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서로 사랑할때 (요13:31-35)
본문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향하여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한 분도 예외 없이 다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또 사랑 이야기야' 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분이 계실 지도 모릅니다. 사랑에 대해서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웬만한 이야기에는 별로 감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보다 더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에멧트 팍스라고 하는 분이 사랑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시적으로 멋지게 표현해 놓은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 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 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거대한 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입니다. 충분히 사랑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사랑은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모 신문사의 주필이 쓴 글을 여러분이 읽어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분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미 생활의 풍요가 주는 단맛을 얼마 동안 경험해 보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잘 사는 재미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이미 맛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단맛을 경험한 우리가 보릿고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기름 보일러 대신 연탄을 떼는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이승은, 허헌선 두 부부가 '엄마 어렸을 적엔'이라는 인형 작품을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하여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감동시킨 일이 있습니다. 저는 가 봐야지 가 봐야지 하면서도 한번도 못 가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서점에 나가 책을 사서 보았습니다.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얼마나 눈시울을 붉혔는지 모릅니다. 불과 4,50년 전에 직접 겪었던 어려운 시절의 추억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자 마음에 뭔가 울컥하고 와서 닿았던 것입니다. 엄마가 어렸을 적에 고생하던 것들을 우리가 달콤한 추억으로 되씹는 것은 낭만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낭만이라기보다 오히려 낭패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종택이라는 동요 작가가 쓴 동요 중에 '새 고무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읍내 장 십리 길 솔 갈비 한 짐 팔아/ 새 고무신 사고 맨발로 돌아가는 시골 사는 돌이/ 돌다리 넘어서서 또한번 신어보고/ 저 고갯마루부터 정말 신고 가야지/ 돌이는 맨발/ 타박타박 맨발" 여러분이 어렸을 때 신었던 고무신을 떠올려 보십시오. 새 고무신이 생기던 날의 흥분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고무신을 얼마나 애지중지했습니까 딱 한번 발에 잘 맞나 신어보고는 고무신이 혹시라도 닳을까봐, 때라도 묻을까봐 걱정이 되어 신고 다니지도 못하고 두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돌이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고무신을 신고 다녀도 그것을 고통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새 고무신이라도 생길라치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행복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런 것들로는 더 이상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처럼 살라고 한다면 살기야 하겠지만 그 때의 행복을 회복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슴을 찢는 무서운 고통을 몇 고비 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삶이 주는 고통이 우리를 옥죄어 오는 바로 이러한 때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의 때에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성만찬을 들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도중에 가룟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이제 목전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주님은 얼마 후에 가룟 유다가 몽둥이와 창을 든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이끌고 자신을 잡으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 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 후에 당할 그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예수님도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영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7장 4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병으로 쓰러지거나 무덤에 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축복을 안겨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는 이 뜻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예수님 앞에 그 십자가를 져야 할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나면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영화롭게 한 예수님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부활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이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할 영원한 구원자로 높이 세우셨으며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사 온 천하가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 곧 하나님이라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빌2:9-11).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세우심으로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의 죽음은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끌려가는 비참한 처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자기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계시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부터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라'는 말은 56회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고별 설교하시는 13장에서 21장 사이에 44회나 나온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들 가운데 가장 핵심 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34-5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예수님이 이와 같이 마지막 떠나는 장면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믿고 보란 듯이 3년을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 예수님이 너무 맥없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런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는 그들의 믿음도 파산하고, 인격도 파산하고, 꿈도 파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중에 제자들 중에서 내노라 하던 베드로마저 공공연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지 않습니까 급하면 스승도 버릴 수 있고, 믿음도 팽개칠 수 있는 초라한 자신들의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제자들이 얼마나 실의와 절망에 빠졌겠습니까 그들이 이후에 겪게될 허탈감이나 좌절감, 공포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이 그들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정신적인 위기와 영적인 위기의 때에, 모든 위기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이 상황을 만날 때 그들로 하여금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이겠습니까 명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남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전에도 사랑만이 우리를 붙들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법입니다. 