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도시 안에 있던 버가모 교회 (계2:12-17)
본문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미국인들이 원하는 주거 환경 요소로 다음 세 가지가 우선 순위로 나와 있었습니다.
첫째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곳이고,
둘째는 공동체의 환경이 좋은 곳이고,
셋째는 교육 환경이 좋은 곳이었습니다.아마도 한국 사람들이라면 자녀들의 학교 문제를 제일 먼저 생각하겠지요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제일 먼저 고려할 것이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고 내 신앙을 건강하게 키워 갈 수 있는 좋은 교회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두번째로는 좋은 의료 시 설이 있는 곳이 아닐까요 영적인 건강 못지않게 육체의 건강도 중요합니다.몸이 병들었을 때 좋은 의료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저 개인적으로는 세번째 요소로 좋은 도서관이 있는 곳을 택하고 싶습니다.책을 통해서 지성을 기르고 우리의 교양을 쌓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어떤 도시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했는데 주변에 다음 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집에서 멀지 않은 곳 에 이단 교회가 있고,사단 숭배자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는 곳 ,그리고 집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는데 잘못된 사상을 담은 책들 로 꽉 차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들을 기른 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자녀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도 파괴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이 버가모라는 도시가 바로 都求名÷側 蹄 서 머나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곳으로 해발 300m 이상 되는 고지대입니다.이 도시는 산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일종의 성읍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도시는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서 에베소,서머나와 함께 소위 소아시아의 3대 도시로 일 컬어지며,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로마 치하 식민지의 수도(首都 )와 같은 역할을 했던 중요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가 자랑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그 첫째가 제우스 신 전입니다.터키에서 에베소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고고학적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이 버가모입니다.지금도 산 위에 올라가 면 제우스 신전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옆에는 로마의 황제들을 숭배하던 신당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아스클레피온이라는 고대 병원이 있습니다.이곳은 주전 400년부터 주후 400년까지 계속해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병을 잘 고치는 장소로 이름나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 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몰려왔다고 합니다.이곳에는 그 당시 사람 들이 숭배하던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치유의 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을 가리켜서 종종구주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의 상징은 뱀인데,군대 의무대의 상징이 뱀으로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또 이 도시에서는 히포크라테스 다음으로 유명한 갈렌이라는 의사가 태어나기도 했습니다.그는 해부로 유명했던 의사라고 합니다. 아스클레피온 신전의 뜨락을 거닐어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 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들어가는 길목에 대리석이 죽 깔려 있습니다.그 당시에 그곳을 찾는 병자들은 그 대리석 길을 맨 발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걸어갔다고 합니다.뜰 중앙에는 온천수가 솟아오르고 있는데,병자들은 그 온천수로 목욕을 한번 하고 지 하 터널로 된 치료실을 지나게 됩니다.그러면 치료실 위쪽으로 난 창문에 의사들이 네 병은 곧 낫는다.나을 수 있느니라 고 이야기를 합니다.그러니까 일종의 심리 치료입니다.그런 다음에는 치료실을 나와 극장에 가서 음악을 듣습니다.마지막으로는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신 앞에 가서 기도를 하고 서약을 하기도 합니다.병을 고치고자 하는 열망까지는 괜찮은데, 이것이 그들을 마침내 우상 숭배자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데 이 도시의 불행이 있습니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도서실입니다. 당시에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던 그 대규모 도서관에 대해서 그 도시 사람들은 굉장 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그 도서관의 대부분의 책들은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풍 요하게 만들고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보다는 그 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타락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도시에서 자녀들을 기르고 있었던 버가모 주민들의 상태를 짐 작해 보십시오. 1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 사단의 위는 사단의 보좌라는 말입니다. 사단의 영향력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도시가 바로 이 버가모입니다. 다시 말하면,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 거대한 우상 숭배와 세 속화의 도시 속에 버가모 교회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어두웠던 도시 버가모 한복판에 위치한 버가모 교회는 그 시대에 그 도시 를 향한 사명을 얼마나 감당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본문의 메시 지 속에서 이 버가모 교회의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읽을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승리 13절을 보십시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다행스럽게도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주께서 이 안디바를 가리켜 충성된 증인이라고 했습니다.이런 사람 때문에 이 교회는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 었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충성된 증인이 있었습니다.