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신앙수준은? (사58:1-12)
본문
얼마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용인에 있는 자연농원엘 갔습니다. 아이들이 놀이기구타는 것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면서 여러가지 놀이기구들을 태워주는데, 어떤 데를 갔더니 키재는 것을 세워놓고 아이들 키를 재게 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 ‘백이십센치가 안된 사람은 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우리 애들은 어려서 키가 아직 백이십센치가 안됩니다. 그러니 탈 수가 없지요. 그래도 애들은 그 놀이기구를 타고 싶어서 안달인데, 아무리 키를 재보아도 백이십센치가 안되어서 결국 탈 수가 없었습니다. 애들에게 누구나 탈 수 있는 놀이기구도 있지만, 이 놀이기구는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니고 키가 더 커야 탈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를 시키느라 애를 많이 썼습니다. 백이십센치를 기준으로 해놓은 것은 너무 어린 아이가 타면 위험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아이를 설득해서 다른 놀이기구를 타게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 눈에는 이런 것도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최소한 백이십센치는 넘어야 저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데. 내 영적인 키는 얼마나 될까 내 신앙의 키는 얼마나 될까 백이십센치가 못되어서 자격미달이라는 판정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 그 놀이기구를 타고 싶어서 발을 동동구르는 아이처럼, 나도 그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적인 키가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시려고 할 때,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키가 최소한 얼마쯤은 되어야 하는데, 키크기가 그만큼 못되어서 발만 동동구르고 있을 정도는 아닙니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청년 대학부 헌신예배이고 하니 우리의 신앙을 재어보고, 다시 한번 주님께 몸바쳐 헌신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무리 보아도 칭찬하는 말씀같지는 이사야 58장 1절에서 12절의 말씀은 위대한 선지자인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책망과 권고의 메시지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집에 그 죄를 고하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큰 목소리로 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신앙수준이 어떠한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부터 2700년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사랑하는 내 아들,내 딸들아. 네 신앙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헌신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우리의 신앙수준이 어떠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시간도 크게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본문을 보면, 신앙의 수준이 삼단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2절에서 4절까지가 첫번째 단계이고, 5절에서 7절이 두번째 단계, 그리고 8절에서 12절까지가 세번째 단계입니다. 먼저 첫번째 단계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우리의 신앙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항목들이 나와있습니다. 2절과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않으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그리고 3절에 이어서 4절과 5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식뿐인 신앙, 껍데기 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참 잘 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높은 신앙의 단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당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고 아주 쉽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당시의 유대인 가운데 유대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셔서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신앙수준이 형편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외식한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신앙생활, 이것이 신앙의 첫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사두개인들에게 이 첫번째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첫번째 단계에서는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이제 신앙의 첫번째 단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우리의 신앙수준은 과연 어떠한지 곰곰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2절과 3절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렇습니다:그들이 날마나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한다.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한다. 그리고 금식을 한다. 그러니까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 알기를 원한다. 그리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번째 단계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서기관,사두개인들도 이것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이 첫번째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까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애씁니까 규칙적으로 기도합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자기 신앙수준이 몇점이나 되는지 점수를 매겨보십시오. 예배시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 이것은 교회의 신자된 자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들입니다. 가장 기본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기본되는 것을 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올해 첫주일을 맞이하면서, 금년에는 성수주일해야지 예배시간마다 잘 참석해야지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서 올해에는 성경을 꼭 한번 통독해야지. 규칙적으로 기도생활을 해야지. 다들 이렇게 다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4개월이 지난 지금 그 다짐을 얼마나 지키셨습니까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요 이것들은 신앙의 기본되는 것들인데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성수주일하게 하고 십일조하게 하고 성경읽게 만드는데 목회자들이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말씀연구하고 기도생활하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교인들을 예배에 참석하게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청년,대학생들은 주일낮에는 예배에 참석을 해도 주일저녁과 수요일예배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일낮예배에 열명이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다면, 주일저녁예배에는 서너명이 참석할까 말까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더 적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워낙 이렇다보니 요즘에는 신앙의 수준을 낮출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연구와 기도는 아예 신앙기준에서 빼버리고,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것만도 상줄 만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정도만 돼도 일등신자입니다. 그러니 그 이상 무엇을 더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본되는 자기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판에 교인들이 무슨 헌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은 헌신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십일조와 다른 헌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 이런 기본적인 일도 못하고서야 어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신자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되는 일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가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수준을 한참 낮추어서 그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기만 하면 일등신자 대접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정도로 신앙생활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 이시간 우리 다시 한번 다짐합시다. 예배시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말씀읽고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기도생활을 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합시다. 신자된 도리로서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내용은 고사하고 형식으로라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은 해가 갈수록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바람에 텅텅 비어간다고 합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교회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목사의 교회입니까 장로들의 교회입니까 권사,집사의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교회를 책임져야 합니다. 정해진 예배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야 하는 것은 성도인 여러분이 행해야 할 가장 기본되는 의무입니다. 