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버지의 통곡 (삼하18:28-33)
본문
우리 나라에 젊은 가수 신해철이라고 하는 가수가 있는데 그 가수가 부르는 노래 중에 '아버지와 나'라고 하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의 노래가 반주가 너무 크고 박자가 빨라서 가사 전달이 잘 안됩니다마는 이 '아버지와 나'라고 하는 노래의 가사는 이러합니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 벌어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의 어느 곳에도 이제 더 이상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려 집을 나간 자식들." 그런 노래입니다. 지난 4월 23일 날자, 우리 나라 신문에는 나지 않았습니다. "U. S. Today"라고 하는 미국 신문에 난 것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습니다. 금년 정월로부터 3월까지 한국에서
2,248명이 자살했습니다.
2,248명의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세운 아버지 상이 어떻습니까 이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은 시간과 함께 변한다고 합니다. 네 살 때는 주로 생각하기를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 모르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다. 힘도 참 되게 세다.' 생각을 합니다. 열 두 살이 되면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열 네 살이 되면 '생각하는 것이 모두 구식이다. 마음에 안 든다.' 생각하고, 스물 한 살이 되면 '아버지는 영 골동품이다.' 스물 다섯살이 되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제법 아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생각을 합니다. 서른 살이 되면은 내가 결정할 이 문제를 놓고 '아버지에게 의논하고 싶다.' 오십 세가 되면 '역시 아버지는 훌륭했다.' 육십이 넘으면 '나는 아버지만 못하다.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하고 모든 것을 아는 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세운 아버지 상만큼 여러분의 존재는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격하시키면 내 자신이 또 격하됩니다. 아버지를 높은 분으로 높이는 순간 내 존재의 위치도 높아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 이미지라는 것은 요새 와서 형편없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거나 말거나 사실입니다. 아버지 이미지에서 우리는 공의와 선과 질서를 배웁니다. 우리는 어머니 이미지에서 사랑을 배우고, 은혜를 배우고, 자비를 배웁니다. 이렇게 배워서 한평생 그 배운 바대로 살아가는 것이올시다. 여기서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하나님을 설명하는 계시적 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렇기 까닭에 우리가 가진 Father
Image 아버지 이미지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아버지가 엄했답니다. 너무 엄해서 그저 재깍하면 때리고 호령하고 폭군적인 아버지였다고 기록합니다. 그 때문에 그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만 나와도 그 아버지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연구할 때는 'Wrath of God', 하나님의 진노 개념을 빼고는 루터를 연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하나님으로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그가 지닌 아버지 인상에서부터 그러한 철학, 그러한 신학, 그러한 신앙구도를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다. 탕자의 아버지를 보라. 이 탕자 비유에서 나는 늘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 아버지 참 훌륭한 아버지요. 좋은 아버지입니다. 보세요. 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왜 돈을 주어서 집을 나가게 했나 안 주면 못나갈 것 아니요. 뻔한 일인데 왜 유산까지 나누어주었던가요 그 아들이 그 돈 내 놓으라고 얼마나 못 되게 놀았겠습니까 성경에 없지만 알만해요.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못 되게 놀았으면 "그래그래. 나 죽은 다음에 줄려고 했지만 까짓 거 지금 가지나 그때 가지나 마찬가지다. 가지고 나가봐라." 아버지 세상 떠나기 전에 유산을 잘라서 줍니다. 그리고 내 보냅니다. 천하에 못된 자식에게 왜 재산을 주어서 내 보냈는가 말이요. 아버지의 마음은 이러했을 겁니다. '이 돈 다 없애도 좋다. 뭐 돈이 대수로운 거냐 제발 다 없애도 좋으니깐 착한 아들이 되어 돌아와서 아버지라고 불러다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집을 내 보냅니다. 나가서 무얼 했는지 뻔히 알잖아요. 어떻게 될 거 환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대로 기다립니다. 꼭 돌아올 줄로 믿고 기다립니다. 살아올 줄로 믿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세요. 아들은 아버지를 못 알아볼 때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봅니다. 상거가 멀 때 알아보고 나가서 끌어안는 아버지를 보세요. 이것이 아버지요. 이 못된 자식을 무엇이라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또 그를 영접합니다. 잔치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내 아들이 살아왔다. 