그 중에 대표적인 증인이 바로 안디바였습니다. 안디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어쩌면 안디바는 특 정 인물보다는 이 교회에 있었던 충성된 무리를 대표하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안디바의 뜻은 모든 악을 대항한 다, 모든 어려움을 대항한다,세상의 모든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대항한다는 것입니다.이미 살펴본 것처럼 버가모는 어두운 도시 였습니다.죄악의 도시였고 우상의 도시였고 귀신들의 도시였고 사 단의 도시였습니다.이 도시 속에 우뚝 서서, 이 도시의 악을 대항하여 거스리며 살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아마도 안디바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거스리는 불신앙의 사조가 우리를 뒤덮고 있는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교부(敎父)가운데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가 있는데 ,박해가 심하고 불신앙의 세력이 자꾸만 일어나게 되니까 크리소 스톰의 제자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온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고 있습니다.어쩌면 좋습니까 이에 크리소스톰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면 되지 않느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과 대결할 수 있었던 안디바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안디바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교인들의 신앙의 흐름을 본문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3절에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 서라고 했는데,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늘어졌다는 의 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의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을 말 한 것입니다.제우스와 로마의 황제들이 주님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버가모에서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라는 진리를 수호하고 있었던 버 가모 교인들의 승리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있습니까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있나요 얼마나 예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교리를 수호하는 열정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저는 이 버가모 교회의 승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앙 고백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이 불신앙의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의 입술로 또 우리 의 삶으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고 백을 얼마나 지키고 있습니까 본문은 이 신앙 고백을 지키기 위 해서 목숨까지 버렸던 버가모 교회 성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안락과 출세를 위해서는 쉽게 신앙을 던져 버릴 수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 같은 사람이 얼마나 그리워 지는지요 종말의 때에 필요한 교회는 안디바와 같은 증인들을 소 유하고 있는 교회입니다.살아 있는 신앙 고백을 갖고 있는 교회 ,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교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걸고 진리를 지키고 입술과 삶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교회, 여기에 버가모 교회의 승리가 있습니다. 읽기(번호) 목록열람(L,D
IR)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 다음게시판(NL) 앞게시판(PL) 선택' 번호:100/106 등록일시:94/11/19 09:37 길이:201줄 제 목:(주) 이동원목사/
(2)사단의 도시 안에 있던 버가모교회 마지막 계시, 마지막 책임 이동원 목사 사단의 도시 안에 있던 버가모 교회
(2) 요한계시록 2장 12-17절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실패 14절에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 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민수기 25장과 31장을 읽어 보면 발람과 발락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발람이 발락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모압 여인들 과 간음하게 만듭니다.또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맞춰져야 할 초점을 우상에게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자리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 결정적인 시작이 모압 여 인들과의 성적인 부도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사람이 죄를 범하면 눈이 어두워집니다.눈이 어두워지면 자기 삶의 표준이 사라지고 ,결국 무슨 일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하나님 ' 에 대한 신앙을 떠나서 우상 숭배자들로 변신하는 타락의 과정을 밟게 됩니다.우리는 발람의 역사를 통해서 이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께서 1세기의 성도들에게 발람의 이야기를 하십니까 옛날에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해서 성적(性的) 인 부도덕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한 것과 똑같은 일이 버가모 교회에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그 당시에 버가모 교회에 존재하던 니골라 당은 발람이 전에 이스라엘에 끼쳤던 것과 같은 영향을 미치는 그룹이었습니다. 버가모는 제우스의 신전도 있고 로마의 황제 숭배도 열렬하게 이루 어지던 도시입니다.버가모 도시의 집권자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황 제 숭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그러자 교회 안에서 이런 생각들 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신전에 가서 절하고로마의 황제가 주님입니다라고 한 번 말했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교회에 와서는 우리 주님을 열심히 섬기되, 이 세상에 나가서는 가이사가 주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그것 때문에 가 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손해를 보고 박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요즈음의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해 볼까요 술 한잔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떠냐고 말합니다.