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원망의 발원지 (출16:4-12)

본문

여러분이 잘 아는 헬라 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단정적인 중요한 명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합리적 존재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철학적 차원에서는 그 이성 때문에 인간이 인간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그 이성 때문입니다. 그 이성이라고 하는 말의 개념은 여러가지로 설명이 되겠습니다마는 쉽게 말해서 그저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합리적이어야 하겠는데 생각하는 기능은 아주 중요해요. 이성적 존재는 되는데 그 이성이 지시하는 대로 합리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는 못 된다 그런 말입니다. 이성의 기능 중에 하나가 비판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알기도 하고 결과를 놓고 원인을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그것을 비판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타락하면 어떻게 되느냐. 생각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자기는 비판하지 아니하고 남만 비판합니다. 자기 잘못은 비판하지 못하고 세상만 탓하고 환경만 탓하는 비합리적 존재로 발전한단 말이요. 거기에 병통이 있는 것이에요. 또 그런가 하면 사람에게는 추리기능이 있습니다. 이성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살면서도 과거를 생각할 줄 알고 또, 현재에서 다시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추리하는 능력이 있어요. 자,
그런데 이 사실을 넘어서는 이 추리능력을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꼭 이것이 타락해 가지고 빗나갈 때는 나쁜 방향으로만 추리하는 겁니다. 그게 문제예요. 가령, 저녁에 남편이 늦게 돌아올 때 '아, 무슨 바쁜 일이 있는가 또 무슨 사업이 어떻게 됐나 아주 참 좋은 일이 있는가보다'하고 좋은 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을 하면 '이렇게 늦도록 수고하는구나' 생각을 하고 저녁에 들어올 때 더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텐데, 조금 늦어지기 시작하면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떨어져요. '요것이 또 어디로 샜나 지금 어디서 노닥거리고 있나' 뭐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엉뚱한 방향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그랬다가 문간에 들어서자마자 '꽝'하고 터지는 겁니다. 이게 소위 날벼락이라는 겁니다. 보세요. 왜 하필이면 그쪽으로만 생각이 가느냐 이거죠. 이 병을 누가 치료할 것이에요 이건 정말 구제불능이에요. 아주 근본적인 병이거든요.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2년 반 동안을 비소설계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던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The Seven Habits of Highly Affective People 이라고 하는 책인데 이 스티븐 코비 박사가 쓴 책으로써 이 코비 박사는 한국에 두 번이나 초청을 받아서 와서 강연을 하고 갔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또 그리고 한 번씩 꼭 읽어볼 만합니다.
그런데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이 뭐냐는 거지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것입니다. 제목 그대로 성공한 사람의 성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환경도 아니라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지식도 아니라는 것이요. 성품이요.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독특한 성품이 있더라는 거예요. 공통적으로 말이죠. 자, 우리는 여건이 좋아야 되고, 환경이 좋아야 되고, 누구 말마따나 처가 집을 잘 만나야 되고, 선배를 잘 만나야 되고, 무슨 정치가 줄을 타야 되고, 이건 이 사람의 얘기가 아닙니다. 코비박사가 사회학적으로 열심히 연구한 결론은 성품이다. 일곱가지 성품을 말해요. 이러 이러한 성품, 이러 이러한 습관의 사람이 성공했더라. 이런 사람이 '성공한다'가 아니에요. '성공했다' 그 말이에요. 이미 된 사람을 연구한 거요. 그러니까 이거는 부정할 수가 없는 얘깁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가서 그 일곱가지 성품이 뭐냐 제가 이 시간에 그런 강의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통틀어서 요지는 뭐냐하면은 Proactivity, 주도성입니다. 주도적 체질의 사람이요, 주도적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요, 주도적 체질,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더란 말입니다. '주도적이다'라는 말은 뭐냐하면, 다시 또 설명을 붙이면 그것은 "내가 책임진다" 그 말이요. 