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은혜 (창20:1-7)
본문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작품 가운데 아주 유명한 작품인 죄와 벌이라는 그런 작품이 있죠. 이 죄와 벌이란 개념은 기독교가 가진 아주 중요한 원리인 율법의 원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죄를 범하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기독교가 율법의 원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약 율법으로만 우리를 다루셨다면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을 지 모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아이언 사이드란 목사님이 계셨는데 한 번은 회의를 주장하는데 어떤 젊은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목사님 법대로 합시다 라고 아주 인상을 쓰면서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법대로 합시다. 이때 아이언 사이드 목사님은 젊은이에게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하나님이 그대를 법대로 다루셨다면 자네는 지금쯤 지옥에 가있어야 마땅할 걸세. 하나님은 율법의 원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폐기된 것은 아니고 율법의 원리는 아직도 유효하지만 또 하나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은혜의 원리입니다. 은혜의 원리.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다루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적인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는 최근에 그의 베스트셀러를 내놓았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우리 교회에서도 추천되었기 때문에 아마 읽으신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이 책의 4장에서 그는 한때 영국에서 열렸던 비교종교학 회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교를 비교하는 학회가 열렸는데 그때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진 독특성이 도대체 무엇이냐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어디에 있느냐 이때 누군가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성육신 사건에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이야말로 기독교 교리요 신앙의 독특성이다.
그런데 어떤 분이 대답하기를
그런데 다른 종교의 문헌에 보면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또 누군가가 제시하기를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사상에 있지 않느냐라는 제기를 했습니다. 확실히 부활은 기독교 신앙과 교리에 독특한 사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부활신앙 위에서 우리의 교회는, 우리의 믿음은 세워져 갑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런데 다른 종교에도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자의 환생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바로 그때 저 유명한
C.S.루이스 교수가 들어와서 이런 대답을 했다고 그래요.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야 은혜에 있죠. 은혜. Grace 은혜에 있죠. 모두가 다 동의했다고 그래요. 은혜.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 그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한 에피소드, 사건은 죄와 벌의 사건이 아니라 죄와 은혜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다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합니다. 자, 그는 믿음의 조상, 믿음의 할아버지,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 되어야 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또다시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또 다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또 다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첫째 질문은 뭐냐 하면 정말 죄는 무엇이냐 두 번째 질문은 은혜는 도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이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느냐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느냐 이것이 질문입니다.
첫째 죄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죄, 죄의 성격, 죄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이 범한 죄에서 인간 죄성의 본질을 우리는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사건에서 본 죄라는 것은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죄는 반복적인 죄였고 의도적인 죄였습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죄를 범했고 또 그것은 매우 우발적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범죄였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그 죄는 반복적인 죄였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아브라함이 그랄 지방에 갔습니다. 그랄 지방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제일 남쪽 애굽과의 경계선 네게브라는 사막지역입니다. 여기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보고서 당신은 내 누이라고 그러라고. 와이프라고 그러지 말고. 그래서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와이프를 자기 누이로 소개하고 있는 거짓말하고 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죠. 어디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가 시작되는 창세기12장, 그때는 애굽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25년이 지나갑니다. 25년 후에 장소를 달리해서 애굽은 아니지만 그랄이라는 지역에서 아브라함이 똑 같은 죄를 범합니다. 물론 아름다운 아내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언제나 축복만은 아니다 라는 것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 안 생긴 아내를 데리고 살아도 괜찮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문제 때문에 한 번도 걱정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똑 같은 범죄를 여기서 저지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죄는 반복적인 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사실은 똑 같은 범죄가 아브라함의 자식 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26장을 한 번 찾아 보세요. 조금 더 가시면 창세기26장이 나오시는데 창세기 26장 6절에 보시면 누가 등장합니까 이삭이 등장합니다. 이삭은 누구죠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창세기 26장 6절에 이삭이 어디에 있었다구요 그랄에. 그러니까 똑 같은 사건입니다. 똑 같은 장소입니다. 본문하고.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어떤 사건입니까 26장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버지하고 똑 같은 범죄를 여기서 범하는 장면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뭐예요 부전자전이죠. 