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자에게 더하는 원리 (마25:23-30)
본문
몇 달 전에 러시아에 희랍정 교회에 신학대학 총장이신 Johanes 박사님을 제가 초청을 해서 한국교회와 그리고 한국신학대학들을 돌아보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와 같이 했었습니다. 혹 3부에 나오시는 분들은 그분이 나와서 여기서 교인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본 분도 계실 겁니다. 그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는 마지막 저녁초대 때에 제가 식사시간이지만 마지막으로 심각한 질문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그처럼 기독교문화로 꽉 차있는 러시아가 어떻게 돼서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게되었는지 그것이 알고싶다. 어떻게 그렇게 됐느냐"고. 아시는 대로 1917년 10월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시작해서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약 한 칠십년 동안을 무서운 공산주의 지배하에 고생을 했고, 또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러시아 경제정치가 엉망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를 방문해보면, 그 유명한 붉은 광장 한 가운데 교회당이 있습니다. 도처에 아주 우뚝우뚝 서있는 성당들을 볼 수가 있고, 더구나 세인트 페트라브르크 같은데 가보면은 그 뭐 온 도시가 기독교문화로 꽉 차있구요. 더구나 그 이삭성전 같은 것은 로마에 베드로 성당하고 맞먹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더 잘지은 것 같아요. 이런 굉장한 기독교 문화 속에 있었던 그 찬란한 그 옛날의 문화…, 어떻게 해서 공산당한테 먹혀 가지고 이렇게 칠십년동안을 모진 고생을 하게됐고, 오늘까지 고생하고 있느냐" 이렇게 심각한 질문을 했습니다. 조용히 생각하더니 눈물이 핑돌더니 눈물이 뚝 떨어져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속았지요." 여러분, 심각한 말입니다. 속았다는 것입니다. 왜요 노동자, 농민을 위한 평등사회를 만들어 준다는데….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아름답고 귀한 평등사회를 이루어 준다고 해서 그만 속았다는 거예요. "아차!"하고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벌써 때는 늦었어요. 꼼짝못하고 칠십년동안 그 고역을 치르게 됩니다. 이미 기회는 놓쳤기 때문에…. 속았습니다. 알게 모르게 오늘도 우리가 속고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됩니다. 스스로 속고있고, 남에게 속고있습니다. 여러분 평등분배, 평등자유란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우리가 다같이 나누어서 평등하자. 이렇게 빈부차이가 많고, 계급차이가 많고, 신분 차이가 많은데 평등하자. 얼마나 좋은 얘기입니까 그러나 정의와 진리와 신앙이 없는 평등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몰랐거든요. 정의가 없는 평등이 혁명이요, 진리가 없는 바로 폭동이요. 이것이 멸망으로 치닫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건 제도로 해결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성경은 평등과 참 자유에 대해서 그 뜻을 깊이 설명해주는 아주 귀한 말씀이올시다. 오늘 이 세대를 향하야 주께서 말씀하시는 대단히 중요한 메세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성경을 이렇게 피상적으로 잠깐 보면은 여기에 엄청난 불평등이 있습니다. 불공평이 있습니다. 보세요. 맨 마지막 부분에 가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열 달란트를 가졌어요. 한 사람은 한 달란트를 가졌어요. 자 예수님의 마음 같아서는 어때야 되겠습니까 "야 너 그 많이 가진 거 나누어 주어라. 하나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한 댓개 나누어 주어라." 그래야 되지않아요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오. 우리 보통생각과는 다릅니다. 