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인내의사람 (약1:2-8)
본문
테크노 가수 이정현이 불러서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는 '바꿔'라고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랫말입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 다들 미쳐가고만 있어 / 어느 누굴 믿어 어찌 믿어 더는 못 믿어 / 누가 누굴 욕하는 거야 / 그러는 넌 얼마나 깨끗해 /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속의 속물들이야 /바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사랑도 다 바꿔 거짓도 다 바꿔 세상을 다 바꿔" 노래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바꿔'라는 소리밖에 들린 게 없는데 그 가사내용을 알고 나면 이런 겁니다. 참 절묘하게 이 세계를 풍자하는 노래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빌게이츠라고 하는 유명한 분, 여러분 다 아십니다마는 그가 '생각의 속도'라고 하는 책을 써서 작년에 세계적으로 많이 읽히워졌던 때가 있습니다. 그 책 속에서 말합니다. 1980년대를 퀄리티(Quality)의 시대라고 합니다. 1990년대 가리켜서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시대라고 했습니다. 2000년대를 내다보면서 스피드(Speed)시대라고 했습니다. 속도의 시대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변화의 속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변화에 속도를 가합니다. 이 변화속도,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문제는 생각의 속도입니다. 사물과 세상은 빨리 변하는데 내 생각의 속도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면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올시다. 여기는 안정이 없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생각에 속도를 가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그것만이 아니지요. 생각컨데 인식의 속도가 문제고, 조화의 속도가 문제고요, 다 소화하고 균형을 잡아야 되겠는데 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달려가면 이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발란스를 잃어버리면 안되거든요. 이 철학의 속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방향입니다. 이렇게 변해나갈 때 어느 방향으론가 가고 있단 말이요. 어느 방향으론가 가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냐 하는 것이 문제고, 변화의 목적이 문제고 변화의 동기가 문제입니다. 변화의 동기가 미래냐, 과거냐, 현재냐 하는 겁니다. 보다 더 앞에 있는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우리가 급하게 변화하고 있는 거냐, 아니면 과거에 몰려서 그저 막연하게 아무 것도 모르고 변화는 다가오는 거냐, 아니면 현재라고 하는 것이 지겨워서 '에라,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바꿔보자. 못 살겠다 바꿔보자.' 뭐 그런 얘기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문제지요. 그런고로 최종목표 궁극적 가치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변화에 속도가 가해진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에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의 철학이 이것을 따라잡지 못한다 할 때에 우리의 도덕이 이걸 함께 가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할 때 세상은 아주 망가지고 마는 겁니다. 인생도 다 망가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단히 중요한 오늘 이 세대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큰 변화, 속도가 가해진 무서운 변화 속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이 변하는 세대의 속도와 함께 나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생각을 변화시키고 있느냐. 이제 그 변화의 속도와 생각의 속도가 일치하게 될 때 거기에 안정이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면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자동차가 달립니다. 내가 서있을 때 보면 자동차가 급하게 달립니다. 그러나 내가 차를 타고 빨리 가는 차와 똑같은 속도로 가면은 두 차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전 하나 재미있는 걸 하나 늘 느낍니다. 내가 운전을 할 때는 내가 모는 차의 속도와 내 생각의 속도가 같이 가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가도 빨리 간다고 느끼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이거 안되겠는데' 좀 천천히 가라고. 그게 불안해진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운전대를 잡으면 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생각의 속도란 말입니다. 가장 큰 성공의 비결은 안정의 비결은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와 함께 내 생각의 속도에 가속을 붙이는 겁니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어엿하게 때로는 고요하게 넉넉하게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인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반항이나 저항이나 혹은 거부라든가 혹은 증오라든가 혹은 굴복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여기 인내하고 하는 말, 휴퍼모네라고 하는 말은 어엿하게 대처한다, 넉넉하게 수용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대한다, 이것이 인내올시다. 자 이제, 우리는 인내를 생각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인내를 생각합니다. 인내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비유,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은 이렇게 참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탕자가 탕자 됩니다. 그 탕자 됨을 참아주십니다. 그가 집을 나갑니다.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참아주십니다. 그가 가서 어떻게 될 걸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 변화를 참아주십니다. 그가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때에 그를 영접해 주십니다. 아버지의 인내,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인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 좋은 아버지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넉넉합니까, 얼마나 어엿하게 인내하셨습니까. 다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라고. 히브리 12장에 보면 역력히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참으사'그랬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시는 예수를 보세요. 그 모순과 부조리한 그 십자가, 그리고 빌라도 법정에서 말이 없으신 예수. 빌라도가 뭐라고 하든 제사장이 뭐라고 하든 예수님은 벌써 뜻하신 바가 있어서 조용하게 참으시고 오히려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까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인애하심.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내가 있어요. 이것을 본받으라. 또 있어요. 그것은 죄인들이 거역한 자, 죄인들의 거역함을 참으시는 예수를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멀리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지금 본 직책을 버리고 갈릴리에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찾아가서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조반을 대접하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허물, 우리의 나약함을 다 참아주셔서 엄청나게 참아주셔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의 인애하심, 깊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다시 본문 성경은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 야고보서에서는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을을 기다리는 것처럼, 또 다시 야고보서에서는 말합니다. '욥의 인내를 배우라 그리고 본을 삼으라', 욥기를 우리가 압니다. 