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기쁘시게하는 교회 (계2:18-19)
본문
우리는 계속해서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인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에 대하여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고 있는데 오늘은 네 번째 시간으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 해 보려고 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일곱교회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칭찬을 하나님께 로 부터 들은 교회라고 할수 있는데 하나님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보다 많도다!' 라고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해 주시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교회이었음을 알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발전하는 교회를 기뻐하시고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두아디 라 교회와 같이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발전하는 교회가 되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그러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전을 좋아하시고 정체와 퇴보를 좋아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와 우리 한국교회를 한번 점검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와 우리 한국교회는 현재 발전하고 새로워지고 있는 교회 인가 아니면 정체하고 퇴보의 기미가 보이는 교회인가를 살펴 보아야 만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개교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고비로 정체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카토릭을 그해를 기점으로 해서 급성장을 하였습니다. 배가 까지는 몰라도 카토릭은 많이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그해를 기점으로 정체의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현 재는 카토릭이나 개신교가 다함께 정체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출석 통계를 가지고 볼때 우리 교회의 영아부로 부터 청 년부에 이르기 까지 학생과 청년들의 출석 숫자는 장년 출석의 39%에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수치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전국 교회가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것은 앞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퇴보할 것인가를 미 리 보여주는 예고지표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앞날 은 결코 밝다고 할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정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제일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안일과 나태를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 100주년을 맞이 하면서 한국교회는 천만 성도를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천만 성도 를 이야기 하면서 한국 교회는 자만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3천만을 잊 어 버리고 안일한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좀 안정이 되면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이는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자신이 부유하다고 착각하여 가난하고 어려 웠을 때보다 하나님을 찾는 신앙적인 열정이 식어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안일함이 자연 시앙적인 나태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 나 태가 교회의 정체를 가져온 것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기적인 욕심과 교만 때문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어 느 집단이나 시간이 흐르고 자리가 잡히게 되고 안정이 되면 반드시 기득권층 이라는 것이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기득권층은 어렵고 힘든 때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고 안정이 되 게 되면 대개 기득권층이 형성되게 되는데 기득권층이 형성되면 거의 정체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득권층은 자신의 기득권에 집착하려고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잘모르지만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하는것은 공정한 선 거 속에서라고 하여도 여당보다 불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권 정 당이 아주 커다란 실수를 하기 전에는 사회의 기득권층은 변화를 두 려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새 대통령에 의하여 많은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대통령의 개혁과 변 화를 지켜보고 있으며 또한 뒤에서 성원을 하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가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변 화를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의 불안심리 때문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집단이든지 기득권층이 많고 강하면 변화와 발전의 속도는 떨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교회에도 사람이 모인 곳임으로 기득권층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 기득권층이 투터워지고 힘이 강하여 질 수록 변화와 발전은 더디어지 게 되고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득권층은 본능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싫어합니다. 저들은 본능적으로 정체를 좋아하는데 그들은 그 것을 보수와 전통 또는 안정이라는 말로 미화하기도 합니다. 다는 아 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보수와 전통 그리고 안정을 주장하는 경우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가장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것일 경우가 있다는 사 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득권자 자신들 조차 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쉽게 분별하 기 어려울때가 많습니다. 심한 경우 저들은 개혁론자들과 발전론자들 을 교회의 안정과 전통을 파괴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매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처럼 나중이 처음보다 좋은 교회가 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발전과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 나태와 이 기적인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태와 교만은 바로 죄의 양면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는 죄악들이 때로는 나태로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이기적인 교만으로 나타나 주의 몸된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하고 또 겸손히 시인 할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나중이 처음보다 좋아 주를 기 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는 다음 두가지를 마음에 명심 하여 야 할 것입니다.
