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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자유인 (요8: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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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호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 가운데 '대 심판관'이라고 하는 유명한 명작소설이 있습니다. Great Inquisitor 라고 하는 소설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다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체포하고 대 심판관이 여기서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하는 그런 내용으로 장면이 전개됩니다. 심판관의 말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는 인간을 너무 존귀한 존재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인간이란 바로 유치한 아이와 같아서 권위와 기적으로 영도되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들에게 빵을 주었다면 너는 쉽게 성공했을 것이다. 인간은 빵만 쥐어주면 누구에게나 복종하는데 어째서 자유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도 결국은 그 자유를 발아래 내동댕이치고 다시 노예로 삼아 달라고 애걸복걸할 것이 뻔한 일이다"하고 말합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빵만 주면 누구에게나 순종한다. 자유를 주었댔자 그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바로 다시 또 다른 어떤 것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버리고 만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노예성이 있는 구제불능한 인간이라고 고발하는 그런 내용의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얼마나 자유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스스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정치적인 자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 자유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한 그릇의 빵을 위해서 양심을 팔아야 되니까요. 또 지식의 자유가 없는 자도 자유가 아닙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 만은 제가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대만을 처음 갔을 때, 좀 거리를 구경하고 싶어서 혼자서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다가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아 들어갔는데 내가 중국말 모르지요, 그 사람이 한국말 모르지요, 내가 영어를 하지만은 저 사람 영어 모르지요,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겁니다. 그 뭐 메뉴, 차림표라고 가지고 왔는데 빨간 글씨로 맨 중국말만 썼는데 그거 하나도 모르겠어요. 자 이거 먹기는 해야겠고, 정말 정말 답답하더만요. 그래서 할 수 없다, 거기에 있는 분을 소매를 끌고 가서 남 먹는 걸보고 저 사람 먹는 것 좀 달라고 손짓, 발짓해 가지고, 그래 한끼 얻어먹고 나온 일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거, 지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 얼마나 답답한 건 지, 뭐 감옥이 따로 없습니다. 이게 바로 부자유라는 것이죠, 자유함이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얼마나 비참한 노예적 상황에 있다는 것을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픈 줄 모르는 병이 죽는 병인 것처럼 이렇게 자기가 얼마나 지금 구제불능한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성경에 보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바로 그 유대인들을 향해서 정면적으로 아주 직선적으로 저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저들은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철저하게 노예상태에 있었습니다. 아주 불쌍한 정도로. 그들의 철저한 노예상을 예수님께서 지금 지적하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유대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노예 된 적이 없거늘 우리를 어째서 자유케 한다고 하느냐" 이 얼마나 웃기는 소리입니까. 아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 했잖아요, 바벨론 70년 포로생활도 했잖아요. 아, 역사 속에 노예생활 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자유인이다, 노예 된 적이 없다, 이건 허상이고요 또 자기 자신, 벌써 선민의 협소한, 스스로의 민족 우월감에 빠져있고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노예적이에요. 아주 비참할 정도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신학적 문제입니다.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어서 그 결과로 외식주의자들이 되어서 많은 종교 예식과 함께 허상, 거짓, 위선에 빠져 있잖아요. 그 율법에 매여서 벌벌 떨고 살고, 그 많은 계율에서 노예가 되어 사는 그 비참한 모습, 자기들이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 뿐입니까 기득권에 대한 아집입니다. 예수를 영접할 수 없는 것이에요. 자기 지금 현재에 있는 이 자기 처지, 바로 여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자기 고집, 자기라고 하는 그런 집착성, 여기에 매여있습니다. 이 기득권을 양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소중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건지 자기 스스로 모르고 있습니다. 때로는 좀 알지요. 깨닫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예수님의 이적 기사를 옆에서 보았습니다. 더욱이 상당한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느낌도 있지만은 그러나 자기 현재의 처지에서 물러서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하고 마침내 회개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자 이 사람들이 자유인입니까 엄청난 죄악의 노예상태에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인이다', 이게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얼마만에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대단히 중요한 전제를 내 놓습니다. "자유 문제는 죄 문제다" 이렇게 결론을 짖습니다. 정치경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거는 교육의 문제도 아니요, 자유의 문제는 바로 죄 문제라는 것이죠. 