유럽의 교회가 비어가는 것은 교인들이 이 의무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교인들이 교회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첫번째 단계마저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합시다. 우리 한국교회도 교인들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할 의무를 망각한다면, 유럽의 교회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예배시간을 꼬박꼬박 지키고,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 신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고,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이것도 못한다면, 우리는 참 죽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충청도가 예전에는 신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개신교 선교사가 제일 먼저 왔던 곳이라는 사실도 아십니까 우리나라에 신앙이 처음 들어왔을 때, 다른 어느 곳보다 이곳 사람들이 열심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때는 지금같지 않아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에서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았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이 충청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이 충청도 예수쟁이들을 없앨 목적으로 충청도 교난이라는 것을 일으킵니다. 여러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 험한 산길을 걸어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서 경상도 지역에 많은 신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다시 경상도 교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충청도에서 피난간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충청도 땅에서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 그들이 흘린 순교의 피를 이어받은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가족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밤을 틈타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어린 아들이 추위에 떨다가 굶어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붙잡혀서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눈을 감으면서, 그들이 참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어떤 세상을 원했을까요 마음놓고 신앙생활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세상을 말입니다. 그들이 이 시대를 보았다면, 모르긴 해도 이곳을 천국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바라는 천국과도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루만이라도 살아보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꿈꾸던 그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그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자신들은 그런 세상을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후손들만큼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 암흑한 조선천지가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으로 가득차게 해달라고 눈물로 눈물로 간구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맺힌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믿는 사람 찾아보기가 어렵던 이 땅에 지금은 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마음놓고 십자가 하나 세울 수 없었던 황량하던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붉은 십자가의 동산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피어린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처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예수믿는다고 모진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후손들을 위해서 드렸던 그 피맺힌 기도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우리가 지금 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현재가 아닌 머나먼 미래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얻은 이 신앙의 자유를, 그들이 피를 뿌려서 꽃피워낸 이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는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겠지만,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도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현대의 기독교인들. 그 가운데 우리가 끼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잘못 섬긴다고 심판받아서 멸망당한, 범죄의 표본과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흉악한 죄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사두개인들도 감히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신앙의 첫번째 단계는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묻힌 순교의 땅을 밟고 있는 여러분, 신앙의 첫번째 단계. 이것은 통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첫번째 단계는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속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식하고 형식뿐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두번째 단계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신앙의 두번째 단계의 기준항목들은 6절과 7절에 나와 있습니다.
6절과 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신앙의 첫번째 단계가 겉으로 보이는 형식이었다면, 신앙의 두번째 단계는 내용입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예배시간에 꼬박꼬박 나오기만 하면 뭐하느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들으면 뭐하느냐 규칙적으로 기도생활하면 뭐하느냐
그런데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이것은 예배시간에 참석하고 성경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생활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도 당연히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린 자들에게 식물을 나누어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유리하는 빈민을 보호해야할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해야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려는 듯합니다:너희들이 신앙의 첫번째 단계를 통과했지만, 그것으로 너희들을 칭찬할 수는 없다. 너희들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신앙의 두번째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에게 맡겨준 일을 충실히 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거기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십시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십니다. 여러분이 어느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인 여러분이 하는 일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시간 이곳에 부름받은 여러분. 신앙의 두번째 단계에 오를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시간 이렇게 명령하십니다:사랑하는 내 아들,내 딸들아. 내가 너희들을 이 세상으로 보낸다. 내가 너희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 내가 맡겨준 일에 최선을 다하여라. 그래서 너희들이 나의 일군임을,나의 증인임을 온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 신앙의 세번째 단계를 보겠습니다. 8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번째 단계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보하는 자,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이 세상을 평화로운 세계로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는 사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마다 ‘내가 여기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물댄 동산같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과 같은 사람. 이 땅에서 이러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앙의 세번째 단계로 초대하십니다. 지금까지 신앙의 세 단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우리의 신앙은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두번째 세번째 단계는 커녕 첫번째 단계에도 못미치는 것은 아닙니까 아직도 기본조차 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재어본 신앙의 키는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이 점수를 매겨본 신앙수준은 얼마나 됩니까 그 옛날 다니엘이 살던 시대에 벨사살의 잔치에 나타난 손가락이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썼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이런 말이 들려져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내가 달아보고 또 달아보았지만 네 신앙의 무게가 모자라기 때문에 너를 흩어버릴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심판의 음성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부디 첫번째 신앙의 단계를 통과하십시오. 그리고 두번째 신앙의 단계도 통과하십시오. 그래서 신앙의 세번째 단계, 그 복된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하십시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내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성민교회의 젊은이,성민의 가족들아. 부디 이 세상을 신앙으로 승리하면서 살아가거라. 그래서 신앙의 세번째 단계에 꼭 이르도록 하거라.
