 과 13절 인데 우선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 우리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 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여기 빌라도가 예수를 놓을려고 했다. 예수를 놓을려고 한 것이 그의 본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소리를 쳤다고 말 합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요. 아니 당신는 가이사 로마의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고 있는 것이요.
그런데 그 다음 절 13절에 보시면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는 판결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라도는 철저하게 자기의 입지만을 생각 했어요. 물론 인생을 살면서 내 입지 내 출세 내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생각해야죠. 그러나 그 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결정할 때에 이것이 정당한 결정일까 이것을 나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하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당한 행동이냐 이 말이예요. 하나님이 기뻐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없어요. 나를 유리하게 한다고 하니까 나를 출세시킨다고 하니까 출세를 위해서 무엇이든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던 사람 그것이 빌라돕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검증될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본래 유대 땅에 제5대 총독이었습니다. 로마에게 파견된 다섯 번째 총독이었습니다. 로마의 타이베리우스 케리큘러 황제시대 AD 26년부터 36년까지 정확하게 10년간 팔레스타인 유대땅의 총독으로 빌라도는 제위했습니다. 유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셉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한 총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치게 로마에게 아부했고 로마 황제숭배를 강요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던 사람. 그래서 그는 다른 총독보다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안에 머물렀어요. 보통 한 5,6년 하고 떠났는데 이 사람은 10년 동안 했습니다. 조금 더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아부 그의 출세욕 그의 처세술이 10년간 총독 자리를 지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 됐을까요. 결국은 사마리아 학살사건이 일어 났는데 사마리아인을 학살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로마의 정부가 이 소식을 듣고 빌라도를 소환합니다. 중앙정부에서 빌라도가 소환을 받자 이제는 자기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빌라도가 자살을 합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종말이예요. 자살로 끝났습니다. 조금 더 그 자리에 있었지만은 결국은 자살로 끝난 인생. 자기의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 잃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얻을 수가 있다. 빌라도의 삶은 이 진리를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출세가 가져온 파멸. 출세를 소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출세만 생각하는 출세의 가치관이 다른 모든 가치관을 압도해 버린 출세지향적인 선택의 비극 그것이 바로 빌라도의 비극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빌라도의 선택은 양심회피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양심회피적인 선택.
오늘 본문에 14절에 보시면 빌라도가 이렇게 소리 칩니다. 이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가 잘못하지 않은 것을 알았어요. 본문에도 보면 10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자 10절 한 번 다 같이 읽어 봐요. 본문의 10절 다 같이 시작.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을 앎이러라 대제사장들이 시기해서 예수를 시기해서 예수의 인기가 높아지고 같은 종교인으로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자리가 좁아진다고 느끼고 예수를 코너로 몰고 십자가에 죽이기로 그들은 결정하고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한 것입니다. 예수의 무죄를 빌라도는 알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 27장의 기사에 보면 빌라도 총독이 재판을 진행 중인데 메모 하나가 올라 옵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보낸 멧세지예요. 사람을 통해서 빌라도의 아내가 멧세지를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그 올바른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소서. 그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요. 내가 꿈자리가 이상하오. 빌라도의 아내가 무슨 꿈을 꾼 모양이예요. 아무래도 그 올바른 사람에게 당신이 관여하지 마시오. 누가복음의 기사를 같은 내용을 우리가 누가복음 23장에서 읽어 보시면 20절 이하에 빌라도는 부단히 예수를 놓아 주고자 애를 씁니다. 세 번씩 그는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판결합니다. 그는 예수가 무죄 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확신과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배반하는 양심을 거스리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양심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저 유명한 도스또옙스키는 말하기를 양심이란 우리 인간의 내면의 존재 속에 신이 주신 목소리다. 우리 내면 존재의 내면 안에 신의 목소리 신이 주신 목소리 빌라도의 양심은 소리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무죄야 아니 빌라도의 양심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그리스도일지도 몰라 그는 그리스도일지도 몰라 인류의 구세주일지도 몰라 마태복음은 이렇게 소리 쳤거든요. 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양심은 그리스도의 무죄를 그리스도의 정당성을 그리스도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기 양심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 결정 위에 마태복음 27장의 기사에 보시면 이 결정 직후에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빌라도는 손을 씻습니다. 손을 씻어요. 손을 씻는 빌라도의 심리 뭘까요. 나는 직접적인 책임은 없어 나는 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손을 씻어요. 