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진리 (요이1:1-6,시85:7-13)
본문
제1 공화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정치가들을 존 경하고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저들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진실이 없기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치가 이와같이 신실하 지 못한 까닭에 오늘 이 땅에서 신뢰심과 사랑이 모두 증발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깊은 증오심과 불신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남북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가장 큰 장애는 불신 과 증오입니다. 저들의 정권이 거짓 위에 세워졌고 진실이란 찾아볼 수 없기에 저들을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는 곳에 신 뢰가 있을 수 없고, 신뢰가 없는 곳에 사랑이 자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통일을 이룩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남북 정 권이 다같이 진실을 회복하지 아니하고서는 통일의 길은 멀기만 한 것입니다. 불신과 증오! 이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암적인 요소입니다. 대 학 사회마저 이 암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는 권위와 신뢰의 대상이었던 것 들이 오늘에 와서는 진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존경하고 사랑할 대상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정에서 조차도 부모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그 자녀들이 부 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모들이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와같이 병든 사회를 누가 치료할 수 있을까요 진리와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사회의 불신과 증오를 거두어 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우리가 사랑과 진리를 이 민족 속에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이 행동화 된 것이다 성경에서 "진리" 라는 말은 공고, 안전, 신실, 확고부동을 뜻합니다. 확 고하고 안전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그가 인간 생활 속에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특징을 나타내는데 주로 사용이 되 었습니다. 시편 31편 5절에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나를 구속하셨나이 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스스로 신실하시고 자기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 신 하나님께서 신자들 편이 되어 주시고 친히 간섭하셔서 신자들을 위협하는 불안정에서 구출하시고 새 기반을 닦아 생존의 터를 만들어 주시며 미 래의 소망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삼하 7:28, 요 17:17).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여서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함이 없다는 뜻에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시고자 오셨고, 그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진리 란 결국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확고불변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거짓에 속아서 잘못된 길로 나가는 인간들을 구원하여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 한 것입니다. 참 안전과 생명을 줄 수 없는 우상에게로 이끌리는 인간들을 그 파멸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이끄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자신을 내어주 시므로 그는 자신이 진리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 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 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의 사랑이 거짓이 아님 을 확증하심으로 그 자신이 진리이심을 나타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와 생명과 사랑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결같이 나타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신 일 이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에 기초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가 빠져버린 사랑 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다"(12:9)고 말씀한 것도 바로 사랑은 행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뜻한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할 때만 효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불신의 사회를 치료하는 길이나 남북의 통일을 이룩하는 길은 우리가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할 때 진리가 나타나게 되고, 진리가 나타나면 거짓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한반도에 거짓이 활개를 치는 까닭은 진리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가 되려면 자신을 희생의 제 물로 드리는 사랑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말로만 복음을 전하여 왔습니다. 이제는 말이 아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여 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이끌려 진리를 떠난 인간을 구원하 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예 언자만을 보내셔서 '생명의 길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가 진리임을 확증하심으로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몰아내시 고 빛과 사랑의 세계를 이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땅에서 모든 거짓과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앞장 서서 몸으로 이 모든 거짓과 부딪쳐 가야 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그 복음이 진리가 되고 그 진리가 이 땅에서 모든 거짓을 몰아내게 될 것입니다. 불신과 증오의 치료는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퍼부을 때만 가능 합니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결국 희생을 뜻합니다. 십자가 를 지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날뛰는 자식을 치료하는 길은 부모의 끝없는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의 병든 대학 사회를 치료하는 길도 재단과 교수 들의 인내와 사랑으로 학생들을 감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고 봅니다. 오늘 의 병든 정치를 치료하는 길도 국민들이 그 거짓된 정치로 인하여 오는 피 해를 감수하면서 이 사랑을 통하여 저들의 거짓을 계속 들어내는 길 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공장이 쏟아내는 폐수를 우리가 마시고 죽어가므로 인 해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각성이 사회 전반에 일어나게 하는 길 밖에는 이 환경 오염을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불신과 증오의 두터운 장벽으로 막힌 남북의 대화의 물꼬를 트는 길은 정권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서로가 거짓말하는 사람들끼리 앉아 아무리 대화를 하여도 거기에 진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이나 쌀 교역 같은 민간 차원에 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가장 좋은 통일의 운동이 될 것입니다. 