만사가 잘 되고 형통할 때 다정하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잉꼬 부부들을 보면 아름다운 장미 같습니다. 그러나 향기 없는 장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미의 진짜 향기는 깊은 밤중에야 비로소 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부부가 정말 사랑합니까 그 사랑의 향기를 맡고 싶습니까 생의 위기를 만나 가족이 험하고 좁은 길을 함께 걸을 때 맡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봅시다. 벌써부터 난리들이 아닙니까 그렇게 잘 살 때는 검은머리가 흰 파뿌리처럼 될 때까지 당신만을 영원토록 사랑하겠다던 사람들이 생활이 조금 어려워지고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어 무능한 남자로 보이기 시작하니까 서로의 사이가 금이가고 티격태격하다가 나중엔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서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그 동안의 사랑이 가짜였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사랑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표준-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사랑의 표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그 표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잘 살 때나 못 살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그 어느 때든지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한번 사랑하고 끝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번 마음을 주셨으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의 표준에 맞추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정말 사랑할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것만큼 어려운게 없습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도 쉽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안 미워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목사 같으면 절로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게 안되더라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서로 사랑의 표준이기 때문에 표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말만 들으면 기가 질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실천하기 어렵다고 포기해 버립니까 ' 교회에서 늘 하는 소리 아니냐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도 약하고 손발도 약하고 입도 약하고 다 약한데 어떻게 하냐' 하며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합니까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카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해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의 참 모습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자기의 참 모습을 드러내시는 사람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제자훈련도 받고, 크로스웨이 성경 대학도 다니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이 꿰며 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하나님을 조금 알 수는 있지만 진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처럼 사랑해 보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기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기가 어렵다 하여 사랑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머리로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을 닮아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예수님처럼 사랑해봐야 합니다.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지 간에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이 표준에 맞추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정해 주셨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서로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제자들끼리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거창한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 할 때 서로는 내 아내요, 내 남편이요, 내 자식이요,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라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것 없습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가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전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통해 전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너무나 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의 '서로'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꼭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막연히 사랑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가 실천해야 될 것들이 경우에 따라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세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위로하라
첫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골고다 현장에서 넋을 잃고 돌아온 제자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너나 가릴 것 없이 그들은 다 실패자요, 배신자요, 비겁자였습니다. 자신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상처와 좌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그들을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격려의 말 한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슨 값을 많이 지불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의 말, 격려의 말 한마디가 사랑을 대변할 수 있을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경쟁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루 종일 실컷 두들겨 맞고 들어오는 사람같이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되는 무서운 생존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어쨌든 더 앞서야 한다는 절박한 경쟁 의식 속에서 하루 종일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이 무서운 정신적인 폭력 때문에 온 몸이 주눅이 들어서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감정의 날이 시퍼렇게 서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상처도 많이 입고 들어옵니다. 너무 고독합니다. 얼마 전에 제자 훈련이 시작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남자 제자 반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한 형제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참 이상해요. 목사님, 남자들끼리 모인 곳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남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눈물이 참 많아요." 여자들이 옆에 있을 때는 남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체면을 차리고서 눈물이 나도 참고 견디지만 남자들끼리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게 남자입니다. 