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마대 요셉의 선택 (막15:42-47)
본문
의미 요법을 창시한 빅터 프랭클 이라는 박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세계 2차 대전 동안에 나치 독일에 의해서 수용소 생활, 감옥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 감옥 중에서 그는 아주 비극적인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자기 부모가 먼저 죽고, 또 자기 아내가 자기 눈 앞에서 가스실에 끌려 가고, 또 자식들을 먼저 앞세우고 보내야 하는 그런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충격적 사실들을 경험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그 분의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 그 간수들까지도 아주 놀랬다고 합니다. 한번은 나치의 게슈타포가 그를 발가벗겨 갖고 하루종일 나체로 끌고 다녔습니다. 아마도 그를 지켜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흥분한다든지 분노하는 사람들, 그리고 저주하고 대드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가스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그날 하루종일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대들은 나에게서 부모를 빼앗아 가고, 또 내 처도 빼앗아 가고, 내 자식들도 빼앗아 갔다. 그러나 절대로 그대들이 나에게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은 바로 내 선택의 자유다. 내가 비극적인 환경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환경 속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란 반응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는 아직도 나 자신에게 있다. 라고 그는 스스로를 향해서 외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태도를 가지고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의 자유, 그것은 아직도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실험으로 증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둘러 싸고 부정적 선택을 했던 한 사례를 살펴 보았습니다. 빌라도의 선택, 그것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악의 선택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빌라도의 선택과 아주 대조가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직후, 예수께서 운명하신 직후에 일어 났던 사건입니다. 이것은 정반대의 긍정적 선택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가능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소위 아리마대 요셉의 선택입니다. 그의 선택은 어떠한 선택이었을까요
첫째로 그의 선택은 공개적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공개적 선택. 성경은 이 사람을 소개하면서 아리마대 요셉이다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의 이름이 아리마대 요셉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아마 성씨는 요셉이고 이름은 아리마대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라는 것은 본래 지명입니다. 유대 중앙 산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한 20마일 정도 올라가면 존재하는 한 작은 마을, 본래는 라마다임소빔 이라고 불리워졌던 마을인데 바로 사무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거기 출신,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다. 왜 이렇게 구별할 필요가 있느냐 하면 요셉이라는 이름이 워낙 흔하고 보편적인 이름이니까 요셉아 하면 서너 사람이 함께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이런 구별이 필요했던 거죠. 마치 제가 이 자리에서 명자야 하면 서너 사람이 대답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흔한 이름이 명자죠. 그래서 우리가 무지개 마을 명자, 수지 마을 명자, 서초 마을 명자 이렇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지개 마을 명자는 제 집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같은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기사를 읽어 보면 이 사람은 아주 본래 일찍이부터 예수를 믿고 따르던 제자였다는 기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한번 찾아 보시면요. 요한복음 19장 38절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한 소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 자, 찾으신 분은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 다같이 시작.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 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자, 여기에서는 이 사람을 소개하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예수의 제자였다고 말해요.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예수의 제자지만 제자나라는 이 뉘앙스가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예수의 제자나. 유태인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가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던 제자, 일종의 예수 그리스도의 007 제자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회사에 가서는 예수 안 믿는 척 하시는 분들, 이런 분들 계시지 않은지 모르겠어요 제가 얼마 전에 아주 황당한 일을 당했는데요. 어떤 모 그룹 잘 알려진 회사에 신우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분을 만났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 교회에 다니는 어떤 분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우리 교회 이 분 아십니까 물었더니 그 분이 깜짝 놀라면서 아, 그래요, 그 분이 크리스챤입니까 그러더라 구요. 