한 화가는 빌라도의 그림을 그리면서 지옥에서 대야를 갖다 놓고 손을 씻고 있는 빌라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옥에서 지금도 손을 씻고 있을지 몰라요. 나는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나는 예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예수는 나도 무죄요. 나도 무죄요. 그러나 더 깊은 그 사람의 내면의 양심은 소리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는 비겁자야 너는 네 양심을 거스렸어 너는 네 양심을 불순종했어 너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스렸단 말이야. 우리가 우리의 내면의 양심을 따라 간다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확신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내 삶의 길을 걸어 간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일제 말기에 이 땅에서 살았던 고독했던 크리스천 지성인 시인 윤동주의 심정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 다음을 제가 좋아해요.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 하겠다 세상이 뭐라 그래도 세상이 뭐라 그래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양심을 따라 내가 걸어 가야 할 내 인생의 길을 나는 묵묵히 걸어야 한다. 이것이 나에게 어떤 손해를 주어도 이것이 나에게 출세를 보장하지 않아도 나는 올바른 길을 내가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걸어 가야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얼마나 될까요. 저는 성지순례팀들을 인도하고 지난 수요일 날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미국신문 USA TODAY지 지나간 수요일 날 신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신문을 읽다가 저는 신문의 한 기사에서 제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 아주 아름답게 생긴 소녀의 사진이 나왔고 그 제목이 제 시선을 강하게 끌었습니다. 영어로 이런 제목이 있더라구요. 이건 크리스챤 잡지 아니예요. 이건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 입니다. THE USA TODAY 지. The National Topic News로 실린 기사예요. Seventeen years olds last word inspire other christians. 열일곱살 먹은 소녀가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도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저는 이 기사를 읽다가 비행기 안에서 펑펑 울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저를 도전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아는 내용 여러분도 아는 내용이었어요. 지난 4월 20일 미국 Colorado주 Denver의 남서쪽 리틀턴이라는 지역 인구 35,000명이 살고 있는 작고 평화로운 도시 콜롬바인 High School 고등학교예요. 총기난사사고가 일어 났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신문 T.V에 보도되었습니다. 학생 25명 용의자 2명이 함께 총기난사사고로 학교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 사건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학교내 불량서클집단이었던 트렌치 코트 마피아 단원 학생 두 사람이 벌린 자기 친구들에 대한 복수 비슷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두 명의 범인 중에 한 사람이 캐시버넬이라는 열일곱살 먹은 소녀 앞에 총을 겨누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옆에 있었던 소녀가 살아나와 목격자가 되어서 이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범인이 총기를 든 범인의 질문이 어린 열일곱살 먹은 캐시라는 소녀에게 한 질문이 Do you believe in God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아마도 하나님 안 믿어요 이 한 마디면 살아날 수 있었던 이 상황 속에서 이 소녀는 침착하게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범인은총뿌리를 더 가까이 겨누면서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영어로 Theres no God. 하나님은 없단 말이야. 캐시는 침착하게 한번 더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Yes, There is God. 하나님은 살아 계세요. And you need to follow His path. 당신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야 하오. 범인의 총구는 불을 뿜기 시작 했고 소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 쓰러져 생명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사건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옆의 생존자 입술을 통해서 증언되자 미국의 크리스챤 teen들이 T셔츠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 T셔츠에는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T셔츠를 입고 소년소녀들이 거리를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나흘전 Florida의 한 도시에서는 2,500명의 teen들이 크리스챤 teenager들이 모여서 Yes I believe in God crusader.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캐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고백의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이 집회는 도시마다 불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캐시는 죽어 있던 크리스챤들의 양심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챤 틴에이저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챤 어른들이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캐시는 미국 교회에 불을 지르고 있다. 캐시는 미국 교회를 향한 충격과 감동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기사의 내용입니다. 빌라도와 비슷한 선택 속에서 세상의 사람이 되어 인생을 의미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 앞에 캐시라는 우리 시대 바로 두 달 전에 일어난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수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도 담대하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그의 가치관을 수렴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담대하게 이 세상을 향해서 이 외침을 토해 낼 수가 있는지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여러분은 빌라도입니까 아니면 캐시입니까.
