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요일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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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도대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새로 시작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아버지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삶의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축복들을 부여잡고 그것을 누리는 은혜가 있어야 될 줄 압니다. 예수 믿으면 어떤 사람들은 잘 살아진다고 말합니다. 부자된다고 말합니다. 우리 말에 모순이 많은 것 중 하나는 '잘 산다'는 것과 '돈이 많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실제로 제가 정말 돈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봅니다. 그러면 가난한 목사니까 그 분이 저하고 돈을 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진실하게 열어놓는 경우를 보는데, 그 사람들은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목사님, 왜 인생이 이처럼 무겁습니까 어둡습니까 내가 일에 쫓기어 지금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다니는데 내 삶이 삶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생이 이런 것 아니지 않습니까 목사님 도와주세요." 재물이 많은 것이 잘 사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1등 부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물론 세계 지도를 펴놓고 예수 믿는 나라와 믿지 않는 나라를 구분해서 색을 칠해보면 일반적으로 예수 안 믿는 나라가 가난하고 예수 믿는 나라가 부자로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을 때 물질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한국의 제1 부자는 예수 믿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그러나 현대가 예수 믿는 기업이라는 말을 못들었습니다. 삼성은 원불교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SK는 불교에 가깝습니다. LG는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대우의 김우중씨인데 그 분 어머니가 신앙이 좋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그 분이 예수 믿는다는 소리는 못들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대통령 조찬기도회 때 설교하는데 그 분이 맨 앞 자리에 앉아 있기에 "아, 이 분이 오늘은 예배를 드리는구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소유가 조금 더 덧붙여지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갖는 특권이나 영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사람이 착해진다." 물론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위선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어도 그 괴팍한 성질은 안변하더라구요. 예수 믿어도 주변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조금 개조된 인생, 과거보다 조금 낳은 인생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을 때 근본적인 변화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존재 자체가 바뀝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아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에서 피조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이전과 상관없는 창조물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출발, 하나님의 자녀로의 새로운 삶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직접 낳아주셨다"(요1:13)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낳아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이 사건이 우리에게서 이미 일어났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치 호적을 떼어보면 내가 누구의 자녀인 줄 아는 것처럼 성경을 열어보면 내 신분을 알게 됩니다. 누구라구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새로운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이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는 그 인생의 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면 그 아이는 인생 전체를 밝게 봅니다. 사랑으로 봅니다. 심지어 상대편이 고약한 사람이라 자기를 미워해도 '이 사람은 나를 괴상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나쁘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호의로 대해도 그 사랑을 못받는 아들입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들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돈 많은 아버지를 모셨으면 그 아들은 돈이 많습니다. 또 아버지가 법관이면 자식들도 꼭 고시를 봅니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 아버지가 의사이면 자식이 따라서 의사를 합니다. 저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려줄 것이 있다면 책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 중 하나도 목사가 안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을 자기도 모르게 익숙하게 따라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것이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 이 땅에서 누리는 특권, 그 특권의 몇 가지를 오늘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번 째 특권은 죄용서 받는 특권입니다. 이것 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인생이 불행한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그처럼 사랑했던 사람이 갈라섭니다. 전현주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초롱초롱 "빛나리" 양의 목을 눌러 죽인 여자입니다. 본인이 비참하고 불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후 옥중에 태어난 그의 자녀는 처음부터 저주 받은 인생 아닙니까 생각해보세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죄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와 그 아래 사람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초롱초롱 빛나리양의 부모 마음 속에 있는 고통은 누가 책임집니까 이것이 죄가 만들어낸 고통입니다. 그것 뿐입니까 이 전현주 씨의 부모님이 도망다니는 딸을 향해서 이런 편지를 써보냈다고 합니다. "너, 죽어라. 그러면 우리도 따라 죽을께" 고급 공무원으로 있던 그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딸과 함께 죽고 싶어하는 그 비극을 죄가 만들었습니다. 아니, 그 가족만 불행했나요 우리가 그 사건을 보면서 며칠동안 얼마나 우울해했습니까 세상에 살 맛이 안나지 않았습니까 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죄가 우리를 불행케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곤고가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비참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 죄는 소극적으로 근심, 걱정, 염려, 삶의 무목적, 염세감의 증세로서 우리 마음을 웅크리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현주씨 죄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 아니라고, 아니 특별한 경우를 어떻게 보편화시킬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자녀를 키웁니다. 천사 같이 맑은 우리 아이들, 부모가 거짓말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거짓말 안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거짓말 안하나요 동생이 태어나 엄마가 갓 난 동생이 연약하기 때문에 품안에 안고 있으면 그 아이들의 천사 같은 눈이 갑자기 살기를 띄는 눈으로 변하는 것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엽니다. 