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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승리의 비결 (갈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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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익히 아는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이기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싸움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연과의 싸움입니다. 많은 재난-홍수라든가, 혹은 지진이라든가, 또 춥고 더운 기후에서 오는 것이라든가-많은 질병, 이런 것들과 우리는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싸움에 이기면 건강하고, 이 싸움에 지면 죽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과의 계속적인 싸움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다. 이웃을 협조자로, 반가운 사람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이웃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긴장관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여러분, 상점에 가서 조그마한 물건 하나를 사면서도 우리는 신경을 씁니다. '어떻게 하면 속지 않고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을까!' 또, 파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팽팽하게 긴장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왜 이러해야 되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심지어는 부부간에도 먹느냐, 먹히느냐,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 하며 팽팽하게 싸워 한 평생 싸우며 살아가는 이 비참한 모습. 왜 이러해야 되는 것입니까 다른 해결은 없을까요 또한 우리는 부득불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나약함과 자신의 게으름과 더불어 싸웁니다. 그러면서 자기 진실을 지켜가는 것이올시다. 이래서 빅토르 위고는 자연과의 싸움을 설명하면서 '바다 위의 노동자'라는 책을 썼고, 인간관계를 역사적으로 그는 연구하면서 '93년'이란 소설을 썼고,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극적으로 그려서 '레미제라블'이라 하는 훌륭한 소설을 썼습니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로도 만들어져서 미국에서는 한 극장에서만 3년 동안을 계속 공연했었습니다. 공교롭게 저는 세 번 보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미국에 갔던 길에 친구들을 만나니까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그만 세 번이나 가게 됐습니다. 볼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작품! 역시 '레미제라블'은 명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제어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느냐 나는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자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자연의 재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경제문제에 대하여, 정치문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는 인간관계에 대해서 나 외의 다른 사람, 또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많이 생각합니다. 고민도 합니다. '왜 저 사람이 내게 이렇게 대할까'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마는 여러분,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민해 보셨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 원망하지 말고,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가해자라고 하는 입장에서 한번 나를 돌이켜 보셨습니까 '나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많은 사람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있나' 그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 인간 자체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해 보셨느냐 말입니다. 자기 진실, 자기 존재를 찾으려고 얼마나 몸부림 쳐봤습니까 어느 날 쇼펜하우어라고 하는 유명한 철학자가 길을 가는데 깊은 생각을 하면서 가다가 너무 골똘히 생각하던 나머지 앞에서 오는 사람하고 부딪쳤습니다. 대낮에 충돌이 됐습니다. 꽝하고 부딪히니까 그쪽 사람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다가 들이받는 거냐며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었더니 쇼펜하우어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 문제요. 내가 누군지를 내가 몰라서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거요" 그랬다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찾기 위하여 고민해 보셨느냐 말입니다. 이솝우화 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파리와 좀나비라고 하는 얘기가 있는데, 어느 날 파리가 꿀 항아리에서 꿀을 먹다가 변두리에서 조금씩 빨아 먹으면 될 텐데 조금더 조금더 많이 먹으려고 깊이 들어갔다가 그만 꿀 항아리에 빠져 버리고 말았어요. 날개가 꿀에 젖어서 이제는 날 수가 없게 되고, 그냥 거기서 꿀 좀 먹다가 죽어 버리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 신세가 됐을 때에 그 좀나비라 하는 나비가 펄펄 날면서 그를 비웃었습니다. "야 이 놈아, 아니 조그만 놈이 변두리서 좀 빨아먹어도 충분할 걸 뭐 그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모양이 되냐, 이 미련한 놈아." 그랬답니다. 그러다가 해가 졌어요. 주인이 등불을 켰더니 좀나비들이 모여드는데 불 가까이로 막 모여들다가 좀 더 밝은 곳으로, 좀 더 밝은 곳으로 나비가 모여들다가 그만 그 속에서 타 죽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이 파리가 하는 말이 "너는 나 보다 더 바보다." 그랬답니다. 자기 욕심, 자기 정욕을 이기지 못 해서, 여기에 끌려 가다가 비참하게 희생되는 이런 모습. 