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갈2:20,고전4:10-12)
본문
어떤 사람이 깊은 산 속에 들어갔다가 산불을 만났습니다. 산불이 멀리서부터 포위해 타들어 오고 있습니다. 꼼짝없이 타죽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살아날 길을 궁리하다가 주머니에 성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가 있는 자리에 불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불탄 그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그 불이 점점 퍼져 나가다가 포위해 들어오던 산불을 만나니까 더 이상 산불이 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탈것이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1.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은 인생의 제일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인데 이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셨습니다. 마치 산불이 포위해 들어올 때 불을 먼저 놓아서 그 안에 들어가서 안전하게 살게 된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대신 죽어 주시고 우리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고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고 죽음이 없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장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려면 죽음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10장3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2. 죽음을 거쳐야 부활이 옵니다.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죽지 않고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도 부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1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을 알아야 하고 2 우리도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죽을 몸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3절 이하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3 과거에 죽은 자 같이 살아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같이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과거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가 지금 부활해서 돌아 온 것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에 갔다온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린도후서12장2절)고 했는데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바울은 죽었다가 산 것처럼 모든 세상 사물이 이전과는 달리 보였습니다. 전에 소중히 보이던 것이 분토와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쉴 틈 없이 복음만 전하다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설 때 세상 것은 도무지 찬양 할 수가 없고, 세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을 수가 있었고, 세상의 압력도 두려움 없이 분쇄할 수가 있었고, 세상의 부귀와 권세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것과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와 같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즉 이 성경책 안에 들어 있는 주보 순서지는 이 성경이 부산에 가면 이 주보도 부산에 가고, 이 성경이 미국에 가면 이 종이도 함께 미국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여기며 순간순간 살아야 합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죽지 않은 옛사람은 아무리 잘 나고 착하고 재주 많고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께는 무가치 한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지 밀러(George Miller)씨는 큰 진리를 깨닫고 말하기를 "나는 어떤 날 죽었습니다. 조지 밀러에 대해서도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송곳으로 찔러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 옛 사람은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 불쾌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칭찬 듣는다고 우쭐하거나 교만 할 것도 없고, 책망이나 비방을 듣는다고 실망하거나 불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같이 한번 입으로 시인합시다. "나는 죽었다." 자기 이름을 넣어서 "0 0 0는 죽었다." 이제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몸인데 칭찬 들으면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 되고, 불쾌한 일이나 근심거리가 있으면 그것도 주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불안해 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장20절)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옛사람이 자꾸 사느냐 하면 TV의 전기 코드가 늘 꼽혀 있지 않고 뽑히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긴장에서 풀리면 옛사람의 성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하시면서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금방 시들고 마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변함이 없지만, 이 새사람의 생활 즉 성화(聖化)된 생활은 순간순간 믿음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성화된 성도라도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라는 믿음의 긴장 속에서 풀어지면 죄악의 옛 성품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는데 "드리라"는 말은 영어로 "yield"로서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3. 내가 많이 죽으면 남을 많이 살립니다. "죽으면 한번 죽는 것이지 많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즉 내가 희생하고 죽어지는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면 그만큼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10-12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고,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한 것은 우리가 많이 죽을수록 다른 사람이 많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이 갈라졌고 그들이 요단강 한복판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에 많은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오자 요단강이 합해져서 아무도 건너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제사장들 즉 교회의 지도자들이 죽음 한 가운데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어 가나안 땅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많이 죽을수록 남을 많이 살릴 수가 있습니다. 영혼구원 사업은 누구의 말대로 생명 놓고 생명을 따먹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면 우선 주의 종들이 희생하고 죽어지는 생활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죽는 일이 없이 사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멋진 설교를 흉내내서 그대로 한다고 해도, 큰 꿈을 가진다고 해도, 진실한 희생과 죽어지는 생활 즉 자기부인(Self Denial)이 없으면 생명을 살리는 역사, 부흥의 역사는 안 일어납니다. 죽음을 거쳐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24절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한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많은 죄인들이 살아나게 될 것을 의미 하지만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 알갱이가 낮은 땅속으로 떨어지기 싫고 습기차고 냄새나는 땅속에 썩어져 죽기 싫어해서 가만히 있으면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는 것이요 많은 생명의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 생명이 살아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탈것이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1.