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6)
본문
1945년 8월 15일 우리 한국은 36년 동안의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 때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어렸을 때의 기억이지만은 한 달여 동안 아무도 일하는 사람도 없고 모두가 계속, 마을이든 교회든 어디든 계속 축제로 그렇게 분위기를 이어 갔습니다. 그래 해방을 맞고 첫 주일을 맏이 했을 때 한경직 목사님께서 신의주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해방 후 첫 주일 설교를 하시게 됐다고 합니다. 그 자신으로서도 신사참배 문제로 해서 일본사람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고 고통을 많이 겪으신 분입니다. 이제 해방을 맞았으니 감격이 특별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부터는 일본말을 앗싸리 하지 맙시다." 그랬답니다. 여러분 자기도 모르게 이제 오래 젖은 습관대로 일본말이 이렇게 나왔다고, 그래서 다 같이 웃었다고 합니다. 자유라고 하게 되면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그런 자유가 있고 또, 도덕적, 신앙적 자유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것은 벌써 의식에서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또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를 뿐더러 자유를 빼앗겼다고 하는 사실을 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노예성 혹은 노예제도, 노예의식 여기에 깊이 길들여서 그 노예의식 속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말입니다. 그럴 때에 그는 자유를 생각할 수가 없게 됩니다. The Shawshank Redemption 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써는 '쇼생크 탈출'이라고 번역이 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앤드 두프레인'이라고 하는 그런 젊은 유능한 회계사가 있었는데 어떤 때의 실수로 인해서 아내와 정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됩니다. 본인은 분명히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누명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 증거가 모자라서. 그래서 그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이제 감옥에 들어가 고생을 하게 되는데 억울한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감옥에서 천신만고 끝에 탈출을 합니다. 탈옥을 합니다. 이제 그런 얘기인데 그 감옥에 브룩스라고 하는 죄수가 있었는데 이분 역시 종신형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감옥에 무려 50년을 있었답니다. 이제 백발 노인이 됐습니다. 정부에서 그걸 불쌍히 여겨서 50년만에 그를 가석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가석방하게 된다는 걸 두려워합니다. 감옥밖에 생활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자유를 무서워합니다. 감옥에서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서 석방 받지 않게 위해서 살인극을 연출을 합니다마는 실패합니다. 결국은 감옥에서 석방됩니다. 그는 감옥생활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거기가 편하지요. 밖에 나와서 스스로 산다는 것은 너무 어려웠어요. 자유가 있는가 하면 책임이 있고, 벌어먹어야지요 뭘 해야지요 이 종신형을 받았던 사람이라고 하는 그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이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Brooks was here." '브룩스는 여기 있었다.'하고 딱 한마디 유서를 써 놓고 자살을 했습니다.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감옥생활에 너무 오랫동안 익숙해져서요 거기 길들여지고 나니까 오히려 자유가 부담이 돼요. 자유스럽다는 것이 고통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간혹 우리 그런 얘기 듣지요. 북한에서 북한 사정이 어려워서 남한으로 탈출한 분들 계시지요. 여기 와서 사는 게 너무 힘들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북한을 그리워하는 분도 많아요. 벌어야지 공부해야지 공부시켜야지 뭐 돈 벌어야지 저축해야지 뭘 해야지 너무 힘들다 이 말이요. 이 자유가 너무 고통스럽다고 고백합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해방될 때에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참 어려웠습니다. 일본사람들 정치하에서는 학교 가서는 완전히 일본말만 해야 됩니다. 만일에 한국말을 한마디라도 하면 그날은 벌서고 변소 청소해야 됩니다. 그러거든요. 또 집에 가서는 아버지가 엄해서 일본말을 한마디 했다하면 그 날은 매를 맞습니다. 그니까 집에 돌아가서는 한국말, 학교 가서는 일본말 아주 헷갈립니다 아주.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해방이 된 다음에 얼마 후에 학교를 나가 봤더니 그 일본말만 하시던 선생님들이 조회 할 때에 운동장으로 나오면서 서로서로 한국말을 하면서 나오는데 얼마나 우스운지요. 자기들도 웃고 학생들도 다 웃었어요. 한국사람이 한국 말하는 것이 당연한데 계속 일본말만 강요받다가 이제 와서 한국말을 하는 게 이렇게 쑥스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자유가 무엇입니까 해방 후 얼마 후에 학교에 가보니까요 교장 선생님 댁을 전부 때려 부셨어요. 사택을 때려 부시고 실험실, 의자 할 것 없이 다 때려 부시고 도둑 맞았어요. 재미있던 그 실험 기구들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요. 이것이 자유입니까 도둑질과 방종과 파괴가 이게 자유더냐 그말예요. 