불신의 벽을 허무는 길은 일방적으로 희생적인 사랑과 신뢰를 보내는 길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중단하지 아니하고 계속 사랑의 손길을 펴 나가는 곳에 점진적으로 신뢰가 회복되고 사랑이 싹트게 될 것입니다. 거짓 위에 세워진 김일성 정권이 아무리 든든하게 철의 장막을 쌓았다 하 더라도 진리 앞에는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든든하던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의 믿음 앞에서 무너져 내린 것처럼 저 거짓의 철벽도 결국은 진리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남북한 정권의 모든 거짓을 우리의 사랑과 진리로 무너뜨리는 날 통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불가분의 관계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 진리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진리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진리가 우리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과연 우리안에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요한 1서에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4-5) 이 말씀은 우리가 믿노라 하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거짓말 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은 사랑과 진리라는 말을 가 장 많이 사용한 서신들입니다. 요한 2서와 3서에 보면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은 바로 그들이 사랑을 행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2서 4절에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 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서신에서 계명은 곧 사랑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진리를 행하는 것으로 표현 하므로 그것이 같은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모든 삶에 거짓이 없다는 것 을 의미합니다.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실 하다든지 진실한 사람이든지 하는 말이 다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나의 삶이 변화 되어 깨끗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추구하므로써 자신의 영혼을 맑게 만드는 삶입니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사랑에 이르게 마련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2절에 "너희 가 진리를 순종하므로써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나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없이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사랑없는 진리는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 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 자부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진리의 사람 들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리는 있었지만 사랑이 없 으므로 해서 그 진리 자체가 왜곡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진리는 율법의 글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지시하는 하나님 안에 있 음을 저들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문자에 사로 잡히거나 교회법에 붙잡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므로 해서 사랑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이 지시하는 사랑의 생활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은 진리가 아닌 한낱 지식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 오염의 원인이 우리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샴프도 쓰고 일회용 컵도 사용하며 지나치게 많은 쓰레기들을 버 리고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환경 오염의 정화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진리로 바꾸는 사랑의 삶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함 께 역동적인 것이므로 우리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 속에 자리잡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성경공부는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성경공부가 우리의 지식은 많이 향상 시켜 주는데는 크게 기여를 했지만 진리를 행하는데 까지는 이끌어 주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배운 지식을 사랑으로 발동을 걸어 그것이 진리가 되게 하는 훈련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지식을 추구했지 진리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진리를 행하는 자, 사랑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불신과 증오로 얼룩진 사회 속에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전하여 이 사회를 치료하여야 하겠습니다. 진리만이 이 사회 속에 퍼져 있는 거짓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진리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거짓과 어둠으로 덮 였던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오심으로 해서 그 거짓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와 빛의 세계를 이룩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그리스도의 몸 인 교회가 이 사회 속에 성육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희생 의 제물이 될 때 비로소 우리가 가진 복음이 진리가 되어 거짓들이 물러가 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지금 사랑도 진리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제 진리의 영 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사랑과 진리가 충만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 함을 통하여 사랑과 진리가 충만한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에 관한 연속 설교' 사랑과 순종 성경
본문:사 1:10-17, 요일 4:7-11 한 율법사가 와서 예수님께 "율법중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을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은 구약성경에서 원래는 따로 따로 있던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함께 묶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계명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잘못되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 지 이웃 사랑을 거기에 포함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평생 수도원에만 틀어박혀 성경 보고 기도하는 생활만 전념했던 것입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치 아니하고 경건생활에만 몰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반대해서 고난당하는 이웃을 사랑하는데 몰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이 모순된 사회를 개혁하려고 뛰 어들어 활동하다 보니 과격해질 수 밖에 없고 폭력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 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웃 사랑을 위해 하나님을 등지고 만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한국 교회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60년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회 참여 를 부르짖으며 인권운동에 앞장 서온 교회가 있는가 하면 급격한 사회 변 동에는 아랑곳 없이 이기적인 신앙생활에만 몰두해온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름 아래서 세상이 버림받은 것이나, 세속에 대한 참 여의 이름 아래서 하나님이 무시되는 것은 똑같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두 계명은 모두 지켜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 두 계명중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비교적 열심히 지켰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데는 한국 교회를 따를 교회가 없습니다. 