잃었다 얻었다 죽었다 살았노라 그리고 잔치를 베푸는 그 기뻐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 역시 탕자의 아버지이기에 탕자임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의 탕자입니다. 구약으로 올라가 보면 다윗이라고 하는 아버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로 대표적인 분으로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맥락을 아시지 않습니까 다윗은 본래 목동이였습니다마는 사울 왕에게 발탁되어서 충성된 장군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사울 왕을 위해서 충성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서 그는 쫓겨나야 했고 광야를 헤메고 고생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유대나라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와서는 또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성경맥락을 연구해 보면은요 압살롬은
셋째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형 둘이 죽었습니다. 실질상 지금
첫째아들입니다. 맏아들이요. 그 인물도 잘났답니다. 출중해서, 머릿결이 좋아서 아주 축 늘어졌는데 모두가 칭찬하고, 똑똑하고, 잘난 아들이었답니다. 온 백성이 추앙하는 그런 아들이었어요. 인기가 있는 아들이요. 가만히 기다리면 아버지 죽으면서 왕이 될텐데 무엇이 바쁘고 초조해서 아버지를 배반하는 겁니까 악당들과 작당을 해서 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아버지는 그대로 왕의 보좌를 내놓고 광야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정처 없이 방황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두 대열에서 전쟁이 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 물어봅니다. 내 아들 압살롬이 평안하냐 내 아들 압살롬이 무사하냐 불효는 고사하고 이런 패륜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어느 역사에 이런 아들이 있단 말입니까 용서할 수 없는 이런 나쁜 아들이지만도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다 대적으로 생각했고, 원수로 생각했지마는 아버지는 여전히 저가 내 아들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이 평안하냐 그가 죽었습니다. 그가 자랑하던 머리채가 나뭇가지에 달려서 매달려 있는 것을 장군이 찔러서 죽였습니다. 통쾌하게 죽었습니다마는 이 죽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못합니다. 이거 얘기했다가는 자기도 살아남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만큼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침내 구스사람이 기어이 "당신 아들이 죽었소"라는 비보를 가지고 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계속 통곡을 하는 아버지의 통곡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천하에 죽일 놈이요. 못된 사람이요. 패륜아라고 했겠지만, 원수라고 했겠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왜 그는 피난의 길을 가야했습니까 왕의 보좌를 내놓고 피난을 가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인 겁니다.
왜냐하면 그가 밧세바라는 여자에게 취해서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이 있거든요. 자기 밑에 있는 충성된 장군을 그 아내를 뺏기 위하여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시면서 "너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가슴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형제들간에 다투면서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심판이라고요.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강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심판이라고요. 그가 피난의 길을 나설 때에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합니다. 옆에 있던 장군이 그대로 칼을 들어서 목을 내려치려고 합니다. "아서라. 그러지 말라. 하나님이 저를 저주하라 하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받는 채찍이요. 심판이니까 나무라지 말라."고 그리고 훌쩍 떠나서 정처 없는 피난의 길을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대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는 말 좀 보세요. "자, 일어나 도망가자." 그래 도망갑니다. 다윗편에 장군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압살롬과 그 일당을 전멸할 수 있습니다마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좌를 놓고 그는 도망갑니다. 왜요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아들에 이와 같은 패륜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죄 때문에 저 아들이 이러한 아들이 되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들이 어렸을 때 잘못된 것을 보았고, 내가 좋지 못한 본을 보여 주어서 그 결과로 이 같은 일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는 아들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너도 피해자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는 집을 나서게 된 겁니다. 