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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심의 죽음 (막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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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7일 강정우라는 10살 먹은 소년이 천 만원의 상해보험을 들은 그 아버지에 의해서 손가락이 절단되었다는 보도가 나가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할 말을 잃어버리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제 정말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직도 양심이 존재하고 있느냐를 물어야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양심은 매우 가변적인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양심은 더렵혀질 수가 있습니다. 양심이 더러워진다, 이런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양심은 약해질 수도 있고, 양심은 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성경에 보면 양심이 불타서 없어진다. 화인맞은 양심, 이런 표현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 불타 버려서 양심이 실종될 수가 있다. 없어질 수가 있다. 양심이 포기될 수도 있다. 이렇게 성경은 양심의 작용을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시면 이스라엘 땅에 한 시대를 다스리던 한 통치자의 양심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도해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헤롯입니다.
그런데 헤롯이라 그럴 때 우리가 크리스마스 스토리에 나오는 헤롯,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그 어린아이들을 죽였던 그 헤롯 대제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 사람은 그 헤롯대왕의 아들입니다. 그 유명한 헤롯대왕이 사마리아 여자 말다스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굉장히 많은대요, 그 많은 아들 중에 한사람 헤롯 안티바스라고 흔히 일컬어집니다. 헤롯 안티바스. 이 헤롯 안티바스는 처음에 아라비아 왕이었던 아렛다라는 그 왕의 딸 왕녀, 그 공주와 더불어서 첫번 결혼을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혼을 합니다. 그 이혼의 사유가 꼭 하나 밖에 없었어요. 못생겼다. 그래서 이혼을 했습니다. 그 후에 헤롯 안티바스는 자기의 동생이었던 헤롯 필랍의 아내, 자기 제수가 되죠, 그 헤로디아라는 여자하고 결혼을 하는데 이 헤로디아느 또한 헤롯 안티바의 조카 딸이기도 했습니다. 복잡합니다 관계가. 하여튼. 이 헤롯이라는 집이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근친상간의 역사로 얼룩진 매우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집안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조카 딸, 자기 제수하고 이렇게 자기 아내를 삼고 이런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니까 당시 하나님이 쓰시던 선지자였던 침례 요한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은 죄를 범했습니다라고 그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헤롯 안티바스는
그런데 요한에 대해서 자기를 꾸중하고 책망한 예언자인 요한에 대해서 상당히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자기의 약점이 지적 되면 누구나 다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메시지를 달게 들을 수 있는 양심이 있었던 사람이예요. 양심이 살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증거를 우리가 20절에서 볼 수가 있죠. 자, 본문의 20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그의 설교를 들었을 때 아프면서도, 괴로우면서도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었다. 또 요한이라는 선지자에 대해서 헤롯은 그가 거룩한 사람이다. 의로운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보호될 가치가 있다, 이렇게 판단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일련의 사건이 전개되자 그는 이런 요한에 대한 좋은 생각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요한의 목을 치는 그런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양심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는 자기의 양심과 전혀 상관없는 자기 양심을 배반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양심이 타락하면 양심이 됩니다. 양심, 두가지 마음 이것도 양심이예요. 그래서 이 사람의 양심은 이중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기 양심과 전혀 거슬리는 그런 결정을 하게 됩니다. 자, 오늘 우리는 이 헤롯 안티바가 그의 양심을 버리는 결정, 양심을 배반하는 그런 결점을 내리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같이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 우리의 이웃들이 왜 양심을 버리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류 속에서 쉽게 양심을 포기 할 수 있는 우리들도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우리의 양심이 회복되기 위해서도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양심을 버릴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헤롯 안티바라는 사람이 양심을 버린 원인을 함께 같이 추적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그 원인을 몇가지로 진단해 볼 수가 있습니다. 헤롯 안티바스가 자기 양심을 버린 원인, 첫 째는 욕심이었다. 욕심때문에 그랬다. 어떤 욕심이예요 성적인 욕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 성욕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많은 욕심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욕심 그 자체가 반드시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 또 이런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의욕도 없다. 의욕도 욕심이예요.
