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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깨닫지 못 하느냐 (막8:13-21)

본문

탈무드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의 머리 속에는 두 개의 방이 있다. 하나는 기억의 방이고 하나는 망각이라는 방이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의 방 속에 집어넣고 또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망각의 방 속에다 집어넣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일들을 기억하기도 하고 어떤 일들은 망각하기도 한다. 이런 탈무드의 말은 일반적으로는 진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과 망각의 기능에는 때로는 혼란이 일어날수가 있습니다. 혼란의 역기능이 일어날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은데 망각해야 할 것을 기억하고 계속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가 하면 반대로 어떤 것은 꼭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데 기억해야 할 것을 쉽게 망각해 버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마가복음 8장, 이 서두에 보시면요, 정확하게 말하면 마가복음 8장1절에서 10절까지에 피상적으로 읽어보면 오병이어의 기적과 거의 비슷한 사건이 거기 기록되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은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칠병이어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칠병이어 들어 보셨어요 오병이어 말고 칠병이어도 있습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보면 아주 비슷한 사건 같지만 안으로 들여 다 보면 이 두 가지 사건은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굶어 가면서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줘야겠다란 문제를 제기한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경우에는 제자들이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해가 저물어 가는데 이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차라리 집에 보내서 먹을 것 먼저 해결하고 그 다음에 와서 선생님 말씀을 듣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마가복음 8장 보시면요, 자 2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마가복음 8장 2절 같이 읽어요. 시작.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예수님 자신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야 이 불쌍한 사람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고 주님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장소도 다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사건은 갈릴리 지역의 벳새다 지역입니다. 그러나 칠병이어의 사건은 갈릴리의 동북편이라 할 수 있는 이방인들이 주로 많이 사는 데가볼리 지역에서 이 사건이, 이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간적으로도 좀 차이가 있는데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하루종일 함께 다니면서 하룻 동안 일어난 사건임에 반하여 자, 마가복음 8장 2절을 다시 보시면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얼마가 경과했다고요 사흘이 지나갔다. 벌써 타임도 좀 다르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병이어의 경우에 이 기적이 일어난 장소는 잔디 위에서 일어났다. 푸른 잔디 위에서. Green green grass 위에서. 왜 웃어요 푸른 잔디 위에서 이 기적의 사건이 일어 났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만 오늘 마가복음 8장 6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어디에 앉게 하시고 잔디라고 안 그랬어요. 땅에 앉게 하시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숫자적으로도 훨씬 차이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경우에는 보리떡 5개를 가지고 주님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뭐예요 5개가 아니라 7개를 가지고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되어 있구요. 또 기적의 수의 대상, 오병이어의 기적의 경우에는 몇 사람을 상대로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네 5천명. 5천명. 오병이어의 경우에는 5천명이예요. 거기다가 사람 아닌 사람까지 포함하면 물론 숫자가 훨씬 많아지겠죠 그 뜻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남자들만 5천명이었단 말이예요. 그러나 이 칠병이어의 경우에는 몇 천명이 대상입니까 4천명 이예요. 자,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 그 나머지를 수거하는 과정에 있어서 몇 광주리 오병이어에는 12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칠병이어의 경우에는 몇 광주리예요 7광주리를 거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 기적이 일어난 후에 반응도 사뭇 달랐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분을 우리 왕으로 삼으면 적어도 식량 문제는 해결되겠다. 그래서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고 하는 임금 추대 운동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칠병이어의 기적의 사건 이후에는 그런 반응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태인의 왕이라는 개념이 이방인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자, 이러한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거의 비슷한 기적을 두 차례 거듭 거듭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두 가지 기적을 두 차례에 걸쳐 행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나 같으면 말이죠, 예수님이 이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내 눈으로 한 번만 확인했다면 내 인생 완전히 뒤바뀔 것 같아요.