어떤 집의 아들아이가 속을 어지간히 썩여요. 말썽도 많이 부리지만 공부도 안하고 집을 나가고 걸핏하면 가출이에요. 그의 어머니는 속이 상해가지고 심지어 제게까지 찾아오면서 너무 답답해 가지고 "또 가출했습니다. 또 말썽입니다. 이 자식이 언제사람될까요 그저 괴로워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자 "이 젊었을 때 이 중요한 나이에 공부 안하고 저러고 다니면 어떻합니까" 그러고 발발 떱니다마는 아버지는 태연합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 부인의 말에 의하면 남편이 말없는 것이 속상하대요. "책임은 나 혼자 지는 거냐 어째서 당신은 말이 없느냐"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아들이 나갔어요!" 그러면 "그래 그랬구먼.돌아왔어요오, 그랬구먼." 아무 말이 없어요. 왜 그 아버지는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아버지 속을 어지간히 썩였거든요. 이 정도가 아니었거든요. 너무 속을 썩인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식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런고로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보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참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이 쓰리고 괴롭지마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 없는 아버지라고 나무라지 마세요. 저 속은 더 썩고 있는 겁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돼요. 그래서 "일어나 도망가자." 그랬어요. "일어나 도망가자."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 아들을 죽여서 해결하겠습니까 내가 죽어서 해결하겠습니까 다윗의 입장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저 아들을 죽이면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됩니다. 그냥 앉아 있다가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면 아들을, 아버지 죽인 아들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이런 전해지는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공자 선생님의 제자 증자라고 있는데 그 증자는 효자로써 소문이 난 분입니다. 어느 날 친구 한 사람이 공자에게 증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증자는 이렇게 효도하는 분입니다."하고 효도한 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을 했더니 공자 선생님은 효도는 고사하고 노발대발합니다. "그런 불효자가 있나" 그러더랍니다. 무슨 사건이냐 하면, 증자가 어떤 날 아버지와 같이 참외밭을 맸어요. 참외밭을 매다가 실수해서 참외의 뿌리를, 참외의 넝쿨 뿌리를 끊어버렸어요. 아버지가 "이 따위로 하면 되느냐 아니 김맨다고 하다가 참외를 죽였잖아." 그래 가지고 얼마나 나무라는지 때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증자는 생각 했습니다. '나는 잘못했고 화가 나는 아버지니까 때리고 싶은 대로 때리십시오.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십시오.'하는 마음으로 맞았습니다. 아 거기 몽둥이가 있었어요. 몽둥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결국은 기절했습니다.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까 일이 이렇게 됐거든요. 아버지가 화가 나 있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 그는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아버지 화를 풀어 드려야지. 그저 때리고 싶은 대로 때려서 그래서 화가 풀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때리십시오.'하는 마음으로 그는 오히려 아프지도 않고 마음도 괴롭지 않습니다 하는 뜻으로 거문고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대요. 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효도 아니냐" 해서 얘길 했더니 공자 선생님은 아니라고, 나쁜 놈이라고 "증자 자네 이리 오라우." 불러 놓고 얘기를 합니다. 순 임금의 이야기를 하는데 "봐라, 중국 역사에 나오는 순 임금은 효자다. 그는 그 아버지가 못 되가지고 그저 발끈하면 화를 내고 발끈하면 때리는데 때릴 때마다 그저 자 고마운 마음으로 맞았다. 그러나 때리다가 아버지가 옆에 몽둥이가 있어서 몽둥이를 들면 그러면 재빨리 도망을 갔다. 왜 도망간 줄 아느냐 내가 이제 아버지로부터 몽둥이로 맞아서 피가 나면, 상처가 나면 나를 때려 놓고 그 다음에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뒤에 아버지가 얼마나 후회하며 마음이 아플까 그 생각을 해서 도망갔느니라. 어느 쪽이 효자냐 너는 불효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때리는 사람 앞에서 '나 죽여라.'하면서 맞는 거 맞아 싸요. 왜 때리는 사람을 만들어 왜 나쁜 사람을 만드느냐 이 말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때릴 때는 재빨리 도망가서 착한 사람을 만들도록 힘써야지 부모가 화났기로서니 화 풀릴 때까지 맞겠다고 대드는 요런 사람이 나쁜 거죠. 자,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왜 떠났느냐구요 내가 여기에 있다가 아들을 죽이겠습니까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여기서 내가 죽으면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아들로 짓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를 죽인, 죽이는 아들을 만드는 거예요. 