첫째,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성실함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발전과 변화를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특히 교회의 중책을 맡은 당회원들이 이에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대체로 우리 한국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공부를 잘 안하는 당회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핵 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당회의 회원들이 게으로고 나태하여 자기 발전을 소홀히 하게 된다면 교회가발전하고 새로워 진다는 것은 거 의 불가능한 일이라 아니 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불변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아니하는 불변의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부대는 언제나 변화하고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거짓된 개혁론자들과 발전론자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부대가 변하여 야 함을 미끼로 하여 교묘하게 불변하는 진리까지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단인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거짓된 전통주의자들 도 있습니다. 저들은 불변하는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변하여야 할 부대까지 지킨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전통이요 부 대는 개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전통과 개혁의 조화 를 찾아 볼수 있습니다. 말씀과 부대를 다 전통과 보수의 개념속에 묶어 두거나 말씀과 부대를 다 개혁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것이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저지르는 잘못들인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회교육을 맡아서 일을 할 때입니다. 신학대학에 서 기독교교육을 연구하고 있는 목사님이 오셔서 고등부를 돌아보시고는 6.25때와 같은 수준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끄러웠지 만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교육이 일반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앞서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가 되지를 않습니다. 일반 교육의 발전은 우리 교회 교 육의 발전과 비교 할수 없습니다. 저희 집 사람이 얼마전 아이들의 영어 공부를 위한 기계를 하나 구입 하였습니다. 자기 태잎이 붙어있는 카드를 기계 사이로 지나가게 하면 거기에 기록된 영어 문장이 300번 씩 반복되어 나오는 기계이었 습니다. 저는 그 기계를 보고 놀랐습니다. 영어 회화를 위한 교육 방 법과 기재가 참으로 많이 발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학교 교육은 어떻습니까 6.25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공과책 하나만을 들고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식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구태의연한 것을 보수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장로교회의 헌법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교단의 헌법은 아마도 교회가 기껏해야 2백명이나 3백명 정도일 때 그러한 교회를 처리하기에 알맞은 사이즈로 제정된 헌법이라고 여겨 집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숫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하였습니다. 이 제는 수천명에서 수만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헌법은 신축성있게 변화하고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헌법이라는 옷에 거대해진 교회의 몸집을 맞추려고 하니 여간 어렵고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든다면 항존 직 선거에 관한 규정입니다. 우리 헌법은 공동의회에서2/3이상의 찬 성을 얻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삼백명이 모일때 그것은 가능 했고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명이 모이고 그것도 1부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4부 5부 예배를 드리는 경우 공동의회에서 2/3이상의 찬성을 얻는 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문 에 요즈음 큰 교회 중에는 새로 선출되시는 장로님보다 은퇴하시는 장 로님들이 더 많아서 고민을 하고 있는 교회들이 맣이 있습니다. 교회 의 상황 변화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고집하는 것을 전통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부하고 연구하는 교회가 되어 끊임없이 자기 변혁과 발전을 시 도하는 우리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 부인' 이라는 말씀에 귀 를 기우려야만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네파가 있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ㅂ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 니라'(고전 3:6-7)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자기 부인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다 바쳐 고린도 교회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부인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라고 바울은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동안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발전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바울과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야만 할 것입니다. 기득권에 대한 욕심은 기득권층에만 젊의 기득권 포기를 주장하는 개혁 론자들에게도 그러한 욕심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저들은 전통주의자들의 기득권을 공격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주장하지 만 사실 저들의 깊은 마음속에는 새로운 기득권의 확보와 그것을 통하 여 저들이 새로운 집단과 교회의 기득권층이 되려고 하는 인간적인 욕망이 가득차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혁명과 개혁이 실패하 게 되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전통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함이 요, 말로는 개혁을 부르짓지만 사실은 새로운 기득권의 확보를 위함 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분쟁 은 그 잇슈가 거의 대부분 전통과 개혁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참 이 유를 살려보면 그것을 가장한 기득권 쟁달전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집단과 교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두아디라 교회처럼 나중이 처음보다 더 나은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동안교회는 어떠한 교회이며 또한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동안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같은 교회입니까 아니면 두아디라 교회와 같은 교회입니까 우리 동안교회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두아디라 교회와 같은 교회되기를 힘써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 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동안교회에는 기득권을 주장 하는 이기적인 전통주의자도 없어야 하겠고 새로운 기득권을 확보하 려고 개혁을 가장하는 이기적인 개혁주의자도 없어야 하겠습니다. 