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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강하신 여호와를 앙망하라 (사40:25-31)

본문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이유들로 피곤 많이 느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피곤을 어떻게 푸십니까 아마 각자 나름대로 피곤을 푸는 방법들이 다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지긋지긋 아플 때면 으레 친구들과 만나 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금새 피곤이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몸이 무겁고 말을 잘 안들을 때면 잠깐 동안이라도 눈을 붙인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내 몸이 가뿐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몸에 조금 무리가 온다 싶으면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하기도 하고, 라켓을 들고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방법들은 각자가 몸의 피곤을 푸는데 나름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삶 자체가 주는 본질적인 피곤은 어떻습니까 이를테면 실패가 주는 피곤이나 자주 괴롭히는 질병 때문에 오는 피곤, 남모르는 고뇌를 안고 가슴앓이를 할 때 오는 피곤 같은 것들은 어떻게 풀고 있습니까 잠을 잔다고 해결됩니까 라켓을 들고 코트로 간다고 풀립니까 그저 산에 가서 두세 시간 있다가 오면 풀립니까 몸이 피곤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 오는 피곤이라면 아마 이런 방법들로도 얼마든지 풀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생의 본질적인 피곤은 다릅니다.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그런 방법들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근본적인 피곤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29절 이하를 보십시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그가 느끼는 피곤이 실패가 주는 피곤이든, 질병이 주는 피곤이든, 인생의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이 주는 피곤이든 간에 반드시 그 피곤에서 벗어나게 하고 새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앙망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바'(qavah)입니다. 이 말은 원래 여러 가지 물건을 비틀어서 하나로 묶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저는 어떻게 이 말이 앙망하다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연유를 짐작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 기다리고, 소망하고, 바라보다 보면 충분히 몸이 비틀리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편 25편을 지은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5절) 여러분이 종일 누군가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한두 시간 기다리는 것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눈이 빠져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 몸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앙망하다'는 말은 몸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만큼 누군가를 바라는 바로 그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사야 38장 14절 역시 '앙망하다'는 말이 가진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오죽 기다리고 바라보았으면 눈에 핏발이 서고 침침해져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곤을 느끼겠습니까 앙망한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를 이처럼 앙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끌어 그에게로 향하게 하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끌리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발로 차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몸이 비틀릴 정도로, 눈이 쇠할 만큼 하나님을 앙망하기를 원한다면 한 가지 꼭 알아야 될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하신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하신 지를 분명히 확인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간절히 앙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강하고 능하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입니다.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만 아직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성경 어디에 붙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크고 강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 알아 가지고는 절대 여호와를 앙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중생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위 '친자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네 다섯 살 먹은 사내아이를 데리고 자주 외출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애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느라 서 있노라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을 발로 차는 못된 버릇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 동안 그 버릇을 고치려고 때로는 야단도 쳐보고, 달래 보기도 했습니다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들이 왜 저렇게 행동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가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 놈이 아빠가 옆에 있으니까 저러는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어린애에게는 아빠가 가장 크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빠보다 더 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빠가 내 옆에 있는데 넌 뭐냐 하는 식으로 신이 나서 으시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친자본능의 한 예라 할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친자본능 때문에 하나님 외에는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강하고 크시다는 사실을 신이 나서 감격스럽게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앙망하는 일은 이런 친자본능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강하고 크시냐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하시냐 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씀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강하심을 우리가 무슨 재주로 다 인지하면서 이해를 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강하시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 한두 가지만으로도 족한 것입니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풍경 사진을 찍어보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가을에 설악산을 가보면 오색찬란한 단풍으로 수놓은 모습이 얼마나 장관입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악산의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카메라 셔터를 연방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온 사방에서 찰카닥 찰카닥 하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막상 사진을 현상해 놓고 보면 그 때의 풍경이 아닙니다. 형편없고 초라한 것이 정말 아니올시다입니다. 사람 얼굴이 들어간 것이나 남기지, 절경이라고 감탄을 하며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던져질지도 모릅니다. 