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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하소 (엡4:1-8)

본문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바로 눈앞에는 지금 몇 시간 후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이제 피 땀을 흘려 기도하시는 그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도 함께 하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권면하여 "깨어 기도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자들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세 제자는 잠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잠시도 깨어있지 못하느냐" 이렇게 아주 감정 어린 말씀을 하셨습니다만은 저들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동정어린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이렇게 말씀하시고 깨어 기도하라고 일깨웠습니다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그것은 깊은 동정에서 사랑으로 하신 말씀입니다만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육신이 약한 것이 아니라 의지가 약합니다. 마음이 약합니다. 그리고 상황을 판단하는 그 판단능력도 없습니다. 또 나아가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의 자세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시게 됩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저들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예수님 십자가를 지실 때에 저들은 산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고 도망갔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그런 부끄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얼마나 몸둘 바를 몰랐겠습니까 왜 그랬을까 왜 이렇게 비참했을까 왜 이렇게 초라한 인간이 됐을까 이유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하라" 하셨는데 기도하지 않았거든요. 기도 없이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베드로는 그렇지 않아도 장담을 하지 않았습니까. "죽을지언정 내가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예수를 부인하게 됩니다. 부인만했나요 맹세했지요. 저주까지 했지요.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얼마나 후회했겠습니까 그래 전설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바가 있는데 옛날엔 시계가 없으니까 닭이 한 번 울고 또 얼마 있다가 또한 번 울고 이러지 않습니까 "두 번 울기 전에" 라고 하신 그 말씀을 생각하고 닭 우는소리가 날 때마다 무릎을 꿇었답니다. 여러분 자기가 자기를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비참한 일입니다.
뭘 좀 아는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어요. 아는 게 없고 된 줄로 알았는데 된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요. 이 때에 후회라고 하는 가슴 아픈 고통이 옵니다. 이건 배고픈 거하고 다릅니다. 어디가 쑤시고 아프다는 얘기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건 동물적 고통이 아니고 생리적 고통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고통이요, 인격적 고통입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실 자체가 무서운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다고 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필립 브룩스' 라고 하는 분은 인간을 세 종류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분류하게 되는데 첫째 사람은 '피상적 낙관주의자' 라고 말했습니다. The Shallow Optimist. 두번째는 염세주의자, The Pessimist. 세번째는 진정한 의미의 낙관주의자, Real Optimist. 셋으로 분류해서 설명합니다. 이것을 발달심리적으로도 적용해서 말씀합니다. 어렸을 때, 누구나 피상적 낙천주의자가 됩니다. 그래서 마냥 즐겁기만 하고 마냥 흥미롭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가능할 듯이 생각이 듭니다. 안될 게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하면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 안 될 것이 없다. 흔히 말하는 대로 태산이 높다하지만 하늘 아래 뫼다. 오르고 오르면 오른다. 가능하다. 이게 철없는 소리죠. 피상적 낙관주의입니다. 그러나 이제 철이 들고 보면은 되는 일이 없어요. 어디 될 대로 됩니까 반대로 생각이 되는데 되는 것 없고 안 되는 것 뿐이요. 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내 노력도 내 의지도 내 지식도 내 소유도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못돼요. 완전히 그 가치를 부정하게 될 때 소위 Pessimist 가 되는 겁니다. 염세주의자가 됩니다. 어쩌면 인간은 한 번쯤은 철저한 염세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그것도 모르면 사람이 덜 된 유치한 인간이죠. 