우리는 이 군상을 보며 이 속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나는 누구입니까. 내 마음, 내 몸, 내 뜻, 내 습관, 내 성향 이대로 좋은 것입니까 이대로 괜찮습니까 한 번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신앙적 위인이 있습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7장입니다. 자기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사람들, 그리고 바울을 세계적인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존경하고 있는 그 로마사람을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편지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주 온 몸을 홀랑 벗은 것과 같은 적나라한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진실할 수 있을까! 어찌 이럴 수가 있나! 그는 위대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왜요 "나는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절박하게 이렇게 부르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진실을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구속의 은혜를 고백하게 됩니다. 자기 진실! 아주 진실한 자기 모습을 자기는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내 몸을 쳐서 복종케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내버려두면 안된다. 아주 쳐서 노예를 길들이듯이 쳐서 복종케 해야만 되는 그런 존재다', 아니면,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가 하면 고린도후서 12장에 가서는 더 절박한 얘기를 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사탄의 사자가 있다고, 이것이 아니면 나는 겸손할 수 없고, 이것이 아니면 나는 교만하고, 이것이 아니면 은혜에 살 수 없는 존재다. 나는 못 된 놈이라고요.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나를 계속 찔러야만 믿음 안에 바로 설 수 있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라고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실패했다고 합시다. 누구든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째는 욕심이 많았어요. 욕심이 지나쳤어요. 누구를 막론하고 실패한 데는 욕심이 지나쳐서. 두 번째는 목적이 잘못되었어요. 자기 일생을 걸만한 확실한, 확고부동한 목적이 없었어요. 그런 목적으로써는 성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적이 문제였어요. 세 번째는 내가 세운 목적에 대한 합리적 값을 지불하지 않았어요. 큰 것을 원했으면 수고해야죠! 학자가 되려 했으면 열심히 공부해야죠! 그리고, 내가 지불해야될 진실과 충성과 열정을 다하지 못 했어요. 열정을 다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는 거예요. 네 번째는 자기 자신을 믿었어요. 세상에 자기처럼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깨달아 보았습니까 아직까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마음먹으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내가 누구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믿을 것이 못 돼요. 내 지식, 내 감정, 내 판단, 이게 도대체 믿을 것이 못 돼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요. 내가 나를 너무 믿었어요. 믿을 것이 못되는 걸 알면서도 믿었어요. 그것이 오늘의 실패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의지 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돼요. 그런고로 대 포기가 필요합니다. 큰 포기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예일대학의 총장님이 어느 날 대학 졸업하는 학생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데, 아주 의미 심장하고도 간단한 말을 해서 유명합니다.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이 승리자가 될 것을 완전히 포기하면 틀림없이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승리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일등이 되고자 하는 욕망! Top crazy! 이것을 포기하기 전에는 당신들은 승리하지 못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얘깁니다. 우리는 쓸데없이 경쟁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허무한 일에 너무 많은 정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어요. 다 포기해야 합니다. 욕망 자체에 대한 완전한 중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을 쫓아 행하라. 내 욕망, 내 의지, 내 판단을 쫓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네 욕망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네 자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요새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면은 패러다임 스위치(Paradigm switch)를 말하는 것이올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규범이 있습니다. 또 전형이 있습니다. 이 패러다임, 이대로는 안됩니다. 이것을 바꾸어야 됩니다. 농담겸 진담으로 말합니다마는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살려고 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제 그만 어리석도록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 거기다가 부지런을 떨어요. 점점 더 멀리 갑니다. 미련한 사람이 또 고집을 부립니다. 저 망하고 남 망하게 합니다. 생각 좀 달리 하십시다. 옛날 어른들은 그런 얘기했습니다. 탱크처럼 밀어 부치면 뭐 하나 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새는 안 됩니다. 고집 좀 그만 부리세요.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세요. 근본적으로 패러다임 스위치가 필요합니다. 언제 한 번 조그마한 잡지에 난 꽁트를 보니까 그런게 있습디다. 골프를 치는 프로선수가 골프를 잘 쳐 나가다가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다고 그럽니다. 