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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음과 거둠 (갈6:6-10)

본문

'심는대로 거둔다.' 이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으로 대신해서 표현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를 멸망시킨 다음, 노아에게 이런 약속을 선언하십니다. "땅이 있는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 심은대로 거두는 자연 질서가 이 땅이 있는 동안 똑같이 존속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을 때 어떤 품종으로 심는가 그것에 따라 어떤 종류의 열매를 얻을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납니다. 쌀을 심으면 쌀을 맺게 되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추수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씨를 심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 농사지을 때 보면 이렇게 합니다. 경작한 부분 가운데 가장 잘 자란 부분을 씨앗으로 베어옵니다. 그리고 그것에 더 영양가가 충분히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알곡을 뒤로 눕혀 놓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잘 훑어서 쥐나 벌레가 범하지 않도록 천장 위에 매달아 겨울동안 잘 보호합니다. 그 다음입니다. 파종 직전에 온 가족이 밤을 새워 알곡 하나 하나를 손가락으로 부지런히 고릅니다. 조금이라도 부실한 것은 옆으로 놓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란을 넣은 물에다 소금을 자꾸 집어넣습니다. 소금물의 비중이 높아져서 계란이 떠오를 때쯤 되면 그 계란을 꺼내고 종자들을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알곡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잘못되고 빈 것은 위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건강한 것은 밑으로 모두 가라앉습니다. 그 위에 떠있는 것을 과감하게 버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것을 물로 씻어서 묘판에 붓습니다. 그렇게 가장 튼튼하고 확실한 씨앗을 심습니다. 북한의 농무성 관계자와 이야기하다가 "김순권박사가 수퍼 옥수수를 개발해서 참 수고하고 있는데 그 결과가 어떤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분이 열정적으로 북한의 식량문제를 위해서 수고한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제 알곡이 나오는데 알곡의 부피는 확실히 커졌답니다.
그런데 무게를 달아보면 전과 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수퍼 옥수수가 북한의 기후와 체질에 아직 맞지 않아 온전하게 좋은 알곡으로 맺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여튼 좋은 양질의 씨앗을 뿌려야 됩니다. 또 얼마나 많이 수확하는가는 얼마나 많은 양을 파종했는가와 비례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법칙이 자연계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 자연계에 자연 법칙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삶에도 법칙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도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 4장 8절은 말합니다.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호세아 8장 7절에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가 우리가 지금 어떤 씨를 심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양을 심고 있는가 내 자신을 스스로 살펴야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이 이런 자연법칙을 보고 영적인 법칙에도 동의하면서 거기에 나를 적용시키지 못합니다. 내가 악한 일을 해도 결국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스스로 속습니다. 나는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속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만홀'이라는 단어를 집약하면 '콧방귀 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심지 않고 거두려드는 것을 보고는 비웃으신다는 말입니다. 아니,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속아서 없수이 여김을 당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심습니까
첫째로 복음을 심습니다. 여기 6절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말씀을 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심으라고 말하는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심으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말씀을 듣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사랑이 내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앞서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쳤던 선생님들의 삶은 본받지 않은 채 그냥 그 분이 가르치는 말씀을 기뻐하고 감동하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참 존경하는 선생님, 박윤선 목사님을 밑에서 배웠습니다. 박윤선 목사님 제자들은 박윤선 목사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고려신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들도, 또 총회신학교에서 배웠던 제자들도, 그 분이 스스로 세운 합동신학교에서 배웠던 제자들도 그 분의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해서 기뻐하고 즐겁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에게서 시간 시간마다 받았던 그 감동만 따먹었지 그 분이 살았던 삶은 전수받지 않았습니다. 그 어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디 가다가 큰 멋진 바위 하나 보면 야, 이것 얼마나 멋지게 생기고 크고 우람한 바위인가 거기까지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 더 생각하십시오. 이 펑퍼짐한 바위에 엎드려서 기도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말 그 분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 분께 음식을 대접해보면 바로 앞에 있는 것만 드셔요. 골고루 못 드십니다. "선생님, 여기도 음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 그래요" 하고 잡수십니다.
