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사람 (행4:5-12)
본문
USA Today라고 하는 잡지가 하버드 대학의 역사와 사회신학 교수인 하비 콕스(Harvey Cox) 교수에 대하여 평한 그런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일반인들이 하버드 대학은 몰라도 하비 콕스는 알고 있다"라고 까지 격찬을 했습니다. 뭐 일반인들에게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이지만은,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요, 그래도 하비 콕스는 알고 있다. 그것은 지나친 얘기같이 들리지마는 그만큼 하비 콕스가 오늘 이 세대에 있어서 중요한 분이고 또 많음 사람들에게 그렇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하는 뜻입니다. 그는 30년 전에 아주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The Secular City"라고 하는 책입니다. 세속도시, 이 우리말로도 번역이 됐고, 제가 젊었을 때 이 책을 많이 읽었고, 큰 감명을 받은 그런 책입니다.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잘못된 신학이 있었습니다. 그 신학의 주제는 '신의 죽음'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 아니, 이미 죽었고 또 죽을 것 같다 그런 얘기예요. 그게 왜 그러냐 이 과학세상, 점점 과학이 발달하니까 이 과학주의가 우상으로 올라서면서 일반적인 신의 잘못된 개념, 신을 의지하는 마음 이런 것은 다 사라진다. 또 곧 사라질 거다. 이렇게들 생각하게 됐지요. 그래서 그 우상 앞에 가서 빌고, 뭐 복을 달라고 빌고 하는 이런 건 다, 이제는 갔다. 이러한 종교 심성이라는 것은 앞으로는 다 사라질 것이다.
이제 그래서 신의 죽음을 말하게 됩니다마는 이에 반대해서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세속 도시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설명합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농촌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도시는 마귀가 만들었다. 갖가지 죄악이 여기에 다 있고, 여기서 움트고 여기서 작용고 있다. 그래 도시 속에는 하나님이 없고, 또 뿐만 아니라 점점 세계가 도시화 되어가니깐 하나님의 신비를 느낄만한 그러한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말합니다마는 하비 콕스는 아닙니다. 오히려 도시 한가운데 그 세속도시 속에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가 있다. 이렇게 역설을 해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웠는데, 30년 후 오늘에 와서는 또 다시 문제의 글을 썼는데 "Fire from Heaven, 하늘로부터 오는 불길"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씁니다. 이것은 오늘 21세기를 향한 많은 과학 문명으로 인해서 컴퓨터를 비롯한 인터넷, 전자공학, 이런 것이 발전을 하면서 또 많은 사람이 점점 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교회가 어려워집니다. 우리도 뭐 5일 근무제를 한다고 하는데 토요일 날까지 놀게되면 또 교인들이 아예 금요일 날 저녁에 놀러갔다가 주일날 교회에 못나오는 일이 생긴단 말이지요. 이렇게 이렇게 가다보면 이 교회가 점점 침체될 거 아니냐 이거 이거 이 교회의 종말이 될 거 같다, 이런 걱정들을 하지요.
