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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II - 사랑의 본질 (고전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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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상회담의 시작과 끝에는 세 가지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김대통령이 평양 순안 공항에 도착했을 때 평양 시민들의 환호성은 오로지 "김정일, 김정일!"이었습니다. 김대통령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떠나올 때 시민들의 외침 내용은 "만세, 만세, 만세!"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또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두 정상이 악수례 하는 것에 그쳤지만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환송할 때는 포옹을 했습니다. 김대통령은 방북 기간 내내 긴장해서 얼굴 표정이 굳어 있었지만 마지막 환송 때의 모습은 활짝 웃는 편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번 정상회담을 보면서 우리 하나님은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때에, 정확한 사람을, 정확하게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가에 대해서 마음으로 참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시간 동안 이 일을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진 분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주체사상의 중심은 수령론입니다. 4년 전에 제가 황장엽씨와 함께 지내면서 10시간 동안 격렬히 논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 심양에서 만나 아침 10시부터 저녁 10까지 같이 있었으니까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대략 10시간 정도는 계속 듣고 말하고, 듣고 말하고 했습니다. 제가 책에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결국 주체 사상의 핵심은 수령론이었습니다. 수령은 절대입니다. 수령은 영향받을 수가 없습니다. 수령은 지시만 해야합니다. 그 수령에게 감히 누가 "내 생각이 이렇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우리 수령이 가니까 수령끼리는 이야기가 되었잖아요 김대중 대통령은 71년도 대통령 유세 기간에 3단계 통일론을 제일 처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얼마 있다가 그 3단계 통일론을 수정해서 자기들의 연방제로 채택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씨를 빨갱이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통일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제가 몇 사람 이름을 불러 보겠습니다. 김구, 김규식, 여운형, 조봉암. 통일 때문에 생명을 잃으신 분들입니다. 남과 북이 극한 대치해 있을 때 '남과 북이 통일하자'는 말은 자연스럽게 용공으로 비쳐졌습니다. 양쪽 어디도 통일운동이 설 수 있는 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일을 주장한 사람들은 대부분 생애를 비참하게 보냈고 김대통령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논리적인 그 주체 사상을 장사꾼이 가거나 정치꾼이 가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죽을 고비 속에서 다지고 다진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었고 설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념은 신념으로 대화가 됩니다. 학문으로도 안됩니다. 그런가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 통일 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했습니다. 제가 북한을 만나고 돕는 일을 시작한 기간을 생각해 보니까, 89년도부터 시작을 했으니까, 12년이 넘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시작해서 세 분의 대통령이 어떻게 통일 문제를 추진하는가 직, 간접적으로 부딪치면서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앞의 두 분들은 '통일은 좋은 것이니까 되면 좋겠다.' 생각을 하면서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계속 생각과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한완상 선생과 꽤 많은 일을 해보았습니다. 일 하면서 '정부가 통일에 대한 의지가 있는가'하는 것을 몇 차례 한완상 선생과 토론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그 권한이 자기에게 주어지니까 통일을 목표로 해서 일하는데, 동해안의 간첩이 침투해도, 서해안에 교전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이 일을 추진해갔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 일은 김대중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다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의 수령들 중에 주체사상을 상대해서 이야기 할만한 분은 이승만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유일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거기다가 두 가지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는 북한 사람들 마음속에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남쪽의 다른 인사에 비해서 좋은 이미지로 심겨졌습니다. 북한에서 생각하는 남쪽의 3대 민주 인사가 있습니다. 문익환, 임수경, 김대중! 이 세 사람입니다. 북에서는 이 세 사람을 남쪽의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계속 선전해왔습니다. 김대통령이 당선된 다음에 얼마 안되어서 제가 평양을 갔었는데, 북한에서 김대통령을 욕하고 싶은데 '김대중'이라는 이름의 이미지를 바꿀 수가 없으니까 기껏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남쪽의 최고 인사라는 작자가.'라고 욕을 하더라구요. 그 때 저는 변화를 실감했습니다. 그 전에는 남쪽의 대통령은 정말 육두문자까지 써가면서 욕을 했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어 자기들한테 나타난 것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를 한번 설문 조사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가지의 여건이 있습니다. 74년에 정상 회담이 성사되어서 만약에 김일성 주석이 서울에 왔었다면 와서 꼭 해야 될 일이 있었습니다. 6.25 전쟁에 대해 반드시 사과해야 되었습니다. 왜냐면 전범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남쪽에서 80%나 되었습니다. 그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점에 대해 해당사항 무(無입)니다.
