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사람을잃을때 (창23:1-6)
본문
최근에 여러분 가운데 우리가 참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먼저 천국에 보내신 가족들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떠났다든지 아내가 떠났다든지 혹은 부모님을 사별했다든지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를 앞세우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친구를 잃어버린 분이 계신지요 저는 저의 외사촌 형제였던 우리 교회 출석하던 이규창 형제가 한 달 전에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는 저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같은 달에 태어났고 저보다 한 일 주일 늦게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많은 추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떠나가면서 저는 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문에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정리라면 우리는 그 헤어짐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바로 내 곁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곁을 떠나 빈자리로 남겨두고 떠나버릴 때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엇1을 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 본문을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창세기 23장 1절에 보시면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 이것이 사라의 향년이다. 성경은 좀처럼 여인의 생애 가운데 얼마를 살고 죽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특별히 사라의 이런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성경은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못지 않게 믿음의 어머니였던 사라의 생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 한 10살 차이니까요. 이삭은 37세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요즈음 인간의 수명이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발달되면서 120세, 150세가 가능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었던 생애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나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100년 이상을 해로한 이 부부로서 이 아브라함과 사라, 이 부부는 얼마나 많은 추억과 그리고 정감으로 살아왔던 부부였겠습니까 그러던 아내가 떠나갔을 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며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으로 준비하고 싶어요.
첫째로 할 일이 무얼까요 우셔야 합니다. 울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습니다. 자, 2절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23장 2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냥 형식적인 슬픔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냥 슬퍼했다가 아니라 슬퍼하며 애통했다라고 성경은 강조해서 기록합니다. 유교 문화권에 살아왔던 우리로서는 일반적으로 눈물을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초상을 맞는 집에 가서 울고있는 조객이나 혹은 가족 유족들을 만났을 때 우리가 위로한다고 그에게 접근하면서 울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는 울어야 합니다. 성경은 눈물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 아브라함이 슬퍼하며 그리고 애통했다, 이것은 깊은 의미의 슬픔을 표출하는 단어가 애통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히브리서11장, 믿음의 장 16절에 보시면 그가 즉 아브라함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 믿음으로 그는 천국을 준비했고 천국을 소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던 사람과의 사별은 분명히 그건 슬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울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의 태도를 성경은 매우 인상적인 두 개의 단어로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것이 성경에서 제일 짤막한 구절이에요. 영어 성경에는 딱 두 개의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Jesus wept. 예수께서 우셨다 이렇게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더군다나 남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람산 언덕 위에서 예루살렘 성을 어느 날 내려다 보시면서 죄 때문에 무너지고 심판 받아야 할 그 성읍을 바라보시면서 통곡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눈물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좀 의미 없는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하품하다가 흘리는 눈물, 이런 것들은 의미 없는 눈물이지만. 필요할 땐 또 울어야 합니다. 오늘날 발달하고 있는 현대 의학에서는 눈물을 억제하는 것이 오히려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랜 동안 우리가 슬픔을 지속적으로 억압하면 이것은 정서 발달에 결정적 장애 요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이 치료예요. 울게 내버려 두어요. 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울 줄 알아야 합니다. 남자도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아이를 기르면서 특별히 딸보다도 그 아들에 대해서는 남자가 울어. 남자도 울어야 합니다. 여성들이 남자가 옆에 계시면 우세요 하고 한 번 얘기해 보세요. 남자들이 일찍 가고 병드는 것이 울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울 수 있어야 돼요. 저는 현대 심리학이 발달되면서 인간의 발달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뭐냐하면 이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 감정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우리가 19세기 이후로 우리는 인간 발달에 가장 중요한 것이 지능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능지수 Q를 중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IQ말고 또 하나의 새로운 단어를 최근 몇 년 동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뭐죠 EQ예요. EQ, 이 감정지수가 인간에게는 지능지수 이상으로 중요하다. 한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실패하는 것이 꼭 지능이 낮아서만은 아니다. 지능도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감정이다. 감정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감정을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하면서 대인관계를 할 수가 있느냐. 이 감정지수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에서도 이 감정 표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경은 절대로 감정을 억제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편을 보세요. 시편에는 놀라운 감정의 표출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찬양하라고, 부르짖어서 기도하라고, 박수도 좀 칠 줄 알라고. 어떤 사람들은 이 감정을 좀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 되었지 뭐 손을 들고 저러고난리를 때리는가, 눈물을 흘리면 다인가,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감정이 병들어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감정 표현할 줄 알아야 돼요. 물론 감정에만 머무는 것은, 그런 신앙은 저는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의 치유가 없이 건강한 인간의 행동이 창출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56편 8절에 보시면 다윗은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주소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주소서. 구약에 히스기야 라는 왕이 있었죠.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질병 때문에 그가 죽어야 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선언되었습니다. 이 선언을 받고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했어요 기도했습니다. 