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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막3:13-19)

본문

오래 전에 영국에 괴짜 바이올리니스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연주가일 뿐 아니라 바이올린, 각종 바이올린을 수집하는 수집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여러 개의 바이올린 가운데서 가장 값비싼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아주 옛날인데 그 당시에 이천 파운드가 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영국에서 이천 파운드 정도는 큰 돈이 아니지만 옛날에는 아주 큰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친구, 많은 관객들이 몇 곡의 연주가 끝나자 장내에서는 큰 박수가, 열렬한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그 다음 순간 그는 갑자기 자기 바이올린을 땅에다 집어 던지더니 발로 그것을 밟기 시작했어요. 파격적인 기행 앞에 온 관객들이 쇼크를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근데 그가 또 하나의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와서 서자 사회하던 분이 이런 맨트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 연주한 그 바이올린은 사실은 이분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고가 바이올린이 아니라 이십 파운드 짜리 제일 싸구려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한 것입니다. 이제 지금, 그러니까 짓밟은 것 가지고 여러분 너무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이제야말로 가장 본격적으로 고가의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하겠습니다.자, 그 연주는 역시 감동을 주었고, 관객들은 큰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별로, 이십 파운드짜리의 연주나 그 고가의 바이올린 연주에서나 결정적인 큰 차이를 느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 괴짜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날 이 기행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했던 메시지 하나가 있었다면 그것은 이것입니다. 위대한 음악은 악기때문만은 아니다. 연주가 때문이다 사람 때문이다. 위대한 음악가가, 위대한 사람이 음악을 만드는 것이지 악기가 꼭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메시지를 그는 전달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같은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이 세상을 변화 시키기 위해서 사람이라는 전략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그는 세상을 변화 시키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공생애, 예수님의 공생애는 사람들, 그가 쓰실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열 두명이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열 둘이라는 숫자는 대표 수의 개념을 갖습니다. 자, 구약에서 하나님이 지파들로 박성들을 나누셨을 때 몇 지파를 세우셨습니까 열두지파에요.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 페이지 계시록 21장에 보시면 완성된 천국, 새 하늘 새 땅의 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그 천국은 12개의 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2개의 보석, 그 기초석이 있었고, 그 열두 보석마다 열 두 지파와 열 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었습니다. 자, 메시지가 뭘까요 이 열두명은 바로 모든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백성 혹은 모든 시대를 대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을 때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 그 주님은 지금도 제자들을 부르고 제자들을 세우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왜 그분은 제자들을 부르고 제자들을 세우실까요
첫째로 그 이유는 그들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이 사람들을 사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자, 본문의 13절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여기 보시면 지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원하셨던 자들의 자격이 이렇게 열거되어 있지 않아요. 그냥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 때문이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분이 제자들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의 기준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사람을 선택하는 세속적인 기준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에 16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의 명단, 리스트가 나와 있습니다. 이 명단들을 열람해 보십시오. 무엇을 느끼십니까 예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별 볼일 없었던 사람들이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적으로 굉장히 내세울 만한 뭘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 예요. 그리고 천대 받던 그 당시에 세리들 이런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 무슨 메시지가 있을까요 아마도 이런 메시지가 있을 거예요. 이 평범한 사람들이 주님께 붙들림을 받았을 때 그들이 비범한 일을 할 수가 있다. 평범한 사람도 비범한 일을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메시지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것은 그의 대표적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붙여주셨던 매우 휴머러스한 별명에서도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들에게는 별명을 주셨어요. 이 습관을 가지고 카톨릭에서는 세례명이라는 이름을 주기도 합니다마는 다 그런 것이 아니라 몇 제자에게만 이런 별명을 주셨습니다. 예컨대 자, 16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이 열두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자 그러니까 베드로의 본명은 무엇입니까 본명은 시몬입니다. 베드로는 별명이 예요. 본명은 시몬입니다. 별명이 베드로인데 베드로의 뜻이 뭡니까 반석, 반석이라는 것은 시몬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복음서에서 이 사람의 성격을 살펴보면 제가 전번에 우리 가정 세미나 때 이 사람의 성격을 다열질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아주 성질이 급하고 변덕스럽고 아침 저녁으로 잘 변하고, 불안정하고 그러나 반석, 육중한 반석의 이미지는 베드로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사람을 변화시켜 반석처럼 쓰시겠다. 초대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로 이 사람을 쓰시겠다. 