그 만큼 실망이 큰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장엄한 대자연을 35mm 필름에다가 담으려는 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문적인 사진가들은 장엄한 대자연을 다 담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설악의 모습 가운데서 특별히 마음에 드는 어느 한 부분을 싹둑 잘라 가지고 그 다음에 그것을 정성껏 묘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설악의 전부를 담은 것이 아님에도 그가 찍은 사진을 보고 "야! 설악산 단풍 아름답다. 우리 나라 설악산은 정말 명산이야."라며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다 담아서 일일이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한 부분만 보아도 우리는 설악산이 아름답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크고 강하신 것을 우리가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한두 가지만 알아도 우리는 그를 앙망하지 아니하면 안될 만큼 마음의 감동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 점에서 오늘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냐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시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을 보라 먼저, 이사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을 보면 그가 얼마나 크고 강한 분이신가를 알 수 있고, 또 앙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이 본문을 그대로 읽어도 감동이 오기는 하지만 좀 어려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더 실감나게 다시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하늘을 올려다 보라. 누가 저 많은 별들을 창조하였는가 여호와께서 그 많은 별들을 군대처럼 배치해 놓으시고 하나하나 그 이름을 불러 점호하신다. 권능이 무한하시고 힘이 강하신 그분은 별 하나 빠뜨리지 않으신다." 이사야는 하늘을 가르키며 그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을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 때 하늘을 창조하시느라고 이틀을 보내셨습니다. 이틀 동안 말씀으로 하늘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 하셨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 잘 모릅니다. 하루에 몇 번씩 특별히 하늘이 파랗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 보고 '야, 넓다. 높다.' 이렇게 탄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아침에 태양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면서 뽐낼 때 감탄하기도 하고,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그 어떤 신비감에 젖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천문학자들의 말을 듣고도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우리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1977년에 토성 탐색을 위해서 미국에서 우주선 하나를 쏘아 올렸습니다. 보이저 1호입니다. 그 우주선은 지구를 떠나면서 하루에 12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달렸습니다. 우리가 고속도로에 들어가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시속 140 킬로미터 정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엄청나게 빠르다고 느끼는데 120만 킬로미터라면 도대체 얼마나 빠른 것입니까 도저히 실감이 안 나는 속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기를 무려 3년 2개월이나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토성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된다는 것입니까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백 킬로미터인 것을 감안하면 토성까지의 거리 역시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엄청난 것입니다. 지구에서 토성까지 그 공간이 얼마나 넓은 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천문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토성, 금성이 포함된 이 태양계도 우리가 볼 때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전 우주에 비하면 그것도 한쪽 모퉁이의 작은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 우주는 도대체 얼마나 넓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올려 다 보는 저 하늘이 얼마나 광대하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좁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이 그 만큼 크고 광대한 것이라면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은 얼마나 크고 광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자기보다 더 큰 것을 창조하실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광대한 우주 공간을 창조하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모든 우주 만물이 정연한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도록 질서를 세우시고 주관하고 계십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지구 주변으로 매일 큰 바윗덩이들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바윗덩이를 일컬어서 '소행성'이라고 말합니다. 직경이 1킬로미터나 되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들이 1년에 2천개 이상 지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서 지나간다고 합니다. 어떤 것은 불덩이가 되어 지나가다 타버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아예 영원히 공간 속으로 사라지기도 하면서 2천개가 지구를 스쳐 가는 것입니다. 이런 바윗덩이 하나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백만 아니 수 백만 메가톤 이상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중의 어느 하나라도 궤도를 잘못 들어 지구 어느 모퉁이와 부딪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 지구는 역사적으로 끝장이 나버린다고 합니다. 직경 1킬로미터 짜리 소행성은 그만 두고라도 직경 1백 미터 정도의 큰 돌덩이 소행성도 1년에 30만 개 이상이 지구 주변을 스쳐 지나간다고 합니다. 또 직경 20미터 짜리 작은 돌덩이는 1억 개가 넘을 정도로 많은 수가 지구 옆을 스쳐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들 중 하나라도 지구 어느 부분하고 충돌하면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일 이 우주를 지배하시는 전능자가 계시지 않는다면 그런 소행성이 지나가다가 충돌이 일어나고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직경이 1킬로미터나 되는 돌멩이 2천 개와 직경 1백 미터가 되는 30만개, 20미터가 되는 1억 개 이상이 되는 돌멩이들이 날아가는데 그것이 질서를 안 지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소행성이 지구와 부딪혀 가지고 사고가 났다는 기록은 없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천문학자들이 "야, 저 행성이 지금 우리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 조금만 있으면 몇 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한다. 잘못하면 지구와 정면충돌할지도 모른다." 하고 조마조마해 하며 요란을 떠는 소리를 우리가 신문을 통해 접합니다만 우리는 그런 날 저녁일수록 더 평안히 잠자고 있잖아요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다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와 같이 크시고 능력이 많으십니다. 이사야 48장 13절을 보십시오.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하늘을 창조하신 전능하고 크신 하나님, 그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믿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자기를 앙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을 보고 하나님의 크고 능하심을 알 수만 있다면 어찌 그를 앙망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를 찾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를 향하여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능하신 분이신지 잘 모르니까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요,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분을 앙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알기만 하면 어떻게 앙망하지 않겠습니까
