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시민 (빌3:18-20)
본문
오래 전 어느 기독교 월간지에 제가 잘 아는 선배 목사님과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제일 마지막 질문은 '목사님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이었는데 그에 대한 그 목사님의 대답은 '자유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이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대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기독교 신앙의 정곡을 찌르는 대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는 자유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원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 죄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 정욕에 대한 욕심은 우리에게 본능입니다. 그 욕심이 우리를 악하게 합니다. 추하게 합니다. 초라한 삶을 살게 합니다. 비굴한 삶을 살게 합니다. 옹졸한 삶을 살게 합니다. 치사한 삶을 살게 합니다. 시시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종과 같아서 그 욕심과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평생을 얽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욕심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욕심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욕심은 부리면 부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리고 사는 욕심은 그와 같이 의롭고 아름다운 욕심이 아닙니다. 가치 없는 것들입니다. 욕심대로 살아봤자 별 볼일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참다운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 욕심을 가지고 사느라고 정말 가치 있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삶은 흉내도 내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쓸데도 없는 욕심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싸우며 다투며 온갖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된 우리들이 한 평생 오직 먹을 것 하나 만을 생각하고 사는 짐승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일에 종처럼 얽매여 그처럼 초라하고 옹졸한 삶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오로지 땅만을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저도 있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그럴 듯 하게 하지만 제 속에 있는 본능도 그 쓸데도 없는 욕심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밤낮 초라하고 옹졸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귀한 시간과 생명을 낭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저는 그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참으로 자유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자유를 위하여 머리를 깍고 세상과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보통 용기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용기 있는 삶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도피입니다. 도피를 통하여 우리는 잠간 동안의 착각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으나 진정한 참 자유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참 자유는 도피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자유를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거듭남 삶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세상의 욕심을 다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참 자유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여전히 로마시민권을 가진 채 그것을 주를 위하여 잘 사용하고 쓰면서 로마시민권에 대한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훌륭하게 살았습니다. 법적으로 로마시민권을 포기함으로 로마시민권에 대한 인간적인 욕심과 미련을 끊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주를 위하여 잘 쓰고 사용하면서 그 대단한 힘과 권력을 자신을 위하여 쓰지 않고 그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의미의 자유를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데도 처할 줄 알게 되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함으로부터 도피하고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함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함을 주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인 것입니다. 부함으로부터 도피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누리는 채 극복할 때 부함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도망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부러 붙잡으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도망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렇게 살면 비천함과 가난함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하면 부한 대로 비천하면 비천한 대로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이 얻기를 원하셨던 것은 우리의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땅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하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하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막혔던 하나님과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막혔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보는 자는 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하늘을 사랑하는 사람은 땅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과 땅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막내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형들하고 놀면서 말을 배워서 그런지 저희 막내 아이가 제일 먼저 배운 말 중에 하나는 '100원'이라는 말이었습니다. 100원을 가지고 형들과 함께 가게를 가면 그것으로 사탕도 살 수 있고 장난감 시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면서 아이는 100원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100원의 가치를 깨닫자 100원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그 욕심을 위하여 100원이라는 말부터 배운 것입니다. 어느 날 심방을 가려고 하는데 막내가 팔을 벌리고 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100원' 하며 외쳤습니다. 통행료를 내고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아이에게 100원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100원짜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500원 짜리 동전이 있길래 너 오늘 수지 맞았다라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막내 아이가 500원짜리를 손바닥 올려놓은 채 제 얼굴을 한번 고 제 손의 돈을 한번보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이가 500원짜리를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그것이 돈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니 아빠가 진짜 돈을 준 것인가 아니면 가짜 돈을 주고 장난을 하는 것인가가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더니 아이가 그 웃음을 오해하고 500원짜리 동전을 방바닥에 던지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잉 100원' !. 그때 큰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열아 그거 500원이다. 100원짜리 다섯 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막내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100원, 100원'만을 외칠 뿐이었습니다. 