하나 가진 사람 것을 빼앗아서 열 가진 사람에게 "너 가져라."하고 주었거든요 이 세상에 그런 불공평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얘기를 해도 말만해도 끔찍한 얘기죠. "없는 자의 것을 뺏어서 더 많이 가진 자에게 주어라." 어째서 이런 일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평등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평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평을 말씀하고 있어요. 또, 다시 생각하면 애시당초, 맨 처음 시작할 때부터 불평등이 있었어요.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것도 불공평 아닙니까 그러나 이 분배는 주인이 오랫동안 경험하고, 그 종들의 능력을 알아서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였어요.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한 달란트 밖에는 관리능력이 없어요. "너는 한 달란트가 족하다." 이게 평등이요. 한 사람에게는 관리능력이 넉넉해서 "너는 다섯 달란트 받아라. 그게 네게 접합하겠다." 그 주인이 판단한 평등이란 말입니다. 여기 이이가 없어요. 보세요. 돈 가질 사람이 돈 가져야지. 어느 택시기사가 한번 내게 그렇데 말합디다요. 제가 택시를 타고 택시기사에게 공손하게 "이리 가십시다. 저리 가십시다." 좀 공대해서 말을 했더니 "아이구 선생님, 제가 기분이 좋으네요." 하더니 한마디 하는데 "가끔 이상한 손님이 있어요. 어쩌다가 떼돈을 벌긴 벌었나본데, 아니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더러워 못살 때가 있습니다. 돈 몇 푼 가졌다고 그까짓 택시 한번 타놓고서 뭐 그냥 종 부리듯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여기 서라 저기 서라 할 때 보면 운전을 뭐 그따위로 하느냐 그저 확 그저 때려 부시고 싶고, 에이 쾅하고 박아서 같이 죽고…." 그러고 싶데요. 정신차려 하세요. 그 왜 그랬을 것 같아요 이게 문제라구요. 돈 못 가질 사람이 돈 가져 놓으면 이 모양이라니깐요. 그 자리에 올라가지 말아야 할 사람이 올라가 놓으면 저 가문 망신하고, 나라 망치고 피차 다 망하는 거요. 그러고 보니까 지식도 그렇더라고요. 사람이 제대로 못되고, 지식 가져놓으니깐 여러 가지로 어렵더구만요. 여러 사람 괴롭혀요. 그러니까 그의 능력대로, 그의 오랜 경험에 의해서 평가되는 능력대로 한 달란트도 주고, 두 달란트도, 다섯 달란트도 주었다. 또 그것은 여러 모양의 사람이 필요하니깐, 이런 사람도 필요하고, 저런 사람도 필요한 거 아닙니까 다 머리가 좋아야 되는게 아니예요. 다 능력이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소위 말하면 Diversity, 하나님의 다양성한, 다양적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다양하게 이런 사람 저런 사람에게 적합하게 주었다. 이게 공평이요. 이걸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됩니다. 자, 이제 가만히 생각하면 좀, 하나님 좀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도대체가 너무 재주도 여러 가지 있어요. 그 사람은 남은 한가지도 없는데, 여러 가지 재주가 있고, 어떤 사람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러나 잘 보면 뭐 하나 있긴 있더라구요. 있어요. 이걸 이제 발견하고 바로 포착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보면 이런 불공평이 있는가하면 또 공평한 것도 있습니다. 공평을 보세요. 문제는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어차피 종은 종입니다. 뭐 종이 주인이 되는게 아닙니다. 주인 앞에 종이요. 종으로서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상관할게 없어요. 문제는 신분이 끝까지 종이라는 거. 그 똑같은 거죠. 또 하나는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주인의 것을 임시로 맡아서 여기에 Mandate가 있는 것이요. 위임받은 것이요. 잠깐동안 재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이렇게 위임받은 것이다. 그게 맡겼다는게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평합니다.