그래서 생각해야 됩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는 자유 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와 자유인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쟁취하는 것이라고. 역사가 말합니다. 자유를 쟁취해서 혁명을 통해 얻어 놓고 평화롭게 사는 나라가 하나도 없습니다. 혁명을 통해서 얻은 자유는 자유 같으나 벌써 폭력과 무질서의 노예가 된 겁니다. 우리도 그 예입니다. 419를 통해서 자유를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서 대모혁명의 재미를 보았어요. 지금까지 이 무질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정말로 자유입니까 그런고로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얻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가 말해 주는 진리입니다. 피땀을 흘리고 싸워서 쟁취해 봤자 그런 순간 벌써 그 인간성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폭력의 노예가 됐어요. 방종의 노예가 되고 말았어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듭니다. 이 사실을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렇게 세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유는 진리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실 때만이 참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죄로부터 저주로부터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약속해 주시고 영원한 자유입니다. 여러분 영적 자유가 없이는 양심의 자유가 없습니다. 양심의 자유 없이는 정신적 자유가 없습니다. 정신적 자유가 없이는 물질적 경제적 정치적 자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참 자유는 오로지 진리 안에 오로지 영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주어진 자유, 중요합니다. 그걸 지켜야겠는데요.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자유 우리 성도들이 이 자유를 잘 지켜가야 합니다. 자유를 얻기보다 지켜 것이 더 어려워요. 그러려면 먼저는 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또 이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바로 지켜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또한가지는 자유를 지키려면은 이것이 어떻게 주어졌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값을 지불하고 주어집니까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한 자유가 주어지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많은 희생자가 나고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많은 대가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값을 지불했습니다. 이렇게 지불해서 어두워진 소중한 자유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의 고귀함을 알아야 지켜 나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고로 다시는 옛것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자유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이것과는 무엇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설교 중에 그 옛날의 설교한 설교 중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서독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동독의 개 한 마리가 서독으로 넘어 왔더랍니다. 그래서 개보고 물어 봤답니다. "너 왜 넘어왔냐 주인이 밥을 안 주더냐 주인이 때리더냐아네요.그럼 왜 넘어왔냐마음대로 짖고 싶어서요." 동독에서는 개에게 자유가 없었다고 해요. 자유를 위해서 넘어 왔다고. 그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유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양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좀 가난하면 어떻고, 좀 어려우면 어떻습니까. 어찌 이걸 자유에 비교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유의 고귀함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것으로도 소중한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자유를 꼭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 했습니다. 자유를 얻었으니 이제 좀 고통스러우면 어떻습니까! 좀 목마른 시간을 가면 어떻고 광야 생활이 좀 고달프더라도 뭐 죽는 건 아닌데 참고 견딜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들은 그 소중한 자유를 모르고 오히려 애굽생활에서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그것이 멸망의 원인입니다. 아니 죽을 고생을 하더라도 이건 자유인이요 저기는 노예입니다. 노예의 부귀영화보다는 자유로운 고생이 더 아름다운 거 아니겠습니까! 진리와 함께 자유 함이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모르면 영원히 자유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식민지 문화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된 지가 벌써 53년이라고 하지마는 아직도 우리는 해방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자유를 얻었지마는 자유인이 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해방된 직후에 초등학교에서 교과서를 공부해야겠는데 공부하는데 책이 없잖아요. 