제가 너무 너무 미안했어요. 어디 그냥 기어 들어 가고 싶더라 구요. 틀림없이 아마 자기가 크리스챤이라는 걸 숨기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 아니셨는가 생각됩니다. 그 분이 회사의 좀 높은 분이었기 때문에 혹시 그것을 자기가 알리면 어떤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라는 어떤 생각 때문에 별로 그 티를 내지 않고 있었던 분일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지금 여기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은 이런 유형의 제자 그것이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숨길 수 없는 시점 앞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공개적인 장소에 끌려 나와 그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에게 이런 변화를 주었을까 우리는 자세히 동기를 성경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아마도 십자가 사건을 둘러 싼 어떤 충격이 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그는 먼 곳에서 계속해서 아마 그는 주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던 그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을까요 혹은 자신이 아픔과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함께 매달린 강도 중의 한 사람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란 부르짖음 앞에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던 당당했던 그 모습, 그것이 그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캄캄한 어둠이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을 향해서 내려오고 하늘이 빛을 잃어 버리던 그 순간, 마침내 그 분이 운명한 후에 그 광경을 지켜 보았던 로마의 백부장 조차도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왔을지 몰라요. 내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어떤 죄책감도 있었을 거예요. 그가 돌아가시자 마자, 돌아가시자 마자 이제 금요일 날 밤이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장례식을 지낼 수가 없습니다. 장례라도 지내드려야지. 그는 마침내 빌라도 에게 찾아가서 시체를 주어서 장사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는 드디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릴 수 밖에 없는 공개적인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변화 시키기 시작합니다. 또 자기 자신의 삶을 변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변화 시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은폐하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크리스챤인 것을 숨기는 한 영향을 줄 수가 없어요. 편할 지는 모르죠. 그러나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리마대 요셉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리자마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일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계속 요한복음서의 기사를 계속 추적해 보면 19장 38절을 또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은폐하더니,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숨겼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드디어 빌라도 앞에 나와서 담대하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 광경을 보고 그 다음 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39절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온지라 즉,아리마대 요셉의 공개적인 선택의 결단이 또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어요. 누구에게 니고데모. 성경은 말하길 일찍 예수께 밤에 나왔던 니고데모 여러분, 니고데모와 예수의 처음 만남 그 장면을 생각하십니까 밤중에 나와서 예수님 앞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는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때 틀림없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개인 전도로 거듭났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후에 니고데모의 활동이 없잖아요. 그러니 니고데모도 소위 007 제자단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아리마대 요셉이 공개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 마자 어떻게 됐어요 그 다음에 보면, 여기 39절에 일찍 예수께 밤에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이유, 성경은 밤에 란 단어를 결코 침묵을 하지 않고 여기에 그대로 집어 넣고 있습니다. 이 사람도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리는 것을 힘들어 하는 모습들을 많이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찾아 왔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런데 드디어 그 밤중에 찾아 왔고 예수 믿는 것을 숨기고 있었던 니고데모도. 이 단어. 니고데모도 드디어. 드디어 장례 행렬에 참여하게 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공개적 신앙의 고백은 영향을 끼쳐요. 주변에 영향을 끼쳐요.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삶에도 영향을 줍니다. 공개적으로 신앙을 선언하면 책임이 따라 옵니다. 그것은 내 신앙 성숙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선언만 해 놓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런 사람은 차라리 007로 있는 것이 나을 지도 몰라요. 여러분, 회사에서 여러분이 크리스챤인 것을 알리십니까 알릴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내가 광고를 안 해도요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식사기도 한 번 하면 야 저 사람 크리스챤이구나 아 크리스챤이로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회사에서는 전혀 예수님과 상관 없는 척 속으로 딱 하고 먹어 버리는. 