2.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이사야는 또 하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크고 강하심을 알려 주기 위해서 예를 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비해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이 크고 강하심을 믿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 세상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보라. 하나님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니라." 주님께서는 세계만민이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불과하고 저울의 접시 위에 앉은 먼지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신가요 얼마나 능하신 하나님이신가요 또 22절을 보십시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 위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메뚜기처럼 작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41장 14절을 보십시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야곱도 지렁이 같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이십니까 한 곳 더 예를 들어봅시다. 이사야 40장 28절 중간은 하나님을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토저(A.W.Tozer)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은 새로 에너지를 보충해 줄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항상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고, 배가 고프면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어야되듯이 그렇게 계속 에너지를 충전 받아야 힘이 생기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줄어들지 않는 충만함 속에 자기가 원하시는 것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능력이 많으십니다. 피곤하시거나 곤비해 하시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30절을 보면 그렇게 힘이 펄펄 넘치는 소년이라도 금방 피곤해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갖추고 지치지 아니할 것 같은 장정이라도, 어른이라도 조금만 지나면 넘어지고 자빠지지 않습니까 능력 많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보고 메뚜기니, 지렁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괜히 자존심이 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도 나름대로 대단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까요 우리에게 염색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염색체 하나에 들어있는 정보량은 2백억 비트 정도라고 합니다. 2백억 비트 하면 별로 실감이 안 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우리가 컴퓨터로 문서를 만들 때 A4용지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 A4용지에 한 3백 단어를 넣는다고 합시다. 2백억 비트란 3백 단어를 쓴 A4용지 2백만 장을 찍어낼 수 있는 엄청난 정보량입니다. 이것을 5백 페이지 짜리 책으로 만든다면 4천 권의 책과 맞먹는 양입니다. 우리 염색체 하나에 4천 권의 도서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우리가 인간의 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인간이란 참 대단한 존재구나 하는 자부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메뚜기와 지렁이에 비기십니다. 얼마나 크고 능하신 분이기에 그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만큼 크고 능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크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피곤하다고 짜증내거나 실망하지 말고 그럴 때마다 이 크고 강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서 짝할 자가 하나도 없는, 비교할 자가 하나도 없는 저 크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새 힘을 준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혹은 '재충전 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을 우리 어감에 맞게 다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나 다시 새 힘을 얻어서 마치 강풍을 타고 창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독수리처럼 그들도 하나님의 영에게 이끌려 올라갈 것입니다. 그들은 뛰고 달려도 피곤한 줄을 모르며 아무리 먼길을 걸어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아무리 믿음 없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이라도 이 말씀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집에 가서 외워보십시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굉장한 힘을 공급해 주는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나타난 표현법이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보통 작은 것부터 먼저 이야기하고 큰 것으로 발전시키는 방법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구절은 거꾸로 입니다. 가장 빠르게 날아가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달리는 것과 걷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카타바시스(Catabasis) 라고 하는 표현법인데, 음악으로 말하면 일종의 디크리센도(decrescendo)기법입니다. 은혜 안에서 볼 수 있는 성장의 효과를 나타내기에 적절한 표현법입니다. 처음 예수 믿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첫사랑을 알고 그분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감격을 알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하늘 나라의 영광을 알면 가슴이 터지고 메어질 것 같아서 못 견딥니다. 그래서 기도도 많이 하게 되고, 안 믿는 사람을 만나면 그가 지옥 가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어떤 때는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지 않습니까 이런 황홀한 은혜의 때는 우리가 독수리처럼 날아가는 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날아가는 때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가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별종이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가봐야 한 3년에서 5년 사이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그런 날아가는 힘도 주십니다. 그러나 2단계에 접어들어서 우리가 진리를 배우면서 신앙이 자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그런 영적인 능력이 자라나는 제2단계가 있지요. 이럴 때는 날아가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달리는 신앙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단계에 비해 속도가 좀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달음박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은혜를 우리가 자주자주 맛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어요. 믿기는 늦게 믿었지만 다른 사람보다 앞서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달리는 거예요. 이 달리는 은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면에는 날아가는 은혜보다 달리는 은혜의 기간이 더 깁니다. 그러나 달리는 것도 오래 계속 되지는 못합니다. 제 아무리 마라톤 선수라도 세네 시간 이상은 못 달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 3단계, 곧 좀더 성숙된 자리에 가면 그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많은 시험을 당하고 연단도 받습니다. 그래서 이 때 쯤이면 영적 싸움을 하느라 고생하다가 얻은 명예로운 상처들을 꽤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이전보다 더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물론 걸어가는 신앙 생활인지라 속도도 많이 느려졌고, 겉으로 보기에 힘도 많이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전 단계와는 달리 꾸준한 전진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 걷는 것은 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어서 걷는 법을 익히기만 하면 종종걸음으로 달음박질하는 때가 있습니다. 