한국말로 쓴 책이 없어서 그 당시는 어땠느냐 하면은 저도 그 때 한 기억이 납니다마는 일본 교과서를 놓고 일본말로 눈으로 보면서 한국말로 읽습니다. 그걸 훈련했어요. 왜요 교과서가 없으니까. 자유가 없는 겁니다. 그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식민지 문화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은 노예생활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 첫째가 탈법주의입니다. 독립한 나라 사람들은 언제나 법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자존심 있게 생각합니다. 이 법을 지키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나라를 위한 것,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준법정신은 내 명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어떻게 해서든지 법에서 빠져나갈 생각만 합니다. 그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붉은 신호가 아직 있는데도 불구하고 쏙 빠져나가면서 신나하는 걸 볼 수 있어요. 자기가 무슨 잘난 체 하고 똑똑한 척 하고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걸 모릅니다. 이게 바로 식민지 문화에서 나오는 겁니다. 아직도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했어요. 왜 보세요. 일본사람들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는요,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법을 빠져나가는 것이 애국자예요. 저 법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일본사람을 위해 있는 법이니까. 그걸 빠져나갈수록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젠 우리 나라의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법을 지키는 것이 자존심인데 아직도 법만을 이리저리 빠져나가면 무슨 잘난 것 같이 생각을 해요. 탈법이 아주 체질화가 돼 버렸어요. 이 식민지 의식은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겁니까 또한 생각해 보세요. 물고기는 물 속에 사는 것이요. 공중의 새가 아무리 자유롭지마는 물 속을 헤엄 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는 새로운 질서, 법을 따라서 그 안에서 자유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익혀야 합니다. 또한 숙명론적 세계관입니다. 이렇게 나라를 빼앗기고 있을 때에 우리 개인적으로 무얼 해봐야 되는 일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그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나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어라 마셔라." 이랬잖아요. 거기서 무책임한 사람들이 이래버렸어요. 자기를 다스릴 줄 몰라요. 그래서는 순 운명론에 맡겨 버리고 그저 무책임한 생활. 아직도. 그리고 남을 원망합니다. 또 관료주의적 의식이 있어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없고, 만사는 남에게 질질 끌려가요. 그냥 명령에 따르고 지시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아요. 이게 바로 식민지 문화의 잔재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포자기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침략했을 때에 어떻게 하면은 이 나라사람들을 아예 못 쓰게 만들까 해서 저들이 만든 문화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가 유곽이요, 또 하나가 술집입니다. 동네마다 술집을 만들었어요. 그 술잔 돌리기 문화가 바로 그 때 생긴 겁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나라 잃어버린 백성이다 해 가지고 그냥 먹고 마셔라 코가 삐뚤어지도록 먹어요. 도대체 술도 문화입니다. 이 민족은 이 술로 망하는 겁니다. 온 세계의 최고의 술. 술을 마셔도 이렇게 마시는 사람이 없어요. 술도 음식인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바로 식민지 문화, 일본사람이 한국을 망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냥 끌려 들어가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포자기, 이 망조입니다. 그저 난 지금 방송국에 할 말이 많아요. 그 드라마라고 나오는 거 보면 그저 속 상하면 술 먹어요. 옛날에는 남자들만 먹더니 이젠 여자들도 잘 먹어요. 홀짝 홀짝 그냥. 속만 상하면 술! 그것밖에 안돼요. 우린 인간이. 우리 민족이 그것밖에 안되냐고. 속상하면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볼 수도 있고, 뭐 예수 안 믿으면 명상 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점잖은 사람한테 찾아가서 스승한테 물어볼 수도 있고, 아 방법이 많으련만 그래 그저 열 번 같이 포장마차. 도대체 이 망조가 어디 달린 거예요. 작가들이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 민족을 어디로 인도할 것이요 속상한 사람은 다 술 마시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괴괴 소리질러야 되는 거예요 획일적이에요 아주 획일적이야. 천편일률적으로 이게 망조가 아니고 뭐예요. 그 사람은 아직도 해방을 모르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뿌리깊은 식민지 문화라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요. 너무 답답한 일입니다. 자,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식민지 문화 속에서 5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말 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참 자유란 진리에 있고, 사랑에 있고 믿음에 있는 것이에요. 