주일 예배를 비롯해서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 구역 예 배, 성경 공부등 수 없는 집회에 많은 교인들이 열성적으로 참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뿐입니다. 그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연결되지 못하 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 계명이 무시된 예배가 과연 진정한 예배일까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 사랑 계명도 온전히 지켜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계명을 함께 묶은 것은 그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온전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이사야 서에 보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시면서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 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변호하라"고 촉구하 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차라리 제사는 이제 고만 드리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오늘 살아 있다면 한국 교회를 향하여 "예배당에 모이는 집회는 좀 주리고 이제는 가 난한 이웃들을 좀 돌보라"고 촉구할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통행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통행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 사랑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흐름은 보통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 교회로 부터 세상으로 흘러가는 일방통행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들도 물론 그 아버지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않고 그 아 들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무리 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서로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을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 이 세상을 향해 흘러 나갈 때 비로소 사랑의 흐름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흐름이 계속될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사랑의 흐름을 막거나 역류(逆流)시킬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 하고자 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 고 그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만 집착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중단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다 면 너희가 받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 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 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1:3-5)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킬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채 여전히 예배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모이는 교회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여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자신들 조차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흘려보낼 여유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내 가 너희들의 예배에 이제 신물이 난다. 예배는 그만했으면 됐으니 제발 너희들끼리라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하나된 힘으로 세상을 향해 사랑을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예배드리러 예배당에 나왔다가 예배만 마치면 교우들과 아무 사귐 없이 그냥 돌아가 버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또 말씀을 통하여 위로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드리고 돌아가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최소한도 같이 앉아 예배드린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지 못한 다면 그가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예배는 반쪽 예배일 수 밖에 없고 반쪽 예배는 결국 예배가 아닙니다.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 태로든지 공동체의 사귐을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요. 이런 공동체 안에 들어 오지 못하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진정 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그 사랑 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사귐을 가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 구원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흘러 들어와 거기서 멈추어 버리고 말면 결국 썩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흘려 보낼 때 깨끗하고 맑은 사랑의 흐름이 내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흐름 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번 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한번 부어지면 영원히 무슨 보석처럼 내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역동적인 것입니다.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줄 때 또다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사랑을 부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말씀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4:12)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계속 들어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받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지런히 이웃을 사랑하십시요. 하나님의 은총으로 병 낫기를 원하시면 자신을 돌아보아 남을 사랑하지 못했 던 죄를 회개하고 사랑을 부지런히 베풀어 보십시요.