벽에 엎드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이 어떤 선언을 하세요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여러분 눈물이 메마른 사람이 있다면 병든 사람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눈물을 흘려 보셨습니까 내 눈물샘에서 순수한 눈물이 흘려진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눈은 건조한 사막은 아닌지요 울어야 할 때 울 수가 있어야 돼요. 특별히 가슴이 아픈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여러분, 사랑하는 주님 앞에 와서 우세요. 그것이 치료예요.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째로 할 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사건이 보여주고 있는 교훈,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고통의 현장에서 우리가 할 일은 뭘까요 두 번째는 일어나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일어나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울어야 돼요. 눈물은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슬픔이 지나쳐 눈물을 전혀 억제할 수 없이 허구한 날 우리가 계속해서 운다면 이것도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눈물은 마치 비와 같다. 여러분 메마른 시절에 이 비는 얼마나 필요한 것이에요 우리가 그래서 단비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가 필요하지만 비가 막상 내리기 시작했을 때 비가 끊임없이 온다, 그건 재앙이에요. 마치 눈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름다운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 눈물은 필요한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마냥 슬퍼하고 애곡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3절 보실까요 자, 창세기 23장 3절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아브라함은 일어났어요. 일어났습니다. 일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할 일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곧장 장례 준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했던 아내와의 이별의식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까요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살았던 그 땅, 헷 족속의 사람들을 향해서 아브라함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이 고백의 일단이 그 당시 아브라함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한 조각이라고 보여지는데 4절에 보시면 어떤 고백을 합니까 나는 당신들 중의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고백을 해요.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훌쩍 떠났을 때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더 나그네 의식이 진하게 그 마음속에 솟아났을까요 맞아, 인생은 나그네야. 이렇게 떠나가는 거야. 자신도 그리고 자신의 생명도 이 땅에서 영원할 수 없는 나그네임을 아브라함은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보았고 그리고 아내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죽음도 준비해야 할 것임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내와의 사별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준비였다고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지하게 이별을 위하여 그리고 또 다른 만남을 위하여 준비의 절차를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최근에 호스피스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이란 것은 말기암,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돕기 위한 사역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사에 가장 기록적인 숫자가 지금 훈련을 받고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150명 이상이 지금 우리 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훈련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그럽디다. 아주 감사해요. 물론 이 분들이 다 봉사자로 일을 하게 될 지 두고 보아야 알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만한 숫자가 한 사람이 가는 마지막 길에 관심을 갖고 도울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분들이 제대로 헌신한다면 앞으로 아름다운 이별의 스토리들이 우리 교회 안에 쌓여져 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호스피스 강의에서 강의를 하면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죽음에 대한 강의를 쭉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런 스토리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호스피스 운동이라는 것은 이 마지막 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운동이라는 것은 저는 이런 것에 비교할 수 있다고. 저는 천로역정의 마지막 장면을 인용했습니다. 여러분 요한 번연이 기록한 이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을 읽어보시면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자, 이제 드디어 기독도가 크리스찬이 인생의 순례의 여정을, 그 긴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죽음의 강을 건너갑니다. 그가 이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까 만나고 헤어지고 사기꾼, 돕는 사람, 도움이 된다고 찾아왔지만 도움이 안 된 사람, 기독도의 발걸음을 이탈시킨 사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요. 인생의 길에서, 그것이 인생이 아니예요 자,
그런데 드디어 이 기독도가 크리스찬이라는 이 사람이 마지막 죽음의 강 앞에 섰을 때 거기까지 따라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누가 따라왔습니까 소위 희망씨가 따라와요. 희망씨, hopeful 희망씨가 마지막까지 따라왔어요. 드디어 기독도가 마지막 죽음의 강에 들어갔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이 미지의 강, 아무도 건너지 못했던 자기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 강을 건너가면서 그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졌을까요 자기에게 있어서는 전혀 새로운 경험, 죽음이라는 경험, 이 죽음의 강을 건너가면서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그 사람을 향해서 그러나 희망씨가 뒤에서 계속 소리를 칩니다. 생각보다 그 강은 그렇게 깊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생각보다 두려워 할 사건이 아니라고 그리고 강 저편을 바라보시라고 보이지 않느냐고. 저편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천사들의 환영의 행렬이 보이지 않느냐고.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것을 준비하셨다고 힘을 내라고. 그 강은 깊지 않다고 손을 조금만 뻗치면 일어날 수 있다고. 걸어갈 수 있다고 힘을 내서 건너가라고. 드디어 이 기독도가 강 저편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리고 그를 환영나온 천사들의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를 들으면서 이 희망씨는 기독도를 향해서 마지막 소리칩니다. 크리스찬이여 크리스찬이여 당신은 승리했소. 당신은 드디어 건너갔소. 아듀. 샬롬. 하나님의 평안이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길. 이 호스피스 하는 사람들이 그 일 하는 거죠. 마지막 가는 길에서 용기를 내고 힘을 내서 그 소망을 바라보고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렇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할 일이 있습니다. 