진리를 떠나 자유 없습니다. 참으로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참 자유 함이 있는 것이올시다. 성경에도 나타납니다마는 페르시아에 고레스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고레스 왕은 주전 6세기에 있었던 분인데 아주 덕망이 높은 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준 그런 귀한 고마운 왕입니다. 이 왕이 어떤 때 전쟁을 했는데 딴 왕과 전쟁을 해서 그 왕과 왕의 아들, 부인, 그 가족과 전부다 포로로 해 버렸어요. 이제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 때에 왕은 그 적장, 그 왕을 향해서 적의 왕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만일에 내가 당신을 살려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얼 주겠소저는 내 재산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 아들을 보면서 "이 아들을 해방시켜주면 어떻게 하겠소나머지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 옆에 사랑하는 아내가 서 있습니다. 그 아내를 보면서 "당신의 아내를 내가 풀어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 나서 하는 말이 "그리하면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고레스 왕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전면 사면하노라. 무상으로 놓아주겠소. 사랑을 아는 사람은 다시 불의의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니까." 놓아 줬어요. 참사랑, 참사랑만이 자유의 길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안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거기에만이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물어 보십시다. 나는 자유 합니까 나는 얼마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나는 정말로 자유한가 오직 믿음, 사랑 그리고 진리 그 속에 자유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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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해방이 된 다음에 얼마 후에 학교를 나가 봤더니 그 일본말만 하시던 선생님들이 조회 할 때에 운동장으로 나오면서 서로서로 한국말을 하면서 나오는데 얼마나 우스운지요. 자기들도 웃고 학생들도 다 웃었어요. 한국사람이 한국 말하는 것이 당연한데 계속 일본말만 강요받다가 이제 와서 한국말을 하는 게 이렇게 쑥스러울 수가 없더라고요. 자유가 무엇입니까 해방 후 얼마 후에 학교에 가보니까요 교장 선생님 댁을 전부 때려 부셨어요. 사택을 때려 부시고 실험실, 의자 할 것 없이 다 때려 부시고 도둑 맞았어요. 재미있던 그 실험 기구들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요. 이것이 자유입니까 도둑질과 방종과 파괴가 이게 자유더냐 그말예요. 그래서 생각해야 됩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는 자유 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와 자유인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쟁취하는 것이라고. 역사가 말합니다. 자유를 쟁취해서 혁명을 통해 얻어 놓고 평화롭게 사는 나라가 하나도 없습니다. 혁명을 통해서 얻은 자유는 자유 같으나 벌써 폭력과 무질서의 노예가 된 겁니다. 우리도 그 예입니다. 419를 통해서 자유를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서 대모혁명의 재미를 보았어요. 지금까지 이 무질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정말로 자유입니까 그런고로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얻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가 말해 주는 진리입니다. 피땀을 흘리고 싸워서 쟁취해 봤자 그런 순간 벌써 그 인간성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폭력의 노예가 됐어요. 방종의 노예가 되고 말았어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듭니다. 이 사실을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는 것이다. 그런고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렇게 세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유는 진리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거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실 때만이 참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죄로부터 저주로부터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약속해 주시고 영원한 자유입니다. 여러분 영적 자유가 없이는 양심의 자유가 없습니다. 양심의 자유 없이는 정신적 자유가 없습니다. 정신적 자유가 없이는 물질적 경제적 정치적 자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참 자유는 오로지 진리 안에 오로지 영생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주어진 자유, 중요합니다. 그걸 지켜야겠는데요.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신 자유 우리 성도들이 이 자유를 잘 지켜가야 합니다. 자유를 얻기보다 지켜 것이 더 어려워요. 