한편 아내는 집에서 하루 종일 얼마나 애간장을 태웁니까 '오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만약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살아가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 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안절부절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저녁에 남편이 들어오면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남편의 표정부터 먼저 살피는 것이 아내의 심정이 아닙니까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경쟁에 시달리며 늘 긴장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식구끼리 서로가 나누는 한마디의 위로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분은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성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저술가입니다. 그분은 '위로'라고 하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위로라고 하는 것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로한다는 것은 마음을 쓰며 돌보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입니다. 위로한다는 것은 고통을 가져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라는 의미의 말 한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와 같은 위로가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보면 가족끼리 위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예 멀리 있는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걱정하지 말게. 곧 지나갈 태풍이야." 라며 위로의 말을 건네기가 그래도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날마다 함께 사는 식구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사 위로한다 하더라도 한두 번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일마다 때마다 변함없이 위로하고 격려해주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더욱이 일이 꼬이고 잘못되는 통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나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낄 때 생의 한 동반자로서 자기를 비우고 전신을 바쳐 남편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아내가 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 집사님 가정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집사님의 남편은 그래도 꽤 괜찮은 중소 기업의 대표 이사로 계시던 분입니다. 그 동안 그가 경영하는 회사가 잘되고 있었는데 최근의 경제위기 한파를 맞아 그만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흑자 부도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던 것도 다 직원들에게 나누어 줘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며칠 후에는 경매에 붙여진다고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지는 그런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남자는 하루 종일 집안에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집안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숨쉬는 것조차 힘들만큼 답답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눈이 많이 왔지 않습니까 그때 부인되는 집사님이 남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눈 오는 것 봐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요. 우리 이러고 앉아 있지 말고 우리 같이 카메라 들고 밖에 나가요. 나가서 눈 오는 사진 좀 같이 찍어요." 남편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런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평생 처음으로 남편이 그러면 나가볼까 하며 일어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니는 애도 같이 따라 나섰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함박눈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닙니까 함박눈을 보자 어느 누구부터라고 할 것 없이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가서는 눈이 쌓인 나무를 흔들기도 하고, 눈싸움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신나게 한 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집사님이 그렇게 했다는 말을 듣고 '참 훌륭한 아내구나. 위대한 여인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큰 일을 해서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못하는 작은 일을 할 때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가정에 돌아가서 위로합시다. 격려합시다. 용서하라
둘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한번 제자들의 입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모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그들은 누가 자기들도 붙들려 오지 않을까 여간 불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열 한 제자는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하고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이럴 때 마태가 갑자기 베드로를 보고 "당신은 수제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여 우리를 망신시킬 수 있느냐" 하며 대든다고 해 봅시다. 그리고 다른 제자는 요한에게 "자네는 말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바로 옆에까지 가서 서 있었지 않은가 거기서 뭐하고 있었는가 대제사장과 좀 안다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를 쓰지 못했나" 라며 불평을 하고, 안드레는 누군가에게 "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그물을 버리고 좇아가지 않았으면 나도 안 따라갔을 거야. 그랬더라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잘 잡고 있었을 텐데 지금 내 꼴이 뭔가 네가 괜히 흥분해 가지고 나서는 통에 오늘 내가 이 꼴이 됐잖아." 하며 서로를 탓하고만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잘못하면 우리도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서로 탓만 할 뿐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살벌한 분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용서를 공동체 생활의 접착제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용서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입니다. 용서하면 공동체가 절대 흩어지지 않습니다. 가정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부부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튀어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면 이 접착제가 끊어지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흩어지고 맙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지만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피차 용서해 주어야 할 빚을 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가정 식구들을 용서하는 것은 특별히 더 중요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보통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먼데 있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가 식구들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을 만하면 또 상처를 받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상처를 또 긁어 피를 냅니다. 