일어나서 우리는 그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건은 하나의 교훈을 더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때 해야 할 일, 우십시오 그러나 이제 적절한 때 울음을 거두시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할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또 중요한 레슨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내 인생의 나머지 길을 살도록 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결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음 앞에 섰을 때 그것이 나의 죽음이든 내 이웃의 죽음이든 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든 우리가 죽음을 구체적으로 느낄 때 그 죽음 앞에서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결산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나의 모습이 내가 떠나간 후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기억할 것 같아요 여러분이 살다가 떠나간 그 빈 공간에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살았던 사람들, 여러분의 가족들이 혹은 직장의 동료들이 혹은 교회의 식구들이 여러분이 떠나간 다음에 여러분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시겠습니까 이러 이러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여러분을 부를 것 같아요 어떤 별명을 사용해서 여러분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별명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사라에 대한 얘기는 없지만 사라와 더불어 한평생 살고 아내의 죽음을 진한 고통으로 느끼고 있었던 그 순간, 아내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향해서 그 헷 족속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던 이방 족속들이 아브라함을 향해서 사용한 호칭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자, 6절을 한 번 읽어 보실까요 우리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거기 아브라함을 향해서 어떤 별명을 주었습니까 뭐라 그랬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이십니다. 자, 따라서 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이십니다. 좀 말이 어렵죠 방백이란 말이. 쉽게 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왕자입니다. 하나님의 prince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영어 성경에 보시면 mighty prince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말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히브리 원문에 보면 엘로힘 하나님의 왕자 이런 뜻입니다. 엘로힘 하나님의 왕자. 전능하신 하나님의 왕자다.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별명이 주어졌을까요 아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자기 땅에 들어와서 살고있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아가는 모습을 주목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아, 저 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로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로구나. 하나님의 딸이었구나. 아마 이러한 인상 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주변에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붙여질 수 있는 이런 별명,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은 하나님의 프린스요. 당신은 하나님의 공주요. 어떻게 해서 이런 별명이 주어졌을까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롭게 우리 입술에서 튀어나온 전에 없었던 단어 하나를 우리는 우리의 날마다의 언어 속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주여. 그 전까지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내 본능대로 내 감정대로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 왔어요. 그러나 내가 주여 라고 부르는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되심을 고백하십니까 그렇게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주여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그 분이 주인되셔야 해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주여 라고 고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 가정 생활에서 우리의 직장생활에서 정말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까 내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내 결정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시군요. 내가 중요한 사건을 처리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것을 handle하고 그것을 감당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답군요. 하나님의 아들이군요. 당신은 하나님의 딸이군요. 당신은 하나님의 왕자군요. 당신은 하나님의 공주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간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Testimony라고 합니다. 간증이 있는 삶. 우리가 세상을 떠나가고 남길 때 마지막 어떤 간증을 남기시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주 지지난 주 우리 교회가 창립 6주년을 감사하면서 또 다른 내일의 새로운 비전을 위해서 우리가 성전대지헌금을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분이 우리 교회의 젊은 가정이고 그리고 잘 사는 가정이 아니예요. 지나치게 너무 많이 내셨어요. 그래서 제게 보고가 들어 왔어요. 제가 마음에 부담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아주 젊은 가정이고 여유가 있는 가정이 아닌데 지나치도록 너무나 많은 헌금을 해서 제가 부담이 되지 않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 부부가 딱 한 마디로 대답을 하더라구요. 목사님 내 돈이 아니잖아요. 더 드리고 싶어요. 제가 아내한테 그랬습니다. 참 믿음이 귀하다. 돈이 문제가 아니예요. 믿음이 귀하다. 신앙고백이 귀하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갈 줄 아는 그 믿음이 얼마나 귀한가! 오늘 본문에 창세기 23장 또 7절 이하에 보면 또 사라의 매장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묘지를 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때 헷 족속 에브론이란 사람이 막벨라 굴이라는 아주 좋은 굴을 묘지로 제공하고 있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냥 쓰라고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것을 사양하지 않습니까 15절, 16절 한 번 읽어보세요. 15절, 16절입니다. 창세기23장15절, 16절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이런 돈을 가지고 거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쓰십시오. 이렇게 제공된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결정을 내립니까 굳이 은 사백 세겔을 내고 값을 치르고 묘지를 사서 거기에 사랑하는 아내를 안장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랬을 것 같아요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컨대 틀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혹시 묘지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깨끗이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잖아요 돈 안 내고 쓰다보면 돈도 낸 증거도 없는데 이것이 어떻게 당신 땅이냐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깨끗한 마무리를 원한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도 거기에 들어가야 되니까. 실제로 들어갔고. 나중에 합장되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란 것은 삶을 결산하는 순간입니다. 내 생애가 끝나고 내 시체가 관에 들어가는 그 순간 어떻게 결산되기를 원하십니까 깨끗한 마무리를 원하지 않으세요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떠나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떠날 때 적어도 떠날 때 이웃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떠나가지는 말아야지요.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목적이에요. 우리가 죽음에 대한 소원이 소극적 목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적극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면 뭘까요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축복의 근원이 되라고. 내가 떠나갈 때 내가 이웃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면서 떠나갈 수 있는 존재. 내 삶이 축복이요 내 이웃, 내 죽음조차도 이웃들에게 축복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죽음이 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웃들에게 축복된 존재로 죽는 것, 그런 소망을 가지세요. 그런 목표를 가지세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미리 기도하세요. 그리고 준비하세요. 죽음은 삶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해 보면 조금 지역이 위험하기 때문에 많이 가지는 않지만 헤브론이란 지역, 이번에 갈 지 안 갈 지 모르겠는데 헤브론,
왜냐하면 헤브론에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어요. 사라의 무덤이 있어요.
