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에서 1 (막4:35-41)
본문
이스라엘을 처음 여행해 본 사람은 이해가 안 되는 한 지명을 성경에서 생각해냅니다. 갈릴리 호수를 왜 바다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바다는 기껏해야 둘레가 18km 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가장 먼 지점의 직경이 한 10km밖에 안됩니다. 평평한 수면 위로 맞은 편을 보기 때문에 10km가 한 2-3km 밖에 안 되는 것처럼 짧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 적은 호수를 왜 바다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지중해 바다를 잘 압니다. 지중해를 성경은 "대해(大海)"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갈릴리를 "그 바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관사까지 붙여 그 바다, 어떤 의미로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바다라는 뜻으로 그 조그만한 담수호를 부릅니다. 아마 그 갈릴리 호수의 중요성 때문에 그렇게 부를 것입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유일하게 담수호가 자신들의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 바다"라고 부르지 않나 생각됩니다. 조그마한 호수이기 때문에 그 호수에 떠있는 배가 적습니다. 고깃배도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엄청난 광풍에 둘러 쌓여서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는 그 현장이 잘 이해가 안됩니다. 실제로 자기가 경험해보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제가 첫 안식년 때 노스 캐롤라이나 도햄이라 지역, 듀크 대학 가까이에서 살았습니다. 거기 살던 어느 날 TV를 보는데 화면 아래 자막에 계속 토네이도(Tornado)가 가까이 들어오고 있으니 이러이러한 것들을 조심하라는 멘트가 나타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토네이도가 도착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한 경고를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토네이도는 회리 바람인데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똑같이 회리바람이라고 써졌어요. '내가 어렸을 때 바닷가에 살면서 회리 바람을 꽤 봤는데, 회리 바람 가지고 그처럼 요란 법석을 떠는가 미국 사람들 엄살도 크게 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토네이도가 제가 살고 있는 옆 동네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을이 완전히 뽑혀 가지고 밑의 기초만 남아있습니다. 큰 백화점마다 세워진 큰 조명 철탑이 있는데 이 철탑들이 50m, 100m 밖에 널부러져 있습니다. 미국의 차가 얼마나 큽니까 8기통 짜리 캐딜락 같은 차가 벌렁 뒤로 넘어져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일이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 미국은 큰 나라다. 나라가 클 뿐 아니라 바람도 크고 죄도 크고 사람도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의 믿음도 큰 것을 봅니다. 하여튼 큰 나라인 것이 사실입니다. 신문을 통해 토네이도가 미국의 어디를 강타했다는 소식만 접하고 있다가 그 엄청난 회리 바람의 위력 앞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와 흡사한 막강한 돌풍이 바로 이 갈릴리 호수에 간혹 불어닥쳤습니다. 지형이 양쪽으로 언덕이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4천 미터나 되는 높은 헐몬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냉기류가 헐몬산 꼭대기에서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낮은 계곡을 향해서 빨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얼마나 그 바람의 위세가 큰 지, 거기에서 텐트를 쳐봤던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쳐놓았던 텐트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벽돌장 처럼 큰 돌들이 날기 시작하는데 바람의 위력이 이렇게 큰가하고 깜짝 놀랐답니다. 또 제가 백두산에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백두산 가기 며칠 전에 백두산에 머물던 기상요원이 바람에 휘말려 한 7,8m 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즉사했다고 했습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도 바람이 불면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런 무서운 광풍이 이 조그마한 호수를 엄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강을 건너가고 계십니다. 가는 도중에 이 바람을 만났단 말입니다. 그 바람과 함께 그 제자들은 죽게 된 자기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물길을 압니다. 바람의 거셈을 압니다.
그런데 그날 분 바람은 베드로마저도, 야고보 마저도, 안드레 마저도, 요한 마저도, 어릴 때부터 그 물가에 살았던 이 사람들 이 살 수 없게 되었다고 깨달았던 바람인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제자들이 다 그랬는지 한 제자가 그랬는지, 배 고물에 머리를 대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고요하라, 잠잠하라" 외칩니다.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집니다. 평온을 다시 되찾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 생애에도, 이 세상이 당하는 폭풍을 똑같이 만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경제위기 의 한파는 무섭게 닥쳤습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실업사태를 경험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식량과 연탄 사놓고 한 달을 어떻게 지내야될지 고민해야될 날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어려운 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어렵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봐야될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형통한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 분이 너무 큰 보배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보화라는 것을 초개처럼 버리고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못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을 받을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제자 12명 가운데 11명은 모두 사형을 당했고 그리고 유일하게 사도 요한만 향년을 다 누리고 살았지만 그의 말로도 인간적으로는 비참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거지였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아니, 이 시대에도 예수 믿는 사업가,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납니다. 