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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백성들의사회적사명 (창18:22-33)

본문

쟌 던이란 유명한 시인의 시 가운데 보면 인간은 각기 떨어진 외로운 섬이 아니다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더불어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임을 가르치고 있는 말입니다. 인간의 사회성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사회적으로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회성의 한 반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은 단순히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신관을 갖고 있다는 기독교 신관의 독특성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창세기1장을 보시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여기서 말씀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데 창세 이전부터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계셨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인격적 관계 속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 따라서 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도 관계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존재로 지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사회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회성 때문에 인간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낳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이 사회 속에 살아갈 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신 바였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그리스도 인들의 사회적 소명 소위 social mission 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 기대에 즉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모본적인 응답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지역 사회가 죄로 말미암아 가라앉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위기 앞에 직면한 것을 알았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시대에 자기의 방법으로 그 사회적 소명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자, 오늘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로 이와 같은 때에 여기서 어떻게 우리들에게 맡겨진 사회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번 목요일날 또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이런 계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인으로서 어떻게 사회적 소명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로 먼저 우리는 중보기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중보기도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지역 사회를 심판하시겠다는 그 심판의 의도를 알아채는 즉시로 아브라함은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본문 들어가기 직전 구절인 창세기18장의 20절과 21절의 말씀을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창세기18장 20절과 21절 함께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살고 있던 그 지역 사회인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 그 죄악 때문에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위기를 경고하셨습니다. 22절에,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22절에 보시면 그 사람들이, 즉 심판을 경고했던 하나님의 천사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자, 이 경고를 받자 마자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22절에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이 충격적인 경고를 받자 아브라함은 그 자리를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절에 보시면 23절에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즉 즉각적으로 기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일을 놓아두고 다른 모든 일을 제껴두고 자기 지역 사회를 위한 즉각적인 기도에 들어갔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를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의 중요성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도 사역의 우선 순위를 그 priority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 아닌가요 우리가 디모데전서 2장1절 이하에 보시면 바울은 소위 이것을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할 때 주님의 세우신 지도자로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느냐를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먼저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여기서첫째로 권한다는 말은첫째로둘째로 란 말이 아니라 네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있다. 그것은 너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다. 특별히 높은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왜 높은 사람일까요 하나님도 높은 사람을 선호하시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법을 제정하고 법을 집행할 때 그들의 정책 결정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보시면 여기 디모데전서 2장 2절에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그들의 결정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의 우선순위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의 내용들은 어떤 것입니까 대부분 어떤 기도하십니까 아니 기도를 하시긴 하십니까 어떤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 내용이 도대체 뭐냐 말입니까 아마도 대부분 우리들의 기도는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이 나 자신을 위한 기도, 기껏해야 우리 자식들을 위한 기도, 아마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젊은 목사님이 하도 안타까워서 여러분, 밤낮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좀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십시다.
.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우리 부모를 위해서도
기도하십시다.
. 그러면서 오늘은 여러분 절대로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셔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중보기도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자신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부모까지는 괜찮아요. 부모를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자신은 안 됩니다. 돌아가면서 기도를 시켰어요.