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술도 마시 고 점도 치고 합니다.이중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신 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앙과 합치될 수 없는 그룹들이 교회 안 에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그러다 보니까 충성된 증인의 목소리 보다도 세속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 갑니다. 결국 그런 교회는 진리를 잃어버리고 순결을 잃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오염과 타락과 부패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던 교회가 버가모 교회였습니다.여기에 교회의 위기가 있었 습니다. 이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정반대입니다.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수 호하려고 애쓰다가 사랑을 잃어버렸는데,반대로 버가모 교회는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회인들 과 어울릴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다가 진리를 잃 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여기에 이 교회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 살펴볼 때도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에 대해 언 급했는데, 어느 시대에나 이런 두 가지 양상의 이단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율법주의가 독선적인 바리새주의를 낳는가 하면,무 율법주의는 쾌락적인 방종주의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아니고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우리는 언제나 진리와 사랑을 함께 간직해야 합니다. 종말이 가까운 이 어두운 시 기에도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이 균형을 이룬 교회를 요구하고 계십니다.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버가모 교회, 하나님께서는 세속 화되어 버린 교회에 대한 경종으로서 이 교회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한 권면 우리는 진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던지는 버가모 교회의 승리와 세속화를 용납함으로써 마침내 그 본질이 변질되기 시작하는 버 가모 교회의 실패를 보았습니다. 이제 이 교회를 향한 권면 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경고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경고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劍)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경고합니다. 버가모 교회와 관련해서는 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요한계시록에서는 검이라는 말이 주님의 심판을 상 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진리를 떠나 세속화되고 있는 이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심판자의 모습으 로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할 때에도 검으로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도시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의 로마 황제는 버가모의 통치자에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던 ' 글라비라고 하는 검을 하나 하사했다고 합니다.세금도 잘 내고 로마의 정책도 잘 따라 주니까 그런 포상을 했겠지요 뿐만 아 니라 버가모의 집정관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죄인을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로마 황제로 부터 사형 집행권을 부여받은 도시 버가모, 이 도시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그 검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 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로마의 집정관이 가지고 있는 칼보다 더 무서운 칼을 가지셨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 고 온갖 박해를 다 받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로마 집정관의 손에 들려진 칼보다 더 두려운 칼을 가진 모습으로 주님이 등장하신 것은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 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 당시에 로마 황제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로마 황제가 주(主)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안디바 같 은 충성된 증인들은 순교의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 들이 쉽게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진정한 승리를 누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초리,친구들의 눈초리, 가족의 눈초리, 직장 동료의 눈초리가 두려워서 쉽게 타협하고 죄를 범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고 복음 증거를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들의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늘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십시 오. 여기에 우리의 실패와 타락의 원인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함의 비밀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거룩한 삶 을 추구하는 비밀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godly fear)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肉)과 영(靈) 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는 열 쇠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습니다. 로마 집정관의 칼보다도 주님의 심판의 칼을 더 두려워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1세기 성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사람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을 두 려워합니까 내 친구와 주위 사람들이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지금 나를 불꽃 같은 안목으로 감찰하시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동자를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버가모 교회의 더럽혀짐과 타락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약속하십니다. 