다시 말하면 이 별명 속에는 이 사람을 향한 주님의 기대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전혀 불안정한 사람을 세워서 안정된 하나님의 기둥같은 존재로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별명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또 계속 읽어보시면 야고보 요한의 두 형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17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자, 베드로와 함께 활동했던 아주 예수님의 내적인 대표적 세 제자, 베드로 빼놓고 누구예요 야고보, 요한 근데 야고보 요한에게 주신 별명은 뭐였습니까 보아너게, 혹은 보아네비게스 그 뜻은 일반적으로 번역할 때 우뢰의 아들들이라, 우뢰의 아들, 여러분 우뢰의 아들, 천둥의 아들 이 말을 했을 때 어떤 느낌이 옵니까 우뢰의 아들 이건 긍적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고 또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우뢰의 아들. 우리가 1세기 의 유대인들의 문서를 읽어보면 우뢰를 하늘의 천사라, 하늘의 메신저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보낸 메신저, 강력한 메신저 이런 긍정적인 이미지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여러분 벼락, 생각해 보면 아주 파괴적이죠 이것은 파괴적인 것입니다. 아주 급한 것 이런 것들을 우리가 연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 학자들은 사실상 야고보, 요한의 성격이 벼락같았다. 실제로 우리가 누가복음에 보시면 누가복음 9장 54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라는 마을에 들어가십니다. 사마리아라는 마을에 들어 가셨을 때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이 예수와 제자들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당신들 이 마을에 들어 오지 마십시오, 쫓아 냈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누가 제일 화가 났을까요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가 제일 화가 났어요. 그래서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선생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이 사람들을 벼락을 쳐 버리십시다.벼락같은 사람들이예요. 이 사람들이. 그러니까 어울리는 별명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았을 때 정말 주의 메시지를, 하늘의 메시지를 천둥처럼 증거하는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베드로와 함께 초대교회를 세우는 위대한 사도의 생애를 이들이 살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 사람들은 약점이 많은 사람들이죠. 그러나 여기서 메시지가 뭐예요 그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부르셨다. 그것이 촛점이 예요. 그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약점 많은 사람들을 주님이 불러서 쓰셨다. 자, 명단에는, 제자들의 명단 맨 끝에는 누구도 포함되어 있습니까 제자들 명단에 항상 맨 끝자리에 나오는 사람 한 사람이 있어요. 유명한 사람입니다. 누구죠 유다입니다. 자, 19절 한번 읽어 보세요.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그랬습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마디로 가룟 유다를 생각할 때 이 사람은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 유다는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비판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해에 밝은 사람, 이재에 밝은 사람, 돈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예수님 제자 일행에 회개 관리를 하다가 시험에 들어서 이 사람은 마침내 예수를 파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베드로와 유다를 비교할 때 두 사람이 똑같이 실패했어요. 똑같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났고 유다는 영 배신자의 자리에서 비극적인 생애를 마무리 짖게 됩니다. 그 차이가 뭘까요 베드로에게는 회개가 있었습니다. 자기 약점을 직면하면서 그 약점 앞에 눈물을 뿌리고 회개하고 고치면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때 그의 실패, 그의 약점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베드로는 약점을 극복했지만 유다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자, 누구나 내가 가진 약점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고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나의 약점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십자가 앞에 내 약점을 내려 놓고 주님의 다루심을 기꺼이 받겠다는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약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첫번째 제자들을 선택하신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렛슨은 이것입니다. 내가 가진 약점, 내가 가진 허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준비만 되어 있다면 주님은 나 같은 사람도 쓰실 수가 있다. 우리도 쓰실 수가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첫번째 렛슨이예요. 주님은 우리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을 필요로 하십니다. 왜 부르셨을까요 왜 제자를 세우실까요 두 번째 이유는 주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14절을 다시 읽겠어요. 자, 14절 다시 읽습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시고 거기에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거기 줄쳐 놓으세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원문으로 읽는다든지 영어성경을 읽어보면자기와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하여그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제자들을 세우신 이유. 선택의 목적.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려고. 이게 무슨 뜻이냐. 저는
첫째로 이 선택의 중요한 목적이 친교적 목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우리와 친교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 하십니다. 여러분 이 감동적인 장면을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생각해보세요. 주님이 저와 여러분과 같이 있고 싶어하세요. 함께 있고 싶다. 너희들과 같이 있고 싶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역사의 주님. 이 놀라우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 있고 싶어하십니다. 같이 있고 싶어하십니다. 감동이 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나와 같이 있고 싶어하신다. 다시 말하면 저와 여러분을 그분은 사랑의 대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인격적 교제의 대상. 사귐의 대상. 같이 있고 싶어해서 부르셨다. 그가 우리를 부르신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가 함께 있고 싶어하십니다. 감동되지 않으세요 나 같은 사람. 이 허물 많은 사람. 이 약점 많은 사람.