부전자전의 현장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죄가 이렇게 반복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죄를 헤어나지 못하고 또 죄를 범하고 또 죄를 범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또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리요. 아브라함의 죄는 반복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의도적이었습니다. 우발적이 아니라 그것은 계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조금 더 지나가서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솔직한 자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20장 13절을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이런 계획을 하고 내가 그 죄를 범하므로 나의 journey가, 나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의 범죄는 헤프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만 그럴까요 우리가 범하는 범죄도 상당히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핑계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인간의 범죄는 깊은 것입니다. 어두운 것입니다. 저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입니다. Totally depraved. 아주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내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나에게 성한 것이 없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의 현장이에요.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범죄를 알면서도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죄를 범하고 있는 현장을 보십시오. 여기에 죄의 뿌리깊은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죄만 보아서는 안 돼요. 동시에 은혜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알면서도 다시 또 다시 죄를 범하고 있는 존재인 아브라함, 이런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처사에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발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다루셨습니까 우선
첫째로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있진 않지만 본문의 맥락을 살펴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회개케 하시고 있어요. 회개를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회개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회개하자 내가 뉘우치자 단순히 인간의 자의식만 가지고 회개가 잘 안 돼요. 내가 목회하면서 사람들을 관찰을 하면서 상담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확실히 회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지 않으면 그 은혜가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탕자의 사건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탕자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너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죽인다. 그래 갖고서 탕자가 회개합니까 아니지요. 탕자가 모든 것이 다 떨어졌을 때 아버지가 나누어준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돌아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그냥 품꾼의 하나로 종의 하나로 맞아주셔도 좋겠다. 기대를 가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힘없이 아버지의 자비와 그 아버지의 선처를 고대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기의 집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아버지가 먼저 봤어요. 그리고 달려 나오잖아요. 아마도 이 탕자가 한 걸음을 옮길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려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십니다. 많이 입을 맞추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습니다. 동네 사람을 초청합니다. 잔치를 엽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다. 그리고 나서 이
둘째 아들이 탕자가 무슨 고백을 했으리라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때 비로소 이
둘째 아들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오열하며 터져나오는 어떤 고백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이 아들의 가슴을 녹였던 것이고 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아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래서 회개라는 것은 너 회개 안 하면 죽어. 그렇게 해서 회개 안 돼요. 여러분 자식 기를 때도 양육할 때도 너 제대로 안 하면 죽인다. 공갈치지 마세요. 그래 가지고 자녀들 달라지는 게 아니예요. 조건 없이 사랑을 주세요. 그 푸근한 사랑, 그 넉넉한 사랑, 그 사랑에 녹아들 때 거기서 회개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아빠 나 정말 잘못 했어요. 은혜만이 인간을 돌이킬 수 있다.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을 회개케 한 것이에요. 아브라함은 아마 하나님 앞에 큰 일 날 줄 알았을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라도 아브라함에게 벼락을 쳤을지 몰라요. 야, 너가 믿음의 조상 자격이 있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치사한 범죄를 또 범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다가서지 않아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회개를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은혜가 있습니다. 또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라를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를 보호해주시는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사라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시집온 죄 밖에 없죠. 남편 따라 다니고 남편 하라는 대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이 사라가 불쌍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라를 보호하시죠. 어떻게 보호하십니까 그 사라를 자기 아내로 취하려고 했던 그랄 지방의 왕이었던 아비멜렉에게 밤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예요. 하나님 뭐라고 말씀했어요 그 여인은 아브라함의 누이 동생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누라다. 남의 마누라다 말이지. 건드리지 말라. 건드리면 죽어. 아비멜렉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나셨단 말이죠. 사라를 보호하신 거예요. 자, 이 사라를 보호하신 이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이다. 어떤 간섭 은혜의 간섭이다. 이 애처로운 여인, 이 불쌍한 여인, 이 사라를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간섭, 은혜의 간섭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직도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아브라함을 인정하십니다. 