예수 믿는 공무원, 예수 믿기 때문에 섬김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세상에 돌풍은 여지없이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괴롭히지만 그 중의 어떤 경우에는 예수 믿기 때문에 더 큰 고난과 아픔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문제없는 생애를 만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문제를 극복하고 그 문제를 넘어서는 인생을 만들기 원하십니다. 믿음의 장부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노도광풍이 부는 그 시간에 많은 배들이 그 정도 바람이면 침몰했어야 됩니다. 아니, 자연재해 앞에 사람이 만든 것은 너무 초라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영국이 타이타닉호라는 배를 만들어놓고 세계적으로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릅니다. 이 배는 물에 띄울 수 있는 칸들을 여러 개 만들어서 구멍이 대 여섯개 나도 가라앉지 않도록 모든 설계를 완벽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시공도 정확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배를 타고 다니면서 이 배만은 절대로 난파할 수 없다, 침몰할 수 없다고 자랑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대서양을 건너가다가 큰 풍랑과 빙산을 만납니다. 배의 안전함을 믿었기 때문에 이까짓 자연은 우리의 과학적인 기술로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들이었습니다. 방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거대한 빙산 앞에 부딪친 것입니다. 그 큰 타이타닉 호의 침몰은 역사상 해난 사고로는 가장 비참한 사고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고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 이 조그마한 배는 그 무서운 풍랑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 배의 자질이 다른 배 보다 좋아서 일까요 목재가 좋을까요 아니 그 배의 건조 기술입니까 그 배의 노를 젓는 능숙한 사공들입니까 아닙니다. 그 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습니다. 그 분이 일어나셔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성난 물결을 꾸중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그 말씀대로 그 노도광풍은 잠잠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온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참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더 큰 축복과 특권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으로 물질의 부도 가질 수 있고, 사회적인 신분이 높아질 수도 있고, 지혜가 많아 사람들을 놀라게 해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다니 마을, 슬피 우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가정의 지주인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서 그를 장사지냈고 장사 지낸지도 나흘이나 되어서 그의 시신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슬픔 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거기에 보탤 아무런 사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 집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돌을 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인고로 돌문을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어서 나흘된 썩은 시신이 수의로 묶인 채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님이 계셨단 말입니다. 축복을 받아야될 결혼식 장소,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포도주를 열심히 들이켰습니다. 그 집이 가난했던지, 손님이 너무 많이 왔던지 지금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 결혼식이 파장이 되버리게 생겼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갈릴리 가나안 혼인잔치가 세상의 모든 혼인 잔치하고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인들은 열심히 물을 채웁니다. 떠서 가져다주어라. 아직까지 물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2:9) 포도주 떠온 하인이 아닙니다. 그 때까지도 포도주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시자 어떤 큰 결혼식 보다 더 풍성한 축복의 결혼식으로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가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을 집어넣어도 내 욕심을 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이 세상 재물이고 이 세상 권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시면 달라집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풍성한 삶을 삽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풍요를 맛본단 말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가 그 풍요를 맛보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노도광풍이 부는 갈릴리 호수, 그 무서운 광풍을 만난 그 곳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계시는 곳마다 새롭게 바꾸어놓습니다. 그 중에 근본적으로 바뀌어진 것, 역사상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이 완전히 바뀌어진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사형 도구입니다. 카르타고 사람들이 민족반역자를 죽일 때 십자가 형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그 의미는 이 사람은 너무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땅에 묻힐 자격도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수반됩니다. 십자가라고 하면 대개 손바닥에 못 자국을 그려놓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손바닥 위에 못을 박으면 체중을 이기지 못해 찢긴답니다. 그래서 뼈가 모여있는 손목에 못을 칩니다. 못을 칠 때도 울릉도 오징어 말리듯이 쫙 펴서 못을 박으면 그래도 조금 나은데, 느슨하게 못을 칩니다. 그래서 손에 힘을 주면 발에 힘을 줄 수 없고 발에 힘을 주면 손에 힘을 줄 수 없어서 의식이 있는 한 꿈틀거리며 계속 그 고통을 곱씹어야 됩니다. 너무 아파서 기절했다가 너무 아파서 다시 깨어나는 이 고통이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끝장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였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였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었습니다. 