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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조심하라2 (마7:1-5)

본문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비판에 대한 말씀을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은 비판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고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비판을 하되 조심하여 바르게 잘 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바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본문 말씀은 무조건 형제의 눈의 티도 건드리지 말고 덮어두고 자신의 눈의 들보도 아무도 모르게 숨겨 두라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눈의 티도 빼어주고 자신의 눈의 들보도 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는 것과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는 것을 비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목적은 무조건적인 비판의 금지가 아닌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비판이 죽은 세상과 사회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괴물과 같은 세상과 사회가 될 것입니다. 비판이 없는 세상은 겉은 평화스러운 것 같고 안정된 것 같지만 속은 다 썩어서 소생의 희망이 없는 세상과 같을 것입니다. 수술하는 것이 무섭다고 곪아서 썩어가고 있는 부분을 그냥 덮어두고만 있으면 사람이 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아무리 수술하는 것이 잔인하고 무서워 보여도 그리고 수술을 받는 것이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하여도 수술을 받아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와 세상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잘 된 수술과 같은 비판이 살아있는 교회와 세상이 될 수 있기를 위하여 늘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바른 비판이 살아있는 세상을 포기하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에 대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하고 노력하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비판은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비판을 잘 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환자를 살린답시고 메스를 들었지만 수술 다시 말해서 비판의 능력과 스킬이 부족하여 결국은 환자를 죽이고 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수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술하여 환자를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비판자들의 경우 비판의 목적이 비판 그 자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환자가 사느냐 죽느냐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환자를 살리기 위하여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죽이고 매장하기 위하여 비판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많습니다. 그런 경우는 엄밀히 이야기하여 비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비난입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경우에도 수술하는 실력이 부족하여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비판하려고 할 때 과연 자신이 이 비판을 감당할만한 실력과 능력이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능력이 부족하면 아무리 환자가 급해 보여도 함부로 메스에 손을 대어서는 안됩니다. 미숙한 의사는 수술을 통하여 환자를 살리기보다 수술을 통하여 환자를 더 빨리 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비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의사들이 수술용 메스를 들고 환자를 수술하기 위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분량의 공부와 훈련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바른 비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공부와 노력과 훈련 그리고 기도가 필요한지 모릅니다. 실력과 자격이 미비한 사람의 수술은 수술 그 자체가 살인행위가 되듯이 비판에 대한 실력과 인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비판 행위는 마치 살인행위와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병원은 수술로 인하여 죽는 사람보다 사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과 교회는 비판으로 인하여 사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수술거부, 다시 비판을 받을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수술을 거부하여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에 못지 않게 서툰 비판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받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수술을 잘하는 명의와 같은 비판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려내는 명의와 같은 비판자가 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사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술을 잘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건져내는 명의 같은 좋은 비판자가 되려면 먼저 비판의 위험성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 비판의 위험성을 피하고 극복하여야만 좋은 비판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비판의 위험성을 극복하고 생명을 살리는 좋은 비판자가 되기 위하여 과연 어떤 비판이 위험한 비판인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위험한 비판이란 첫째, 정확하지 못한 엉뚱한 비판입니다. 요즘은 많이 의학이 발달하여 암에 걸린 사람들을 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많이 그리고 잘 살려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암은 그렇게 치료가 쉬운 병이 아닙니다. 암에 걸려 암을 치료하는 환자들을 보면 엄청난 고통을 격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 함암제 치료를 받는데 이제까지 항암제의 문제는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세포도 함께 죽인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에는 아직도 그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이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비판의 문제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비판자들이 비판이 서툴기 때문에 정확하게 잘못된 부분만 수술하지 못하고 엉뚱한데 까지 비판하고 수술하다가 비판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비판자가 되려면 비판의 내용과 대상을 정확하게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약 15년 전에 당시로서 만도 5천만명의 독자를 가지고 있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더스다이제스트라는 잡지에 우리나라 기업인 한 분이 취재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번을 사양하다가 결국 취재에 응하게 되었는데 정작 기사는 8개월이 지난 후에야 실렸습니다. 그 이유는 기자가 취재한 내용이 사실인가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기자가 그 8개월 동안에 기사의 주인공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을 방문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마음이 숙연해 졌습니다. 기사 하나도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기사를 쓰기 위하여 그토록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서 확인을 하는 그 정신 때문에 그 잡지가 그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가 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비판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리더스다이제스트의 기자와 같이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는 신중함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비판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비판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들도 수술을 하기 이 전에 정확한 수술을 하기 위하여 수도 없이 많은 검사들을 합니다. 엑스레이 촬영도 하고 컴퓨터 단층 촬영도 하고 그밖에 수 없이 많은 검사들을 통하여 할 수 있는 대로 환자의 병과 환부를 정확히 알고 수술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우리 많은 비판자들은 대개가 그와 같은 과정을 생략합니다. 즉흥적으로 그리고 다분히 감정적으로 문제를 받아들이고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인도 하기 전에 섣부른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좋은 비판을 하려면 먼저 자신이 비판하려고 하는 내용에 대한 신중한 확인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정확한 비판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실력 없는 사람의 비판입니다. 의사가 메스를 들고 환자를 수술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훈련이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수술을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도 화급을 다투는 약한 환자들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수술 그 자체가 살인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수술을 위하여 끊임없이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수술의 능력을 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은 1904년 생 이셨습니다. 