그의 범죄, 두 번씩 반복되는 이 범죄에도 불편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서부터 그의 사역자로서의 지위가 박탈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참 감동적인 구절이 7절인데요, 7절 다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그랬어요.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와요 그는 선지자다. 그랬습니다. 그는 선지자다. 나 같았으면 어떻게 이런 경우에 아브라함을 보고 말했을까 저 같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 같아요. 니가 선지자야. 니가 믿음의 조상이야. 오늘부로 믿음의 조상 끝, 선지자 사표 아마 이랬을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 아브라함의 죄, 이 반복적인 범죄, 의도적인 범죄에도 불구하고 또 아브라함의 실패의 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도 말씀하시기를 그를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선지자야. 너는 선지자라고. 내가 너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고. 그리고 네가 기도하면 내가 응답해 주시겠다고. 그의 실패 때문에 그의 좌절 때문에 그에게서 사역을 빼앗아가지 않으시는 하나님. 여전히 변함없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여기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 앞에 얼마나 자주 실수합니까 얼마나 자주 실패합니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우리를 향한 기대를 거두어 가지 않습니다. 나는 부끄러워서 나는 자격지심 때문에 하나님이 내 기도 들으실까 이미 주님이 아직도 나를 써 주실까 이런 계면쩍은 마음으로 주 앞에 어설프게 주 앞에 나와서 감히 입술을 열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때도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나는 아직도 너에게 기대가 있다. 너는 참 귀한 사람이야. 하나님의 사람이야. 내가 너를 쓸 계획이 있다고. 네 인생 속에서 아직도 너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예요.
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은혜가 어떻게 시작이 되는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 편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경험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 은혜라는 것은 조건 없이 하나님 편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을 잘 살펴보고 공부해보면 아브라함이 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어떤 상황적인 열쇠가 있어요. 이 부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흘러들어 오더라.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더라.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더라 라는 그 상황적인 열쇠.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한 이 상황적 열쇠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죄와의 대면입니다. 사람이 솔직히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대면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 저는 아까 우리가 읽었던 13절 말씀이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솔직한 자기 죄하고의 대면입니다. 어떻게 자기의 생애 속에서 죄가 시작되었는가 의도적인 죄악이 솔직히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털어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료의 시작이에요. 우리가 바로 죄를 부인할 때 거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인정할 때 그리고 자백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치유가 하나님의 용서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병 가운데 고쳐지지 않는 병이 참 많지만 그 중의 하나가 알코올 중독입니다. 일단 알코올에 중독되면 헤어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죠. 모든 중독이 그렇습니다 만은.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일단 거기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러한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연구가 됩니다. 의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연구가 됩니다.
그런데 현재 이 시점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프로그램 하나가 있는데 그것을 AA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AA프로그램. 소위 12단계를 거쳐서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인데 미국에서는 굉장히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이 프로그램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모두 12 step으로 되어 있습니다. 꼭 1주일에 한 번씩 주로 교회에서 모여요. 교회당을 빌려주고 그 곳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소그룹 미팅을 통해서 치료하는 모임인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도움을 받고 알코올 중독에서부터 빠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 치유의 첫 번째 단계가 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자, 알코올 중독자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신분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남자, 여자, 학생, 주부, 관리, 사업가 여러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단 이 AA프로그램에 오게 되면 처음에 이런 자기 소개로 어김없이 모임이 시작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알코올 중독자 이동원입니다. 혹은 마약 중독자 이동원입니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고백으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신분을 말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거기 오면 오직 신분이 하나예요.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있는 그대로 자기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게 치유의 시작입니다. 또 온전히 치유되기 전에 나는 치유되었습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사실 그대로 자기의 상태 그대로 정확하게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기의 상태를 바라보고 대면하고 인정하는 것, 이게 치유의 시작입니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그래 가지고는 치유가 안 된다 말이죠. 아브라함은 오래간만에 솔직하게 자기의 인생의 길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자기의 죄가 계획적으로 의도적으로 시작되었는지 그것을 아브라함은 아주 솔직히 대면하고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진지한 기도, 아주 진지한 기도. 17절에 보시면 창세기 20장 17절에 어떤 말로 시작이 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기 아내를 마누라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했을 때 기도했을까요 틀림없이 안 했을 거예요. 기도하면 죄를 범할 수가 없죠. 