키케로(Cicero)는 그의 글에서 "로마 시민은 십자가 같은 것은 해당되지도 않고 머리로 상상해서도 안되는 물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잔혹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에서 십자가 사형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로마 시민권자만은 어떤 경우에도 십자가에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이 사형을 당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목베임을 당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똑같은 죄목이었고 똑같은 무게의 사형언도였지만 로마 시민권자인 사도 바울에게는 목베어 죽이는 간단한 사형방법을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십자가 우리 주님이 지셨습니다. 그러자 그 십자가의 의미가 주검에서 생명으로 바뀝니다. 패배가 생명으로 바뀝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바뀝니다. 불안이 평화로 바뀝니다. 역사상 십자가만큼 근본적으로 그 개념이 변화된 예가 있는가 찾아보세요. 세상에 어디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그 십자가에 달렸었단 말입니다. 그러자 그 다음부터 십자가의 절망은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평화가 되었습니다. 참다운 구원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십자가를 바꾸어버린 우리 주님, 이 고깃배에 계셨던 그 주님이 내 인생에 계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은 임마누엘이니라." 함께 하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말씀하시도록 해야됩니다. "주여 이 풍랑을, 나의 이 무서운 고통을, 환난을 잠잠하라 명하소서." 우리 주님을 깨워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 고해야됩니다. 우리 주님이 계신 그 배는 세상에서 풍랑 만난 다른 배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는 제자들은 우리 주님께 꾸중을 당합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주께서 질문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습니다. 주께서 내게 평안과 기쁨과 감격을 주심을 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에는 주님이 안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진실로 환난을 당할 때 그 환난과 주님이 같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나 혼자 당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우리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에게 믿음이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교회만 다니는 믿음이라면, 그리고 영생의 확신을 얻었다는 한 개념으로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 주님께서 오늘 내 환경, 내 어려움, 내 고통 속에 함께 하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주께서 묻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예수 믿어도 기적은 다른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고 내게는 없는 것이다. 간증은 전도사에게만 있는 것이지 평신도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밀알학교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우리 주님께서 작년 12월 17일날 풀어주셨거든요. 그것은 남서울 은혜교회만 있는 것이지, 내 어려운 경제 형편에는 해당 안된다구요 아닙니다. 그 주님이 내 주님이심을 믿습니까 과거에는 우리 주님이 나를 도우신 것을 내가 믿는다, 그러나 지금 이 형편, 지금의 이 어려움과는 주님이 상관 없다구요 아닙니다. 이 풍랑이 이는 바다, 평생 물에서 자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가 죽게 되었다고 절망하던 그 때에 그들은 주님이 주무시는 것을 주님이 안계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어요. 여러분, 내가 당하는 어려움, 내가 당하는 이 환난, 주님이 전혀 상관없을 것인 것처럼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놓고 회개해야될 것입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소서. 믿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 믿음은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주는 놀라운 기회가 됩니다. 사람들이 "이 분이 어떤 분이기에 바람과 파도도 잠잠하는고" 그리고 그를 믿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 분이 내 믿음의 주인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혀서 누구든지 기도하면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다니엘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주님,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한 다니엘 옆에 사자가 강아지처럼, 호랑이는 고양이 새끼처럼 잠잠하고 고요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애굽의 대군이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도망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만 보입니다. 그 현장에서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너희는 오늘날 가만히 서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네 눈앞에 있는 저 적군들은 다시는 영영 네 눈 앞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팡이를 내밀었습니다. 물과 뭍이 나눠지라고 명령하신 주님 앞에 물과 뭍이 나눠졌는데 하물며 조그마한 홍해일까 보냐 그 큰 바다가 우리 주님 명령이 떨어지자 물과 뭍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을 바라본 이 모세에게 믿음의 놀라운 능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만방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가나안 복지로 진군할 때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덜덜덜 떨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제위기 한파, 매섭고 매몰차게 우리 앞에 돌진해올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을 빼놓으려고 들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은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도 똑같이 어려움 당한다는 것, 기억하십시오. 아니 우리가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가지, 우리가 가는 내 인생 항로에 주님이 나의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십니다. 그 때야말로 믿음의 기회입니다. 이런 위기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신앙을 요구합니다. 내 고백을 묻습니다. "네가 믿는 예수가 어떤 분이냐 개념이냐, 그렇지 않으면 네 삶 속에 역사하는 능력이냐" 내게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대해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믿음의 기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바다는 기껏해야 둘레가 18km 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가장 먼 지점의 직경이 한 10km밖에 안됩니다. 