이 세속화의 거대 한 물결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그들의 몸 과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약속 17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 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승리자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나와 흰 돌과 흰 돌 위에 기록한 새 이름을 준다고 했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사단은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기만 하면 자기가 쾌락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인들 가운데서 발람의 교훈을 따르며 우상의 제물을 취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만족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만족은 어디에서 옵니까 주께서는 이기는 그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리라고 하십니다.광 야에서 배고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께서 예비했던 이 만 나는 얼마나 신선한 만족을 주었을까요 진정한 만족, 참된 만족은 주님 자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진정한 만족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중동 지방에서 재판을 할 때 이 흰 돌이 많이 쓰였다고 하는데, 재판관이 까만 돌을 던지면 유죄를 의미했고 흰 돌을 던지면 무죄를 의미했다고 합니다. 또 죄수들을 무사(武士)로 등장시 켜 맹수와 싸움을 시켰을 때, 그 사람이 워낙 싸움을 잘해서 맹수를 이길 경우에는 높은 사람들이 흰 돌을 집어던져서 그 가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선포한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의 흰 돌도 비슷한 의미의 자유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죄악에 꽁꽁 얽매여서 꼼짝 못하는 자신을 발견 합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 주께서는 진정한 자유를 속하십니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앞에서 죄수인 무사가 승리할 경우에는 자유의 몸이 된다고 했는데, 그럴 때 그는 새 이름을 받아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시 작합니 것은 노예 되었던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 예입니다. 마치 벤허가 노예 신분을 벗고 귀족의 아들이 되어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께서는 이 어둡고 더러운 시대에 신앙을 지키고 경건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만나와 흰 돌과 새로운 이름을 약속하십니다.주님 안 에만 진정한 만족과 자유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만 진정한 명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주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소유하는 이 위대한 명예! 당신은 어떤 명예를 추구합니까 어떤 자유를 추구합니까 그리고 어떤 만족을 추구합니까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 견고 하게 세우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신앙 고백을 지키 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신 이 위대한 축복! 주께서 이 어두운 종말의 시대에 우리들을 진 정한 의미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는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 곳이고,
둘째는 공동체의 환경이 좋은 곳이고,
셋째는 교육 환경이 좋은 곳이었습니다.아마도 한국 사람들이라면 자녀들의 학교 문제를 제일 먼저 생각하겠지요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제일 먼저 고려할 것이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고 내 신앙을 건강하게 키워 갈 수 있는 좋은 교회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두번째로는 좋은 의료 시 설이 있는 곳이 아닐까요 영적인 건강 못지않게 육체의 건강도 중요합니다.몸이 병들었을 때 좋은 의료 혜택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저 개인적으로는 세번째 요소로 좋은 도서관이 있는 곳을 택하고 싶습니다.책을 통해서 지성을 기르고 우리의 교양을 쌓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어떤 도시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했는데 주변에 다음 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집에서 멀지 않은 곳 에 이단 교회가 있고,사단 숭배자들이 운영하는 병원이 있는 곳 ,그리고 집 가까이에 도서관이 있는데 잘못된 사상을 담은 책들 로 꽉 차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녀들을 기른 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자녀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 도 파괴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이 버가모라는 도시가 바로 都求名÷側 蹄 서 머나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곳으로 해발 300m 이상 되는 고지대입니다.이 도시는 산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일종의 성읍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도시는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서 에베소,서머나와 함께 소위 소아시아의 3대 도시로 일 컬어지며,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로마 치하 식민지의 수도(首都 )와 같은 역할을 했던 중요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가 자랑하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그 첫째가 제우스 신 전입니다.터키에서 에베소 다음으로 가장 많은 고고학적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이 버가모입니다.지금도 산 위에 올라가 면 제우스 신전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옆에는 로마의 황제들을 숭배하던 신당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아스클레피온이라는 고대 병원이 있습니다.이곳은 주전 400년부터 주후 400년까지 계속해서 소아시아에서 가장 병을 잘 고치는 장소로 이름나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 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몰려왔다고 합니다.이곳에는 그 당시 사람 들이 숭배하던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치유의 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을 가리켜서 종종구주라고 불렀습니다. 