그런데 어떤 자매가 이렇게 기도하더래요. 이 자매가 아마 old Miss였던 모양이에요. 노 자매인데 자신의 차례가 오자 기도를 시작하기를 하나님 오늘은 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부모에게 좋은 사위가 필요하오니 사윗감을 주옵소서. 이 에피소드는 우리의 기도가 그 이기심이라는 영역을 벗어나기가 힘든가를 보여주는 사건일 것입니다. 자, 때가 때이니 만큼 여러분,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세요. 정말 공명선거를 위해서 기도를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들이 정말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기도를 응답하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중보기도의 책임을 먼저 감당할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중보기도의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할 일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의인들을 찾아 세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의인들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자, 아브라함이 이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 도성에서 의인 오십 명만 찾으면 하나님 이 도성을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멸망시키지 말아주십시오. 왜 아브라함이 오십 명에서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을까 잘 모르겠어요.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집단을 카운트할 때 셀 때 기본적인 단위가 백 명이었다고 합니다. 아마 백 명 중에서 오십 명을 생각했을 지 모르죠. 하나님, 절반만 오십 명만 찾을 수 있다면 이 도시를 봐 주십시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절반만 의롭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 사회에 절반은커녕 한 사회에 한10%만 의로울 수가 있다면 그 사회는 아주 건강할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아니 바다에는 소금이 4%만 있어도 그 바닷물은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한국 땅에 기독교인의 숫자만 개신교도 19% 가톨릭까지 합쳐서 약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총체적인 부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책임을 다 못한 것이에요. 자, 우리 민주사회에서 투표 행위라는 것은 의인을 찾아 세우는 그런 정치적인 행위,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물론 사람이 추구하는 의, 사람들의 의인됨, 이런 것은 아주 상대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의와는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하는 의는 모두가 상대적인 것입니다. 거기는 어떤 질적 차이가 있어요. 엄격하게 말하면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의 가르침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 의인은 없나니 뭐예요 한 사람도 없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어떤 장난을 좋아하는 젊은이 한 사람이 런던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유명인사 20명의 리스트를 작성한 다음에 그 20명에게 일제히 같은 메시지의 텔리그램을 전문을 보냈습니다. 그 전문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났습니다. 즉시 피신하기 바람. 그 이튿날 20명이 런던 시내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 모두가 부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간의 죄인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의인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의인, 어떤 의인일까요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시면 아브라함의 일생을 통해서 이미 의라는 개념이 창세기 15장에서 나타났습니다. 자, 아브라함도 허물 있는 사람이고 아브라함도 약점 있는 사람이고 아브라함도 많은 잘못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standard로 수용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결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었을 때 창세기 15장 6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 내가 의인되려면 먼저 하나님 믿어야 되요. 내 부족과 내 죄인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의의 출발입니다. 그러나 내가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해서 의의 종착역이 아니예요.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성도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부터 그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를 통해서 날마다의 삶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완전히 닮을 수는 없지만. 완전히 닮을 수 없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예요. 여기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의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닮으라고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가 추구하는 의는 상대적인 의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는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의로우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닮아갈 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도대체 이번 후보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아무리 봐도 의인이 없는 것 같다. 죄다 다 악질 같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뽑을까요 신학자 가운데 라인홀트 니버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윤리를 통한 신학을 전개했는데 이 사람의 신학적 입장을 가리켜서 기독교 현실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어요. 오늘 우리들의 대부분의 선택은 의와 불의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선택은 큰 악과 작은 악 소위 greater evil과 less evil 커다란 악과 작은 악 사이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별수 없이 보다 적은 악을 선택한다. 이것을 선거에 적용한다면 후보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 그렇게 깨끗한 것 같지 않다. 그러면 그 사람 중에서 덜 부패한 사람, 후보가 한 사람 와 있으니까 얘기하기가 곤란하네. 어쨌든 두 사람이 다 부패했으면 덜 부패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이것이 라인홀트 니버가 가르쳐준 실제적인 지혜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투표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는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치를 외면해 온 것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실제로 정치판이 더 더러워졌는지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 책임이 있죠. 그래서 오죽하면 이런 유머가 생겼어요. 이미 한 시절 지나간 유머입니다만. 한강에 국회의원과 수녀가 빠졌는데 119구조대원이 오더니 국회의원만 건져내더래요. 그래서 아니 거기 수녀님 있는데 수녀님 놔두고 어떻게 국회의원을 건져내느냐고 그러니까 구조대원이 대답하기를 국회의원 그대로 놔두면 한강물이 오염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우리 시대상을 잘 풍자해주고 있는 얘기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나은 사람, 가급적이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애쓰는 사람, 이런 의인들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의 마음에 근접한 사람을 찾고 세우기 시작할 때 그만큼 우리 사회는 건강해 질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우리의 사회적 소명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의인들을 찾아 세우는 도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사회적 사명 가운데 또 하나는 우리는 우리 사회가 의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의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오늘 아브라함의 기도 속에 나타난 하나님관,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기도문을 보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선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수위를 넘자 하나님은 그 도성을 심판하시겠다고 작정하십니다. 여기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심판 행위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사회를 심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얼굴만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있습니다.