그런데 이 곳에 가보면 흥미로운 것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무덤에는 유태교인도 찾아 와요. 이슬람교도도 찾아와요. 물론 기독교도도 찾아와요. 그리고 심지어는 무신론자도 찾아와요. 그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남기고 축복을 남기고 갈 수 있었던 이 아브라함의 무덤을 향한 행렬은 그의 삶이 얼마나 축복이었는가를 증언해주고 있는 가장 좋은 사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떤 죽음을 준비하십니까 제가 만약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어버리고 그 곁에서 울고 있는 아브라함 곁에 다가설 수 있다면 그리고 제가 노래를 잘 한다면 저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어버리고 울고있는 아브라함 곁에 가서 이런 노래를 불러주고 싶어요.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어디서 많이 듣던 가사 같이 않아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찾아간 천국, 그리고 거기에서 함께 거하며 영원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아브라함에게 있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아브라함의 또한 눈은 현실적으로 자기가 남은 세월 살아야 할 자기의 삶을 바라보며 나도 내 아내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마지막 삶을 위하여 아내의 깨끗한 삶 그리고 자기의 삶의 마무리를 깨끗하게 준비하기 위해서 현실을 현실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눈이 있었어요. 저는 이런 소망의 눈과 현실의 눈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요한지요! 예수님도 이런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이런 두 개의 세상을 바라보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그 고통 가운데서도 그 옆에 회개한 한 강도에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가 구원한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거할 수 있는 그 영원한 낙원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어요. 그러나 또한편 그 주님은 죽음을 구체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안목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이 기도하시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뭐예요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받아들이겠어요. 이 십자가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내게 주어진 인생의 나머지 시간, 이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제가 그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가 인생의 남은 날을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붙잡고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그렇게 바라볼 수 있었던 현실적인 눈, 주님은 두 개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음을 느껴야 하는 시간이 온다면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순간이 온다면 아니면 내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면 우리도 두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한 눈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예비된 영원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또한 눈으로 아직도 살아야 할 이 세상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왜 십자가로 가셨습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왜 세상길, 짧은 세상길이 그렇게도 험해요 피곤해요 괴로워요 아파요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이지요. 바로 여러분과 저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신 바로 그 분.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던 바로 그 분.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용서받고 우리가 살아야 할 새로운 삶을 위해서 우리가 영원을 바라보고 살도록 다시 부활하신 주님. 그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 사건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 분이 부활하셨다면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잖아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뭐예요 죽어도 살겠고. 그 분의 부활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의 근거가 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이 부활하셨기에 살아계시기에 우리의 남아있는, 나머지 살아야 할 인생의 길, 험해도 멀고 고통스럽고 어려워 보여도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남아있는 내 인생의 과업을 마치고 주 앞에 설 수 있는 그 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프십니까 죽음을 경험하면서 아파하는 분이 있어요 울고 계십니까 외로워하십니까 외로운가요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아직도 남은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그 두 눈만 있다면 우리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 저는 한국에 고위 관리를 지내셨다가 불의의 사고로 떠나간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부인되시는 여집사님이 이런 말을 하는데 오랜 동안 남아요. 제 머리 속에. 목사님 제 남편이 떠나고 나니까 천국이 가까워졌어요. 천국이 가까워졌어요. 내 남편이 가 있는 천국. 천국이 아주 가까워졌어요. 천국은 멀지 않습니다. 죽음도 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가야 할 그 길입니다. 하나님 잘 갈 수 있도록 그리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머지 길을 소망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삶의 주인 되신 그 분을 높이며 그 분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을 불러주신 주님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아버지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고통스러워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고 그 영원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첫째로 할 일이 무얼까요 우셔야 합니다. 울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습니다. 자, 2절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 23장 2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그냥 형식적인 슬픔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냥 슬퍼했다가 아니라 슬퍼하며 애통했다라고 성경은 강조해서 기록합니다. 유교 문화권에 살아왔던 우리로서는 일반적으로 눈물을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초상을 맞는 집에 가서 울고있는 조객이나 혹은 가족 유족들을 만났을 때 우리가 위로한다고 그에게 접근하면서 울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는 울어야 합니다. 