내가 안 죽으면 못 죽이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는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들은 악합니다마는 그러나 더 악한 아들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처 없이 어디 가서 죽더라도 이 길을 떠나야 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불효자 자식을 만드는 것도 때로는 부모라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 오늘 사무엘하 18장 5절에 보면 이 전란 속에서 계속 다윗은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 이 불효자식, 이 패륜 자식을 놓고도 "나를 위해서 내 아들을 너그럽게 대하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아들이 죽었을 때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다린 겁니다. 이런 와중에서 돌아오기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참 아들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1997년 8월 31일자에 중앙일보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미화원을 하고 있는 아버지인데, 청소부란 말입니다. 어떤 날에 보니까 그 아들이 아주 높은, 고급 브랜드 청바지를 입었어요. 자기가 돈 준 일이 없는데. 그래서 "너 어디서 나서 이것을 옷을 입었느냐" 호되게 나무라니까 사실대로 불었습니다. "전철역에서 남의 돈을 훔쳤습니다." 아버지는 "그래, 아무리 가난하고 어렵기로서니 남의 돈을 훔쳐서야 되느냐 이놈아!" 붙들고 울고 "그래선 안 된다." 이걸 끌고 파출소에 갔어요. 자수했습니다. 자술서를 쓰면서 보니까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그전에 또한 일이 또 있었어요. 이걸 아버지가 알게 되어 너무 기가 막혔어요. "그래, 내가 가난하고 어려워서 옷을 못 사준 죄다. 그걸 입고 싶어서 했겠지만 어째 이럴 수가 있느냐 이놈아 그래서야 되느냐" 하면서 그냥 죽어버렸어요.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재판정에서 얘기했습니다. "이놈에게 중죄를 내려주세요. 이놈은 나쁜 놈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중죄를 내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판정은 판사는 "무죄" 그랬습니다. 무죄선언을 했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판사의 말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이 절대로 잘못될 수 없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아버지가 있으면 그 자식은 잘못될 수가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세워 놓은 아버지의 위상만큼의 내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248명이 자살했습니다.
2,248명의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기가 세운 아버지 상이 어떻습니까 이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은 시간과 함께 변한다고 합니다. 네 살 때는 주로 생각하기를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 모르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다. 힘도 참 되게 세다.' 생각을 합니다. 열 두 살이 되면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열 네 살이 되면 '생각하는 것이 모두 구식이다. 마음에 안 든다.' 생각하고, 스물 한 살이 되면 '아버지는 영 골동품이다.' 스물 다섯살이 되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제법 아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생각을 합니다. 서른 살이 되면은 내가 결정할 이 문제를 놓고 '아버지에게 의논하고 싶다.' 오십 세가 되면 '역시 아버지는 훌륭했다.' 육십이 넘으면 '나는 아버지만 못하다. 아버지는 정말로 훌륭하고 모든 것을 아는 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세운 아버지 상만큼 여러분의 존재는 평가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격하시키면 내 자신이 또 격하됩니다. 아버지를 높은 분으로 높이는 순간 내 존재의 위치도 높아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 이미지라는 것은 요새 와서 형편없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거나 말거나 사실입니다. 아버지 이미지에서 우리는 공의와 선과 질서를 배웁니다. 우리는 어머니 이미지에서 사랑을 배우고, 은혜를 배우고, 자비를 배웁니다. 이렇게 배워서 한평생 그 배운 바대로 살아가는 것이올시다. 여기서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라는 단어를 하나님을 설명하는 계시적 용어로 사용합니다. 그렇기 까닭에 우리가 가진 Father