틀림없이 웃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일단 정중하게 기도를 해보세요. 아 저 친구 크리스챤이었구나. 그 다음부터 나를 주목한단 말이죠. 책임을 져야 돼요. 크리스챤 다운 업무처리, 크리스챤 다운 성실성, 크리스챤 다운 정직함 이런 삶이 요구되는 것이죠. 나에게 도움이 돼요 그것이. 저는 차 뒤에 물고기표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그건 담대한 공개적인 신앙의 고백이거든요. 이 차를 몰고 가는 나는 크리스챤이다 이말이예요, 물고기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딱 물고기표 달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물고기표 달고 다니면서도 빨간불에 빨리 빨리 지나가고 뭐 막 운전하는 사람 있어요. 그럴래면 차라리 그것 떼고 007의 자리로 돌아 가십시오. 그러나 내가 그걸 달았다면 빨간불에 서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좀 시켜주고 정확하고 천천히 제대로 운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말할까요 자 저 사람 크리스챤인 모양인데 과연 다르구나 다르구나 공개적 신앙 고백은 내 신앙 고백에 도움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가 공개적으로 나오기를 꺼려 하는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 왜 우리가 전도하길 꺼려 하는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빌리그래함 전도협회에서 세계 각 도시를 다니면서 전도대회를 하는데 저녁에는 전도집회를 하고 낮에는 전도학교를 합니다. School of Evangelism 전도학교를. 그걸 하면서 통계를 냈어요. 왜 크리스챤들이 전도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전도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전도 안 합니다. 이런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것은 0.001%도 안돼. 왜 사람들이 전도하지 않는가 너무 바빠서 전도하지 못 하겠다 9%, 9%고, 세계적인 통계예요. 그 다음에 내 삶이 모범이 되지 못 해서 전도하지 못 하겠다 14%, 그 다음 28%는 전도하는 방법을 몰라서. 내가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도방법을 몰라서 그러니까 전도 훈련을 받는 것이 필요해요. 훈련 받으면 다 할 수 있어요. 우리 교회 전도폭발 훈련이 있지 않습니까 전도방법이 무지해서 28%, 그런데 51%는 뭐냐 하면 내가 전도하다가 거절 당할 까봐 두려워서. 이 두려움 이예요. 두려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까 내가 크리스챤인 것을 알렸다가, 전도했다가, 내가 회사에서 왕따 당하지 않을까 내가 왕창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 fear, 두려움 때문에. 이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단 내가 그리스도인 인 것을 선포하면 내 삶 속엔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전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은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모르죠. 그 전까지는 믿으나 마나 영향력이 없는 삶, 그러나 그가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삶이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공개적 선택,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선택, 이 선택은 두 번째로 모험적 선택이었습니다. 모험적 선택. 본문에서 마가는 요셉의 결단을 소개하면서 그 결단은 당돌한 결단이었다고 말합니다.
43절에 보세요. 본문 43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뭐라고 그랬어요 당돌히 빌라도에게. 당돌히 빌라도 에게 시체를 요구했다. 당돌하게. 성경은 그것이 당돌한 행위였다 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당돌하게 다른 말로 바꾸면 당돌하다는 말은 대담하게 이 말입니다. 대담하게. 담대하게. Boldly. 담대하게. 대담하게 이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모험적인 행동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모험적인 선택이었고 결단이었습니다. 왜 모험이었습니까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자기의 모든 지위와 출세의 담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43절을 계속 읽어 보시면요 빌라도 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존귀한 공회원이요 그랬습니다. 공회원.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70명으로 구성된 소위 산헤드린 이라고 불리워 지는 의회가 조직되어 있었어요. 그 중의 한 멤버예요. 국회의원 비슷한 사람. 자, 그런데 범법자로 붙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어간 예수, 그가 예수 편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는 그 사회에서 정말 문자 그대로 왕따를 당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제 무시를 받고 어쩌면 자기의 자리까지고 잃어 버릴 수 있었던 결단입니다. 자기 모가지가 관계된, 자기 지위와 자기 명예를 잃어 버릴 수가 있었던 결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험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주 앞에 구체적인 헌신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자 마자 그의 삶이 영향을 주기 시작해요. 니고데모를 변화 시키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삶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신앙 생활 하지만 신앙 생활이 재미가 없다 이런 분 계세요 소위 신앙 생활의 매너리즘, 주일날 예배 드리고 왔다 갔다 그것밖에는 의미가 없는 사람 변화가 없어요. 감격이 없습니다. 다이내믹한 삶의 생동감이 없어요. 무력한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저 주일날 예배 드릴 땐 뭔가 좀 느껴지다가 그 다음에는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삶. 뭔가 좀 달라져야 겠다는 느낌을 갖지 않습니까 제가 그 방법을 가르쳐 드릴께요.