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베풀지 않고도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 은총에 응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사랑을 베풀어 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믿고 구원받았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넘쳐 흐르는듯한 감격을 맛봅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그 감격이 사라지고 덤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중요한 원인은 받은 바 사랑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우리 사이에서 조차 사랑을 느끼지 못 한다면 항차 다른 곳에서는 더욱 사랑을 베풀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굳게 닫힌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사랑도 받아들이고 또 내 속에서 사랑이 흘러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가운데 숨어계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하시고 구원하신 다음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만약에 그가 승천하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오래 계셨다면 사람들이 그만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예수님께 바칠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열 두 제자들 이 서로 사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저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만큼 우리가 그에게 사랑을 되돌릴 것을 요청하시지 않습니다. 그에게 돌릴 사랑을 이웃에게 돌릴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 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면서 그와같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여 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 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그렇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나의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다면 그가 사랑하시는 양떼들 곧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기 위해 이 땅에 머무시 지 아니하고 승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의 형상을 본뜬 어떤 우상도 만들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자신을 감추시기 위한 것입니다. 자 신을 감추시므로 우리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땅의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 숨어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예수님 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 은 이 땅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저들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위를 쳐다보며 하나님을 예배함과 동시에 내 작은 이웃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 부터 아래로 흐르는 강물과 같 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서로 사랑하 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우리에게 더욱 사랑을 넘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 사랑이 우리 에게서 멈추어 저수지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계속 이 사랑의 강물이 흘러가도록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랑의 강물 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았던 마음의 둑을 모두 헐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의 강물이 여러분의 가정에 넘치시고 그리고 이 교회 안에 차 고 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넘쳐 흐른 사랑의 강물이 지극히 작은 우리의 이웃들에게로 흘러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랑의 강물이 흐르도록 은총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하나님께로 돌린다는 핑게로 이웃 사랑을 중단해서 안 됩니다. 사랑의 흐름에는 일방통행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서 흘러나는 사랑의 강물로 인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 성경
본문:고전 13:1-3 우리는 짧은 인생 즉 눈깜짝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봅니다. 처음에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열정을 가지고 목회생활을 했던 것을 바라보면서 가슴깊이 뉘위치는 것도 많았고, 부족했 던 모습이 많아 보입니다. 역시 사랑으로 목회를 해야 됨을 절실히 느낍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나타나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사랑이 없으면'이란 말이 세번 나옵니다. 예언자의 삶과 그들의 큰 믿음의 역사의 근원은 사랑입니다. 구제 또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결국 이 사회가 사랑의 결핍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적이며 절대성을 지니고 있고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사랑은 생사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속에는 '관심을 갖는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보람있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사랑과 사랑의 결핍의 차이는, 전자는 정성을 다하지만 후자는 대강대강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 때문에 지는 짐은 가볍지만 사랑이 없이 지는 짐은 매우 무겁습니다. 사랑은 날 짜와 시간이 없으며 사랑을 하면 시간이 짧게 느껴집니다. 인생은 사랑으로 살 때 즐겁고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분명히 있고 이로 인하여 삶의 무한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매우 중요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을 주 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듯이 전세계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의 무가 되었습니다. 지난 5년간 우리 한국기아대책기구는 우리가 사랑으로 했기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발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할 때 우리는 모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큰 사랑을 가지고 전세계에 굶어죽어가는 우리 의 이웃에게 떡과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란 말씀에 귀를 기울 이시기를 바랍니다. 참다운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 사랑의 결핍에 걸리지 않았나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이란 말을 '사랑이 있으면'이란 말로 대치하 여 이겨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풀어 나가며 감싸주는 귀한 직분자들이 되시기 를 주님이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삼하 7:28, 요 17:17).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여서 틀림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변함이 없다는 뜻에서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시고자 오셨고, 그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진리 란 결국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확고불변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거짓에 속아서 잘못된 길로 나가는 인간들을 구원하여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 한 것입니다. 