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사람 (벧전서1:3-9)
본문
1951년 압록강 강변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에 속하는 해병대의 군인들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진격전보다 후퇴하는 작전이 제일 어렵습니다.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고 포위 당하는 가운데서 저들은 쫓기고 있다가 바위틈에 은신하고 피곤하게 지친 군인들이 잠깐 쉬고 있었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을 본 한 종군기자가 물었습니다. "What can
I do for you, 내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해병대의 미군은 대답했습니다. "Give me tomorrow,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닙니다. 내일입니다. 내일! 즉 미래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내게 내일을 주십시오. 내게 미래를 주십시오. 내게 소망을 주십시오." 이것이 그의 외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그가 아는 만큼 사는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가 가진 만큼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만큼 사는 것이올시다.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가졌느냐에 행복이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어떠한 소망을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서 행복은 좌우되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현대 젊은이들이 타락해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을 합니다.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는 거 같아서 걱정을 합니다 만은 타락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게 아닙니다. 절망하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돼서 소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올시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걸 생각해보세요. 가끔 이 젊은이들이 고생하는 걸 봅니다. 요새 뭐 학교 고생하고 젊은 사람들 여러 가지로 시달리고 고생하는 걸 보지만은 여기 나이 많은 분들은 그 젊은이들 고생하는 거 하나도 안쓰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젊은이의 고생과 나이 많은 돈 많은 할머니의 생활과를 비교해보세요.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아무리 잘 살면 뭘합니까 시간이 없는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나 고생하는 젊은이, 그 젊었다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나이 든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이 사람들이 걱정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하루종일 찬송을 불러도 끝이 없다. 젊은 거 그거 하나만 가지고 충분하다" 왜요 미래가 있잖아요.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미래가 없는 이거 가졌으면 뭘 하고 알면 뭘 합니까. 혹 건강하다면 또 그건 뭘 합니까. 가끔 어떤 분들은 제게 요새 농담 겸 진담 인사로 "목사님, 참 전보다 더 건강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인사를 해요. 그러면 전 대답합니다. "건강하게 보이면 뭘 하나 실속이 있어야지" 내가 그럽니다. 안 그래요 아 지금 미래가 눈앞에 있고 카운트다운 하는데 좀 더 건강하면 뭘 하고 안 하면 뭘 하고. 이게 아니죠. 당신이 지닌 미래 이것이 나의 행복이거든요. 나의 나 됨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라고 하는 분은 궁극적 관심, "얼트밑 콘선(Ultimate Concern)" 이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제가 아주 젊었을 때 이 책을 참 탐독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 관심, 바로 그것이 종교라는 겁니다. 그리고 궁극적 관심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 신앙이다 그랬어요.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에 있습니까, 물질에 있습니까, 무상한 이 생활 속에 있습니까, 혹은 순간적 쾌락에 있습니까 그 사람은 속물이요. 그건 동물 같은 인간이요. 인간은 언제나 그 다음을 생각해요. 봄에는 여름을 생각해요,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해요, 젊어서는 늙었을 때를 생각해요. 그 다음을 생각하고 좀 더, 좀 더 나아가서 궁극적인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 관심에 이끌리어서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분명히 현재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저 궁극에 있어야 합니다. 네 가지 궁극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대학에 입학하느라고 그 몇 년 동안 공부하느라고 고생을 합니다. 그저 도시락 둘씩 싸들고 다니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들에게 묻기를 네 목적이 뭐냐 대학에 입학하는 거라고, 그래 입학을 하고 보니까 또 어떠냐 아 이거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고생했습니다. 