그런데 재능대로, 그가 가진 재능대로 재능에 적합하게, 적당하게 정말로 공평하게 외적으로 공평한게 아니오, 내적으로 아주 실질적으로 공평하게 주어졌다 이거요. 이게 중요한 것이구요. 또 그런가하면 기회가 평등하게 주워집니다. 주인이 잠깐 타국에 가면서 그에게 맡깁니다. 그 자율적 기간이 주어집니다. 그간에는 얼마동안 주인이 간섭하지 않을 거예요. 뭐 아침에 일어나라, 저녁에 자라 뭐 그 말도 안 할거요. 내버려둘 거예요. 달란트를 주고 나서는 주인은 가버렸으니까. 얼마 후에 오겠지요. 고 기간동안은 자율적 기간이라는 것이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예요. 요 자율기간.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꼭 제도에 매여서 뭐 가라와라, 그런 정도는 충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상관없이 난 나대로 내 할 일을 할 뿐이요. 그러한 기회를 주었어요. 미안한 얘깁니다만 제가 젊었을 때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말입니다. 여러분, 미국은 방학이 깁니다. 삼개월이나 돼요, 여름방학은…. 방학이 많아요. 도대체, 노는 날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여름방학동안 저는 방학이라고 쉬어본 일이 없어요. 얼마나 귀한 시간을 냈고, 얼마나 귀한 장학금 받아 가지고 공부하는데 아 이 3개월 동안을 멍청하게 놀아요 안되죠 제가 공부 끝날 때까지 그 가까운 옆에 있는데, 라스베가스를 한번도 안 갔어요. 유혹은 받았지요. 그 자동차도 있겠다. 그 좀 갔다오면 되지만 "저건 내게 갈곳이 아니다." 왜요 여름방학동안에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공부했더니 공부하는 학생이 둘밖에 없어요. 그 사람하고 나하고 3개월 동안 친했다고요. 그걸 그분들이 다 알고 있었어요. 교수들이. 그래서 저 얼마 전에 그 학교로부터 The Man of the Year Prize를 받을 때 뭐 상을 받을 때 학교를 빛낸 동창이라고 해 가지고 뭐 상패하나 주더만요.
그런데 그걸 주는 이유 중에 하나가요. 여기 와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에 공부했다 그러더라구요. 그때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준다 이거예요. 그때 빈둥거렸으면 아무리 지금 뭘해도 안돼요 그거는 모범생이 못되니까…. 자 자율성이라는 게 중요한 거예요. 뭐 가라와라 거기에 매이는 건 충성하게 아니죠.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을 때 내가 하는 거죠.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그게 바로 진정한 충성이 아니겠어요 그게 문제가 있는 것이요. 자 이 주인이 원하는 충성이 무엇이었던가 보세요. 그것은 틀림없이 양적인 것이 아니고, 질적인 것이요. 생산적이고 자발적이고, 자원적 충성을 요구하고 있어요. "여기서 뭐 얼마를 남겨라. 뭘 해라. 뭘 해라." 그 말이 없어요. 자율적 충성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서비스라는 말이 있지요. 옛날에 일본말로 할 때는 사비스라고 했는데, 요새는 서비스. 서비스가 문제죠. 서비스 개념이 문제예요. 우리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느냐 서비스 정신이, 그게 문젠데. 이것처럼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어요. 서비스! 좋은 말이지요. 그러나 여기 수식어가 붙어요. 립 서비스. 말만 하는 거. 말만 충성이요. 말만 봉사한다 하고 하는게 없어. 도대체가. 그런가하면 이어 서비스. 또 귀로 봉사하는 거야. 언제나 그저 듣기 만하고 그저 "예, 예." 하는데, 하는 일은 없어요. 가장 무서운 건 아이 서비스. 사람 보는데서는 잘하는 척하고, 안보는 데서는 없어요. 이렇게 눈치보는 서비스. 이거 참 괴로운 거예요. 이거 참 문제란 말이예요. 자 서비스는 좋은데…. 립 서비스, 이어 서비스, 아이 서비스. 이건 충성이 아니에요. 남이야 보던 말던, 어떻게 평가해주던 말던 나 나름의 충성과 진실을 다하는 것이요. 이것을 주님은, 이 주인은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그 자율적인 기간에 열심히 스스로 일을 해서 능력대로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두 달란트 남겼어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남겼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주인이 칭찬합니다. "적은 일에 충성했다. 뭐 그거 큰 일은 아닌데, 적은 일에 충성을 다 했으므로 내가 큰 일을 맡기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참 귀하고 복된 시간이에요. 그런가하면 한 사람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다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도로 가지고 가서 "이거 주인의 것입니다."하고 내놓습니다. 그래 이 주인은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합니다. 나는 게으르다는 말은 인정하겠어요. 그러나 악하다는 말은 조금 못마땅해요.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아 그 본전 가지고 왔으면 그만하면 괜찮지. 요새 같으면 이만하면 훌륭한 사람이요. 본전,