첫째로 그의 선택은 군중심리적 선택이었습니다. 군중심리에 근거한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15절은 본문의 사건에 대한 일종의 결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결론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15절인데요. 다 같이 읽겠습니다. 15절 시작. 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내 주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단했다.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에서 빌라도의 선택의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결단을 했다. 많은 무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무리들에게 편승하기 위해서 결단했다. 그의 선택과 그의 결단은 자기 확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군중들의 반응 군중들의 pressure 압력에 따라 간 결단이었습니다. 자기 확신과는 정 반대의 결단을 그는 내리고 만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말하니까 나도 그렇게 말하고 세상이 이렇게 행동하니까 나도 그렇게 행동하고 세상이 이런 옷들을 입도록 요구하니까 나도 맹목적으로 유행에 따라가고 세상에 편승하는 삶. 세상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때때로 이 세상은 잘못된 방향으로 얼마든지 나갈 수 있는 위험한 가치관의 함정을 가진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리를 가르칠 때 잘 아는 로마서 12장 2절에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 초대교회 시절에 콘스탄티노플의 초대교회의 유명한 설교자요 교부였던 크리소스텀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교회에서 중대한 한 가지 결정을 내렸을 때 주변사회가 그 당시의 세상이 아주 들끓면서 교회의 결정을 반대한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자기의 참모가 이 보고를 올렸을 때 크리소스텀은 이런 유명한 말을 한 것으로 전해 내려 옵니다. 온 세상이 반대한다고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해야지.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리라. 이 흔들릴 수 없는 확신. 확신.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결과적으로 우리는 너무나 쉽게 너무나 빨리 우리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기독교적 가치관을 쉽게 포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는 자문을 던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양육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가장 어려운 때가 틴에이저 시절이라고 생각이 돼요. 틴에이저 시절의 우리 자녀가 왜 힘드냐 하면은 가장 힘든 그들의 문제 제1호는 소위 Fear Pressure입니다. Fear Pressure. 친구들에게서부터 오는 압력. 친구를 모방하지 않고는 친구들 세계에서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친구들을 본 따게 됩니다. 다행히 주변에 좋은 친구가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때 쉽게 감정에 빠져 드는 것이 우리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만약 어려서부터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세워 줄 수가 있다면 그들은 좀 더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틴에이저 문제만 아니예요. 우리 어른들도 하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교회 나온다는 사실만 빼놓고 주일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 빼놓고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정말 우리는 다를까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우리도 너무나 쉽게 세상을 모방하고 또 세상을 따라가고 또 세상 속에게 오히려 삶을 우리가 배우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세상을 카피하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교회는 나와 있지만 별 수 없는 세상의 사람은 아닌지 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유모어가 생긴 것 같아요. 최근의 사오정 시리즈에 보니까 이런 유모어가 있더라구요. 사오정이 취직시험 할 때마다 계속 떨어져요.