배나무는 배를 엽니다. 포도는 만년을 두고 포도를 열매맺습니다. 죄인은 죄를 짓습니다. 공산주의가 크게 잘못했던 것 중 하나는 인간이 죄인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이론으로 인생을 멋지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죄와 상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아직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밝음이 내 인생 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밝음이 내 생애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법이 내 마음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우리들은 이상한 죄를 발견합니다. 내 모습 속에서 진실해야될 때 거짓된 나를 봅니다. 그런가하면 사랑해야될 때 미워하고 있는 나를 봅니다. 내 손을 펴서 주워야 될 때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움켜잡는 내 손을 봅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세워줘야될 때 그 사람을 은근히 짓밟는 못된 내 괴팍한 심령을 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보니까 내가 그처럼 엉터리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야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슈바이쳐 같은 사람, 마하트마 간디 같은 사람, 테레사 같은 사람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죽기 2주 전에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에 보면 이렇게 써 있습니다. '나의 죄가 나를 신으로부터 자꾸 멀리 벌어지게 만드는 곤고함이 내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인류 최고의 성자인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죄악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치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외쳐대고 있는 비참한 신음을 들어보게 됩니다. 이 원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는 여러 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몸을 가진 고래부터 시작해서, 지능이 높기로 유명한 돌고래, 심지어는 단세포로 되어지는 식물까지 여러 가지 수천 수만 가지의 생물이 바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바닷가에 살고 있는 것의 종류는 천차 만별이고, 더 멋지고, 좋은 것 같고, 더 아름다운 것 같고, 더 진화된 것 같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 물 속에서만 살아야되는 공통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모습도 여러 모습이 있지만, 인생은 죄 안에 갇혀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악을 행하여 무익하게 되고 의를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저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3:10-23)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두 죄 아래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죄의 그 무거움에 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있습니다. 인생을 불행케 하는 이 무서운 죄를 해결할 방법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양을 잡아서 가죽으로 그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려주셨습니다. 그 사건 속에서는 "내가 너의 죄를 가려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아담의 아들, 아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 인격을 믿고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이 해주는 제사의 말씀을 믿고 그는 자기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이 아벨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죽는 대신 이 양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여기 내 주검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 원합니다." 그는 소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를 위해 양을 대신 죽인 그 규례를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꺼번에 행하게 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거룩한 족장, 노아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계속 하나님을 향해 죄 대신 양을 죽이는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집트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땅에 재앙을 내립니다. 그 재앙을 경험한 바로왕은 재앙을 당할 때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하나님 말씀 듣겠습니다."했지만 그 재앙이 풀리면 다시 완악해졌습니다. 이것을 아홉번이나 되풀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열번 째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집에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죽이라고 선고했습니다. 모두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밤에 이스라엘의 가장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갑니다. "얘들아, 우리 같이 가자. 우리 양들 가운데 흠 없는 것을 골라라. 발톱이 상했어도 안된다. 헌데가 조금 있어도 안돼. 모양이 틀려먹었어도 안돼. 오른쪽 뿔과 왼쪽 뿔이 삐딱해도 안돼." 좋고 귀한 것들을 고릅니다. "아빠, 왜 이렇게 예쁜 걸 골라야 되나요" 드디어 아이 앞에서 심장을 갈라 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그 양의 피를 문지방과 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밤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저들을 지나갑니다. 이 방에서 큰 소리로 우는 곡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 집에서 통곡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밤에 통곡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했으니까 안심이야.' 코를 골고 자는 사람이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양의 피를 발라놓고도 '이것 좀 발랐다고 해결될까' 벌벌 떨면서 저녁에 한숨 못자고 지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효과는 같았습니다. 효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밤 새 잠을 못 이룬 그 집에도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습니다. Pass Over Day,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경에 유월절이라고 해서 6월 며칠날인가를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습니다. 그 피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양을 죽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가 오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들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양만 죽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땅에 메시야가 오셔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그리스도가 이 땅에 틀림없이 오셨습니다. 그 분 이름을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예수라는 말은 이런 뜻을 가졌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입니다. 어디서입니까 죄에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양을 죽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 분을 예수님이라고 부르려면 내가 예수님 백성이라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에는 예수께서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죽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자기가 죽음 당할 메시야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주여, 그리 마소서."