우리가 이러면서 한 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상처를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해도 쉽게 아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지고 세상살이가 빠듯해 지고 여러 가지 면에서 긴장이 고조되면 나도 모르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농사 지을 때야 화가 나면 밖에 나가 강아지라도 두들겨 패면 되었지만 지금은 스트레스를 풀 강아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있는 아내에게 마구 화풀이를 하고 애들을 들볶으며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용서란 자기를 해방시키는 행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그에게 감정이 상했다는 정신적 부담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의 감정을 상하게 한 그 사람들을 늘 마음속에 데리고 다녀야 하는 부담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그런 부담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도 살고, 내 가까이 있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웃들도 삽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어려운 위기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가정에서 웃음이 사라져 버리거나 갑자기 어떤 문제가 터지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때가 많습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문제를 빌미로 삼아 남편을 괴롭히고, 아내를 괴롭히는 것은 아직 상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경제적인 위기를 만났다고 파산되는 많은 가정들을 보십시오. 그 가정의 문제가 정말 돈의 문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평소에 용서한 줄 알고 덮어두었는데 사실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응어리 때문에 가정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깨어지고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못나고 무능한 남편이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돈 잘 벌어 줄 때 흥청망청 쓰기에 바빴던 아내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용서하고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어려운 위기를 함께 웃으면서 대처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용서가 곧 사랑인 것입니다. 인내하라
셋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인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인내를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옛 속담에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험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함께 참는 것만큼 큰사랑이 없습니다. 코리텐 붐이라고 하는 위대한 여성은 참는 것에 대해서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스위스에 있는 알프스 터널을 한번 통과하려면 30분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가 연기를 품으면서 달리던 시절에는 일단 터널 속에 들어가면 모두들 손수건을 가지고 코를 막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문을 꽉꽉 닫아놓아도 한 30분을 연기로 가득 찬 터널 속을 달리다보면 객차 안에 연기가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있어도 코 안이 새까매지고 숨이 탁탁 막힐 정도니 터널을 지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차표를 찢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을 열고 뛰어 내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코를 손수건으로 틀어막고 숨을 아끼며 참습니다. '조금 있으면 밝은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는 입구가 나올거야. 이제 한 10분만 더 가면 돼.' 하며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위기 한파가 우리 나라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은 우리가 추워도 참아야 됩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지 못하고, 쓰고 싶은 것도 절제해야 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것도 겪는다 해도 참아야 합니다. "아빠, 우린 참을 수 있어요. 염려하지 마세요.여보, 나 괜찮아요. 전의 옷 다시 손질해 가지고 입으니까 이렇게 예쁘지 않아요 보세요.아빠 직장 못 가는 것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한두 달 푹 쉬세요. 그 다음에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 무엇이든지 한번 해보자 구요. 기껏 해 봐야 한 2년 이렇게 고생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러면서 서로 참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을 위기 속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꼭 실천할 일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용서하고, 참자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두 번 실천하는 것을 그치지 말고 한평생 동안 계속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식구끼리 나누는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은혜 없이는 안 되는 사랑입니다.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34절). 은혜를 받아서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도 있는 옛 계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이름 붙이신 것은 은혜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묵상하며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왕 서로 사랑해야 된다면 흠뻑 젖을 때까지 합시다. 적당히 사랑하지 맙시다. 잠깐 사랑하다가 중단하지 맙시다. 흠뻑 젖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 집안이 사랑의 홍수가 나서 전부 떠내려갈 정도로 실컷 사랑해 봅시다. 저는 작은 정원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원에 나가서 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무가 생기를 잃고 점점 시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 때문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자기 회사 동료 가운데 나무에 관한 한 도사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 집 나무를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나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런 진단을 내렸습니다. 토질이 척박해서라거나 나무에 무슨 병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을 너무 적게 줘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긴 했지만 너무 적게 줬기 때문에 나무가 더 갈급증이 나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을 마음껏 주지 않으면 나무가 오히려 물을 줌으로써 더 병이 듭니다. 물을 대충대충 주면 안됩니다. 큰 나무는 물이 뿌리 깊이까지 푹 스며들도록 잔뜩 부어 주어야 합니다. 그저 호수를 가지고 잎사귀에 물을 조금 뿌리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물을 주어도 흠뻑 주어야 잘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 나무만 그렇겠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공허하게 비어있는데 날마다 "사랑해요"라며 간지럼만 태우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빈자리가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속에서부터 물씬물씬하게 품어 나오도록 나중에는 "아이고 그만 사랑해요. 나 못살겠어요."라고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마음껏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나도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보다 마력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은 어깨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크고 부드럽고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이 내 어깨에 와서 놓인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의 축 쳐진 어깨에 얹는 하나님의 큰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불안해하는 아내의 어깨에 조용히 얹어 주시는 하나님의 부드럽고 큰손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또 아내는 남편에게, 아빠는 자녀에게, 자녀는 아빠에게 하나님의 큰손이 됩시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고통이 가정을 향하여 물밀듯이 닥쳐온다 해도 주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의 은혜를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실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미 단맛을 경험한 우리가 보릿고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기름 보일러 대신 연탄을 떼는 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이승은, 허헌선 두 부부가 '엄마 어렸을 적엔'이라는 인형 작품을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하여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감동시킨 일이 있습니다. 