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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촛점 2 (마22:34-40)

본문

제가 이 본문을 목회 25년 하는 동안 딱 한번, 1982년에 설교했습니다. 그간 낮이고 밤이고 새벽기도, 수요 기도회, 주일 설교, 부흥회 등 곳곳에서 무수히 많은 설교를 했었는데 이 본문을 가지고는 딱 한번 설교한 것을 알고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설교했을까 궁금해서 나름대로 추적해보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모두 피해서 설교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17년만에 다시 이 본문을 설교합니다. 설교자도 피하고 싶은 본문이요, 듣는 사람도 부끄럽게 만드는 본문이요, 우리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이 본문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장 큰 명령 앞에 서봅니다.  예수 믿는 축복들 왜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확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44-45)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달라진 축복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내 모든 죄가 동이 서에서 멀리 옮겨진 속죄의 은총을 내 것으로 소유했습니다. 내가 지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벌이 처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습니다. 대 심판정에서 무죄라고 선고 되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누명을 벗은 것이 아니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내 대신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가 무죄라는 선고를 선언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을 때 누리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 믿으면 우리가 물질적인 축복도 좀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 지도를 그려놓고 예수 믿는 지역과 믿지 않는 지역을 나눠서 색칠해보고 그들의 사는 형편을 비교해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스리랑카에 있던 어떤 학자를 비행기 안에서 만났는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스리랑카는 불교에서 구원받지 못하는 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 인도의 캘커타의 도로를 지나면서 그 비참함을 보고 "하나님, 세상이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하고 한숨이 나오는데, 저들이 힌두교를 신봉하는 한 다른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모슬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종교라는 계율이 이처럼 사람을 속박할 수 있는가'에 놀랍니다. 다들 어렵게 삽니다.
그런데 기독교 국가만 유독 그래도 인권이 있고 살만큼 삽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기독교 국가를 자세히 살피면 그래도 선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요즘 6.25 전쟁 때 이 땅에 있었던 잔혹상들이 다시 조명되는데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소련의 잔혹상이 아직 안 드러나고 있습니다. 중국의 잔혹상 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베트남의 잔혹상도 모두 감춰져 있습니다. 잔혹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사회는 그래도 살만한 사회입니다. 터키의 어떤 신문기자가 우리 나라 전직 대통령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 이런 칼럼을 썼더라구요. "참으로 부럽다. 참으로 부럽다." 우리들은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는데, 대통령 감옥 가는 것을 이렇게 부러워하는 나라들이 얼마든지 있더라구요. 정말 예수 안에서 가지는 자유와 풍요, 이것들은 우리가 예수 믿었기 때문에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 보다 훨씬 더 건강하게 산다는 통계는 의학의 정설입니다. 예수 믿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 근본적으로 가지게 된 축복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영접하는 자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녀되는 특권을 주셨건만 우리는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확인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사랑해 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 분 닮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의 자녀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생식 능력이 없는 남자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닮은 것 없으니까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보다가 마지막에 발가락이 닮았다고 강변하는 것, 이것이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는 소설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의 DNA가 흐르는 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 속에 드러나야 됩니다. 그 중 가장 크게 드러나야 될 특성은 사랑입니다.  이웃사랑, 하나님의 자녀에게 맡겨진 책임입니다. 두 번째로 이런 놀라운 특권을 주셨는데 특권은 언제나 책임을 수반합니다. 언제나 책임을 붙잡고 삽니다. 요한 일서 4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되리라"(요 13:35)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그 신분에 걸 맞는 책임을 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삶 전체로 누렸던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 너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계명을 붙잡고 일제시대에 감옥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 분을 죽이기 위해서 1945년 8월 이십 몇 일날 사형 집행을 하려고 했는데 바로 8월 15일에 해방되어서 그 분이 목숨을 부지하고 나왔습니다. 서울의 큰 교회, 부산의 큰 교회에서 그 분을 모셔 가려고 교회 교회마다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 어른은 "나는 내 형제들에게 가야됩니다." 