물질과 가정과 재산과 건강과 의를 다 잃어버렸어요.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이 많은 고생을 치르나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꾸준히 기다립니다. 인내합니다. 욥의 인내. 그래서 그 결말을 봅니다. 욥은 다시 큰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욥의 인내를 배우고, 그 결말을 보고, 그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 없는 인내는 고통입니다. 소망이 없는 인내는 절망입니다. 결국은 믿음과 소망, 이것이 그 속에 있을 때 넉넉하게 어엿하게 참아나갈 수 있는 것이올시다. 오늘 본문 성경에서 인내의 지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참을 것이냐고요. 먼저는 시련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어려운 일 당할 때 이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아주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팩(M. Scott Peck)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더 로드 레스 트레블드(The Road Less Traveled)'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아직도 가야할 길' 그렇게 번역이 됩니다. 이 책에서 많은 정신병자들을 치료하면서 정신병이 왜 걸렸을까 또 어떻게 해야 정신병자가 나았나 어디서부터 치료가 되기 시작하나 그의 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해줍니다. 맨 먼저 중요한 것은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벌써 50%는 병이 낫는답니다. 내 불행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세상에 있다고, 남을 원망하는 동안은 절대로 병이 낫지 않습니다. 이건 구제불능입니다. 그걸 알아야합니다. 애당초 정신병 걸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 불행의 원인이 나 외에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하면서부터 병에 걸리는 겁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그러나 '이것이 나 자신의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벌써 치료가 되기 시작을 합니다. 그걸 말하고 그걸 설득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시간이 걸립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이 고통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내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인간을 위하여, 나의 생각을 위하여, 나의 철학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시련은 유익한 것이다. 이걸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 이것을 통해서 발전하고, 이것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궤도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건 앞에 진실해지고, 그리고 삶의 균형을 잡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당한 지금 어려움에 몰두하지 아니하고 좀더 멀리 떠나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마음의 균형을 잡게될 때 치유는 가능하게 되더라, 하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씀합니다마는 '시련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인내의 시작입니다. 또한가지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초점을 믿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게 하고,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그것이 시련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헤맵니다.
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만나를 일년 분을 한꺼번에 주지 아니하시고 매일매일 주십니다. 아침마다 거둬들여서 식사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시간시간 매일매일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이 시련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믿음,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자,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때때로 물질이 중요하고, 명예가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지만 좀더 달관된 세계에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은 오직 믿음만 중요합니다. 깨끗한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시련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걸 인정해야 하고, 또한가지는 이 시련은 시련이지 시험이 아니라는 겁니다. 같은 개념같이 보이지만은 시험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있고, 시련이란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시험은 남을 넘어뜨리게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가하면 시련은 이것을 통해서 강하게 만든다는 뜻이 있어요. 마치 훈련과 같은 거예요. 그런고로 이 사건 속에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에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구비한다는 말은 헬라 원문대로 하면 완전 무장한다는 뜻입니다. 군인이 무장을 하고야 일선에 나가잖아요. 제가 최일선에서 군인으로 있을 때 보니까요 이제 전쟁의 실전에 나가게 되면요 탄약을 쭈욱 갖다놓고 수류탄 많이 갖다놓고 가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지고 가라 그래요. 그래서 군인들의 옷이 그렇게 얼기설기한 거예요. 모조리 갖다가 수류탄을 여기다 걸고, 여기다 걸고, 허리에다 띠고, 또 탄알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갈 생각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욕심 많게 많이 가져다 넣고 일어서질 못해요. 왜요 어떻게든 이걸 가지고 가야하거든요. 맨손으로 싸우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비해야 합니다. 이 시련을 통하여 계속 훈련을 받아서 강인하게 훈련을 받아서 채워나가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고칠 것을 고치고,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고, 깨달을 것을 깨닫고, 사랑할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시련을 통해서. 이것을 알고 인내하시는 거지요. 이것을 알 때에 참을 수 있는 거지요. 유익한 것이니까. 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니까. 그런고로 또한가지 오늘 성경말씀에 아주 중요한 요절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기쁘게 여기는 것, 그리함으로 그게 참는 거예요. 여러분 참는다는 거, '두고보자' 이거예요. 이를 갈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신세 타령하면서, 그건 참는 게 아니에요. 찬송을 불러야 참는 거예요. 기쁘게 여겨야 참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말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로 앎이니라. 인내가 필요해요. 소망이 필요해요. 그런고로 우리는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는 거예요.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가지 시련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이에요.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내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것이 인내요. 사람은 임종시에 세 가지를 후회한답니다.