그렇지요 그건 목적이 될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 또 자기가 원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면 부모가 반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죽기살기로 저 여자하고 결혼 못하면 죽는다고 약을 세 번이나 먹고 별짓 다 합니다. 아 그래 이렇게 목숨을 걸고 야단을 하지만은 또 결혼을 하고 나니까 이혼하더라고요. 그게 아니더라는 거야. 이건 목적이 못돼 이거는요. 이런 건 목적이 못돼요. 그러면 보세요, 그건 궁극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이요. 최종, 궁극적 목적이 뭐냐, 그걸 알고 살아가야 되는 것이죠. 또 하나는 궁극적 상태, 마지막엔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란서 파리에 어느 수도원에 가면 그 들어가는 입구에 큰 돌비석이 있습니다. 그 비석의 비문은 이렇습니다. "아프레 쓸라(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불어로 딱 석자 써있습니다. 해설 없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이상한 문구올시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법과대학 졸업반에 다니는 학생이 고학을 하느라고 애쓰다가 이제 한 학기 남았는데 도저히 학자금을 조달할 수가 없어서, 이 학교를 쉬게 될 거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느 신부님께 찾아가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마지막 학기인데 학비를 좀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그 신부님은 "마침 조금 전에 어떤 교인이 좋은 일에 써 달라고 돈을 한 묶음 갔다 놓고 갔는데 이건 분명히 자네를 위한 것일세" 돈을 세 보지도 않고 한 줌을 딱 붙들어서 그냥 주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 답답했던 중에 소원이 갑자기 이루어지니까 당황해 가지고 오히려 걱정이 돼서 "이거 가져도 되는 겁니까아 그럼, 자네 거야 그거는. 하나님이 자네에게 주는 걸세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잠깐만" 그러더래요. "뭡니까", "내가 하나 묻는데 그거 가지고가서 뭘 하려나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등록금을 치러야지요", "그 다음은공부해야죠", "공부하고졸업 해야죠", "그 다음은법관이 돼서 변호사가 돼 가지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의로운 변호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구만 그래주면 좋겠네", "그 다음은돈 좀 벌겠습니다", "그 다음은장가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심상치 않은 질문에 그는 더 이상 대답을 못합니다. 신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자네도 죽어야되네. 그 다음은 자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일세, 알았는가알겠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귓가를 계속 때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Apres cela,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견딜 수가 없이 계속 들려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사실입니다. 그 돈을 내 던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를 하고 훌륭한 수도사가 되어서 한 평생 귀한 일을 많이 했어요. 그 비석에 그 묘비에 그가 한 평생 자기 책상 앞에 써 놓고 좌우명으로 외우던 세 마디,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써 놓았습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그 다음, 궁극적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황하지도 마세요, 깊이 알려고 하지도 마세요, 슬퍼할 것도 없어요. 당연히 이 길로 가야됩니다. 궁극적 상태, 이걸 모르고 사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에요. 또한 궁극적 주인이 누군가를 알아야합니다. 나도 주인이 아니고 너도 주인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끌려 살고 있습니까 마틴 루터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기수에게 조정을 받는 말과 같은 것이 인간이다" 여기에 말이 있습니다. 말에 올라 탄 기수가 있습니다. 기수가 말을 채찍질하면서 말고삐를 쥐고 자기가 원하는 데로 갑니다. 세우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자, 나라고 하는 인간을 끌고 가는 주인이 누굽니까 그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질투심입니까, 증오심입니까, 끝없는 욕심입니까 도대체 나는 누구의 노예입니까 궁극적 주인은 악마입니까 천사입니까 성령입니까 아니면 씻을 수 없는 과거의 죄악입니까 무엇에 끌려 그렇게 허덕이며 살아왔습니까 궁극적 주인이 누구냐, 그걸 생각해야 되고요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야 됩니다. 도대체 가치 있는게 뭡니까. 그게 여자들 말마따나 옷입니까 다이아몬드입니까.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이 뭡니까.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두고두고 기억하며 잘했다 싶은 것, 그러한 높은 가치, 궁극적 가치, 이걸 잊어서는 안되죠. 