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최후의 기회 (눅19:1-10)

본문

사람에게 가장 싱거운 일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이름을 불러보는 것입니다. 또 가장 심각할 때 사람은 자기 이름을 불러봅니다. 여러분, 자기 이름의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름의 뜻에 대해 요근래 언제 생각해보셨습니까 이름의 뜻은 소중하고, 평생 이름 값만 하면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잘못짓는 경우도 더러 보았습니다. 한 3년 전 동경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자기 아들 이름을 악마라고 지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이름을 호적에 등재(登載)하려고 하는데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소송을 했습니다. 제가 그 곳에 있던 때에 마지막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났습니다. "아빠는 자녀에게 이름 부여할 권리를 가졌다"는 대법원 확정 판결로 그 아이의 이름을 악마로 등재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세상이 악해지니까 이런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제 친구 하나는 성이 정(鄭)씨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흰 백(白)자 하나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이름을 거꾸로 부르며 놀립니다. 그래서 정백이라는 아이는 자기 이름을 무척이나 저주했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최선의 이름을 주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이름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라는 사람도 이름의 뜻은 참 좋았습니다. '순결하다, 깨끗하다'이런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늘 그를 볼 때마다 더러운 사람, 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이 분의 신분에 대해서는 성경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키가 작은 것을 보상하고 싶어서 자기의 키 작은 것만큼 돈을 높이 쌓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의 디딤돌 위에 다른 사람을 위압하고자 자기 민족이 그처럼 싫어하는 세리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오늘날 같은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세무 공무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였던 로마가 황실의 호사를 위해, 전쟁으로 인한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각 정복지에다 할당을 해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러면 그 국가의 세금 총 책임자는 100이 할당되어 내려왔으면 150을 더 붙여서 세금 부과를 명령합니다. 그러면 고을에서는 50을 더 붙여서 세금을 부과합니다. 그래서 원래 로마가 부과한 것보다 어떤 경우에는 3배 이상의 과중한 세금을 정복지 사람들은 내어야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당시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오는 모든 육상 통로는 반드시 여리고를 지나서 유럽이나 중동 지방으로 갑니다. 또 유럽의 문물들이나 북쪽 바빌로니아의 모든 문물들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길목에 위치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모든 문물이 올라올 때 사하라 사막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리고 밑에 있는 가사 지방의 황량한 들판과 사막을 경험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지는 오아시스를 만납니다. 이곳이 바로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물이 좋았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여리고에는 수많은 녹음이 우거져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에게 쉼터를 제공합니다. 중동지방 최대의 오아시스입니다. 당시 로마가 12만의 인구를 자랑하면서 세계 최고의 도시라고 할 때 이 여리고는 군락을 이루어서 5만명의 인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돈이 몰려오니까 사람들이 그처럼 많이 몰려와서 살았습니다. 자연히 돈이 굴러다니는 곳에서 세리장으로 일했으니까 그는 수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사람들의 것을 빼앗고 모았습니다. 그 모은 돈 위에 로마의 권력까지 뒷받침한 채 그는 부요와 세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볼 때마다 나쁜 놈의 대명사로 여겼습니다. 가장 저주받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예수께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누려보면서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마음의 깊은 공백을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그는 예수라는 사람이 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너 가난한 자의 복이여!" 가난한 사람을 향해서 복을 선포합니다. 그 때 마음 속에 많은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는 자기가 참으로 가난하고 초라했던 그 때는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진정한 화목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가난했지만 가난이 주는 이상한 만족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부요로우면서도 과거 6.25 직후에 당했던 그 고난의 시절, 아름다운 추억을 지금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져봤지만 허망하고 과거의 갖지 않음 속에서도 가졌던 이상한 풍요, 삭개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지금 묵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로마의 세도를 가지고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호령했던 권력자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상과 다르지만 무언가 있을 것 같은, 가져보니까 별 것 아닌 내 모습, 그 마음 속 공백을 어찌할 수 없는 그였습니다. 그 때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기로 작정합니다. 사람들 틈에 가려서 볼 수 없는 예수, 삭개오는 자기의 키 작은 장애를 발견합니다. 그는 키 작은것, 예수 볼 수 없는 것을 알자 쫓아 나갑니다. 그리고는 예수가 가는 방향의 길목의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뽕나무도 종류가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 사람이 대나무를 그리는 것과 한국 사람이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 다릅니다. 