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 죄값을 지고 점도, 티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말이예요.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처럼 죄를 지었다면 죄의 값을 무엇이라고 그랬을까요 죄를 범하였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고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예수가 죄를 지었다면 자기 죄로 죽어야지요. 남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점도, 티도, 흠도 없었기 때문에 남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죄의 형벌을 모두 다 당하셨습니다. 죄 값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존재의 중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사실을 뭐라고 말합니까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기쁨과 보람과 감격과 평안과 축복을 날마다 공급받으면서 인생을 멋지게 삽니다. 그런데 단절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고통을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첫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고 외쳐댔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적인 육신적인 고통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죄를 대신 질 때 하나님과 분리를 경험합니다. 한번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던 예수입니다. 영원토록 영원부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렸습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렸던 예수, 그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죄가 주는 그 분리의 고통을 우리 주님께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죄의 형벌이 시행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가 현실로 내 것이 되었습니다. 죄 용서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죄값을 지불할 때, 또 하나는 그 사람에게 용서받을 때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비유컨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의롭고 정확하고 엄한 법관이 있었습니다. 이 법관이 어느날 심리하는데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걸려들었습니다. 보니까 술을 먹고 어느 상점을 덥쳐 상점의 그 많은 물건을 다 깨뜨렸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상점의 여러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들은 사건의 심리자가 자기 아버지니까 "됐다. 나 살았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공의자 재판장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지은 죄를 조목조목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 증거를 선고했습니다. 너무 중형을 선고하자 그 아들은 "아버지, 너무하다. 잔인하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외쳐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공의로운 법관은 집에 돌아가서 딴 짓을 합니다. 박봉으로 사놓은 집을 팝니다. 생명처럼 아꼈던 서적들을 하나하나 모두 팝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변상해야될 돈들을 마련해서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갚았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었던 그 분은 법정에서 자기 아들을 향해서도 의로운 선고를 했어야 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중한 것을 모두 팔아서 그 아들에게 보상해야될 것을 모두 보상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이것은 사랑의 비밀입니다. 강아지 하나만 사랑해도 10만원짜리 강아지를 치료하기 위해서 천만원도 아깝지 않은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위해서는 줍니다. 못줘서 안달입니다. 내 목숨이라도 바칩니다. 그러면서도 아까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 죄의 형벌을 다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지 않으면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아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서 행하신 그 속죄를 내가 받기를 원합니다. 내 것으로 소유하기 원합니다. 손을 내미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신 선물, 감사합니다. 얼굴을 들수 없지만 내가 그 선물을 받겠습니다."하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성경은 선포합니다. "네 죄가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너희 죄를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나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처럼,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깨끗케 하겠다."(사1:18) "내가 너의 죄가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너희에게서 멀리 옮겼노라."(시103:1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출발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이 구속의 사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사건이 내게 효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서 나는 무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전에서 모두 무지하다고, 형벌이 지워졌다고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 또 죄를 범합니다. 연약해서 또 쓰러집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성경은 빛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그 죄를 주님 앞에 자백하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내가 또 고백하면 됩니다. "주님, 내가 또 넘어졌습니다. 내 연약을 아시는 주님, 용서해주시옵소서. 내가 주님 십자가에 내 마음의 끌림을 따라서 우리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주께서 용서해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용서 밖에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용서 못하는 사건도 부모는 용서합니다. 그런고로 우리 주님 앞에 내 죄를 자백하십시오. 주께서는 널리 용서해주십니다.
그런데 회개하시되 같은 죄를 반복해서 고백하지 마십시오. 10년 전에 회개했던 것, 또 회개하고 그 다음에도 또 회개하고 반복을 합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용서를 안믿는 것입니다.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우리 정목사님께 실수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참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정목사님은 "제가 다 용서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15분 후에 만났는데 "목사님 또 죄송합니다" 그러면 두번까지는 홍목사가 겸손해서, 오죽 가슴 아프면 그러겠는가 할텐데 만날 때마다 10번, 20번 반복하면 나중에 마음 속으로 "홍목사, 내 인격을 믿는거요 안믿는거요 내가 용서했다면 믿어야지!"하고 역정을 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꼭 이렇게 합니다. 미가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발로 밟아 바닷속 깊은 곳에 빠뜨리셨느니라" 우리 죄악을 모두 바닥 깊은 곳에 빠뜨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큰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낚시질을 금함" 내가 한번 중심으로 회개했으면 그 죄는 다시 회개하면 안됩니다. 