죄를 짓는 자 마다 죄의 종이 되니까요. 이것은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잘 살고, 못 살고는 얘기하지 맙시다. 좀 제대로 바르게 사는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바르게 사는 자유를 잃어버린 거예요. 어떤 사람이 셋방살이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니까 한평생 소원이 제발 좀 내 집 쓰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사 안 할 수 있으니까 좀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찌어찌 해서 집을 하나 마련했어요. 너무 좋아요. 그 때에 그 만족한 마음은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바로 몇 달 안돼 가지고 '집이 왜 이렇게 작아 남의 집들은 크더만, 이게 요렇게 조그매 가지고 답답해서 살수가 있나.' 좀 큰집, 좀 큰집이 있어야 자유롭겠다고 몸부림을 쳐서 또 애써서 큰집을 마련했습니다. 좀 무리하게 하고 나니까 이젠 집이 커서 좋다, 했더니요 청소하는 게 힘들더랍니다. 또 그런가 하면 집이 크다보니까 작은 집 쓰고 사는 사람들 친구들 만날 때마다 이거 돈도 없는 사람이 집만 큰 거 가졌다고 하는 거 비난하는 거 같아서 이거 또 따가워요. 마음이 좋지 않아요. 그런가 하면 밖에 나갈 때마다 도둑놈 들어 올까봐, 밤에 잘 때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집이 크니까 강도 들어 올까봐 걱정이 되어 가지고. 심지어는 누가 찾아 올까봐 교회도 못 나가요. 집을 비울 수가 없어서. 자 자유는 어디로 갔습니까 차라리 문단속 안 해도 될 만큼 살 때가 좋았는데,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죠. 참 자유라는 것은 그것은 경제문제도 아니요 정치문제도 아닙니다. 지위와 명예도 아닙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죄. 죄를 짓는 자마다 가책에 매이죠, 양심의 가책. 또 저주의식에 매입니다.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은요 감기만 걸려도 죄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조그만 자동차 접촉사고만 나도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벌벌 떨면서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디 자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또 그런가 하면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죄를 반복하는 죄를 짓습니다. 죄에 끌려서 또 다른 죄, 또 다른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죄의 영향을 받아서 성품도 파괴되고 맙니다. 그래서 거짓되지요, 변명의 사람이 되지요,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되지요, 무능한 사람, 무지한 사람, 그리고 아무 것도 없으면서 속에 쓸데없는 교만만 남았어요. 이러한 인간, 정말 살고싶지 않은 그런 비참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죄의 값은 사망이니까요.
그렇다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유함의 근본이에요. 돈 벌어 자유하는 거 아니에요. 출세해서 자유하는 거 아닙니다. 오직 죄로부터 자유할 때만이 내 영이, 내 인격이 자유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또 소중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자유케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어떻게 해야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느냐하는 거지요.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그랬어요. 이게 비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영접해야 되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되고, 주님의 말씀을 많이 깨끗한 마음으로 수용해야 되요. 그리할 때 나도 모르게 어느 사이에 진리를 알게 되요. 진리를 알게 되면 이제는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에요. 주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런데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 예수님이 그렇게 귀한 말씀을 전하는데 받아들이지 않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너희 마음 내 말이 거할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욕심과 시기 질투로 가득차 있으니 주님의 말씀이 들어갈 곳이 없어요. 그래 하시는 말씀이예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면 너는 자유케 되리라. 말씀이 내 안에 밀려올 때 내가 매여있던 이 많은 쇠사슬이 다 풀려나는 것이예요. 그걸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유명한, 여러분 잘 아시는 지미 카터가 The Virtues of Aging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여러분 다 읽어보신 줄 압니다. 제가 언젠가도 한 번 말씀을 드렸는데 그 책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자가 묻기를 "당신은 대통령도 했고, 세계를 호령하면서 여기저기 큰 일도 많이 하고 했는데 참 많이 행복한 날, 가장 즐거웠던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평생 지내오면서 최고의 때가 언제였습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지미 카터의 유명한 말은 이렇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다 그만두고, 다 은퇴하고, 지금 농촌에 있지마는 바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왜 가장 자유로우니까. 이제 아무 걱정도 없어요. 아무 미련도 없어요. 내 영혼이 가장 자유롭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반생을 살아오면서 그 언제가, 언제가 가장 최고의 해였습니까 어떻게 되면 최고의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위대한 사람의 고백은 이겁니다. 바로 지금이라고. 지금은 내 영혼이 온전히 자유하고 있으니까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이러한 고백이 아쉽습니다. 진리를 알아야합니다. 아는 문제입니다. 진리를 깨달아야합니다. 진리를 깨달을 때에 그 속에서 내 가치의 존재를 찾고, 삶의 의미를 찾고, 내게 주어진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내가 받아들여야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여러분 내가 스스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물에 빠져서 이제 홍수에 떠내려간다고 합시다. 내가 내 머리카락을 내 손으로 추켜올린다고 해서 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겁니까 몸부림 쳐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이젠 적어도 이건 알아야지요. 내 노력, 내 수고, 내 의지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요. 