여기에 끌려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도 베드로는 본래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가 제자가 되고,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합니다만은 성경을 읽어서 아는바와 같이 그는 계속적으로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큰 능력을 행할 때마다 저 능력을 가지면은 이 나라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저같은 희한한 능력과 지혜라면은 분명히 이 나라를 구출할 수 있는 지도자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천국열쇠를 준다. 너는 베드로다" 칭찬하십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할 때, "절대로 지지 마십시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 뒤에는 "유대나라의 왕이 될 분이 그 무슨 십자가와 같은 불길한 것을 다 생각하십니까" 그거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아 너는 내 뒤고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준다, 말씀하시고 곧 돌이켜서 사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세요, 베드로는 세속적 욕망, 세속적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그리고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비로소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원한 가치, 궁극적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산 소망"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산 소망, 리빙 호프(Living Hope), 산 소망, 엘피다 죠산, 이 한 마디는 베드로의 신학의 핵심입니다. 베드로전서후서 베드로의 신앙의 극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산 소망! 오늘 본문에서 그는 소망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둡니다. 부활신앙, 십자가에 죽어지는거 같은데 아니요 부활하시더라 이거요. 또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이제 그의 생각은 영원한 세계로, 궁극적 관심으로 생각의 방향이 확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가 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거꾸로 못 박혀 죽는 것, 그는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 위대한 능력을 그는 눈앞에 보면서 산 소망 그 속에 살았습니다. 여러분 소망과 소원은 다릅니다. 우리 인간들이 소원을 합니다만은 그거는 내 마음이고요 소망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바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받아들이는 순간 그 약속이, 그 산 소망이 우리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 인격을 완전히 붙들고 나갑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더그 함마슐드 총장을 아실 것입니다. 그가 쓴 에세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탄 배, 그가 타고 지금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배 안의 선원중의 하나는 이 배 안에 있으면서 큰 걱정이요.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찼어요. 그건 뭐냐하면, 자기 고향에서 자기는 어떤 집에 구두 수선하는 집에 직공으로 있었는데 그 구두 수선하는 주인이 나이 많아요. 그래서 자기는 이 배를 타고 미국까지 왔다가 돈을 좀 벌어 가지고 돌아가서 그 주인의 구두수선 가게를 인수받으려고, 인계 받으려는 것이 그게 소망입니다.
그런데 걱정이 풍랑이 일어날 때마다 아이고 이거 죽으면 어떡하나, 좀 시간이 늦을 때마다 아 이거 늦으면 못 가는데 이거 어떡하나, 또 내가 가지전에 그 노인 죽으면 어떡하나, 이걸로 걱정이 가득하다 이 말이에요. 자 생각해보세요. 신대륙을 발견하는,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이 귀한, 위대한 역사에 동참한 사람이 말입니다 그래 그까짓 가게 하나에 메여 가지고, 지금 집에 못 돌아갈까 봐 걱정하는 이 불쌍한 청년을 생각해보세요. 콜롬부스는, 콜롬부스가 가진 소망은 저 앞에 있는 것이고 이 청년이 가진 소망은 저 과거에 있는, 뒤에 있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밝은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될 때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한다 그랬어요. 소망을 가진 사람이 시험을 당합니다. 왜요 그 소망이 계속 순수한 소망으로 지켜가기 위해서,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련이 있어요. 당연한 것이요. 그 시련 중에 더 확실한 소망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시련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요. 오늘 본문에도, 잠깐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걸 당연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 소망을 위하여, 이 소망의 사람들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잠시 받는 환난에 경한 것이 중한 영광을 이룬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 이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이 시련, 이 잠깐 있는 이 시련,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위대한 소망 앞에서 생각할 때 이 시련은 잠깐 지나가는 거예요. 또한 "믿음의 시련이"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믿음을 강하게 하고 이 시련이, 시련의 초점은 믿음이요. 