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은 인생의 제일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인데 이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죄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셨습니다. 마치 산불이 포위해 들어올 때 불을 먼저 놓아서 그 안에 들어가서 안전하게 살게 된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대신 죽어 주시고 우리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 주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영생을 얻고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되고 죽음이 없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12장2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려면 죽음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10장3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2. 죽음을 거쳐야 부활이 옵니다.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죽지 않고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우리도 부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1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음을 알아야 하고 2 우리도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죽을 몸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3절 이하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3 과거에 죽은 자 같이 살아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같이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과거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가 지금 부활해서 돌아 온 것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천국에 갔다온 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린도후서12장2절)고 했는데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바울은 죽었다가 산 것처럼 모든 세상 사물이 이전과는 달리 보였습니다. 전에 소중히 보이던 것이 분토와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쉴 틈 없이 복음만 전하다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설 때 세상 것은 도무지 찬양 할 수가 없고, 세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을 수가 있었고, 세상의 압력도 두려움 없이 분쇄할 수가 있었고, 세상의 부귀와 권세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것과 족히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와 같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즉 이 성경책 안에 들어 있는 주보 순서지는 이 성경이 부산에 가면 이 주보도 부산에 가고, 이 성경이 미국에 가면 이 종이도 함께 미국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로 여기며 순간순간 살아야 합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죽지 않은 옛사람은 아무리 잘 나고 착하고 재주 많고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께는 무가치 한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지 밀러(George Miller)씨는 큰 진리를 깨닫고 말하기를 "나는 어떤 날 죽었습니다. 조지 밀러에 대해서도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송곳으로 찔러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 옛 사람은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 불쾌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칭찬 듣는다고 우쭐하거나 교만 할 것도 없고, 책망이나 비방을 듣는다고 실망하거나 불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같이 한번 입으로 시인합시다. "나는 죽었다." 자기 이름을 넣어서 "0 0 0는 죽었다." 이제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몸인데 칭찬 들으면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 되고, 불쾌한 일이나 근심거리가 있으면 그것도 주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불안해 할 것도 없고 실망할 것도 없고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장20절)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옛사람이 자꾸 사느냐 하면 TV의 전기 코드가 늘 꼽혀 있지 않고 뽑히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긴장에서 풀리면 옛사람의 성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하시면서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금방 시들고 마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변함이 없지만, 이 새사람의 생활 즉 성화(聖化)된 생활은 순간순간 믿음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성화된 성도라도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라는 믿음의 긴장 속에서 풀어지면 죄악의 옛 성품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13절에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는데 "드리라"는 말은 영어로 "yield"로서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3. 내가 많이 죽으면 남을 많이 살립니다. "죽으면 한번 죽는 것이지 많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즉 내가 희생하고 죽어지는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면 그만큼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10-12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에 넘기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고,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한 것은 우리가 많이 죽을수록 다른 사람이 많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이 갈라졌고 그들이 요단강 한복판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에 많은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오자 요단강이 합해져서 아무도 건너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제사장들 즉 교회의 지도자들이 죽음 한 가운데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어 가나안 땅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내가 많이 죽을수록 남을 많이 살릴 수가 있습니다. 영혼구원 사업은 누구의 말대로 생명 놓고 생명을 따먹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면 우선 주의 종들이 희생하고 죽어지는 생활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죽는 일이 없이 사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멋진 설교를 흉내내서 그대로 한다고 해도, 큰 꿈을 가진다고 해도, 진실한 희생과 죽어지는 생활 즉 자기부인(Self Denial)이 없으면 생명을 살리는 역사, 부흥의 역사는 안 일어납니다. 죽음을 거쳐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됩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2장24절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한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많은 죄인들이 살아나게 될 것을 의미 하지만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한 알의 밀 알갱이가 낮은 땅속으로 떨어지기 싫고 습기차고 냄새나는 땅속에 썩어져 죽기 싫어해서 가만히 있으면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는 것이요 많은 생명의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 생명이 살아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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