그러려면 먼저는 이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또 이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어진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바로 지켜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또한가지는 자유를 지키려면은 이것이 어떻게 주어졌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값을 지불하고 주어집니까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한 자유가 주어지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많은 희생자가 나고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많은 대가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값을 지불했습니다. 이렇게 지불해서 어두워진 소중한 자유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의 고귀함을 알아야 지켜 나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고로 다시는 옛것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무슨 말이고 하니 자유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이것과는 무엇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설교 중에 그 옛날의 설교한 설교 중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서독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동독의 개 한 마리가 서독으로 넘어 왔더랍니다. 그래서 개보고 물어 봤답니다. "너 왜 넘어왔냐 주인이 밥을 안 주더냐 주인이 때리더냐아네요.그럼 왜 넘어왔냐마음대로 짖고 싶어서요." 동독에서는 개에게 자유가 없었다고 해요. 자유를 위해서 넘어 왔다고. 그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유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양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좀 가난하면 어떻고, 좀 어려우면 어떻습니까. 어찌 이걸 자유에 비교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유의 고귀함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것으로도 소중한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자유를 꼭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 했습니다. 자유를 얻었으니 이제 좀 고통스러우면 어떻습니까! 좀 목마른 시간을 가면 어떻고 광야 생활이 좀 고달프더라도 뭐 죽는 건 아닌데 참고 견딜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들은 그 소중한 자유를 모르고 오히려 애굽생활에서의 노예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어요. 그것이 멸망의 원인입니다. 아니 죽을 고생을 하더라도 이건 자유인이요 저기는 노예입니다. 노예의 부귀영화보다는 자유로운 고생이 더 아름다운 거 아니겠습니까! 진리와 함께 자유 함이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모르면 영원히 자유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식민지 문화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된 지가 벌써 53년이라고 하지마는 아직도 우리는 해방되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자유를 얻었지마는 자유인이 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해방된 직후에 초등학교에서 교과서를 공부해야겠는데 공부하는데 책이 없잖아요. 한국말로 쓴 책이 없어서 그 당시는 어땠느냐 하면은 저도 그 때 한 기억이 납니다마는 일본 교과서를 놓고 일본말로 눈으로 보면서 한국말로 읽습니다. 그걸 훈련했어요. 왜요 교과서가 없으니까. 자유가 없는 겁니다. 그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식민지 문화에 깊이 젖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은 노예생활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 첫째가 탈법주의입니다. 독립한 나라 사람들은 언제나 법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자존심 있게 생각합니다. 이 법을 지키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나라를 위한 것,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준법정신은 내 명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어떻게 해서든지 법에서 빠져나갈 생각만 합니다. 그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붉은 신호가 아직 있는데도 불구하고 쏙 빠져나가면서 신나하는 걸 볼 수 있어요. 자기가 무슨 잘난 체 하고 똑똑한 척 하고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걸 모릅니다. 이게 바로 식민지 문화에서 나오는 겁니다. 아직도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했어요. 왜 보세요. 일본사람들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는요,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법을 빠져나가는 것이 애국자예요. 저 법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일본사람을 위해 있는 법이니까. 그걸 빠져나갈수록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젠 우리 나라의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법을 지키는 것이 자존심인데 아직도 법만을 이리저리 빠져나가면 무슨 잘난 것 같이 생각을 해요. 탈법이 아주 체질화가 돼 버렸어요. 이 식민지 의식은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겁니까 또한 생각해 보세요. 물고기는 물 속에 사는 것이요. 공중의 새가 아무리 자유롭지마는 물 속을 헤엄 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는 새로운 질서, 법을 따라서 그 안에서 자유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익혀야 합니다. 