그러나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애당초 교회는 성령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건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이고, 무슨 세계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니다." 역설적으로 주장합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혜, 이로 인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또 교회는 부흥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지적하는 성령에 충만이라는 것은 신학자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성령체험' 이것은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의지의 문제도 아니고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과학의 문제도 물론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함과 함께 오는 종말론적 의식이다. 성령을 받게될 때에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예요. 이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고 나 자신의 종말에 대한 의식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원초적 성령, "Primer Spirituality"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원초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원초적 언어, 원초적 신앙. 이 원초적 신앙이란 뭐냐 과학자들이 흔히 유치하게 생각하지만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기도하면 병이 났는다'하는 단순한 믿음. 이건 원초적 신앙입니다. 그 누가 죽는다 해도 아니오. 기도하면 났고, 하나님 뜻이면 병을 이길 수 있다. 또 사실 이기기도 합니다. 이런 기초적이고 원초적 그런 신앙,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원초적 소망, 모든 것이 절망이라고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아요. 교회가 가진 소망이란 이 세상 것이 아니에요. 그런고로 성경이 말씀하는 원초적 소망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원초적 영성이고, 또 두 번째는 성령 체험과 함께 해방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근본주의적 제재나, 율법이나, 혹은 자기 자신이나,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세상 복잡한 문제에 대한 그런 절망의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된다. 그래 성령 받았다는 것은 뭐냐 그의 영혼이 자유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그 영이 자유하고 그래서 행복한 겁니다. 그래서 용기의 사람이 되고,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자, 세상이 몇 번 바꿔도 이것은 여전한 것이다. 이 원초적 영성이라는 것은 여전히 교회의 생명으로 또, 생명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교회는 영원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공회 앞에 섰습니다. 이 공회는 그 옛날 예수님을 재판한 곳입니다. 그리고 빌라도 법정으로 넘겨서 형식적으로 빌라도의 재판에 의해서 돌아가신 것처럼 돼있지마는 내막적으로는 바로 이 산헤드린 공회,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을 하게 된 겁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섰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놓고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켰소" 이렇게 증거하고 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담대하게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 서있는 모습을 성령 충만, 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스데반이 또 돌에 맞아 죽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 앞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살기 등등한 사람들 앞에서 그 무서운, 피맺힌, 그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편안합니다. 죽음 직전에 그는 평안합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소망과 믿음으로 충만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마침내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바로 이 장면이 이게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프레데스 프뉴마토스사이오'라는 말인데 헬라 말입니다마는 이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깊이 말씀을 드리면 복음서의 저자 중에 있는 누가의 전용 용어입니다. 누가만이 사용한 용어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충만, 프레데스. 그래 이게 뭐냐 이건 물리적인 용어입니다. 그릇에다가 물을 담아요. 물을 담고 꽉 넘치게 담으면 철철 넘쳐요. 가득 차서 철철 넘친다. 그게 프레데스예요. 이게 충만입니다. 자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일반적 은혜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대조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일반적 은혜, 이것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는 의에 대한 수용적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Justification,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내 죄 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으심으로 해서 나를 의롭다 하신 것이에요. 그런고로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저 분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다'하는 감격을 얻게되고 그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믿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믿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저분이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한 저 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 이거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요한 거예요. 또, 우리가 여러 가지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복주시고,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모든 믿음이 다 중요하고 그 내용들이 다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믿음은 딱 한가지입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하는 말에 대한 믿음이올시다. 그걸 내가 수용해야됩니다. 그걸 내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올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지붕을 뚫고 환자를 침상채 달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달아 내려서 예수님 앞에 놓여 있는 환자를 놓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 인사도 없이 첫마디가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이것을 믿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바리새교인의 비판처럼 "당신이 누군데 내 죄를 사하는 거요 당신이 내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거요"하고 만약 물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또 "왜 남의 죄는 들추는 거요 병이나 고치지" 그것도 아니오. 문제는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하는 말씀을 그가 믿습니다. 믿는 순간 그는 병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어린아이들도 뭘 잘못 하던가 하면 이렇게 좀 나무라기도 하고 때로는 뭐 꾸지람도 하고 때리기도 하지요.
이제 그 다음에 다 일이 지나가고 잘못했다고 하고 그 다음에 용서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오늘 이후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하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돌아가야지, 용서한다고 했는데도 "뭐 용서를 했는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용서는 믿을 수가 없어. 용서했다가 며칠 있다가 또 들출거지 이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구제불능입니다. 부모님이 낳아 놓긴 했지마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나는 체질적으로 의로울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는 말을 영 믿질 않고, 받아주질 않아요. 그러면은 그는 항상 우울증에 걸려 있을 수밖에 없어요. 자 "내가 너를 용서했다" 여기에 대한 믿음, 아주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게 결정적 신앙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내가 네 죄를 다 감당했다. 네 죄 대신 내가 죽었다. 네 죄 사함 받았다" 이것을 믿어야 돼요. 의롭다 하심을 믿고 그 의를 내가 수용해야된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성령이 주시는 거예요. 오로지 성령이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세요. 그래서 죄 사함 받은 기쁨을 가지고 그 의로움을 가지고 살게 되어있는 게 아닙니까 이것이 기초적인 것이에요. 또 하나는 로마서 8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 해 주십니다. 이건 Adoption 이라는 겁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마는 양자 되었습니다. 비유로 말할 때 '양자'라고 그랬어요. 자녀답지 못하지만 이제 양자를 삼으셨어요. 너는 나의 자녀다. 이것도 믿어져야 되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란 말이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란 말이요" 여러분, 그 믿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보면은 이제는 실패해도 사랑 때문이요 병들어도 사랑 때문이요 역경이 다가와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사랑의 매요 사랑의 시련이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정체의식 속에서 이해 하는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요.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 이것이 있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자아 의식이에요.
