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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요13:36-38)

본문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솅키에비치(H. Sienkiewicz)가 쓴 쿠오바디스 라고 하는 소설입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가 절정에 달하자 당시 로마 시에 머물고 있던 교회 지도자 베드로는 신변의 위협을 절실하게 느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와서 눈물을 흘리며 간청을 했습니다. "사도님, 우리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사도님께서 만일 우리를 떠나시기라도 한다면 로마 교회는 완전히 흩어지고 맙니다. 그러니 부디 몸을 피하십시오." 성도들이 하도 눈물겹게 간청을 하자 베드로는 환난이 지나기까지 당분간 몸을 피하기로 하고 밤중에 로마 시를 빠져 나왔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오는 무렵에 그는 그 유명한 아피안 가드로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날이 밝기 시작했습니다. 동쪽에서 황금빛 찬란한 빛을 뿜으며 떠오르는 태양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태양을 보는 순간 현란한 태양 빛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고는 깜짝 놀라서 다급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당시 사용하던 라틴어로 말하면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입니다. 또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로 바꾼다면 '퀴리에 푸 휘파게이스'(kyrie pou hypageis)라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의 백성을 버리고 나오다니 내가 가서 그들을 위해 한번 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한참동안 고개를 떨군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침묵 속에 돌부처처럼 앉아 있던 베드로는 드디어 결심이 선 듯 몸을 일으켜 자기가 오던 길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으로 가신다는데 나도 따라가야지.' 로마로 돌아간 그는 결국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와 같은 죄인이 어떻게 스승 되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못 박힐 수 있겠느냐 라며 자기를 거꾸로 매달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요청대로 십자가에 거꾸로 달림으로 영광스런 순교의 재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전설일 수 있습니다. 또 문학가가 이것을 미적으로, 문학적으로 묘사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부풀어진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서 주님을 따라가려다가 십자가에서 순교했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정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면 늘 쿠오바디스 라고 하는 작품의 내용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은 33절에서 제자들에게 아직은 그들과 함께 있겠지만 장차 그들을 떠나갈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어리둥절해진 제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질문할 기회만을 찾고 있을 때 드디어 베드로가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절) 사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는 이 질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인기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이 인기가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가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형편입니다. 눈을 뜨면 '내가 오늘 뭘 사야 되는데 어느 백화점으로 갈까',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좀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 어느 음식점으로 갈까' 하는 생각만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한 때 흥청망청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조금 고급스러운 사람은 '오늘 몸을 좀 풀고 싶은데 어느 골프장으로 갈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날마다 '내가 어디로 갈까'하는 것만 생각하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질문하며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이란 과연 무엇인지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오늘 예배 드리러 나와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신앙생활입니다. 그 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 드리는 것도 신앙생활이요, 우리가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려는 것도 신앙생활이요, 교회를 통해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하는 것도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는 질문을 매일 매일 반복하며 주님이 가시는 길을 나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신앙생활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나실 때 우리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지 교인을 삼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마 28:19) 제자가 누구입니까 선생이 가는 대로 따라 가는 사람 아닙니까 선생이 하는 일을 똑같이 따라 하는 사람 아닙니까 모든 면에서 선생을 따르며, 심지어 선생이 죽는 곳에서 나도 죽겠다고 하는 것이 제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러한 제자가 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는 질문을 늘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주님 가신 길 오늘도 걷게 하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1. 구원을 얻기 위해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구원을 받기 원합니까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고 있습니다.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 자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참으로 민망한 장면을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카톨릭의 책임자라고 하시는 어른이 가끔 중들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나왔고, 또 어떤 때는 불당에 앉아서 참배하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톨릭이 주후 800, 900년까지는 적어도 그렇게까지 막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때까지는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정통적인 진리를 올바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세의 암흑 시대를 접어들면서 서서히 다원주의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원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길이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 얼마나 고소한 말입니까 현대인일수록 그런 소리를 듣기 좋아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는 카톨릭에 몸담고 있는 교인들 가운데 나중에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몇 퍼센트나 될까 걱정입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들 가운데도 진짜 믿음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신실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지어 마리아도 안 부릅니다. 그러나 카톨릭 전체는 어느 종교든지 괜찮다고 하는 다원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을 스스로 발로 걷어차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는 앞으로 지성인들 가운데서는 카톨릭 신자가 많이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성인일수록 독선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자기 아내가 끼고 있는 다이아 반지를 가리키며 가짜인 것 같다고 말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진짜라고 우기지 않겠습니까 심지어는 멱살을 붙잡고 싸우려 들지도 모릅니다. 제 아무리 지성인이고 박사라고 해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아무도 그러한 태도를 가리켜 독선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말에 대해서는 독선이니 개인주의니 하며 기독교를 몰아 부칩니다. 이 얼마나 모순된 모습입니까 그러니까 다들 모순을 범하면서도 자기가 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에 실족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따라야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야 할 또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하나님의 뜻이면 그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피땀 흘리며 기도 한 다음 주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바로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 뜻에 순종하여 자기를 희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예수를 믿습니까 왜 교회에 다닙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받는 것에만 만족하고 머무른다면 그것은 반쪽 신앙생활밖에 안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궁극적인 목적을 상실한 방향 없는 신앙생활이라고 할 것입니다. 