그런데 주인은 아니오. 악하다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건
왜냐하면, 이 사람은 비생산적이고, 비능률적이었기 때문이요. 왜 이렇게 됐을까 모름지기 질투하는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고, 개제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 질투라는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모든 죄가 질투로부터 오기 때문이요. 왜 다른 사람 다섯 달란트 주면서 나는 한 달란트, 아 이거 챙피해 못살겠다 이거요. 나 이거 정말 부끄러워…, 화가 난거요. 질투요. 일류 대학 심리학 교수인 피터 살로비(Peter Salovey)라고 하는 교수님은 범죄의 20%가 질투에서 비롯된다 그랬고요, 또 그레고리 화이트 박사(Dr. Gregory White)라고 하는 분은 "질투 임상학", "클리닉 오브 젤러시"(Clinic of Jealousy)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도 말합니다. 부부관계 이혼되는 거 복잡한 문제 30%가 질투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사업도 질투 때문에 실패하는 걸 아십니까 우리가 그런 흔히 말하는 무한 경쟁이라고 합니다만은 이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병신 만드는 거예요. 경쟁하는 동안에 내 페이스를 잃어버려요, 도덕성도 잃어버려, 더구나 허약한 체질이 경쟁을 하게되면 죽어요. 자기, 자기 능력을 잊어버리기 때문이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바로 된 인간은 자기 존재와 수직적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크게 여깁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그러나 시원치 않은 사람은 옆사람 말이면, 이 수평적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써요. 남들이 뭐라고 하나 체면이 어떤가 이걸 생각 하다가 골병드는 거예요. 정신병자가 따로 없어요. 이렇게 될 때 사람 병신 되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남이 어떻게 한다 여기에 끌려 다니지 마세요. 남 같이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 높이 평가받고 자기 낮게 평가되는데 대해서 불평했어요. 또 주인의 그 자기 재능 평가에 대해서 불만예요. 왜 하필이면 나를 한 달란트 밖에 관리할 능력이 없는 자로 평가했느냐는 거죠. 이걸 수용할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서 주인에게 화를 내고 있어요. 그래서 본문에 보면 책임을 주인에게 전가합니다. "주인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분인줄 알았기 때문에 주인의 것을 땅에 묻었다 가져왔나이다. 당신의 것을 받으소서." 못됐어요 아주. 그렇게 불평을 하지 않습니까. 주인에게 책임을 돌려요. 이런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여보세요, 그 닭하고 개하고 둘이 싸움을 벌렸답니다. 개가 닭보고 하는 말이 "너는 아침에 꼬끼오하고 울어서 주인을 깨워드려야 되는데, 요새 왜 그렇게 침묵하고 있냐. 울지를 않냐." 또, 닭은 말하기를 "너는 주인을 지키느라고 멍멍거리고 짙어야 되는데 요새 왜 벙어리 개가 됐냐" 서로 다투다가 달님에게 재판을 청했대요. 그랬더니 달님이 묻기를, 닭보고 "너 왜 요새 꼬끼오 하고 울지 않느냐아 그거야 주인이 자명종을 놓고 쉬기 때문에 내가 깨울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이 원하는 시간에 다 깨니깐 내가 울 필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개보고, "너는 왜 이렇게 멍멍 짖지를 못하냐" 그러니깐 "저요, 저희는 도둑을 지키는게 목적인데 도둑이 집안에 있기 때문에, 주인이 도둑이라서 뭐 짖을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저들도 할 말이 있더라구요. 여러분, 꼭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불충성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두려워하여' 그랬습니다. 주인을 두려워하고 또, 처벌을 두려워하고, 손해볼까 두려워했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에 이 사람이 한 달란트를 홀랑 잃어버리고 와서 주인에게 엎드려서 "주인이여, 주인이 나를 보신 바와 같이 처음부터 나는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내 딴에는 수고를 했습니다만, 홀랑 잃어버렸습니다. 