그런데 목사 눈에는 이런 것도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최소한 백이십센치는 넘어야 저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데. 내 영적인 키는 얼마나 될까 내 신앙의 키는 얼마나 될까 백이십센치가 못되어서 자격미달이라는 판정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 그 놀이기구를 타고 싶어서 발을 동동구르는 아이처럼, 나도 그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적인 키가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시려고 할 때,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키가 최소한 얼마쯤은 되어야 하는데, 키크기가 그만큼 못되어서 발만 동동구르고 있을 정도는 아닙니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청년 대학부 헌신예배이고 하니 우리의 신앙을 재어보고, 다시 한번 주님께 몸바쳐 헌신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무리 보아도 칭찬하는 말씀같지는 이사야 58장 1절에서 12절의 말씀은 위대한 선지자인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책망과 권고의 메시지입니다.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집에 그 죄를 고하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큰 목소리로 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신앙수준이 어떠한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부터 2700년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사랑하는 내 아들,내 딸들아. 네 신앙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헌신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우리의 신앙수준이 어떠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시간도 크게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본문을 보면, 신앙의 수준이 삼단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2절에서 4절까지가 첫번째 단계이고, 5절에서 7절이 두번째 단계, 그리고 8절에서 12절까지가 세번째 단계입니다. 먼저 첫번째 단계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우리의 신앙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항목들이 나와있습니다. 2절과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않으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그리고 3절에 이어서 4절과 5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식뿐인 신앙, 껍데기 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참 잘 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높은 신앙의 단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당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다고 아주 쉽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당시의 유대인 가운데 유대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셔서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신앙수준이 형편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들도 겉으로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외식한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신앙생활, 이것이 신앙의 첫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사두개인들에게 이 첫번째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첫번째 단계에서는 합격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이제 신앙의 첫번째 단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우리의 신앙수준은 과연 어떠한지 곰곰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2절과 3절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렇습니다:그들이 날마나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한다.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한다. 그리고 금식을 한다. 그러니까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 알기를 원한다. 그리고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첫번째 단계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서기관,사두개인들도 이것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이 첫번째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까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애씁니까 규칙적으로 기도합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자기 신앙수준이 몇점이나 되는지 점수를 매겨보십시오. 예배시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 이것은 교회의 신자된 자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들입니다. 가장 기본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기본되는 것을 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올해 첫주일을 맞이하면서, 금년에는 성수주일해야지 예배시간마다 잘 참석해야지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서 올해에는 성경을 꼭 한번 통독해야지. 규칙적으로 기도생활을 해야지. 다들 이렇게 다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4개월이 지난 지금 그 다짐을 얼마나 지키셨습니까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요 이것들은 신앙의 기본되는 것들인데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성수주일하게 하고 십일조하게 하고 성경읽게 만드는데 목회자들이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말씀연구하고 기도생활하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교인들을 예배에 참석하게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청년,대학생들은 주일낮에는 예배에 참석을 해도 주일저녁과 수요일예배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주일낮예배에 열명이 참석해서 예배를 드렸다면, 주일저녁예배에는 서너명이 참석할까 말까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더 적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워낙 이렇다보니 요즘에는 신앙의 수준을 낮출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연구와 기도는 아예 신앙기준에서 빼버리고,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것만도 상줄 만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정도만 돼도 일등신자입니다. 그러니 그 이상 무엇을 더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본되는 자기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판에 교인들이 무슨 헌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은 헌신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입니다. 십일조와 다른 헌금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 이런 기본적인 일도 못하고서야 어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신자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되는 일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가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수준을 한참 낮추어서 그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기만 하면 일등신자 대접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요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정도로 신앙생활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 이시간 우리 다시 한번 다짐합시다. 예배시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말씀읽고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기도생활을 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합시다. 신자된 도리로서 기본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내용은 고사하고 형식으로라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은 해가 갈수록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바람에 텅텅 비어간다고 합니다. 유럽의 교회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교회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목사의 교회입니까 장로들의 교회입니까 권사,집사의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교회를 책임져야 합니다. 정해진 예배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야 하는 것은 성도인 여러분이 행해야 할 가장 기본되는 의무입니다. 유럽의 교회가 비어가는 것은 교인들이 이 의무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교인들이 교회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규칙적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첫번째 단계마저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합시다. 