그런데 주님이 나와 더불어 친교를 나누고 싶어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9절에서 이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우리를 불러 우리를 불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뭐라 그랬어요 미쁘시도다. 미쁘시도다. 이쁘시도다가 아니예요. 미쁘시도다. 다릅니다. 미쁘시도다 뜻이 뭐예요 성실하시다. 나같이 불성실한 인간을 불러 교제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신 분.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 이게 바울의 고백이예요. 그러나 친교의 목적을 넘어선 또 하나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있고 싶어한다는 얘기는 같이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고 싶어하신다. 저는 훈련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있는 기회. 자연스럽게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전달하시고 주님의 삶을 보여주시고 그래서 우리도 주님처럼 살아가기를 주님은 기대하셨다. 훈련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요 같이 있지 않고는 그분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을 수가 있어요 같이 있지 않고는 그분의 삶의 모습을 어떻게 볼 수가 있어요 같이 있지 않고는 어떻게 그분을 따라갈 수가 있을까요 훈련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오늘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오늘 이 시대.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있는 방법이 뭡니까 어떻게 주님과 같이 있을 수가 있어요 전 두가지 방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그래서 전 제자훈련의 가장 기본적인 방편. Basic한 가장 중요한 훈련은 이 두가지 훈련이예요. 말씀훈련과 기도훈련. 자, 내가 성경 말씀을 펼칠 때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함으로 나는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래서 주님과함께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제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말씀에 대한 애정이 없다. 성경공부에 관심이 없어요.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저는 이건 병든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들락들락하면서 무릎꿇고 싶은 맘이 없다. 기도의 목마름이 없다. 기도의 갈증이 없다. 저는 이거 병든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씀훈련. 기도훈련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있는 그 기회를 통해서 주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일체의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기도의 훈련에는 밸런스가 필요합니다. 균형이 필요해요. 어떤 성도들을 보면 말씀은 좀 읽는데 기도는 전혀 안해요. 또 어떤 성도들은 무릎꿇어 기도는 하는데 아예 성경은 닫고 살아요. 이건 좋은 사례가 아니죠.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한다. 함께 있는다. 대화한다. 그러면 상대방의 얘길 들어야 되고 또 내 마음을 open하고 얘기해야 되요. 어떤 사람 보면 남의 얘기 열심히 듣는데 자기마음 open하지 않아요. 자기 마음 열지 않아요. 답답하죠. 이런 사람과 친구 되기 곤란합니다. 상대방의 얘길 잘 들어야 하고 그런가 하면 내 마음을 열고 내 고민과 좌절을 얘기하면서 우리는 정말 친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나 사이의 교제도 마찬가지예요. 기도해야 되요. 무릎꿇어 기도해야 되요. 동시에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 없이 말씀 없이 기도만 하려고 하면 그 기도는 욕심에 근거한 기도. 이기적인 기도. 부속적인 기도가 되기 쉬워요. 기도 한다고 해서 그 기도가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도하느냐 기도의 내용. 이런 것은 말씀을 읽어가며 말씀 앞에 응답할 때 성서적 기도생활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 예요. 뭘 기도하느냐가 중요해요. 이런 얘기가 있어요. 어떤 교인 하나가 앵무새를 길렀습니다. 앵무새 기른 동기가 뭐냐면 자기 교회 목사님이 앵무새를 기른다고 하니까 덩달아나도 앵무새 하나 기를까그래서 앵무새 하나를 사다가 길렀습니다. 근데 그 앵무새가 꼭 한마디 말을 할 줄 아는데 그 말이 이 앵무새를 산 주인을 얼마나 당황하게 만들었는지 몰라요. 꼭 한마디 하는데 그게 뭐냐면키스해 주세요시도 때도 없이키스해 주세요하니까 어, 이거 찾아오는 손님에게 주인이 오해받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당황을 해가지고 목사님께 어느날 전화를 걸었습니다. 목사님 듣자 하니 목사님 앵무새는 경건한 언어훈련이 잘되 있다고 하는데 내 앵무새 보낼 테니까 training좀 시켜 주십시오. 이 목사님이 문제 없다고 보내라고 목사님 새장에 이 새 앵무새를 같이 집어 넣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앵무새가 주인이니까 먼저 인사를 합니다. 사실은 목사님의 앵무새도 꼭 한마디의 말을 할 줄 아는데 그게 뭐냐면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그래서 목사님의 앵무새가 주인이니까 먼저 인사를 하는 거예요.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그랬더니 새로 온 앵무새가키스해주세요그랬더니 목사님 앵무새가 전에 하지 않았던 한마디 말을 더 하더래요. 주께서 드디어 내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밤낮 뭐기도 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기도하느냐 성경을 읽어보면 거기서 기도거리가 나와요. 