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보존하라 (창19:12-17)
본문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도성만 보게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여러 곳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중에 가장 인상적으로 우리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사해입니다. 눈에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바다입니다. 넓은 바다지만은 사실은 바다가 아니고 호수입니다. 사해라고 부르는 호수일 뿐입니다. 이 호수는 우리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충격적 교훈을 주는 그런 바다입니다. 이것은 지중해 해면보다 388미터나 낮습니다. 그러니까 바다 표면보다 388미터나 낮은 그런 땅을 이루고 있구요 모름지기 지구 표면 중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비롯해서 많은 강의 물이 흘러 들어갑니다. 그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서 이것을 채우지 못합니다. 다 증발해 버립니다. 그러니까 물이란 흐르기 마련입니다만은 사해로 흘러들어간 물은 다시 흘러나오질 못합니다. 그대로 거기서 증발해 버립니다. 이 무서운 곳입니다. 결국은 이래서 염도가 25%나 되고 보통 바닷물이 짜다고 하지만 그보다 5배나 더 짭니다. 이래서 어떤 생물도 이 사해 바다에서는 살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거기 가서 이렇게 누우면 둥둥 뜹니다. 그만큼 아주 짠물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저기 소금덩어리가 보입니다. 깊은 수렁이죠. 이 사해바다! 이렇게 깊이 파들어간 이 웅덩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는 이곳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있었던 곳입니다. 본래는 풍요하던 곳입니다. 롯이 창세기 13장에 보면은 삼촌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바로 이쪽을 택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그랬어요. 에덴동산같이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풍요한 곳이요, 에굽땅과 같더라. 이것은 농사가 잘된다는 얘깁니다. 에덴동산 같고, 그리고 애굽 땅과 같았던 바로 이 풍요한 도시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것이 저주를 받아서 그대로 팍 꺼져 들어가서 오늘 사해가 되어 우리 눈앞에 산 증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올시다. 오늘도 우리가 영어 쓰는 말 가운데 소도마이트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소돔사람, 소도마이트라고 하는 말은 소돔사람의 죄악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인간, 아주 더러운 타락된 인간을 소도마이트라고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별명지어 말하게 됩니다. 본래는 아름다운 땅이요, 비옥한 곳이요, 화려한 도시였습니다만은 죄로 인하여 멸망되어서 우리 눈앞에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들의 죄를 진멸하실때 반드시 먼저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지 않고 멸망되는 일은 없습니다. 성경에 확실하게 증거 합니다. 이렇게 증거하고, 권면하고, 또 때로는 징계로 전쟁을 통하여, 재난을 통하여, 한발을 통하여, 흉년을 통하여, 질경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고하십니다. 징계하시고, 책망하시고, 훈계하시다가 끝내 듣지 않을 때 완전히 타락해 버리고 말 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마지막 심판을 하십니다. 종말적 심판입니다. 총체적 심판입니다. 그대로 유황불로 내려쳐서 오늘과 같은 사해가 되었다는 얘깁니다. 성경에는 이런 얘기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홍수입니다. 거기에 보면 죄목을 간단하게 한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육체가 되니라. 육체가 됐다. 사람이 동물이 됐다. 동물적 욕망만 있는 육체가 되어버렸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은 다 죽어졌고, 동물적 욕망과 버러지 같은 인간만 꿈틀거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고로 엄격히 말하면 산 사람을 죽이신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쓸어버리신 거예요. 노아의 홍수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건 과학자들의 얘기니깐 그저 그대로 들으시면 됩니다. 산에 올라가 보면요 혹은 그 그렌케니온 같은데 가보면 그 산에 말입니다 조개껍질이 있어요. 그리고 물고기 화석이 있어요. 산 속에 말입니다. 이것을 과학자들은 뭐 몇천 만년 몇억 만년 전에 뭐 여기가 바다였을꺼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만은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는 그렇지가 않아요. 창조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거는 노아의 홍수! 노아홍수로 인하여 확 뒤집어 놓을 때 산위에 물고기 시체가 있는거요. 또 저 북극에 맘모스에 시체가 있단 말이예요. 이것도 노아홍수의 흔적이다. 그렇게 과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어쨌든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어려움이나 어떤 징계가 어떤 고통이 이게 마치 종말적인 것처럼 이 끝나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만은 아닙니다. 