그런데 인생을 살아 갈 의욕도 없다. 그건 사람이 아니지요. 욕심이 다 나쁜 것이 아니예요. 많은 경우에 욕심은 매우 중립적인 것일 수가 있습니다. 성욕, 물욕, 명예욕, 인간이 많은 욕심을 갖는데요.
그런데 그 욕심 때문에 삶을 사는 추진력도 생기는 거예요. 욕심이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욕심을 잘못 관리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그 욕심이 죄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욕심에 대한 올바른 청지기적 책임을 행사하지 못할 때, 욕심을 컨트롤하지 못할 때 욕심이 죄로 변합니다. 그때 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그 다음에 뭐가 되요 죄가 되고 죄가 자라나면 사망이 된다. 성경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이 한 말 가운데 '나는 내 머리 위에 새들이 날아 다니는 것을 방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우리를 틀지 못하도록 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렇습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지나가지만 그 욕심을 컨트롤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죠. 지금 전 세계에 가장 힘있는 나라인 미국의 대통령이 그 욕심을 컨트롤 하지 못해서 문자 그대로 개망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오늘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헤롯 안티바와 나중에 재혼했던 여인 헤로디아 이 두 사람만 잘 살았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우리가 1세기의 문서들을 보면 이 사람들의 인생이 그 후에도 개판이었습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섹스 파트너를 바꾸었고 free sex life style 속에서 살고 있었던 그 궁중과 나라의 기강을 문란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누구하고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자식이 주구인지도 모르고, 타락하면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부목사님 한분이 얼마전에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침해의 마지막 단계 증상을 아십니까' 그런 얘기 못들었어요. 그래서 모른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침해의 마지막 단계증상은 부부사이가 갑자기 좋아지는 거요.' 그게 어쨌단 말이냐 그러니까 그 원인는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좋아진대요.' 사람이 타락하면 거기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 이 헤롯의 집안의 타락이 그런 양상이었습니다. 도무지 자기 양심을 컨트롤하지 못했어요. 우리가 그 강정우군의 아버지도 물욕, 그것을 컨트롤 하지 못한것이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자, 욕심에서부터 잘못 관리된 욕심 여기서 부터 양심이 더렵혀지는 타락이 시작됩니다. 또 하나, 욕심과 함께 허영심이었습니다. 헤롯 안티바스의 양심을 오염시킨 그를 타락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허영심이었습니다. 허영심이 뭡니까 저는 허영심을 단순하게 이렇게 정의하고 싶어요. 그것은 분수없는 자기 과시의 욕구다.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고 자기 분수를 넘어서서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 그것이 허영이다. 우리가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바울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정말 기쁨의 삶, 건강한 삶을 살도록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2장 3절을 보시면 '다툼과 허영을 버려라.' 거기 허영이라는 말이 나와요. 허영을 버려라. 이 허영이라는 단어가 영어 단어에 보면 아주 흥미있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vain glory' 'glory'라는 말은 영광이라는 뜻이죠. 'vain' 은 비어있다. 속이 빈것. 그러니까 자기를 나타낼만한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구. 이것이 바로 허영의 본질입니다. 이 허영심. 자, 이 허영심이 헤롯 안티바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자, 본문에 23절에 보시면 잔치의 절정에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라고 전해지는 이 소녀가 춤을 추는 광경을 보고 황홀해진 나머지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합니다. 23절을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나라의 절반도 주겠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따져보면 이 사람이 나라의 절반을 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왕이기는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헤롯 안티바는 분봉왕이었습니다. '분봉왕'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는 네 등분을 해버렸어요. 그래서 네등분한 사분의 일 지역에 해당되는 갈릴리 베레아 지역의 한 부분을 맡았던 왕이 바로 헤롯 안티바스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봉왕은 여러 가지로 제한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거기에는 로마 총독이 와있었습니다. 유명한 빌라도 총독도 있었단 말이죠. 그러니 이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가지 행동의 제약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지니까 갑자기 한다는 소리가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 그랬습니다. 