저는 가 봐야지 가 봐야지 하면서도 한번도 못 가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서점에 나가 책을 사서 보았습니다. 저는 그 책을 보면서 얼마나 눈시울을 붉혔는지 모릅니다. 불과 4,50년 전에 직접 겪었던 어려운 시절의 추억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자 마음에 뭔가 울컥하고 와서 닿았던 것입니다. 엄마가 어렸을 적에 고생하던 것들을 우리가 달콤한 추억으로 되씹는 것은 낭만입니다. 그러나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낭만이라기보다 오히려 낭패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종택이라는 동요 작가가 쓴 동요 중에 '새 고무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읍내 장 십리 길 솔 갈비 한 짐 팔아/ 새 고무신 사고 맨발로 돌아가는 시골 사는 돌이/ 돌다리 넘어서서 또한번 신어보고/ 저 고갯마루부터 정말 신고 가야지/ 돌이는 맨발/ 타박타박 맨발" 여러분이 어렸을 때 신었던 고무신을 떠올려 보십시오. 새 고무신이 생기던 날의 흥분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고무신을 얼마나 애지중지했습니까 딱 한번 발에 잘 맞나 신어보고는 고무신이 혹시라도 닳을까봐, 때라도 묻을까봐 걱정이 되어 신고 다니지도 못하고 두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돌이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고무신을 신고 다녀도 그것을 고통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새 고무신이라도 생길라치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행복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런 것들로는 더 이상 행복을 느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어렵던 시절처럼 살라고 한다면 살기야 하겠지만 그 때의 행복을 회복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가슴을 찢는 무서운 고통을 몇 고비 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삶이 주는 고통이 우리를 옥죄어 오는 바로 이러한 때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고통의 때에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지금은 서로 사랑할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성만찬을 들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도중에 가룟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이제 목전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주님은 얼마 후에 가룟 유다가 몽둥이와 창을 든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이끌고 자신을 잡으려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 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 후에 당할 그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영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예수님도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영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7장 4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몸은 병으로 쓰러지거나 무덤에 갈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축복을 안겨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는 이 뜻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예수님 앞에 그 십자가를 져야 할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나면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영화롭게 한 예수님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시어 부활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를 이 세상 모든 인류를 구원할 영원한 구원자로 높이 세우셨으며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사 온 천하가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주 곧 하나님이라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빌2:9-11).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하나님은 그를 높이 들어 세우심으로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의 죽음은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끌려가는 비참한 처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자기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계시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부터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라'는 말은 56회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고별 설교하시는 13장에서 21장 사이에 44회나 나온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들 가운데 가장 핵심 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34-5절을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예수님이 이와 같이 마지막 떠나는 장면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실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줄 믿고 보란 듯이 3년을 따라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 예수님이 너무 맥없이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런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는 그들의 믿음도 파산하고, 인격도 파산하고, 꿈도 파산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중에 제자들 중에서 내노라 하던 베드로마저 공공연히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지 않습니까 급하면 스승도 버릴 수 있고, 믿음도 팽개칠 수 있는 초라한 자신들의 모습을 서로 바라보며 제자들이 얼마나 실의와 절망에 빠졌겠습니까 그들이 이후에 겪게될 허탈감이나 좌절감, 공포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이 그들에게 닥쳐오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정신적인 위기와 영적인 위기의 때에, 모든 위기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이 상황을 만날 때 그들로 하여금 꿋꿋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끈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이겠습니까 명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보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살아남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고 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목전에도 사랑만이 우리를 붙들어주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랑의 진가는 어려울 때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법입니다. 만사가 잘 되고 형통할 때 다정하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잉꼬 부부들을 보면 아름다운 장미 같습니다. 그러나 향기 없는 장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미의 진짜 향기는 깊은 밤중에야 비로소 맡을 수 있다고 합니다. 부부가 정말 사랑합니까 그 사랑의 향기를 맡고 싶습니까 생의 위기를 만나 가족이 험하고 좁은 길을 함께 걸을 때 맡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봅시다. 