어떡할까요. 죄송합니다." 했더라면 제가 생각하건 대는 주인이 꼭 그랬을 것만 같이요. 열 달란트 가진 사람보고, "야! 거 다섯 달란트만 이 사람 줘라.Try again!" 꼭 그랬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걸 땅에다 묻어 놨다가 본전치기, 이 본전치기 가지곤 안 통해요. 하나님은 그걸 용납하지 못했어요. 그리고는 여기 보니까, 있는 자에게 더 주라. 이거는 평등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성경을 읽으면은요, 열 달란트를 내게 가져와라. 다섯 이 네 달란트는 이제 벌었으니까 가져와라. 그런 얘기가 아니예요. 다섯 달란트 주었던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더니 열 달란트를 주어버렸어요. 이걸 우리는 잊어서는 안돼요. 네 달란트를 번 사람에게는 네 달란트를 주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다시 더 큰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용어가운데 그런 말이 있지요. 뷰로크라시(Bureaucracy) 관료주의,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 귀족주의, 귀족이 다스리는 사회. 그리고 데모크라시(Democracy) 민주주의 이럽니다만은, 요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무어냐 하면은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입니다. 이것은 실적주의 입니다.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이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이 굳이 나는 그럼 어떡할까요 오늘 본문엔 형벌을, 벌을 내립니다만은, 한다면은 "너는 열 달란트 가진 집에 가서 얻어먹어라." 그랬을 거예요. 왜요 그것이 그에게 마땅한 일이니까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대로 평가받는 세상에 왔습니다. 이제 뭐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했다고 뭐 그것 가지고 진실 말할 때는 지났어요. 하루종일 담배 세 대 피운 것밖에는 없으니까. 한 일이 뭐요 이건 본전치기도 못하고 월급만 가져가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필요없다 그거 아닙니까. 여러분 우린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소유는 복이 아닙니다. 소유란 기회일 뿐이요, 소유란 내게 맡겨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제 내가 이것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해요. 얼마를 가졌느냐 묻지 마십시다. 가진 것을 가지고 얼마나 생산적으로, 능률적으로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제 그 능력에 따라서 다시 다음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주인 앞에서 주인의 평가에 대해서 우리는 온유, 겸손하게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주의 뜻을 알았으면 이제 우리는 다시 정비해서, 진실과 정의와 하나님 앞에 정직함을, 생산적 정직함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일을 위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도대체가 너무 재주도 여러 가지 있어요. 그 사람은 남은 한가지도 없는데, 여러 가지 재주가 있고, 어떤 사람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그러나 잘 보면 뭐 하나 있긴 있더라구요. 있어요. 이걸 이제 발견하고 바로 포착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보면 이런 불공평이 있는가하면 또 공평한 것도 있습니다. 공평을 보세요. 문제는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어차피 종은 종입니다. 뭐 종이 주인이 되는게 아닙니다. 주인 앞에 종이요. 종으로서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상관할게 없어요. 문제는 신분이 끝까지 종이라는 거. 그 똑같은 거죠. 또 하나는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닌, 주인의 것을 임시로 맡아서 여기에 Mandate가 있는 것이요. 위임받은 것이요. 잠깐동안 재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이렇게 위임받은 것이다. 그게 맡겼다는게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평합니다.