저는 늘 왜 중국 사람은 대나무를 이상하게 그리는가 하고 의문시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에는 대나무가 30종 밖에 안되는데 중국에는 3,000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30종 밖에 못 보았던 제가 중국 사람이 그린 대나무 보고 이상하다고 말할 수 밖에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뽕나무는 관목입니다. 그러므로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북미에 가면 정원수로 참 많이 씁니다. 또 중동지방의 뽕나무는 상당히 큰 나무로 자라 올라갑니다. 지금도 여리고에 가면 여리고의 가장 큰 뽕나무를 안내원들이 안내해주면서 여기가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라고 가르쳐줍니다. 삭개오는 키 작다는 열등감도 잊은 채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자기 앞에 있는 장애 때문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적은 장애를 만나도 그 장애 때문에 주저앉아버리곤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의롭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왜냐면 댓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장애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십니다. 찾는 자를 만나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 앞에 그 열심으로 삭개오는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가 뽕나무에 올라가 있자 예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사랑의 눈동자 둘이 부딪칩니다.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겠다" 내가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과 비슷한 말씀이 또 다른 성경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수가성에 목마른 여인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4:4) 예수께서 수가성을 지나가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의지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수가성을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왜냐면 구원받은 한 백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목말라하는 한 여인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 소망을 주께서 외면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주님은 자기를 간절히 찾아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가 여리고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그를 만나자 "너희 집에 유하여야겠다. 유할 목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삭개오라는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았을까요 그 분은 나다나엘을 무화과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이름을 모두 아십니다. 그 앞에 빛과 어둠이 일반입니다. 알지 못함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여러분 중에 '예수께서 나를 알까'하는 의심이 있으신 분이 계십니까 아십니다. 그 뿐 아니라 여러분이 어젯밤에 흘렸던 눈물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깊은 한숨을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사정은 아무도 모른다.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내 당하는 그 고통과 곤고를 아십니다. 내 마음 속 깊은 허무함을 아십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그 주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뽕나무에서 속히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아무 질문이 없습니다. 그 분 만난 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한 기적이 사실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 분을 보는 것 자체가 정답이었습니다. 제가 예수 믿기 싫어서 예수 안 믿을 이유에 대한 질문들을 계속 노트에 정리해 보았는데 상당한 양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하나 질문하려고 했는데 질문이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질문이 녹아버렸습니다. 마치 지난 겨울에 쌓였던 눈이 봄이 오자 녹아버린 것처럼, 캄캄한 밤이 해가 뜨자 사라져 버린 것처럼 예수를 만나자 완전히 그 모든 의심과 근심과 그 분을 향한 음성이 다 녹아버렸습니다. 인생에 관한 최대의 문제를 알고 싶으십니까 정답인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모든 의문들이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소멸되어 버리고 맙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자 생애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주여, 내 재산의 반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는 쌓고 쌓고 모으고 모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만족을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를 만나자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부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마음 속에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았던 빈 공간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KOSTA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한 가정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박사 학위 마치고 돌아와서 교회에 나가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부르더니 "네가 교회 나가면 내 재산 하나도 너에게 줄 수 없다. 교회 나가는 것 그만둘래 내 재산 포기할래" 그 이야기를 듣고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아버지가 진정한 부요가 무엇인지 모르시기 때문에 내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하는 태도를 보고 그 아버지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돈 앞에 머리 숙이고 돈이 최고의 가치인데 자기 아들이 도무지 돈에 대해 반응을 하지 않자 그 아버지가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아들의 손에 의해 아버지가 결국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새로운 넘침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삭개오는 토색한 것은 4배나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 4배를 갚겠다는 것은 율법에 도둑놈들이 도적질한 물건을 변상할 때 4배를 갚았습니다. 