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을 조심하라1 (마7:1-5)
본문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말씀이고 교회나 세상의 지도자들이 아주 좋아하여 자주 인용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판은 아주 나쁜 것이니 아예 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 절대 금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은 아주 위험한 것이니 처음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비판 절대 조심'을 말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비판 자체를 부정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만 가지고 보아도 우리는 충분히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5절의 말씀을 보면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형제의 눈의 티를 덮어 주라'는 말씀으로 끝이 나지 않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어 주라'는 말씀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판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무조건 '비판 금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 내재하고 있는 위험 중에 가장 큰 위험 중에 하나가 저는 바로 이와 같은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잘못 사용하고 있는 위험한 말 중에 '은혜스럽게 합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스럽게 하자'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그것이 '적당히 대충대충 넘어가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토론 없이 반대의견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모든 일을 원안대로 받아주고 넘어가는 것을 우리는'은혜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에서 브레이크를 떼어낸 것과 같아서 달릴 때는 좋으나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수 없어서 결국은 충돌하고 파멸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사이에는 당회와 제직회를 몇 분 안에 끝내는가를 가지고 자신의 목회능력을 과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능력 있는 목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우리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장일치'입니다. 은혜스러운 교회와 당회가 되기 위하여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로 하려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결정을 100%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북한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무슨 결정을 할 때 수 백 수 천명의 의원들이 신분증 같은 것을 들어서 찬성을 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꿈꾸고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와 같은 식으로 교회를 목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목회하고 있는 유능한 목회자와 교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는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라'(삼상 15:22)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비판이 없는 사회와 교회는 위험한 집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비교적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항상 그가 옳을 수는 없습니다. 악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선한 의도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그가 보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건전한 비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나 사회가 건강해 질 수 있고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을 때 선지자 나단은 통렬하게 다윗의 범죄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늘 컴플랙스를 가지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나단의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과연 나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단과 같이 생명을 걸고 인간으로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 앞에서 그와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단은 참으로 훌륭한 선지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단보다 더 훌륭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나단의 비판을 받아들인 다윗입니다. 나단이 다윗 왕의 실수와 잘못을 비판하였을 때 다윗은 즉시 나단의 비판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한 사무엘하 12장 13절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어떠한 말보다 훌륭한 말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갈 때 사울의 집안 사람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을 따르던 부하들이 저를 죽이려 하였을 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 16:10) 나단 선지자와 같은 바르고 용기 있는 비판이 아닌 사적인 감정으로 저주를 하는 시므이의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책망을 들으려고 하였던 다윗은 정말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들을 줄 알았던 세상의 다른 왕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는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었고 자기를 저주하는 말속에 혹시 하나님의 책망이 있지 않은가를 살필 줄 아는 아주 훌륭한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자기를 비판하는 말을 들을 줄 알았던 능력과 인격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우리에게 쉽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와 같은 능력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욕심을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을 때 세례요한은 용기 있게 왕 앞에 나서서 그 일을 비판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 나단이 왕에게 직언을 한 것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세례요한을 신약 시대의 나단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나단과 같았는데 불행히도 헤롯은 다윗과 같지 못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세례요한의 목을 벱니다. 그리고 끝내 회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보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충신의 아내를 취한 다윗의 행동이 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헤롯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헤롯과 다윗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차이가 어디에서부터 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저는 다음 주일에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핵심인 '비판을 조심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비판을 조심하라는 말씀에 우선하여 비판을 금지하지 말라는 내용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비판이 죽으면 교회가 죽습니다. 사회가 죽습니다. 나라가 죽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어떤 분으로부터 요즘 우리나라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가들과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한 왕조가 500년과 1000년의 역사를 이어간 일이 쉽지 않은데 우리 한국은 보면 보통 500년과 1000년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치가 세계의 그 어느 나라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어느 나라 보다 뛰어나게 민주적이었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 한국에는 감히 왕 앞에서도 목을 걸고 '아니되옵니다'를 말할 수 있는 충신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들이 대부분 그와 같은 충신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왕조를 500년에서 1000년 동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판하기는 좋아하나 비판 듣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나 여러분들도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 남의 비판을 받을 줄 아는 것을 먼저 배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라'는 말씀을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이전에 먼저 남의 비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으로 해석하여도 크게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선과 외식입니다. 예수님도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싫어하셔서 저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죄인 인줄을 아는 세리는 오히려 인정하시지만 속에 있는 자기의 죄를 은폐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은 인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위선자와 외식 하는자가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남의 비판은 들을 줄 모르고 남을 비판하기만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5 절에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남의 비판을 들지 못하고 남을 비판하게만 되면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결국 외식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비판하기 이전에 먼저 남의 비판을 받을 줄 아는 사람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노력하고 연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비판에 대한 말씀이 끝나자마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기도의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연한 배치가 아니라는 생각을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비판하는 것보다 비판을 듣는 것을 더 잘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신 직후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니 하나님께 그것을 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그 동안 동안교회를 목회하면서 나름대로 교회를 민주화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권력이 어떤 한 사람에게나 기관에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습니다. 