첫째가 좀더 베풀 걸,
둘째가 좀더 즐길 걸,
셋째가 좀더 참을 걸. 참지 못한 유감이 우리 마음을 임종시에 괴롭힌다고 합니다. 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대만의 역사가이자 사학자이자 작가인 백양이라고 하는 분이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일본사람하고 미국사람하고 중국사람 세 사람이 밀폐된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돼지가 있는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상금을 걸고 인내심 경기를 하게 됐습니다. 누가 오래 참나 보자. 일본사람 들어가자마자 아이고, 숨 막혀 못 견디겠다고 나왔고, 미국사람 어지간히 견디더니 "아이고, 이제는 실신하게 되어서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나왔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중국사람이 안 나옵니다. 심사위원들이 들어가 보니까 돼지를 떡 베개하고 누워 자고 있더랍니다. 이 중국작가는 말합니다. 이것이 중국사람이라고. 이것이 중국사람의 저력이라고. 여러분 인내로서 승부가 결정이 됩니다. 얼마나 참느냐, 얼마나 잘 참느냐, 얼마나 넉넉하게 참느냐, 얼마나 어엿하게 느긋하게 참아내느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말든 내가 어엿하게 대처하면 그게 생각에 속도를 가하는 거예요. 변화를 즐겨야 합니다. 겁내지 맙시다. 파도 타기하는 청년들처럼 파도가 밀려오면 타고 즐기는 거요. 세상 파도 무서워하지 맙시다. 우리 앞에는 확실한 약속의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기도-하나님 아버지, 각컨데 넉넉히 참을 수 있었던 일에 참지 못한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인내가 부족함으로 해서 많은 실수가 또 있었습니다.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이 급변하는 세대에서 우리의 마음은 고요하게 하시고 넉넉하게 잘 수용하면서 참고 견디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승리할 수 있는 주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넉넉히 이기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렇다면 이건 문제지요. 그런고로 최종목표 궁극적 가치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변화에 속도가 가해진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에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의 철학이 이것을 따라잡지 못한다 할 때에 우리의 도덕이 이걸 함께 가지 못하고 소화하지 못할 때 세상은 아주 망가지고 마는 겁니다. 인생도 다 망가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단히 중요한 오늘 이 세대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큰 변화, 속도가 가해진 무서운 변화 속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이 변하는 세대의 속도와 함께 나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생각을 변화시키고 있느냐. 이제 그 변화의 속도와 생각의 속도가 일치하게 될 때 거기에 안정이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면 내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자동차가 달립니다. 내가 서있을 때 보면 자동차가 급하게 달립니다. 그러나 내가 차를 타고 빨리 가는 차와 똑같은 속도로 가면은 두 차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전 하나 재미있는 걸 하나 늘 느낍니다. 내가 운전을 할 때는 내가 모는 차의 속도와 내 생각의 속도가 같이 가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가도 빨리 간다고 느끼질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이거 안되겠는데' 좀 천천히 가라고. 그게 불안해진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운전대를 잡으면 안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생각의 속도란 말입니다. 가장 큰 성공의 비결은 안정의 비결은 변화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와 함께 내 생각의 속도에 가속을 붙이는 겁니다.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어엿하게 때로는 고요하게 넉넉하게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인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반항이나 저항이나 혹은 거부라든가 혹은 증오라든가 혹은 굴복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여기 인내하고 하는 말, 휴퍼모네라고 하는 말은 어엿하게 대처한다, 넉넉하게 수용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대한다, 이것이 인내올시다. 자 이제, 우리는 인내를 생각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인내를 생각합니다. 인내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비유, 탕자의 비유를 보십시오. 아버지 하나님은 이렇게 참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탕자가 탕자 됩니다. 그 탕자 됨을 참아주십니다. 그가 집을 나갑니다.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참아주십니다. 그가 가서 어떻게 될 걸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 변화를 참아주십니다. 그가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때에 그를 영접해 주십니다. 아버지의 인내,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인내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 좋은 아버지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넉넉합니까, 얼마나 어엿하게 인내하셨습니까. 