Image 아버지 이미지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아버지가 엄했답니다. 너무 엄해서 그저 재깍하면 때리고 호령하고 폭군적인 아버지였다고 기록합니다. 그 때문에 그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만 나와도 그 아버지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연구할 때는 'Wrath of God', 하나님의 진노 개념을 빼고는 루터를 연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하나님으로 그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그가 지닌 아버지 인상에서부터 그러한 철학, 그러한 신학, 그러한 신앙구도를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다. 탕자의 아버지를 보라. 이 탕자 비유에서 나는 늘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 아버지 참 훌륭한 아버지요. 좋은 아버지입니다. 보세요. 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왜 돈을 주어서 집을 나가게 했나 안 주면 못나갈 것 아니요. 뻔한 일인데 왜 유산까지 나누어주었던가요 그 아들이 그 돈 내 놓으라고 얼마나 못 되게 놀았겠습니까 성경에 없지만 알만해요.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못 되게 놀았으면 "그래그래. 나 죽은 다음에 줄려고 했지만 까짓 거 지금 가지나 그때 가지나 마찬가지다. 가지고 나가봐라." 아버지 세상 떠나기 전에 유산을 잘라서 줍니다. 그리고 내 보냅니다. 천하에 못된 자식에게 왜 재산을 주어서 내 보냈는가 말이요. 아버지의 마음은 이러했을 겁니다. '이 돈 다 없애도 좋다. 뭐 돈이 대수로운 거냐 제발 다 없애도 좋으니깐 착한 아들이 되어 돌아와서 아버지라고 불러다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요. 집을 내 보냅니다. 나가서 무얼 했는지 뻔히 알잖아요. 어떻게 될 거 환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립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대로 기다립니다. 꼭 돌아올 줄로 믿고 기다립니다. 살아올 줄로 믿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세요. 아들은 아버지를 못 알아볼 때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봅니다. 상거가 멀 때 알아보고 나가서 끌어안는 아버지를 보세요. 이것이 아버지요. 이 못된 자식을 무엇이라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또 그를 영접합니다. 잔치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내 아들이 살아왔다. 잃었다 얻었다 죽었다 살았노라 그리고 잔치를 베푸는 그 기뻐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 역시 탕자의 아버지이기에 탕자임이 분명합니다. 또 하나의 탕자입니다. 구약으로 올라가 보면 다윗이라고 하는 아버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아버지로 대표적인 분으로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여러분 맥락을 아시지 않습니까 다윗은 본래 목동이였습니다마는 사울 왕에게 발탁되어서 충성된 장군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사울 왕을 위해서 충성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 왕의 시기를 받아서 그는 쫓겨나야 했고 광야를 헤메고 고생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유대나라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와서는 또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성경맥락을 연구해 보면은요 압살롬은
셋째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형 둘이 죽었습니다. 실질상 지금
첫째아들입니다. 맏아들이요. 그 인물도 잘났답니다. 출중해서, 머릿결이 좋아서 아주 축 늘어졌는데 모두가 칭찬하고, 똑똑하고, 잘난 아들이었답니다. 온 백성이 추앙하는 그런 아들이었어요. 인기가 있는 아들이요. 가만히 기다리면 아버지 죽으면서 왕이 될텐데 무엇이 바쁘고 초조해서 아버지를 배반하는 겁니까 악당들과 작당을 해서 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아버지는 그대로 왕의 보좌를 내놓고 광야로 피난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정처 없이 방황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두 대열에서 전쟁이 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계속 물어봅니다. 내 아들 압살롬이 평안하냐 내 아들 압살롬이 무사하냐 불효는 고사하고 이런 패륜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어느 역사에 이런 아들이 있단 말입니까 용서할 수 없는 이런 나쁜 아들이지만도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다 대적으로 생각했고, 원수로 생각했지마는 아버지는 여전히 저가 내 아들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이 평안하냐 그가 죽었습니다. 그가 자랑하던 머리채가 나뭇가지에 달려서 매달려 있는 것을 장군이 찔러서 죽였습니다. 통쾌하게 죽었습니다마는 이 죽었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못합니다. 이거 얘기했다가는 자기도 살아남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만큼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침내 구스사람이 기어이 "당신 아들이 죽었소"라는 비보를 가지고 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계속 통곡을 하는 아버지의 통곡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버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천하에 죽일 놈이요. 못된 사람이요. 패륜아라고 했겠지만, 원수라고 했겠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왜 그는 피난의 길을 가야했습니까 왕의 보좌를 내놓고 피난을 가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적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인 겁니다.