하시면서 여수의 애양원, 나병환자 촌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때마침 그 분이 타지로 부흥회 가있는 동안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반란 사건이 끝난 다음 집에 돌아와 보니까 사랑하는 아들 동인이, 동신이가 무참하게 죽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부모로서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 고생하다가 믿음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다음 주일날 그 분이 설교했던 설교 내용은 "하나님께 감사하라"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간증하기를 "저는 우리 집에서 순교자 하나가 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밤이고 낮이고 기도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해서 일본 관원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순교의 제물로 받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 집에 순교자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허락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열 가지 감사의 제목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으로 그 설교를 맺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자기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라는 아들 친구를 붙잡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자 딸에게 명령합니다. "동희야, 지금 가서 그 친구를 우리 가족이 용서한다고 서명하고 구명운동해라." 그러니까 그 딸이 아버지에게 대들면서 "아버지, 어찌해서 아버지는 별난 예수를 믿습니까 다른 사람은 예수 믿어도 감옥에 안 갑디다. 다른 사람은 예수 믿어도 나병 환자촌에 가서 일 안 합니다. 아니 내 사랑하는 오빠들을 죽였는데, 왜 그 살인자를 또 왜 용서해야 됩니까 내게 아무 말 하지 마세요." 외쳐댑니다. 그래서 그 분이 직접 구명운동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잘 들어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우상에게 절하지 않기 위해 8년 동안이나 감옥 속에서 그처럼 매맞고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했는데, 그 명령은 순종해놓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는 주님의 또 다른 명령을 불순종 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 순종했던 것은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그 말을 들은 그 딸이 "나는 아버지 믿는 하나님 안 믿겠습니다."라고 선언을 하고 실제로 오랫동안 신앙생활 안 했습니다. 그렇지만 손양원 목사님은 하나님 자녀에게 주시는 특권이 무엇이며, 그 책임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셨기에 끝까지 붙잡고 믿음으로 사시다가 6.25때 순교 하셨습니다. 순교장에 끌려 가면서도 그를 끌고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들, 구원받아야 산다"고 계속 전도하니까 인민군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입을 때려서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분은 손짓으로 예수 믿어야 된다고 했고 인민군들이 대검으로 내리쳐 팔이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사랑을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기독교 100년사에 이 어른 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한경직 목사님도 여기에 절대로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삶을 사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른이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신분에 걸맞는 삶을 향해 달려 가셨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손양원 목사님 좋다는 이야기도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 가슴아픈 것은 한경직 목사님을 칭찬하면서 이 분이 자식에게 교회 물려주지 않은 것을 칭찬 하더라구요. 한국 교회가 이만큼 타락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웃사랑, 우리의 행복을 위함입니다. 그런가하면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반드시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감격이 있습니다. 뭉클거리는 감격을 언제 누려 보았습니까 왜 지금 여러분의 감격이 식었습니까 사랑이 함께 식어있지 않습니까 사랑 없이 사는 삶은 죽지 못해서 사는 생존에 불과합니다. 계속 반복되는 생존일 뿐입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는 사람들, 자기의 좋은 조건을 다 뺏기는데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순교대로 올라서는 순교자들에게 왜 두려움이 없는 줄 아세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두려움은 물러나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화가 임합니다. 그런가하면 사랑하면 보람이 생깁니다. 세계 고통받는 난민지역을 나름대로는 꽤 열심히 다녀봅니다. 고베 지진 현장에도 학생들 300여 명 인솔해서 같이 가서 살펴보았고 터키에 지진이 난 후에도 가서 돌아다녀 보고 베트남, 캄보디아 난민촌도 돌아보고 이곳 저곳 고통스러운 현장을 돌아보는데 가는 곳마다 아무 보상도 없이 나와서 수고하는 젊은 청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청년들이 10명 중 9명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어디가도 그렇습니다. 공식 같습니다. 같이 굶고 어떤 때는 같이 말라리아에 걸려서 신음해도 뿌듯한 보람을 갖더라구요. 사랑하면 놀라운 보람이 생깁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랑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제 친구 목사 중에 강아지 좋아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15만원 짜리 강아지를 키웠는데 어느 날 병들었습니다. 동물병원에 가니까 300만원 들어야 낫겠다고 수의사가 말합니다. 그러면서 고치지 말고 한 마리 다시 사라고 덧붙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 말이 "3천만 원 들어도 좋으니까 고쳐 주시오." 사랑이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멋지게 키워서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 자식이 만일 내 자식 아니었다면 정말 그 놈들 꼴을 봐 줄수 있을까'