교회가 어떤 한 기관이나 한 두 사람에 의하여 일사천리로 은혜스럽게 진행되어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제도를 바꾸고 개혁하느라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10 년 동안 목회를 해 오던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떠나게 되면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기는 교회를 민주화하여야 한다는 이 정신만은 바뀌어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교회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은혜스럽게 달리기만 잘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교인들은 건전한 비판을 잘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그리고 교회의 어른과 지도자들은 그 어느 교회의 어른과 지도자들보다 교인들의 비판을 잘 받아 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달릴 때 달릴 줄 알고 설 때 설 줄 아는 건강하고도 안전한 교회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무조건 '비판 금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 내재하고 있는 위험 중에 가장 큰 위험 중에 하나가 저는 바로 이와 같은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잘못 사용하고 있는 위험한 말 중에 '은혜스럽게 합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스럽게 하자'는 말은 좋은 말이지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그것이 '적당히 대충대충 넘어가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토론 없이 반대의견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모든 일을 원안대로 받아주고 넘어가는 것을 우리는'은혜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동차에서 브레이크를 떼어낸 것과 같아서 달릴 때는 좋으나 멈추어야 할 때 멈출 수 없어서 결국은 충돌하고 파멸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사이에는 당회와 제직회를 몇 분 안에 끝내는가를 가지고 자신의 목회능력을 과시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능력 있는 목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우리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잘못된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장일치'입니다. 은혜스러운 교회와 당회가 되기 위하여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로 하려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결정을 100%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나라를 알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북한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보면 무슨 결정을 할 때 수 백 수 천명의 의원들이 신분증 같은 것을 들어서 찬성을 표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것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꿈꾸고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그와 같은 식으로 교회를 목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목회하고 있는 유능한 목회자와 교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는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라'(삼상 15:22)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비판이 없는 사회와 교회는 위험한 집단입니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비교적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항상 그가 옳을 수는 없습니다. 악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선한 의도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그가 보지 못하는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건전한 비판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나 사회가 건강해 질 수 있고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였을 때 선지자 나단은 통렬하게 다윗의 범죄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습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늘 컴플랙스를 가지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나단의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과연 나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나단과 같이 생명을 걸고 인간으로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왕 앞에서 그와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단은 참으로 훌륭한 선지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단보다 더 훌륭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나단의 비판을 받아들인 다윗입니다. 나단이 다윗 왕의 실수와 잘못을 비판하였을 때 다윗은 즉시 나단의 비판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한 사무엘하 12장 13절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어떠한 말보다 훌륭한 말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난을 갈 때 사울의 집안 사람인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을 따르던 부하들이 저를 죽이려 하였을 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 16:10) 나단 선지자와 같은 바르고 용기 있는 비판이 아닌 사적인 감정으로 저주를 하는 시므이의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책망을 들으려고 하였던 다윗은 정말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만 들을 줄 알았던 세상의 다른 왕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는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었고 자기를 저주하는 말속에 혹시 하나님의 책망이 있지 않은가를 살필 줄 아는 아주 훌륭한 인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자기를 비판하는 말을 들을 줄 알았던 능력과 인격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우리에게 쉽지 않는 능력입니다. 그와 같은 능력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욕심을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하였을 때 세례요한은 용기 있게 왕 앞에 나서서 그 일을 비판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 나단이 왕에게 직언을 한 것과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세례요한을 신약 시대의 나단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나단과 같았는데 불행히도 헤롯은 다윗과 같지 못했습니다. 결국 헤롯은 세례요한의 목을 벱니다. 그리고 끝내 회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보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충신의 아내를 취한 다윗의 행동이 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헤롯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헤롯과 다윗은 비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차이가 어디에서부터 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저는 다음 주일에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핵심인 '비판을 조심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비판을 조심하라는 말씀에 우선하여 비판을 금지하지 말라는 내용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비판이 죽으면 교회가 죽습니다. 사회가 죽습니다. 나라가 죽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어떤 분으로부터 요즘 우리나라의 역사가 세계의 역사가들과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어느 나라의 역사를 보아도 한 왕조가 500년과 1000년의 역사를 이어간 일이 쉽지 않은데 우리 한국은 보면 보통 500년과 1000년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정치가 세계의 그 어느 나라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어느 나라 보다 뛰어나게 민주적이었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 한국에는 감히 왕 앞에서도 목을 걸고 '아니되옵니다'를 말할 수 있는 충신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들이 대부분 그와 같은 충신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왕조를 500년에서 1000년 동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판하기는 좋아하나 비판 듣기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나 여러분들도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남을 비판하는 것보다 남의 비판을 받을 줄 아는 것을 먼저 배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부터 빼라'는 말씀을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이전에 먼저 남의 비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으로 해석하여도 크게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선과 외식입니다. 예수님도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싫어하셔서 저들을 향하여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죄인 인줄을 아는 세리는 오히려 인정하시지만 속에 있는 자기의 죄를 은폐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은 인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위선자와 외식 하는자가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남의 비판은 들을 줄 모르고 남을 비판하기만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5 절에서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남의 비판을 들지 못하고 남을 비판하게만 되면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결국 외식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비판하기 이전에 먼저 남의 비판을 받을 줄 아는 사람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노력하고 연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비판에 대한 말씀이 끝나자마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기도의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연한 배치가 아니라는 생각을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비판하는 것보다 비판을 듣는 것을 더 잘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신 직후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은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니 하나님께 그것을 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그 동안 동안교회를 목회하면서 나름대로 교회를 민주화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권력이 어떤 한 사람에게나 기관에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습니다. 교회가 어떤 한 기관이나 한 두 사람에 의하여 일사천리로 은혜스럽게 진행되어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제도를 바꾸고 개혁하느라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제 저는 10 년 동안 목회를 해 오던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떠나게 되면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기는 교회를 민주화하여야 한다는 이 정신만은 바뀌어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교회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은혜스럽게 달리기만 잘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교인들은 건전한 비판을 잘 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그리고 교회의 어른과 지도자들은 그 어느 교회의 어른과 지도자들보다 교인들의 비판을 잘 받아 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달릴 때 달릴 줄 알고 설 때 설 줄 아는 건강하고도 안전한 교회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