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가 주는 교훈 (요13:18-30)
본문
'가룟 유다'라는 이름을 듣는 사람 치고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마가복음 14장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에 대해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만큼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 주변에 보면 무슨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사람도 있고, 차라리 무엇을 가지지 말았으면 좋았을 뻔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지목된 가룟 유다보다 더 불행하지는 않을 것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성경에서 '마귀', 혹은 '도둑', '멸망의 자식', '배신자'라는 온갖 좋지 않은 이름들이 항상 따라 다니는 불행한 인생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중에는 가룟 유다와 같다거나 그와 같은 자가 될 것이라 예상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믿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그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해 보는 이유는 그에게서 배워야 할 값진 교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소득(GNP) 만 불의 풍요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보며 너나 할 것 없이 허탈감에 빠져 있는 이 때 우리가 더욱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들려주는 교훈은 듣기 좋은 교훈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 속에 숨겨진 잘못들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책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난 이 때에 지혜를 배우기 원한다면, 진정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가룟 유다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성공자들을 통해서도 교훈을 주시기도 하지만 가룟 유다와 같은 실패자를 통해서도 그 음성을 들려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좋은 소리만 하기 좋아하는 풍토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들이나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나쁜 소리는 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꼭 해야 될 말이라도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지 아니하면 입을 다물어 버렸고, 백해무익한 거짓말이라도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면 안심하고 떠들어대는 참으로 기이한 풍토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아파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는데, 사람들의 거부감을 의식해서 듣기 싫은 소리는 가능하면 안 하려고 했던 것이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참담한 지경에 빠지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 이야기가 듣기에 거북하다 할지라도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하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주시는 교훈으로 들어야 합니다.
1. 돈을 사랑하다 망한 사람 먼저 가룟 유다하면 돈을 사랑하다가 망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를 보면 가룟 유다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마다 이상하게 돈 문제가 함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 역시 그를 돈궤 맡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회계 일을 맡아볼 정도면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갈 뿐 아니라 계산이 빠르고, 어떤 면에서는 돈에 무척 밝은 사람입니다. 마리아라고 하는 참하고 믿음 좋은 자매가 평생 보물처럼 간직해 왔던 향유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을 보고 가룟 유다는 대뜸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 오랜 시간 계산할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향유의 값어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을 만큼 돈에 밝았던 그로서는 향유를 그런 식으로 허비한다는 것이 여간 아깝지 않았습니다. 자기 말대로 가난한 자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서가 아닙니다. 그 중 얼마를 자기 주머니에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입니다. 그의 돈에 대한 욕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급기야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놓고 대제사장과 흥정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26:15) 그러자 대제사장은 그에게 은 삼십을 달아 주었습니다. 흥정은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은 삼십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그 다음부터 예수를 팔아 넘길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은 삼십'하면 엄청난 거액의 돈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은 삼십을 오늘의 시세대로 계산하면 20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액수라고 말합니다. 물론 돈의 가치라는 것은 시대마다 현격하게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2천년 전의 은 삼십을 오늘날의 달러로 정확하게 계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출애굽기 21장 32절을 통해 은 삼십의 가치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는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은 삼십은 어떤 집의 소가 사납게 굴다가 이웃 집 노예를 들이받아 부상을 입혔을 경우 소의 주인이 배상해야 할 금액입니다. 만일 이웃집에서 애지중지하는 아들이 그 소 때문에 부상을 당했다면 그 돈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그런 액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은 삼십은 결코 큰돈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그 정도의 액수에도 사랑과 믿음과 함께 자기 스승을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극단적이야. 그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일 뿐 내 이야기는 아냐. 그래도 나는 그처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나 온 세상이 온통 돈 이야기와 경제 이야기로 넘치는 이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돈에 대해 지나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가룟 유다처럼 명예도, 믿음도 다 팔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돈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돈 문제만 개입되면 부모 형제가 원수지간이 되고, 사랑이라고 하는 그 아름다운 얼굴도 창백해지고, 우정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는 것을 수도 없이 지켜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돈에 밀착되어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까지도 돈 앞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처럼 돈을 탐하다가 예수를 버리고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간 사람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난 20여 년 동안 돈만 있으면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어느 정도 수중에 넣으며 살아왔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20년 전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그런 대로 