또 세 번째는 성령은 우리를 성화 하십니다.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 받으면서 아 Magical, Mechanical, 아주 마술적으로 변화되길 바래요. 예수 믿자마자 싹 달라지는 바래요. 그게 전기 스위치 올리면은 불이 확 꺼지고 켜지는 것처럼. 인격적인 건 그렇지 않아요. 성령과 함께 나도 모르게 의식이전에 내 안에 역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인격적으로 점차적으로 변화되고 있어요. 제가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우리 교회에 그런 분이 계셨어요. 지금 독일 가서 유학하면서 저희들끼리 친해가지고 결혼을 했어요. 어린애도 낳았는데 한국에 와서 살면서 환경이 좀 다르니까 이게잘 조화가 안돼요. 서로서로 개성 강해 가지고 남자가 말이야 이혼하자고 그니깐 여자가 "그래!" 그랬대요. 아, 장군 멍군 했어요. 그리고는 이혼하기로 하고 도장을 다 찍어 놨는데 이제 가서 구청에 제출하면 끝나는데 바로 그 시간 회사에서 출장을 보냈어요. 이제 출장, 6개월 동안 출장 가면서 "자 뭐 이혼하는 거 그리 바쁜 거 아니니까 갔다와서 이혼하자" 그랬어요. 그리고 출장을 갔어요. 그 간 사이에 이 여자가 이혼하겠다고 큰소리는 쳤는데 그 다음에 살길이 막연해요. 아무튼 속상한 가운데서 교회를 나왔어요. 그저 뭐 나오다 보니까 깨달아서가 아니라 답답하니까 새벽에 나오고 저녁에 나오고 언제 나오고, 나왔단 말이에요. 6개월 동안. 남편 돌아온다는 날 차를 가지고 비행장에 나갔어요. 아직까지는 남편이니까. 갔는데 돌아온 사람을 차에 태웠습니다. 이제 이혼할 사람들이 무슨 인사할 것도 없지요. "타." 탔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야, 너 이뻐졌다. 얼굴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남의 여자보고 쓸데없는 소리하는 거 아니야" 했어요. "아무래도 달라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니까 "하도 속상해서 교회 좀 나갔지 뭐"그랬대요. "예수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네 얼굴 달라진 거 보니까 뭔가 있는 거 같다. 나도 교회 좀 나가보고 이혼하자." 그래 그럭저럭 잘 나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벌써 얼굴이 달라졌어요. 마음이 달라지고, 인격이 달라졌어요. 이게 예수 믿는다는 거예요. 이게 성령의 역사, 이것을 Sanctification이라고 그럽니다.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충만 이라는 건 뭐냐 이건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그를 포로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 베드로라는 사람, 이거 갈릴리 어부요. 성경에 보면 이 사람 '아그람마타'라 그랬어요. 아그람마타, 글도 모른다 그 뜻이에요. 불학무식한 사람, 이런 사람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됐고 다혈질이라서 언제든지 앞서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아주 초라한 인간이 됩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삼중부인이올시다. Threefold Deny,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고, 맹세하고, 저주하고, 아주 형편없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을 받게 됩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 다 잊어버리고 삼 천명 앞에서 전도를 합니다. 오늘도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 이라는 겁니다. 오늘 한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선 얼굴이 달라졌어요. 스데반의 얼굴 천사의 얼굴입니다. 여러분, 얼굴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성령 받고 못 받고는 이렇게 보면 알 수 있지요. 밝은 얼굴 이게 중요한 거예요. 소망과 기쁨으로 충만한 얼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얼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얼굴이요. 자, 어려워하지 않는 얼굴입니다. 또한 그의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세요. 그래서 성전 미문이라는 곳에 언제든지 들락날락하던 곳이요. 거기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언제나 봤어요. 전에도 많이 본 사람이요. 그러나 오늘은 달라요. 성령 충만한 사람은 딱 보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이 작용을 해요.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환자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시는 분이에요. 모든 환자를 다 고쳤어요. 어떤 문둥병 환자든지, 정신병자든지, 심지어는 예수님 앞에는 시체도 누워있을 수가 없어요. "일어나라" 그거지요. 이게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그 하나님의 나라, 그 마음이 그 속에서 작용할 때, 늘 보던 앉은뱅이지만 오늘은 다르게 보입니다. 딱 보는 순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오니 일어나라!" 벌떡 일으켰어요. 여기서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명력이 작용할 때 기적이 나타난 것이지요. 그런고로 여기에는 아무 두려움이 없어요. 아무 낙심함도 없어요. 미워하는 사람도 없어요. 담력과 용기로 충만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할 때, 그 생명력이 작용합니다.