우리가 기도를 망각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놓쳐버릴 때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죄 속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 기도하면서 아브라함에게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아브라함이 틀림없이 자기 연약함을 주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놓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저는 참 연약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자기 아내를 가져갈 수 있었던, 고통을 줄 수 있었던 후보였던 아비멜렉을 위해서도 아브라함이 여기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회복이 시작돼요. 회복이. 여러분,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사람, 인정하는 사람, 이제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주 앞에 엎드려 진지하게 기도할 때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주시는 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하나님의 도움이 내 생애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자, 17절 이하에 보시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아비멜렉도 살려주시고 그리고 아내를 보호해 주시고 상황이 온전히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이 달라져요. 아브라함은 다시는 이제 똑 같은 범죄 속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이 죄를 범했었습니다.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죄를 인정하고 대면하고 고백하고 거기에서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진지하게 구하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죄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더욱 놀라운 은혜가 부어진 것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항상 은혜는 넘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시점에서 이런 논란을 제기하고 싶은 계실지 몰라요. 아브라함이 죄를 범하고 또 범하고 하나님이 거기서 은혜를 주시고 다시 더 큰 은혜를 주셨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도 죄를 범하고 또 범해 볼까요 바울 사도가 거의 정확한 질문을 로마서에서 제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도 그 대답을 던집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깊이가 있는 것이고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달은 사람마다 일시적으로 잠시는 죄에 끌려 다닐 수 있지만은 결국은 빠져나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설 것입니다. 결국은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신학자들은 이런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혜다. Ultimate grace of God궁극적 은혜다. 여러분 구원 받은 사람도 과거의 죄의 영향에서 한 동안은 벗어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정말 주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 그리고 정말 기도한 사람, 그 은혜를 계속적으로 구하는 사람, 그리고 그 은혜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결국은 이 죄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의 영토 안에 견고하게 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궁극적인 승리가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믿으세요. 아브라함은 빠져 나왔어요. 여러분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의 은혜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체험한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여성들이 간음하다 잡히면 남자들은 안 그래도 여성들은 그 자리에서 돌팔매질을 맞아서 죽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그 당시의 사회였습니다.
자, 이 여자는 꼼짝 없이 죽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 돌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상황 속에 개입하신 우리 예수님,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쳐라. 한 사람 한 사람씩 돌을 놓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계속 쳐다보십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은 돌을 떨어뜨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슬그머니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그 자리에서 퇴장해 버립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대일로 그 여인만 남았을 때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주목하세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 다음에 첨부하신 말씀이 있었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잖아요. 그래서 또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돕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여인 뿐만 아니라 이 여인과 비슷한 모든 인류들을 돕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살아 계십니다. 왜 지금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구원 받은 우리들이 마침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서 그리고 그 은혜를 찬양하며 은혜를 선포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살아나셨다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그 분이 마침내 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마침내 승리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원 받은 자이지만 삶의 스트레스, pressure, 연약함 때문에 넘어져서 이대로 나는 이 자리에서 쓰러지는 모양이다,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주의 은혜가 계속된다면 여러분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오늘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분, 그리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 살아계신 주님 그 분 앞에 오십시오. 이 은혜를 한 번 경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여러분의 죄를 회개하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면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용납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나와 함께 한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분, 그 분의 은혜가 나를 구원하기에 족한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은혜는 나를 구원하기에 족한 은혜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스트레스와 pressure와 죄악의 유혹을 이기고 마침내 우리를 승리하기에 넉넉한 은혜, 이 궁극적인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내가 도와주겠다.
기도하십시다.