마치 나라의 절반을 줄 수 있는 무슨 권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본래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는 말을 옛날에 그런 소리 한 사람이 있어요. 성경에 보시면. 혹시 아세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수요일 날 에스더서 강해에 나오시면 그런 소리를 과거에 한 독재자가 있었습니다. 아하수에로가 에스더에게 한 소리였어요. 근데 그 사람은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근데 전혀 권한이 없으면서 이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습니다.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허영이죠. 우리는 지나간 몇년 간 이땅의 많은 허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가 우리 나라를 망치는데 일조를 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비전을 강조하지만 허영을 경계합니다. 이 비전과 허영은 달라요. 내가 가진 어떤 달란트, 내가 가진 어떤 은사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을 추구하기 위해서 꿈을 갖는 것 이것은 꼭 해야할 일입니다. 비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기하고 전혀 상관없이 무엇을 가질 수 있다고, 가지고 있다고,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허영, 이런 허영은 우리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시편 131편에서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바울도 로마서 12장 3절에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허영을 경계하는 말이예요.
왜냐하면 허영이 양심을 더럽힙니다. 허영심에서 부터 우리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허영심. 이것이 바로 헤롯 안티바라는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간파해 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헤롯 안티바의 양심을 더럽힌 중요한 원인 또 하나를 우리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만 의식하고 있었던 것, 인간의식. 여러분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의식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 의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눈치도 보고 다른 사람 쳐다보고 다른 사람 의식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죠. 허나 저는 사람을 의식한다는 자체를 정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만 의식한다 이게 문제예요. 사람만 의식한다. 거기엔 중요한 전제가 있어요. 뭘 의식하지 않는단 말이예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한다. 다른 사람만 의식해요. 사람만 기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섭리하신 하나님, 인생을 다 살고 그분 앞에서 심판 받아야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 나의 결정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 생각이 없었단 말이예요 헤롯 안티바에게. 본문의 26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26절,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26절 시작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이 세례 요한의 목을 베라고 마지막 결론을 내린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여기 뭐냐하면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 보고 자기 체면 생각하고 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약속 했으면 해야지. 그러나 이 사람의 목을 치는 것 이 의인 한 사람을 없애는 것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하나님 생각이 없었단 말이죠. 하나님 의식이 없었단 말이예요. 하나님 의식 그냥 줄곧 인생을 사람만 의식하고 사람들만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눈만 잠깐 속이면 인생이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만 의식하고 살아가는 인생 이런 사람들은 현장에서 그 사람들만 잠깐 속이면 된다는 그런 무서운 판단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사람을 속이는 자로 자기 양심을 더럽힐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어떤 신사가 이렇게 다리가 있는 난간을 지나가다가 보니까 그 옆에서 어린 소녀가 까만 안경을 쓰고 소경처럼 소경으로서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구걸을 하는 모습을 보고 추운날 너무 안되게 생각한 신사가 자기의 지갑을 열어서 지폐 몇 장을 놓았습니다. 지폐 몇 장인가 동전 던져 주는데 지폐가 날라 오니까 깜짝 놀래 갖고,
그런데 몇 걸음 지나가 탁 보니까 이렇게 뒤를 돌아다 봤대요. 지폐를 자세히 보고 있더래요. 그러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 갖고 되돌아 가서 너 소경 아니지 그래서 안경을 벗겨 보니까 아저씨 미안해요. 정말 저는 소경은 아니예요. 사실 우리 아저씨가 앉으라 그래서 아저씨 대신으로 잠깐 우리 아저씨가 잠깐 간 사이에 여기 와서 앉아 있는 거예요. 고백을 하더래요. 네 아저씨는 어디 갔니 우리 아저씨는요 영화관 갔어요. 잠깐 그 순간만 모면하면 될 수가 있다는 이런 사고 방식이 사실은 각계 각층에 이 시대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종교 개혁이 일어 났을 때 유럽은 그 상황이 그렇게 좋지 못했습니다. 많은 가치관의 혼란 정치적인 혼란이 가중 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유럽의 많은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편안한 도시, 살기 좋은 도시, 바람직한 도시에로 변하고 있었던 도시가 있었는데 그것이 스위스의 제네바였습니다.