한 번 신앙 앞에 목숨을 걸어 봐요. 좀 희생을 시작해 봐요. 구체적인 희생 그리고 헌신을 해 보세요. 내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 앞에 드리고 시간을 바치고 사랑을 바치고 그러면서 영혼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구체적 헌신의 삶을 시작해 보세요. 인생이 좀 달라질 거예요. 주님은 주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모험적인 결단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나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저는 신앙은 일종의 도박이라고 생각해요. 파스칼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거룩한 도박입니다. 거룩한 모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엠(OEM) 선교회 총재인 조지 보어, 우리 교회도 다녀 갔습니다만, 그가 구원 받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젊은 시절에 예수 앞에 자기 일생을 몽땅 받치기로 결심합니다. 친구들이 물었어요. 소감이 어떠냐 그때 그는 이런 인상 깊은 말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갔다 No turning back.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나는 건넜다. 나는 이제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저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의 도브 해협을 건너가서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서 영국에 도착하자 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하면 그들이 타고 왔던 모든 배들을 불살라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자, 군인들이, 시저의 부하들이 무얼 느꼈을까요 우리는 돌아갈 순 없다 이제. 앞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 싸울 수 밖에 없다. 나가야 한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손에 쟁기를 잡고서 만약 뒤를 돌아다 본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고 기왕에 믿으려면 좀 제대로 믿어요. 시시하게 믿지 말고. 이런 모험적인 선택, 이런 거룩한 도박, 그러나 흥분 있고 스릴 있고 보람 있고 감격 있고 눈물이 있는 삶, 아리마대 요셉은 바로 그 선택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모험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로 그의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었습니다. 자, 아리마대 요셉을 본문이 소개하면서 계속 보면 이런 인상 깊은 단어들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43절 맨 마지막에 보시면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그 다음에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다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과거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었다 가 아닙니다. 소위 현재 분사로 쓰여져 있어요.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 말입니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가 왔을 때 그리고 그가 메시야임을 확신했을 때 바로 그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했습니다.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의 시작을 어떤 메시지의 선포로 시작하셨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장례나 잘 치러 드리자 그게 아니 예요 여러분. 본문의 사건이 그런 얘기 아닙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사건을 주목하면서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구세주 되심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 분은 기어이 그가 예언하신 그대로 다시 살아 날 것이다. 저는 이 부활 신앙을 그가 갖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아마도 구약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사야 53장이 있죠 저 유명한 메시야의 수난을 예언하고 있는 그런 예언의 장이 아닙니까 그 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사야 53장에 보시면 그 중에 이런 예언이 있어요.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얻어 강도들 사이에서 죽을 것이고. 구약에 이미 그 예언이 있어요. 그 뿐만 아니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무덤은 부자의 묘실과 함께 할 것이다. 아마도 아리마대 요셉이 그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아마 흥분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성경이 기록한 부자가 나일지 몰라. 내가 쓰임을 받을 수 있을 지 몰라. 그래서 그는 마태복음의 기사에 보면 그냥 무덤이 아니라 새 무덤을 준비합니다. 정결한 세마포를 준비하고 그리고 새 무덤, 아무도 쓰이지 않은 새로운 무덤을 준비합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계시다가, 안식하시다가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완성하시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자라. 그리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는 기쁘게 자기의 무덤을 내어 놓았습니다. 자기 재산을 내어 놓은 것이지요.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내어 놓습니다. 그는 이제 지상의 부요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저 영원한 명예, 하늘의 부요를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땅의 명예, 땅의 이름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명예. 사람들은 나를 몰라 주어도 좋다. 아니 나는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고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나를 알아 주신다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기꺼이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 앞에 내어 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빛깔을 달리합니다.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붙잡히기 시작합니다. 쓰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의 인생은 역동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삶은 찬란한 빛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움을 받고 성령님충만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진짜 인생을 살아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순간적인 이 땅에 있는 것, 지나가 버릴 명예, 지나가 버릴 이름, 지나가 버릴 부요에 그의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의 선택, 그의 결단은 영원을 향한 선택이었고 영원을 향한 결단이었습니다. 후회할 필요가 없는 결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22살 먹은 사람 하나, 저음의 아름다운, 매력적인 바리톤 보이스를 갖고 있던 사람,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우고 있었어요. 미국의 NBC방송은 거액을 주고 전속 계약을 체결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마침 바로 비슷한 때에 그는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의 젊은이 하나를 만나서 그의 메시지에 매료 당하여 우리 함께 전세계에 다니면서 당신은 노래하고 나는 복음을 전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는 NBC의 전속 계약 체결을 거절했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자기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책상 위에 자기 어머니가 애송하는 성시 한 편이 있었습니다. 그 성시를 쭉 읽어 보다가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붓을 들어 작곡을 시작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을 없네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빌리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그 곁에서 동역하며 찬양사역을 감당한 조지 베버리 셰어 할아버지의 간증입니다. 그는 수년 전 암스텔담에서 세계 수많은 전도자들이 몰려들었을 때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설교직전에 노구의 백발을 흩날리면서 이 찬송을 불렀어요. 그가 앞에 올라왔을 때 사람들은 standing obeisance 하면서 끝없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는 그 박수를 진정시키면서 인상 깊은 한마디 말을 또 던졌습니다. 박수가 감사합니다만은 나는 예수가 더 좋습니다.Id rather have the Jesus. 예수가 난 더 좋아요.