평평한 수면 위로 맞은 편을 보기 때문에 10km가 한 2-3km 밖에 안 되는 것처럼 짧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 적은 호수를 왜 바다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지중해 바다를 잘 압니다. 지중해를 성경은 "대해(大海)"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갈릴리를 "그 바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정관사까지 붙여 그 바다, 어떤 의미로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바다라는 뜻으로 그 조그만한 담수호를 부릅니다. 아마 그 갈릴리 호수의 중요성 때문에 그렇게 부를 것입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유일하게 담수호가 자신들의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 바다"라고 부르지 않나 생각됩니다. 조그마한 호수이기 때문에 그 호수에 떠있는 배가 적습니다. 고깃배도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엄청난 광풍에 둘러 쌓여서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는 그 현장이 잘 이해가 안됩니다. 실제로 자기가 경험해보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제가 첫 안식년 때 노스 캐롤라이나 도햄이라 지역, 듀크 대학 가까이에서 살았습니다. 거기 살던 어느 날 TV를 보는데 화면 아래 자막에 계속 토네이도(Tornado)가 가까이 들어오고 있으니 이러이러한 것들을 조심하라는 멘트가 나타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토네이도가 도착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한 경고를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토네이도는 회리 바람인데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똑같이 회리바람이라고 써졌어요. '내가 어렸을 때 바닷가에 살면서 회리 바람을 꽤 봤는데, 회리 바람 가지고 그처럼 요란 법석을 떠는가 미국 사람들 엄살도 크게 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토네이도가 제가 살고 있는 옆 동네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을이 완전히 뽑혀 가지고 밑의 기초만 남아있습니다. 큰 백화점마다 세워진 큰 조명 철탑이 있는데 이 철탑들이 50m, 100m 밖에 널부러져 있습니다. 미국의 차가 얼마나 큽니까 8기통 짜리 캐딜락 같은 차가 벌렁 뒤로 넘어져 있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일이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 미국은 큰 나라다. 나라가 클 뿐 아니라 바람도 크고 죄도 크고 사람도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의 믿음도 큰 것을 봅니다. 하여튼 큰 나라인 것이 사실입니다. 신문을 통해 토네이도가 미국의 어디를 강타했다는 소식만 접하고 있다가 그 엄청난 회리 바람의 위력 앞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와 흡사한 막강한 돌풍이 바로 이 갈릴리 호수에 간혹 불어닥쳤습니다. 지형이 양쪽으로 언덕이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는 4천 미터나 되는 높은 헐몬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냉기류가 헐몬산 꼭대기에서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낮은 계곡을 향해서 빨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얼마나 그 바람의 위세가 큰 지, 거기에서 텐트를 쳐봤던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쳐놓았던 텐트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벽돌장 처럼 큰 돌들이 날기 시작하는데 바람의 위력이 이렇게 큰가하고 깜짝 놀랐답니다. 또 제가 백두산에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백두산 가기 며칠 전에 백두산에 머물던 기상요원이 바람에 휘말려 한 7,8m 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즉사했다고 했습니다. 백두산 꼭대기에서도 바람이 불면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런 무서운 광풍이 이 조그마한 호수를 엄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강을 건너가고 계십니다. 가는 도중에 이 바람을 만났단 말입니다. 그 바람과 함께 그 제자들은 죽게 된 자기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 물길을 압니다. 바람의 거셈을 압니다.
그런데 그날 분 바람은 베드로마저도, 야고보 마저도, 안드레 마저도, 요한 마저도, 어릴 때부터 그 물가에 살았던 이 사람들 이 살 수 없게 되었다고 깨달았던 바람인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제자들이 다 그랬는지 한 제자가 그랬는지, 배 고물에 머리를 대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향해서 "고요하라, 잠잠하라" 외칩니다.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집니다. 평온을 다시 되찾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우리 생애에도, 이 세상이 당하는 폭풍을 똑같이 만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경제위기 의 한파는 무섭게 닥쳤습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실업사태를 경험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식량과 연탄 사놓고 한 달을 어떻게 지내야될지 고민해야될 날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어려운 때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어렵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봐야될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 사실입니다. 예수 믿고 형통한 것,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 분이 너무 큰 보배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보화라는 것을 초개처럼 버리고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지 못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을 받을 수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제자 12명 가운데 11명은 모두 사형을 당했고 그리고 유일하게 사도 요한만 향년을 다 누리고 살았지만 그의 말로도 인간적으로는 비참했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거지였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많은 것을 포기했습니다. 아니, 이 시대에도 예수 믿는 사업가,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납니다. 예수 믿는 공무원, 예수 믿기 때문에 섬김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세상에 돌풍은 여지없이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괴롭히지만 그 중의 어떤 경우에는 예수 믿기 때문에 더 큰 고난과 아픔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문제없는 생애를 만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문제를 극복하고 그 문제를 넘어서는 인생을 만들기 원하십니다. 