500원의 가치를 모르는 아이는 100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500원의 가치를 아는 아이는 100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지 못한 사람은 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본 사람은 드디어 땅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땅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늘과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그 하늘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늘을 보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부터 우리는 드디어 땅에 살지만 땅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땅에 얽매여 욕심과 죄의 종노릇하며 시시하게 초라하게 옹졸하고 비굴하게 살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훌륭하게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땅에 얽매여 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땅에 얽매여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는 땅에 벗어나 자유 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믿는 것인데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땅에 더 얽매이기 위하여 예수를 믿습니다. 땅에 대한 더 많은 욕심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주에 말씀드린 예수를 미시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오늘 사도바울을 통하여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거꾸로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벗어나 자유하는 삶을 살라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떻게 그 예수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 땅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똑같이 땅의 일만을 생각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은 그와 같은 삶을 사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시민권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사모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시민권을 얻게 되면 우리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로 우리를 세상과 만물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세상과 만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통하여 우리의 낮고 천한 몸과 삶이 하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과 삶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의 말씀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아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하늘로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요 하늘에서의 삶은 영원입니다. 잠시 동안의 삶에 욕심부리다가 눈이 어두워져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요 어리석음입니다. 땅의 것은 우리에게 만족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죽을 때 하늘로 가져가지도 못합니다. 만족도 주지 못하고 하늘로 가져가지도 못할 것에 연연하여 욕심부리고,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음으로 옹졸하고 비굴하며 시시하고 치사한 삶 평생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도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사탄이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놀라운 계획입니다. 땅에서 자유 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에서 도망하지 말고 땅과 세상을 극복하시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다음에 죽어서 살 천국의 삶을 지금부터 이 땅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쓴 책 중에 함철훈이라고 하는 사진작가와 함께 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쓴 책 중에 가장 안 팔린 책인데 사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그 책 중의 제일 첫 번째 글은 '하늘을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신천옹(信天翁)이라고 하는 새가 높은 하늘을 나는 사진을 가지고 쓴 글입니다. 그 글을 소개해 드리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하늘을 사는 사람 고려대 기독 학생들의 채플에 같다가 사진가 함철훈씨를 만났다. 한번 얼굴을 익힌 적이 있어서 반갑게 인사할 수가 있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슬라이드의 주제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주제만 듣고도 감동이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상을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수요 예배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한 장도 볼 수 없었지만, 본 것 만큼이나 감동을 받았다. 흥분되 어조로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하는 사진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러나 분주한 일상에 묻혀 나는 그를 잊었다.
그런데 기독교수들의 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 갔다가 거기서 그를 또다시 만났다. 함께 식사를 했는데 여전히 흥분하며 나의 설교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의 사진이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한 번 그 사진을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다. 그는 흔쾌히 승했고 드디어 식구들과 함께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그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느겼던 감동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평소 늘 만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왔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만났던 것이다. 그는 실력 있는 사진 작가이다. 큰맘 먹고 일하지 않아도 적당히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을 찍으면서 얼마든지 넉넉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찍고 싶어하시는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격어야만 했다. 거의 3년 가까이 한달에 6만원 하는 창고 같은 방, 아니 창고에서 생식을하며 버텼다. 모세와 바울 그리고 다윗과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그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고집을 통하여 그의 사진들이 나왔다. 그의 사진에 메시지가 실라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사진에 나타나면서 그는 흥분했다. 세상에 없는 부요함으로 부요해지고 세상에 없는 기쁨으로 들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의 가난함과 인간적인 외로움을 말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그가 찍은 사진 중에 하늘을 비상하고 있는 신천옹의 사진이 있다. 그는 그 사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여 놓았다. 그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알아낼 수 있다.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히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높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 내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조차 난 이곳에 떠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먹인 난알로도 단 한발로 모든 것을 끝내 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 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굴레를 훌훌 털어버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삶,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그 바울의 삶을 오늘 그가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는 기쁨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참된 부요가 어떤 것인지를 하는 사람이다. 