금보다 귀한 믿음,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이 시련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소망에 사는 사람은 저 앞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렇습니다. 벅찬 기쁨으로 앞에 있는 시련을 쉽게 넉넉하게 이겨 가는 것입니다. 요새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다만은 널리 알려진 아주 슈퍼 베스트셀러 책이 하나 있습니다. "튜즈데이즈 위드 모리(Tuesdays with Morrie)"라고 하는 책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이렇게 번역이 됐습니다. 이 책은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라고 하는 대학 교수님인데 브랜다이스 대학의 교수님으로써 지금 연세가 높은 분인데 루게릭이라고 하는 특별한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근육이 자꾸만 굳어지는 겁니다. 이걸 풀 제간이 없습니다. 근육이 자꾸자꾸만 굳어져 가지고 마지막엔 심장이 멎는 거예요. 이런 병에 걸려서 병원에 계시는데, 여기에 미치라고 하는 학생 하나가 화요일마다 찾아옵니다, 교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화요일마다 찾아와서 대화를 합니다. 그 대화하는 중에서 참 귀한 말씀들을 많이 들었는데 이거 마지막, 마지막 가는 교수와 젊은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이것을 그 학생이 편집을 해서 책으로 낸 겁니다. 아주 생생한 생감이 있는 생동감이 있는 그런 대화올시다. 인생의 궁극을 같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의 말 중에 이런 말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알 수 있느니라"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이요. 여러분 어떤 모양으로 죽을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생을 끝내나, 그것을 똑바로 알고 살면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자연히 쉽게 풀려지는 것이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은 땅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에 두고 사는 사람은 현재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은 세상적인 것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불변한 진리를 통달하고 거기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도 세상을 달관할 수 있습니다. 희망과 소원은 결코 소망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소망! 확실한 약속! 그것이 크게 확실하게 내 마음에 들어 올 때, 내가 당한 조그마한 현실, 그거 별로 문제될 게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소망의 문제입니다. 산 소망, 이 산 소망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갈 때 그 앞에 영광과 승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I do for you, 내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해병대의 미군은 대답했습니다. "Give me tomorrow, 내일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닙니다. 내일입니다. 내일! 즉 미래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내게 내일을 주십시오. 내게 미래를 주십시오. 내게 소망을 주십시오." 이것이 그의 외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그가 아는 만큼 사는게 아닙니다. 인간은 그가 가진 만큼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만큼 사는 것이올시다.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가졌느냐에 행복이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어떠한 소망을 지니고 사느냐에 따라서 행복은 좌우되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현대 젊은이들이 타락해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을 합니다.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하는 거 같아서 걱정을 합니다 만은 타락하기 때문에 절망하는 게 아닙니다. 절망하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돼서 소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올시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걸 생각해보세요. 가끔 이 젊은이들이 고생하는 걸 봅니다. 요새 뭐 학교 고생하고 젊은 사람들 여러 가지로 시달리고 고생하는 걸 보지만은 여기 나이 많은 분들은 그 젊은이들 고생하는 거 하나도 안쓰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젊은이의 고생과 나이 많은 돈 많은 할머니의 생활과를 비교해보세요.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아무리 잘 살면 뭘합니까 시간이 없는데.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나 고생하는 젊은이, 그 젊었다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나이 든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이 사람들이 걱정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하루종일 찬송을 불러도 끝이 없다. 젊은 거 그거 하나만 가지고 충분하다" 왜요 미래가 있잖아요.