왜냐하면 제네바의 한 사람 때문에 그랬어요. 개혁자 캘빈 때문이었습니다. 캘빈! 제네바의 시민들은 그를 제네바의 양심 이라고 불렀습니다. 캘빈이 비단 종교 개혁만 한 사람이 아니라, 이 제네바라는 도시의 문화, 정치, 삶의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 가고 있었어요. 사람들은 그를 신뢰 했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제네바의 양심 이었고 유럽의 양심 이었습니다.
그런데 캘빈이 그런 생애를 살 수 있었던 중요한 한 원인이 저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캘빈의 일생을 지배하고 있었던 중요한 삶의 좌우명 하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캘빈의 좌우명을 아십니까 유명한 좌우명이예요. 호람데오. 그 말의 뜻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 그는 평생 이 좌우명을 가지고 살았어요. 하나님 앞에서 산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판단 하실까요. 우리 크리스챤 조차도 죄를 범할 때 종종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 아니요. 나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십니다. 그 하나님 나를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하나님 의식 없단 말이죠. 하나님 의식,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불꽃 같은 안목으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이 하나님 의식이 없이 인생을 살고 있었단 말이죠. 헤롯 안티바가 결국 이런 범죄 속에 비극의 주인공이 된 원인은 바로 하나님 의식이 그에게 부재 했던 까닭입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습니까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헤롯 안티바는 한평생 죄책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그의 나머지 생애를 살아야만 했었습니다. 죄책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그는 나머지 인생을 살아 갑니다. 자, 이 사람 왕이니까 궁중에서 살았습니다. 몸뚱이는 궁중에 살았지만 그의 마음은 감옥이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지옥이었습니다. 그가 가책을 갖고 살았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16절을 한번 읽어 보세요. 16절, 자 본문의 16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 났다 하더라. 자 이 얘기를 헤롯이 하게 된 동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14절부터 보시면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14절 전에 무슨 얘기가 나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냈어요. 자 복음이 전해 집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자가 고침을 받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자 헤롯이 보여 준 반응이예요. 16절에 내가 목 베인 요한이 살아 났는가 요한이 살아 났는가. 자 예수님이 연대적으로 요한이 조금 앞섰죠. 요한이 와서 그가 회개의 멧세지를 전했을 때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어요. 요단강에 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광경을 생각하고 있었던 헤롯 안티바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사람들이 회개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어요 요한이 살아 났는가. 이건 뭘 증거해 주고 있습니까 그는 요한을 죽인 뒤에도 한 순간도 요한의 환상에서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죽인 요한 그가 그를 붙들고 있었던 것이예요. 다시 말하면, 정확하게 말하면 가책이 양심의 가책이 그 길트 컴프랙스가 그 자책이 그를 붙들고 그를 놓아 주지 않고 있었어요. 그는 평생 그 감옥 속에서 삽니다. 양심의 괴로움울 느껴며 살아갑니다. 지옥 아니겠어요. 이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지옥에서 삽니다. 저는 한마디로 지옥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어요. 지옥이란 것이 뭐냐하면 꿈이 깨이지 않는 영원한 악몽입니다. 악몽을 꾸어 보셨죠.