그런데 이런 충격적 사실들을 경험하면서 놀라운 사실은 그 분의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 그 간수들까지도 아주 놀랬다고 합니다. 한번은 나치의 게슈타포가 그를 발가벗겨 갖고 하루종일 나체로 끌고 다녔습니다. 아마도 그를 지켜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흥분한다든지 분노하는 사람들, 그리고 저주하고 대드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가스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그날 하루종일 자기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대들은 나에게서 부모를 빼앗아 가고, 또 내 처도 빼앗아 가고, 내 자식들도 빼앗아 갔다. 그러나 절대로 그대들이 나에게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은 바로 내 선택의 자유다. 내가 비극적인 환경을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환경 속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란 반응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는 아직도 나 자신에게 있다. 라고 그는 스스로를 향해서 외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태도를 가지고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의 자유, 그것은 아직도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실험으로 증명해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둘러 싸고 부정적 선택을 했던 한 사례를 살펴 보았습니다. 빌라도의 선택, 그것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악의 선택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빌라도의 선택과 아주 대조가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직후, 예수께서 운명하신 직후에 일어 났던 사건입니다. 이것은 정반대의 긍정적 선택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가능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소위 아리마대 요셉의 선택입니다. 그의 선택은 어떠한 선택이었을까요
첫째로 그의 선택은 공개적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공개적 선택. 성경은 이 사람을 소개하면서 아리마대 요셉이다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의 이름이 아리마대 요셉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아마 성씨는 요셉이고 이름은 아리마대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라는 것은 본래 지명입니다. 유대 중앙 산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한 20마일 정도 올라가면 존재하는 한 작은 마을, 본래는 라마다임소빔 이라고 불리워졌던 마을인데 바로 사무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거기 출신,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다. 왜 이렇게 구별할 필요가 있느냐 하면 요셉이라는 이름이 워낙 흔하고 보편적인 이름이니까 요셉아 하면 서너 사람이 함께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이런 구별이 필요했던 거죠. 마치 제가 이 자리에서 명자야 하면 서너 사람이 대답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흔한 이름이 명자죠. 그래서 우리가 무지개 마을 명자, 수지 마을 명자, 서초 마을 명자 이렇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지개 마을 명자는 제 집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같은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기사를 읽어 보면 이 사람은 아주 본래 일찍이부터 예수를 믿고 따르던 제자였다는 기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한번 찾아 보시면요. 요한복음 19장 38절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한 소개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 자, 찾으신 분은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 다같이 시작.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 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자, 여기에서는 이 사람을 소개하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예수의 제자였다고 말해요.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예수의 제자지만 제자나라는 이 뉘앙스가 아주 흥미롭지 않습니까 예수의 제자나. 유태인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가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던 제자, 일종의 예수 그리스도의 007 제자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회사에 가서는 예수 안 믿는 척 하시는 분들, 이런 분들 계시지 않은지 모르겠어요 제가 얼마 전에 아주 황당한 일을 당했는데요. 어떤 모 그룹 잘 알려진 회사에 신우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분을 만났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리 교회에 다니는 어떤 분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우리 교회 이 분 아십니까 물었더니 그 분이 깜짝 놀라면서 아, 그래요, 그 분이 크리스챤입니까 그러더라 구요. 제가 너무 너무 미안했어요. 어디 그냥 기어 들어 가고 싶더라 구요. 틀림없이 아마 자기가 크리스챤이라는 걸 숨기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 아니셨는가 생각됩니다. 그 분이 회사의 좀 높은 분이었기 때문에 혹시 그것을 자기가 알리면 어떤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라는 어떤 생각 때문에 별로 그 티를 내지 않고 있었던 분일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지금 여기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은 이런 유형의 제자 그것이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을 숨길 수 없는 시점 앞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공개적인 장소에 끌려 나와 그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에게 이런 변화를 주었을까 우리는 자세히 동기를 성경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추측컨대 아마도 십자가 사건을 둘러 싼 어떤 충격이 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그는 먼 곳에서 계속해서 아마 그는 주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던 그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을까요 혹은 자신이 아픔과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함께 매달린 강도 중의 한 사람의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란 부르짖음 앞에 자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던 당당했던 그 모습, 그것이 그에게 어떤 감동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캄캄한 어둠이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을 향해서 내려오고 하늘이 빛을 잃어 버리던 그 순간, 마침내 그 분이 운명한 후에 그 광경을 지켜 보았던 로마의 백부장 조차도 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마음에 변화가 왔을지 몰라요. 내가 예수님이 돌아가시는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어떤 죄책감도 있었을 거예요. 