몇 달 동안 안 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불안해져서 안 된답니다. 뭐 아주 형편없이 떨어진답니다. 몇 달 동안 푹 떨어져서 성적이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안 된답니다. 거기서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비결이 뭐냐하면 다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랍니다. 교과서적으로 골프채 잡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을 해요. 그 동안에 상 받은 거 다 잊어버리고, 그 동안에 우승했던 거 다 잊어버리고 다시 초보자로서 시작을 합니다. 기초부터. 그래서 올라가야 다시 전보다 더 올라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세요. 아주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뭐 한가지 고치고, 두 가지 고치고, 결심하고, 맹세하고… 이제 그만하세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중생하며 예수 처음 믿고 십자가의 예수를 발견하고 내 죄 사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던 감격 바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 동안 믿었느니 내가 뭘 알았느니 뭐 내가 직분을 맡았느니 뭐라 쓸데없는 생각 다 잊어버리세요. 처음 믿을 때로 돌아가고 첫사랑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다시 생각하세요. 거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율법적 관계에서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소극적 방법으로는 해결이 없습니다. 부정적 방법으로는 죽음뿐입니다. 더 이상 비판 할 것도 없습니다. 믿어 볼 것도 없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창조적인 역사로 시작되어야 됩니다. 이제 내 생각은 다 버리고 그저 어리석을 정도로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감동해 주시는 대로, 성령님이 지시해 주시는 대로, 성령님이 깨우쳐 주시는 대로, 성령님이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원수를 이기려고 몸부림 칠 것 없습니다. 아주 사랑해 버리면 됩니다. 핍박하는 자를 피해보려고 하고, 미워하는 자를 같이 미워할 것 없습니다. 대결하지 맙시다. 싸우지 맙시다. 더 이상 비방하지 맙시다. 이제는 비방하는 자를 위하여 복을 빌어요. 이게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은 복음을 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도둑질하던 자가 있느냐 이제는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일하라' 그랬어요. 도둑질하던 사람은 구제하고. 자 교만하던 사람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겸손해 지세요. 내가 무엇을 하고 남을 도왔다고 생각하던 것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나는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다시 시작하세요. 온유와 겸손, 화평과 진실을 찾을 것입니다. 새로운 방법입니다. 새로운 세계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빌립보서 2장에 말합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이 마음을 품으라.' 예수의 마음으로 다시 바라보세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게 될 때에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 합니다. 그는 자유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도 이 어려운 나 자신을 이기게 됩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순간, 세상은 새로운 세상으로 내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정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자기 노력으로 해 보려고 애쓰다가 더 비참해 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참으로 비참한 사람은 자기 욕심에 끌리는 사람이요, 더 비참한 사람은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 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자기 옛 생활에 노예가 된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이 없어요. 이건 안돼는 줄 알면서도 벗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가끔 비행기를 타고 여기 저기 다니다 보면 비행장 대합실에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러야 될 때가 많습니다. 그 대합실에서 어떤 때는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리려면 참 지루하거든요. 그래서 이리 저리 좀 책을 보다가 또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보니까 늘 보게 되는대요. 그 넓은 대합실에 한쪽 구석을 유리로 막아 놓고 거기다가 '흡연실'이라고 써 놓았거든요. 사람들이 그 속에 들어가서 요렇게 빨고 있는 걸 보니까 꼭 원숭이 같기도 하고, 동물원 같기도 하고. 전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당신들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 구박을 받으면서도 그래 그걸 이기지 못해서 거기 들어가서 그게 뭡니까. 저게 뭐예요, 꼴이… 그 남의 얘긴 줄 알지 마세요. 내가 자기 정욕, 자기 혈기, 자기 욕심, 자기 자존심, 이거 별 것도 아닌 것, 여기에 붙들려 가지고 그 사는 비참한 모습. 그 노예화된 성품, 비참한 것이에요. 이제 다 그만하고 패러다임-스위치 해 버리세요. 그리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탁 털어 버리고 일어나 보세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겁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能)으로도 못합니다. 오직 성령님으로만 가능합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고로 성령님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을거라고요.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그 이웃을 사랑하십시다. 성령님은 곧 진리의 영이요, 사랑의 영입니다. 그때에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자신을 찾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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