여기 진정한 회개가 있습니다. 회개는 감정 정도가 아닙니다. 회개는 말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상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이 갖는 태도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쳤으면, 정말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면 그 분에게 사과해야 됩니다. 그 분을 인격적으로 모독했다면 그것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다면 보상을 해줘야 됩니다. 회개의 진정한 열매입니다. 진정한 능력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공무원으로서 돈을 마음대로 벌 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분은 60평 짜리 좋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가용이 없을 때 자가용을 타셨습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 보니 집이 15평으로 줄었더라구요. 그리고 사무실 옆으로 이사가서 자전거 타고 다닙니다. 저는 이것을 보고 진정한 회개라고 감탄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이처럼 연약하고 힘이 없는 이유는 교인 숫자가 많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회개의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회개의 능력을 갖는다면 우리는 경제위기를 넉넉하게 돌파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진정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면 세상은 교회를 보고 놀랄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기대할 것입니다. 삭개오는 새로운 삭개오가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새 삭개오의 모습입니다. 아니 새 삭개오가 아니라 자기 이름대로 돌아간 삭개오입니다. 그의 모든 죄악은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애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에 오늘날 구원이 이르렀고 네가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은 예수 믿고 나서 죽어서 얻는것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을 때부터 누리는 영광입니다. 구원의 삶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생각 따라 살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믿음의 걸음을 내걷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그에게 진정한 구원이 임했습니다. 주께서 말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다시 찾은 바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자기 이름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자의 아픔을 아십니까 잃어버린 자의 고통을 아십니까 제가 언제 만리포 해수욕장을 갔을 때였습니다. 제 큰 아이가 물을 몹시 좋아합니다. 저는 텐트를 손보고 있는데 물을 좋아하는 제 아이가 튜브를 가지고 바닷가로 달려갑니다. 물을 정신없이 쫓아가는 그 아이를 보면서 묶던 줄을 놔두고 멀리서 보며 쫓아갔습니다. 한참 가서 물에 들어가려다 보니까 조금 이상한지 돌아봅니다. 돌아보니까 텐트를 치던 송림에서는 멀리 떨어졌지요. 아빠도 엄마도 안보이지요. 자기 혼자인 것을 이 아이가 알았습니다. 돌아서서 한바퀴 빙 돌더니 울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린 자의 아픔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그래서 가봅니다. 이것이 참 삶인가하고 오늘까지 달렸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니까 내 삶이 전혀 내 삶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랬던 삭개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여기 잃어버려진 자의 고통 뿐 아니라 잃은 자의 고통을 아십니까 제가 얼마전 가슴 아픈 T.V의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개구리 소년 부모들의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나간지 20여 년이 지났는데 오늘도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위해서 문을 잠그지 않고 그 지역을 떠나야 되는데도 그 아이가 돌아오면 이 동네 밖에 돌아올 수 없다며 그 동네를 지키는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멋지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따라 걸작의 생애를 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랬던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어서 나만 고통을 당하는 줄 알았는데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2-3) 그런가하면 예레미야서에서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렘 8:7) 오늘도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있습니다. 또 그 속에서 알찬 인생, 넘치는 생애를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짖음, 간절함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욱 우리 하나님은 나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간절함이 내 생애를 향해 있으십니다. 영광의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다른 사람이 그처럼 멸시하는 여리고를 지나면서 세리 삭개오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여기 최후의 기회를 붙잡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는 여리고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길로 겟세마네로 올라가십니다. 겟세마네로 가신 주님은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삭개오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이 시간 주의 구원의 음성을 듣고 계신 분 계십니까 목말라서 주님이 필요하다고 원하시는 분이 지금 이 시간에 계십니까 우리 주님, 나를 찾아오신 그 주님 앞에 마음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삭개오를 찾아가신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 내 생애에 찾아오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내 이름대로 인생 살기를 원하십니다. 본질대로 내 인생이 펼쳐지기를 우리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 앞에 내 삶이 나아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365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