. 우리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신앙 생활이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좌절하고 있다고 내가 무력함 속에 넘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분,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너에게 기대가 있다고 너는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내게 다가와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밀어 주시며 우리를 돕기를 원하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여러분의 좌절과 여러분의 고통을 다 털어 놓으세요. 은혜를 구하세요. 주님, 은혜 주시면 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주님 앞으로 부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놀라운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으로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와 주시사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 주의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터치해 주심으로 인생이 변하여 주 앞에 서서 이 세대를 이기고 역경과 시련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주 앞에 서서 승리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런데 어떤 분이 대답하기를
그런데 다른 종교의 문헌에 보면 신이 인간의 몸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또 누군가가 제시하기를 아무래도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은 부활사상에 있지 않느냐라는 제기를 했습니다. 확실히 부활은 기독교 신앙과 교리에 독특한 사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부활신앙 위에서 우리의 교회는, 우리의 믿음은 세워져 갑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런데 다른 종교에도 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는 사자의 환생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바로 그때 저 유명한
C.S.루이스 교수가 들어와서 이런 대답을 했다고 그래요.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야 은혜에 있죠. 은혜. Grace 은혜에 있죠. 모두가 다 동의했다고 그래요. 은혜.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 그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한 에피소드, 사건은 죄와 벌의 사건이 아니라 죄와 은혜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다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합니다. 자, 그는 믿음의 조상, 믿음의 할아버지,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 되어야 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또다시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또 다시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또 다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려고 합니다.
첫째 질문은 뭐냐 하면 정말 죄는 무엇이냐 두 번째 질문은 은혜는 도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세 번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이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느냐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느냐 이것이 질문입니다.
첫째 죄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사건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죄, 죄의 성격, 죄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이 범한 죄에서 인간 죄성의 본질을 우리는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사건에서 본 죄라는 것은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죄는 반복적인 죄였고 의도적인 죄였습니다. 그는 반복적으로 죄를 범했고 또 그것은 매우 우발적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범죄였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그 죄는 반복적인 죄였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아브라함이 그랄 지방에 갔습니다. 그랄 지방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제일 남쪽 애굽과의 경계선 네게브라는 사막지역입니다. 여기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보고서 당신은 내 누이라고 그러라고. 와이프라고 그러지 말고. 그래서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와이프를 자기 누이로 소개하고 있는 거짓말하고 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죠. 어디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가 시작되는 창세기12장, 그때는 애굽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25년이 지나갑니다. 25년 후에 장소를 달리해서 애굽은 아니지만 그랄이라는 지역에서 아브라함이 똑 같은 죄를 범합니다. 물론 아름다운 아내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 언제나 축복만은 아니다 라는 것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금 안 생긴 아내를 데리고 살아도 괜찮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문제 때문에 한 번도 걱정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똑 같은 범죄를 여기서 저지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죄는 반복적인 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놀라운 사실은 똑 같은 범죄가 아브라함의 자식 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26장을 한 번 찾아 보세요. 조금 더 가시면 창세기26장이 나오시는데 창세기 26장 6절에 보시면 누가 등장합니까 이삭이 등장합니다. 이삭은 누구죠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창세기 26장 6절에 이삭이 어디에 있었다구요 그랄에. 그러니까 똑 같은 사건입니다. 똑 같은 장소입니다. 본문하고.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어떤 사건입니까 26장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버지하고 똑 같은 범죄를 여기서 범하는 장면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뭐예요 부전자전이죠. 부전자전의 현장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죄가 이렇게 반복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죄를 헤어나지 못하고 또 죄를 범하고 또 죄를 범하고 있는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또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리요. 아브라함의 죄는 반복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의도적이었습니다. 우발적이 아니라 그것은 계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조금 더 지나가서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솔직한 자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20장 13절을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이런 계획을 하고 내가 그 죄를 범하므로 나의 journey가, 나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솔직히 털어놓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의 범죄는 헤프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만 그럴까요 우리가 범하는 범죄도 상당히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핑계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인간의 범죄는 깊은 것입니다. 어두운 것입니다. 저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처럼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입니다. Totally depraved. 아주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내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나에게 성한 것이 없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의 현장이에요. 반복적이고 의도적인 범죄를 알면서도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죄를 범하고 있는 현장을 보십시오. 여기에 죄의 뿌리깊은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죄만 보아서는 안 돼요. 동시에 은혜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알면서도 다시 또 다시 죄를 범하고 있는 존재인 아브라함, 이런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처사에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발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다루셨습니까 우선