제가 어느 공장을 한번 견학 갔습니다. 구경을 갔는데 새로 만드는 공장, 아주 최신식 공장, 기계를 잘 장치해놨어요. 공장은 조용해요. "이제 한번 시동을 시켜보십시오." 전기 스위치를딱 넣자마자 전력이 들어가니까 기계가 '와'하고 돌아갑니다. 전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이건 완전히 물질이요. 그러나 전기라고 하는 생명력이 들어가는 순간 살아있는 물건이요, 살아있는 기계. 작용하는 걸 봤어요. 여러분, 사람이라는 인격. 지식이건 물질이건 재주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의 물질에 불과해. 그러나 여기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작용할 때 확 피어오르는 것이에요. 여기가 바로 성령 충만이라구요. 그래서 인격을 변화시키고, 내적 존재를 변화시키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 되고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붙들고 당신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앞에 보입니다. 확실하게 보입니다. 영원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됩니다. 거기에서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클레멘트라고 하는 교부가 있는데 주후 150년에서 215년까지 계셨던 분입니다. 그 분이 써놓은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와 같은 시간에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가 천국에 함께 들어갈 것을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격려하기를 "여보, 주님을 기억하십시다"라고 위로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기 아내와 함께 순교하게 됩니다. 함께 순교해서 함께 하늘나라 간다는 것이 너무 기쁜 일이라요. 여러분,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수를 증거 하다가 공회에 끌려가라. 현장에 가서 서면 네가 무엇을 말할 것인지 일러주리라"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성령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보통 은혜, 특별한 은혜 다 체험을 했습니다. 내게 말씀하실 때에 순종해야됩니다. 내가 성령을 거역하면 성령이 근심합니다. 성령이 떠납니다. 성령에 순종하세요. 그대로 그대로 순종해 들어가면은 충만함에 이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고 그의 기쁨과 그의 능력 그의 용기로 충만한 그런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래서 신의 죽음을 말하게 됩니다마는 이에 반대해서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세속 도시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설명합니다. 그 당시에 유행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농촌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도시는 마귀가 만들었다. 갖가지 죄악이 여기에 다 있고, 여기서 움트고 여기서 작용고 있다. 그래 도시 속에는 하나님이 없고, 또 뿐만 아니라 점점 세계가 도시화 되어가니깐 하나님의 신비를 느낄만한 그러한 영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말합니다마는 하비 콕스는 아닙니다. 오히려 도시 한가운데 그 세속도시 속에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가 있다. 이렇게 역설을 해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웠는데, 30년 후 오늘에 와서는 또 다시 문제의 글을 썼는데 "Fire from Heaven, 하늘로부터 오는 불길"이라고 하는 그런 책을 씁니다. 이것은 오늘 21세기를 향한 많은 과학 문명으로 인해서 컴퓨터를 비롯한 인터넷, 전자공학, 이런 것이 발전을 하면서 또 많은 사람이 점점 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교회가 어려워집니다. 우리도 뭐 5일 근무제를 한다고 하는데 토요일 날까지 놀게되면 또 교인들이 아예 금요일 날 저녁에 놀러갔다가 주일날 교회에 못나오는 일이 생긴단 말이지요. 이렇게 이렇게 가다보면 이 교회가 점점 침체될 거 아니냐 이거 이거 이 교회의 종말이 될 거 같다, 이런 걱정들을 하지요.