다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라고. 히브리 12장에 보면 역력히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참으사'그랬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시는 예수를 보세요. 그 모순과 부조리한 그 십자가, 그리고 빌라도 법정에서 말이 없으신 예수. 빌라도가 뭐라고 하든 제사장이 뭐라고 하든 예수님은 벌써 뜻하신 바가 있어서 조용하게 참으시고 오히려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까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인애하심.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내가 있어요. 이것을 본받으라. 또 있어요. 그것은 죄인들이 거역한 자, 죄인들의 거역함을 참으시는 예수를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멀리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렇게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지금 본 직책을 버리고 갈릴리에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찾아가서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조반을 대접하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내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허물, 우리의 나약함을 다 참아주셔서 엄청나게 참아주셔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의 인애하심, 깊이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다시 본문 성경은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 야고보서에서는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을을 기다리는 것처럼, 또 다시 야고보서에서는 말합니다. '욥의 인내를 배우라 그리고 본을 삼으라', 욥기를 우리가 압니다. 물질과 가정과 재산과 건강과 의를 다 잃어버렸어요.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이 많은 고생을 치르나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꾸준히 기다립니다. 인내합니다. 욥의 인내. 그래서 그 결말을 봅니다. 욥은 다시 큰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욥의 인내를 배우고, 그 결말을 보고, 그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믿음 없는 인내는 고통입니다. 소망이 없는 인내는 절망입니다. 결국은 믿음과 소망, 이것이 그 속에 있을 때 넉넉하게 어엿하게 참아나갈 수 있는 것이올시다. 오늘 본문 성경에서 인내의 지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참을 것이냐고요. 먼저는 시련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어려운 일 당할 때 이 이유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 아주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팩(M. Scott Peck)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더 로드 레스 트레블드(The Road Less Traveled)'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아직도 가야할 길' 그렇게 번역이 됩니다. 이 책에서 많은 정신병자들을 치료하면서 정신병이 왜 걸렸을까 또 어떻게 해야 정신병자가 나았나 어디서부터 치료가 되기 시작하나 그의 많은 경험과 지식으로 이렇게 요약해서 말해줍니다. 맨 먼저 중요한 것은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벌써 50%는 병이 낫는답니다. 내 불행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세상에 있다고, 남을 원망하는 동안은 절대로 병이 낫지 않습니다. 이건 구제불능입니다. 그걸 알아야합니다. 애당초 정신병 걸린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 불행의 원인이 나 외에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하면서부터 병에 걸리는 겁니다. 억울하고 분해서. 그러나 '이것이 나 자신의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벌써 치료가 되기 시작을 합니다. 그걸 말하고 그걸 설득하는데 그렇게 어려운 시간이 걸립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이 고통은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내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인간을 위하여, 나의 생각을 위하여, 나의 철학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이 시련은 유익한 것이다. 이걸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 이것을 통해서 발전하고, 이것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궤도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건 앞에 진실해지고, 그리고 삶의 균형을 잡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당한 지금 어려움에 몰두하지 아니하고 좀더 멀리 떠나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마음의 균형을 잡게될 때 치유는 가능하게 되더라, 하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씀합니다마는 '시련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인내의 시작입니다. 또한가지는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초점을 믿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게 하고,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믿음을 온전케 합니다. 그것이 시련이 있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40년을 헤맵니다.