사서 즐기고 뽐내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안 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의 삶을 살다보니 무의식중에 돈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자라나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는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좋아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엄중히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놓고, 아무리 많이 누리며 살아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배가 고픈 것은 어느 정도 배부르게 먹으면 끝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배는 먹을 만큼만 먹으면 만족하고 식탁에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에 대해 애착을 가진 돈 배는 아무리 먹어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식탁에서 일어서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탐욕이란 이토록 무섭고 끈질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러한 탐욕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그것에 매여 '조금만 더 벌고 신앙 생활 착실히 해야지. 조금만 더 모아 가지고 여유가 생기면 헌금 해야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가능한 옆으로 제쳐놓은 채 좀더 모으고, 쌓고, 즐기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탐욕의 결국이 영혼의 파산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회사만 부도 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처럼 우리의 영혼도 부도가 날 수 있습니다. 국가만 부도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파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철이 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돈이 믿을 게 못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습니까 지금처럼 돈을 사랑해봐야 결과적으로 쓴맛만 남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또 어디 있습니까 지금처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도 가룟 유다는 지옥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돈 사랑하다가는 나처럼 망한다!" 우리 모두 영의 귀를 활짝 열고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중에는 겉으로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거짓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여,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에 대해서 너무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하고 우리 마음을 찢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주님께서 그 보혈의 피로 우리를 씻어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실 줄 믿습니다.
2. 자기 뜻을 고집하다 망한 사람
둘째로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의 뜻을 고집하다가 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열심당'이라고 하는 정치 단체에 소속이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열심당원은 요즘 말로 하면 과격분자입니다. 회교로 말하면 원리분자나 비슷한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식민지로 있던 유대 나라를 로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열심당원이었던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이 유대 나라를 로마로부터 무력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자기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자신과 자신이 세울 나라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나라가 아니다. 내 나라는 유대 나라를 로마에서 해방시켜서 세우는 나라가 아니다.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 매여 있는 전 인류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요, 그 나라에서 다스리는 것이 나의 왕권이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는 예수님의 생각이 자기 생각과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가룟 유다가 제대로 된 제자라면 자기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자기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랐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나라 역사를 보면 가룟 유다처럼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다가 나중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소위 '메시야'라는 자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시몬 벤 코시바(Simon Ben Kosiba)라고 하는 사람은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 때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유대 나라 사람들로부터 '메시야'라는 칭호를 받았고 '별의 아들'이라고 하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라고 믿고 그를 추종했습니다.
드디어 그가 칼을 빼고 로마 정부를 향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58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노예로 끌려갔으며, 나중에는 코시바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약 100년 후에 바르 코캅(Bar Kochab)라고 하는 사람이 또 다시 '메시야'로 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유대 나라를 구원할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 역시 로마를 향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50만 명이 전장터에서 죽음을 당하고 수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으며, 그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도 그들처럼 무력으로 유대 나라를 독립시키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끝까지 자기 뜻을 고집하다가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를 좋아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우리 입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데 더욱 더 능수 능란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뜻을 고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 뜻을 순종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밀고 나갈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좀 지으면 어때 거룩하지 못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좀더 행복하고 즐기면서 살면 좋겠다.'