벌써부터 난리들이 아닙니까 그렇게 잘 살 때는 검은머리가 흰 파뿌리처럼 될 때까지 당신만을 영원토록 사랑하겠다던 사람들이 생활이 조금 어려워지고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되어 무능한 남자로 보이기 시작하니까 서로의 사이가 금이가고 티격태격하다가 나중엔 별 것 아닌 것 가지고 싸우다가 갈라서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그 동안의 사랑이 가짜였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사랑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표준-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사랑의 표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가 그 표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잘 살 때나 못 살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그 어느 때든지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한번 사랑하고 끝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번 마음을 주셨으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의 표준에 맞추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정말 사랑할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것만큼 어려운게 없습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도 쉽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안 미워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목사 같으면 절로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게 안되더라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서로 사랑의 표준이기 때문에 표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말만 들으면 기가 질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실천하기 어렵다고 포기해 버립니까 ' 교회에서 늘 하는 소리 아니냐 하지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도 약하고 손발도 약하고 입도 약하고 다 약한데 어떻게 하냐' 하며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로하는 것으로 만족합니까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카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해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의 참 모습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자기의 참 모습을 드러내시는 사람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제자훈련도 받고, 크로스웨이 성경 대학도 다니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이 꿰며 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하나님을 조금 알 수는 있지만 진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처럼 사랑해 보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기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기가 어렵다 하여 사랑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머리로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을 닮아야 합니다. 제자는 선생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예수님처럼 사랑해봐야 합니다.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지 간에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이 표준에 맞추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정해 주셨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라고 하십니까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서로가 누구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제자들끼리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 말입니다. 예수님은 거창한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 할 때 서로는 내 아내요, 내 남편이요, 내 자식이요,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라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것 없습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가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전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 "여보, 내가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를 통해 전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너무나 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의 '서로'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꼭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막연히 사랑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가 실천해야 될 것들이 경우에 따라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세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위로하라
첫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골고다 현장에서 넋을 잃고 돌아온 제자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너나 가릴 것 없이 그들은 다 실패자요, 배신자요, 비겁자였습니다. 자신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상처와 좌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였을 것입니다. 그들을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격려의 말 한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무슨 값을 많이 지불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의 말, 격려의 말 한마디가 사랑을 대변할 수 있을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너무 경쟁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남편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루 종일 실컷 두들겨 맞고 들어오는 사람같이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게되는 무서운 생존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어쨌든 더 앞서야 한다는 절박한 경쟁 의식 속에서 하루 종일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이 무서운 정신적인 폭력 때문에 온 몸이 주눅이 들어서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감정의 날이 시퍼렇게 서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상처도 많이 입고 들어옵니다. 너무 고독합니다. 얼마 전에 제자 훈련이 시작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남자 제자 반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한 형제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참 이상해요. 목사님, 남자들끼리 모인 곳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남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눈물이 참 많아요." 여자들이 옆에 있을 때는 남자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체면을 차리고서 눈물이 나도 참고 견디지만 남자들끼리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게 남자입니다. 한편 아내는 집에서 하루 종일 얼마나 애간장을 태웁니까 '오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나 만약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살아가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 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안절부절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저녁에 남편이 들어오면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남편의 표정부터 먼저 살피는 것이 아내의 심정이 아닙니까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경쟁에 시달리며 늘 긴장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식구끼리 서로가 나누는 한마디의 위로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고 하는 분은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성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저술가입니다. 