사람은 책임지는 만큼의 왕국을 살아가는 겁니다. 영역을 살아가는 것이요. 내 책임 내가 지면 내 왕국에 사는 것이요, 남의 책임도 내가 지면 그 사람도 내가 다스리는 것이요. 내 책임과 남의 책임까지 많은 사람들의 책임까지 다 내가 느끼고 살면 그 사람은 그 만큼 넓은 영역의 인생을 사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잘못된 책임, 내 잘못까지 남에게 돌리면 나는 반으로 주는 거예요. 내 책임은 전혀 없고 완전히 남의 책임이라고 하는 순간, 내 존재는 사라지고 마는 거예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남편이 하도 성격이 못돼서 불같아 가지고 자꾸만 벌컥벌컥 화를 내니까 참다가 난감하거든요. 그래서 아내가 하는 말이 "여보, 왜 당신 점점 더 이렇게 성격이 못돼지느냐"고 충고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남편 하는 말이 뭔 줄 아세요 "나는 본래 안 그랬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다." 성격 나빠진 것이 마누라 때문입니까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이다. 그 소리예요. 그 책이 그 얘기예요. 딴 얘기가 아니에요. 이런 사람에게 성공이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도 "내가 잘못해서 네가 그렇구나." 이런 사람이 성공하더란 얘기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적어도 다른 이성의 사람에게는 결코 남을 원망하지 않아요. 환경을 탓하지 않아요. 환경이 잘못될수록 더 강해지고 더 지혜로워지니까. 더 성공의 길이 열리니까. 실패한 과거 때문에 미래를 망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실로 문제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공한 과거가 미래를 망치는 겁니다. 뭔가 지난날에 좀 잘된 것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만 집착되어서 오늘과 내일을 망치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어떤 분들, 뭐 일류대학을 나왔다. 그것 때문에 망친 사람들 많아요. 그게 어느 세월의 얘기요. 그거 하나 붙들고 일류대학, 일류대학 하는 동안에 다 망했지. 미래 다 망치고 만 거예요.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시원치 않았어요. 그러나 과거로부터 결별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가운데서 훌륭한 일을 많이했어요.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어느 때에 참 좋은 책을 읽었어요. '아버지는
IQ 어머니는 EQ' 아 그런 좋은 책을 보며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경력을 보니까 이 사람이 국제대학 나왔어요, 야간대학. 이 정도 되면 한국에서는 장가가기도 힘들어요. 그러나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가지고 하는 걸 내가 볼 때 '그래 그래 도대체 일류대학은 다 어디 갔나' 여러분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공한 과거가 걸림돌이 된 거예요. 거기에 붙들려 있는 동안 미래로 향한 진취력을 잃어 버렸어요. 그러곤 원망 불평이에요. 세상이 어떻고 뭐이 어떻고 말이에요. 이게 망조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자,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고생을 하는데 그 애굽에 400년 동안에 그 고생 얼마나 큽니까 노예생활, 거기서 영원히 노예로 노예로 나만 아니라 자손 만대에 노예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 홍해를 넘어 광야로 왔습니다. 이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질 못합니다. 완전한 자유인이 됐습니다. 애굽으로부터 자유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자유인은 됐으나 광야에서 태반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비롯한 몇 사람뿐이고 나머지가 다 광야에서 40년 광야생활에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그 후손들이 가나안에 건너가게 되는데 심지어는 모세까지도. 왜 이렇게 됐느냐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원망 죄 때문이다.' 야고보서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확실하게 말합니다. '원망하다가 광야에 떨어져 죽었느니라. 그런고로 너희는 원망하지 말라.'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그러나 단절대로 원망하지 말아야 해요. 누구도 원망하지 맙시다. 원망하면 끝이요. 모처럼 구원받았던 이 백성도 가나안에서 다 죽었으니까요. 이제 우리는 원망하지 말아야 해요. 아무도 원망해서는 안돼요. 원망 죄가 가장 무서운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립니다마는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뭐냐 공산주의는 혁명철학에 볼세비키 당 사상에 두었거든요.