다시 죄악감을 들게 하는 것은 사탄이 장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서 내가 회개했으면 무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망아,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라고 죽음 앞에서도 큰 소리 치는 인생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세워주십니다.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것 있습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쁨을 잃어버린 것,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비참이 끝나지 않은 것,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죄의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깨끗이 씻겨주시는 그 은총 앞에서 우리 아버지를 다시 만나십시오. 찬란히 빛나는 얼굴로 나를 향해서 나오시는 주의 영광 위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첫번째 특권은 죄 용서받는 특권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위선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어도 그 괴팍한 성질은 안변하더라구요. 예수 믿어도 주변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를 조금 개조된 인생, 과거보다 조금 낳은 인생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을 때 근본적인 변화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존재 자체가 바뀝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아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에서 피조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잘못 번역되었습니다.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이전과 상관없는 창조물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출발, 하나님의 자녀로의 새로운 삶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이 직접 낳아주셨다"(요1:13)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낳아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이 사건이 우리에게서 이미 일어났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치 호적을 떼어보면 내가 누구의 자녀인 줄 아는 것처럼 성경을 열어보면 내 신분을 알게 됩니다. 누구라구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새로운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이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는 그 인생의 출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나면 그 아이는 인생 전체를 밝게 봅니다. 사랑으로 봅니다. 심지어 상대편이 고약한 사람이라 자기를 미워해도 '이 사람은 나를 괴상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나쁘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호의로 대해도 그 사랑을 못받는 아들입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들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습니다. 돈 많은 아버지를 모셨으면 그 아들은 돈이 많습니다. 또 아버지가 법관이면 자식들도 꼭 고시를 봅니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 아버지가 의사이면 자식이 따라서 의사를 합니다. 저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려줄 것이 있다면 책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 중 하나도 목사가 안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을 자기도 모르게 익숙하게 따라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것이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이 이 땅에서 누리는 특권, 그 특권의 몇 가지를 오늘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번 째 특권은 죄용서 받는 특권입니다. 이것 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인생이 불행한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그처럼 사랑했던 사람이 갈라섭니다. 전현주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초롱초롱 "빛나리" 양의 목을 눌러 죽인 여자입니다. 본인이 비참하고 불행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후 옥중에 태어난 그의 자녀는 처음부터 저주 받은 인생 아닙니까 생각해보세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죄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와 그 아래 사람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초롱초롱 빛나리양의 부모 마음 속에 있는 고통은 누가 책임집니까 이것이 죄가 만들어낸 고통입니다. 그것 뿐입니까 이 전현주 씨의 부모님이 도망다니는 딸을 향해서 이런 편지를 써보냈다고 합니다. "너, 죽어라. 그러면 우리도 따라 죽을께" 고급 공무원으로 있던 그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딸과 함께 죽고 싶어하는 그 비극을 죄가 만들었습니다. 아니, 그 가족만 불행했나요 우리가 그 사건을 보면서 며칠동안 얼마나 우울해했습니까 세상에 살 맛이 안나지 않았습니까 죄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죄가 우리를 불행케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 곤고가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비참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 죄는 소극적으로 근심, 걱정, 염려, 삶의 무목적, 염세감의 증세로서 우리 마음을 웅크리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현주씨 죄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죄인 아니라고, 아니 특별한 경우를 어떻게 보편화시킬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자녀를 키웁니다. 천사 같이 맑은 우리 아이들, 부모가 거짓말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거짓말 안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거짓말 안하나요 동생이 태어나 엄마가 갓 난 동생이 연약하기 때문에 품안에 안고 있으면 그 아이들의 천사 같은 눈이 갑자기 살기를 띄는 눈으로 변하는 것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사과나무는 사과를 엽니다. 배나무는 배를 엽니다. 포도는 만년을 두고 포도를 열매맺습니다. 죄인은 죄를 짓습니다. 공산주의가 크게 잘못했던 것 중 하나는 인간이 죄인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이론으로 인생을 멋지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죄와 상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아직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밝음이 내 인생 속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밝음이 내 생애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법이 내 마음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우리들은 이상한 죄를 발견합니다. 내 모습 속에서 진실해야될 때 거짓된 나를 봅니다. 그런가하면 사랑해야될 때 미워하고 있는 나를 봅니다. 내 손을 펴서 주워야 될 때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움켜잡는 내 손을 봅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고 세워줘야될 때 그 사람을 은근히 짓밟는 못된 내 괴팍한 심령을 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 보니까 내가 그처럼 엉터리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야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슈바이쳐 같은 사람, 마하트마 간디 같은 사람, 테레사 같은 사람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죽기 2주 전에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에 보면 이렇게 써 있습니다. '나의 죄가 나를 신으로부터 자꾸 멀리 벌어지게 만드는 곤고함이 내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인류 최고의 성자인 사도 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죄악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치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 외쳐대고 있는 비참한 신음을 들어보게 됩니다. 