또한 숙명론적 세계관입니다. 이렇게 나라를 빼앗기고 있을 때에 우리 개인적으로 무얼 해봐야 되는 일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그저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나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어라 마셔라." 이랬잖아요. 거기서 무책임한 사람들이 이래버렸어요. 자기를 다스릴 줄 몰라요. 그래서는 순 운명론에 맡겨 버리고 그저 무책임한 생활. 아직도. 그리고 남을 원망합니다. 또 관료주의적 의식이 있어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하는 일은 없고, 만사는 남에게 질질 끌려가요. 그냥 명령에 따르고 지시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아요. 이게 바로 식민지 문화의 잔재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포자기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침략했을 때에 어떻게 하면은 이 나라사람들을 아예 못 쓰게 만들까 해서 저들이 만든 문화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가 유곽이요, 또 하나가 술집입니다. 동네마다 술집을 만들었어요. 그 술잔 돌리기 문화가 바로 그 때 생긴 겁니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나라 잃어버린 백성이다 해 가지고 그냥 먹고 마셔라 코가 삐뚤어지도록 먹어요. 도대체 술도 문화입니다. 이 민족은 이 술로 망하는 겁니다. 온 세계의 최고의 술. 술을 마셔도 이렇게 마시는 사람이 없어요. 술도 음식인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게 바로 식민지 문화, 일본사람이 한국을 망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그냥 끌려 들어가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포자기, 이 망조입니다. 그저 난 지금 방송국에 할 말이 많아요. 그 드라마라고 나오는 거 보면 그저 속 상하면 술 먹어요. 옛날에는 남자들만 먹더니 이젠 여자들도 잘 먹어요. 홀짝 홀짝 그냥. 속만 상하면 술! 그것밖에 안돼요. 우린 인간이. 우리 민족이 그것밖에 안되냐고. 속상하면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볼 수도 있고, 뭐 예수 안 믿으면 명상 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점잖은 사람한테 찾아가서 스승한테 물어볼 수도 있고, 아 방법이 많으련만 그래 그저 열 번 같이 포장마차. 도대체 이 망조가 어디 달린 거예요. 작가들이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 민족을 어디로 인도할 것이요 속상한 사람은 다 술 마시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괴괴 소리질러야 되는 거예요 획일적이에요 아주 획일적이야. 천편일률적으로 이게 망조가 아니고 뭐예요. 그 사람은 아직도 해방을 모르는 거예요. 이것이 얼마나 뿌리깊은 식민지 문화라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요. 너무 답답한 일입니다. 자,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렇게 오랫동안 식민지 문화 속에서 5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말 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참 자유란 진리에 있고, 사랑에 있고 믿음에 있는 것이에요. 진리를 떠나 자유 없습니다. 참으로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참 자유 함이 있는 것이올시다. 성경에도 나타납니다마는 페르시아에 고레스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고레스 왕은 주전 6세기에 있었던 분인데 아주 덕망이 높은 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준 그런 귀한 고마운 왕입니다. 이 왕이 어떤 때 전쟁을 했는데 딴 왕과 전쟁을 해서 그 왕과 왕의 아들, 부인, 그 가족과 전부다 포로로 해 버렸어요. 이제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 때에 왕은 그 적장, 그 왕을 향해서 적의 왕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만일에 내가 당신을 살려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얼 주겠소저는 내 재산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그 아들을 보면서 "이 아들을 해방시켜주면 어떻게 하겠소나머지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 옆에 사랑하는 아내가 서 있습니다. 그 아내를 보면서 "당신의 아내를 내가 풀어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소"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보고 나서 하는 말이 "그리하면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고레스 왕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전면 사면하노라. 무상으로 놓아주겠소. 사랑을 아는 사람은 다시 불의의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니까." 놓아 줬어요. 참사랑, 참사랑만이 자유의 길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안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자유인입니다. 거기에만이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물어 보십시다. 나는 자유 합니까 나는 얼마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나는 정말로 자유한가 오직 믿음, 사랑 그리고 진리 그 속에 자유가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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