그러나 하비 콕스는 말합니다. "애당초 교회는 성령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건 사회학적이고, 정치학적이고, 무슨 세계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게 아니다." 역설적으로 주장합니다. "성령의 역사, 성령의 은혜, 이로 인해서 교회가 존재하고 또 교회는 부흥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지적하는 성령에 충만이라는 것은 신학자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성령체험' 이것은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의지의 문제도 아니고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과학의 문제도 물론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함과 함께 오는 종말론적 의식이다. 성령을 받게될 때에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예요. 이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고 나 자신의 종말에 대한 의식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원초적 성령, "Primer Spirituality"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원초적 신앙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원초적 언어, 원초적 신앙. 이 원초적 신앙이란 뭐냐 과학자들이 흔히 유치하게 생각하지만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기도하면 병이 났는다'하는 단순한 믿음. 이건 원초적 신앙입니다. 그 누가 죽는다 해도 아니오. 기도하면 났고, 하나님 뜻이면 병을 이길 수 있다. 또 사실 이기기도 합니다. 이런 기초적이고 원초적 그런 신앙,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원초적 소망, 모든 것이 절망이라고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아요. 교회가 가진 소망이란 이 세상 것이 아니에요. 그런고로 성경이 말씀하는 원초적 소망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원초적 영성이고, 또 두 번째는 성령 체험과 함께 해방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근본주의적 제재나, 율법이나, 혹은 자기 자신이나, 욕망이나, 두려움이나, 세상 복잡한 문제에 대한 그런 절망의식으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된다. 그래 성령 받았다는 것은 뭐냐 그의 영혼이 자유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은 그 영이 자유하고 그래서 행복한 겁니다. 그래서 용기의 사람이 되고, 소망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자, 세상이 몇 번 바꿔도 이것은 여전한 것이다. 이 원초적 영성이라는 것은 여전히 교회의 생명으로 또, 생명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교회는 영원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공회 앞에 섰습니다. 이 공회는 그 옛날 예수님을 재판한 곳입니다. 그리고 빌라도 법정으로 넘겨서 형식적으로 빌라도의 재판에 의해서 돌아가신 것처럼 돼있지마는 내막적으로는 바로 이 산헤드린 공회, 바로 이 자리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로 결정을 하게 된 겁니다. 바로 그 자리에 섰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놓고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켰소" 이렇게 증거하고 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담대하게 그 자리에 섰습니다. 그 서있는 모습을 성령 충만, 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스데반이 또 돌에 맞아 죽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 앞에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살기 등등한 사람들 앞에서 그 무서운, 피맺힌, 그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편안합니다. 죽음 직전에 그는 평안합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소망과 믿음으로 충만합니다.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마침내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바로 이 장면이 이게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프레데스 프뉴마토스사이오'라는 말인데 헬라 말입니다마는 이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깊이 말씀을 드리면 복음서의 저자 중에 있는 누가의 전용 용어입니다. 누가만이 사용한 용어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충만, 프레데스. 그래 이게 뭐냐 이건 물리적인 용어입니다. 그릇에다가 물을 담아요. 물을 담고 꽉 넘치게 담으면 철철 넘쳐요. 가득 차서 철철 넘친다. 그게 프레데스예요. 이게 충만입니다. 자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일반적 은혜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대조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일반적 은혜, 이것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먼저는 의에 대한 수용적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Justification,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도덕적으로 선해지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내 죄 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으심으로 해서 나를 의롭다 하신 것이에요. 그런고로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저 분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다'하는 감격을 얻게되고 그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믿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믿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저분이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내가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한 저 사람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 이거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중요한 거예요. 또, 우리가 여러 가지 믿음을 가져야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복주시고,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모든 믿음이 다 중요하고 그 내용들이 다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믿음은 딱 한가지입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하는 말에 대한 믿음이올시다. 그걸 내가 수용해야됩니다. 그걸 내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올시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지붕을 뚫고 환자를 침상채 달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달아 내려서 예수님 앞에 놓여 있는 환자를 놓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 인사도 없이 첫마디가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이것을 믿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바리새교인의 비판처럼 "당신이 누군데 내 죄를 사하는 거요 당신이 내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거요"하고 만약 물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또 "왜 남의 죄는 들추는 거요 병이나 고치지" 그것도 아니오. 문제는 "네 죄 사함 받았느니라"하는 말씀을 그가 믿습니다. 믿는 순간 그는 병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어린아이들도 뭘 잘못 하던가 하면 이렇게 좀 나무라기도 하고 때로는 뭐 꾸지람도 하고 때리기도 하지요.