왜냐하면 그가 밧세바라는 여자에게 취해서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일이 있거든요. 자기 밑에 있는 충성된 장군을 그 아내를 뺏기 위하여 죽였습니다. 이 사건을 나단 선지자가 책망하시면서 "너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가슴깊이 새겼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형제들간에 다투면서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심판이라고요. 아들이 아버지의 첩을 강간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심판이라고요. 그가 피난의 길을 나설 때에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합니다. 옆에 있던 장군이 그대로 칼을 들어서 목을 내려치려고 합니다. "아서라. 그러지 말라. 하나님이 저를 저주하라 하기 때문에 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받는 채찍이요. 심판이니까 나무라지 말라."고 그리고 훌쩍 떠나서 정처 없는 피난의 길을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대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는 말 좀 보세요. "자, 일어나 도망가자." 그래 도망갑니다. 다윗편에 장군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압살롬과 그 일당을 전멸할 수 있습니다마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좌를 놓고 그는 도망갑니다. 왜요 중요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아들에 이와 같은 패륜이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죄 때문에 저 아들이 이러한 아들이 되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들이 어렸을 때 잘못된 것을 보았고, 내가 좋지 못한 본을 보여 주어서 그 결과로 이 같은 일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는 아들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너도 피해자다.' 이런 생각을 하고 그는 집을 나서게 된 겁니다. 어떤 집의 아들아이가 속을 어지간히 썩여요. 말썽도 많이 부리지만 공부도 안하고 집을 나가고 걸핏하면 가출이에요. 그의 어머니는 속이 상해가지고 심지어 제게까지 찾아오면서 너무 답답해 가지고 "또 가출했습니다. 또 말썽입니다. 이 자식이 언제사람될까요 그저 괴로워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자 "이 젊었을 때 이 중요한 나이에 공부 안하고 저러고 다니면 어떻합니까" 그러고 발발 떱니다마는 아버지는 태연합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 부인의 말에 의하면 남편이 말없는 것이 속상하대요. "책임은 나 혼자 지는 거냐 어째서 당신은 말이 없느냐"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아들이 나갔어요!" 그러면 "그래 그랬구먼.돌아왔어요오, 그랬구먼." 아무 말이 없어요. 왜 그 아버지는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아버지 속을 어지간히 썩였거든요. 이 정도가 아니었거든요. 너무 속을 썩인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식을 보면서 자기 모습을 보는 거예요. 그런고로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이것이 다윗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자녀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 얼굴을 보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참고 있는 것입니다. 가슴이 쓰리고 괴롭지마는 할 말이 없습니다. 말 없는 아버지라고 나무라지 마세요. 저 속은 더 썩고 있는 겁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돼요. 그래서 "일어나 도망가자." 그랬어요. "일어나 도망가자."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 아들을 죽여서 해결하겠습니까 내가 죽어서 해결하겠습니까 다윗의 입장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저 아들을 죽이면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됩니다. 그냥 앉아 있다가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면 아들을, 아버지 죽인 아들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이런 전해지는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공자 선생님의 제자 증자라고 있는데 그 증자는 효자로써 소문이 난 분입니다. 어느 날 친구 한 사람이 공자에게 증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증자는 이렇게 효도하는 분입니다."하고 효도한 한 사건에 대해서 설명을 했더니 공자 선생님은 효도는 고사하고 노발대발합니다. "그런 불효자가 있나" 그러더랍니다. 무슨 사건이냐 하면, 증자가 어떤 날 아버지와 같이 참외밭을 맸어요. 참외밭을 매다가 실수해서 참외의 뿌리를, 참외의 넝쿨 뿌리를 끊어버렸어요. 아버지가 "이 따위로 하면 되느냐 아니 김맨다고 하다가 참외를 죽였잖아." 그래 가지고 얼마나 나무라는지 때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증자는 생각 했습니다. '나는 잘못했고 화가 나는 아버지니까 때리고 싶은 대로 때리십시오.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십시오.'