라며 자기 생각을 앞세울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공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불의와 손잡기도 하고 비양심적인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자기 뜻을 하나님 뜻보다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헌신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과 재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자신의 행복과 안일을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원히 찾아오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보다는 이 세상에 더 많은 매력을 느낍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하지만 실제로는 그 뜻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교회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영적인 위기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정부나 사회 각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도자로서 많이 군림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기보다 자기 뜻을 앞세우다가 이지경이 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 서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장에서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앞세우고, 가정에서도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더라면 오늘날 이와 같은 절망적인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합시다. "주님, 주님 뜻대로 살기보다 내 뜻대로 살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가 마음을 찢으면 주님께서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찢어진 마음을 싸매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높이 받드는 거룩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했다면 그 뜻을 따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3. 경고를 받았으나 회개하기 를 거부한 사람]
셋째로, 가룟 유다는 거듭 경고를 받았으나 회개하기를 거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펴놓은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성만찬을 함께 나누던 아름답고 은혜로운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직간접적으로 다섯 번이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어떤 계락을 꾸미고 있는지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그에게 계속 경고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먼저 10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심지어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자기를 팔 자가 있는 줄 아시고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 주시는 간접적인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경고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구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가룟 유다에게 두 번째 경고를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가룟 유다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한 상에서 떡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면 그는 일어나서 자기 발로 예수를 걷어찰 것입니다. 함께 식탁에 초대받아 음식을 나누는 사람은 서로 우정과 신뢰를 나누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동지인줄 알았더니, 제자인 줄 알았더니, 사랑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일어나 가지고 발을 들어 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자였다면 '아, 예수님이 벌써 다 알고 계시는구나.'하고 벌떡 일어나 "주여,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회개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했습니다. 또 21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민망하고 고통스러우셨던지 제자들에게 자기 속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 정도가 되면 주님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주목하고 계시는지 눈치채고 그 악한 마음을 돌이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마비된 가룟 유다는 이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26절에 가면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떼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27절에서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아마 그것은 마지막 경고였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시간,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많은 경고가 있었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만찬을 나누던 그 분위기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흔히 보는 성만찬 그림에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큰 탁자 주변에 둘린 의자에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 사람들은 유월절을 먹을 때 그런 식으로 둘러앉지 않습니다. 유(U)자 형의 식탁 주변에 다리는 뒤로 뻗고 왼팔은 바닥에 고인 채 몸을 비스듬히 눕히고는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식사를 하다 보니 예수님 오른 쪽에 있는 제자는 자연 몸을 조금만 뒤로 누이면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듯한 모양이 됩니다.
23절이 예수님 오른편에 있던 사도 요한에 대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괴롭고 착찹한 심정을 토로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는 싸인을 보냈습니다. 이에 요한은 몸을 뒤로 재끼면서 예수님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25절)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의 귀에 살짝 대고 속삭이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26절) 요한 말고 아무도 이 말씀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유대 나라 사람들이 식탁에 앉는 독특한 자세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떡을 떼어 곧바로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쉽게 곧바로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룟 유다는 예수님 가까이, 그 왼편에 앉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경고를 받은 것은 서로가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품에 안기듯 한 자세로 소곤소곤 이야기 나눌 수도 있는 그런 사랑이 넘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바로 옆에서 예수님의 뜨거운 가슴의 사랑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모든 기회를 다 흘려 버리고 회개하지 않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나간 때가 밤이었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30절) 어떻게 생각하면 저녁만찬 중에 나갔으므로 밤이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가 문을 열고 나간 때를 굳이 밤이었다고 강조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밤이 지니는 영적 의미 때문입니다. 경고를 하는데도 듣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고집하는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는 곳에는 어두움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은 어두운 길입니다. 