그런데 손오공은 취직시험 할 때마다 붙어요. 그래서 사오정이 손오공에게서 도움을 청했어요. 면접을 어떻게 잘 하는가. 그랬더니 손오공이 내가 면접할 때 잘 보고 고대로 따라서 하라고. 그래서 한 번 가서 봤습니다. 손오공이 어떻게 입사시험에 면접을 하나. 시험관이 질문을 던집니다. 손오공에게.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누구요 전에는 차범근이었으나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열심히 뒤에서 외웠습니다. 전에는 차범근이었으나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시험관이 고개를 끄떡끄떡하더니 또 둘째 질문을 던집니다. 박찬호 선수는 몇 번이오 손오공이 싹 웃으면서 61. 그러니까 시험관이 고개를 끄떡끄떡 거렸습니다. 61 두 번째 대답은 61이었죠 61. 열심히 외웠습니다. 카피를 했습니다. 세 번째로 또 시험관이 손오공에게 질문을 던지기를 당신은 UFO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손오공이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하기를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다고 시험관이 대답을 참 잘 했다고. 손오공이 패스하는 모습을 보고 사오정이 잘 배웠습니다. 시험을 끝낸 손오공이 봤지 나처럼 하면 돼. 내가 하는 그대로 카피하면 돼. 내가 형님이 하는 그대로 배웠다고 사오정이 이번에 가서 면접을 하게 되었어요 시험관이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뭐요 전에는 차범근이었으나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당신의 나이는 몇 살이요 61입니다. 당신 귀는 잘 들립니까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남을 카피하는 일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가 있는가라는 일종의 휴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이 그렇게 사니까 우리도 카피하는 거예요. 우리는 삶을 성경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배우지 않아요. 이웃들에게서 세상에서 배우고 세상을 그대로 카피하고 세상의 무리들처럼 우리도 그 흐름 속에 우리를 인생을 맡기고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요. 군중심리에 의한 삶. 그것이 빌라도의 삶이었고 그것이 빌라도의 선택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빌라도의 선택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빌라도의 선택은 출세지향적 선택이었습니다. 출세지향적인 선택. 왜 빌라도가 무리를 맹목적으로 따라 갔느냐. 빌라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군중을 따라 가는 것이 자기의 삶을 안전하게 만들고 자기의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빌라도의 가치관이 있었다면 그의 가치관 제 1호는 출세였을 것입니다. 출세하는 것. 오늘 본문의 사건에 보면 빌라도가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에게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빌라도가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기사는 본문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4복음서에 다 이 빌라도의 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빌라도가 많은 질문을 해요. 그것이 사실을 파악하기 위한 의도에서 질문을 하는 것이라면 그 질문은 필요한 것이고 진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본문을 들여다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앞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빌라도가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27장 24절에 보시면 바라바 대신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리는 이유를 마태는 설명하기를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빌라도가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민중의 난이 일어 나면 예수를 놓아 줬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면 유대를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내 입지가 불리해지지 않겠느냐 그것이 빌라도의 계산이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서에 보다 확실하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 한 번 찾아 보세요. 요한복음 19장 12절 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 과 13절 인데 우선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2절 우리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 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입니다. 여기 빌라도가 예수를 놓을려고 했다. 예수를 놓을려고 한 것이 그의 본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소리를 쳤다고 말 합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요. 아니 당신는 가이사 로마의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고 있는 것이요.