성경은 눈물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에 아브라함이 슬퍼하며 그리고 애통했다, 이것은 깊은 의미의 슬픔을 표출하는 단어가 애통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히브리서11장, 믿음의 장 16절에 보시면 그가 즉 아브라함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 믿음으로 그는 천국을 준비했고 천국을 소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던 사람과의 사별은 분명히 그건 슬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울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의 태도를 성경은 매우 인상적인 두 개의 단어로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것이 성경에서 제일 짤막한 구절이에요. 영어 성경에는 딱 두 개의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Jesus wept. 예수께서 우셨다 이렇게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더군다나 남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람산 언덕 위에서 예루살렘 성을 어느 날 내려다 보시면서 죄 때문에 무너지고 심판 받아야 할 그 성읍을 바라보시면서 통곡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눈물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좀 의미 없는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하품하다가 흘리는 눈물, 이런 것들은 의미 없는 눈물이지만. 필요할 땐 또 울어야 합니다. 오늘날 발달하고 있는 현대 의학에서는 눈물을 억제하는 것이 오히려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랜 동안 우리가 슬픔을 지속적으로 억압하면 이것은 정서 발달에 결정적 장애 요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는 것이 치료예요. 울게 내버려 두어요. 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울 줄 알아야 합니다. 남자도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아이를 기르면서 특별히 딸보다도 그 아들에 대해서는 남자가 울어. 남자도 울어야 합니다. 여성들이 남자가 옆에 계시면 우세요 하고 한 번 얘기해 보세요. 남자들이 일찍 가고 병드는 것이 울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울 수 있어야 돼요. 저는 현대 심리학이 발달되면서 인간의 발달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뭐냐하면 이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 감정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우리가 19세기 이후로 우리는 인간 발달에 가장 중요한 것이 지능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능지수 Q를 중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IQ말고 또 하나의 새로운 단어를 최근 몇 년 동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뭐죠 EQ예요. EQ, 이 감정지수가 인간에게는 지능지수 이상으로 중요하다. 한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실패하는 것이 꼭 지능이 낮아서만은 아니다. 지능도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감정이다. 감정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감정을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하면서 대인관계를 할 수가 있느냐. 이 감정지수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에서도 이 감정 표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경은 절대로 감정을 억제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시편을 보세요. 시편에는 놀라운 감정의 표출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찬양하라고, 부르짖어서 기도하라고, 박수도 좀 칠 줄 알라고. 어떤 사람들은 이 감정을 좀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 되었지 뭐 손을 들고 저러고난리를 때리는가, 눈물을 흘리면 다인가,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감정이 병들어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감정 표현할 줄 알아야 돼요. 물론 감정에만 머무는 것은, 그런 신앙은 저는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의 치유가 없이 건강한 인간의 행동이 창출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56편 8절에 보시면 다윗은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주소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주소서. 구약에 히스기야 라는 왕이 있었죠.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질병 때문에 그가 죽어야 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선언되었습니다. 이 선언을 받고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했어요 기도했습니다. 벽에 엎드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이 어떤 선언을 하세요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여러분 눈물이 메마른 사람이 있다면 병든 사람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눈물을 흘려 보셨습니까 내 눈물샘에서 순수한 눈물이 흘려진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눈은 건조한 사막은 아닌지요 울어야 할 때 울 수가 있어야 돼요. 특별히 가슴이 아픈 일이 있을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여러분, 사랑하는 주님 앞에 와서 우세요. 그것이 치료예요.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째로 할 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사건이 보여주고 있는 교훈,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고통의 현장에서 우리가 할 일은 뭘까요 두 번째는 일어나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일어나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울어야 돼요. 눈물은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슬픔이 지나쳐 눈물을 전혀 억제할 수 없이 허구한 날 우리가 계속해서 운다면 이것도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눈물은 마치 비와 같다. 여러분 메마른 시절에 이 비는 얼마나 필요한 것이에요 우리가 그래서 단비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가 필요하지만 비가 막상 내리기 시작했을 때 비가 끊임없이 온다, 그건 재앙이에요. 마치 눈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름다운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 눈물은 필요한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마냥 슬퍼하고 애곡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 3절 보실까요 자, 창세기 23장 3절 무슨 말로 시작합니까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아브라함은 일어났어요. 일어났습니다. 일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할 일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곧장 장례 준비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했던 아내와의 이별의식을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했을까요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살았던 그 땅, 헷 족속의 사람들을 향해서 아브라함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이 고백의 일단이 그 당시 아브라함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한 조각이라고 보여지는데 4절에 보시면 어떤 고백을 합니까 나는 당신들 중의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고백을 해요.