왜냐하면 저하고 나이가 같거든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맨 날 이리 저리 도망 다닌 것이 6.25 기억의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책임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방법으로 역사를 이루어 가심에 놀랍니다. 김대중이라는 한 사람의 고통의 세월을 사용하셔서 정상 회담이라는 이런 결론을 맞게 해주신 우리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북에서는 다른 사람이 서명한 것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령이 서명한 것은 못 바꿉니다. 8.15 때 감격의 상봉이 있기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이처럼 기뻐하고 열광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은 멉니다. 마치 길을 잃은 등산로에서, 캄캄한 밤을 헤매다가 이제 겨우 날이 밝아진 것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올라가야 될 정상은 멉니다. 정상을 향한 골짜기는 대부분 깊습니다. 비탈은 심합니다. 도처에 바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가는데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치권이 다 해결하겠고, 경제인들이 다 채워줄텐데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통일을 위해 어떤 자리에서 일해야 되는가 저는 지금부터 일해야 된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93년 남북 나눔 운동 사무총장을 맡아 실무적인 일을 8년 째 하고 있습니다만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할 일이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박수 받고 갈채 받는 일은 없어질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를 아무도 못 이야기할 때, 교회만이 통일 문제에 매달렸고, 한국 교회의 진보 지식인들이 1986년 남북이 완전히 대치상태에 있을 때 스위스 글리온에서 처음으로 남북 기독자 대회를 열어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통일 백서를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 운동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지만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통일의 새로운 세기를 맞기 위해서 투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투쟁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칩시다. 그러나 지금부터 해야될 것 있습니다. 정책이나 경제는 사람들끼리 직접 만나는데 까지는 해주지만 곳곳에 뚫려있는 빈 틈새까지 메꾸지는 못합니다. 빈 틈새를 메꾸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게 되면 부딪치는 여러 아픔들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그처럼 죽기 살기로 연애해서 결혼해도 부부들이 밤낮 싸우는데, 50년간 서로 다른 이념과 생활 속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당할 어려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때 한국 교회가 그 아픔을 맨 몸으로 맞으면서 둘 사이가 부딪치지 않도록 윤활유의 역할을 해주어야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키(key)를 주셨습니다. 그 키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키입니다. 다른 키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첫 번째 모습은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말은 "긴 열정"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열정, 조금 어렵고 조금 잘못되어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열정, 긴 열정이 오래 참음입니다. 그 다음에 오래 참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을 "온유"라고 말했습니다. 이 온유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8-29) 주님 앞에 가서 배워야될 인격의 모습은 넉넉히 다른 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 온유입니다.
세 번째로는 "투기하지 아니하고"입니다. 이 투기는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의 "사모하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만족이 없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늘 부족하게 느껴서 다른 사람이 뭘 갖기만 하면 샘내는 마음, 이것을 성경은 투기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 남편이 5캐럿 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사주었습니다.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데, 마침 동창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그 반지를 끼고 나갔습니다. '나도 이제 다이아 5캐럿 반지를 하나 끼어봤다.'고 폼을 잡으려고 했는데, 자기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제일 꼴 보기 싫은 아무개가 10 캐럿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얼른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핸드백에 넣습니다. 그리고는 10캐럿을 가질 때까지 불편한 마음을 가집니다. 이것이 투기입니다. 여러분, 처음 집을 사서 들어갔을 때는 얼마나 감격하셨습니까 그러다가 우리 집 보다 화장실 한 개가 더 있는 친구네 집에 갔다와서는 갑자기 불행해졌어요. 화장실 개수로 모든 인생의 무게와 가치가 결정됩니까 또 "자랑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과대 포장하지 않고 허풍선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전에는 뭔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서 이상한 짓들을 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사람들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몇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나 잘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대개 대화의 모든 말을 줄이고 줄이면 그 말입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는 인격적인 특성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 한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한 것은 자기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어머니는 큰 형에 비해서 키도 작고 머리는 짱구이고 어릴 때부터 괴상하게 생기고 고집은 황소 고집인 나폴레옹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늘 "너는 형 반만 되라."고 했던 어머니에게 "어머니 나도 할 수 있어요"하는 심정으로 유럽을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이 없는 마음의 모습들입니다. 그 다음입니다.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 교만을 어거스틴은 원죄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없이 교만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리라."하고 선악과 실과를 베어먹은 다음 이 교만은 마치 햇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반드시 인생을 따라다닙니다. 죄인지도 모르게 조용히 내 인생을 주장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 있다고 교만하고, 어떤 사람은 세도가 있다고 교만하고, 어떤 사람은 인기가 있다고 교만하고, 어떤 사람은 잘 생겼다고 교만하고. 이런 시시한 교만부터 시작해서 영적으로도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보다 기도 잘 한다고 교만하고, 다른 사람 보다 성경 더 안다고 교만하고, 다른 사람 보다 착한 일 했다고 교만하고, 심지어는 내가 얼마나 겸손한가 교만합니다. 이것은 치료불능의 교만이예요. 교정이 안됩니다.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또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이것은 상대편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입니다. 제가 남북 공연을 비교해보면서 우리가 무례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북에서 제일 많이 부르는 노래는 "온 인민이 총 폭탄 되어 혁명의 수뇌를 사수하자. 지도자를 사수하자"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TV이건 라디오이건 김일성 장군 노래, 김정일 장군 노래, 장군님, 만세, 만만세를 외치는 노래들입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님 찬양하는 것처럼, 자기들만 즐기는 지도자를 찬양하는 노래로 꽉 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쪽에 와서는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노래를 자제하고 안 불렀습니다. 그런데 남쪽에서는 북쪽에서 공연하러 왔을 때 우리도 보기에 역겨운 공연을 보여주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남쪽을 멸시하도록 빌미를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분들이 제일 처음 우리 나라에 왔을 때, 보여준 것이 워커힐에서의 스트립쇼였다고 합니다. 우리 남쪽에서 하는 짓이 그렇습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례 중의 무례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이 무례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유럽 여행하면 '한국 관광객은 거절함'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는 호텔이 많습니다. 호텔의 타월은 다 걷어 내오고 호텔의 비품 중 쓸만한 것은 포켓에 넣어 다 가져옵니다.