첫째로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있진 않지만 본문의 맥락을 살펴볼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회개케 하시고 있어요. 회개를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회개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회개하자 내가 뉘우치자 단순히 인간의 자의식만 가지고 회개가 잘 안 돼요. 내가 목회하면서 사람들을 관찰을 하면서 상담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확실히 회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지 않으면 그 은혜가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탕자의 사건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탕자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너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죽인다. 그래 갖고서 탕자가 회개합니까 아니지요. 탕자가 모든 것이 다 떨어졌을 때 아버지가 나누어준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돌아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를 그냥 품꾼의 하나로 종의 하나로 맞아주셔도 좋겠다. 기대를 가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힘없이 아버지의 자비와 그 아버지의 선처를 고대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기의 집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아버지가 먼저 봤어요. 그리고 달려 나오잖아요. 아마도 이 탕자가 한 걸음을 옮길 때 아버지는 열 걸음을 달려 나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십니다. 많이 입을 맞추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습니다. 동네 사람을 초청합니다. 잔치를 엽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다. 그리고 나서 이
둘째 아들이 탕자가 무슨 고백을 했으리라고 여러분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때 비로소 이
둘째 아들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오열하며 터져나오는 어떤 고백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이 아들의 가슴을 녹였던 것이고 이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아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래서 회개라는 것은 너 회개 안 하면 죽어. 그렇게 해서 회개 안 돼요. 여러분 자식 기를 때도 양육할 때도 너 제대로 안 하면 죽인다. 공갈치지 마세요. 그래 가지고 자녀들 달라지는 게 아니예요. 조건 없이 사랑을 주세요. 그 푸근한 사랑, 그 넉넉한 사랑, 그 사랑에 녹아들 때 거기서 회개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아빠 나 정말 잘못 했어요. 은혜만이 인간을 돌이킬 수 있다.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을 회개케 한 것이에요. 아브라함은 아마 하나님 앞에 큰 일 날 줄 알았을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라도 아브라함에게 벼락을 쳤을지 몰라요. 야, 너가 믿음의 조상 자격이 있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 치사한 범죄를 또 범하고. 하나님이 그렇게 다가서지 않아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회개를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은혜가 있습니다. 또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라를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를 보호해주시는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사라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시집온 죄 밖에 없죠. 남편 따라 다니고 남편 하라는 대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이 사라가 불쌍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라를 보호하시죠. 어떻게 보호하십니까 그 사라를 자기 아내로 취하려고 했던 그랄 지방의 왕이었던 아비멜렉에게 밤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예요. 하나님 뭐라고 말씀했어요 그 여인은 아브라함의 누이 동생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마누라다. 남의 마누라다 말이지. 건드리지 말라. 건드리면 죽어. 아비멜렉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나셨단 말이죠. 사라를 보호하신 거예요. 자, 이 사라를 보호하신 이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이다. 어떤 간섭 은혜의 간섭이다. 이 애처로운 여인, 이 불쌍한 여인, 이 사라를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간섭, 은혜의 간섭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직도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아브라함을 인정하십니다. 그의 범죄, 두 번씩 반복되는 이 범죄에도 불편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서부터 그의 사역자로서의 지위가 박탈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참 감동적인 구절이 7절인데요, 7절 다같이 한 번 읽어봅시다. 7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그랬어요.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와요 그는 선지자다. 그랬습니다. 그는 선지자다. 나 같았으면 어떻게 이런 경우에 아브라함을 보고 말했을까 저 같으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 같아요. 니가 선지자야. 니가 믿음의 조상이야. 오늘부로 믿음의 조상 끝, 선지자 사표 아마 이랬을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 아브라함의 죄, 이 반복적인 범죄, 의도적인 범죄에도 불구하고 또 아브라함의 실패의 현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직도 말씀하시기를 그를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선지자야. 너는 선지자라고. 내가 너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고. 그리고 네가 기도하면 내가 응답해 주시겠다고. 그의 실패 때문에 그의 좌절 때문에 그에게서 사역을 빼앗아가지 않으시는 하나님. 여전히 변함없는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여기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 앞에 얼마나 자주 실수합니까 얼마나 자주 실패합니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우리를 향한 기대를 거두어 가지 않습니다. 나는 부끄러워서 나는 자격지심 때문에 하나님이 내 기도 들으실까 이미 주님이 아직도 나를 써 주실까 이런 계면쩍은 마음으로 주 앞에 어설프게 주 앞에 나와서 감히 입술을 열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때도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나는 아직도 너에게 기대가 있다. 너는 참 귀한 사람이야. 하나님의 사람이야. 내가 너를 쓸 계획이 있다고. 네 인생 속에서 아직도 너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예요.