일단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얻으면 그 다음에는 눈을 돌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 구원 얻게 하는 것으로 절대 만족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큰 뜻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먼저 구원받게 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내 이웃이 구원 받고, 나를 통해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옴으로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하나님의 큰 뜻에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원합니다. 무엇이든지 명령하옵소서. 내가 순종하겠나이다. 하나님이 내게 희생을 요구하시면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제단에 올려놓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자기가 구원받고 천국에서 영광을 누리는 것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자기의 미지근한 자세를 감추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교인이 많아질수록 기독교 정신은 점점 천박해집니다. 자기만 아는 신앙생활, 이것은 천박한 신앙생활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뜻에 대해서 질겁을 합니다. 설교를 조금만 강하게 해도 '요즈음이 어떤 세상인데'라며 눈을 부릅뜨고 쳐다봅니다. 그리고 깊은 영적인 이야기나 내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왠지 불안해하는 믿음의 노쇠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중에는 이런 분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이런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지쳐 있습니다. 세상살이를 하느라고 너무 지쳐있는데 그런 설교를 하시면 우리는 감당할 힘이 없어요. 가뜩이나 우리는 세상의 문제들 때문에 에너지를 몽땅 다 쏟아버렸습니다. 이런 때 교회가 이런 소모된 에너지를 재충전시켜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요, 격려입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십시오." 이런 소리만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물론 상처 입은 자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고 살 의욕을 잃어버린 자에게 격려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경적 입니다. 제가 위로나 격려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신앙생활이 온통 그런 것인줄 알고 있는 자세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 그 다음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하고 이제 그분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왜 이 모양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날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위로나 받으려고 하고, 복이나 받으려고 하는 천박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자아가 죽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소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지금은 자기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질문을 했던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을 해보십시오.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셔서 베드로의 기를 확 꺾어 놓으셨을까요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 뜻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건이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베드로는 아직 그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 요건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37절에서 베드로에게 부족했던 요건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 베드로는 아직 자아가 살아있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신감에 불타고 있습니까 '내가 그래도 제자들 중에 수제자인데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어떻게 선생을 버리고 나 혼자 갈 수 있겠는가 어찌 선생은 죽으러 가는데 나 혼자 살겠다고 하겠는가 나도 선생님을 따라가겠다고 하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에 보면 한 수 더 뜨고 있습니다.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다른 제자는 다 포기할지라도 자기만은 끝가지 주를 따라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베드로의 태도는 참 감동적인 자세요, 우리가 칭찬할 만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스스로 실격자인 것을 입증하는 행동에 불과했습니다. 콧대 높은 자아가 펄펄 뛰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그의 실패를 예견하셨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조금 뒤에 이 예언은 사실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비참한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복싱 선수들이 링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 중에 어떤 복서가 한 방을 맞아 다운을 당했다고 해 봅시다. 우리는 한번 다운을 당한 정도라면 그래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다운을 당하면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로 다운되면 이제 가망이 없겠구나 하고 생각을 합니다. 세 번 다운되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역시 그러한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가기는 고사하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러한 실패를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기독교의 가장 큰 이단은 인본주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적 인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은근히 갖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내가 뭔가 할 수 있다 하는 자신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우수한 두뇌를 은근히 믿는 것입니다. 그 동안 사회적으로 화려했던 자기 경력을 은근히 기대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쌓아 놓은 부와 건강을 은근히 기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내가 주님의 일을 한다면 썩 잘 할 거야. 나 아니면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며 은근한 자만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런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지금은 안돼. 지금은 날 따라올 수 없어." 자아가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사람은 절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그 희생의 길을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밤낮없이 외우고 다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한마디로 말하면 난 죽었다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입으로는 그렇게 청산유수로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보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모두 이런 모순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자아가 살아 있으면 절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잠언 28장 2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자기가 잘난 자라고 하는 자기 마음을 은근히 기대고 믿는 자는 미련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넘어질 줄 알고 조심하는 사람은 절대 넘어지는 법이 없는 반면 자기는 안 넘어진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는 사람은 쉽게 넘어집니다. 그래서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문제가 없는지, 내 자아가 살아 있어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이 없는지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우리 자신을 발가벗기고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4. 깨어진 자아에 깃 드는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은 또 하나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올 수 있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후에는'이라는 말이 얼마나 긴 시간을 가리키는지 우리가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은 안되지만 결국 나중에는 따라 올 수 있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베드로가 '지금'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그의 자아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에는' 그가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베드로가 자아가 산산이 깨어지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대로 나중에 베드로는 자아가 깨어지는 처참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과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는 숱하게 실패를 했습니다. 