아직도 제가 뭘 잘난 줄 알고 뭐 된 줄 알고 뭐 할 수 있는 줄 알고 이게 얼마나 쓸데없는 소리입니까 철저하게, 일단 자기 능력과 모든 것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그런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있다.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혜와 그 사랑과 그 지혜 속에서 오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중한 것이다. 이런 것을, 이런 사람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낙관주의자다라고 생각하게 되겠어요. 그래서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이런 의미에서 낙천가여야 합니다. 은혜 안에 부담이 없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다시 은혜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이렇게 바라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마음 아파하는 일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되지 아니하면 나도 불행하고 저도 불행하구요 우리 모두가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됨, 통일, 연합. 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런데 연합을 외치기는 하는데 되는 일이 없구만요. 우리에게 지금 넌센스가 있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겠다고 지금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동과 서가 하나가 안 됩니다. 자 김정일씨하고 하나가 되겠다고 노력을 하는데 국회는 하나가 안 됩니다. 큰 하나를 이루겠다고 하는데 집안 식구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웁니다. 이게 넌센스가 아닙니까 그 왜 하나가 안되느냐고요 하나되어야 될 줄 알면서 그렇게 외치면서 그렇게 노력하면서 왜 안 되느냐 이거예요. 그 근본 원인을 한 번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문제는 하나됨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되려고 노력할 것 없습니다. 본래가 하나니까요. 그 오리지날의 길을 그 본래성을 이해하면서만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이건 협상이 아닙니다. 정치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로 돌아가서 인간이 뭡니까 근본으로 돌아갈 때, 본래성으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남북 전쟁 때 그 미국이 남북 전쟁을 하고 있을 때 포토맥강이라고 하는 강을 사이에 두고 북군과 남군이 대치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터져서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그런 그날 밤입니다. 달빛이 흐르고 조용한 시간에 군사들은 불안에 떨면서 지금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 누군가가 생각합니다. 군가를 부르기로 하면 양군이 전부 군가가 다릅니다. 애국가를 불러도 둘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느 군인이 누구나 다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 Home, Sweet Home,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여러분 잘 아는 그 노래를 어느 군인이 조용하게 불렀습니다. 옆에서 따라 불렀습니다. 강 건너편에 소리가 들려졌습니다. 그 분도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로 가득 찼습니다. 저들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 불렀습니다. 다음날 전쟁은 없었습니다. 왜요 근본으로 돌아갔거든. 우리가 왜 싸워야 되는 겁니까 즐거운 곳에서는 나를 오라고 하는데 나는 왜 여기서 이래야 되느냐 이거예요. 이게 무슨 짓이냐구요. 근본으로 돌아갑니다. 근본이 하나다. 이건 우리가 말한 대로 동질성 회복이라고 하지만 아니요. 동질성 이해입니다. 누가 회복하고 말고 합니까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거기에 하나가 있는 것이고 또하나는 보다 깊은 곳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는 다른 것 같으나 속은 다 같은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걸 생각해야 됩니다. 저는 공동묘지에 갈 때마다 나 혼자서 소리를 내서 웃곤 합니다. 왜요 묘비가 가소로워서요. 무덤을 크게 하고 묘비를 굉장하게 하고 거기다가 돈을 처넣어서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이요. 그런 가 하면 어떤 묘지는 누군가 돌아보지도 않아서 그만 다 없어져가는 묘지도 있더라구요.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 보세요. 묘비가 크나 작으나 무덤이 크나 작으나 간에 속에는 시체가 있을 뿐이요. 이건 하나입니다. 왜 이것이 시체라는 걸 몰랐냐 이거예요. 왜 쓸데없이 형식적인 것에 우리가 신경을 쓰고 있느냐는 거죠. 돈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때요 인생은 같은 길을 가고 있거든요. 깊은 곳에서 보면은 무슨 다를 것이 있습니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는데 한 번쯤은 읽어볼 만 합니다. 이 부부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죤 그리샴이라고 하는 박사님께서 십여년동안을 이 가정 문제로 연구하고 많은 세미나를 인도하시고 강연을 하고 또 상담을 하고 그리고 이 책을 쓴 것입니다. 