주님의 음성 들으면서 대답이 나와요. 말씀과 기도의 밸런스. 이 균형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친해지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주님의 기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을 펴십시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무릎을 꿇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생활에 연륜이 흘러가는데 아직도 성경 몰라요. 성경 닫고 사는 사람 있어요. 덮어놓고 믿자. 그래서 덮어놓고 믿어요. 열어야 되요. 덮어놓고 믿으면 안되요. 기도해야 합니다. 무릎꿇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서야 제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이 시대에 우리가 주님의 제자다운 제자가 될 수 있어요 왜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는가 왜 제자로 세우셨는가 그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는 주께서 우리를 보내사 전도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14절입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꼐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자! 함께 있는 기회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친교합니다. 주님과의 친교! 중요합니다. 또 함께 있는 기회에 주님에게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친교와 훈련을 넘어서서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과 대화하고, 또 주님께 배우고 그래서 마지막에 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를 보내사 전도하게 하시려고-이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전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참순종하게 되면 주님은 전도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그것이 15절의 말씀이예요.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전도하고자 하는 이에게 전도하는 능력, 전도할 수 환경, 전도할 수 있는 권능도 내가 준다. 궁극적인 목적은 전도하게 하려하심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님의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전도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 마지막 명령이 뭐예요 마태복음 28장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도전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으라. 사도행전 1장 8절에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복음 전도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저는 제자들에게 프라이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들의 자존심, 전도하는 사람들의 자존심, 이것 때문에 전도하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전도만이 인간을 바꿀 수가 있다. 전도만이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이 프라이드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전도하는 것이지요. 전도만이 이 세상을 바꾸고 온 역사를 바꿀 수가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은 그 교회안에 전도하는 교인이 별로 없다. 또 전도하기를 원하는데 도무지 전도할 줄을 모른다. 이것은 마치 이런 얘기입니다. 한 군대안에 총 쏠 줄을 모른다. 군인들이 싸울 줄을 모른다. 이 얼마나 비극이예요 이 얼마나 커다란 비극입니까 전쟁할 줄을 모른다. 총을 사용할 줄을 모른다. 전도할 줄을 모른다. 이 얼마나 비극이예요 월드컵의 비극, 한국축구의 비극이 뭐예요 우리 모두 흥분하면서 16강에 들기를 원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까 기본적인 기술이 없더라. 사람들은 차범근 때려죽이자고 소리치지만 차범근 칭찬할 때는 언제예요 감독의 전술이 나쁘다고 소리소리치고 있지만 문제의 핵심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사실 얼마나 기술이 없어요 마지막 벨기에와의 싸움은 잘 싸웠지요. 피가 터지도록 싸웠습니다. 우린 그걸 칭찬합니다. 저는 지난 번 벨기에와 싸울 때 이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이겼으면 이런 생각을 했을거예요. 투지만 가지면 모든 것이 된다. 대들면 된다. 이 생각했을거예요. 아니예요. 기본기가 부족했어요. 우리가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았습니까 철야기도는 못해도 축구보느라고 밤샌 사람들 한 번 대답해 봐요. 그러나 우리가 감독의 전술이 부족하다, 여러가지 소리치는 마당에서 저는 한 평범한 사람이 문제의 핵심을 잘 짚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포츠 조선을 보니까 떠나는 차범근 감독에게 한 사람이 편지를 썼어요. 이 사람이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어요. 김남호라는 사람이 아주 짤막한 편지를 썼어요. 떠나는 차범근에게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보내게 된 것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슬픔입니다. 하지만 패배의 충격이 우리들에겐 너무도 컸습니다. 지치고 힘들었던 우리들에게 월드컵에서의 승리는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퇴출기업 명단이 발표되던 척박한 그 날에도 지치고 슬픈 퇴근길 지하철에서 시민들은 스포츠신문을 펼쳐들고 기적을 꿈꾸며 소박한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입시지옥의 뜨거운 여름날 지친 하교길 청소년 학생들도 친구들과 축구얘기를 할 때에는 서로 눈을 반짝이며 웃을 수가 있었습니다. 