그런데 못나고 내게 고통을 줘도 사랑이 중단이 안됩니다. 도무지 사랑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는 기도하다가 "하나님, 내 생명이 필요하면 내 목숨 가져가 주시고 내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 사랑이 주는 부요를 몰랐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John D. 록펠러(Rockefeller)입니다. 이 분은 50세 되었을 때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체는 너무 늙어서 머리는 다 빠지고 70, 80된 할아버지처럼 시력은 나빠지고 그 많은 돈을 가지고도 우유 한 컵을 하루 종일 다 못 먹고 토스트 반쪽밖에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의사들이 이제 더 이상 생명을 지탱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각 언론사들은 그 분의 사망 기사와 프로필 등 원고를 다 만들어놓고 윤전기에 걸어놓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신체검사를 위해서 휠체어를 타고 병실에서 이동하는데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서 보니까 병원 로비에 큰 글자가 가물가물 거리며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글은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되도다"였습니다. 그 문장, 그가 알았던 문장입니다. 경건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집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와 세 가지를 약속했다고 합니다. "
첫째로 너는 언제든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 해라.
둘째로 문제가 생기면 너는 항상 목사편이 되어라."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목사의 말이 서로 다르다면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됩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 몹시 비겁합니다. 이것은 제가 시비를 걸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영적으로 유치했을 때 목사는 바른 말 하는데 그 말이 이해가 안될 것을 생각해서 어머니가 그렇게 지침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자란 사람은 하나님 말씀과 목사 말이 다르면 하나님 말씀, 성경 말씀을 좇아야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틀렸으면 틀렸다고 언제든지 이야기해주세요.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하여튼 어머님과 그렇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분은 평생 목사 말을 안 어겼대요. 그리고 "
셋째로 너는 어떤 때든지 십일조 해라."였습니다. 나중에 쓴 그의 기록을 보면 돈이 많아지고 이익이 너무 커지니까 십일조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답니다. 그렇지만 어머님과의 약속을 평생 저버리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는 십일조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들을 그가 지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지기 시작하자 깊이 묵상합니다. 검사를 맡고 돌아오는데 다투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만히 들어보니까 누가 입원비를 못 내서 입원을 시켜 달라, 안된다 실갱이 하는 소리였습니다. 우는 소리 들립니다. 그래서 비서에게 얼른 가서 돈을 지불해 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시켰습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한 그 소녀 이야기를 듣고 계속 관심을 가졌는데 그 소녀가 죽을 병에서 살아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쓴 기록을 보면 "나는 그 때 내 평생에 이처럼 넘치는 기쁨의 삶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는 돌아 다니면서 자신이 도와줄 사람들이 없는가를 살피게 되었고 그러면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93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애는 둘로 나누어야 된다. 쓸모 없는 삶을 살았던 50년의 생애와 나머지 가치 있게 살았던 43년의 삶이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서 그는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서 세계 어려운 곳곳을 계속 지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북한 농업구조 개선을 위한 기구에도 록펠러 재단이 계속해서 은밀히 돕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 속에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집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하면 가치를 생성해 냅니다. 사랑하면 보람이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이웃 사랑, 심판의 잣대가 됩니다. 그런가하면 마지막으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내 인생이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학 지식이 있느냐에 우리 하나님은 관심 없습니다. 얼마나 크고 위대한 일 했느냐고요 주님 앞에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누구도 없습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 무슨 큰 일이 있습니까 선하신 하나님 앞에 어떤 착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구요 천국에 입성하는 날, 우리 지혜가 얼마나 누추한 것인가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 크신 지혜의 원천인 하나님 앞에서 그것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 내겠느냐구요