믿음의 장부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노도광풍이 부는 그 시간에 많은 배들이 그 정도 바람이면 침몰했어야 됩니다. 아니, 자연재해 앞에 사람이 만든 것은 너무 초라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영국이 타이타닉호라는 배를 만들어놓고 세계적으로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릅니다. 이 배는 물에 띄울 수 있는 칸들을 여러 개 만들어서 구멍이 대 여섯개 나도 가라앉지 않도록 모든 설계를 완벽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시공도 정확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배를 타고 다니면서 이 배만은 절대로 난파할 수 없다, 침몰할 수 없다고 자랑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대서양을 건너가다가 큰 풍랑과 빙산을 만납니다. 배의 안전함을 믿었기 때문에 이까짓 자연은 우리의 과학적인 기술로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들이었습니다. 방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거대한 빙산 앞에 부딪친 것입니다. 그 큰 타이타닉 호의 침몰은 역사상 해난 사고로는 가장 비참한 사고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사고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 이 조그마한 배는 그 무서운 풍랑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 배의 자질이 다른 배 보다 좋아서 일까요 목재가 좋을까요 아니 그 배의 건조 기술입니까 그 배의 노를 젓는 능숙한 사공들입니까 아닙니다. 그 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습니다. 그 분이 일어나셔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성난 물결을 꾸중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그 말씀대로 그 노도광풍은 잠잠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온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참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더 큰 축복과 특권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으로 물질의 부도 가질 수 있고, 사회적인 신분이 높아질 수도 있고, 지혜가 많아 사람들을 놀라게 해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 보다 더 중요한 것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베다니 마을, 슬피 우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가정의 지주인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서 그를 장사지냈고 장사 지낸지도 나흘이나 되어서 그의 시신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슬픔 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거기에 보탤 아무런 사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 집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돌을 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인고로 돌문을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죽어서 나흘된 썩은 시신이 수의로 묶인 채 벌떡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님이 계셨단 말입니다. 축복을 받아야될 결혼식 장소,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포도주를 열심히 들이켰습니다. 그 집이 가난했던지, 손님이 너무 많이 왔던지 지금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 결혼식이 파장이 되버리게 생겼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갈릴리 가나안 혼인잔치가 세상의 모든 혼인 잔치하고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인들은 열심히 물을 채웁니다. 떠서 가져다주어라. 아직까지 물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요2:9) 포도주 떠온 하인이 아닙니다. 그 때까지도 포도주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시자 어떤 큰 결혼식 보다 더 풍성한 축복의 결혼식으로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가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을 집어넣어도 내 욕심을 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이 세상 재물이고 이 세상 권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시면 달라집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풍성한 삶을 삽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풍요를 맛본단 말입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가 그 풍요를 맛보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노도광풍이 부는 갈릴리 호수, 그 무서운 광풍을 만난 그 곳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계시는 곳마다 새롭게 바꾸어놓습니다. 그 중에 근본적으로 바뀌어진 것, 역사상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이 완전히 바뀌어진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사형 도구입니다. 카르타고 사람들이 민족반역자를 죽일 때 십자가 형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그 의미는 이 사람은 너무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땅에 묻힐 자격도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수반됩니다. 십자가라고 하면 대개 손바닥에 못 자국을 그려놓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손바닥 위에 못을 박으면 체중을 이기지 못해 찢긴답니다. 그래서 뼈가 모여있는 손목에 못을 칩니다. 못을 칠 때도 울릉도 오징어 말리듯이 쫙 펴서 못을 박으면 그래도 조금 나은데, 느슨하게 못을 칩니다. 그래서 손에 힘을 주면 발에 힘을 줄 수 없고 발에 힘을 주면 손에 힘을 줄 수 없어서 의식이 있는 한 꿈틀거리며 계속 그 고통을 곱씹어야 됩니다. 너무 아파서 기절했다가 너무 아파서 다시 깨어나는 이 고통이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끝장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였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였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었습니다. 