잠언 4장 19절을 보십시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경제위기 한파를 만나 어려움을 당하게 된 데 대해 얼마나 말들이 많았습니까 정부가 왜 그동안 한번도 경고하지 않았느냐 왜 정부 지도자들이 여러 가지 경고를 듣고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느냐 하고 얼마나 비판을 많이 했습니까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경제현상이든 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면 조짐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집안에 불이 날 것 같으면 쥐들이 집에서 뛰어 나가고, 지진이 나려고 하면 짐승들이 매우 이상하게 행동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지난 연말에 그와 같은 무서운 위기가 불어닥칠 때 왜 아무런 경고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았느냐 왜 어떤 조짐도 없이 갑자기 일이 터졌느냐 그 이유가 뭐냐 하며 여기 저기서 이런 류의 비판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런 경고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 시피 일년 전부터 우리 나라 안팎에서 우리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경고 사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나 경제 실무자들은 그러한 경고들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최근에 한 경제 전문가가 자기가 경험한 사실들을 실토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을 하거나 보고서를 올린 적이 있지만 재경원 고위층이 '쓸데없이 국민에게 불안감이나 주는 일은 삼가라. 당신이 나중에 그런 말을 한데 대해 책임을 지겠느냐'며 못마땅해하는 바람에 더 이상 그런 보고를 하지 못했다고 실토했습니다. 우습게도 경제 위기에 대한 경고를 정부 스스로 앞장서서 차단해 버렸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경고 없는 사회나 경고를 무시하고 차단하는 사회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고 신호등 없는 네거리와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국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습니까 우리 개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귀를 막고 바른 소리를 듣기를 싫어하여 마땅히 고쳐야 할 기회를 놓치는 사람은 삶의 본질을 역행하는 사람입니다. 영어에서 산다는 말은 'live'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뒤집은 'evil' 곧 악이 됩니다. 악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걸어가야 될 삶의 본질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거꾸로 뒤집으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경고를 받으면 겸손히 그것을 수납하고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역행했던 가룟 유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를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삶은 그 자체가 악(evil)이요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금년에는 우리가 이런 저런 일로 하나님을 자주 찾아야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함을 간절히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전국 곳곳에 있는 기도원들마다 초만원이 되어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방 하나 얻기조차 힘들 정도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좋습니다. 또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개인이 살고 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달라고, 어떻게 해 달라고 구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 자신이 그 동안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았는지를 돌이켜 보고 잘못된 것들에 대해 마음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쓰고 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달라고 하기 전에 진실로 회개부터 해야 됩니다. '주여, 내가 가룟 유다처럼 돈을 은근히 사랑했습니다. 주님, 가룟 유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의 뜻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내 뜻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경고를 받지만 아예 우습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습니다. 그 동안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습니다.' 이런 회개의 기도를 진지하게 해야 됩니다. 우리는 회개하라고 하면 쉽게 생각하고는 '주여, 잘못했어요.' 하고 깨끗이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당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체험하려면 개인뿐만 아니라 이 나라도, 교회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의인으로 받으십니다. 의인의 길에는 절대로 어두움이 없습니다. 잠언 4장 19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느니라." 의인에게는 일시적인 고통이나 위기가 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항상 새로운 도약을 약속하는 축복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후크야마 교수는 한국의 위기를 놓고 하늘에서 떨어진 축복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록 어렵지만 우리 개인이 회개하고 우리 교회가 회개하고 이 나라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이 위기를 축복의 계기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돈을 사랑하던 이중성을 깨트려 버립시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서 행동으로는 '내 뜻대로'를 고집하던 자기 모순을 철저히 떨쳐버립시다. 바른 소리를 하면 듣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미워하던 내 마음의 잘못된 근성을, 이 완악함을 산산히 깨트려버리고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주님 앞에 회개합시다. 회개하면 주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치유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나라를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호세아 6장 1절,2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큰 축복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돈을 사랑하다 망한 사람 먼저 가룟 유다하면 돈을 사랑하다가 망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를 보면 가룟 유다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마다 이상하게 돈 문제가 함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9절 역시 그를 돈궤 맡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회계 일을 맡아볼 정도면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갈 뿐 아니라 계산이 빠르고, 어떤 면에서는 돈에 무척 밝은 사람입니다. 마리아라고 하는 참하고 믿음 좋은 자매가 평생 보물처럼 간직해 왔던 향유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을 보고 가룟 유다는 대뜸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 오랜 시간 계산할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향유의 값어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을 만큼 돈에 밝았던 그로서는 향유를 그런 식으로 허비한다는 것이 여간 아깝지 않았습니다. 자기 말대로 가난한 자들을 진심으로 걱정해서가 아닙니다. 그 중 얼마를 자기 주머니에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입니다. 그의 돈에 대한 욕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급기야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놓고 대제사장과 흥정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26:15) 그러자 대제사장은 그에게 은 삼십을 달아 주었습니다. 흥정은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은 삼십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그 다음부터 예수를 팔아 넘길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흔히 '은 삼십'하면 엄청난 거액의 돈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은 삼십을 오늘의 시세대로 계산하면 20달러 정도밖에 안 되는 액수라고 말합니다. 