모름지기 화성에서 온 남자 같은 사람, 그리고 금성에서 온 여자 같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처음에 첫 눈이 맞을 때 사랑하고 한참 좋을 때는 오히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통해서 매력을 느껴요. 다르기 때문에 좋아요. 남자고 여자니까 좋고 부드럽고 거치니까 좋고 하나는 시험에 안나오고 하나는 나오니까 좋고. 요래서 서로 다른 것 때문에 좋다고 미쳐 가지고 돌아가다가 어느 시간에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왜 다르냐 왜 같지 않느냐 남자는 여자를 보고 "날 닮아라" 그러고 여자는 남자보고 "왜 여자의 세계를 이해 못하는 이런 사람이 됐느냐" 고 서로가 나를 닮으라고 싸우고 싸우면서 터지는 것이지요. "해결책이 있다면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사는 데 있다" 라고 말합니다만은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하세요. 다른 것이 몇 가지고 같은 것이 몇 가지입니까 남자와 여자라는 것 알고 보면 같은 게 99%고 다른 것이 몇 가지 있을 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서로 사이가 좋을 때는 전부 같은 것 뿐이요. 서로 하나가 되기가 쉬운데 사랑이 식어지고 나면은 이제는 다른 것만 보이는 거예요. 세상에 먹고사는 것이 다릅니까 죽는 것이 다릅니까 늙는 것이 다릅니까 무엇이 다르다는 얘기입니까 근데 그 조그마한 차이, 이것에 매여서 그 소중한 동질성을 다 잃어버리고 사는 거예요. 생각하면 저 쪽이 괴로우면 내가 더 괴로운 것이지요. 저 쪽이 죽으면 내가 먼저 죽는 거예요. 왜 이런 생각을 못하노. 그리고 서로 괴롭히면서 한 평생을 사는 거 아닙니까. 보세요. 신학적으로 말하면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고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었다. 요걸 정리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만든 부분은 다르다' 하는 말이구요. 성경은 분명히 창조의 이야기가 두 번 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부분은 다르고 창조된 영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같다고 말하고 있어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랬어요. 이 창조에 대한 두 이야기는 너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겁니다. 창조된 바는 같고 만들어진 부분은 서로 다르다. 이걸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좀 더 깊은 세계에서 생각을 해야돼요. 같은 것이 전부다. 다른 것이라는 것은 아주 미미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되는 길이요. 또 나아가서는 종말론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결과에 가서 같다는 것이죠. 지금은 조금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지만 다 같애요. 제가 그런 가정을 압니다. 어떻게 되어서 남자는 박사가 되고 출세하고 그런 사람인데 비해서 여자는 사실로 국민학교도 못 나왔어요. 옛날 어른들이 결혼을 시켜줬기 때문에. 자,
그런데 이 집에 대화가 있겠습니까 남자는 항상 부인을 구박하는 형이예요. '이 무식한 것. 내가 데리고 사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런 식이라요. 또 여자 측에서는 '잘난 사람 맘대로 해. 나야 그저 뭐 식모로 들어왔다가 식모로 갈거니까' 이러고 삽니다. 한 평생을 살았어요. 이거야말로 완전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이래 살은 거예요. 이제 나이 많아서 병원엘 가봤더니요 치매가 와 가지고 싹 갔는데요 그 부인이 오히려 웃더라구요 웃어요. "이 사람 좀 봐요. 제 나이도 몰라요. 제 이름도 몰라요." 여러분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사람답게 살지. 뭘 안다고 까불었노. 안 그렇습니까 한경직 목사님이 97세때 제가 뵈었는데요 "곽목사 잘 들어 두라우" 그러면서 나보고 얘기하더라구요.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영어를 많이 하고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성경을 한국말 성경보다 많이 봤거든.그래서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싹없어지는데 영어단어가 하나도 안 생각난대요. 영어성경을 읽을 수가 없데요. 그리고 다 잊어먹었던 어머니와의 대화, 이런 것이 생각난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갈 때가 가까운 가봐"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이승만 박사께서 파란 눈의 마누라하고 평생을 살지 않았습니까 하와이에 계실 때 마지막에 영어를 다 잊어 버려서 통역을 했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 이 지식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뭐 가졌다면 뭘 가졌다는 얘기요. 우리가 어느 시간을 좀 멀리 내다보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요. 다 하나요. 하나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 종말을 바라보며 오늘 현재를 생각해 보세요. 누가누구를 비판하고 누구를 원망하고 뭘 또 교만할 교만할 꺼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실제거든요. 그런고로 하나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건 뭐냐 믿는 순간부터 하나됨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다 같은 죄인이니까. 