그런데 두 번씩 보고도 제자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 시작되는 13절에 보시면 이 사건 이후에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셨다 이번에는 데가볼리에서 다시 갈릴리 방향으로 항해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 본문 14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그런데 짤막한 항해지만 그래도 항해는 항핸데 도시락 챙겨 가지고 가는 것을 잊어 버렸어요. 자, 그랬을 때 16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자, 그래서 또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야 우리가 양식 챙겨 가지고 타지 않아서 큰일 났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느냐 그래서 다시 떡을 인해서 걱정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 두 차례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칠병이어의 기적의 현장, 거기에 제자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봤어요. 이 두 가지 기적의 공통점의 명백한 렛슨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여러분 믿으세요 예수님 계시면 그 분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할 수가 있다. 이 기적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는 정녕 우리의 모든 Need 우리의 모든 필요에 의한 공급자이신 것을 기적을 통해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또 걱정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만 그렇습니까 5년 전, 10년 전 내가 역경에 처했을 때 부르짖었더니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를 고통에서 건져내셨던 놀라우신 그 주님. 자, 주님은 내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 내게 오셨고 과연 나를 구출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소망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흥분하며 감사했어요. 그러나 오늘의 역경 다시 오늘 내가 처한 환경 속에서는 나는 또 다시 걱정하고 있습니다. 어떡하지 오늘 나는 이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자, 17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보세요. 17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들 떡 때문에 걱정하는구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내가 두 번씩 기적을 행하여 너희들의 필요를 공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를 신뢰하지 못하느냐 아직도 내가 너희들의 문제에 대한 정말 해결자요 구세주요. 그리고 주님이라는 사실을 너희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너희 마음이 둔하냐 요즘식으로 말하면 그렇게 너희 대가리가 돌대가리냐 뭐 이런 말이예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서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이 단순히 예수께서 제자들이 기억력의 문제만 문제시 한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너희 자꾸만 기억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에 처해 있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원인, 두 번씩이나 기적을 경험하고도 아직도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그들이 환경 속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지적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15절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본문에서. 15절이 중요합니다. 15절 같이 읽겠습니다. 15절 시작.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네,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게 무슨 말씀인가 왜 여기서 누룩 얘기를 할까요 누룩은 한 마디로 말하면 영향력에 대한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빨리 퍼지는 것. 이것을 예수님은 누룩으로 상징하고자 의도하셨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술을 빚어 만들 때, 우리가 빵을 만들 때, 우리가 옛날에는 주로 이 누룩을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발효시킵니다. 그래서 빨리 퍼지게 하는 것. 주로 누룩은 나쁜 영향력의 상징으로 많이 쓰여 집니다. 좋은 영향력의 상징으로 쓰여진 예도 성경에 있어요. 더 많은 경우에 누룩은 나쁜 영향력의 확산을 의미할 때 상징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5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지금 자랑하고 있는 것, 너희들이 자랑하고 있는 육신적인 자랑 이것은 옳지 않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룩을 영향력의 확산에 비유하셨습니다. 자,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지금 염려하고 있는 이유, 아직도 걱정하고 있는 이유,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두 번씩이나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들의 신앙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나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영향,
첫째는 무슨 영향 이예요 바리새인의 영향, 또 하나는 헤롯의 영향 때문이다. 이 바리새 적인 영향 그리고
둘째는 헤롯의 영향 때문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꿔야 할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영향을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얼마나 자주 우리는 거꾸로 세상에 의해서 우리가 오히려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영향을 받았기에 오늘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똑같은 비슷한 사건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낙심하며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영향이 있었기에. 두 가지 영향을 지적하십니다.