물론 돈의 가치라는 것은 시대마다 현격하게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2천년 전의 은 삼십을 오늘날의 달러로 정확하게 계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출애굽기 21장 32절을 통해 은 삼십의 가치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는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은 삼십은 어떤 집의 소가 사납게 굴다가 이웃 집 노예를 들이받아 부상을 입혔을 경우 소의 주인이 배상해야 할 금액입니다. 만일 이웃집에서 애지중지하는 아들이 그 소 때문에 부상을 당했다면 그 돈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그런 액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은 삼십은 결코 큰돈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그 정도의 액수에도 사랑과 믿음과 함께 자기 스승을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극단적이야. 그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일 뿐 내 이야기는 아냐. 그래도 나는 그처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나 온 세상이 온통 돈 이야기와 경제 이야기로 넘치는 이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돈에 대해 지나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가룟 유다처럼 명예도, 믿음도 다 팔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돈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아닌지 심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돈 문제만 개입되면 부모 형제가 원수지간이 되고, 사랑이라고 하는 그 아름다운 얼굴도 창백해지고, 우정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는 것을 수도 없이 지켜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돈에 밀착되어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믿음까지도 돈 앞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처럼 돈을 탐하다가 예수를 버리고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간 사람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지난 20여 년 동안 돈만 있으면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어느 정도 수중에 넣으며 살아왔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20년 전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그런 대로 사서 즐기고 뽐내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안 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의 삶을 살다보니 무의식중에 돈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자라나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는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좋아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엄중히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놓고, 아무리 많이 누리며 살아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배가 고픈 것은 어느 정도 배부르게 먹으면 끝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배는 먹을 만큼만 먹으면 만족하고 식탁에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에 대해 애착을 가진 돈 배는 아무리 먹어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식탁에서 일어서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탐욕이란 이토록 무섭고 끈질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러한 탐욕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그것에 매여 '조금만 더 벌고 신앙 생활 착실히 해야지. 조금만 더 모아 가지고 여유가 생기면 헌금 해야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가능한 옆으로 제쳐놓은 채 좀더 모으고, 쌓고, 즐기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탐욕의 결국이 영혼의 파산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회사만 부도 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처럼 우리의 영혼도 부도가 날 수 있습니다. 국가만 부도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파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철이 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돈이 믿을 게 못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습니까 지금처럼 돈을 사랑해봐야 결과적으로 쓴맛만 남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또 어디 있습니까 지금처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도 가룟 유다는 지옥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돈 사랑하다가는 나처럼 망한다!" 우리 모두 영의 귀를 활짝 열고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중에는 겉으로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회개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거짓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여,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돈에 대해서 너무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하고 우리 마음을 찢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주님께서 그 보혈의 피로 우리를 씻어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실 줄 믿습니다.
2. 자기 뜻을 고집하다 망한 사람
둘째로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의 뜻을 고집하다가 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열심당'이라고 하는 정치 단체에 소속이 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열심당원은 요즘 말로 하면 과격분자입니다. 회교로 말하면 원리분자나 비슷한 것입니다. 그들은 당시 식민지로 있던 유대 나라를 로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열심당원이었던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이 유대 나라를 로마로부터 무력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자기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자신과 자신이 세울 나라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나라가 아니다. 내 나라는 유대 나라를 로마에서 해방시켜서 세우는 나라가 아니다. 죄와 사망의 쇠사슬에 매여 있는 전 인류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요, 그 나라에서 다스리는 것이 나의 왕권이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는 예수님의 생각이 자기 생각과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에 틀림없습니다. 만일 가룟 유다가 제대로 된 제자라면 자기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자기 뜻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랐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나라 역사를 보면 가룟 유다처럼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투쟁하다가 나중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소위 '메시야'라는 자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시몬 벤 코시바(Simon Ben Kosiba)라고 하는 사람은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 때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유대 나라 사람들로부터 '메시야'라는 칭호를 받았고 '별의 아들'이라고 하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라고 믿고 그를 추종했습니다.
