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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땅에 심는 교회 (계21:5-11)

본문

우리는 지금 새해를 광활한 우주공간 속에서 아시아 대륙의 조그마한 반도국가 대한민국 경상북도에 소재한 구미라는 한 중소도시에서 맞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몇 개월 혹은 일,이년의 삶으로 아직 이곳에 익숙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 개중에는 수 년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니면 몇 대에 걸쳐 이 땅에 살아 익숙한 터전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도 이 구미사람된지가 어제로 꼭 만 10개월이 되었습니다. 3월 1일 이사와서 어제가 1월 1일이니 꼭 만삭이 된 것입니다. 저희 집 여식아가 전화를 통해서 친구와 너무도 자연스럽게 경상도 사투리로 대화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 녀석이 경상도 사람 다 됐구나' 싶었습니다. 아이들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저의 억양 속에도 이젠 제법 경상도 장단이 배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 구미라는 도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를 구미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씨,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리고 모든 생활 양식을 알게 모르게 그렇게 바꾸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시라는게 뭡니까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기에 자기가 속한 환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자나깨나 구미라는 이 도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럼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이 도시는 어떤 곳입니까 '거북 꼬리'라는 남다른 이름이 붙여져 있는 이 도시, 매일 우리 삶의 터전이 되는 이 구미라는 도시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어느덧 나의 분신이요 나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회학자들은 도시를 네가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위치'입니다. 좋은 위치를 끼고 도시가 선다는 것입니다. 강이 있고, 산이 있고, 들판이 있고, 길이 있고… 좋은 지리적 조건을 따라 이런 것들이 조화있게 어우러진 자리에 도시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구미만 해도 낙동강이 있고 금오산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넓은 들판도 있고 국가의 동맥이라는 경부고속도로, 경부선이 관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위치에 도시가 들어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도시는 인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구가 늘어날수록 대도시가 만들어지고 위성도시화됩니다. 이젠 지구 전체를 하나의 도시로 보는 지구촌이라는 말까지 생겨나지 않았습니까 지구가 이젠 한 마을입니다. 이렇게 인구가 모이는 곳에 도시가 서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도시를 '전문화된 집단'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 대표적 도시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구미라는 도시입니다. 구미 하면 '전자공단의 도시'입니다. '자동차 도시'하면 울산, 창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철의 도시' 하면 포항입니다. '관광 도시'하면 경주입니다. 이렇게 성격을 가지고 전문화됨으로 비로소 생존의 터인 도시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네번째는 '도시는 사람이다'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사람들이 도시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 의해서 도시가 서고, 사람들을 위해서 도시가 존재하고, 거기서 운명을 같이 하는 한 공동체가 형성되는데 그게 바로 도시라는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해석이 이 네번째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함께 모여 어우러져 사는 인간 공동체가 도시라는 해석, 가장 그럴듯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정의한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학적 도시학을 접하면서 왠지 명쾌하고 시원한 느낌을 갖게 되지 못함은 왠일입니까 도시는 '위치'다, '인구'다, '전문화된 집단'이다, '사람들의 무리짐'이다 등등 여러 해석을 살펴보았습니다만은 그러나 이것이 도시를 설명한 전부이겠나 하는 것입니다. 물론 도시가 수많은 기회와 행복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오늘의 도시는 인간성을 파괴하고 너와 나를 분열시키는 극렬한 싸움터로 변하고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우리 도시인들은 바로 이 틈바구니에 끼어 살면서 많은 것을 얻으면서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모순과 갈등과 허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 도시 한 복판에서 우리는 또한 해의 생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구미시라는 삶의 자리에서 우리로 한 해를 맞게하시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냥 어쩌다 직장 관계로 이곳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까 그냥