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미래가 없는 이거 가졌으면 뭘 하고 알면 뭘 합니까. 혹 건강하다면 또 그건 뭘 합니까. 가끔 어떤 분들은 제게 요새 농담 겸 진담 인사로 "목사님, 참 전보다 더 건강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인사를 해요. 그러면 전 대답합니다. "건강하게 보이면 뭘 하나 실속이 있어야지" 내가 그럽니다. 안 그래요 아 지금 미래가 눈앞에 있고 카운트다운 하는데 좀 더 건강하면 뭘 하고 안 하면 뭘 하고. 이게 아니죠. 당신이 지닌 미래 이것이 나의 행복이거든요. 나의 나 됨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라고 하는 분은 궁극적 관심, "얼트밑 콘선(Ultimate Concern)" 이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제가 아주 젊었을 때 이 책을 참 탐독하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 관심, 바로 그것이 종교라는 겁니다. 그리고 궁극적 관심에 붙잡혀서 사는 것이 신앙이다 그랬어요.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현실에 있습니까, 물질에 있습니까, 무상한 이 생활 속에 있습니까, 혹은 순간적 쾌락에 있습니까 그 사람은 속물이요. 그건 동물 같은 인간이요. 인간은 언제나 그 다음을 생각해요. 봄에는 여름을 생각해요, 여름에는 겨울을 생각해요, 젊어서는 늙었을 때를 생각해요. 그 다음을 생각하고 좀 더, 좀 더 나아가서 궁극적인 일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 관심에 이끌리어서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몸은 분명히 현재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저 궁극에 있어야 합니다. 네 가지 궁극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대학에 입학하느라고 그 몇 년 동안 공부하느라고 고생을 합니다. 그저 도시락 둘씩 싸들고 다니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들에게 묻기를 네 목적이 뭐냐 대학에 입학하는 거라고, 그래 입학을 하고 보니까 또 어떠냐 아 이거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고생했습니다. 그렇지요 그건 목적이 될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 또 자기가 원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면 부모가 반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죽기살기로 저 여자하고 결혼 못하면 죽는다고 약을 세 번이나 먹고 별짓 다 합니다. 아 그래 이렇게 목숨을 걸고 야단을 하지만은 또 결혼을 하고 나니까 이혼하더라고요. 그게 아니더라는 거야. 이건 목적이 못돼 이거는요. 이런 건 목적이 못돼요. 그러면 보세요, 그건 궁극적인 것이 못되기 때문이요. 최종, 궁극적 목적이 뭐냐, 그걸 알고 살아가야 되는 것이죠. 또 하나는 궁극적 상태, 마지막엔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죠.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란서 파리에 어느 수도원에 가면 그 들어가는 입구에 큰 돌비석이 있습니다. 그 비석의 비문은 이렇습니다. "아프레 쓸라(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불어로 딱 석자 써있습니다. 해설 없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이상한 문구올시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법과대학 졸업반에 다니는 학생이 고학을 하느라고 애쓰다가 이제 한 학기 남았는데 도저히 학자금을 조달할 수가 없어서, 이 학교를 쉬게 될 거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느 신부님께 찾아가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마지막 학기인데 학비를 좀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 그 신부님은 "마침 조금 전에 어떤 교인이 좋은 일에 써 달라고 돈을 한 묶음 갔다 놓고 갔는데 이건 분명히 자네를 위한 것일세" 돈을 세 보지도 않고 한 줌을 딱 붙들어서 그냥 주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 답답했던 중에 소원이 갑자기 이루어지니까 당황해 가지고 오히려 걱정이 돼서 "이거 가져도 되는 겁니까아 그럼, 자네 거야 그거는. 하나님이 자네에게 주는 걸세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잠깐만" 그러더래요. "뭡니까", "내가 하나 묻는데 그거 가지고가서 뭘 하려나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등록금을 치러야지요", "그 다음은공부해야죠", "공부하고졸업 해야죠", "그 다음은법관이 돼서 변호사가 돼 가지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의로운 변호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구만 그래주면 좋겠네", "그 다음은돈 좀 벌겠습니다", "그 다음은장가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심상치 않은 질문에 그는 더 이상 대답을 못합니다. 신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자네도 죽어야되네. 그 다음은 자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일세, 알았는가알겠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귓가를 계속 때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Apres cela,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견딜 수가 없이 계속 들려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사실입니다. 