첫째는 뭐예요 바리새인의 영향입니다. 그것을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런 말씀으로 말씀하셨어요. 자, 누가복음 12장1절에 보시면 우리는 바리새적 누룩의 정체, 그 영향의 정체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 다 찾아보세요. 누가복음12장1절입니다. 자, 누가복음 12장 1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절입니다. 시작.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너희가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곧 바리새인의 누룩은 곧 뭐라고 했습니까 외식이다 그랬습니다. 외식주의. 이 바리새 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외식주의다 외식. 어떤 분들은 성경 읽다가 외식하지 말라 이 말씀을 보고서 외식을 안 하신대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외식은 그런 외식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이란 것은 겉만 꾸미는 것. 안으로 내용에 대한 관심, 그 내용을 갖추지 못하고 채우지 못한 채 바깥으로만 관심을 갖는 것, 이것이 바리새 주의의 특성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리새 주의는 외식주의 혹은 형식주의라고 우리는 정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전통적으로 그들은 전통을 중요시 합니다. 어떤 종교의 형식, 그 틀을 수호하고 그 틀을 지키는데 아주 민감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자, 그러나 그들의 맹목적 오류, 그들의 결정적 오류, 그들의 삶에 있어서 주님을 실망시키고 있었던 오류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종교의 형식, 이 틀을 갖추는 데는 열심이 있었지만 내용을 갖추는데 열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에 주님의 신랄한 고발 가운데 하나가 회 칠한 무덤이여 회칠한 무덤이여 자, 무덤을 겉으로만 꾸미는 거예요. 무덤 열심히 겉으로 꾸며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 안에는 썩고 있습니다. 죽어 있는 뼈다귀들이 그리고 냄새와 부패함이 그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겉만 꾸미는 거예요. 자, 우리는 이런 바리새적인 종교, 바리새인들의 신앙 생활의 특성을 아주 예리하게 주께서 지적하신 한 대목을 복음서에서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 한 번 다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유형의 신앙생활을 했느냐를 우리가 잘 알 수가 있는 대표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자, 마태복음 23장 2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주께서 바리새인들의 신앙 생활을 말하면서 너희들이 십일조에는 열심이다 그게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예요. 십일조한 것을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나중에 보시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때때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위 이 땅의 크리스챤들,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의 신앙 생활이 바리새인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많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우리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그들을 고발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들이 십일조는 열심인데 십일조란게 그 당시 종교인들의 대표적인 특성이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열심히 믿는 사람 그러면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십일조 열심히 하는 사람. 종교의 틀, 종교인의 삶의 틀을 만드는 사람. 그 시대 하나님 믿는 사람이면 어떤 사람이냐 십일조 열심히 하고, 요즈음 말로 하면 주일 성수하고, 주일날 꼬박 꼬박 나오고 그리고 예배 열심히 참여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때때로는 성경공부도 하고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모습이겠죠. 그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이런 모습들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 중요한 것이에요. 나쁜 것이 결코 아니에요. 그러나 예수님이 문제 삼은 것은 뭐냐 하면 이러한 십일조 외적으로 드러난 종교인의 틀을 만드는 이런 삶에는 열중하면서도 더 중요한, 뭘 강조했습니까 의와 인과 신. 의롭게 사는 것 그리고 사랑하며 사는 것 그리고 믿음직스럽게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런 삶의 태도, 진정한 삶의 내용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삶의 문제점이었단 말이죠. 오늘의 그리스도 인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제가 지난 금요일 날 미국에서 왔어요. 와서 제 컴퓨터를 열어 보니까 우리 교인 중의 한 분이 저에게 전자우편으로 E-mail을 보냈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로 기도하다가 본인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았지만 교육적 목적을 위해서 이 편지를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편지를 쓰신 분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작됩니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바쁘실 텐데 귀찮게 해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이 말씀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편지를 씁니다. 지난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그러니까 두 주일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수지 행 노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부 예배를 마친 후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고 몹시 찬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밤새 내린 눈으로 교통이 불편해서 인지는 몰라도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이 길었습니다. 