그가 돌아가시자 마자, 돌아가시자 마자 이제 금요일 날 밤이면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장례식을 지낼 수가 없습니다. 장례라도 지내드려야지. 그는 마침내 빌라도 에게 찾아가서 시체를 주어서 장사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는 드디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릴 수 밖에 없는 공개적인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변화 시키기 시작합니다. 또 자기 자신의 삶을 변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변화 시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은폐하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크리스챤인 것을 숨기는 한 영향을 줄 수가 없어요. 편할 지는 모르죠. 그러나 영향을 줄 수가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리마대 요셉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리자마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일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계속 요한복음서의 기사를 계속 추적해 보면 19장 38절을 또 보십시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은폐하더니,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숨겼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드디어 빌라도 앞에 나와서 담대하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 광경을 보고 그 다음 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39절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온지라 즉,아리마대 요셉의 공개적인 선택의 결단이 또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어요. 누구에게 니고데모. 성경은 말하길 일찍 예수께 밤에 나왔던 니고데모 여러분, 니고데모와 예수의 처음 만남 그 장면을 생각하십니까 밤중에 나와서 예수님 앞에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는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그때 틀림없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개인 전도로 거듭났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후에 니고데모의 활동이 없잖아요. 그러니 니고데모도 소위 007 제자단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아리마대 요셉이 공개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 마자 어떻게 됐어요 그 다음에 보면, 여기 39절에 일찍 예수께 밤에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던 이유, 성경은 밤에 란 단어를 결코 침묵을 하지 않고 여기에 그대로 집어 넣고 있습니다. 이 사람도 사회적 신분이 높을수록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리는 것을 힘들어 하는 모습들을 많이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찾아 왔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런데 드디어 그 밤중에 찾아 왔고 예수 믿는 것을 숨기고 있었던 니고데모도. 이 단어. 니고데모도 드디어. 드디어 장례 행렬에 참여하게 된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공개적 신앙의 고백은 영향을 끼쳐요. 주변에 영향을 끼쳐요.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삶에도 영향을 줍니다. 공개적으로 신앙을 선언하면 책임이 따라 옵니다. 그것은 내 신앙 성숙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선언만 해 놓고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런 사람은 차라리 007로 있는 것이 나을 지도 몰라요. 여러분, 회사에서 여러분이 크리스챤인 것을 알리십니까 알릴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내가 광고를 안 해도요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식사기도 한 번 하면 야 저 사람 크리스챤이구나 아 크리스챤이로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회사에서는 전혀 예수님과 상관 없는 척 속으로 딱 하고 먹어 버리는. 틀림없이 웃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일단 정중하게 기도를 해보세요. 아 저 친구 크리스챤이었구나. 그 다음부터 나를 주목한단 말이죠. 책임을 져야 돼요. 크리스챤 다운 업무처리, 크리스챤 다운 성실성, 크리스챤 다운 정직함 이런 삶이 요구되는 것이죠. 나에게 도움이 돼요 그것이. 저는 차 뒤에 물고기표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굉장히 존경합니다. 그건 담대한 공개적인 신앙의 고백이거든요. 이 차를 몰고 가는 나는 크리스챤이다 이말이예요, 물고기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딱 물고기표 달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물고기표 달고 다니면서도 빨간불에 빨리 빨리 지나가고 뭐 막 운전하는 사람 있어요. 그럴래면 차라리 그것 떼고 007의 자리로 돌아 가십시오. 그러나 내가 그걸 달았다면 빨간불에 서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좀 시켜주고 정확하고 천천히 제대로 운전하게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말할까요 자 저 사람 크리스챤인 모양인데 과연 다르구나 다르구나 공개적 신앙 고백은 내 신앙 고백에 도움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가 공개적으로 나오기를 꺼려 하는 이유는 두려움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 왜 우리가 전도하길 꺼려 하는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빌리그래함 전도협회에서 세계 각 도시를 다니면서 전도대회를 하는데 저녁에는 전도집회를 하고 낮에는 전도학교를 합니다. School of Evangelism 전도학교를. 그걸 하면서 통계를 냈어요. 왜 크리스챤들이 전도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전도하기 싫습니다. 그래서 전도 안 합니다. 이런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그것은 0.001%도 안돼. 왜 사람들이 전도하지 않는가 너무 바빠서 전도하지 못 하겠다 9%, 9%고, 세계적인 통계예요. 그 다음에 내 삶이 모범이 되지 못 해서 전도하지 못 하겠다 14%, 그 다음 28%는 전도하는 방법을 몰라서. 내가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도방법을 몰라서 그러니까 전도 훈련을 받는 것이 필요해요. 훈련 받으면 다 할 수 있어요. 우리 교회 전도폭발 훈련이 있지 않습니까 전도방법이 무지해서 28%, 그런데 51%는 뭐냐 하면 내가 전도하다가 거절 당할 까봐 두려워서. 이 두려움 이예요. 두려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까 내가 크리스챤인 것을 알렸다가, 전도했다가, 내가 회사에서 왕따 당하지 않을까 내가 왕창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 fear, 두려움 때문에. 이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단 내가 그리스도인 인 것을 선포하면 내 삶 속엔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전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삶은 바로 이때부터였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모르죠. 그 전까지는 믿으나 마나 영향력이 없는 삶, 그러나 그가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삶이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공개적 선택, 얼마나 중요합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선택, 이 선택은 두 번째로 모험적 선택이었습니다. 모험적 선택. 본문에서 마가는 요셉의 결단을 소개하면서 그 결단은 당돌한 결단이었다고 말합니다.