자, 24절 한 번 읽어보시죠. 본문의 2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18장 24절 다같이 시작.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무엇을 어필하고 호소합니까 하나님 의인 오십을 찾아 세운다면 이 성을 어떻게요 용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용서를 호소해요. 하나님 용서하신다고 그랬어요 안 하신다고 그랬어요 그 다음에 보시면 2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여기 내가 용서하리라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용서하리라.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왜 용서하시는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자비의 하나님, 그리고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 긍휼의 속성 혹은 사랑의 성품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십니다 단 회개할 때. 회개할 때 용서하세요. 만약 우리가 죄를 돌이키고 주 앞에 나와서 그의 용서를 구한다면 회개한다면 주님은 기쁘게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용서하리라. 그제인가요 몇 일전에 국회의원 후보들의 전과 사실이 신문에 공개되었습니다. 참 놀랐습니다. 이렇게 전과자가 많은가 그래서 놀란 것은 아니구요 그렇게 많을 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제가 놀라운 것은 해명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 해명을 보고. 다 억울하신 분들이더라구요. 한 분도 죄인은 없어요. 다 억울하시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유심히 보았습니다. 유심히 관찰해 보니까 꼭 한 분이 내 과오를 인정한다 유감을 표명한다 이렇게 썼더라구요. 유감을 표명한다. 제가 그 지역구 주민이라면 두 번도 보지 않아요. 그 사람 찍어요. 저는 이번 후보들 가운데 소위 기독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교회 올 때마다 성경을 공부할 때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무얼 배웠습니까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의 회개를 전제로 용서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정직하게 자기의 잘못과 과오를 인정할 수가 있다는 것, 이것이 용기에요. 이것이 감동입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이 없다 말이죠. 수많은 기독교인 후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과오를 인정한다 이런 감동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안타까웠습니다. 그것이 저를 놀라게 한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의와 사랑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와 사랑의 균형.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팔복을 읽어보시면 팔복의 첫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둘째 혹시 성경 읽어 보셨습니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 다음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 다음에 뭐예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축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의에 대한 강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 다음에 어떤 강조가 나옵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의 다음에 바로 긍휼이 따라 와요. 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standard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에 미칠 수 없는 우리의 불의함, 우리의 추악함,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한 긍휼히 여기는 자를 축복하신다. 의 다음에 긍휼이 강조되었어요. 의와 사랑의 밸런스, 이 균형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 아니예요 십자가의 메시지. 그는 우리의 죄를 그냥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불의한 인간, 죄를 범한 인간을 심판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 그래서 전 인류의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짊어지우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심판하셨습니다. 공의는 집행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인류의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정의의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만약 그 분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끝나요. 우리는 그 분 앞에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심판하는 대신에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를 내 허물과 내 죄를 예수에게 대신 짊어지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함으로 그가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진노를 대신 받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그 놀라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 우리는 십자가에서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회, 어떤 사람, 어떤 사회일까요 이 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입니다. 의를 추구하되 동시에 사랑과 긍휼을 동시에 추구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정의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가 빠져버린 사랑만 구하는 사회, 그 사랑은 감상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만으로는 한 사회를 향한 올바른 제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이 없는 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 빠져버린 의, 그 의라는 것은 아주 냉혹하고 잔혹한 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빠져버린 의만으로는 사회 변혁의 에너지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인간을 감동시킬 수가 있습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감동할 수가 있어요.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와 사랑의 균형을 밸런스를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레슨이 있다면 본문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challenge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인의 존재 여부입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의인이 있느냐 이 의인됨을 추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또 그 의를 확산하고 있는 또 그 의인의 확산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느냐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도전은 나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에게서부터. 