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훌쩍 떠났을 때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더 나그네 의식이 진하게 그 마음속에 솟아났을까요 맞아, 인생은 나그네야. 이렇게 떠나가는 거야. 자신도 그리고 자신의 생명도 이 땅에서 영원할 수 없는 나그네임을 아브라함은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보았고 그리고 아내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죽음도 준비해야 할 것임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내와의 사별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준비였다고 아브라함은 틀림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지하게 이별을 위하여 그리고 또 다른 만남을 위하여 준비의 절차를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최근에 호스피스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이란 것은 말기암,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돕기 위한 사역입니다. 호스피스 운동사에 가장 기록적인 숫자가 지금 훈련을 받고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150명 이상이 지금 우리 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훈련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그럽디다. 아주 감사해요. 물론 이 분들이 다 봉사자로 일을 하게 될 지 두고 보아야 알겠습니다만 어쨌든 이만한 숫자가 한 사람이 가는 마지막 길에 관심을 갖고 도울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분들이 제대로 헌신한다면 앞으로 아름다운 이별의 스토리들이 우리 교회 안에 쌓여져 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호스피스 강의에서 강의를 하면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죽음에 대한 강의를 쭉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런 스토리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호스피스 운동이라는 것은 이 마지막 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운동이라는 것은 저는 이런 것에 비교할 수 있다고. 저는 천로역정의 마지막 장면을 인용했습니다. 여러분 요한 번연이 기록한 이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을 읽어보시면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와요. 자, 이제 드디어 기독도가 크리스찬이 인생의 순례의 여정을, 그 긴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죽음의 강을 건너갑니다. 그가 이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까 만나고 헤어지고 사기꾼, 돕는 사람, 도움이 된다고 찾아왔지만 도움이 안 된 사람, 기독도의 발걸음을 이탈시킨 사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요. 인생의 길에서, 그것이 인생이 아니예요 자,
그런데 드디어 이 기독도가 크리스찬이라는 이 사람이 마지막 죽음의 강 앞에 섰을 때 거기까지 따라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누가 따라왔습니까 소위 희망씨가 따라와요. 희망씨, hopeful 희망씨가 마지막까지 따라왔어요. 드디어 기독도가 마지막 죽음의 강에 들어갔습니다. 두려웠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이 미지의 강, 아무도 건너지 못했던 자기도 경험하지 못했던 이 강을 건너가면서 그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졌을까요 자기에게 있어서는 전혀 새로운 경험, 죽음이라는 경험, 이 죽음의 강을 건너가면서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던 그 사람을 향해서 그러나 희망씨가 뒤에서 계속 소리를 칩니다. 생각보다 그 강은 그렇게 깊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생각보다 두려워 할 사건이 아니라고 그리고 강 저편을 바라보시라고 보이지 않느냐고. 저편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천사들의 환영의 행렬이 보이지 않느냐고.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것을 준비하셨다고 힘을 내라고. 그 강은 깊지 않다고 손을 조금만 뻗치면 일어날 수 있다고. 걸어갈 수 있다고 힘을 내서 건너가라고. 드디어 이 기독도가 강 저편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리고 그를 환영나온 천사들의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를 들으면서 이 희망씨는 기독도를 향해서 마지막 소리칩니다. 크리스찬이여 크리스찬이여 당신은 승리했소. 당신은 드디어 건너갔소. 아듀. 샬롬. 하나님의 평안이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길. 이 호스피스 하는 사람들이 그 일 하는 거죠. 마지막 가는 길에서 용기를 내고 힘을 내서 그 소망을 바라보고 건너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렇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할 일이 있습니다. 일어나서 우리는 그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건은 하나의 교훈을 더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릴 때 해야 할 일, 우십시오 그러나 이제 적절한 때 울음을 거두시고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할 일을 하십시오. 그리고 또 중요한 레슨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내 인생의 나머지 길을 살도록 결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결심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음 앞에 섰을 때 그것이 나의 죽음이든 내 이웃의 죽음이든 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든 우리가 죽음을 구체적으로 느낄 때 그 죽음 앞에서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결산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을 해요. 나의 모습이 내가 떠나간 후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기억할 것 같아요 여러분이 살다가 떠나간 그 빈 공간에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살았던 사람들, 여러분의 가족들이 혹은 직장의 동료들이 혹은 교회의 식구들이 여러분이 떠나간 다음에 여러분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시겠습니까 이러 이러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여러분을 부를 것 같아요 어떤 별명을 사용해서 여러분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별명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것은 사라에 대한 얘기는 없지만 사라와 더불어 한평생 살고 아내의 죽음을 진한 고통으로 느끼고 있었던 그 순간, 아내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을 향해서 그 헷 족속들이 그 지역에 살고 있었던,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던 이방 족속들이 아브라함을 향해서 사용한 호칭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자, 6절을 한 번 읽어 보실까요 우리 6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거기 아브라함을 향해서 어떤 별명을 주었습니까 뭐라 그랬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이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이십니다. 