그런데 재능대로, 그가 가진 재능대로 재능에 적합하게, 적당하게 정말로 공평하게 외적으로 공평한게 아니오, 내적으로 아주 실질적으로 공평하게 주어졌다 이거요. 이게 중요한 것이구요. 또 그런가하면 기회가 평등하게 주워집니다. 주인이 잠깐 타국에 가면서 그에게 맡깁니다. 그 자율적 기간이 주어집니다. 그간에는 얼마동안 주인이 간섭하지 않을 거예요. 뭐 아침에 일어나라, 저녁에 자라 뭐 그 말도 안 할거요. 내버려둘 거예요. 달란트를 주고 나서는 주인은 가버렸으니까. 얼마 후에 오겠지요. 고 기간동안은 자율적 기간이라는 것이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예요. 요 자율기간.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꼭 제도에 매여서 뭐 가라와라, 그런 정도는 충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상관없이 난 나대로 내 할 일을 할 뿐이요. 그러한 기회를 주었어요. 미안한 얘깁니다만 제가 젊었을 때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말입니다. 여러분, 미국은 방학이 깁니다. 삼개월이나 돼요, 여름방학은…. 방학이 많아요. 도대체, 노는 날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여름방학동안 저는 방학이라고 쉬어본 일이 없어요. 얼마나 귀한 시간을 냈고, 얼마나 귀한 장학금 받아 가지고 공부하는데 아 이 3개월 동안을 멍청하게 놀아요 안되죠 제가 공부 끝날 때까지 그 가까운 옆에 있는데, 라스베가스를 한번도 안 갔어요. 유혹은 받았지요. 그 자동차도 있겠다. 그 좀 갔다오면 되지만 "저건 내게 갈곳이 아니다." 왜요 여름방학동안에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공부했더니 공부하는 학생이 둘밖에 없어요. 그 사람하고 나하고 3개월 동안 친했다고요. 그걸 그분들이 다 알고 있었어요. 교수들이. 그래서 저 얼마 전에 그 학교로부터 The Man of the Year Prize를 받을 때 뭐 상을 받을 때 학교를 빛낸 동창이라고 해 가지고 뭐 상패하나 주더만요.
그런데 그걸 주는 이유 중에 하나가요. 여기 와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에 공부했다 그러더라구요. 그때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준다 이거예요. 그때 빈둥거렸으면 아무리 지금 뭘해도 안돼요 그거는 모범생이 못되니까…. 자 자율성이라는 게 중요한 거예요. 뭐 가라와라 거기에 매이는 건 충성하게 아니죠.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을 때 내가 하는 거죠.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그게 바로 진정한 충성이 아니겠어요 그게 문제가 있는 것이요. 자 이 주인이 원하는 충성이 무엇이었던가 보세요. 그것은 틀림없이 양적인 것이 아니고, 질적인 것이요. 생산적이고 자발적이고, 자원적 충성을 요구하고 있어요. "여기서 뭐 얼마를 남겨라. 뭘 해라. 뭘 해라." 그 말이 없어요. 자율적 충성을 요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서비스라는 말이 있지요. 옛날에 일본말로 할 때는 사비스라고 했는데, 요새는 서비스. 서비스가 문제죠. 서비스 개념이 문제예요. 우리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느냐 서비스 정신이, 그게 문젠데. 이것처럼 아름다운 말이 어디 있어요. 서비스! 좋은 말이지요. 그러나 여기 수식어가 붙어요. 립 서비스. 말만 하는 거. 말만 충성이요. 말만 봉사한다 하고 하는게 없어. 도대체가. 그런가하면 이어 서비스. 또 귀로 봉사하는 거야. 언제나 그저 듣기 만하고 그저 "예, 예." 하는데, 하는 일은 없어요. 가장 무서운 건 아이 서비스. 사람 보는데서는 잘하는 척하고, 안보는 데서는 없어요. 이렇게 눈치보는 서비스. 이거 참 괴로운 거예요. 이거 참 문제란 말이예요. 자 서비스는 좋은데…. 립 서비스, 이어 서비스, 아이 서비스. 이건 충성이 아니에요. 남이야 보던 말던, 어떻게 평가해주던 말던 나 나름의 충성과 진실을 다하는 것이요. 이것을 주님은, 이 주인은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그 자율적인 기간에 열심히 스스로 일을 해서 능력대로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두 달란트 남겼어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남겼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주인이 칭찬합니다. "적은 일에 충성했다. 