저도 아이들을 데리고 한참 기다렸는데 몇 대의 차를 보낸 후 저희가 맨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마침 버스가 한 대 오기에 곧 타겠거니 하면서 춥다고 보채는 아이들을 달래고 있었는데 그 버스가 대기 행렬의 중간쯤에 서는 순간 중간 이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올라타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기다리는 줄이 꽤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중간에서부터 타기 시작하니까 맨 앞에 서 있던 저희들은 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 교회 앞마당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 날은 마침 성찬식까지 한 주일이었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저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얼떨떨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교인들 중에는 자기 자녀들 손을 잡고 올라 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더 기다리다가 뒤에 온 차를 타고 집에 왔습니다. 좀 지나간 다음에 이미 지나간 일을 새삼 목사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 유치해 보이기도 해서 그만 두려고 했으나 만일 본당에서 갑자기 화재와 같은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런 의식 수준을 가진 교인들이라면 과연 질서 있게 대피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기에 말씀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차량 승차를 질서 있게 하기 위해서 인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초등 학생들도 새치기를 하지 않는 세상에 교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교회가 앞으로 이 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물론 제자신도 나을 바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요. 얼마 전에는 본당의 의자 맨 가에 앉아서 버티고 있던 교인이 안내위원이 좀 들어가서 앉아 달라고 부탁을 하자 성질을 부리면서 끝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는 모습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설교 시간에 내용을 적으면서 은혜를 받던데 저는 그 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심히 산란해 졌습니다. 신앙이 성숙의 단계를 밟아 간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양보와 배려도 무시하는 일부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야말로 설교만을 들으려 오는 사람들로 교회가 채워지지나 않을까 라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습니다. 물론 이웃 사랑과 봉사를 남몰래 실천하는 지체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가끔 가다가 상식 이하의 일이 벌어지는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착잡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교회 왜 나오십니까 왜 신앙 생활 하십니까 저는 교회 나오는 이유, 신앙 생활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다면 구원이라고 생각해요. 구원. 이 구원 문제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예요. 출발입니다. 신앙 생활의 출발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 그것이 목적이예요. 구원받은 자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날마다 살아가는 것.
그런데 우리가 교회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종교인의 모습에 예배 드렸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예배를 드렸고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예요. 내 신앙이 증명되는 순간은 예배시간이 아닙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부터가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 받은 바 은혜가 불과 몇 미터 되는 저 마당까지도 연장될 수가 없다면 우리의 가정 생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우리의 직장 생활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우리가 과연 이런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일 수가 있을까요 저는 한국 교인들의 최대의 문제는 예배 드리는 것은 신앙 생활이고 여러분, 질서 지키는 것, 그거 신앙 생활이에요. 예배 드림과 꼭 마찬가지 신앙 생활입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 그리고 장애인을 아끼는 것, 그들에게 앞장서는 것, 장애인 파킹장 있으면 파킹하지 않는 것, 이것이 신앙 생활이예요. 그리고 이웃들을 구체적으로 돌보는 것, 그리고 빛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서서 내가 손을 벌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 이것이 신앙 생활의 모습이란 말이죠.
그런데 만약 우리에게 변화의 의지가 없다면 교회 나오고 예배 드리는 것 조차도 주님 앞에 오히려 송구한 일일 수가 있습니다. 저는 바리새인들의 최대의 문제가 뭐냐 바리새인들의 문제. 그들은 변화의 의지가 없이 종교 형식을 수호하는 데만 열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누굴까요 우리가 바리새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요 어쩌면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앙이 자라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바리새 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서 어느 정도의 찬송과 기도에는 익숙해 졌지만 아직까지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었던 제자들.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너희가 바리새 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신앙의 형식과 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신앙의 삶을 형성하는 진지한 삶의 변화에 대한 의지가 없는 너희들이여,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게 주님의 말씀이예요. 두 번째는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헤롯의 누룩. 우리가 본문을 마태복음 16장하고 비교해 보시면요, 마태복음 16장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과 헤롯. 