어깨 처진 명퇴한 아버지들도 축구중계를 볼 때면 예전의 박력있던 모습을 되찾곤 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지친 우리들에게 잃었던 웃음을 되찾게 해 주리라 믿었던 소박한 소망은 정말로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을 이렇게 보내는 것은 당신만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맨 땅에서 축구하는 유소년들과 인조 잔디에서 부상당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도 대표팀 경기에서는 당연한 권리행사 하듯 승리만을 강요했던 우리들의 독선도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승리에 대한 영광이 제일 크게 보장되는 감독이었기에 이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황량한 7-80년대의 한국의 영웅이었던 당신을 이렇게 보내는 우리들도 당신만큼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화려했던 만남만큼이나 이별이 쓸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과 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당신이 소중하게 키우는 꿈나무 축구소년들이 훗날 월드컵에서 결승전 승리의 주역이 되었을 때 당신과 다시 활짝 웃으며 깊은 포옹을 하게 될 그날을 믿습니다. 그 동안의 외로운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이 짤막한 감동적인 편지에서 문제의 핵심을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력있는 내일의 꿈나무들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이 축구에 말로 한국 민족사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이었던 이 나라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는 현장에서 우리가 느낀 것은 뭐예요 우리는 진정한 실력있는 한국인의 자원을 키워놓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똑같은 얘기를 한국교회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축구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저도 비판하기 쉬워요. 저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맞다, 나도 비판할 자격이 없다. 나도 축구장 한번도 가보지 않았거든요. 축구장 만드는데 헌금해 본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비판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교회를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우리는 한국교회의 자원을 기르는 일에 애썼을까요 아니 당신이,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얼만큼 훈련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무릎꿇어 우리는 기도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기 위해 성경을 펼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이 말씀을 붙들고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고민했던 흔적이 내 삶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한국교회, 한국민족을 치유하고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갖출 것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합니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불란서의 스트랄스부르크라는 도시의 한 교회에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습니다. 모인 이유는 그 교회마당에 예수님 상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폭격을 받았을 때 예수님의 두 팔이 떨어져 나갔어요.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의제였어요. 그것만 복원을 시킬까 아예 다시 만들까 그 때 누군가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폭격맞은 그대로, 두 팔이 없는 그대로 놔 둡시다.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 그리고 그 아래 이렇게 써 놓으십시다. 예수님은 당신과 나의 팔을,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것은 멋진 얘기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서 일하고자 하십니다. 고통받는 이웃들의 상처를, 그 아픔을 느끼며 그들에게 찾아가는 주님의 손이 내 손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들의 아픔을 짊어지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손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들에게 전해줄 메시지를 위해서 말씀을 붙드는 손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 복음을 가지고 찾아가는 손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손이 그리스도의 손이 될 때 우리를 통해서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열두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세우셨습니다. 동일한 목적으로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세우십니다. 이 부르심앞에 우리는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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