그분은 '위로'라고 하는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위로라고 하는 것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로한다는 것은 마음을 쓰며 돌보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입니다. 위로한다는 것은 고통을 가져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함께 있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어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라는 의미의 말 한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이와 같은 위로가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보면 가족끼리 위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예 멀리 있는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걱정하지 말게. 곧 지나갈 태풍이야." 라며 위로의 말을 건네기가 그래도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날마다 함께 사는 식구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사 위로한다 하더라도 한두 번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일마다 때마다 변함없이 위로하고 격려해주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더욱이 일이 꼬이고 잘못되는 통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나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낄 때 생의 한 동반자로서 자기를 비우고 전신을 바쳐 남편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아내가 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 집사님 가정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집사님의 남편은 그래도 꽤 괜찮은 중소 기업의 대표 이사로 계시던 분입니다. 그 동안 그가 경영하는 회사가 잘되고 있었는데 최근의 경제위기 한파를 맞아 그만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흑자 부도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던 것도 다 직원들에게 나누어 줘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며칠 후에는 경매에 붙여진다고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지는 그런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남자는 하루 종일 집안에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 집안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숨쉬는 것조차 힘들만큼 답답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눈이 많이 왔지 않습니까 그때 부인되는 집사님이 남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눈 오는 것 봐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어요. 우리 이러고 앉아 있지 말고 우리 같이 카메라 들고 밖에 나가요. 나가서 눈 오는 사진 좀 같이 찍어요." 남편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런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평생 처음으로 남편이 그러면 나가볼까 하며 일어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니는 애도 같이 따라 나섰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함박눈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닙니까 함박눈을 보자 어느 누구부터라고 할 것 없이 모두들 동심으로 돌아가서는 눈이 쌓인 나무를 흔들기도 하고, 눈싸움도 하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신나게 한 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집사님이 그렇게 했다는 말을 듣고 '참 훌륭한 아내구나. 위대한 여인이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큰 일을 해서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못하는 작은 일을 할 때 위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가정에 돌아가서 위로합시다. 격려합시다. 용서하라
둘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한번 제자들의 입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모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그들은 누가 자기들도 붙들려 오지 않을까 여간 불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열 한 제자는 다락방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하고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이럴 때 마태가 갑자기 베드로를 보고 "당신은 수제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여 우리를 망신시킬 수 있느냐" 하며 대든다고 해 봅시다. 그리고 다른 제자는 요한에게 "자네는 말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바로 옆에까지 가서 서 있었지 않은가 거기서 뭐하고 있었는가 대제사장과 좀 안다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수를 쓰지 못했나" 라며 불평을 하고, 안드레는 누군가에게 "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그물을 버리고 좇아가지 않았으면 나도 안 따라갔을 거야. 그랬더라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잘 잡고 있었을 텐데 지금 내 꼴이 뭔가 네가 괜히 흥분해 가지고 나서는 통에 오늘 내가 이 꼴이 됐잖아." 하며 서로를 탓하고만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 분위기가 어떠했겠습니까 잘못하면 우리도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서로 탓만 할 뿐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살벌한 분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용서를 공동체 생활의 접착제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용서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입니다. 용서하면 공동체가 절대 흩어지지 않습니다. 가정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부부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튀어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면 이 접착제가 끊어지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흩어지고 맙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지만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피차 용서해 주어야 할 빚을 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가정 식구들을 용서하는 것은 특별히 더 중요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보통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오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먼데 있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가 식구들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을 만하면 또 상처를 받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의 상처를 또 긁어 피를 냅니다. 우리가 이러면서 한 가정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상처를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받는다 해도 쉽게 아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지고 세상살이가 빠듯해 지고 여러 가지 면에서 긴장이 고조되면 나도 모르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농사 지을 때야 화가 나면 밖에 나가 강아지라도 두들겨 패면 되었지만 지금은 스트레스를 풀 강아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있는 아내에게 마구 화풀이를 하고 애들을 들볶으며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용서란 자기를 해방시키는 행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그에게 감정이 상했다는 정신적 부담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의 감정을 상하게 한 그 사람들을 늘 마음속에 데리고 다녀야 하는 부담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그런 부담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도 살고, 내 가까이 있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웃들도 삽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어려운 위기를 만났을 때에야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가정에서 웃음이 사라져 버리거나 갑자기 어떤 문제가 터지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때가 많습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문제를 빌미로 삼아 남편을 괴롭히고, 아내를 괴롭히는 것은 아직 상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경제적인 위기를 만났다고 파산되는 많은 가정들을 보십시오. 