이 신의 상징은 뱀인데,군대 의무대의 상징이 뱀으로 된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또 이 도시에서는 히포크라테스 다음으로 유명한 갈렌이라는 의사가 태어나기도 했습니다.그는 해부로 유명했던 의사라고 합니다. 아스클레피온 신전의 뜨락을 거닐어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 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들어가는 길목에 대리석이 죽 깔려 있습니다.그 당시에 그곳을 찾는 병자들은 그 대리석 길을 맨 발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걸어갔다고 합니다.뜰 중앙에는 온천수가 솟아오르고 있는데,병자들은 그 온천수로 목욕을 한번 하고 지 하 터널로 된 치료실을 지나게 됩니다.그러면 치료실 위쪽으로 난 창문에 의사들이 네 병은 곧 낫는다.나을 수 있느니라 고 이야기를 합니다.그러니까 일종의 심리 치료입니다.그런 다음에는 치료실을 나와 극장에 가서 음악을 듣습니다.마지막으로는 아스클레피온이라는 신 앞에 가서 기도를 하고 서약을 하기도 합니다.병을 고치고자 하는 열망까지는 괜찮은데, 이것이 그들을 마침내 우상 숭배자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데 이 도시의 불행이 있습니다.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도서실입니다. 당시에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던 그 대규모 도서관에 대해서 그 도시 사람들은 굉장 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그 도서관의 대부분의 책들은 그들의 삶을 진정으로 풍 요하게 만들고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보다는 그 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타락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도시에서 자녀들을 기르고 있었던 버가모 주민들의 상태를 짐 작해 보십시오. 1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 사단의 위는 사단의 보좌라는 말입니다. 사단의 영향력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도시가 바로 이 버가모입니다. 다시 말하면,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 거대한 우상 숭배와 세 속화의 도시 속에 버가모 교회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어두웠던 도시 버가모 한복판에 위치한 버가모 교회는 그 시대에 그 도시 를 향한 사명을 얼마나 감당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본문의 메시 지 속에서 이 버가모 교회의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읽을 수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승리 13절을 보십시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다행스럽게도 버가모 교회에 안디바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주께서 이 안디바를 가리켜 충성된 증인이라고 했습니다.이런 사람 때문에 이 교회는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 었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충성된 증인이 있었습니다.그 중에 대표적인 증인이 바로 안디바였습니다. 안디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어쩌면 안디바는 특 정 인물보다는 이 교회에 있었던 충성된 무리를 대표하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안디바의 뜻은 모든 악을 대항한 다, 모든 어려움을 대항한다,세상의 모든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대항한다는 것입니다.이미 살펴본 것처럼 버가모는 어두운 도시 였습니다.죄악의 도시였고 우상의 도시였고 귀신들의 도시였고 사 단의 도시였습니다.이 도시 속에 우뚝 서서, 이 도시의 악을 대항하여 거스리며 살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아마도 안디바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거스리는 불신앙의 사조가 우리를 뒤덮고 있는 세상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교부(敎父)가운데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가 있는데 ,박해가 심하고 불신앙의 세력이 자꾸만 일어나게 되니까 크리소 스톰의 제자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생님,온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고 있습니다.어쩌면 좋습니까 이에 크리소스톰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가 온 세상을 반대하면 되지 않느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과 대결할 수 있었던 안디바 같은 사람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안디바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교인들의 신앙의 흐름을 본문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3절에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 서라고 했는데,이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늘어졌다는 의 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의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을 말 한 것입니다.제우스와 로마의 황제들이 주님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버가모에서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라는 진리를 수호하고 있었던 버 가모 교인들의 승리를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있습니까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있나요 얼마나 예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교리를 수호하는 열정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까 저는 이 버가모 교회의 승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앙 고백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이 불신앙의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의 입술로 또 우리 의 삶으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고 백을 얼마나 지키고 있습니까 본문은 이 신앙 고백을 지키기 위 해서 목숨까지 버렸던 버가모 교회 성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안락과 출세를 위해서는 쉽게 신앙을 던져 버릴 수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 같은 사람이 얼마나 그리워 지는지요 종말의 때에 필요한 교회는 안디바와 같은 증인들을 소 유하고 있는 교회입니다.살아 있는 신앙 고백을 갖고 있는 교회 ,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교회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생명을 걸고 진리를 지키고 입술과 삶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교회, 여기에 버가모 교회의 승리가 있습니다. 읽기(번호) 목록열람(L,D