우리는 쉽게 정치인들을 비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나는 여러분은 우리는 주 앞에 어떤 사람입니까 나에게서부터. 나는 얼마나 의의 사람이고 나는 얼마나 사랑의 사람이고 나는 얼마나 정의에 목말라 하며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인가 말이죠.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돼요 이 질문은. 저는 늘 아브라함의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안타까운 게 하나 있어요. 하나님, 오십명 의인 찾으면 봐 주실래요 사십 오명 찾아볼께요 안 찾아지거든요. 사십명 찾으면 하나님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삼십명 찾으면요 이십 명 찾으면 하나님 용서해 주시겠어요 하나님 열 명만 찾으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열 명에서 끝났을까 그게 안타까운 거예요. 하나님 부족하지만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봐서 한 번 봐 주십시오. 저는 그렇게 기도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성경에 보시면 예레미야 5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한 사람의 중요성. 한 사람의 중요성은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해요 나 한 사람이. 내가 의의 불을 켤 때 의의 등불을 켤 때 이 등불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금년 초에 남성 세미나할 때 저 유명한 초대 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말을 인용한 것을 여러분 아마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한 명이 진지하게 의를 추구한다면 그리고 그 한명이 열명이 될 수가 있다면 그 열명이 오십명이 되고 오십명이 백명이 될 수가 있다면 그리고 백명이 천명이 될 수가 있다면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촛불을 켤 수가 있다면 그리고 그 촛불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점화될 수가 있다면 열개의 촛불이 된다면 캄캄한 밤 백개의 촛불이 빛난다면 마침내 그 촛불이 천개의 촛불이 빛날 수가 있다면 우리의 어두운 도시는 그 만큼 환해질 수가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도전입니다. 자, 결론을 맺겠습니다. 목요일날 여러분, 선거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첫째로 하실 일은 투표하셔야 돼요. 투표할 때 중요한 것은 지역주의에 좌우되지 마십시오. 학연에 좌우되지 마십시오. 그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인물을 보세요. 사람을 보세요. 그리고 인물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정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어떤 정책을 주장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정치를 해온 사람이라면 어떤 정책 법안을 입안해온 사람들인가를 주의 깊게 관찰해 보십시오. 그리고 새로 나오신 분이라면 어떤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가, 혹시 그 정책이 당선되기 위해서 허황된 실현 불가능한 정책은 아닌가, 그 정책을 보세요. 그리고 정책의 내용이 얼마나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서 흥왕 할 수 있도록 얼마나 진지한 그런 의로움에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가를 여러분은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진지하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무슨 기도를 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밝힐 수 있는 사람들이 당선될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공명선거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그렇게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우리 교회 젊은이들에게 도전하고 싶어요. 나이 많은 분들도 할 수가 있지만 특별히 젊은 분들. 조금 시간을 내어서 이번 선거가 금권 선거가 되지 않도록 타락한 선거가 되지 않도록 이 선거의 감시자가 되어 주십시오. 아래층 내려가시면서 사인도 하시고 공명선거에 서명도 하시고. 실제로 이 선거가 거룩한 선거가 되고 제대로 된 공명한 선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선거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수가 있다면 우리 나라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 그러면서 사랑이 풋풋한 사회가 될 수가 있다면 그리고 이 사회를 밝게 하고 맑게 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조 할 수가 있다면 우리의 모습을 우리를 불러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고 의로운 백성이 되게 하시고 사랑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던 우리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말이야 세상의 빛이야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야.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조용히 함께 더불어 기도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땅, 이 나라, 지구상의 최후의 분단국가, 아직도 나누어져 있는 유일한 지구상의 국가, 남과 북의 형제들이 서로 대적하고 아직도 총칼을 겨누고 있는 유일한 나라, 조그만 나라,
그런데 이 남쪽에서도 다시 지역주의로 갈라지고 상처받고 있는 나라, 선거 때가 되면 아직도 부정선거가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이 어두운 나라, 이 아픔의 나라, 그러나 버릴 수 없는 나라, 포기할 수 없는 나라, 내 어머니가 문둥이 여도 어머니 문둥이를 포기할 수 없는 자식처럼 포기할 수 없는 조국, 기도할 수밖에 없는 조국, 상처받은 이 땅, 하나님, 이 땅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 땅을 고쳐주시고 이 땅을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땅을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는 먼저 나부터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나부터 좀 더 정결해지게 하시고 나부터 좀 더 의로워지게 하시고 좀 더 거룩해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목마르게 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 마침내 우리가 등불이고 우리가 소금이고 우리가 빛인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 사회가 우리 한국이 역사의 이 말기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붙들리어 선교 한국으로 복음의 등불을 켜는 나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선거를 앞두고 이 땅 이 민족을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이 나라를 새롭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이 나라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의 죄 많음과 우리의 불의함을 주 앞에 자복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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