드디어 그가 칼을 빼고 로마 정부를 향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58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노예로 끌려갔으며, 나중에는 코시바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약 100년 후에 바르 코캅(Bar Kochab)라고 하는 사람이 또 다시 '메시야'로 출현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유대 나라를 구원할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 역시 로마를 향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50만 명이 전장터에서 죽음을 당하고 수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으며, 그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도 그들처럼 무력으로 유대 나라를 독립시키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끝까지 자기 뜻을 고집하다가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를 좋아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우리 입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데 더욱 더 능수 능란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뜻을 고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 뜻을 순종해야 된다고 말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밀고 나갈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좀 지으면 어때 거룩하지 못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좀더 행복하고 즐기면서 살면 좋겠다.'라며 자기 생각을 앞세울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공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는 불의와 손잡기도 하고 비양심적인 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자기 뜻을 하나님 뜻보다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헌신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과 재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채 자신의 행복과 안일을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원히 찾아오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보다는 이 세상에 더 많은 매력을 느낍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하지만 실제로는 그 뜻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교회의 위기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영적인 위기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정부나 사회 각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도자로서 많이 군림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기보다 자기 뜻을 앞세우다가 이지경이 된 것이 아닙니까 우리 서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장에서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앞세우고, 가정에서도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더라면 오늘날 이와 같은 절망적인 위기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합시다. "주님, 주님 뜻대로 살기보다 내 뜻대로 살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가 마음을 찢으면 주님께서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찢어진 마음을 싸매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높이 받드는 거룩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했다면 그 뜻을 따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3. 경고를 받았으나 회개하기 를 거부한 사람]
셋째로, 가룟 유다는 거듭 경고를 받았으나 회개하기를 거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펴놓은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성만찬을 함께 나누던 아름답고 은혜로운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직간접적으로 다섯 번이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어떤 계락을 꾸미고 있는지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그에게 계속 경고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먼저 10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심지어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자기를 팔 자가 있는 줄 아시고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 주시는 간접적인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경고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구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가룟 유다에게 두 번째 경고를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가룟 유다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한 상에서 떡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면 그는 일어나서 자기 발로 예수를 걷어찰 것입니다. 함께 식탁에 초대받아 음식을 나누는 사람은 서로 우정과 신뢰를 나누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동지인줄 알았더니, 제자인 줄 알았더니, 사랑하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일어나 가지고 발을 들어 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자였다면 '아, 예수님이 벌써 다 알고 계시는구나.'하고 벌떡 일어나 "주여,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회개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했습니다. 또 21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민망하고 고통스러우셨던지 제자들에게 자기 속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 정도가 되면 주님이 자신을 얼마나 깊이 주목하고 계시는지 눈치채고 그 악한 마음을 돌이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마비된 가룟 유다는 이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26절에 가면 예수님이 떡 한 조각을 떼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27절에서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아마 그것은 마지막 경고였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시간,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많은 경고가 있었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만찬을 나누던 그 분위기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흔히 보는 성만찬 그림에는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큰 탁자 주변에 둘린 의자에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 사람들은 유월절을 먹을 때 그런 식으로 둘러앉지 않습니다. 유(U)자 형의 식탁 주변에 다리는 뒤로 뻗고 왼팔은 바닥에 고인 채 몸을 비스듬히 눕히고는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식사를 하다 보니 예수님 오른 쪽에 있는 제자는 자연 몸을 조금만 뒤로 누이면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는 듯한 모양이 됩니다.