IR) 다음메세지(N) 앞메세지(P) 도움말(H) 다음게시판(NL) 앞게시판(PL) 선택' 번호:100/106 등록일시:94/11/19 09:37 길이:201줄 제 목:(주) 이동원목사/
(2)사단의 도시 안에 있던 버가모교회 마지막 계시, 마지막 책임 이동원 목사 사단의 도시 안에 있던 버가모 교회
(2) 요한계시록 2장 12-17절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실패 14절에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 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민수기 25장과 31장을 읽어 보면 발람과 발락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발람이 발락을 가르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모압 여인들 과 간음하게 만듭니다.또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맞춰져야 할 초점을 우상에게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자리로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 결정적인 시작이 모압 여 인들과의 성적인 부도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사람이 죄를 범하면 눈이 어두워집니다.눈이 어두워지면 자기 삶의 표준이 사라지고 ,결국 무슨 일이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하나님 ' 에 대한 신앙을 떠나서 우상 숭배자들로 변신하는 타락의 과정을 밟게 됩니다.우리는 발람의 역사를 통해서 이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께서 1세기의 성도들에게 발람의 이야기를 하십니까 옛날에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해서 성적(性的) 인 부도덕을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한 것과 똑같은 일이 버가모 교회에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그 당시에 버가모 교회에 존재하던 니골라 당은 발람이 전에 이스라엘에 끼쳤던 것과 같은 영향을 미치는 그룹이었습니다. 버가모는 제우스의 신전도 있고 로마의 황제 숭배도 열렬하게 이루 어지던 도시입니다.버가모 도시의 집권자들은 무력을 사용하여 황 제 숭배를 강요하기도 했습니다.그러자 교회 안에서 이런 생각들 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신전에 가서 절하고로마의 황제가 주님입니다라고 한 번 말했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교회에 와서는 우리 주님을 열심히 섬기되, 이 세상에 나가서는 가이사가 주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그것 때문에 가 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손해를 보고 박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요즈음의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해 볼까요 술 한잔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어떠냐고 말합니다.그래서 예수 믿으면서 술도 마시 고 점도 치고 합니다.이중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신 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앙과 합치될 수 없는 그룹들이 교회 안 에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그러다 보니까 충성된 증인의 목소리 보다도 세속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 갑니다. 결국 그런 교회는 진리를 잃어버리고 순결을 잃어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오염과 타락과 부패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던 교회가 버가모 교회였습니다.여기에 교회의 위기가 있었 습니다. 이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정반대입니다.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수 호하려고 애쓰다가 사랑을 잃어버렸는데,반대로 버가모 교회는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회인들 과 어울릴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다가 진리를 잃 어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여기에 이 교회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 살펴볼 때도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에 대해 언 급했는데, 어느 시대에나 이런 두 가지 양상의 이단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율법주의가 독선적인 바리새주의를 낳는가 하면,무 율법주의는 쾌락적인 방종주의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기독교는 율법주의도 아니고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우리는 언제나 진리와 사랑을 함께 간직해야 합니다. 종말이 가까운 이 어두운 시 기에도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이 균형을 이룬 교회를 요구하고 계십니다.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버가모 교회, 하나님께서는 세속 화되어 버린 교회에 대한 경종으로서 이 교회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한 권면 우리는 진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던지는 버가모 교회의 승리와 세속화를 용납함으로써 마침내 그 본질이 변질되기 시작하는 버 가모 교회의 실패를 보았습니다. 이제 이 교회를 향한 권면 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경고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경고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劍)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경고합니다. 버가모 교회와 관련해서는 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요한계시록에서는 검이라는 말이 주님의 심판을 상 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진리를 떠나 세속화되고 있는 이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심판자의 모습으 로 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할 때에도 검으로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도시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의 로마 황제는 버가모의 통치자에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던 ' 글라비라고 하는 검을 하나 하사했다고 합니다.세금도 잘 내고 로마의 정책도 잘 따라 주니까 그런 포상을 했겠지요 뿐만 아 니라 버가모의 집정관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죄인을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도 주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로마 황제로 부터 사형 집행권을 부여받은 도시 버가모, 이 도시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그 검이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 버가모 교회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 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로마의 집정관이 가지고 있는 칼보다 더 무서운 칼을 가지셨습니다.