그 가정의 문제가 정말 돈의 문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평소에 용서한 줄 알고 덮어두었는데 사실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응어리 때문에 가정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깨어지고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못나고 무능한 남편이라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돈 잘 벌어 줄 때 흥청망청 쓰기에 바빴던 아내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용서하고 끌어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어려운 위기를 함께 웃으면서 대처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용서가 곧 사랑인 것입니다. 인내하라
셋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인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인내를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옛 속담에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험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서 함께 참는 것만큼 큰사랑이 없습니다. 코리텐 붐이라고 하는 위대한 여성은 참는 것에 대해서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스위스에 있는 알프스 터널을 한번 통과하려면 30분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가 연기를 품으면서 달리던 시절에는 일단 터널 속에 들어가면 모두들 손수건을 가지고 코를 막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문을 꽉꽉 닫아놓아도 한 30분을 연기로 가득 찬 터널 속을 달리다보면 객차 안에 연기가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있어도 코 안이 새까매지고 숨이 탁탁 막힐 정도니 터널을 지나는 그 시간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차표를 찢어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을 열고 뛰어 내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코를 손수건으로 틀어막고 숨을 아끼며 참습니다. '조금 있으면 밝은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는 입구가 나올거야. 이제 한 10분만 더 가면 돼.' 하며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위기 한파가 우리 나라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은 우리가 추워도 참아야 됩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지 못하고, 쓰고 싶은 것도 절제해야 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것도 겪는다 해도 참아야 합니다. "아빠, 우린 참을 수 있어요. 염려하지 마세요.여보, 나 괜찮아요. 전의 옷 다시 손질해 가지고 입으니까 이렇게 예쁘지 않아요 보세요.아빠 직장 못 가는 것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한두 달 푹 쉬세요. 그 다음에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 무엇이든지 한번 해보자 구요. 기껏 해 봐야 한 2년 이렇게 고생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러면서 서로 참는 모습을 보여 주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을 위기 속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꼭 실천할 일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용서하고, 참자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두 번 실천하는 것을 그치지 말고 한평생 동안 계속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식구끼리 나누는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은혜 없이는 안 되는 사랑입니다. 은혜를 받아야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34절). 은혜를 받아서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도 있는 옛 계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이름 붙이신 것은 은혜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묵상하며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왕 서로 사랑해야 된다면 흠뻑 젖을 때까지 합시다. 적당히 사랑하지 맙시다. 잠깐 사랑하다가 중단하지 맙시다. 흠뻑 젖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 집안이 사랑의 홍수가 나서 전부 떠내려갈 정도로 실컷 사랑해 봅시다. 저는 작은 정원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정원에 나가서 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무가 생기를 잃고 점점 시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 때문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자기 회사 동료 가운데 나무에 관한 한 도사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 집 나무를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나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런 진단을 내렸습니다. 토질이 척박해서라거나 나무에 무슨 병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을 너무 적게 줘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긴 했지만 너무 적게 줬기 때문에 나무가 더 갈급증이 나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양을 마음껏 주지 않으면 나무가 오히려 물을 줌으로써 더 병이 듭니다. 물을 대충대충 주면 안됩니다. 큰 나무는 물이 뿌리 깊이까지 푹 스며들도록 잔뜩 부어 주어야 합니다. 그저 호수를 가지고 잎사귀에 물을 조금 뿌리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물을 주어도 흠뻑 주어야 잘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디 나무만 그렇겠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공허하게 비어있는데 날마다 "사랑해요"라며 간지럼만 태우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빈자리가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속에서부터 물씬물씬하게 품어 나오도록 나중에는 "아이고 그만 사랑해요. 나 못살겠어요."라고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마음껏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나도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보다 마력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감정은 어깨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크고 부드럽고 따뜻한 하나님의 손길이 내 어깨에 와서 놓인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의 축 쳐진 어깨에 얹는 하나님의 큰손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불안해하는 아내의 어깨에 조용히 얹어 주시는 하나님의 부드럽고 큰손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또 아내는 남편에게, 아빠는 자녀에게, 자녀는 아빠에게 하나님의 큰손이 됩시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고통이 가정을 향하여 물밀듯이 닥쳐온다 해도 주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건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랑의 은혜를 우리 모두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실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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