자, 따라서 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방백이십니다. 좀 말이 어렵죠 방백이란 말이. 쉽게 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왕자입니다. 하나님의 prince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영어 성경에 보시면 mighty prince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말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히브리 원문에 보면 엘로힘 하나님의 왕자 이런 뜻입니다. 엘로힘 하나님의 왕자. 전능하신 하나님의 왕자다.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별명이 주어졌을까요 아마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자기 땅에 들어와서 살고있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아가는 모습을 주목해서 보았을 것입니다. 아, 저 분들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로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로구나. 하나님의 딸이었구나. 아마 이러한 인상 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주변에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붙여질 수 있는 이런 별명,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은 하나님의 프린스요. 당신은 하나님의 공주요. 어떻게 해서 이런 별명이 주어졌을까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롭게 우리 입술에서 튀어나온 전에 없었던 단어 하나를 우리는 우리의 날마다의 언어 속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주여, 주여. 그 전까지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내 본능대로 내 감정대로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 왔어요. 그러나 내가 주여 라고 부르는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되심을 고백하십니까 그렇게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주여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그 분이 주인되셔야 해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주여 라고 고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 가정 생활에서 우리의 직장생활에서 정말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고 계십니까 내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내 결정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시군요. 내가 중요한 사건을 처리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것을 handle하고 그것을 감당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답군요. 하나님의 아들이군요. 당신은 하나님의 딸이군요. 당신은 하나님의 왕자군요. 당신은 하나님의 공주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간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Testimony라고 합니다. 간증이 있는 삶. 우리가 세상을 떠나가고 남길 때 마지막 어떤 간증을 남기시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주 지지난 주 우리 교회가 창립 6주년을 감사하면서 또 다른 내일의 새로운 비전을 위해서 우리가 성전대지헌금을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분이 우리 교회의 젊은 가정이고 그리고 잘 사는 가정이 아니예요. 지나치게 너무 많이 내셨어요. 그래서 제게 보고가 들어 왔어요. 제가 마음에 부담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전화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아주 젊은 가정이고 여유가 있는 가정이 아닌데 지나치도록 너무나 많은 헌금을 해서 제가 부담이 되지 않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 부부가 딱 한 마디로 대답을 하더라구요. 목사님 내 돈이 아니잖아요. 더 드리고 싶어요. 제가 아내한테 그랬습니다. 참 믿음이 귀하다. 돈이 문제가 아니예요. 믿음이 귀하다. 신앙고백이 귀하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인 되심과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갈 줄 아는 그 믿음이 얼마나 귀한가! 오늘 본문에 창세기 23장 또 7절 이하에 보면 또 사라의 매장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묘지를 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때 헷 족속 에브론이란 사람이 막벨라 굴이라는 아주 좋은 굴을 묘지로 제공하고 있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냥 쓰라고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것을 사양하지 않습니까 15절, 16절 한 번 읽어보세요. 15절, 16절입니다. 창세기23장15절, 16절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이런 돈을 가지고 거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쓰십시오. 이렇게 제공된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결정을 내립니까 굳이 은 사백 세겔을 내고 값을 치르고 묘지를 사서 거기에 사랑하는 아내를 안장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랬을 것 같아요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컨대 틀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혹시 묘지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 깨끗이 처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잖아요 돈 안 내고 쓰다보면 돈도 낸 증거도 없는데 이것이 어떻게 당신 땅이냐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깨끗한 마무리를 원한 것입니다. 나중에 자기도 거기에 들어가야 되니까. 실제로 들어갔고. 나중에 합장되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란 것은 삶을 결산하는 순간입니다. 내 생애가 끝나고 내 시체가 관에 들어가는 그 순간 어떻게 결산되기를 원하십니까 깨끗한 마무리를 원하지 않으세요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떠나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떠날 때 적어도 떠날 때 이웃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로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떠나가지는 말아야지요. 그러나 이것은 소극적인 목적이에요. 우리가 죽음에 대한 소원이 소극적 목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적극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면 뭘까요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까 축복의 근원이 되라고. 내가 떠나갈 때 내가 이웃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면서 떠나갈 수 있는 존재. 내 삶이 축복이요 내 이웃, 내 죽음조차도 이웃들에게 축복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죽음이 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웃들에게 축복된 존재로 죽는 것, 그런 소망을 가지세요. 그런 목표를 가지세요.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미리 기도하세요. 그리고 준비하세요. 죽음은 삶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해 보면 조금 지역이 위험하기 때문에 많이 가지는 않지만 헤브론이란 지역, 이번에 갈 지 안 갈 지 모르겠는데 헤브론,
왜냐하면 헤브론에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어요. 사라의 무덤이 있어요.