키케로(Cicero)는 그의 글에서 "로마 시민은 십자가 같은 것은 해당되지도 않고 머리로 상상해서도 안되는 물건"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처럼 잔혹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카르타고에서 십자가 사형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로마 시민권자만은 어떤 경우에도 십자가에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사람이 사형을 당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목베임을 당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똑같은 죄목이었고 똑같은 무게의 사형언도였지만 로마 시민권자인 사도 바울에게는 목베어 죽이는 간단한 사형방법을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십자가 우리 주님이 지셨습니다. 그러자 그 십자가의 의미가 주검에서 생명으로 바뀝니다. 패배가 생명으로 바뀝니다. 저주가 축복으로 바뀝니다. 불안이 평화로 바뀝니다. 역사상 십자가만큼 근본적으로 그 개념이 변화된 예가 있는가 찾아보세요. 세상에 어디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그 십자가에 달렸었단 말입니다. 그러자 그 다음부터 십자가의 절망은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되었습니다. 인류의 평화가 되었습니다. 참다운 구원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십자가를 바꾸어버린 우리 주님, 이 고깃배에 계셨던 그 주님이 내 인생에 계십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은 임마누엘이니라." 함께 하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말씀하시도록 해야됩니다. "주여 이 풍랑을, 나의 이 무서운 고통을, 환난을 잠잠하라 명하소서." 우리 주님을 깨워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 고해야됩니다. 우리 주님이 계신 그 배는 세상에서 풍랑 만난 다른 배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는 제자들은 우리 주님께 꾸중을 당합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주께서 질문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습니다. 주께서 내게 평안과 기쁨과 감격을 주심을 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에는 주님이 안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진실로 환난을 당할 때 그 환난과 주님이 같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나 혼자 당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우리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에게 믿음이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교회만 다니는 믿음이라면, 그리고 영생의 확신을 얻었다는 한 개념으로 끝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 주님께서 오늘 내 환경, 내 어려움, 내 고통 속에 함께 하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주께서 묻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예수 믿어도 기적은 다른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고 내게는 없는 것이다. 간증은 전도사에게만 있는 것이지 평신도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밀알학교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우리 주님께서 작년 12월 17일날 풀어주셨거든요. 그것은 남서울 은혜교회만 있는 것이지, 내 어려운 경제 형편에는 해당 안된다구요 아닙니다. 그 주님이 내 주님이심을 믿습니까 과거에는 우리 주님이 나를 도우신 것을 내가 믿는다, 그러나 지금 이 형편, 지금의 이 어려움과는 주님이 상관 없다구요 아닙니다. 이 풍랑이 이는 바다, 평생 물에서 자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가 죽게 되었다고 절망하던 그 때에 그들은 주님이 주무시는 것을 주님이 안계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어요. 여러분, 내가 당하는 어려움, 내가 당하는 이 환난, 주님이 전혀 상관없을 것인 것처럼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이 시간 주님 앞에 내놓고 회개해야될 것입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소서. 믿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 믿음은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주는 놀라운 기회가 됩니다. 사람들이 "이 분이 어떤 분이기에 바람과 파도도 잠잠하는고" 그리고 그를 믿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 분이 내 믿음의 주인 되십니다. 그렇습니다. 왕의 조서에 어인이 찍혀서 누구든지 기도하면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다니엘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주님, 능력의 주님이 함께 한 다니엘 옆에 사자가 강아지처럼, 호랑이는 고양이 새끼처럼 잠잠하고 고요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애굽의 대군이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도망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만 보입니다. 그 현장에서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너희는 오늘날 가만히 서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네 눈앞에 있는 저 적군들은 다시는 영영 네 눈 앞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팡이를 내밀었습니다. 물과 뭍이 나눠지라고 명령하신 주님 앞에 물과 뭍이 나눠졌는데 하물며 조그마한 홍해일까 보냐 그 큰 바다가 우리 주님 명령이 떨어지자 물과 뭍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을 바라본 이 모세에게 믿음의 놀라운 능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만방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가나안 복지로 진군할 때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덜덜덜 떨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제위기 한파, 매섭고 매몰차게 우리 앞에 돌진해올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을 빼놓으려고 들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은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도 똑같이 어려움 당한다는 것, 기억하십시오. 아니 우리가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가지, 우리가 가는 내 인생 항로에 주님이 나의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십니다. 그 때야말로 믿음의 기회입니다. 이런 위기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신앙을 요구합니다. 내 고백을 묻습니다. "네가 믿는 예수가 어떤 분이냐 개념이냐, 그렇지 않으면 네 삶 속에 역사하는 능력이냐" 내게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대해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이 당하는 모든 어려움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믿음의 기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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