43절에 보세요. 본문 43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뭐라고 그랬어요 당돌히 빌라도에게. 당돌히 빌라도 에게 시체를 요구했다. 당돌하게. 성경은 그것이 당돌한 행위였다 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당돌하게 다른 말로 바꾸면 당돌하다는 말은 대담하게 이 말입니다. 대담하게. 담대하게. Boldly. 담대하게. 대담하게 이 말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모험적인 행동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모험적인 선택이었고 결단이었습니다. 왜 모험이었습니까 잘못하면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자기의 모든 지위와 출세의 담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43절을 계속 읽어 보시면요 빌라도 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존귀한 공회원이요 그랬습니다. 공회원.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70명으로 구성된 소위 산헤드린 이라고 불리워 지는 의회가 조직되어 있었어요. 그 중의 한 멤버예요. 국회의원 비슷한 사람. 자, 그런데 범법자로 붙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어간 예수, 그가 예수 편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그는 그 사회에서 정말 문자 그대로 왕따를 당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제 무시를 받고 어쩌면 자기의 자리까지고 잃어 버릴 수 있었던 결단입니다. 자기 모가지가 관계된, 자기 지위와 자기 명예를 잃어 버릴 수가 있었던 결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험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주 앞에 구체적인 헌신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자 마자 그의 삶이 영향을 주기 시작해요. 니고데모를 변화 시키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삶을 시작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내가 신앙 생활 하지만 신앙 생활이 재미가 없다 이런 분 계세요 소위 신앙 생활의 매너리즘, 주일날 예배 드리고 왔다 갔다 그것밖에는 의미가 없는 사람 변화가 없어요. 감격이 없습니다. 다이내믹한 삶의 생동감이 없어요. 무력한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저 주일날 예배 드릴 땐 뭔가 좀 느껴지다가 그 다음에는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삶. 뭔가 좀 달라져야 겠다는 느낌을 갖지 않습니까 제가 그 방법을 가르쳐 드릴께요.