이제는 주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하는 길 외에 자유케 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특별히 여기에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다시 말씀하기를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간단한 말씀이요, 우주적인 진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메시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비로소 자유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로 사망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실 것을 말씀하는 겁니다. 그 약속입니다. 뉴욕에 브르클린에 플림마우스(Plymouth)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여기에 1928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예배 끝났을 때쯤 되서 손을 들고 "목사님 죄송하지만 딱 한번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저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 주세요" 그 너무 간절해서 허락을 했어요. 이 할머니가 이 강대상에 올라와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68년 전 이야기입니다"그래요. 68년 전 날짜까지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860년 9월 19일, 그 날은 주일날이었습니다. 저는 이 교회당 바로 마당에서 거기서 노예시장이 열렸는데 저는 노예로 팔려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경매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딴 곳으로 노예로 팔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어떤 집으로 팔려가게 되나, 내 운명은 어떻게 되나, 초조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방금 이 예배를 마치고 이 교회에서 나오는 목사님이 나를 붙들고 800불을 주고 나를 사서 그 시간에 나를 자유하게 해 주었습니다. 듣자하니 그날 우리가 어찌할 수가 없지만은 우리가 오늘 헌금을 해서 노예 한 사람이라도 자유를 줍시다, 해서 헌금한 돈을 가지고 저를 사서 풀어주어서 내가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고로 이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68년 동안 이 교회에 출석하며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는데 이제 내가 나이 많아서 죽을 때가 가까왔기에 이 말을 꼭 하고 가야겠기에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 노예가 스스로 자유할 수 있습니까 팔려 가는 노예가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정욕과 죄와 시기, 질투, 저주로 지금 완전히 노예된 인간이 스스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러서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 해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오늘 말씀대로 아들에게만 자유함이 있어요. 노예는 자유가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그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학자인 아이자야 베를린(Isaiah Berlin)이라고 하는 분은 Four Essays on Liberty라고 하는 책에서 이렇게 자유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Negative Liberty, 소극적인 자유가 있고 Positive Liberty, 적극적인 자유가 있다.
그런데 소극적인 자유는 어떤 간섭이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여기서 벗어나는 자유, 그런고로 Freedom from Something, 그러한 자유가 있고요. 또 하나는 Freedom for Something, 무엇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 자유를 버리는 자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만 가지고는 자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선한 일에, 의로운 일에, 사랑에 노예가 될 때 자유할 수 있어요. 미워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내 자유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에요. 용서하고 사랑할 때만, 사랑하는 자만이 자유인이 되는거요. 영국의 교육 철학자인 알 에스 피터스(R.S. Peters)는 Paradox of Freedom이라고 하는 아주 재미있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유의 역설! 왜요 큰 자유를 위해서 작은 자유를 버려야 되니까요. 작은 자유를 버릴 때에 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 자유의 역설이 있습니다. 내 정욕, 시기, 교만, 이 우스꽝스러운 자존심, 이 끝없는 욕심, 깨끗이 버려요. 그리고 주님을 영접할 때만 비로소 참 자유, 큰 자유,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십자가의 진리를 알고 비로소 그 지불된 값을 할 때, 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소중한 존재로 발견됩니다. 나는 진리의 노예가 되고 진리는 나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영원한 노예로, 영원한 사랑의 노예가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자유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인만이 건강합니다. 이 자유인만이 행복합니다. 이 자유인만이 창작적, 창의적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만이 21세기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손에 무엇이 있던 없던 그거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이 나를 향하여 뭐라고 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이 자유할 때만이 영원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기도-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졌고 얼마나 비참하게 쇠사슬에 묶여있는지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저희들을 자유케 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얼마나 고귀한 값이 주어졌고 나의 자유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을 알아서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고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세상 그 무엇의 노예되지 않은 영원한 자유인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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