그런데 이 공산주의 철학의 근본이 뭐냐 혁명철학이요. 혁명이 뭐냐하면 혁명의식이란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에요. 부르즈아가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가 있다는 거지요. 내 가난이 부자 때문이라는 거예요. 내가 못사는 것이 지식인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 의식 때문에 서로 책임전가 하다가 망한 거예요. 철학적으로는 오직 그에게는 주도성이 없어요.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거예요. 이것이 혁명입니다. 이것이 혁명 철학이요. 그래서 저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 변증법적 유물론이요. 여기서 망조가 든 거예요. 인간성이 다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거나 말거나 이건 사실이요. 가끔 이런 얘기해 보면 '픽 픽' 웃더라고요. 웃을 얘기가 아닙니다. 이거는요. 심각합니다. 북조선이 못사는 이유, 남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도자이건 백성이건 어린아이까지도. 자기들이 못사는 이유가 철저하게 우리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쌀가마니 하나 보내줬다고 고맙다고 생각 안 해요. 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에요, 이게. 그래서 위험한 것이에요. 자기들이 그렇게 못살고 굶어 죽는 이유가 우리 때문이래요. 말 돼요, 안 돼요 안되지요 내가 한 시간만 설명하면 말 돼요. 이게 되게 되어 있어요. 꼭 그렇게 돼 있어요. 지금. 이게 바로 자기가 못살게 되는 이유요 앞으로도 이래서 못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살아갈 길이 없는 거예요. 개인이건 민족이건 나라이건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아시는 대로 원망이라고 하는 것은 에스칼레이팅합니다. 원망하기 시작하면 자꾸만 버릇이 되요. 그 다음에는 부모 탓, 형제 탓, 이웃 탓, 아내 탓, 무슨 심지어는 자기가 낳은 자식을 놓고 자식 탓, 전부 원망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말 속에서 원망조의 말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누구 때문에" 그 말은 말이 안 됩니다.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은 놓고 "너 때문에"하고 말해보세요. 아이는 "나는 당신 때문에"그래요. 어느 누구하나 여기에 대해서는 원망은 원망을 낳게 돼있지요. 끝도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지 않습니까 이걸 바꾸어 놓으면 우리 인간은 어떠냐 범사에 원망해요. 여기 있는 범사라는 말은 'in every circumstances', '조건 없는' 그런 얘기예요. '이유 없이 어떤 경우에도' 그 말이에요. 범사에 확실히 그래요. 불평하는 사람은 범사에 불평해요. 원망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원망해요. 반대로 똑 같은 환경 속에서도 은혜 받은 사람은 달라요. 범사에 감사해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장애인들을 위해서 평생을 봉사하는 전도사님이 계시는데 그가 간증을 한 간증 설교를 제가 테이프로 들어보았습니다. 너무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그 장애자들이라는 건 여러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건 팔 하나가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팔 두개 있는 사람을 부러워해요. '팔 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그런가 하면 또 팔 둘 다 없는 사람은 팔 하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해요.
왜냐하면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나는 사랑하는 아내도 안아볼 수가 없고, 사랑하는 아이들도 팔로 안아보지 못한다."이거예요. 얼마나 괴로워요. 그 뿐 아니라 어떤 부인은 자기 남편이 12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있는 거예요. 12년 동안을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있는데 이 효력이 없는 거예요. 그 아내의 소원은 눈을 뜨면서 과거와 같 "여보, 수고하오." 한 마디만 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한이 없겠다고 그래요. 그러면 그 외에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럼 다시 한번 물어봅시다. 그러면 그대로 소원대로 "여보, 내가 당신 12년 동안 수고한 것 정말 고맙다"고 하면 한 번쯤은 감격하겠지. 그러면 이제 다시는 원망이 없을까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분은 그런 남편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또 그런대요. 끝이 없는 거예요. 그런고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절대적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원망과 감사는 결코 환경에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체질이요, 이건 성품이요, 그건 존재의 문제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만히 보면 그렇더만요. 제가 그 교인들 사는 걸 보아도 가만히 보니 남편도 좋고, 마누라도 좋고, 음식 솜씨도 좋고, 다 좋은 것 같은데 그 가정에 문제가 많아요. 또 어떤 때 보면은 '저런 집도 무사히 살 수 있을까' 싶은데 그것도 또 잘 살더라고요. 세상에 알 수 없는 게 이거예요. 그러니까 환경이나 여건이나 조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걸 알아야 되요.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죠. 그 원망하는 내용들을 가만히 보면은 내용이 기가 찹니다. 아니 어떻게 됐습니까 400년 동안 노예생활 하다가 거기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건 엄청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홍해를 건너서 광야를 나왔다, 감격했지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래 며칠 있다 원망했나 조사해 보면 꼭 열 나흘, 열 나흘만에 원망을 시작해요. 알겠습니까 그리고는 또 원망하되 얘기가 뭐냐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에요. 이게 이래될 수 있느냐는 거지요. 그래 원망하는 것 보면 물이 없다고 원망해요. 그럴 수 있죠. 목마르면 힘드니까. 또 떡이 없다고 원망해요. 그것도 있을 수 있어요. 또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해요. 그러면서 "애굽에 있을 때 노예생활 할 때 고기가마 끝에서 주인들의 음식 만들면서 좀 갈쿠리로 훔쳐먹었는데 그거 맛이 있었는데" 이 소리하고 앉았어요. 그 다음엔 또 보세요. 여러분, 성경 슬쩍 보니까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도. 원망 속에도. 