나태와 교만에 빠지기 쉬운 자기 자신을 날마다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는 그러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이기적이 될 때 전통과 개혁은 언제나 갈등관계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된 교회만을 생각하게 될 때 전통과 개혁은 신비한 조화를 이 루게 될 것입니다. 마치 새 부대에 담겨져 있는 새 포도주와 같이 말 입니다. 우리 동안교회를 그러한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두아디 라 교회와 같이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발전하는 교회가 되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은 그러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전을 좋아하시고 정체와 퇴보를 좋아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와 우리 한국교회를 한번 점검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와 우리 한국교회는 현재 발전하고 새로워지고 있는 교회 인가 아니면 정체하고 퇴보의 기미가 보이는 교회인가를 살펴 보아야 만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개교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고비로 정체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카토릭을 그해를 기점으로 해서 급성장을 하였습니다. 배가 까지는 몰라도 카토릭은 많이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는 그해를 기점으로 정체의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현 재는 카토릭이나 개신교가 다함께 정체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출석 통계를 가지고 볼때 우리 교회의 영아부로 부터 청 년부에 이르기 까지 학생과 청년들의 출석 숫자는 장년 출석의 39%에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수치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전국 교회가 거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것은 앞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발전할 것인가 아니면 퇴보할 것인가를 미 리 보여주는 예고지표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앞날 은 결코 밝다고 할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전체적으로 정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제일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안일과 나태를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 100주년을 맞이 하면서 한국교회는 천만 성도를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천만 성도 를 이야기 하면서 한국 교회는 자만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3천만을 잊 어 버리고 안일한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좀 안정이 되면서 하나님을 찾는 간절함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행복이 소유의 넉넉함에 이는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자신이 부유하다고 착각하여 가난하고 어려 웠을 때보다 하나님을 찾는 신앙적인 열정이 식어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안일함이 자연 시앙적인 나태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 나 태가 교회의 정체를 가져온 것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기적인 욕심과 교만 때문이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어 느 집단이나 시간이 흐르고 자리가 잡히게 되고 안정이 되면 반드시 기득권층 이라는 것이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기득권층은 어렵고 힘든 때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고 안정이 되 게 되면 대개 기득권층이 형성되게 되는데 기득권층이 형성되면 거의 정체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득권층은 자신의 기득권에 집착하려고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잘모르지만 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하는것은 공정한 선 거 속에서라고 하여도 여당보다 불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집권 정 당이 아주 커다란 실수를 하기 전에는 사회의 기득권층은 변화를 두 려워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새 대통령에 의하여 많은 개혁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대통령의 개혁과 변 화를 지켜보고 있으며 또한 뒤에서 성원을 하고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가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변 화를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의 불안심리 때문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집단이든지 기득권층이 많고 강하면 변화와 발전의 속도는 떨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교회에도 사람이 모인 곳임으로 기득권층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 기득권층이 투터워지고 힘이 강하여 질 수록 변화와 발전은 더디어지 게 되고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득권층은 본능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싫어합니다. 저들은 본능적으로 정체를 좋아하는데 그들은 그 것을 보수와 전통 또는 안정이라는 말로 미화하기도 합니다. 다는 아 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보수와 전통 그리고 안정을 주장하는 경우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가장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것일 경우가 있다는 사 실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득권자 자신들 조차 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에 쉽게 분별하 기 어려울때가 많습니다. 심한 경우 저들은 개혁론자들과 발전론자들 을 교회의 안정과 전통을 파괴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매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처럼 나중이 처음보다 좋은 교회가 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발전과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 나태와 이 기적인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태와 교만은 바로 죄의 양면인 것입니다.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는 죄악들이 때로는 나태로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이기적인 교만으로 나타나 주의 몸된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하고 또 겸손히 시인 할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나중이 처음보다 좋아 주를 기 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서는 다음 두가지를 마음에 명심 하여 야 할 것입니다.