뭐 그거 큰 일은 아닌데, 적은 일에 충성을 다 했으므로 내가 큰 일을 맡기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참 귀하고 복된 시간이에요. 그런가하면 한 사람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다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다가 도로 가지고 가서 "이거 주인의 것입니다."하고 내놓습니다. 그래 이 주인은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합니다. 나는 게으르다는 말은 인정하겠어요. 그러나 악하다는 말은 조금 못마땅해요. 본전 잘라먹는 사람도 많은데, 아 그 본전 가지고 왔으면 그만하면 괜찮지. 요새 같으면 이만하면 훌륭한 사람이요. 본전,
그런데 주인은 아니오. 악하다고 책망을 하십니다. 그건
왜냐하면, 이 사람은 비생산적이고, 비능률적이었기 때문이요. 왜 이렇게 됐을까 모름지기 질투하는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고, 개제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 질투라는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모든 죄가 질투로부터 오기 때문이요. 왜 다른 사람 다섯 달란트 주면서 나는 한 달란트, 아 이거 챙피해 못살겠다 이거요. 나 이거 정말 부끄러워…, 화가 난거요. 질투요. 일류 대학 심리학 교수인 피터 살로비(Peter Salovey)라고 하는 교수님은 범죄의 20%가 질투에서 비롯된다 그랬고요, 또 그레고리 화이트 박사(Dr. Gregory White)라고 하는 분은 "질투 임상학", "클리닉 오브 젤러시"(Clinic of Jealousy)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도 말합니다. 부부관계 이혼되는 거 복잡한 문제 30%가 질투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사업도 질투 때문에 실패하는 걸 아십니까 우리가 그런 흔히 말하는 무한 경쟁이라고 합니다만은 이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병신 만드는 거예요. 경쟁하는 동안에 내 페이스를 잃어버려요, 도덕성도 잃어버려, 더구나 허약한 체질이 경쟁을 하게되면 죽어요. 자기, 자기 능력을 잊어버리기 때문이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바로 된 인간은 자기 존재와 수직적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크게 여깁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그러나 시원치 않은 사람은 옆사람 말이면, 이 수평적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써요. 남들이 뭐라고 하나 체면이 어떤가 이걸 생각 하다가 골병드는 거예요. 정신병자가 따로 없어요. 이렇게 될 때 사람 병신 되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남이 어떻게 한다 여기에 끌려 다니지 마세요. 남 같이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 높이 평가받고 자기 낮게 평가되는데 대해서 불평했어요. 또 주인의 그 자기 재능 평가에 대해서 불만예요. 왜 하필이면 나를 한 달란트 밖에 관리할 능력이 없는 자로 평가했느냐는 거죠. 이걸 수용할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서 주인에게 화를 내고 있어요. 그래서 본문에 보면 책임을 주인에게 전가합니다. "주인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분인줄 알았기 때문에 주인의 것을 땅에 묻었다 가져왔나이다. 당신의 것을 받으소서." 못됐어요 아주. 그렇게 불평을 하지 않습니까. 주인에게 책임을 돌려요. 이런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여보세요, 그 닭하고 개하고 둘이 싸움을 벌렸답니다. 개가 닭보고 하는 말이 "너는 아침에 꼬끼오하고 울어서 주인을 깨워드려야 되는데, 요새 왜 그렇게 침묵하고 있냐. 울지를 않냐." 또, 닭은 말하기를 "너는 주인을 지키느라고 멍멍거리고 짙어야 되는데 요새 왜 벙어리 개가 됐냐" 서로 다투다가 달님에게 재판을 청했대요. 그랬더니 달님이 묻기를, 닭보고 "너 왜 요새 꼬끼오 하고 울지 않느냐아 그거야 주인이 자명종을 놓고 쉬기 때문에 내가 깨울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이 원하는 시간에 다 깨니깐 내가 울 필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개보고, "너는 왜 이렇게 멍멍 짖지를 못하냐" 그러니깐 "저요, 저희는 도둑을 지키는게 목적인데 도둑이 집안에 있기 때문에, 주인이 도둑이라서 뭐 짖을 필요가 없게 됐습니다." 