1, 2년 잠시 머물다 발령나면 다시 대구로 서울로 가면될 정류장일 뿐입니까. 꼭 그렇게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은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겁니다. 이곳에서 내 생이 마감될지 누가 압니까 이곳이 내 생의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합니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오늘이 그날이듯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와 우리 가정을 이 구미라는 도시에 보내시고 이곳에서 이 1994년도를 맞게 하시는 걸까. 저는 한 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으면서 이 물음을 자신에게 계속 던져 보았습니다. 이곳은 저에게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 이곳에서 지난 해를 살았고 또한 해의 삶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도시에 대한 성서적 입장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구미라는 세속도시는 무엇이고 어떤 곳입니까 우리에게 이 구미라는 도시는 단순히 이 세상사람들이 정의하는 것처럼 '위치'고 '인구'고 '전문화된 집단'이고 '사람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에 보내어진 우리에게 이 구미라는 도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 앞에 서 있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 앞에 서 있는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도시학입니다. 사회학이 보지 못하는 도시의 본질을 신학은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구미라는 이 세속도시의 운명을 보아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흐르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도시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도시를 인간교만의 산물 또는 죄의 산물로 여기고 타락의 결과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최초의 도시는 살인자 가인에 의해서 에덴의 동쪽에 세워집니다. 그건 뭘 말하는 겁니까 그 첫번째 도시는 저주받은 가인이 오랜 방황 끝에 '자기'를 숨기고 보호하기 위해 만든 에덴의 대용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도시는 '잃어버린 참고향 에덴을 대치하려는 인간들의 가짜 고향'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바로 도시만능주의의 함정이 있습니다. 도시에는 흥분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중심적 삶을 갈망합니다. 서울을 보십시오. 가까운 대구를 보십시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듭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곳이 에덴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낙원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인구가 유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혹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흥정, 이해관계, 무자비한 경쟁. 이것들이 도시의 한폭을 주름잡고 있는 것들입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세계는 휘황차고 황홀한듯 하지만 속인즉은 그렇게 찬란한 동경의 세계가 못된다는 사실입니다. 제 얘기를 해서 안됐습니다만은 용서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시골에 태어나서 도시에 대한 동경이 강했습니다. 중 3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저는 정말 그때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밤에 도착했는데 온 도시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신설동에서 내려서 종로3가까지 걸어가는데 정말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겠다 싶었습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차가 레일 위로 지나갑니다. 전차였습니다. 네모난 박스 안에선 사람이 노래하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TV였습니다. 간판이 빙글빙글 돕니다. 네온사인이었습니다. 정말 별천지였습니다. '이런 세계가 다 있구나' 싶었습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는데 한달 내내 서울생각 밖에 안납니다. 아이들이 왜 가출하는지, 왜 무작정 상경하는지 그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서울로 진학할까 해서 대광고등학교 원서까지 사다놨었습니다. 그러나 환경이 여의치 않아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졸업하자 마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20년을 살았습니다. 고향에서보다도 더 많은 세월을 살았지요. 물론 하나님을 영접지 않았던 그 세월 속에서 서울은 참으로 편리하고 좋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한 2년 여를 경기도 광주라는 서울 근교의 시골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마냥 편한 그곳에서의 목회생활이었지만 그렇게 답답하고 무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서울로 임지를 옮겨 6년을 살았습니다. 다시 6년 동안 서울에 살면서 하나하나 새록새록 깨달아지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골이 갖지 못한 편리한 것들을 서울이라는 도시가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서울이 갖고 있지 못한 좋은 것들을 시골 또한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구나'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큰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도 아닌 이 구미라는 중소도시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이 구미가 참 좋습니다. 어떤 분들은 더 발전해야 된다, 도청을 끌어들여야 된다 합니다만은 아마 그러면 이곳도 점점 더 생존경쟁의 치열함이 배가되는 세속도시의 하나가 되어 갈 것입니다. 오늘 새해 벽두에 박목사가 이렇게 장황하게 도시론을 늘어놓는 이유는 두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또 하나의 도시'를 말씀드리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한 해 우리 영락의 가족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봉독해 드린 오늘의 본문 2절에 보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보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이 새해 벽두에 꼭 기억해야할 사실은 '우리는 천국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미시민 이전에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구미시민은 한시적 신분이고 천국시민은 무한시적 신분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땅에 살면서 땅의 시민처럼 사셨습니까 물론 시민다운 성실함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 시민입니다.