이 재난의 시작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전쟁이 있고, 재난이 있고, 기근이 있고, 환란이 있고, 배신이 있겠다. 오히려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건 주님의 말씀입니다. 재난의 끝은 여기에 있습니다. 유황불이 떨어져서 그대로 땅이 깊이 폐해져서 사해 바다가 됩니다. 이것이 재난의 끝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면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이렇게까지 큰 심판을 받게 됐느냐 어떤 죄목이었더냐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sexual city입니다. 도덕적,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경제, 정치, 문화, 분배 뭐 이런 거 가지고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만은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성의 타락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세가지 유혹이 있다. 하나는 육체의 욕망, 끝없는 육체의 욕망, 이것을 밝은 이성으로 재제하지 못하면 그만 인간이 동물화 됩니다. 아주 잔인하고 못된 동물이 됩니다. 동물도 사람 같지 않습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걸핏하면 우리가 못된 사람보고 개 같은 놈 그럽니다만은 개가 그 말 알아들으면 말조심하우 우린 깨끗하우 당신네들이 한심하우 우리 끼린 이렇게 말하우 사람 같은 놈! 한다고. 안그래요. 개만 못하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해요. 어디까지 왔나 또 사람의 욕망 가운데는 잘났다는 교만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억제하지 못하면 양심이 타락합니다. 도덕성이 타락합니다. 또한 졸렬한 이기심이 있습니다. 이기심을 바로잡지 못하면 사회성이 타락합니다. 그 사회가 망합니다. 자 그리고 보면 죄악 중에 가장 무서운 죄악은 그 인간자체, 인간본질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성이 타락하고, 마음이 타락하고, 육체가 타락하고, 욕망이 타락하게 됩니다. 비인간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다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사람이라고 부를 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없어집니다. 여기에 끝이 있는 것이올시다. 이건 경제적인 죄를 말하지만 그거 중요한거 아닙니다. 어느 나라든지 도덕 때문에 죽었고, 그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망했습니다. 인간성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내려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얼마 전에 미국에 여행하면서 책을 몇 권 가지고 갔는데 가며 오며 읽다가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그럴수가 있나 여러분 믿거나 말거나 이건 사실입니다. 소위 소구라파에 지금 흔히 말하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이것을 통계로 내보면요 태어나는 아이가운데 3분의 2가 미혼모로부터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릅니다. 우리말로 말하면 잡것들이라 이거예요. 되는대로 살다가 만들어낸 아이예요. 이것이 3분의 2요. 이 세대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미국의 현실로 말하면은 부모사이에서 곱게 태어나서 아버지 어머니 사랑을 받으면서 결혼식 날까지 자기가 결혼해서 독립될 때까지 무사히 클 수 있는 그런 가정을 가진 아이가 전체 인구 중에 8%입니다 8%. 10%로도 안됩니다. 그러면 이 세대가 어디로 가는 겁니까 요즘의 40%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요새 미혼시대올시다. 불혼시대입니다. 왜요 매이고 싶지 않아서. 그 왜 한 남자 한 여자에게 매여서 그짓 하느냐 되는대로 사는게 얼마나 좋으냐 자 코메치멘트가 없어요. 매이고 싶지가 않아요. 또 자식을 낳아서 키운다는 것 이건 미래를 심는건데 이것, 여기에 투자하고 싶지 않아요. 난 나대로 자유하고 방종하고 싶다. 발광을 하다 보니까 이 세대가 어디로 가는거요. 소돔 고모라보다 나은게 있습니까 소돔 고모라의 극단적인 죄가 바로 그거요. homosex입니다요. 정상적인게 아니고 동성애예요. 또 동물과의 관계 이런 것을 소도마이크라고 합니다. 말하기도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거에요. 사람이 이 모양이 되어 버렸어요. 이렇게 타락하니 역겨워요.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거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정치, 경제문제 가지고 얘기합니다만은 잘살고 못살고 이게 중요한 얘기가 아니요 당신의 인간성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사람된 모습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롯과 그 식구를 구원하시는 구출작전을 하세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구출작전이 있는데 가만히 보면 롯도요 벌써 소돔사람 다 됐어요. 그래서 손님이 왔을 때 손님을 영접하겠다는 마음은 고맙지만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가지고 그 당신의 온 사람들 끌어내라고 우리가 호모섹스 하겠다고 나오잖아요. 관계하겠노라고 대들 때에 여보, 여보 우리 집에 온 사람은 다치지 말아. 우리 집에 결혼하지 아니한 딸 둘이 있는데 얘를 보낼테니까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우리 손님은 다치지 말라고 하는데 손님 보호하겠다고 하는 건 좋지만 딸 내놓는거 보니까 그도 그놈이요. 안그렇습니까 타락했어요. 이걸 잘못으로 생각 못 했드라구요. 잘못이라고 생각도 안해요. 이 정도로 벌써 소도마이트가 된 상태지만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는데 롯에게는 조그마한 의가 있었어요. 