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은혜가 어떻게 시작이 되는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 편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경험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 은혜라는 것은 조건 없이 하나님 편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상황을 잘 살펴보고 공부해보면 아브라함이 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어떤 상황적인 열쇠가 있어요. 이 부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흘러들어 오더라.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더라.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더라 라는 그 상황적인 열쇠. 우리가 은혜 받기 위한 이 상황적 열쇠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죄와의 대면입니다. 사람이 솔직히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대면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 저는 아까 우리가 읽었던 13절 말씀이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솔직한 자기 죄하고의 대면입니다. 어떻게 자기의 생애 속에서 죄가 시작되었는가 의도적인 죄악이 솔직히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털어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료의 시작이에요. 우리가 바로 죄를 부인할 때 거기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인정할 때 그리고 자백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치유가 하나님의 용서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병 가운데 고쳐지지 않는 병이 참 많지만 그 중의 하나가 알코올 중독입니다. 일단 알코올에 중독되면 헤어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죠. 모든 중독이 그렇습니다 만은.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일단 거기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러한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연구가 됩니다. 의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연구가 됩니다.
그런데 현재 이 시점에서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프로그램 하나가 있는데 그것을 AA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AA프로그램. 소위 12단계를 거쳐서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인데 미국에서는 굉장히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에도 이 프로그램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모두 12 step으로 되어 있습니다. 꼭 1주일에 한 번씩 주로 교회에서 모여요. 교회당을 빌려주고 그 곳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소그룹 미팅을 통해서 치료하는 모임인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도움을 받고 알코올 중독에서부터 빠져 나옵니다.
그런데 그 치유의 첫 번째 단계가 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자, 알코올 중독자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신분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남자, 여자, 학생, 주부, 관리, 사업가 여러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단 이 AA프로그램에 오게 되면 처음에 이런 자기 소개로 어김없이 모임이 시작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알코올 중독자 이동원입니다. 혹은 마약 중독자 이동원입니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고백으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신분을 말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거기 오면 오직 신분이 하나예요.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있는 그대로 자기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게 치유의 시작입니다. 또 온전히 치유되기 전에 나는 치유되었습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사실 그대로 자기의 상태 그대로 정확하게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자기의 상태를 바라보고 대면하고 인정하는 것, 이게 치유의 시작입니다.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그래 가지고는 치유가 안 된다 말이죠. 아브라함은 오래간만에 솔직하게 자기의 인생의 길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자기의 죄가 계획적으로 의도적으로 시작되었는지 그것을 아브라함은 아주 솔직히 대면하고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진지한 기도, 아주 진지한 기도. 17절에 보시면 창세기 20장 17절에 어떤 말로 시작이 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기 아내를 마누라를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했을 때 기도했을까요 틀림없이 안 했을 거예요. 기도하면 죄를 범할 수가 없죠. 우리가 기도를 망각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놓쳐버릴 때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죄 속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 기도하면서 아브라함에게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아브라함이 틀림없이 자기 연약함을 주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놓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저는 참 연약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 아내를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자기 아내를 가져갈 수 있었던, 고통을 줄 수 있었던 후보였던 아비멜렉을 위해서도 아브라함이 여기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회복이 시작돼요. 회복이. 여러분,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사람, 인정하는 사람, 이제 정말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주 앞에 엎드려 진지하게 기도할 때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주시는 순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하나님의 도움이 내 생애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자, 17절 이하에 보시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어요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아비멜렉도 살려주시고 그리고 아내를 보호해 주시고 상황이 온전히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이 달라져요. 아브라함은 다시는 이제 똑 같은 범죄 속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이 죄를 범했었습니다.