그런데 그 다음 절 13절에 보시면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는 판결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라도는 철저하게 자기의 입지만을 생각 했어요. 물론 인생을 살면서 내 입지 내 출세 내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생각해야죠. 그러나 그 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결정할 때에 이것이 정당한 결정일까 이것을 나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하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당한 행동이냐 이 말이예요. 하나님이 기뻐할 것인가 이런 물음이 없어요. 나를 유리하게 한다고 하니까 나를 출세시킨다고 하니까 출세를 위해서 무엇이든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던 사람 그것이 빌라돕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검증될 수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본래 유대 땅에 제5대 총독이었습니다. 로마에게 파견된 다섯 번째 총독이었습니다. 로마의 타이베리우스 케리큘러 황제시대 AD 26년부터 36년까지 정확하게 10년간 팔레스타인 유대땅의 총독으로 빌라도는 제위했습니다. 유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셉푸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잔인한 총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지나치게 로마에게 아부했고 로마 황제숭배를 강요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던 사람. 그래서 그는 다른 총독보다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안에 머물렀어요. 보통 한 5,6년 하고 떠났는데 이 사람은 10년 동안 했습니다. 조금 더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아부 그의 출세욕 그의 처세술이 10년간 총독 자리를 지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 됐을까요. 결국은 사마리아 학살사건이 일어 났는데 사마리아인을 학살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로마의 정부가 이 소식을 듣고 빌라도를 소환합니다. 중앙정부에서 빌라도가 소환을 받자 이제는 자기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빌라도가 자살을 합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종말이예요. 자살로 끝났습니다. 조금 더 그 자리에 있었지만은 결국은 자살로 끝난 인생. 자기의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 잃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얻을 수가 있다. 빌라도의 삶은 이 진리를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출세가 가져온 파멸. 출세를 소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출세만 생각하는 출세의 가치관이 다른 모든 가치관을 압도해 버린 출세지향적인 선택의 비극 그것이 바로 빌라도의 비극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빌라도의 선택은 양심회피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양심회피적인 선택.
오늘 본문에 14절에 보시면 빌라도가 이렇게 소리 칩니다. 이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예수가 잘못하지 않은 것을 알았어요. 본문에도 보면 10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자 10절 한 번 다 같이 읽어 봐요. 본문의 10절 다 같이 시작.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을 앎이러라 대제사장들이 시기해서 예수를 시기해서 예수의 인기가 높아지고 같은 종교인으로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자리가 좁아진다고 느끼고 예수를 코너로 몰고 십자가에 죽이기로 그들은 결정하고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한 것입니다. 예수의 무죄를 빌라도는 알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 27장의 기사에 보면 빌라도 총독이 재판을 진행 중인데 메모 하나가 올라 옵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보낸 멧세지예요. 사람을 통해서 빌라도의 아내가 멧세지를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그 올바른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소서. 그 사람은 올바른 사람이요. 내가 꿈자리가 이상하오. 빌라도의 아내가 무슨 꿈을 꾼 모양이예요. 아무래도 그 올바른 사람에게 당신이 관여하지 마시오. 누가복음의 기사를 같은 내용을 우리가 누가복음 23장에서 읽어 보시면 20절 이하에 빌라도는 부단히 예수를 놓아 주고자 애를 씁니다. 세 번씩 그는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판결합니다. 그는 예수가 무죄 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확신과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배반하는 양심을 거스리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양심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저 유명한 도스또옙스키는 말하기를 양심이란 우리 인간의 내면의 존재 속에 신이 주신 목소리다. 우리 내면 존재의 내면 안에 신의 목소리 신이 주신 목소리 빌라도의 양심은 소리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무죄야 아니 빌라도의 양심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그리스도일지도 몰라 그는 그리스도일지도 몰라 인류의 구세주일지도 몰라 마태복음은 이렇게 소리 쳤거든요. 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양심은 그리스도의 무죄를 그리스도의 정당성을 그리스도의 구세주이심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기 양심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기로 결정을 합니다.