그 의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았다는 거요. 그리고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 이거 삼촌으로부터 배운거요. 낯선 손님을 잘 대접하는 바로 그같은 거룩함이 있었어요. 고만큼의 의가 있었고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이 성을 멸하시겠다고 할 때 바로 인정을 했어요.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이 성이 망하지 않을수가 없지. 그러셔야죠. 받아들이고 이 성을 떠나게 됩니다. 고만큼의 의가 있었구요. 좀더 깊이 말씀을 드리면 신학적으로 그는 아브라함의 의가 그에게 임한겁니다.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의인 1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기도 할때 그 마음속에는 롯을 생각한 것이예요. 나도 아는데 하나님이 모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왜 저렇게 간절하게 소돔을 위하자고 하나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아시고 분명히 성경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창세기 19장 29절에 이렇게 말씀하세요. 롯을 구원해 주셨다고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의로 인하여 그는 롯은 의인이 못되지만은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의를 입어서 의롭다함을 얻은 그러한 의인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은 6가지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소돔사람들입니다. 영 회개치 않고 회개할 줄도 모르고 전혀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완전 타락한 인간, 소돔 사람들. 또 그리고 사위들이 있어요. 그 딸들과 정혼한 사인데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이 성을 떠나자 할 때 농담으로 여겼더라 그랬어요. 비웃어 버렸어요. 이 비웃는 사람들 농담으로 여겼지요. 이렇게 오늘도 하나님의 경고와 말씀을 만홀히 여기는 업수이 여기고 비웃는 사람 있죠. 또 다음에는 딸들이 있는데 이 딸들은 믿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자기가 사랑하는 애인보다 아버지를 더 소중히 여겼어요. 아버지 말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서 이렇게 이 소돔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은 간접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볼 수가 있구요. 그 다음에는 롯입니다.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장망성, 이 성은 죄로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인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소돔을 떠난 사람이고 문제는 롯의 처입니다. 롯의 아내는 어떠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나오기는 나왔는데 몸은 나왔고 마음은 거기에 있어요. 아이구 아까운 것! 아이구 그걸 놓고 오다니, 저 아까운 것 꽝! 하고 무너질 때 뒤돌아 보았답니다. 돌아본 순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금기둥이 되어서 오늘도 방문하는 사람마다 소금기둥을 바라보고 저것이 롯이라고 롯의 아내의 모습이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죄인이 아닙니다만은 자기조카 롯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롯을 구출해 낸 중보적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것입니다. 이곳을 떠나서 생명을 보존하라. 이것이 메세지입니다. 생명을 보존하라 자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한동안 남의 것 가지고 살았지만 흥청거리고 살다가 요새 약간 쪼들리니까 억울하고 분하고 섭섭하고 그렇습니까 그럴 것 없어요. 지금은 살아남았다는 것만 가지고도 고맙구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느냐 하는 것만이 남는 문제입니다. 은혜로우냐 못하냐 부끄러우냐 뭐 체면. 다 잊어버리세요. 없어진지가 언젠데. 툭툭 털어버리고 오직 생명을 보존하라. 생명 중심 생명 지향적 가치관으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고통이 둘 있는데 하나가 절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배고픈거죠. 아픈거죠. 병드는거죠. 이건 절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통이 있죠. 배고픔. 그런가 하면 상대적 빈곤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내가 못살아서가 아니예요. 나보다 잘 사는 사람보고 배아파서 걱정이에요. 체면이나 위신이나 이런 것들 이게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고민입니다.