이제 그 다음에 다 일이 지나가고 잘못했다고 하고 그 다음에 용서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오늘 이후로 내가 너를 용서한다"하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돌아가야지, 용서한다고 했는데도 "뭐 용서를 했는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 용서는 믿을 수가 없어. 용서했다가 며칠 있다가 또 들출거지 이제.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구제불능입니다. 부모님이 낳아 놓긴 했지마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나는 체질적으로 의로울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는 말을 영 믿질 않고, 받아주질 않아요. 그러면은 그는 항상 우울증에 걸려 있을 수밖에 없어요. 자 "내가 너를 용서했다" 여기에 대한 믿음, 아주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게 결정적 신앙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내가 네 죄를 다 감당했다. 네 죄 대신 내가 죽었다. 네 죄 사함 받았다" 이것을 믿어야 돼요. 의롭다 하심을 믿고 그 의를 내가 수용해야된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성령이 주시는 거예요. 오로지 성령이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세요. 그래서 죄 사함 받은 기쁨을 가지고 그 의로움을 가지고 살게 되어있는 게 아닙니까 이것이 기초적인 것이에요. 또 하나는 로마서 8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 해 주십니다. 이건 Adoption 이라는 겁니다. 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마는 양자 되었습니다. 비유로 말할 때 '양자'라고 그랬어요. 자녀답지 못하지만 이제 양자를 삼으셨어요. 너는 나의 자녀다. 이것도 믿어져야 되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란 말이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란 말이요" 여러분, 그 믿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보면은 이제는 실패해도 사랑 때문이요 병들어도 사랑 때문이요 역경이 다가와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사랑의 매요 사랑의 시련이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정체의식 속에서 이해 하는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요.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 이것이 있는 거예요.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자아 의식이에요.
또 세 번째는 성령은 우리를 성화 하십니다.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 받으면서 아 Magical, Mechanical, 아주 마술적으로 변화되길 바래요. 예수 믿자마자 싹 달라지는 바래요. 그게 전기 스위치 올리면은 불이 확 꺼지고 켜지는 것처럼. 인격적인 건 그렇지 않아요. 성령과 함께 나도 모르게 의식이전에 내 안에 역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인격적으로 점차적으로 변화되고 있어요. 제가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우리 교회에 그런 분이 계셨어요. 지금 독일 가서 유학하면서 저희들끼리 친해가지고 결혼을 했어요. 어린애도 낳았는데 한국에 와서 살면서 환경이 좀 다르니까 이게잘 조화가 안돼요. 서로서로 개성 강해 가지고 남자가 말이야 이혼하자고 그니깐 여자가 "그래!" 그랬대요. 아, 장군 멍군 했어요. 그리고는 이혼하기로 하고 도장을 다 찍어 놨는데 이제 가서 구청에 제출하면 끝나는데 바로 그 시간 회사에서 출장을 보냈어요. 이제 출장, 6개월 동안 출장 가면서 "자 뭐 이혼하는 거 그리 바쁜 거 아니니까 갔다와서 이혼하자" 그랬어요. 그리고 출장을 갔어요. 그 간 사이에 이 여자가 이혼하겠다고 큰소리는 쳤는데 그 다음에 살길이 막연해요. 아무튼 속상한 가운데서 교회를 나왔어요. 그저 뭐 나오다 보니까 깨달아서가 아니라 답답하니까 새벽에 나오고 저녁에 나오고 언제 나오고, 나왔단 말이에요. 6개월 동안. 남편 돌아온다는 날 차를 가지고 비행장에 나갔어요. 아직까지는 남편이니까. 갔는데 돌아온 사람을 차에 태웠습니다. 이제 이혼할 사람들이 무슨 인사할 것도 없지요. "타." 탔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야, 너 이뻐졌다. 얼굴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남의 여자보고 쓸데없는 소리하는 거 아니야" 했어요. "아무래도 달라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니까 "하도 속상해서 교회 좀 나갔지 뭐"그랬대요. "예수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네 얼굴 달라진 거 보니까 뭔가 있는 거 같다. 나도 교회 좀 나가보고 이혼하자." 그래 그럭저럭 잘 나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벌써 얼굴이 달라졌어요. 마음이 달라지고, 인격이 달라졌어요. 이게 예수 믿는다는 거예요. 이게 성령의 역사, 이것을 Sanctification이라고 그럽니다.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충만 이라는 건 뭐냐 이건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그를 포로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이 베드로라는 사람, 이거 갈릴리 어부요. 성경에 보면 이 사람 '아그람마타'라 그랬어요. 아그람마타, 글도 모른다 그 뜻이에요. 