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 고 온갖 박해를 다 받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로마 집정관의 손에 들려진 칼보다 더 두려운 칼을 가진 모습으로 주님이 등장하신 것은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마태복음 10장 2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 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 당시에 로마 황제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로마 황제가 주(主)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안디바 같 은 충성된 증인들은 순교의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 들이 쉽게 세상과 타협하고 신앙의 진정한 승리를 누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초리,친구들의 눈초리, 가족의 눈초리, 직장 동료의 눈초리가 두려워서 쉽게 타협하고 죄를 범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고 복음 증거를 포기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들의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늘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십시 오. 여기에 우리의 실패와 타락의 원인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룩함의 비밀을 발견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거룩한 삶 을 추구하는 비밀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godly fear)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肉)과 영(靈) 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는 열 쇠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습니다. 로마 집정관의 칼보다도 주님의 심판의 칼을 더 두려워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1세기 성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사람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을 두 려워합니까 내 친구와 주위 사람들이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지금 나를 불꽃 같은 안목으로 감찰하시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동자를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버가모 교회의 더럽혀짐과 타락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약속하십니다. 이 세속화의 거대 한 물결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그들의 몸 과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승리자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약속 17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 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승리자에게 세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나와 흰 돌과 흰 돌 위에 기록한 새 이름을 준다고 했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사단은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기만 하면 자기가 쾌락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약속합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인들 가운데서 발람의 교훈을 따르며 우상의 제물을 취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만족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만족은 어디에서 옵니까 주께서는 이기는 그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리라고 하십니다.광 야에서 배고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께서 예비했던 이 만 나는 얼마나 신선한 만족을 주었을까요 진정한 만족, 참된 만족은 주님 자신에게 있다고 합니다.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사람들에게 주께서 진정한 만족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중동 지방에서 재판을 할 때 이 흰 돌이 많이 쓰였다고 하는데, 재판관이 까만 돌을 던지면 유죄를 의미했고 흰 돌을 던지면 무죄를 의미했다고 합니다. 또 죄수들을 무사(武士)로 등장시 켜 맹수와 싸움을 시켰을 때, 그 사람이 워낙 싸움을 잘해서 맹수를 이길 경우에는 높은 사람들이 흰 돌을 집어던져서 그 가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선포한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의 흰 돌도 비슷한 의미의 자유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죄악에 꽁꽁 얽매여서 꼼짝 못하는 자신을 발견 합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 주께서는 진정한 자유를 속하십니다.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앞에서 죄수인 무사가 승리할 경우에는 자유의 몸이 된다고 했는데, 그럴 때 그는 새 이름을 받아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시 작합니 것은 노예 되었던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 예입니다. 마치 벤허가 노예 신분을 벗고 귀족의 아들이 되어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께서는 이 어둡고 더러운 시대에 신앙을 지키고 경건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만나와 흰 돌과 새로운 이름을 약속하십니다.주님 안 에만 진정한 만족과 자유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만 진정한 명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주님이 인정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소유하는 이 위대한 명예! 당신은 어떤 명예를 추구합니까 어떤 자유를 추구합니까 그리고 어떤 만족을 추구합니까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 견고 하게 세우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신앙 고백을 지키 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성도들에게 주께서 약속하신 이 위대한 축복! 주께서 이 어두운 종말의 시대에 우리들을 진 정한 의미의 승리자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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