좌절감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을 내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대제사장의 법정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아무 것도 모르는 계집종 앞에서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니 메시아니 하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입에 풀칠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갈릴리로 돌아가서 어설프게 고깃배와 그물을 손질하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느라 비지땀을 흘리는 초라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이게 자존심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에 그래도 내가 수제자인데 하는 생각이 있습니까 어디에 자기라는 것이 살아있습니까 베드로의 자아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전히 부서져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때에 예수님은 다시 그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마 옛날 같으면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아직도 모르고 계셨습니까"하고 자신만만하게 대꾸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살아서 펄펄 뛰던 베드로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렇게 실패한 자신을 찾아오셔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는 음성을 듣는 순간 은혜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산산이 깨어진 자기 안에서 은혜의 샘이 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은혜를 잘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적 인본주의자의 공통점은 은혜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산산이 깨어지고 나면 그때에야 비로소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자를 높이 들어 사용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힘없는 자를 강하게 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공로 없는 자를 공로 있는 자처럼 대우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 또 사람보기에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 힘없는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은혜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깨어지니까 비로소 그러한 은혜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철저하게 깨어진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솟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귓가에 부드러우면서도 자석처럼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잡아당기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요 21:19) 주님이 그를 십자가의 길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겸손하게 일어나서 묵묵히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기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와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감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자아가 깨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은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슴을 치며 탄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여러분 자신이 깨어져야 할 과정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은혜'라는 말을 참 사랑합니다. '은혜'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평안을 느낄 정도로 이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손녀가 태어나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이름을 '은혜'라고 지었습니다. 이제 그 아이는 일곱 살 가까이 되었는데, 이 놈이 교회에 오면 가끔 텔레비전에서 제가 설교하는 것을 듣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이렇게 불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자꾸 내 이름을 불러요" 그렇다고 그 애를 보고 뭐라고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가 뭔지 아무리 설명을 해봐야 통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그럽니다. "너도 다음에 커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값지고 좋고 가슴 뭉클한 말인지 깨달을 때가 올거야. 그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너에게 은혜라는 이름 지어준 것 때문에 굉장히 감사하게 될 거야.' 저는 그 날이 틀림없이 올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은혜를 금방 배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일은 꽤 시간이 걸립니다. 수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드로의 경우처럼 지금은 은혜를 잘 몰라서 주님을 따를 수 없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어 주님을 따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아가 하나하나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은혜를 맛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끝까지 자아를 깨트리기를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우리 자아를 깨트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고 세상에서 교회만 왔다 갔다 하다가 나중에 자아가 여전히 살아서 펄펄 뛰는 몸으로 천국에 들어가면 여러분들이 설 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는 자아가 살아 있으면 반드시 그 자아를 깨트리고 꺾는 과정을 주십니다. 징계를 통해서든지 아니면 우연한 어떤 사건을 통해서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자아를 꺾으십니다. 베드로의 자아를 꺾으셨듯이 우리의 자아를 꺾으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은혜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 경제 위기를 참으로 가슴 아파합니다. 이 일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름부터는 우리가 이러한 위기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될지도 모릅니다. 직업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나 가정 분란이 일어난 사람들, 할 일이 없어서 산이나 공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자살하는 사람들, 나중에는 정신이 미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강력 범죄가 여기저기서 빈번하게 발생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 고비를 잘 넘겨야 됩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러한 위기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너무나 안스럽고 동정이 갑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며 능치 못한 일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제위기 위기 앞에서 슬퍼하거나 한탄하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 우리에게 이와 같이 어려운 연단의 시기가 왔을까 하고 영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자아가 죽지 못해 주님을 따라가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조금 잘되고 은과 금이 풍성하고 자기 명성이 드러나고 하다 보니 옥 목사를 위시해서 교회 지도자들의 자아가 오히려 되살아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를 드리기 보다 자기 뜻을 위해서 뭔가를 해보려고 이리 저리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려운 지경에 몰아 넣으신 것에는 이와 같은 고통스런 경제 위기를 통해 옥 목사를 산산이 깨트리시고,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산산이 깨트리셔서 그 깨어진 틈바구니로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솟아나게 하시려는 선하신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교역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진리이겠습니까 일반 평신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는 그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저런 축복을 받아 신나게 살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어디로 갈 것이냐'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만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몰아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아가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경제위기의 