이 땅에서도 천국 즉 하늘을 사는 사람이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예수를 아는 순간, 그분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간, 하늘을 믿는 신천옹(信天翁)이 되는 순간, 그가 믿는 하늘이 자신의 것이 되어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기가막힌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삶이 부유할 수도 가난할 수도 있고 높아질 수도 낮아 질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그리고 하나님게 기도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 오늘 거룩한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도 다 이같이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 참으로 자유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종과 같아서 그 욕심과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평생을 얽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욕심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욕심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욕심은 부리면 부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리고 사는 욕심은 그와 같이 의롭고 아름다운 욕심이 아닙니다. 가치 없는 것들입니다. 욕심대로 살아봤자 별 볼일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참다운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 욕심을 가지고 사느라고 정말 가치 있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삶은 흉내도 내보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쓸데도 없는 욕심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싸우며 다투며 온갖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된 우리들이 한 평생 오직 먹을 것 하나 만을 생각하고 사는 짐승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일에 종처럼 얽매여 그처럼 초라하고 옹졸한 삶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오로지 땅만을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저도 있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그럴 듯 하게 하지만 제 속에 있는 본능도 그 쓸데도 없는 욕심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밤낮 초라하고 옹졸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귀한 시간과 생명을 낭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저는 그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참으로 자유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와 같은 자유를 위하여 머리를 깍고 세상과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보통 용기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용기 있는 삶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도피입니다. 도피를 통하여 우리는 잠간 동안의 착각 같은 자유를 누릴 수 있으나 진정한 참 자유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참 자유는 도피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자유를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거듭남 삶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세상의 욕심을 다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참 자유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여전히 로마시민권을 가진 채 그것을 주를 위하여 잘 사용하고 쓰면서 로마시민권에 대한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훌륭하게 살았습니다. 법적으로 로마시민권을 포기함으로 로마시민권에 대한 인간적인 욕심과 미련을 끊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주를 위하여 잘 쓰고 사용하면서 그 대단한 힘과 권력을 자신을 위하여 쓰지 않고 그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의미의 자유를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데도 처할 줄 알게 되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함으로부터 도피하고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함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함을 주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삶인 것입니다. 부함으로부터 도피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누리는 채 극복할 때 부함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도망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부러 붙잡으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도망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렇게 살면 비천함과 가난함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하면 부한 대로 비천하면 비천한 대로 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이 얻기를 원하셨던 것은 우리의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땅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하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하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막혔던 하나님과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막혔던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보는 자는 땅을 버릴 수 있습니다. 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하늘을 사랑하는 사람은 땅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과 땅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막내 아이가 두 돌이 지나면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형들하고 놀면서 말을 배워서 그런지 저희 막내 아이가 제일 먼저 배운 말 중에 하나는 '100원'이라는 말이었습니다. 100원을 가지고 형들과 함께 가게를 가면 그것으로 사탕도 살 수 있고 장난감 시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면서 아이는 100원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100원의 가치를 깨닫자 100원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그 욕심을 위하여 100원이라는 말부터 배운 것입니다. 어느 날 심방을 가려고 하는데 막내가 팔을 벌리고 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며 '100원' 하며 외쳤습니다. 통행료를 내고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아이에게 100원을 주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100원짜리가 없었습니다. 마침 500원 짜리 동전이 있길래 너 오늘 수지 맞았다라고 생각하며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막내 아이가 500원짜리를 손바닥 올려놓은 채 제 얼굴을 한번 고 제 손의 돈을 한번보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이가 500원짜리를 처음 보는 것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그것이 돈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니 아빠가 진짜 돈을 준 것인가 아니면 가짜 돈을 주고 장난을 하는 것인가가 의심스러웠던 것입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더니 아이가 그 웃음을 오해하고 500원짜리 동전을 방바닥에 던지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잉 100원' !. 그때 큰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정열아 그거 500원이다. 100원짜리 다섯 개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막내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100원, 100원'만을 외칠 뿐이었습니다. 500원의 가치를 모르는 아이는 100원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500원의 가치를 아는 아이는 100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보지 못한 사람은 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본 사람은 드디어 땅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땅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늘과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그 하늘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늘을 보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부터 우리는 드디어 땅에 살지만 땅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땅에 얽매여 욕심과 죄의 종노릇하며 시시하게 초라하게 옹졸하고 비굴하게 살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훌륭하게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땅에 얽매여 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땅에 얽매여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는 땅에 벗어나 자유 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믿는 것인데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땅에 더 얽매이기 위하여 예수를 믿습니다. 