이 원리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는 여러 생물이 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몸을 가진 고래부터 시작해서, 지능이 높기로 유명한 돌고래, 심지어는 단세포로 되어지는 식물까지 여러 가지 수천 수만 가지의 생물이 바다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바닷가에 살고 있는 것의 종류는 천차 만별이고, 더 멋지고, 좋은 것 같고, 더 아름다운 것 같고, 더 진화된 것 같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 물 속에서만 살아야되는 공통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모습도 여러 모습이 있지만, 인생은 죄 안에 갇혀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다 악을 행하여 무익하게 되고 의를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저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3:10-23)고 성경은 말합니다. 모두 죄 아래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죄의 그 무거움에 눌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있습니다. 인생을 불행케 하는 이 무서운 죄를 해결할 방법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양을 잡아서 가죽으로 그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려주셨습니다. 그 사건 속에서는 "내가 너의 죄를 가려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아담의 아들, 아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 인격을 믿고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없이 해주는 제사의 말씀을 믿고 그는 자기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이 아벨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죽는 대신 이 양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여기 내 주검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 원합니다." 그는 소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를 위해 양을 대신 죽인 그 규례를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꺼번에 행하게 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거룩한 족장, 노아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계속 하나님을 향해 죄 대신 양을 죽이는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집트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예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땅에 재앙을 내립니다. 그 재앙을 경험한 바로왕은 재앙을 당할 때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내가 하나님 말씀 듣겠습니다."했지만 그 재앙이 풀리면 다시 완악해졌습니다. 이것을 아홉번이나 되풀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열번 째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집에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죽이라고 선고했습니다. 모두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날 밤에 이스라엘의 가장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갑니다. "얘들아, 우리 같이 가자. 우리 양들 가운데 흠 없는 것을 골라라. 발톱이 상했어도 안된다. 헌데가 조금 있어도 안돼. 모양이 틀려먹었어도 안돼. 오른쪽 뿔과 왼쪽 뿔이 삐딱해도 안돼." 좋고 귀한 것들을 고릅니다. "아빠, 왜 이렇게 예쁜 걸 골라야 되나요" 드디어 아이 앞에서 심장을 갈라 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그 양의 피를 문지방과 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밤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저들을 지나갑니다. 이 방에서 큰 소리로 우는 곡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 집에서 통곡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밤에 통곡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했으니까 안심이야.' 코를 골고 자는 사람이 있었지만 어떤 사람은 양의 피를 발라놓고도 '이것 좀 발랐다고 해결될까' 벌벌 떨면서 저녁에 한숨 못자고 지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효과는 같았습니다. 효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밤 새 잠을 못 이룬 그 집에도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습니다. Pass Over Day, 그래서 유월절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경에 유월절이라고 해서 6월 며칠날인가를 고민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나갔다는 말입니다. 죽음의 천사가 지나갔습니다. 그 피를 보고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양을 죽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예수가 오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저들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양만 죽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땅에 메시야가 오셔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그리스도가 이 땅에 틀림없이 오셨습니다. 그 분 이름을 예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예수라는 말은 이런 뜻을 가졌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입니다. 어디서입니까 죄에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양을 죽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 분을 예수님이라고 부르려면 내가 예수님 백성이라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에는 예수께서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죽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자기가 죽음 당할 메시야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은 "주여, 그리 마소서."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 죄값을 지고 점도, 티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말이예요.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처럼 죄를 지었다면 죄의 값을 무엇이라고 그랬을까요 죄를 범하였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고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으니 예수가 죄를 지었다면 자기 죄로 죽어야지요. 남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점도, 티도, 흠도 없었기 때문에 남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죄의 형벌을 모두 다 당하셨습니다. 죄 값은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존재의 중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사실을 뭐라고 말합니까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기쁨과 보람과 감격과 평안과 축복을 날마다 공급받으면서 인생을 멋지게 삽니다. 그런데 단절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고통을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첫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고 외쳐댔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적인 육신적인 고통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죄를 대신 질 때 하나님과 분리를 경험합니다. 