오늘 1절에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그렇습니다. 없어질 무상한 세계의 시민이 전부인양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새해에 새로워지시기 바랍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변화를 전제합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의식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발견하고 설정하는 것입니다. 한 해의 출발점에서 무엇보다도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천국시민이고 하늘백성이다'라는 의식이 깨어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있을 때만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이는 겁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다른 날이 아닙니다. 어제의 태양이 또한 오늘의 태양입니다. 그러나 심령으로 비상한 결단을 하고 참회와 결심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세계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하늘백성입니까 하늘백성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요한은 8절에서 천국시민답지 않은 모습들을 열거하면서 역설적으로 천국시민의 참모습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 믿지 않는자, 흉악한 자, 살인자, 행음자, 술객, 우상 숭배자, 거짓말 하는 자. 저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라." '불과 유황의 심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아닙니까 바로 어제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서 받은 말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장면이었습니다. 이런 속성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라는 세속도시민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워 하는 자'란 비겁한 자를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란 신앙에 성실치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흉악한 자'란 가증한 자, 겉과 속이 다른 자를 가리킵니다. '살인한 자', '음란한 자', 그리고 '술객'이란 마술장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자', '거짓을 일삼는 자'. 이들은 천국시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내가 교회다니는 사람이요' 고백하지를 못했습니까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입맞추는 우상숭배와 음란의 삶을 살았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주저하며 거짓으로 살고 불신앙적인 모습으로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았습니까 그런 비겁과 온갖 패덕을 이 한해에는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이 새해 벽두에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적어도 이런 것이 전제되어야 그 다음에 사명을 말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한 해에 우리 영락교회에 주어진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 한번 복창하겠습니다. "하늘을 땅에 심는 교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한 해에 이 구미라는 세속도시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을 심어야 합니다. 그 도시는 지금 임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시민답지 못해서 그 임한 거룩한 도시를 이 세속도시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리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셨습니까 그 하늘마을을 체험하셨습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무슨 엑스타시나 황홀경에 몰입해야만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곳은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보이는 확실한 현재요 미래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이 세속의 안목과 삶의 자세로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10절의 사도 요한의 간증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왜 베드로와 바울이 그렇게 확신에 차서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습니까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저들이 어떻게 담대한 주님의 사도들이 되었습니까 첫째는 '성령이 함께 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보고 들었기에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속도시에 거룩한 도시를 심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는 하늘을 땅에 심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는 네가지입니다.첫째는 'Justification/의인화'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Adoption/양자화'입니다. 본문 7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제 내가 하나님의 아들되었고 딸되었다는 인식을 갖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런 확신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Sanctification/성화'입니다. 세속 도시민적인 패덕들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번째가 바로 'Witness/증거'입니다. 왜 주님이 이 한 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왜 생명주셨고 건강주셨고 직장주셨고 일할 터전을 주신 겁니까 돈많이 벌어 부자되라는 겁니까 출세해서 명예얻으라는 겁니까 가족끼리 달콤하게 생을 엔조이하라고 주신 겁니까 그건 보너스지 본봉이 아닙니다. 본봉은 바로 Witness, 여기에 있습니다. 동 터 오는 하늘나라를 증거하는 증거자 되라고 이 한 해에 생명과 건강과 온갖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목사가 년말이 되면 가장 골몰하는 문제 중의 하나가 내년도의 목회방향입니다. 이상(理想)만 그려서도 안되고 현실(現實)만 생각해서도 안되고 교회의 현실과 하나님의 이상을 잘 조화해서 내일을 그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께서 주신 표어가 바로 '하늘을 땅에 심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새해 첫예배의 말씀으로 무엇을 증거할까 할 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한 해에 하늘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도시로 이 세속도시를 덮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 한 해 저와 여러분에게 부여된 하늘의 과제입니다. 이 숙제를 우리는 풀어가야 합니다. 이 구미라는 도시, 이 나라 이 민족, 그리고 이 지구마을 구석구석에 하늘마을을 심어 가야 합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만도 아닙니다. 누가 이 역사를 감당하겠습니까 패배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몫입니다. 본문 7절에 '이기는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자만이 처음과 나중되시는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 샘물을 받아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고 하늘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 해에 이 땅에 하늘을 심을 것입니다. 이 구미라는 세속도시에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을 심을 것입니다. 이 땅은 지금 바벨의 비극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발전하고, 경제는 풍요해지고, 과학은 첨단을 자랑할지 모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 상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어느 대중가요 가수는 이것을 '유리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보이지 않는듯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속도시에 하늘마을을 심어가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한 세속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입니다. 저들은 불성실한 메신저 요나의 선언 한마디를 듣고도 회개하여 하나님의 도시를 변하고 맙니다. 저들의 회개에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이 용서와 사랑의 계획으로 바뀌고맙니다. 우리가 이 구미라는 세속도시를 그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벅찬 사명입니까. 밧모섬에서 사도요한이 보았던 새 예루살렘, 거룩한 도성, 그곳은 너무도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란 '세속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위치', '많은 인구', '전문화된 집단', '사람의 무리짐'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 성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었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으로서 그 도시 안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 한해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구미라는 도시의 많은 시민들이 우리 영락교회를 통해서 세속도시민이 아닌 거룩한 천국도시민으로 바뀌어 지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전에 모여 하나님을 모시고 이 도성에 흩어질 때 세속도시 구미는 거룩한 도성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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