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만나를 일년 분을 한꺼번에 주지 아니하시고 매일매일 주십니다. 아침마다 거둬들여서 식사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 신명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시간시간 매일매일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이 시련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믿음,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자,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때때로 물질이 중요하고, 명예가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지만 좀더 달관된 세계에서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은 오직 믿음만 중요합니다. 깨끗한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시련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걸 인정해야 하고, 또한가지는 이 시련은 시련이지 시험이 아니라는 겁니다. 같은 개념같이 보이지만은 시험이란 부정적인 의미가 있고, 시련이란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시험은 남을 넘어뜨리게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가하면 시련은 이것을 통해서 강하게 만든다는 뜻이 있어요. 마치 훈련과 같은 거예요. 그런고로 이 사건 속에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말씀에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구비한다는 말은 헬라 원문대로 하면 완전 무장한다는 뜻입니다. 군인이 무장을 하고야 일선에 나가잖아요. 제가 최일선에서 군인으로 있을 때 보니까요 이제 전쟁의 실전에 나가게 되면요 탄약을 쭈욱 갖다놓고 수류탄 많이 갖다놓고 가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지고 가라 그래요. 그래서 군인들의 옷이 그렇게 얼기설기한 거예요. 모조리 갖다가 수류탄을 여기다 걸고, 여기다 걸고, 허리에다 띠고, 또 탄알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져갈 생각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욕심 많게 많이 가져다 넣고 일어서질 못해요. 왜요 어떻게든 이걸 가지고 가야하거든요. 맨손으로 싸우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비해야 합니다. 이 시련을 통하여 계속 훈련을 받아서 강인하게 훈련을 받아서 채워나가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고칠 것을 고치고,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고, 깨달을 것을 깨닫고, 사랑할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시련을 통해서. 이것을 알고 인내하시는 거지요. 이것을 알 때에 참을 수 있는 거지요. 유익한 것이니까. 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니까. 그런고로 또한가지 오늘 성경말씀에 아주 중요한 요절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기쁘게 여기는 것, 그리함으로 그게 참는 거예요. 여러분 참는다는 거, '두고보자' 이거예요. 이를 갈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신세 타령하면서, 그건 참는 게 아니에요. 찬송을 불러야 참는 거예요. 기쁘게 여겨야 참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서 말합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로 앎이니라. 인내가 필요해요. 소망이 필요해요. 그런고로 우리는 환난 중에도 기뻐한다는 거예요.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가지 시련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 것입니다.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내할 수 있는 비결이에요.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내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것이 인내요. 사람은 임종시에 세 가지를 후회한답니다.
첫째가 좀더 베풀 걸,
둘째가 좀더 즐길 걸,
셋째가 좀더 참을 걸. 참지 못한 유감이 우리 마음을 임종시에 괴롭힌다고 합니다. 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대만의 역사가이자 사학자이자 작가인 백양이라고 하는 분이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일본사람하고 미국사람하고 중국사람 세 사람이 밀폐된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돼지가 있는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상금을 걸고 인내심 경기를 하게 됐습니다. 누가 오래 참나 보자. 일본사람 들어가자마자 아이고, 숨 막혀 못 견디겠다고 나왔고, 미국사람 어지간히 견디더니 "아이고, 이제는 실신하게 되어서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나왔어요. 아무리 기다려도 중국사람이 안 나옵니다. 심사위원들이 들어가 보니까 돼지를 떡 베개하고 누워 자고 있더랍니다. 이 중국작가는 말합니다. 이것이 중국사람이라고. 이것이 중국사람의 저력이라고. 여러분 인내로서 승부가 결정이 됩니다. 얼마나 참느냐, 얼마나 잘 참느냐, 얼마나 넉넉하게 참느냐, 얼마나 어엿하게 느긋하게 참아내느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말든 내가 어엿하게 대처하면 그게 생각에 속도를 가하는 거예요. 변화를 즐겨야 합니다. 겁내지 맙시다. 파도 타기하는 청년들처럼 파도가 밀려오면 타고 즐기는 거요. 세상 파도 무서워하지 맙시다. 우리 앞에는 확실한 약속의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기도-하나님 아버지, 각컨데 넉넉히 참을 수 있었던 일에 참지 못한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인내가 부족함으로 해서 많은 실수가 또 있었습니다.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이 급변하는 세대에서 우리의 마음은 고요하게 하시고 넉넉하게 잘 수용하면서 참고 견디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도 승리할 수 있는 주의 사람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넉넉히 이기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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