그 돈을 내 던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를 하고 훌륭한 수도사가 되어서 한 평생 귀한 일을 많이 했어요. 그 비석에 그 묘비에 그가 한 평생 자기 책상 앞에 써 놓고 좌우명으로 외우던 세 마디,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써 놓았습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그 다음, 궁극적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황하지도 마세요, 깊이 알려고 하지도 마세요, 슬퍼할 것도 없어요. 당연히 이 길로 가야됩니다. 궁극적 상태, 이걸 모르고 사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에요. 또한 궁극적 주인이 누군가를 알아야합니다. 나도 주인이 아니고 너도 주인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끌려 살고 있습니까 마틴 루터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기수에게 조정을 받는 말과 같은 것이 인간이다" 여기에 말이 있습니다. 말에 올라 탄 기수가 있습니다. 기수가 말을 채찍질하면서 말고삐를 쥐고 자기가 원하는 데로 갑니다. 세우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자, 나라고 하는 인간을 끌고 가는 주인이 누굽니까 그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질투심입니까, 증오심입니까, 끝없는 욕심입니까 도대체 나는 누구의 노예입니까 궁극적 주인은 악마입니까 천사입니까 성령입니까 아니면 씻을 수 없는 과거의 죄악입니까 무엇에 끌려 그렇게 허덕이며 살아왔습니까 궁극적 주인이 누구냐, 그걸 생각해야 되고요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야 됩니다. 도대체 가치 있는게 뭡니까. 그게 여자들 말마따나 옷입니까 다이아몬드입니까.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이 뭡니까.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두고두고 기억하며 잘했다 싶은 것, 그러한 높은 가치, 궁극적 가치, 이걸 잊어서는 안되죠. 여기에 끌려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사도 베드로는 본래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가 제자가 되고,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합니다만은 성경을 읽어서 아는바와 같이 그는 계속적으로 세속적 욕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큰 능력을 행할 때마다 저 능력을 가지면은 이 나라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저같은 희한한 능력과 지혜라면은 분명히 이 나라를 구출할 수 있는 지도자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천국열쇠를 준다. 너는 베드로다" 칭찬하십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의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고 할 때, "절대로 지지 마십시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 뒤에는 "유대나라의 왕이 될 분이 그 무슨 십자가와 같은 불길한 것을 다 생각하십니까" 그거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아 너는 내 뒤고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준다, 말씀하시고 곧 돌이켜서 사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보세요, 베드로는 세속적 욕망, 세속적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그리고 성령에 충만하게 될 때 비로소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이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영원한 가치, 궁극적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산 소망"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산 소망, 리빙 호프(Living Hope), 산 소망, 엘피다 죠산, 이 한 마디는 베드로의 신학의 핵심입니다. 베드로전서후서 베드로의 신앙의 극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산 소망! 오늘 본문에서 그는 소망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둡니다. 부활신앙, 십자가에 죽어지는거 같은데 아니요 부활하시더라 이거요. 또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이제 그의 생각은 영원한 세계로, 궁극적 관심으로 생각의 방향이 확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가 됩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거꾸로 못 박혀 죽는 것, 그는 사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 위대한 능력을 그는 눈앞에 보면서 산 소망 그 속에 살았습니다. 여러분 소망과 소원은 다릅니다. 우리 인간들이 소원을 합니다만은 그거는 내 마음이고요 소망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바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받아들이는 순간 그 약속이, 그 산 소망이 우리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 인격을 완전히 붙들고 나갑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더그 함마슐드 총장을 아실 것입니다. 그가 쓴 에세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탄 배, 그가 타고 지금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배 안의 선원중의 하나는 이 배 안에 있으면서 큰 걱정이요.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찼어요. 그건 뭐냐하면, 자기 고향에서 자기는 어떤 집에 구두 수선하는 집에 직공으로 있었는데 그 구두 수선하는 주인이 나이 많아요. 그래서 자기는 이 배를 타고 미국까지 왔다가 돈을 좀 벌어 가지고 돌아가서 그 주인의 구두수선 가게를 인수받으려고, 인계 받으려는 것이 그게 소망입니다.