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죄를 인정하고 대면하고 고백하고 거기에서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을 진지하게 구하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죄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더욱 놀라운 은혜가 부어진 것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항상 은혜는 넘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시점에서 이런 논란을 제기하고 싶은 계실지 몰라요. 아브라함이 죄를 범하고 또 범하고 하나님이 거기서 은혜를 주시고 다시 더 큰 은혜를 주셨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도 죄를 범하고 또 범해 볼까요 바울 사도가 거의 정확한 질문을 로마서에서 제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도 그 대답을 던집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경험한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깊이가 있는 것이고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깨달은 사람마다 일시적으로 잠시는 죄에 끌려 다닐 수 있지만은 결국은 빠져나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설 것입니다. 결국은 승리할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신학자들은 이런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은혜다. Ultimate grace of God궁극적 은혜다. 여러분 구원 받은 사람도 과거의 죄의 영향에서 한 동안은 벗어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정말 주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 그리고 정말 기도한 사람, 그 은혜를 계속적으로 구하는 사람, 그리고 그 은혜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결국은 이 죄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의 영토 안에 견고하게 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궁극적인 승리가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믿으세요. 아브라함은 빠져 나왔어요. 여러분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의 은혜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체험한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여성들이 간음하다 잡히면 남자들은 안 그래도 여성들은 그 자리에서 돌팔매질을 맞아서 죽어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그 당시의 사회였습니다.
자, 이 여자는 꼼짝 없이 죽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 돌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상황 속에 개입하신 우리 예수님,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쳐라. 한 사람 한 사람씩 돌을 놓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계속 쳐다보십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은 돌을 떨어뜨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슬그머니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그 자리에서 퇴장해 버립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일대일로 그 여인만 남았을 때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주목하세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 다음에 첨부하신 말씀이 있었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잖아요. 그래서 또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돕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여인 뿐만 아니라 이 여인과 비슷한 모든 인류들을 돕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진노를 대신 받으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는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살아 계십니다. 왜 지금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구원 받은 우리들이 마침내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서 그리고 그 은혜를 찬양하며 은혜를 선포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살아나셨다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그 분이 마침내 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마침내 승리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원 받은 자이지만 삶의 스트레스, pressure, 연약함 때문에 넘어져서 이대로 나는 이 자리에서 쓰러지는 모양이다,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주의 은혜가 계속된다면 여러분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오늘 십자가 앞에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분, 그리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 살아계신 주님 그 분 앞에 오십시오. 이 은혜를 한 번 경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여러분의 죄를 회개하면서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면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용납하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나와 함께 한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분, 그 분의 은혜가 나를 구원하기에 족한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은혜는 나를 구원하기에 족한 은혜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스트레스와 pressure와 죄악의 유혹을 이기고 마침내 우리를 승리하기에 넉넉한 은혜, 이 궁극적인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내가 도와주겠다.
기도하십시다.
. 우리 가운데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신앙 생활이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좌절하고 있다고 내가 무력함 속에 넘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분, 걱정하지 마세요. 주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너에게 기대가 있다고 너는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내게 다가와 그리고 자신의 손을 내밀어 주시며 우리를 돕기를 원하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여러분의 좌절과 여러분의 고통을 다 털어 놓으세요. 은혜를 구하세요. 주님, 은혜 주시면 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주님 앞으로 부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놀라운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 성령으로 역사하시고 주의 권능으로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와 주시사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아버지 주의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터치해 주심으로 인생이 변하여 주 앞에 서서 이 세대를 이기고 역경과 시련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주 앞에 서서 승리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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