한 번 신앙 앞에 목숨을 걸어 봐요. 좀 희생을 시작해 봐요. 구체적인 희생 그리고 헌신을 해 보세요. 내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 앞에 드리고 시간을 바치고 사랑을 바치고 그러면서 영혼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구체적 헌신의 삶을 시작해 보세요. 인생이 좀 달라질 거예요. 주님은 주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모험적인 결단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나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저는 신앙은 일종의 도박이라고 생각해요. 파스칼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거룩한 도박입니다. 거룩한 모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엠(OEM) 선교회 총재인 조지 보어, 우리 교회도 다녀 갔습니다만, 그가 구원 받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젊은 시절에 예수 앞에 자기 일생을 몽땅 받치기로 결심합니다. 친구들이 물었어요. 소감이 어떠냐 그때 그는 이런 인상 깊은 말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갔다 No turning back.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나는 건넜다. 나는 이제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저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의 도브 해협을 건너가서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서 영국에 도착하자 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뭐냐 하면 그들이 타고 왔던 모든 배들을 불살라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자, 군인들이, 시저의 부하들이 무얼 느꼈을까요 우리는 돌아갈 순 없다 이제. 앞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 싸울 수 밖에 없다. 나가야 한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손에 쟁기를 잡고서 만약 뒤를 돌아다 본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고 기왕에 믿으려면 좀 제대로 믿어요. 시시하게 믿지 말고. 이런 모험적인 선택, 이런 거룩한 도박, 그러나 흥분 있고 스릴 있고 보람 있고 감격 있고 눈물이 있는 삶, 아리마대 요셉은 바로 그 선택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모험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로 그의 선택은 영원한 선택이었습니다. 자, 아리마대 요셉을 본문이 소개하면서 계속 보면 이런 인상 깊은 단어들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43절 맨 마지막에 보시면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그 다음에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다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과거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었다 가 아닙니다. 소위 현재 분사로 쓰여져 있어요.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 말입니다. 예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가 왔을 때 그리고 그가 메시야임을 확신했을 때 바로 그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했습니다. 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의 시작을 어떤 메시지의 선포로 시작하셨습니까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장례나 잘 치러 드리자 그게 아니 예요 여러분. 본문의 사건이 그런 얘기 아닙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사건을 주목하면서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을, 구세주 되심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 분은 기어이 그가 예언하신 그대로 다시 살아 날 것이다. 저는 이 부활 신앙을 그가 갖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아마도 구약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사야 53장이 있죠 저 유명한 메시야의 수난을 예언하고 있는 그런 예언의 장이 아닙니까 그 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사야 53장에 보시면 그 중에 이런 예언이 있어요.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얻어 강도들 사이에서 죽을 것이고. 구약에 이미 그 예언이 있어요. 그 뿐만 아니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무덤은 부자의 묘실과 함께 할 것이다. 아마도 아리마대 요셉이 그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아마 흥분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성경이 기록한 부자가 나일지 몰라. 내가 쓰임을 받을 수 있을 지 몰라. 그래서 그는 마태복음의 기사에 보면 그냥 무덤이 아니라 새 무덤을 준비합니다. 정결한 세마포를 준비하고 그리고 새 무덤, 아무도 쓰이지 않은 새로운 무덤을 준비합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계시다가, 안식하시다가 일어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완성하시고야 말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자라. 그리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는 기쁘게 자기의 무덤을 내어 놓았습니다. 자기 재산을 내어 놓은 것이지요.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을 내어 놓습니다. 그는 이제 지상의 부요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저 영원한 명예, 하늘의 부요를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땅의 명예, 땅의 이름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명예. 사람들은 나를 몰라 주어도 좋다. 아니 나는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고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나를 알아 주신다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기꺼이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주 앞에 내어 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빛깔을 달리합니다. 그의 삶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붙잡히기 시작합니다. 쓰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의 인생은 역동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삶은 찬란한 빛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움을 받고 성령님충만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진짜 인생을 살아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순간적인 이 땅에 있는 것, 지나가 버릴 명예, 지나가 버릴 이름, 지나가 버릴 부요에 그의 관심이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의 선택, 그의 결단은 영원을 향한 선택이었고 영원을 향한 결단이었습니다. 후회할 필요가 없는 결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22살 먹은 사람 하나, 저음의 아름다운, 매력적인 바리톤 보이스를 갖고 있던 사람,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우고 있었어요. 미국의 NBC방송은 거액을 주고 전속 계약을 체결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마침 바로 비슷한 때에 그는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나이의 젊은이 하나를 만나서 그의 메시지에 매료 당하여 우리 함께 전세계에 다니면서 당신은 노래하고 나는 복음을 전하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는 NBC의 전속 계약 체결을 거절했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자기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책상 위에 자기 어머니가 애송하는 성시 한 편이 있었습니다. 그 성시를 쭉 읽어 보다가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붓을 들어 작곡을 시작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을 없네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빌리그래함 목사님과 평생을 그 곁에서 동역하며 찬양사역을 감당한 조지 베버리 셰어 할아버지의 간증입니다. 그는 수년 전 암스텔담에서 세계 수많은 전도자들이 몰려들었을 때 빌리그래함 목사님이 설교직전에 노구의 백발을 흩날리면서 이 찬송을 불렀어요. 그가 앞에 올라왔을 때 사람들은 standing obeisance 하면서 끝없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는 그 박수를 진정시키면서 인상 깊은 한마디 말을 또 던졌습니다. 박수가 감사합니다만은 나는 예수가 더 좋습니다.Id rather have the Jesus. 예수가 난 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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