그런데 걱정이 풍랑이 일어날 때마다 아이고 이거 죽으면 어떡하나, 좀 시간이 늦을 때마다 아 이거 늦으면 못 가는데 이거 어떡하나, 또 내가 가지전에 그 노인 죽으면 어떡하나, 이걸로 걱정이 가득하다 이 말이에요. 자 생각해보세요. 신대륙을 발견하는,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이 귀한, 위대한 역사에 동참한 사람이 말입니다 그래 그까짓 가게 하나에 메여 가지고, 지금 집에 못 돌아갈까 봐 걱정하는 이 불쌍한 청년을 생각해보세요. 콜롬부스는, 콜롬부스가 가진 소망은 저 앞에 있는 것이고 이 청년이 가진 소망은 저 과거에 있는, 뒤에 있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밝은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될 때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한다 그랬어요. 소망을 가진 사람이 시험을 당합니다. 왜요 그 소망이 계속 순수한 소망으로 지켜가기 위해서,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시련이 있어요. 당연한 것이요. 그 시련 중에 더 확실한 소망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시련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요. 오늘 본문에도, 잠깐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걸 당연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참 소망을 위하여, 이 소망의 사람들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잠시 받는 환난에 경한 것이 중한 영광을 이룬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 이것이 바울의 말씀입니다. 이 시련, 이 잠깐 있는 이 시련,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위대한 소망 앞에서 생각할 때 이 시련은 잠깐 지나가는 거예요. 또한 "믿음의 시련이"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믿음을 온전하게 하고, 믿음을 강하게 하고 이 시련이, 시련의 초점은 믿음이요. 금보다 귀한 믿음,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이 시련은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 소망에 사는 사람은 저 앞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렇습니다. 벅찬 기쁨으로 앞에 있는 시련을 쉽게 넉넉하게 이겨 가는 것입니다. 요새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다만은 널리 알려진 아주 슈퍼 베스트셀러 책이 하나 있습니다. "튜즈데이즈 위드 모리(Tuesdays with Morrie)"라고 하는 책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이렇게 번역이 됐습니다. 이 책은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z)라고 하는 대학 교수님인데 브랜다이스 대학의 교수님으로써 지금 연세가 높은 분인데 루게릭이라고 하는 특별한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근육이 자꾸만 굳어지는 겁니다. 이걸 풀 제간이 없습니다. 근육이 자꾸자꾸만 굳어져 가지고 마지막엔 심장이 멎는 거예요. 이런 병에 걸려서 병원에 계시는데, 여기에 미치라고 하는 학생 하나가 화요일마다 찾아옵니다, 교수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화요일마다 찾아와서 대화를 합니다. 그 대화하는 중에서 참 귀한 말씀들을 많이 들었는데 이거 마지막, 마지막 가는 교수와 젊은 학생과의 대화입니다. 이것을 그 학생이 편집을 해서 책으로 낸 겁니다. 아주 생생한 생감이 있는 생동감이 있는 그런 대화올시다. 인생의 궁극을 같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의 말 중에 이런 말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알 수 있느니라"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 말이요. 여러분 어떤 모양으로 죽을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생을 끝내나, 그것을 똑바로 알고 살면 내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자연히 쉽게 풀려지는 것이올시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 소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은 땅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에 두고 사는 사람은 현재의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은 세상적인 것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불변한 진리를 통달하고 거기에 이끌려 사는 사람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도 세상을 달관할 수 있습니다. 희망과 소원은 결코 소망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소망! 확실한 약속! 그것이 크게 확실하게 내 마음에 들어 올 때, 내가 당한 조그마한 현실, 그거 별로 문제될 게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소망의 문제입니다. 산 소망, 이 산 소망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갈 때 그 앞에 영광과 승리가 있는 것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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