23절이 예수님 오른편에 있던 사도 요한에 대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괴롭고 착찹한 심정을 토로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는 싸인을 보냈습니다. 이에 요한은 몸을 뒤로 재끼면서 예수님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25절) 그러자 예수님은 요한의 귀에 살짝 대고 속삭이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26절) 요한 말고 아무도 이 말씀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은 유대 나라 사람들이 식탁에 앉는 독특한 자세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떡을 떼어 곧바로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쉽게 곧바로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룟 유다는 예수님 가까이, 그 왼편에 앉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가룟 유다가 경고를 받은 것은 서로가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품에 안기듯 한 자세로 소곤소곤 이야기 나눌 수도 있는 그런 사랑이 넘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바로 옆에서 예수님의 뜨거운 가슴의 사랑을 느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모든 기회를 다 흘려 버리고 회개하지 않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나간 때가 밤이었음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30절) 어떻게 생각하면 저녁만찬 중에 나갔으므로 밤이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가 문을 열고 나간 때를 굳이 밤이었다고 강조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밤이 지니는 영적 의미 때문입니다. 경고를 하는데도 듣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고집하는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는 곳에는 어두움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은 어두운 길입니다. 잠언 4장 19절을 보십시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경제위기 한파를 만나 어려움을 당하게 된 데 대해 얼마나 말들이 많았습니까 정부가 왜 그동안 한번도 경고하지 않았느냐 왜 정부 지도자들이 여러 가지 경고를 듣고도 대책을 세우지 않았느냐 하고 얼마나 비판을 많이 했습니까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경제현상이든 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면 조짐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집안에 불이 날 것 같으면 쥐들이 집에서 뛰어 나가고, 지진이 나려고 하면 짐승들이 매우 이상하게 행동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지난 연말에 그와 같은 무서운 위기가 불어닥칠 때 왜 아무런 경고 시스템이 발동하지 않았느냐 왜 어떤 조짐도 없이 갑자기 일이 터졌느냐 그 이유가 뭐냐 하며 여기 저기서 이런 류의 비판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이런 경고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 시피 일년 전부터 우리 나라 안팎에서 우리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경고 사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나 경제 실무자들은 그러한 경고들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저는 최근에 한 경제 전문가가 자기가 경험한 사실들을 실토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을 하거나 보고서를 올린 적이 있지만 재경원 고위층이 '쓸데없이 국민에게 불안감이나 주는 일은 삼가라. 당신이 나중에 그런 말을 한데 대해 책임을 지겠느냐'며 못마땅해하는 바람에 더 이상 그런 보고를 하지 못했다고 실토했습니다. 우습게도 경제 위기에 대한 경고를 정부 스스로 앞장서서 차단해 버렸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경고 없는 사회나 경고를 무시하고 차단하는 사회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고 신호등 없는 네거리와도 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국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습니까 우리 개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귀를 막고 바른 소리를 듣기를 싫어하여 마땅히 고쳐야 할 기회를 놓치는 사람은 삶의 본질을 역행하는 사람입니다. 영어에서 산다는 말은 'live'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뒤집은 'evil' 곧 악이 됩니다. 악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걸어가야 될 삶의 본질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거꾸로 뒤집으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경고를 받으면 겸손히 그것을 수납하고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귀를 틀어막고 듣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역행했던 가룟 유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를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삶은 그 자체가 악(evil)이요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금년에는 우리가 이런 저런 일로 하나님을 자주 찾아야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함을 간절히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전국 곳곳에 있는 기도원들마다 초만원이 되어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방 하나 얻기조차 힘들 정도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좋습니다. 또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개인이 살고 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달라고, 어떻게 해 달라고 구하기에 앞서 과연 우리 자신이 그 동안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았는지를 돌이켜 보고 잘못된 것들에 대해 마음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쓰고 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달라고 하기 전에 진실로 회개부터 해야 됩니다. '주여, 내가 가룟 유다처럼 돈을 은근히 사랑했습니다. 주님, 가룟 유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의 뜻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내 뜻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경고를 받지만 아예 우습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너무 많이 놓쳤습니다. 그 동안 주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습니다.' 이런 회개의 기도를 진지하게 해야 됩니다. 우리는 회개하라고 하면 쉽게 생각하고는 '주여, 잘못했어요.' 하고 깨끗이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적당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체험하려면 개인뿐만 아니라 이 나라도, 교회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의인으로 받으십니다. 의인의 길에는 절대로 어두움이 없습니다. 잠언 4장 19절을 보십시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느니라." 의인에게는 일시적인 고통이나 위기가 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항상 새로운 도약을 약속하는 축복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후크야마 교수는 한국의 위기를 놓고 하늘에서 떨어진 축복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록 어렵지만 우리 개인이 회개하고 우리 교회가 회개하고 이 나라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이 위기를 축복의 계기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돈을 사랑하던 이중성을 깨트려 버립시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서 행동으로는 '내 뜻대로'를 고집하던 자기 모순을 철저히 떨쳐버립시다. 바른 소리를 하면 듣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미워하던 내 마음의 잘못된 근성을, 이 완악함을 산산히 깨트려버리고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주님 앞에 회개합시다. 회개하면 주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치유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나라를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호세아 6장 1절,2절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큰 축복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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