첫째,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성실함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발전과 변화를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특히 교회의 중책을 맡은 당회원들이 이에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대체로 우리 한국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공부를 잘 안하는 당회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핵 심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당회의 회원들이 게으로고 나태하여 자기 발전을 소홀히 하게 된다면 교회가발전하고 새로워 진다는 것은 거 의 불가능한 일이라 아니 할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불변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아니하는 불변의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부대는 언제나 변화하고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거짓된 개혁론자들과 발전론자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부대가 변하여 야 함을 미끼로 하여 교묘하게 불변하는 진리까지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단인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거짓된 전통주의자들 도 있습니다. 저들은 불변하는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변하여야 할 부대까지 지킨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전통이요 부 대는 개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전통과 개혁의 조화 를 찾아 볼수 있습니다. 말씀과 부대를 다 전통과 보수의 개념속에 묶어 두거나 말씀과 부대를 다 개혁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것이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저지르는 잘못들인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교회교육을 맡아서 일을 할 때입니다. 신학대학에 서 기독교교육을 연구하고 있는 목사님이 오셔서 고등부를 돌아보시고는 6.25때와 같은 수준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부끄러웠지 만 수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교육이 일반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앞서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가 되지를 않습니다. 일반 교육의 발전은 우리 교회 교 육의 발전과 비교 할수 없습니다. 저희 집 사람이 얼마전 아이들의 영어 공부를 위한 기계를 하나 구입 하였습니다. 자기 태잎이 붙어있는 카드를 기계 사이로 지나가게 하면 거기에 기록된 영어 문장이 300번 씩 반복되어 나오는 기계이었 습니다. 저는 그 기계를 보고 놀랐습니다. 영어 회화를 위한 교육 방 법과 기재가 참으로 많이 발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학교 교육은 어떻습니까 6.25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공과책 하나만을 들고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식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구태의연한 것을 보수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장로교회의 헌법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교단의 헌법은 아마도 교회가 기껏해야 2백명이나 3백명 정도일 때 그러한 교회를 처리하기에 알맞은 사이즈로 제정된 헌법이라고 여겨 집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숫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하였습니다. 이 제는 수천명에서 수만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헌법은 신축성있게 변화하고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헌법이라는 옷에 거대해진 교회의 몸집을 맞추려고 하니 여간 어렵고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든다면 항존 직 선거에 관한 규정입니다. 우리 헌법은 공동의회에서2/3이상의 찬 성을 얻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삼백명이 모일때 그것은 가능 했고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명이 모이고 그것도 1부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4부 5부 예배를 드리는 경우 공동의회에서 2/3이상의 찬성을 얻는 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문 에 요즈음 큰 교회 중에는 새로 선출되시는 장로님보다 은퇴하시는 장 로님들이 더 많아서 고민을 하고 있는 교회들이 맣이 있습니다. 교회 의 상황 변화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고집하는 것을 전통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부하고 연구하는 교회가 되어 끊임없이 자기 변혁과 발전을 시 도하는 우리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 부인' 이라는 말씀에 귀 를 기우려야만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네파가 있었습니다.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ㅂ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 니라'(고전 3:6-7)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자기 부인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생명을 다 바쳐 고린도 교회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부인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라고 바울은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와 동안교회가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발전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교회가 되려고 하면 바울과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야만 할 것입니다. 기득권에 대한 욕심은 기득권층에만 젊의 기득권 포기를 주장하는 개혁 론자들에게도 그러한 욕심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저들은 전통주의자들의 기득권을 공격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주장하지 만 사실 저들의 깊은 마음속에는 새로운 기득권의 확보와 그것을 통하 여 저들이 새로운 집단과 교회의 기득권층이 되려고 하는 인간적인 욕망이 가득차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혁명과 개혁이 실패하 게 되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전통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려함이 요, 말로는 개혁을 부르짓지만 사실은 새로운 기득권의 확보를 위함 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분쟁 은 그 잇슈가 거의 대부분 전통과 개혁의 갈등입니다. 그러나 참 이 유를 살려보면 그것을 가장한 기득권 쟁달전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러한 집단과 교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두아디라 교회처럼 나중이 처음보다 더 나은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동안교회는 어떠한 교회이며 또한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오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동안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같은 교회입니까 아니면 두아디라 교회와 같은 교회입니까 우리 동안교회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두아디라 교회와 같은 교회되기를 힘써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 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동안교회에는 기득권을 주장 하는 이기적인 전통주의자도 없어야 하겠고 새로운 기득권을 확보하 려고 개혁을 가장하는 이기적인 개혁주의자도 없어야 하겠습니다. 나태와 교만에 빠지기 쉬운 자기 자신을 날마다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는 그러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이기적이 될 때 전통과 개혁은 언제나 갈등관계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몸된 교회만을 생각하게 될 때 전통과 개혁은 신비한 조화를 이 루게 될 것입니다. 마치 새 부대에 담겨져 있는 새 포도주와 같이 말 입니다. 우리 동안교회를 그러한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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