생존해 계셨다면 올해 만 97세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옛날 어른이셨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젊으셨을 때 맹장 수술을 받으신 적이 있으신데 그때는 맹장 수술을 받고도 죽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님도 맹장 수술을 받으시고 사경을 헤메시다가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수술 자국도 10cm가 퍽 넘었습니다. 지금은 맹장 수술은 수술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며 수술 자국도 불과 몇 cm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에는 맹장 수술도 잘 못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심장이나 신장 그리고 간까지 이식하는 엄청난 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그 동안 의사들이 끊임없이 공부하고 훈련하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수술을 공부하고 훈련하여야 하듯 비판은 공부하고 훈련하여야 합니다. 피나는 훈련과 공부를 통하여 비판을 연습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비판을 하여야만 합니다.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만 알고 무조건 그리고 아무나 수술용 메스를 들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의 문제가 무엇인가만 알고, 그리고 그것을 수술해야만 한다는 것만 알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비판하고 수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과 상식이 없는 사람이 열정만 가지고 메스를 들고 수술을 한다면 그 수술 즉 그 비판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의사들이 환자를 수술하는 모습을 보면 눈에 현미경과 같이 배율이 높은 렌즈를 끼고 환자를 수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술하는 도중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들을 피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판할 때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은 수술용 메스와 같습니다. 그것의 사용법을 잘 알지 못하면 그리고 정확하게 그것을 사용하는 훈련을 하지 못하면 그 메스로 엉뚱한 부분을 자르게 될 것입니다. 저도 늘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만은 뜻밖에 많은 비판자들이 자기들이 쓰는 용어와 문장이 상대방에게 어떤 효과와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하고 수술을 함부로 하다가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악화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그와 같은 일에 대한 책임이 비판자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비판자가 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비판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글 쓰는 법과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심리를 배워야 합니다. 자기가 쓰는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그 말이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를 충분히 공부하고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비판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셋째, 예의 없는 사람의 무례한 비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의사들이 아주 섬세한 수술을 하기 위하여 현미경과 같은 렌즈를 끼고 수술을 합니다. 정확하게 자를 것만 자르고 잘라서는 안 될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러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수술시 잘라서는 안 되는 부분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잘못 건드리면 수술이 실패로 돌아가는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비판할 때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우리가 수술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와 판단 그리고 그 행위와 판단으로 말미암은 사건입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잘못하여 그 사람의 인격을 건드리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그 비판은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대부분의 훈계와 비판이 실패로 돌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바른 말을 해 주어도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요즘 아이들은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며 아이들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닙니다. 많은 경우 부모의 바른 말이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부모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의 인격과 자존심을 건들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무례합니다. 부모에게 무례한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헐씬 더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무례합니다. 그래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훈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우리 부모들에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언제 가장 부모에게 대하여 노여워합니까. 그것은 부모들이 부지중에 자녀들의 무례하여 자녀들의 인격과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경우 비판이 비난이 됩니다. 물론 정당한 비판을 비난으로 듣는 사람도 많지만 비난을 하면서도 그리하여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 그리고 정당한 권위를 함부로 훼손하면서도 그것이 비난인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럴 경우 그런 비판은 절대로 좋은 비판이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의 후임으로 아볼로라는 사람이 부임하였습니다. 학식이 많은 아주 훌륭한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예수님의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 부부이었습니다. 저들은 아볼로의 설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들 부부는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아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에 대하여 일러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학문이 없는 노동자 부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던 아굴라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생각한 비판을 받을 줄 아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겸손한 비판 자세입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볼로의 설교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자신들이 사람들이 보는 것과 같이 그렇게 무식하지 않다는 것을 얼마든지 과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판에 실패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비판을 통한 자기 과시를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런 유치한 마음으로 비판을 하였다면 아볼로의 인격과 권위에 흠이 갔을 것이고 저들의 비판은 성공하기 어려웠을는지도 모릅니다. 좋은 비판을 하려면 먼저 자기 부인이 있어야만 합니다. 겸손해야만 합니다. 신중해야만 합니다. 예의가 있어야만 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상대방의 권위와 인격에 손상이 가지 않게 하려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비판이 좋은 비판입니다. 그런 비판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다윗과 같이 그리고 오늘 설교 중에 나온 아볼로와 같이 비판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정당한 비판을 무조건 비난으로만 받아들여 헤롯처럼 비판자의 입을 막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비판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른 비판을 할 줄 아는 좋은 비판자가 되기를 위하여서도 공부하고 노력하고 훈련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의 건전하고 바른 그리고 예리한 비판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그것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판력을 가지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엄밀히 말해서 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비판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비판의 전문의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공부해야 하고 훈련을 받아야 하고 그리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공부와 훈련과 기도를 통하여 비판을 받을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바른 비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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