한파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철저히 깨어질 수만 있다면 이 고통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고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평할 고통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들이여, 남편이 어려움을 당할 때 옆에서 보는 것이 얼마나 안스럽습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현실을 영적으로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한참 잘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승승장구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까 정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교만으로 가득한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이런 어려운 고통을 겪게 하심으로 여러분의 남편을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깨어지게 하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하던 남편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던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하신 은혜 앞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끓고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남편이 승승장구하여 이사가 되고, 전무가 되고, 사장이 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감격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할렐루야! 우리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도 성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적으로 축복 주시는 자에게는 재산을 모으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을 잘 키워서 사람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건강을 잘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노년에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까를 생각하며 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노년에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뒤에 혼자 고생하며 어려움을 당하는 것만큼 처량한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년에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편하게 살까 자녀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무엇을 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가지 꼭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그 광대한 뜻에 매혹된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꽃과 같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조금 있으면 하나님이 지으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하며 살게 될 그 날이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서 어떻게 영원토록 살 것이냐를 마음에 두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잠시편하게 사는 것이나 남보다 앞서는 것, 쌓아 놓고 사는 것에 매력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아가 깨어지기 전에 영적으로 교만했을 때에는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얼마나 흥분했습니까 그러나 경제위기 한파를 만나 그 모든 것들이 내 손에서 떠나게 되자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새삼스럽게 다가오지 않습니까 앞으로 이것을 깨달아 알게 될 분들이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놀라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는 그 영원한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그 나라에 가면 고개를 들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깨를 펴고 걸어 다녀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나는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하다가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천국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잠깐 신나게 살아서 무엇하겠습니까
C.S.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아직은 하나의 모형에 지나지 아니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아들이 당신 곁에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변화시켜서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삶을, 사상을 당신에게 주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형이 실물로 점점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겉모양만 갖고 있던 우리가 작은 예수로 점점 변해 간다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있는 대부분은 모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모형 정도가 아니라 작은 예수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이 순종하신 일을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히 사는 것이고, 영원히 빛나는 것이고, 영원히 광채를 발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한 이십 여명 모이는 어떤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그곳에 40대 후반의 장로님 한 분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름만 대면 다 아실 만큼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대화하는 가운데 어떤 목사님이 그 장로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장로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사역 장로로서 요즈음 신나게 일하고 있습니다." '사역 장로'라는 말에 목사님들은 일제히 사역 장로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사역 장로'에 대해 잘 모르시죠 우리 교회는 '사역 장로'라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장로로 피택 되면 시무 장로가 되든지 사역 장로가 되든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무 장로가 좋다고들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목사님이 또 물었습니다. "
그런데 왜 시무 장로 안하고 사역 장로가 됐습니까"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역 장로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시무 장로로 일을 하시다가 50대 넘어가서 명퇴 당하고 또 타의로 실직 당하고,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재산 손해 본 장로님들이 여러분 계시는데 그 분들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세상적인 성공이라는 게 참 덧없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난 다음에는 시무 장로를 내 놓고 사역 장로를 택했답니다. 그분들 중에는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정리해 가지고 중국에 가서 거기 있는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각오하고 지금까지 수년 동안 일하는 사람도 있고, 일본에 가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동남아에 가서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는 한 다섯 분이 그렇게 사역 장로가 되어서 일을 하는데 그분들은 힘든 일을 해야 되는 그런 곳에 교회 직원을 채용하지 않고 자기가 자원해서 그 일을 맡아 아침 8시부터 어떤 때는 밤10시까지 봉급도 안 받고 자기 돈을 써 가면서 수년 동안 묵묵히 기쁨으로 봉사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 사역 장로님들을 볼 때마다 참 자랑스럽고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래서 '나도 저런 사람이 되자.'고 생각하고 사역 장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래, 맞아.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세는 바로 이런 자세야!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주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하시느라 걸어가신 그 길을 내가 따라가는 데, 거기에 무슨 자아가 있고, 내세울 자존심이 있겠는가 주님도 저렇게 산산이 깨어지고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의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내가 뭐라고 얼굴을 쳐들고 남에게 칭찬을 받겠다고 하겠는가 사람이 알아주든 말든 나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 자신을 드려야겠다.'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주님을 따라갑시다. 여러분 가운데는 주님께서 "지금은 안돼"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후에는 반드시 여러분이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합시다. 그래서 우리 남은 여생을 멋지게 살아봅시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 한번 신나게 웃어 봅시다. 신나게 찬송해 봅시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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