그런데 뭐, 맛을 음미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선생님, 도무지 음식 맛을 생각 안하시네요." 그러니까 그 분이 이렇게 이야기 하시더라구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냥 먹기 싫어도 주님 영광 위해서 먹고 맛이 없어도 주님 영광 위해서 먹고 맛있으면 기뻐하고 먹고 그렇게 먹는다" 우리들은 그 박윤선 목사님의 삶을 감히 못 따라갑니다. 그 분이 언제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성도인데 어떤 사람은 강대상 올라가 큰 소리 치고 이야기하고 어떤 교인은 앉아서 설교를 들어야 되는데 강단에 서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너무 황송하지 않느냐 말이예요"
그러므로 정말로 어떤 글을 인용하고 싶은데 그 책이 부산에 있으면 그 주간에 부산까지 가서 확인하고 인용하라는 겁니다. 제가 언제 한번 이런 일을 당했어요. 그 분이 저에게 전화했습니다. "홍목사님, 00가 지은 주석 중에 잠언서를 가지셨습니까예, 목사님. 제게 있습니다.내가 학교 도서관에서 그 책을 보다가 그냥 왔는데 내일 강의 준비가 조금 미진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그 책을 빌려줄 수 없겠습니까" 하시더니 저한테 직접 오셨어요. 제가 다른 곳에 있으니까 곧 가겠다고 했는데 그분이 직접 오셨습니다. 제가 그 책을 그 분에게 드리면서 얼마나 손이 부들부들 떨렸는지요 특별히 합동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자기가 마치 박윤선 목사님 된 것처럼 흥분해서 설명합니다. 그렇지만 그 분의 삶은 똑같이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잘못된 배움입니다. 말씀을 잘못 심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 설교 잘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간에 말씀 듣는 즐거움을 원하는 것이지, 진정한 내 생애 속에 새로운 씨를 심는 파종의 노력을 하는가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감동 뿐만 아닙니다.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속에 자기 생애를 쏟아부어 사는 삶을 좇아가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내 인생 속에 잘 심어지고 있는가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로 내 인생이 성령의 밭에 심어졌는가를 보라고 합니다. 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지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두 밭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육체라는 밭입니다. 이 육체라는 단어는 하나님 앞에 타락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기를 즐거워하는 본성으로서의 육체를 말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배나무는 무엇을 열지요 배를 열매맺지요. 배나무니까 배를 열어요. 사과나무니까 사과를 열매로 내놓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쳐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어느새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구요. 본질이 그렇단 말입니다. 아니, 아이들에게 언제 살인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살인의 눈길이 내 아이들에게 있더란 말이예요. 그것을 안된다고 가르쳤는데, 우리의 타락한 본질은 가만 놔두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행합니다. 이 못된 것은 연습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가만 놔두면 잡초 밭에 잡초 자라듯이 내 삶 속에 이 악한 것이 쉽게 쉽게 자라납니다. 그래서 "육체에 있는 현저함이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이 목록을 한참 이야기하다가 그 정도가 아니라 "그와 같은 것들이라." 그와 같은 비슷한 종류가 주변에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내 속에서 노력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부지런히 열매를 맺는단 말입니다.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해버린단 말입니다. 내 육체는 충동을 따라서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님을 좇아 행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인생을 심습니다. 영으로 육체를 죽이면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로 삽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은 해야될 것이 많습니다. 정말 내가 내 영혼이 주안에서 아름답게 자라기를 위해서 성령의 부으심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까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기 위해서 성령께서 함께 임재하는 그룹에 참여해서 교제 나누시기를 원하십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약점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또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스스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의 믿음의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교제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런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나는 완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 혼자 충분히 깨달아서 알 수 있다.'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가 서로 교제하면서 더 깊이 깨달아지고, 더 깊이 부딪쳐집니다. 그리고 신앙 인격이라는 것은 홀로 성경 연구해서 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형성되는 것이 신앙 인격입니다.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고 찾아오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여기 나오신 분들, 주일 낮 예배 눈 길 헤치고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후 찬양 예배는 이렇게 모이지 않습니다. 성가대원 여러분, 찬양으로 예배하는 오후 찬양예배 때, 여러분이 몸 전체로 찬양예배를 드린다면 여러분의 찬양은 더 영감이 넘칠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제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찬양대가 찬양 예배를 기피한다! 그럼 무엇을 찬양하는 것입니까 지난 금요일날 성만찬을 교회에서 행했습니다.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만찬을 행했기 때문에 대개 전통적으로 성금요일날 큰 성찬 예식을 행합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금요 기도회 때 한달에 한번 성찬예식을 하고 일년에 두 차례 주일 오전 예배 때 성찬식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찬 예식 때, 평소 금요기도회 정도밖에 참석을 안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속에 '야, 참 안됐다.' 한숨이 터져 나왔습니다. 왜 안됐는가 교회의 징계 가운데 그 징계를 받으면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던 징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수찬정지'입니다. '당신은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해제 받기 위해서 옛 믿음의 성도들은 무릎 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을 스스로 수찬정지를 당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감각이 없습니다. 주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 십자가의 감격을 내 마음으로 되새기지 않습니다. 주님을 기념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날 나온 사람들에게는 이 축복 놓치지 말고 무조건 성찬예식 한다면 우르르 몰려오라고, 가족들도 모두 함께 모시고 나오라고 강요했습니다. 수찬정지, 그것은 한 성도에게 치명적인 징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을 좋다고 스스로 거부합니다. 수찬정지 당하는 것이나 자기가 스스로 수찬정지하는 것이나 똑같지요 성령의 인도로 영적으로 유익되고 귀한 것을 사모하고 이것이 내 속에 진작되게 하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것, 성령으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는 영생의 영광을 안겨줍니다. 