그런데 너무 중요한 것은 선생님이 시험에 난다고 예고하지 않습니까 선지자와 모든 율법에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지막에 설 때 바로 이것 가지고 심판 받는다고 예고하시는 우리 주님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대로 심판하셨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신학지식이 대단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개인 경건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경건의 기초가 사랑이 아니라 미움이었습니다. 멸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손을 하늘에 쳐들고 기도하기를 "오! 아버지여, 나를 저 세리와 창기와 같지 않게 한 것을 감사하나이다." 남을 멸시하고 미워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저들은 선을 행했고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주님은 "독사의 새끼들아, 회칠한 담이여!"라고 사랑으로 하지 않은 것을 심판하셨습니다. 공산주의는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졌습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초가 미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계속 고발해야 됩니다. 그리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투쟁하자. 싸우자."입니다. 미워하자는 말입니다. 미움은 더 큰 미운 마음을 낳지, 선을 낳는 법이 없습니다. 부메랑 같습니다. 사랑을 던지면 사랑이 돌아옵니다. 미움을 던지면 미움이 돌아옵니다. 여러분, 사랑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실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굴 미워하고 멸시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는 사랑의 잣대로 인생을 심판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랑했다는 것 외에 없습니다.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의 원리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가 오늘은 짧게 몇 가지 원리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 세계를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결점 있고, 내 맘에 들지 않는 구체적인 인격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참 모호한 민족입니다. 이 민족을 불타게 사랑했던 386세대 국회의원들이 구체적인 일에 실패해서 지금 얼굴을 싸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계 인류는 사랑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아이들을 입양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에 아이들을 팔아먹는 나라 1위라는 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워낙 인구 많은 중국이 1위를 추월합니다만 한국이 최근까지 1위였어요. 그러니까 옆에 가까이 있는 우리 아이는 사랑 못하고 온 세계를 사랑한다고 떠듭니다. 그렇게 세계 박애를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소리입니다. 거기는 사랑이 자랄 틈이 없습니다. 사랑은 인격 대 인격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로 상대방 중심의 관심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제 개인 고백을 하겠습니다. 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우리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좋은 일 하니까 내가 참는 것이 당연해."하며 불만을 누르고 살았습니다. 또 저로서는 미안하니까 아이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나름대로 도우려고 해보았습니다. 제 아이하고 언제 만나서 이야기 하는데 제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내가 너무 외로울 때, 그리고 마음이 찢어지게 아플 그 때 곁에 있어주지 않은 것이 사랑인가요 나는 목마르다고 그러는데, 여기 맛있는 영양가 있는 카스테라 있다고 입에 밀어 넣어 준 것이 사랑인가요" 그 말을 하면서 통곡하던 제 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제가 제 관심이 그 아이 중심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도 내 위주의 사랑이고 내 요구의 사랑이고 내 편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아닙니다. 막연하게 사랑한다는 감정이었지, 실제가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로 있는 대로 받아주어야 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는데서 시작됩니다. 내 요구에 딱 맞는 것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한없이 받아줌입니다. 네 번째로 사랑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랑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고린도전서 13장을 본문으로 가지고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섯 번째로 사랑은 구체적인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상일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로 믿음으로 사랑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의 흉내를 다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딱 한가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수 1:3) 그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서 진군하는데 앞에 범람하는 요단강을 만났습니다. 요단강은 오늘날 한탄강처럼 보통 때는 물이 없다가 범람하면 폭포를 이루는데 그 물살이 가눌 수 없을 만큼 힘찹니다. 그 넘치는 물이 저들을 모두 떠밀어 내리려는 위세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네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것을 다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의지해서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발바닥으로 밟은 즉" 성경은 말합니다. 그랬더니 흐르던 물이 Stop! 저들은 육지처럼 그 강을 건넜습니다. 여러분, 미움의 강물이 도도하게 흐를 그 때에도 나는 사랑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죄인 된 나를 위해서 죽이신 그 사랑 앞에 서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 미움의 강은 사랑의 길을 내주고 말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영예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의 원천입니다. 사랑으로 부요해진 생애, 사랑의 영광이 평생 함께 하는 삶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니라.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선지자요 율법이니라." 삶의 초점이 분명한 삶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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