그런데 그 무례가 우리의 삶에 배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무례합니다.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무례합니다. 부모 자식간에 무례가 있습니다. 남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 뿐 아니라 남의 이익도 돌아볼 줄 압니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의 특징은 정상들끼리 장시간 동안 맞붙어 회담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회담을 하는 경우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보통은 아래 실무진들이 다 해오면 나중에 서명이나 하는 것이 정상 회담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시간을 두 사람이 맨 몸으로 부딪치면서 합의문을 도출해냈습니다. 그렇게 설득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우리는 함께 살아야하는 것이다." 아니겠습니까 그 정신이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아파트 문화는 나 중심입니다. 인터넷 문화는 나 홀로 입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과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여러분, 감정이니까 성은 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내는 것에 대해서 해가 질 때까지 그 화를 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탄이 우리의 성내는 것을 이용해서 마음대로 요리하니까 사탄이 틈을 못 얻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분노라고 착각하면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때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영어 성경에는 "타인의 잘못을 기록해두지 아니하고"라고 번역한 책이 있습니다. 부부들이 싸움하면서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면 "내가 당신을 이미 다 용서했지만. 어쩌고 저쩌고." 그럽니다. 용서 안한 것이예요. 용서했다고 해놓고 과거부터의 이야기들을 다시 미주알 고주알 하는 것은 용서한 것 아닙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나쁜 점들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힘들 때 꼭 희생양을 찾습니다. 그래서 모든 위험을 그 사람에게 떠맡기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어떤 때든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는 '아니하는 것'만 계속 말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는 것' 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 이익과 함께 기뻐합니다. 사람들은 내 편과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러나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참습니다. 이 말은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덮어주고 참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신뢰합니다. 도무지 끝난 것 같은데 사랑하면 그 사람을 향한 최소한의 신뢰가 싹트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사랑하면 회의는 사라지고 믿음이 점점 그 사랑 안에서 성숙 되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 다음입니다. 모든 것을 소망합니다. 부모가 자식이 아무리 잘못 되어도 소망을 갖고, 희망을 꺽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움이 있는데도 모든 것을 견뎌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기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아니하는 것'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니한다는 말은 '참는다'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그리고 내면의 마음 모습은 온유합니다. 투기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교만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무례히 행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불의를 기뻐하고 싶은 마음을 참습니다. 그 다음은 적극적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참아줍니다. 모든 것을 신뢰합니다. 모든 것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견뎌서 그 영광의 열매를 얻을 때까지 우리를 지켜줍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바꿔보면 그 모습이 드러납니다. 사랑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십시오. 같이 읽어볼까요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셨으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셨으며, 예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셨으며, 교만하지 아니하셨으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셨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셨으며, 성내지 아니하셨으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셨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였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셨고, 모든 것을 믿으셨고, 모든 것을 바라셨고,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오늘 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날마다 좇아서 살아야될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또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에 내 이름을 붙여보십시다. 이렇게 읽어보면, 어쩌면 그렇게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모두 하지 말라고 했고, 못하고 있는 것은 하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자기 이름을 붙여보세요. 000는 오래 참고, 000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000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름을 붙이니까 어떻습니까 하루에 세 번만 이렇게 이름을 붙여서 읽으시면 운수 대통할 것입니다. 운수는 좋아 하시쟎아요 우리 주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힘든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님이 사신 영광스러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고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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