하는 마음으로 맞았습니다. 아 거기 몽둥이가 있었어요. 몽둥이로 두들겨 팼습니다. 결국은 기절했습니다.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까 일이 이렇게 됐거든요. 아버지가 화가 나 있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 그는 '내가 잘못한 것이니까 아버지 화를 풀어 드려야지. 그저 때리고 싶은 대로 때려서 그래서 화가 풀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때리십시오.'하는 마음으로 그는 오히려 아프지도 않고 마음도 괴롭지 않습니다 하는 뜻으로 거문고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대요. 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효도 아니냐" 해서 얘길 했더니 공자 선생님은 아니라고, 나쁜 놈이라고 "증자 자네 이리 오라우." 불러 놓고 얘기를 합니다. 순 임금의 이야기를 하는데 "봐라, 중국 역사에 나오는 순 임금은 효자다. 그는 그 아버지가 못 되가지고 그저 발끈하면 화를 내고 발끈하면 때리는데 때릴 때마다 그저 자 고마운 마음으로 맞았다. 그러나 때리다가 아버지가 옆에 몽둥이가 있어서 몽둥이를 들면 그러면 재빨리 도망을 갔다. 왜 도망간 줄 아느냐 내가 이제 아버지로부터 몽둥이로 맞아서 피가 나면, 상처가 나면 나를 때려 놓고 그 다음에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뒤에 아버지가 얼마나 후회하며 마음이 아플까 그 생각을 해서 도망갔느니라. 어느 쪽이 효자냐 너는 불효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때리는 사람 앞에서 '나 죽여라.'하면서 맞는 거 맞아 싸요. 왜 때리는 사람을 만들어 왜 나쁜 사람을 만드느냐 이 말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때릴 때는 재빨리 도망가서 착한 사람을 만들도록 힘써야지 부모가 화났기로서니 화 풀릴 때까지 맞겠다고 대드는 요런 사람이 나쁜 거죠. 자,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왜 떠났느냐구요 내가 여기에 있다가 아들을 죽이겠습니까 아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겠습니까 여기서 내가 죽으면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아들로 짓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를 죽인, 죽이는 아들을 만드는 거예요. 내가 안 죽으면 못 죽이는 것 아닙니까 그래 그는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들은 악합니다마는 그러나 더 악한 아들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처 없이 어디 가서 죽더라도 이 길을 떠나야 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불효자 자식을 만드는 것도 때로는 부모라는 것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 오늘 사무엘하 18장 5절에 보면 이 전란 속에서 계속 다윗은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접하라." 이 불효자식, 이 패륜 자식을 놓고도 "나를 위해서 내 아들을 너그럽게 대하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아들이 죽었을 때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하면서 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기다린 겁니다. 이런 와중에서 돌아오기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참 아들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1997년 8월 31일자에 중앙일보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미화원을 하고 있는 아버지인데, 청소부란 말입니다. 어떤 날에 보니까 그 아들이 아주 높은, 고급 브랜드 청바지를 입었어요. 자기가 돈 준 일이 없는데. 그래서 "너 어디서 나서 이것을 옷을 입었느냐" 호되게 나무라니까 사실대로 불었습니다. "전철역에서 남의 돈을 훔쳤습니다." 아버지는 "그래, 아무리 가난하고 어렵기로서니 남의 돈을 훔쳐서야 되느냐 이놈아!" 붙들고 울고 "그래선 안 된다." 이걸 끌고 파출소에 갔어요. 자수했습니다. 자술서를 쓰면서 보니까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그전에 또한 일이 또 있었어요. 이걸 아버지가 알게 되어 너무 기가 막혔어요. "그래, 내가 가난하고 어려워서 옷을 못 사준 죄다. 그걸 입고 싶어서 했겠지만 어째 이럴 수가 있느냐 이놈아 그래서야 되느냐" 하면서 그냥 죽어버렸어요.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재판정에서 얘기했습니다. "이놈에게 중죄를 내려주세요. 이놈은 나쁜 놈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중죄를 내려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재판정은 판사는 "무죄" 그랬습니다. 무죄선언을 했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판사의 말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이 절대로 잘못될 수 없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아버지가 있으면 그 자식은 잘못될 수가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세워 놓은 아버지의 위상만큼의 내 존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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