그런데 이 곳에 가보면 흥미로운 것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무덤에는 유태교인도 찾아 와요. 이슬람교도도 찾아와요. 물론 기독교도도 찾아와요. 그리고 심지어는 무신론자도 찾아와요. 그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남기고 축복을 남기고 갈 수 있었던 이 아브라함의 무덤을 향한 행렬은 그의 삶이 얼마나 축복이었는가를 증언해주고 있는 가장 좋은 사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떤 죽음을 준비하십니까 제가 만약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어버리고 그 곁에서 울고 있는 아브라함 곁에 다가설 수 있다면 그리고 제가 노래를 잘 한다면 저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를 잃어버리고 울고있는 아브라함 곁에 가서 이런 노래를 불러주고 싶어요. 울고 있나요 당신은 울고 있나요 아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 아직도 남은 별을 찾을 수 있는 그렇게 아름다운 두 눈이 있으니. 어디서 많이 듣던 가사 같이 않아요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찾아간 천국, 그리고 거기에서 함께 거하며 영원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아브라함에게 있었어요. 그리고 동시에 아브라함의 또한 눈은 현실적으로 자기가 남은 세월 살아야 할 자기의 삶을 바라보며 나도 내 아내 앞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마지막 삶을 위하여 아내의 깨끗한 삶 그리고 자기의 삶의 마무리를 깨끗하게 준비하기 위해서 현실을 현실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눈이 있었어요. 저는 이런 소망의 눈과 현실의 눈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요한지요! 예수님도 이런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이런 두 개의 세상을 바라보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그 고통 가운데서도 그 옆에 회개한 한 강도에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가 구원한 수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거할 수 있는 그 영원한 낙원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어요. 그러나 또한편 그 주님은 죽음을 구체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안목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이 기도하시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뭐예요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가 받아들이겠어요. 이 십자가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내게 주어진 인생의 나머지 시간, 이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제가 그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가 인생의 남은 날을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붙잡고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그렇게 바라볼 수 있었던 현실적인 눈, 주님은 두 개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음을 느껴야 하는 시간이 온다면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순간이 온다면 아니면 내 자신의 죽음을 예비하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면 우리도 두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한 눈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예비된 영원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또한 눈으로 아직도 살아야 할 이 세상을 믿음으로 준비하고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왜 십자가로 가셨습니까 사랑하시는 여러분 왜 세상길, 짧은 세상길이 그렇게도 험해요 피곤해요 괴로워요 아파요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이지요. 바로 여러분과 저의 허물과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로 가신 바로 그 분.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던 바로 그 분. 그러나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용서받고 우리가 살아야 할 새로운 삶을 위해서 우리가 영원을 바라보고 살도록 다시 부활하신 주님. 그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 사건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 분이 부활하셨다면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잖아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뭐예요 죽어도 살겠고. 그 분의 부활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의 근거가 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이 부활하셨기에 살아계시기에 우리의 남아있는, 나머지 살아야 할 인생의 길, 험해도 멀고 고통스럽고 어려워 보여도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남아있는 내 인생의 과업을 마치고 주 앞에 설 수 있는 그 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프십니까 죽음을 경험하면서 아파하는 분이 있어요 울고 계십니까 외로워하십니까 외로운가요 그러나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아름다운 그 마음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아직도 남은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그 두 눈만 있다면 우리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 저는 한국에 고위 관리를 지내셨다가 불의의 사고로 떠나간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부인되시는 여집사님이 이런 말을 하는데 오랜 동안 남아요. 제 머리 속에. 목사님 제 남편이 떠나고 나니까 천국이 가까워졌어요. 천국이 가까워졌어요. 내 남편이 가 있는 천국. 천국이 아주 가까워졌어요. 천국은 멀지 않습니다. 죽음도 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가야 할 그 길입니다. 하나님 잘 갈 수 있도록 그리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머지 길을 소망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삶의 주인 되신 그 분을 높이며 그 분을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다 일어나서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처소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을 불러주신 주님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아버지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고통스러워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고 그 영원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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