저는 이 성경구절을 이렇게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함께 하실 때, 영원 속에서 누릴 그 영광스러운 것을 현재적으로 느끼는 축복으로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 현재적인 축복이 가슴에 피는 사랑이고, 세상이 감당못할 기쁨이고,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화이며 어떤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내이고, 불쌍한 사람을 향한 깊은 동정심이고 그리고 이 세상 악을 향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이고, 우리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고, 우리 주님의 모습 같은 온유함이고, 진리 안에서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 절제입니다. 그 때 우리들은 천국에서 누려야될 그 영광과 기쁨을 이 땅에서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내세적인 의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의 은혜로 오늘 이 시간에 느끼게 만드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 우리의 생애를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선행을 심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있는 이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주변을 향해서 선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행위는 구원에 무력합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하는 것에는 영광의 상급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그 앞에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 계신 것과 더불어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선행은 참 오해도 많이 받고 보람이 없습니다. 가령, 지금 우리 남한에 탈북해온 동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 몇 분들이 '고향마을'이라는 탈북자들의 정착촌을 만들었습니다. 농사를 짓겠다고 자원하는 분들을 받아서 농사를 짓도록 준비를 다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마을 사람들도 북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음식도 갖다주고 대접을 잘 했는데, 좀 시간이 흐르니까 이 사람들이 일을 안합니다. 일을 안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술먹고 '네 것은 내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고.'하는 사회주의 생각을 하며 남의 닭이나 남의 밭의 식물들을 무단으로 가져다가 같이 나눠먹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이 분들이 떠나주었으면 좋겠다는 진정을 해서 그 일을 하시는 목사님들이 참 마음 아파하십니다. 선을 행하면 이렇게 낙심스러운 일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노숙자도 도와보고 실직자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연구도 많이 해봤는데, 우리가 선을 행하면서 수고하고 애쓰는 것에 비해 소득이 참 빨리 돌아오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답답합니다. 만주 지방에 가보면 탈북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품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숨어있는 것도 힘든 분들이 술을 먹고 동네 사람과 싸웁니다. 그러면 붙잡혀갑니다. 붙잡혀 가서 북한에 끌려가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하여튼 최소한 그들을 도와주었던 사람들까지 줄줄이 붙잡혀가서 공안원들에게 큰 곤욕을 치룹니다. 그러니까 가정 교회 지도자들이 "목사님, 언제까지 저들을 도와야 합니까 우리가 열심히 도와도 그 분들이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않습니다."라는 항변을 종종 듣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실 하는 짓을 보면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그렇게 밖에 못살아요. 그렇게 밖에 못사니까 도울 수 밖에 없더라구요. 그들을 향해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라.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내가 거두게 하겠다." 여러분, 선은 선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행하는가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선을 명령했으니 그냥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도무지 반응이 없고 하나님을 향해서 항거하고 배반했던 내게 계속 선을 베푸시고 그 마음을 한시도 놓치 않았던 것처럼 주변에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향해서 선행을 중단하면 안됩니다. 놀라운 주의 약속이 여기 있습니다.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러분, 우리들이 이 세상의 거대한 악의 구조를 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이런 시험을 당합니다. '아니, 정직하면 손해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정직해야될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도전을 받습니다. '나 혼자 정직하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 대한민국의 노숙자들, 그리고 북한의 탈북자들, 연해주에 이주한 고려인들, 그 사람들의 그 무수한 비극에 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초라한 것이 아닌가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한 두번 하다가 피곤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이루면 거두게 해주겠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이것 때문에 믿을만합니다. 사회의 모든 악에 대해서 우리들은 너무 초라합니다. 그러나 5천명이 굶주리며 주님과 함께 있을 때 한 어린 소년이 자기의 점심 도시락을 주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으로는 도무지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손에 붙잡힙니다. 그러자 5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을 믿습니다. 이 사회가 아무리 악해도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또한 현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입니다. 전능자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우리는 단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선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주께서 그것을 받으셔서 주님의 원대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보는대로 살지 않습니다. 듣는 대로 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우리 속에 도무지 안될 것 같고 쓸모없는 것 같은 그것을 붙잡으셔서 역사하시는 살아계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주님을 우리는 신뢰합니다. 그 분이 말씀하십니다.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어떻게 하신다구요 "거두리라." 믿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마음으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새 천년, 시작하면서 아직 1월도 안지나갔습니다. 어떻게 이 천년을 사시겠습니까 오는 백년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심었던 것의 결과로 내가 여기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심었든, 부정적으로 심었든, 적극적으로 심었든, 소극적으로 심었든, 그 심었던 결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변경이 안됩니다. 그러나 지금 변경 시킬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변경시킵니까 지금 무엇을 심는가입니다. 그러면 5년 후, 주께서 추수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10년 후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세가지가 잘 심겨졌다고 말합니다. 말씀이 바로 심겨졌는가 성령을 위하여 심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하는 일, 피곤한 일이고 귀찮은 일이지만 선행을 중단하지 않고 믿음으로 계속 순종하고 있는가 "네가 그것을 심어가면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들이 우리의 삶 속에 풍성히 열매맺는 값진 생애로 주님 앞에 아름답게 심기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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