왜 이 차이가 났을까요 사실상 헤롯과 사두개인은 한 통속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헤롯과 사두개인은 같은 통속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헤롯은 로마로부터 임명을 받아서 그 당시 팔레스타인 땅을 다스리고 있던 왕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분봉왕이다 이렇게 되어 있죠. 로마 정부의 임명을 받아서 팔레스타인 땅을 몇 개의 구분으로 나누어서 그것을 통치하던 자가 바로 헤롯왕이었습니다. 물론 헤롯이 많이 있지만은. 그러나 헤롯 가문에게 공통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이 다 욕심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이 헤롯 왕가의 대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에게 필요 없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물론 이 세금의 상당한 부분은 헤롯 왕가가 그들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뇌물을 즐겼습니다. 이 철저하게 헤롯 왕가가 대표하고 있는 라이프 스타일, 그것은 세속주의 혹은 물질주의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함께 쌍 벽을 이루고 있었던 또 하나의 종교 계층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두개 인들입니다. 주로 사두개 인들은 제사장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와 결탁해서 친 로마적인 삶을 살고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그들은 헤롯 왕가와 어울렸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이면서도 종교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했던 중요한 관심은 돈이었습니다. 저는 바리새 주의가 형식주의, 외식주의를 대표한다면 바로 헤롯주의 혹은 사두개 주의는 세속주의,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물질주의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이 헤롯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들이 세상에 영향을 주기는커녕 그들이 오히려 물질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의 신앙은 자라나지 못하고 그들은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눈이 멀어 버린 원인, 그들의 신앙이 맹목적이고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물질주의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 증거를 볼 수가 있는데요. 자, 다시 본문 마가복음 8장에 보시면 15절에서 예수님이 유명한 이 경고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었을 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이건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죠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사못 흥미롭습니다. 우리 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다시 읽습니다. 시작.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가만히 읽어보시면 이게 동문서답이예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했어요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는데 누룩 소리가 나오니까 제자들은 얼른 마음속에서 무얼 떠올렸어요 떡. 떡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누룩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당장에 아 예수님도 떡 얘기하시는구나. 자기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떡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제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물질에 대한 관심 뿐이었습니다. 물질에 대한 관심. 물질은 오늘 이 시대의 최대의 우상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황금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들을 우리는 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휴머를 들었는데 옛날에 우리가 아주 위기에 처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우리가 누구를 불렀습니까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찾지만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죠 어려운 일에 처하면 어머니 이북 출신들은 오마니. 요즈음은 어려움에 처하면 오마니를 찾는게 아니라 오, 머니하고 찾는 대요. 시대의 풍자 일 수가 있습니다. 돈 앞에 무릎을 꿇고 황금 앞에 무릎을 꿇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왜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너희들 내 제자들도 다르지 않구나. 늘 떡 생각만 하고 있구나. 물질 생각만 하고 있구나. 물질은 필요합니다. 성경은 물질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우리의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의 물질주의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상을 두 가지에서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우리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우리가 정말 물질주의를 극복한다면 그것이 우리 헌금 생활에 나타나야 돼요. 물질적으로 헌신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물질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건 다 헌신하는데 내가 물질은 드릴 수가 없다 이것은 내가 아직도 물질주의의 노예로 살고 있다는 증거죠. 저 유명한 요한 웨슬레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는 신용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정말 변했다 회개했다라면 그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하면 그 돈을 사용하는 용도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전에는 나를 위해서 내 욕심만을 위해서 쓰여지던 돈.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될 수가 있느냐 이것이 내 물질관, 물질과 관련된 내 가치관을 시험하는 척도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미국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그러는데 미국의 어떤 침례 교회에서 목사님이 지금 침례를 주는 거예요. 저기서.