뭘 원망하는고 하니 마늘과 부추가 없다고 원망을 해요. "이 광야에는 마늘도 없고 부추도 없도다" 그리고 주가 달렸는데 정력 떨어진다고. 그게 정력제래요. 이거 없다고 원망이에요. 가지 가지예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게 원망이 됩니까 이게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이 모양이에요. 그 어떤 의미의 생을 살아가는데 그 따위 가지고 원망을 하고 있느냔 말이요.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이거 알아야 됩니다. 왜 그럼 원망하게 되느냐 그거죠. 과거 지향적이기 때문이요. 특별히 우리 민족은 과거 지향적이요. 옛날 얘기, 정말 옛날 얘기만 해요. 옛날로 생각이 돌아갑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할 수 있어야 해요.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했던 것도 그렇고 실패했던 것도 그렇고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예요. 잊어버려. 굉장해봐도 별거 없어요.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성공한 과거가 문제라니까요. 그게 병통이요. 어쨌든 과거로부터 깨끗이 끊고 그 다음에는 또 과거에 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해석 문제올시다.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겁니다. 자, 보세요 좋은 사람은요 항상 오늘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어제보다 낫다, 아1 피난 때 보다 낫다, 작년보다 낫다, 언제나 지난 날 보다 낫다. 오늘이 더 훌륭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항상 과거가 오늘 보다 낫대요. 그 때는 그때대로 죽을 지경으로 살아놓고도 "그때가 좋았지1"그래요. 이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자꾸만 옛날로, 옛날 지향으로 돌아갑니다. 이게 해석 능력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게 이성이 병들었기 때문이요. 그런가 하면 노예생활의 회고, 그 잠깐 잠깐에 있었던 즐거움. 그거 하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요. 고기가마 끝에서 그 고기 한 점 얻어 먹을 때 도대체 어찌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렇게 육체적이고 세속적이요. 물질적이고. 그런고로 생각해 보십시다. 이 구속받은 은혜에 대한 엄청난 감격은 다 사라지고 고기 한 점에 목을 매고 있는 거야. 어찌 생각하면은 '거기서 노예적으로 향락하기보다는 자유인으로서 광야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냐' 여기까지 생각했더라면 저들은 원망할 수가 없었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텐데. 어찌 이런 저속한 인간이 되었더냐 말입니다. 또한가지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믿는 믿음이 허약했기 때문이에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여기에 온 것 아닙니까 이게 가나안의 약속이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입니다. 이게 그 약속한 땅에 들어가서 살 꿈이나 꾸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거 준비하면 되는 건데 왜 자꾸만 이렇게 복잡해집니까 하나님의 약속, 미래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믿었어야지요. 이걸 못 믿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겁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생활 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벗어났지마는 노예성, 노예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요. 노예적 체질이. 노예적 의식, 노예적 철학, 이것을 벗겨서 자유인 되게 하고 자유인으로부터 다시 비약을 해서 선민 되게 하려고 할 때, 거기는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많은 시련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건을 겪기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단련하고, 씻어지고, 훈련이 되어서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높은 존재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요. 이것을 믿고 있다면 오늘 당하는 고난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이 커리큘럼에 대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이 discipline, 이 훈련과정에 대하여 오히려 감사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건 미래 지향적 의미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지요. 선민 되게 하는 하나님의 확실한 축복이기 때문이지요. 또한가지는 모세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계시고 모세가 백성에게 말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여기에 있다는 것만 가지고 충분합니다. 모세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함께 하시고, 모세가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원망입니까 하나님이 임마누엘하고 계시는데. 그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원망하느냐 나를 원망함이 아니오 하나님을 원망함이다. 우리가 무엇인데 너희가 우리를 원망하느냐 우리는 심부름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고로 나를 원망하지 마라. 나를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되느니라." 여러분, 환경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원망하는 것이요,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할 때 아무 원망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의 발원지가 어디입니까 그건 환경도 아니고 세상사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아닙니다. 이것은 불신앙적 교만입니다. 한 번 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 보세요. 한 번 더 내려앉아서 자기를 비우고 깨끗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로 나타나 보세요. 모든 원망은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와 그 능력이 바로 우리 눈앞에 보여질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369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