그런데 깨이지 않는 악몽 그 영원한 괴로움 그 자책의 영원한 괴로움 속에서 그 영원을 살아야 하는 지옥. 이것이 이 사람의 마지막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헤롯 안티바에게 그 양심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 회개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진 않았어요.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 기회를 붙잡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빌라도와 더불어 함께 예수님을 처형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끝끝내 양심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양심은 회복될 수 있을까요 더럽혀진 양심, 불 타버린 양심, 실종 된 양심, 죽은 양심 살아날 수 있을까요 더럽혀진 양심 깨끗함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성경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멧세지를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굿 뉴스, 여러분, 양심은 깨끗해 질 수가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양심은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양심의 회복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양심은 회복될 수가 있을까요 양심이 회복 될려면 중요한 스텝은, 첫번째 스텝은 하나님 앞에 서셔야 합니다.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오셔서 하나님 앞에 서셔야 합니다. 양심을 누가 주셨어요 하나님이 주셨죠. 양심의 주인은 하나님 이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뭐냐하면 양심이라는 희랍어 단어가 두 가지 단어의 결합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무엇 무엇과 함께라는 단어와 그 다음에 안다, 안다 함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제로 하는 말이예요. 하나님과 더불어 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예요. 그래서 우리 양심은 하나님을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서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볼 때 거기서 회개가 시작 되는 거예요.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이예요. 자! 하나님 앞에 서 보십시요. 양심을 주신 그 하나님 앞에 서 보십시오. 옛날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는 저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반짝이고 내 마음속에는 양심의 도덕률이 빛나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양심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소리 치고 있지 않습니까 안돼! 해서는 안돼! 양심이 우리를 경고합니다. 양심이 우리를 향해서 책망합니다. 내 속에 양심을 주신 하나님, 양심의 주인 되신 그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세요. 그것이 회개의 시작이예요. 양심의 회복은 한마디로 말하면 회개하면 되는거예요. 회개하면. 우리가 방금 부른 찬송가 가운데도 보면 회개한 양심 생명수 가운데 젖었네 어떻게 회개한 겁니까 회개의 첫번째 스텝은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생각 하실까. 뭐 인생 살면서 그 정도의 부정 안하고 사는 사람 어딨나. 그러니까 그 정도는 다 부정 할 수 있다. 그래서 회개가 없는 거예요. 그게 아니예요. 사람과 사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 하실까요. 창조주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나를 보셔야 되요. 그러면 결론은 하나 밖에 없어요. 하나님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해야 되요. 회개의 첫번째 스텝,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입장에서 내 죄를 보고 하나님 이 죄 이제 포기 하겠습니다. 회개의 시작이예요. 지금 미국의 대통령이 당하고 있는 끔찍한 어려움 그거 죄를 일찌감치 자복 했으면 그 문제 없습니다. 미국교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지도자가 되시는 목사님 한 분과 제가 얼마전에 시간을 같이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클링턴을 만났을 때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했대요. 빨리 회개 하라구 전 국민 앞에 나는 죄를 범했습니다. 에스아이앤 나는 죄를 범했다. 그 단어를 쓰라 그랬대요.