저들도 할 말이 있더라구요. 여러분, 꼭 남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불충성이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두려워하여' 그랬습니다. 주인을 두려워하고 또, 처벌을 두려워하고, 손해볼까 두려워했죠.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에 이 사람이 한 달란트를 홀랑 잃어버리고 와서 주인에게 엎드려서 "주인이여, 주인이 나를 보신 바와 같이 처음부터 나는 시원치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내 딴에는 수고를 했습니다만, 홀랑 잃어버렸습니다. 어떡할까요. 죄송합니다." 했더라면 제가 생각하건 대는 주인이 꼭 그랬을 것만 같이요. 열 달란트 가진 사람보고, "야! 거 다섯 달란트만 이 사람 줘라.Try again!" 꼭 그랬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걸 땅에다 묻어 놨다가 본전치기, 이 본전치기 가지곤 안 통해요. 하나님은 그걸 용납하지 못했어요. 그리고는 여기 보니까, 있는 자에게 더 주라. 이거는 평등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성경을 읽으면은요, 열 달란트를 내게 가져와라. 다섯 이 네 달란트는 이제 벌었으니까 가져와라. 그런 얘기가 아니예요. 다섯 달란트 주었던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더니 열 달란트를 주어버렸어요. 이걸 우리는 잊어서는 안돼요. 네 달란트를 번 사람에게는 네 달란트를 주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다시 더 큰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용어가운데 그런 말이 있지요. 뷰로크라시(Bureaucracy) 관료주의,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 귀족주의, 귀족이 다스리는 사회. 그리고 데모크라시(Democracy) 민주주의 이럽니다만은, 요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무어냐 하면은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입니다. 이것은 실적주의 입니다.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이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이 굳이 나는 그럼 어떡할까요 오늘 본문엔 형벌을, 벌을 내립니다만은, 한다면은 "너는 열 달란트 가진 집에 가서 얻어먹어라." 그랬을 거예요. 왜요 그것이 그에게 마땅한 일이니까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력대로 평가받는 세상에 왔습니다. 이제 뭐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했다고 뭐 그것 가지고 진실 말할 때는 지났어요. 하루종일 담배 세 대 피운 것밖에는 없으니까. 한 일이 뭐요 이건 본전치기도 못하고 월급만 가져가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은 필요없다 그거 아닙니까. 여러분 우린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다. 소유는 복이 아닙니다. 소유란 기회일 뿐이요, 소유란 내게 맡겨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이제 내가 이것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해요. 얼마를 가졌느냐 묻지 마십시다. 가진 것을 가지고 얼마나 생산적으로, 능률적으로 살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제 그 능력에 따라서 다시 다음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주인 앞에서 주인의 평가에 대해서 우리는 온유, 겸손하게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주의 뜻을 알았으면 이제 우리는 다시 정비해서, 진실과 정의와 하나님 앞에 정직함을, 생산적 정직함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일을 위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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