불학무식한 사람, 이런 사람인데 예수님의 제자가 됐고 다혈질이라서 언제든지 앞서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아주 초라한 인간이 됩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삼중부인이올시다. Threefold Deny,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고, 맹세하고, 저주하고, 아주 형편없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을 받게 됩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 다 잊어버리고 삼 천명 앞에서 전도를 합니다. 오늘도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 이라는 겁니다. 오늘 한번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선 얼굴이 달라졌어요. 스데반의 얼굴 천사의 얼굴입니다. 여러분, 얼굴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성령 받고 못 받고는 이렇게 보면 알 수 있지요. 밝은 얼굴 이게 중요한 거예요. 소망과 기쁨으로 충만한 얼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얼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얼굴이요. 자, 어려워하지 않는 얼굴입니다. 또한 그의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예수님이 함께 하세요. 그래서 성전 미문이라는 곳에 언제든지 들락날락하던 곳이요. 거기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언제나 봤어요. 전에도 많이 본 사람이요. 그러나 오늘은 달라요. 성령 충만한 사람은 딱 보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이 작용을 해요.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환자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시는 분이에요. 모든 환자를 다 고쳤어요. 어떤 문둥병 환자든지, 정신병자든지, 심지어는 예수님 앞에는 시체도 누워있을 수가 없어요. "일어나라" 그거지요. 이게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 그 하나님의 나라, 그 마음이 그 속에서 작용할 때, 늘 보던 앉은뱅이지만 오늘은 다르게 보입니다. 딱 보는 순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오니 일어나라!" 벌떡 일으켰어요. 여기서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요.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명력이 작용할 때 기적이 나타난 것이지요. 그런고로 여기에는 아무 두려움이 없어요. 아무 낙심함도 없어요. 미워하는 사람도 없어요. 담력과 용기로 충만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할 때, 그 생명력이 작용합니다.
제가 어느 공장을 한번 견학 갔습니다. 구경을 갔는데 새로 만드는 공장, 아주 최신식 공장, 기계를 잘 장치해놨어요. 공장은 조용해요. "이제 한번 시동을 시켜보십시오." 전기 스위치를딱 넣자마자 전력이 들어가니까 기계가 '와'하고 돌아갑니다. 전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이건 완전히 물질이요. 그러나 전기라고 하는 생명력이 들어가는 순간 살아있는 물건이요, 살아있는 기계. 작용하는 걸 봤어요. 여러분, 사람이라는 인격. 지식이건 물질이건 재주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사람이라고 하는 하나의 물질에 불과해. 그러나 여기에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작용할 때 확 피어오르는 것이에요. 여기가 바로 성령 충만이라구요. 그래서 인격을 변화시키고, 내적 존재를 변화시키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 되고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붙들고 당신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앞에 보입니다. 확실하게 보입니다. 영원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됩니다. 거기에서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 클레멘트라고 하는 교부가 있는데 주후 150년에서 215년까지 계셨던 분입니다. 그 분이 써놓은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와 같은 시간에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내를 보았습니다. 그가 천국에 함께 들어갈 것을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격려하기를 "여보, 주님을 기억하십시다"라고 위로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자기 아내와 함께 순교하게 됩니다. 함께 순교해서 함께 하늘나라 간다는 것이 너무 기쁜 일이라요. 여러분,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수를 증거 하다가 공회에 끌려가라. 현장에 가서 서면 네가 무엇을 말할 것인지 일러주리라"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다 성령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보통 은혜, 특별한 은혜 다 체험을 했습니다. 내게 말씀하실 때에 순종해야됩니다. 내가 성령을 거역하면 성령이 근심합니다. 성령이 떠납니다. 성령에 순종하세요. 그대로 그대로 순종해 들어가면은 충만함에 이릅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고 그의 기쁨과 그의 능력 그의 용기로 충만한 그런 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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