일으켜 놓으면 쪼르르하고 달려가고, 만사에 촐랑촐랑 뛰는 그런 걸음걸이를 가지고 행동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간은 많아봐야 4,5년에 불과합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걸어야 합니다. 비가 와도 걸어야 되고, 태양이 뜨거워도 걸어야 되고, 사막과 같은 황량한 들판도 걸어야 되고, 산을 오를 때도 걸어야 됩니다. 꾸준히 걷는 자가 인생의 승자입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걷는 것보다 뛰는 것이 더 능력 있고, 뛰는 것보다 날아가는 것이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날아야 할 때는 날아야 될 힘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또 달려야 할 때에는 하나님이 달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힘보다 중요한 힘은 바로 걸을 수 있는 힘입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이런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함은" 우리가 인생 길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걷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 가운데는 십자가의 험난한 길을 낙심하거나 주저함이 없이 꾸준히 걸어감으로써 자기도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동안 힘차게 날아가는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가 제풀에 지쳐 곤두박칠 치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해 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걷는 자에게 피곤치 않도록 새 힘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날아야 될 힘을 필요로 할 때도 있습니다. 달려야 할 힘을 필요로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꾸준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날을 힘도 없고 달릴 힘도 없는 상황에서 그냥 주저 앉으면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는 걸어야 합니다.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걸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보면 속으로 수백 번도 이혼을 다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보기 싫고 함께 살기 싫어도 그 남편하고 끝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쫓겨 나오고 정말로 무력한 남자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주여. 이 남자와 평생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힘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최근에 저는 저와 친분이 두터운 어느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참 은혜로운 간증 하나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담임하고 있는 인천에 있는 내리 교회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에 들어와 전도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개척한 교회로 10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목사님은 지금까지 그 교회를 23년째 담임해 오고 계신데, 처음 부임해 올 당시에는 교회가 조그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목사님이 목회를 잘 하신 덕택에 그 교회는 교인수
1,300명 정도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고, 한 십여 년 전에는 구 예배당을 헐어버리고 지금의 교회당을 아주 멋지게 잘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당을 짓자마자 교회에 시험이 들어왔습니다. 그 교회에서 아주 중심 되는 역할을 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한 20명 정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터줏대감처럼 그 교회를 오랫동안 섬겨온 사람이 10여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7명이 교회 안에 시험을 일으킨 것입니다. 교회당을 지을 때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어서 그랬는지 건축헌금을 그렇게 많이 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1억도 내고 2억도 내서 건축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자기들이 이젠 너무 초라해진 모습이 된 것입니다. '교회당이 완공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설 땅이 없어지는구나.'하는 위기 의식을 느꼈나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 교회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일을 한 것처럼 일을 하려면 저 목사 쫓아내야 된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목사를 쫓아낼 공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어려워졌겠습니까 3년 반 동안 그 교회는 그야말로 죽다 못해 겨우겨우 연명하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참 어려웠을 때는 그 일곱 분이 예배 도중 그 목사님을 강단에서 끌어내리려고 깡패를 동원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참다 못한 어떤 집사님은 강단으로 뛰어 올라 목사님 옆에 서서 칼을 빼든 채 "누구든지 올라와서 끌어내리기만 해. 다 찔러 죽인다."고 그들과 대치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렇게 되었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 목사님의 입장에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죽을 맛이었겠습니까 저녁에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밥맛도 없어지고 몸도 점점 여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야 이러다가는 내가 완전히 가겠구나. 내가 죽어도 목사처럼 죽어야지.'하고 생각하고는 넥타이를 메고 옷을 다시 입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교회당에 있는 자기 기도실로 갔습니다. 밤중에 엎드려서 "주여-"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 말고 다른 무슨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며칠을 불면증으로 시달렸었는데 한 30분이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코를 드르렁 거리며 완전히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자다가 깜짝 놀라서 깨어 보니 한 시간쯤 지났더랍니다. 그 잠이 어떻게나 단지 그렇게 쌓였던 피곤이 금방 확 날아가 버리고 힘이 솟구치는데 그 시간부터 새벽 시간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양했다고 합니다. 첫날밤에 그렇게 재미 보고 나서는 그 문제가 다 해결될 때까지, 7명이 다 교회를 떠나기까지 1년 반 동안 저녁에 옷을 한번 벗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저녁때면 기도실에 엎드려 "주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오냐. 잘 자라. 내가 새 힘을 주노라."하시며 그에게 한 시간 정도의 단잠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한 잠을 푹 자고 활동을 하니까 몸이 점점 좋아졌습니다. 그 뒤로 목사님은 피곤하고 힘들면 하나님 앞에 가서 "주여"하고 앙망하면 끝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보다 한 수 더 뜨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시시때때로 밀려드는 피곤에 시달리고 계십니까 특히 형제들 요즘 얼마나 피곤합니까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자기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저 크고 높은 하늘을 창조하신 크고 광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독수리처럼 날 수도 있고, 어린 소년처럼 달릴 수도 있고, 저 험한 사막 길을 꾸준히 걸어갈 수도 있는 새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는데 우리가 왜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앙망합시다. 앙망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그분이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주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어 그 모든 피곤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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