우리 한국교회도 교인들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할 의무를 망각한다면, 유럽의 교회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예배시간을 꼬박꼬박 지키고,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 신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고,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이것도 못한다면, 우리는 참 죽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충청도가 예전에는 신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개신교 선교사가 제일 먼저 왔던 곳이라는 사실도 아십니까 우리나라에 신앙이 처음 들어왔을 때, 다른 어느 곳보다 이곳 사람들이 열심으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때는 지금같지 않아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에서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았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이 충청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이 충청도 예수쟁이들을 없앨 목적으로 충청도 교난이라는 것을 일으킵니다. 여러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 험한 산길을 걸어서,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도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서 경상도 지역에 많은 신자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다시 경상도 교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충청도에서 피난간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충청도 땅에서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 그들이 흘린 순교의 피를 이어받은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가족들이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밤을 틈타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어린 아들이 추위에 떨다가 굶어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붙잡혀서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눈을 감으면서, 그들이 참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어떤 세상을 원했을까요 마음놓고 신앙생활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세상을 말입니다. 그들이 이 시대를 보았다면, 모르긴 해도 이곳을 천국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바라는 천국과도 같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루만이라도 살아보았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꿈꾸던 그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그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자신들은 그런 세상을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지만, 후손들만큼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 암흑한 조선천지가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으로 가득차게 해달라고 눈물로 눈물로 간구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맺힌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믿는 사람 찾아보기가 어렵던 이 땅에 지금은 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마음놓고 십자가 하나 세울 수 없었던 황량하던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붉은 십자가의 동산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피어린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이처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예수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예수믿는다고 모진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후손들을 위해서 드렸던 그 피맺힌 기도를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우리가 지금 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현재가 아닌 머나먼 미래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얻은 이 신앙의 자유를, 그들이 피를 뿌려서 꽃피워낸 이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는 가치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겠지만,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도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현대의 기독교인들. 그 가운데 우리가 끼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잘못 섬긴다고 심판받아서 멸망당한, 범죄의 표본과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흉악한 죄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사두개인들도 감히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신앙의 첫번째 단계는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묻힌 순교의 땅을 밟고 있는 여러분, 신앙의 첫번째 단계. 이것은 통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첫번째 단계는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속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식하고 형식뿐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두번째 단계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신앙의 두번째 단계의 기준항목들은 6절과 7절에 나와 있습니다.
6절과 7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신앙의 첫번째 단계가 겉으로 보이는 형식이었다면, 신앙의 두번째 단계는 내용입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예배시간에 꼬박꼬박 나오기만 하면 뭐하느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들으면 뭐하느냐 규칙적으로 기도생활하면 뭐하느냐
그런데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이것은 예배시간에 참석하고 성경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생활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도 당연히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한 말입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린 자들에게 식물을 나누어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유리하는 빈민을 보호해야할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해야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려는 듯합니다:너희들이 신앙의 첫번째 단계를 통과했지만, 그것으로 너희들을 칭찬할 수는 없다. 너희들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신앙의 두번째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에게 맡겨준 일을 충실히 해라.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자리에 있든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거기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십시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움직여 나가십니다. 여러분이 어느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인 여러분이 하는 일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이 시간 이곳에 부름받은 여러분. 신앙의 두번째 단계에 오를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시간 이렇게 명령하십니다:사랑하는 내 아들,내 딸들아. 내가 너희들을 이 세상으로 보낸다. 내가 너희들과 항상 함께 하겠다. 내가 맡겨준 일에 최선을 다하여라. 그래서 너희들이 나의 일군임을,나의 증인임을 온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 신앙의 세번째 단계를 보겠습니다. 8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번째 단계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보하는 자,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이 세상을 평화로운 세계로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사는 사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마다 ‘내가 여기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물댄 동산같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과 같은 사람. 이 땅에서 이러한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앙의 세번째 단계로 초대하십니다. 지금까지 신앙의 세 단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도대체 우리의 신앙은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두번째 세번째 단계는 커녕 첫번째 단계에도 못미치는 것은 아닙니까 아직도 기본조차 되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재어본 신앙의 키는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이 점수를 매겨본 신앙수준은 얼마나 됩니까 그 옛날 다니엘이 살던 시대에 벨사살의 잔치에 나타난 손가락이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썼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이런 말이 들려져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내가 달아보고 또 달아보았지만 네 신앙의 무게가 모자라기 때문에 너를 흩어버릴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심판의 음성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부디 첫번째 신앙의 단계를 통과하십시오. 그리고 두번째 신앙의 단계도 통과하십시오. 그래서 신앙의 세번째 단계, 그 복된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하십시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께서 원하십니다: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내 목숨보다도 사랑하는 성민교회의 젊은이,성민의 가족들아. 부디 이 세상을 신앙으로 승리하면서 살아가거라. 그래서 신앙의 세번째 단계에 꼭 이르도록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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