그런데 그 말을 끝까지 안 썼어요 이 사람. 부적절한 관계 부적절한 관계 그 단어로 빠져 나갈려고 한 것입니다. 나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말 얘기하고 사임하라고 국민이 당신은 사임하면 안된다고 해주면 그 다음에 하라고 그랬더니 그가 말하길 대통령은 하고 싶다고 그랬대요. 회개 할 용의가 없다는 거예요. 나 이 사람 회개 했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두고 보세요. 하나님이 회개 할 때 까지 몰아 부칠거예요. 전 세계 앞에 개 망신 하면서 그 속에 몰릴 때 까지 그대로 하나님이 주장 하실겁니다. 빨리 고백 할수록 좋습니다. 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를 포기 하겠습니다. 죄를 포기 하는 것 이건 차차하는게 아니예요. 한 순간에 해버려야 해요. 한 순간에 해 버려. 단숨에 해 버려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미국의 세금을 걷는 기관 국세청
IRS라고 그러는데 이 국세청에 어느날 편지 한 장이 날아 들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가 세금 보고를 할 때 약간은 의도적으로 잘못 보고 했습니다. 양심이 괴로워서 제가 잠을 자지 못 하다가 그래서
IRS 국세청을 향해서 제가 체크를 보냅니다. 수표를 보내는데 150불, 그래서 그 아래 더 쓰여진 내용이 재미 있는 것은 뭐냐하면 제가 계속 양심이 괴롭고 계속 잠을 잘 수 없다면 수표를 더 보내겠습니다. 아직도 제대로 회개 한 거 아니예요. 단숨에 회개해야 되요. 회개는 단숨에 죄를 인정하고 죄를 전적으로 포기할 결심을 하고 주앞에 엎드러 지십시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요. 그게 회갭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진지하게 주앞에 서서 용서를 구한다면 여러분 믿으십니까 주님의 용서를 믿으십니까 주님 용서하십니다. 양심은 회복 될 것입니다. 그 양심 살아 날 수가 있습니다. 깨끗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 복음을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보시면요 히브리서 9장 14절, 그 전 구절 보면 13절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구약의 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옛날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염소나 혹은 황소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속죄의 제물을 잡아 그대신 그 제물을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라. 하나님이 나 심판하면 끝장 나니까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속죄의 제물을 준비해서 그 제물이 대신 죽어 흘린 피 그 피는 일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고 죄를 용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염소의 피, 황소의 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일시적으로 덮어질 수가 있었다면. 그 다음에 히브리서 9장 14절이 이런 말로 시작되요. 하물며 이 중요한 단업니다. 하물며, 하물며. 자 하나님이 준비하셔서 내 죄를 대신해서 속죄의 제물로 드려진 염소나 황소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일시적으로 덮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준비 하셔서 이 땅에 보내신 흠 없는 하나님 자신이 준비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피가 십자가에 이르신 보혈이 어찌 너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못할 수가 있으며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섬기는 자리에 세우지 못하겠느냐. 사랑하신 여러분, 일시적으로 주께서 준비하신 구약시대의 제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고 그 죄를 속죄하는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사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쏟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 앞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고 이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피가 너희를 깨끗하게 못하겠느냐. 너희의 양심을 깨끗하게 못하겠느냐. 그리고 다시 한번 살아계신 하나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리에 너희들을 세우지 못하겠느냐. 사랑하신 여러분 주의 보혈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되신 주님의 이 보혈의 피가 우리를 이 양심의 갈등에서 해방할 것입니다. 주님이 용서하실 것입니다. 진지한 회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주 앞에 그 죄를 포기할 결심 속에 엎드려 십자가 앞에서 주여 용서해 주십시요. 주님이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 입니다. 양심의 자유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미래를 향해서 우리는 새로운 감격을 가지고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자유, 그리고 새로운 담대함을 가지고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용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양심은 회복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 민족과 그리고 온 세상이 십자가 앞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 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꺼꾸러져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진지하게 회개할 때 양심의 회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먼저 내 안에서 양심이 회복될 수 있기를 구하십시다. 구원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던 우리도 세상을 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 양심이 더럽혀 질 수가 있어요. 어쩌면 내가 자유한 마음으로 오늘 감격을 가지고 주님 섬기지 못하고 내 삶의 신바람이 빠져버리고 감동과 감격이 사라진 원인 나를 괴롭히고 어떤 양심의 억압이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십자가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주 앞에 회개 하시기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내 속을 꿰뚫어 보시며 내 양심을 꿰뚫어 보시고 내 삶의 현장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오늘 엎드리십시요. 그리고 회개 하십시요. 그리고 오늘 주의 도우심과 용서를 체험 하시기 바랍니다. 보혈이 강같이 흘러 갈 것입니다. 양심의 자유가 올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이 시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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