한번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던 예수입니다. 영원토록 영원부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렸습니다. 아버지는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깊은 사랑의 교제를 누렸던 예수, 그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외칩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죄가 주는 그 분리의 고통을 우리 주님께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의 죄의 형벌이 시행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가 현실로 내 것이 되었습니다. 죄 용서받으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죄값을 지불할 때, 또 하나는 그 사람에게 용서받을 때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비유컨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의롭고 정확하고 엄한 법관이 있었습니다. 이 법관이 어느날 심리하는데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걸려들었습니다. 보니까 술을 먹고 어느 상점을 덥쳐 상점의 그 많은 물건을 다 깨뜨렸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상점의 여러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들은 사건의 심리자가 자기 아버지니까 "됐다. 나 살았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공의자 재판장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지은 죄를 조목조목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하게 증거를 선고했습니다. 너무 중형을 선고하자 그 아들은 "아버지, 너무하다. 잔인하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외쳐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공의로운 법관은 집에 돌아가서 딴 짓을 합니다. 박봉으로 사놓은 집을 팝니다. 생명처럼 아꼈던 서적들을 하나하나 모두 팝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변상해야될 돈들을 마련해서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갚았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었던 그 분은 법정에서 자기 아들을 향해서도 의로운 선고를 했어야 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자기 소중한 것을 모두 팔아서 그 아들에게 보상해야될 것을 모두 보상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이것은 사랑의 비밀입니다. 강아지 하나만 사랑해도 10만원짜리 강아지를 치료하기 위해서 천만원도 아깝지 않은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위해서는 줍니다. 못줘서 안달입니다. 내 목숨이라도 바칩니다. 그러면서도 아까와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내 죄의 형벌을 다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붙잡지 않으면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아는 것으로만 끝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나를 위해서 행하신 그 속죄를 내가 받기를 원합니다. 내 것으로 소유하기 원합니다. 손을 내미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신 선물, 감사합니다. 얼굴을 들수 없지만 내가 그 선물을 받겠습니다."하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성경은 선포합니다. "네 죄가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너희 죄를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나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44:22)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처럼,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처럼 깨끗케 하겠다."(사1:18) "내가 너의 죄가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너희에게서 멀리 옮겼노라."(시103:1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출발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이 구속의 사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사건이 내게 효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서 나는 무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전에서 모두 무지하다고, 형벌이 지워졌다고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누가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 또 죄를 범합니다. 연약해서 또 쓰러집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성경은 빛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그 죄를 주님 앞에 자백하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내가 또 고백하면 됩니다. "주님, 내가 또 넘어졌습니다. 내 연약을 아시는 주님, 용서해주시옵소서. 내가 주님 십자가에 내 마음의 끌림을 따라서 우리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주께서 용서해주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용서 밖에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용서 못하는 사건도 부모는 용서합니다. 그런고로 우리 주님 앞에 내 죄를 자백하십시오. 주께서는 널리 용서해주십니다.
그런데 회개하시되 같은 죄를 반복해서 고백하지 마십시오. 10년 전에 회개했던 것, 또 회개하고 그 다음에도 또 회개하고 반복을 합니다. 이런 경우가 참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용서를 안믿는 것입니다.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우리 정목사님께 실수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 참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정목사님은 "제가 다 용서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15분 후에 만났는데 "목사님 또 죄송합니다" 그러면 두번까지는 홍목사가 겸손해서, 오죽 가슴 아프면 그러겠는가 할텐데 만날 때마다 10번, 20번 반복하면 나중에 마음 속으로 "홍목사, 내 인격을 믿는거요 안믿는거요 내가 용서했다면 믿어야지!"하고 역정을 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꼭 이렇게 합니다. 미가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발로 밟아 바닷속 깊은 곳에 빠뜨리셨느니라" 우리 죄악을 모두 바닥 깊은 곳에 빠뜨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큰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낚시질을 금함" 내가 한번 중심으로 회개했으면 그 죄는 다시 회개하면 안됩니다. 다시 죄악감을 들게 하는 것은 사탄이 장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런고로 내가 지었던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해서 내가 회개했으면 무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망아,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라고 죽음 앞에서도 큰 소리 치는 인생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세워주십니다.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것 있습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쁨을 잃어버린 것,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비참이 끝나지 않은 것,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알아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죄의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깨끗이 씻겨주시는 그 은총 앞에서 우리 아버지를 다시 만나십시오. 찬란히 빛나는 얼굴로 나를 향해서 나오시는 주의 영광 위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첫번째 특권은 죄 용서받는 특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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