그런데 한 성도가 들어오질 않아요. 자꾸만 들어오질 않아요. 그래서 왜 안 들어오느냐고 그러니까 목사님 나 지금 지갑을 갖고 있어서요. 그 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형제여 Oh brother, 당신의 지갑도 침례를 받으셔야 합니다. 지갑도 침례를 받으셔야 합니다. 지갑까지도. 침례라는 것이 무얼 의미합니까 이 Baptism이란 것은 물 속에 들어갈 때 내가 죽었다는 것이예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예요. 물에서 나올 때 나는 주님과 함께 부활되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전에는 나를 위해서만 사용되던 이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역을 위해서 사용된다. 이 물질에 대한 구체적 헌신이야말로 내가 변했고 내가 회개했고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 증거가 우리에게 있느냐 말이예요. 물질적인 헌신을 하지 못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교회를 어떤 물질을 이용하려는 장소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 사귀어서 내가 취직이나 하고 혹은 적당히 돈이나 얻을 수가 있지 않을까. 과거에 한국 교회에서 6.25사변 직후에 외국에서 원조 물자가 오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 나왔던 사람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옛날에. 옛날 선교사님들이 가만히 보니까 순수한 동기가 아니고 이 쌀 얻어 먹으려고 오는 교인들이 있어서 과거에 선교사들이 뭐라고 불렀나 하면 riceChristian이라고 불렀어요. 라이스 크리스챤. 지금은 우리가 그런 지경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동기를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니깐 축복 받는다더라, 물질적인 축복. 신앙의 유일한 동기가 물질의 축복이 되어 있는 사람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으면 축복도 받아요.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믿는 이유는 아니죠. 만약 물질의 축복 때문에 예수 믿었다면 이런 사람은 내가 신앙 생활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축복이 오지 않는다 하면 이 사람은 언제든지 주님을 버리고 떠나갈 사람이예요. 그것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위대한 꿈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삼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내 인생이 쓰임을 받을 수 있다. 이 더 높은 프라이드와 그리고 더 높은 기쁨 때문에 인생을 사는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이 물질 앞에 굴복하고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 이런 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생각이 물질에서 해방되지 못한 이 제자들의 모습. 주님의 가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그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8절 보세요. 자 18절 같이 읽겠습니다. 18절 다 같이 시작.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보아야 할 것은 주님이었습니다. 그들 앞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누구이십니까 창조자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칠병이어의 현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던 놀라우신 주님이 그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보지 못하고 떡을 보고 있어요. 지금. 여러분의 시선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내 눈이 열려 살아계신 주님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면 뭐가 걱정 이예요 그 주님이 내 곁에 계시면. 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주님이 내 앞에 계시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씀이 내게 용기가 아닙니까 그가 말씀하시면 천지는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세상은 새로워 질 수가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주님, 주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고 그리고 그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제자들의 안타까운 모습. 어찌하여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가 마태복음 16장에 보시면요, 이 바리새인들이 자꾸만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주님, 당신이 메시야라면 진짜 메시야라면 더 위대한 표적을, 더 놀라운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이제 주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일축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 왜 그 장면에서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을까요, 여러분 요나의 위대한 사건은 뭐예요 그가 물 속에 들어갔다가 몇 일 만에 살아 나옵니까 사흘 만에 살아 나와요. 이것은 십자가의 그림입니다. 주님의 가장 위대한 기적은 그가 여러분과 저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그가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그가 우리의 소망인 줄 믿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생명인 줄 믿습니다. 그 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함께 하십니다. 왜 염려하십니까 왜 걱정하십니까 부활의 주님, 살아계신 주님이 내 앞에 계시고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주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승리인 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염려하고 있습니까 왜 깨닫지 못하십니까 아직도 깨닫지 못하십니까
기도하십시다.
. 여러분,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뭐가 걱정이세요 하나님이신 예수, 구세주요 주님이신 그 분, 전능하신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뭐가 걱정이예요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그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그 분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일어 설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새로워 질 것입니다. 피할 길은 생길 것입니다. 홍해 바다는 열릴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돈 걱정 하지 마시고 예수님 그 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가 당신을 신뢰하겠사오니, 그리고 당신을 따르겠사오니, 그리고 당신의 사람이 되겠사오니, 나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 앞에 나와 주의 말씀을 받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성령님으로 임하시사 우리의 영혼 속에 당신의 능력으로 베풀어주시고 우리가 완전히 주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함께 하시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을 확인합니다. 오 나의 생명이신 주님, 나의 사랑이신 주님, 주님 바라보며 살겠사오니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어려움과 고통이 찾아 와도 그 주님 바라보면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그 분 바라보시고 그 분을 따라가시는 그 기쁨으로 충만한 우리들의 삶이 되도록 하나님 역사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주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린 사랑하는 에스더와 또 이 복된 주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이제 이 말씀 붙들고 살기 위하여 주를 의지하고 다시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성령님의 권능과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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