이 결정 위에 마태복음 27장의 기사에 보시면 이 결정 직후에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빌라도는 손을 씻습니다. 손을 씻어요. 손을 씻는 빌라도의 심리 뭘까요. 나는 직접적인 책임은 없어 나는 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손을 씻어요. 한 화가는 빌라도의 그림을 그리면서 지옥에서 대야를 갖다 놓고 손을 씻고 있는 빌라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옥에서 지금도 손을 씻고 있을지 몰라요. 나는 죽이고 싶지 않았어. 나는 예수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예수는 나도 무죄요. 나도 무죄요. 그러나 더 깊은 그 사람의 내면의 양심은 소리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는 비겁자야 너는 네 양심을 거스렸어 너는 네 양심을 불순종했어 너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스렸단 말이야. 우리가 우리의 내면의 양심을 따라 간다는 것,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확신에 따라 하나님이 주신 내 삶의 길을 걸어 간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일제 말기에 이 땅에서 살았던 고독했던 크리스천 지성인 시인 윤동주의 심정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 다음을 제가 좋아해요.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 하겠다 세상이 뭐라 그래도 세상이 뭐라 그래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양심을 따라 내가 걸어 가야 할 내 인생의 길을 나는 묵묵히 걸어야 한다. 이것이 나에게 어떤 손해를 주어도 이것이 나에게 출세를 보장하지 않아도 나는 올바른 길을 내가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걸어 가야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얼마나 될까요. 저는 성지순례팀들을 인도하고 지난 수요일 날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미국신문 USA TODAY지 지나간 수요일 날 신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신문을 읽다가 저는 신문의 한 기사에서 제 시선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 아주 아름답게 생긴 소녀의 사진이 나왔고 그 제목이 제 시선을 강하게 끌었습니다. 영어로 이런 제목이 있더라구요. 이건 크리스챤 잡지 아니예요. 이건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 입니다. THE USA TODAY 지. The National Topic News로 실린 기사예요. Seventeen years olds last word inspire other christians. 열일곱살 먹은 소녀가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의 마지막 말이 그리스도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저는 이 기사를 읽다가 비행기 안에서 펑펑 울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것은 저를 도전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아는 내용 여러분도 아는 내용이었어요. 지난 4월 20일 미국 Colorado주 Denver의 남서쪽 리틀턴이라는 지역 인구 35,000명이 살고 있는 작고 평화로운 도시 콜롬바인 High School 고등학교예요. 총기난사사고가 일어 났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신문 T.V에 보도되었습니다. 학생 25명 용의자 2명이 함께 총기난사사고로 학교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 사건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학교내 불량서클집단이었던 트렌치 코트 마피아 단원 학생 두 사람이 벌린 자기 친구들에 대한 복수 비슷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두 명의 범인 중에 한 사람이 캐시버넬이라는 열일곱살 먹은 소녀 앞에 총을 겨누고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옆에 있었던 소녀가 살아나와 목격자가 되어서 이 소식을 전한 것입니다. 범인이 총기를 든 범인의 질문이 어린 열일곱살 먹은 캐시라는 소녀에게 한 질문이 Do you believe in God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아마도 하나님 안 믿어요 이 한 마디면 살아날 수 있었던 이 상황 속에서 이 소녀는 침착하게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범인은총뿌리를 더 가까이 겨누면서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영어로 Theres no God. 하나님은 없단 말이야. 캐시는 침착하게 한번 더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Yes, There is God. 하나님은 살아 계세요. And you need to follow His path. 당신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야 하오. 범인의 총구는 불을 뿜기 시작 했고 소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리에 쓰러져 생명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사건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옆의 생존자 입술을 통해서 증언되자 미국의 크리스챤 teen들이 T셔츠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 T셔츠에는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T셔츠를 입고 소년소녀들이 거리를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나흘전 Florida의 한 도시에서는 2,500명의 teen들이 크리스챤 teenager들이 모여서 Yes I believe in God crusader.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캐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고백의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이 집회는 도시마다 불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캐시는 죽어 있던 크리스챤들의 양심을 깨우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챤 틴에이저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챤 어른들이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캐시는 미국 교회에 불을 지르고 있다. 캐시는 미국 교회를 향한 충격과 감동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기사의 내용입니다. 빌라도와 비슷한 선택 속에서 세상의 사람이 되어 인생을 의미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 앞에 캐시라는 우리 시대 바로 두 달 전에 일어난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수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도 담대하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그의 가치관을 수렴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담대하게 이 세상을 향해서 이 외침을 토해 낼 수가 있는지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어요. 여러분은 빌라도입니까 아니면 캐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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