그런데 이제 보세요. 절대적 빈곤이란 육체적이고 동물적 본능의 욕구에서 오는 겁니다만은 자 상대적 빈곤이라는 것은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에서 더 큰 고민을 느낍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예요. 여러분 가끔 그런 경우가 있드만요. 어떤 예쁜 여집사님이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친구들이 내가 병원에 찾아가겠다고 / 오지 말라고 절대 면회 사절 왜 초췌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곧 죽어도 아름다움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나 점점 아파서 죽을 지경이 되면 그때 가서야 오라고 부릅니다. 반갑고. 이제는 예쁘냐 안예쁘냐 남의 구설수에 어떻게 오르냐 그게 중요한게 아니예요. 사느냐 죽느냐만 문제예요. 오직 생명 좀 불편하게 살아도 좋고 장애자로 살아도 좋아요. 문제는 사느냐는 것만이 중요해요. 그런고로 생명위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세가지 불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내 제자가 되려고 할 때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you can not me disciple 절대 내 제자가 될 수가 없다. can not 이렇게 말씀하시고,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십자가를 벗는다는 얘기가 아니요 내 몫의 십자가를 내가 져야해요. 지고 따르는 자라야 한다. 말씀하시고, 또 하나는 모든 소유를 버리고 쫓아야 한다. 소유욕, 물질을 위한 욕심, 이 세상적 욕망, 끊어 버리지 않고는 창조적 역사를 이룰 수 없다는 겁니다. 생명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친히 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모세 처를 생각하라. 모세 아내를 생각하라. 모처럼 소돔 고모라를 떠나거든 마음은 저기에 있었기 때문에, 미련 때문에 정때문에 자꾸만 이것을 끊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었느니라. 여러분, 소중한 이 생명 이것이 문젭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서 이루어 졌던 아성, 그런 고무풍선 같은거 화려했던 일들 다 잊어버리세요. 무너져야 할 것이라면 무너져야 하고, 버려야 할 것이라면 버려야 하고, 꺼져 버려야 할 것이었더라면 꺼져 버렸어야 되지요. 끈어버려야 될 것이었더라면 끈었어야지요. 이제 한가지 복음을 들어야겠습니다. 오늘 롯이 소돔고모라를 떠나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지체합니다. 갈등을 일으킵니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이러고 있을 때에 오늘 성경에 보면 제가 천사라면 그러겠어요. 너는 구제 불능이다하고 내버리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롯과 그 아내와 딸들을 손을 잡아 끌어냈습니다. 강권적으로 그리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를 더하심이라고요. 내가 못하는 것 하게 하시고, 이 더러운 세상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 욕망으로부터 떠나게 하시는 강권적 역사가 이게 복음이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긍휼의 역사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보세요. 절대적 빈곤이란 육체적이고 동물적 본능의 욕구에서 오는 겁니다만은 자 상대적 빈곤이라는 것은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에서 더 큰 고민을 느낍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예요. 여러분 가끔 그런 경우가 있드만요. 어떤 예쁜 여집사님이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친구들이 내가 병원에 찾아가겠다고 / 오지 말라고 절대 면회 사절 왜 초췌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곧 죽어도 아름다움이 중요한 거예요. 그러나 점점 아파서 죽을 지경이 되면 그때 가서야 오라고 부릅니다. 반갑고. 이제는 예쁘냐 안예쁘냐 남의 구설수에 어떻게 오르냐 그게 중요한게 아니예요. 사느냐 죽느냐만 문제예요. 오직 생명 좀 불편하게 살아도 좋고 장애자로 살아도 좋아요. 문제는 사느냐는 것만이 중요해요. 그런고로 생명위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세가지 불가능한 것을 말합니다. 내 제자가 되려고 할 때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you can not me disciple 절대 내 제자가 될 수가 없다. can not 이렇게 말씀하시고,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십자가를 벗는다는 얘기가 아니요 내 몫의 십자가를 내가 져야해요. 지고 따르는 자라야 한다. 말씀하시고, 또 하나는 모든 소유를 버리고 쫓아야 한다. 소유욕, 물질을 위한 욕심, 이 세상적 욕망, 끊어 버리지 않고는 창조적 역사를 이룰 수 없다는 겁니다. 생명을 구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친히 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모세 처를 생각하라. 모세 아내를 생각하라. 모처럼 소돔 고모라를 떠나거든 마음은 저기에 있었기 때문에, 미련 때문에 정때문에 자꾸만 이것을 끊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었느니라. 여러분, 소중한 이 생명 이것이 문젭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서 이루어 졌던 아성, 그런 고무풍선 같은거 화려했던 일들 다 잊어버리세요. 무너져야 할 것이라면 무너져야 하고, 버려야 할 것이라면 버려야 하고, 꺼져 버려야 할 것이었더라면 꺼져 버렸어야 되지요. 끈어버려야 될 것이었더라면 끈었어야지요. 이제 한가지 복음을 들어야겠습니다. 오늘 롯이 소돔고모라를 떠나라 할 때 떠나지 못하고 지체합니다. 갈등을 일으킵니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이러고 있을 때에 오늘 성경에 보면 제가 천사라면 그러겠어요. 너는 구제 불능이다하고 내버리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롯과 그 아내와 딸들을 손을 잡아 끌어냈습니다. 강권적으로 그리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를 더하심이라고요. 내가 못하는 것 하게 하시고, 이 더러운 세상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 욕망으로부터 떠나게 하시는 강권적 역사가 이게 복음이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요. 하나님의 보다 더 큰 긍휼의 역사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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