잘났으나 못 났으나 죄인은 마찬가지요. 우리 의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다 죽을 죄인이야. 죄인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죠. 오직 예수의 은혜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 예수의 은혜로 내가 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주님의 거룩한 은혜로 우리가 하늘나라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오늘을 삽니다. 철저하게 하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요, 구속받은 이 하나요, 소망도 하나입니다. 초대교회를 연구해 보면요 기도교가 맨 처음 시작될 때 불과 얼마 안 가서 온 세계적인 종교로 기독교가 크게 왕성하게 됩니다. 대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기독교가 온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역사가 그런 나타나는데 이거를 종교학적으로, 신학적인 게 아니고 종교학적으로 연구해 보면요 큰 공로자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가 노예요. 하나가 여성입니다. 로마의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입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팔고 사고 죽이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이게. 하나의 물건이요 동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노예를 그리스도인은 형제로, 형제로 영접했어요. 교회에서 똑같이, 너와 나는 같다. 주인과 노예가 같이 하나됨을 지켜갑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종교가 되게된 시작이요. 또 하나는 여성입니다. 옛날에 여성의 위치라는 건 죄송하지만 형편이 없었거든요. 인구 조사를 할 때 여자는 헤아리지를 않았어요 어차피 부속이니까. 남자만 헤아렸답니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는 형제자매 꼭 같이 다 같이 그리스도 인이요 다 같은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말입니다. 예수님도 정말로 그 불쌍한 사람들 꼭 같이 대하고 심지어는 정신병자까지도 아브라함의 딸로 생각합니다. 세리 같은 사람도 예수님은 자기 제자로 삼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더러운 여자도 사랑했고 부활하신 다음에 맨 먼저 그를 만나 주었습니다. 보세요. 이것이 예수님의 인사이트요. 예수님의 하나됨의 세계관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고로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겁니다. 벌써 하나되게 하신 겁니다. 하나를 만들자는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됨을 깨닫고 하나됨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온유와 겸손으로, 온유와 겸손으로 그랬습니다. 내가 나됨을 알게 될 때, 하나됨을 아는 순간, 온유하고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여기 보니까 오래 참음으로 혹 나와 의견이 다른 것이 있더라도 멀리 내다보면서 오래 참음으로 사랑의 줄로 매게 될 때 비로소 하나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북녘 땅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그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같은 아픔을 느끼고 내 형제로 내 자매로 대할 수 있어요. 고통 당하는 그 누구도 나와 함께, 나와 같은, 그런 마음이 있을 때 그게 하나가 되는 거죠. 높은 위치에서 누구를 구제하는 것처럼 누구를 먹여 살리는 것처럼……. 그거 착각이에요. 나와 저는 하나라고 하는 거죠. 여기에 다른 점이 있다면 은사가 다릅니다. 그러나 은사를 주신 분은 한 분입니다. 오늘 성경을 자세히 보면은 하나됨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소망이 하나요, 부르심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하나, 하나. 다르다는 것은 오직 은사만 다르다는 얘기요. 같은 것이 전부요. 조금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쓰시는 용도가 다르다 이거예요. 여러분, 하나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중에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동시에 저도 하나님의 자녀요,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저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됨. 이미 이루신 하나됨을 굳게 지켜갈 때 거기에 평안히 있고 기쁨이 있고 자유가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벌써 하나됨을 이루셨건만 우리는 어느새 분열하며 자기를 높이며 그리고 분열로 인한 상처로 인해서 시달리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그 하나됨을 깨닫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참고 서로 이해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하나됨의 의미를 오늘도 지켜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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