땅에 대한 더 많은 욕심을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주에 말씀드린 예수를 미시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오늘 사도바울을 통하여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거꾸로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벗어나 자유하는 삶을 살라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떻게 그 예수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이 땅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똑같이 땅의 일만을 생각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은 그와 같은 삶을 사는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시민권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사모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시민권을 얻게 되면 우리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로 우리를 세상과 만물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세상과 만물로부터 자유하는 삶을 통하여 우리의 낮고 천한 몸과 삶이 하나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과 삶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의 말씀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아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하늘로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요 하늘에서의 삶은 영원입니다. 잠시 동안의 삶에 욕심부리다가 눈이 어두워져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요 어리석음입니다. 땅의 것은 우리에게 만족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죽을 때 하늘로 가져가지도 못합니다. 만족도 주지 못하고 하늘로 가져가지도 못할 것에 연연하여 욕심부리고,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음으로 옹졸하고 비굴하며 시시하고 치사한 삶 평생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도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사탄이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놀라운 계획입니다. 땅에서 자유 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에서 도망하지 말고 땅과 세상을 극복하시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다음에 죽어서 살 천국의 삶을 지금부터 이 땅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제가 쓴 책 중에 함철훈이라고 하는 사진작가와 함께 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쓴 책 중에 가장 안 팔린 책인데 사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입니다. 그 책 중의 제일 첫 번째 글은 '하늘을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신천옹(信天翁)이라고 하는 새가 높은 하늘을 나는 사진을 가지고 쓴 글입니다. 그 글을 소개해 드리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하늘을 사는 사람 고려대 기독 학생들의 채플에 같다가 사진가 함철훈씨를 만났다. 한번 얼굴을 익힌 적이 있어서 반갑게 인사할 수가 있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찍은 슬라이드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슬라이드의 주제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주제만 듣고도 감동이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과 세상을 창조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수요 예배 시간이 급박했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한 장도 볼 수 없었지만, 본 것 만큼이나 감동을 받았다. 흥분되 어조로 '보이지 않는 손'을 설명하는 사진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러나 분주한 일상에 묻혀 나는 그를 잊었다.
그런데 기독교수들의 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 갔다가 거기서 그를 또다시 만났다. 함께 식사를 했는데 여전히 흥분하며 나의 설교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의 사진이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한 번 그 사진을 볼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했다. 그는 흔쾌히 승했고 드디어 식구들과 함께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그의 사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느겼던 감동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평소 늘 만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왔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만났던 것이다. 그는 실력 있는 사진 작가이다. 큰맘 먹고 일하지 않아도 적당히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을 찍으면서 얼마든지 넉넉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찍고 싶어하시는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사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격어야만 했다. 거의 3년 가까이 한달에 6만원 하는 창고 같은 방, 아니 창고에서 생식을하며 버텼다. 모세와 바울 그리고 다윗과 예수님의 광야 생활을 그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고집을 통하여 그의 사진들이 나왔다. 그의 사진에 메시지가 실라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사진에 나타나면서 그는 흥분했다. 세상에 없는 부요함으로 부요해지고 세상에 없는 기쁨으로 들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자신의 가난함과 인간적인 외로움을 말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그가 찍은 사진 중에 하늘을 비상하고 있는 신천옹의 사진이 있다. 그는 그 사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여 놓았다. 그 글과 사진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알아낼 수 있다.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모든게 하찮아졌어 두 번씩이나 접히는 내 크고 고운 날개도 더 높이 날아서 더 멀리 봐야 한다는 의지도 그래, 이름 석자를 위해 퍼덕이기엔 난 너무 늙었어 신천옹, 내 이름만큼이나 하늘 위에 더 높은 하늘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난 자주 여기서 살아 날개를 접고 부리를 땅에 박고 있을 때조차 난 이곳에 떠있지 약해진 두 발목을 노리는 올가미로도, 약먹인 난알로도 단 한발로 모든 것을 끝내 버리는 총알로도 날 여기서 끌어내릴 순 없어 난 이미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을 내 안에 넣어 뒀거든 하늘은 이미 내 안에 살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던 바울,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굴레를 훌훌 털어버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삶,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그 바울의 삶을 오늘 그가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그는 기쁨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참된 부요가 어떤 것인지를 하는 사람이다. 이 땅에서도 천국 즉 하늘을 사는 사람이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예수를 아는 순간, 그분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간, 하늘을 믿는 신천옹(信天翁)이 되는 순간, 그가 믿는 하늘이 자신의 것이 되어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기가막힌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삶이 부유할 수도 가난할 수도 있고 높아질 수도 낮아 질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며 늘 감사하며 그리고 하나님게 기도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 오늘 거룩한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도 다 이같이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 참으로 자유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