참 안전과 생명을 줄 수 없는 우상에게로 이끌리는 인간들을 그 파멸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이끄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자신을 내어주 시므로 그는 자신이 진리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 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 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의 사랑이 거짓이 아님 을 확증하심으로 그 자신이 진리이심을 나타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와 생명과 사랑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결같이 나타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신 일 이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에 기초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가 빠져버린 사랑 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거짓 사랑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랑엔 거짓이 없다"(12:9)고 말씀한 것도 바로 사랑은 행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뜻한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할 때만 효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불신의 사회를 치료하는 길이나 남북의 통일을 이룩하는 길은 우리가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할 때 진리가 나타나게 되고, 진리가 나타나면 거짓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한반도에 거짓이 활개를 치는 까닭은 진리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진리가 되려면 자신을 희생의 제 물로 드리는 사랑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말로만 복음을 전하여 왔습니다. 이제는 말이 아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여 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이끌려 진리를 떠난 인간을 구원하 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과 예 언자만을 보내셔서 '생명의 길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직접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가 진리임을 확증하심으로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몰아내시 고 빛과 사랑의 세계를 이룩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땅에서 모든 거짓과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앞장 서서 몸으로 이 모든 거짓과 부딪쳐 가야 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그 복음이 진리가 되고 그 진리가 이 땅에서 모든 거짓을 몰아내게 될 것입니다. 불신과 증오의 치료는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사랑을 퍼부을 때만 가능 합니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결국 희생을 뜻합니다. 십자가 를 지는 것을 뜻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날뛰는 자식을 치료하는 길은 부모의 끝없는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의 병든 대학 사회를 치료하는 길도 재단과 교수 들의 인내와 사랑으로 학생들을 감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고 봅니다. 오늘 의 병든 정치를 치료하는 길도 국민들이 그 거짓된 정치로 인하여 오는 피 해를 감수하면서 이 사랑을 통하여 저들의 거짓을 계속 들어내는 길 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공장이 쏟아내는 폐수를 우리가 마시고 죽어가므로 인 해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각성이 사회 전반에 일어나게 하는 길 밖에는 이 환경 오염을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불신과 증오의 두터운 장벽으로 막힌 남북의 대화의 물꼬를 트는 길은 정권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서로가 거짓말하는 사람들끼리 앉아 아무리 대화를 하여도 거기에 진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쌀 보내기 운동이나 쌀 교역 같은 민간 차원에 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가장 좋은 통일의 운동이 될 것입니다. 불신의 벽을 허무는 길은 일방적으로 희생적인 사랑과 신뢰를 보내는 길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중단하지 아니하고 계속 사랑의 손길을 펴 나가는 곳에 점진적으로 신뢰가 회복되고 사랑이 싹트게 될 것입니다. 거짓 위에 세워진 김일성 정권이 아무리 든든하게 철의 장막을 쌓았다 하 더라도 진리 앞에는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든든하던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의 믿음 앞에서 무너져 내린 것처럼 저 거짓의 철벽도 결국은 진리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입니다. 남북한 정권의 모든 거짓을 우리의 사랑과 진리로 무너뜨리는 날 통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의 불가분의 관계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사랑과 진리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진리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진리가 우리 안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과연 우리안에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요한 1서에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4-5) 이 말씀은 우리가 믿노라 하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거짓말 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은 사랑과 진리라는 말을 가 장 많이 사용한 서신들입니다. 요한 2서와 3서에 보면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 안에 거한다는 말은 바로 그들이 사랑을 행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2서 4절에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 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서신에서 계명은 곧 사랑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진리를 행하는 것으로 표현 하므로 그것이 같은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모든 삶에 거짓이 없다는 것 을 의미합니다.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실 하다든지 진실한 사람이든지 하는 말이 다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나의 삶이 변화 되어 깨끗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추구하므로써 자신의 영혼을 맑게 만드는 삶입니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사랑에 이르게 마련입니다. 베드로 전서 1장 22절에 "너희 가 진리를 순종하므로써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나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없이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사랑없는 진리는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 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 자부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진리의 사람 들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진리는 있었지만 사랑이 없 으므로 해서 그 진리 자체가 왜곡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진리는 율법의 글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이 지시하는 하나님 안에 있 음을 저들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문자에 사로 잡히거나 교회법에 붙잡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므로 해서 사랑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이 지시하는 사랑의 생활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은 진리가 아닌 한낱 지식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 오염의 원인이 우리 자신들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샴프도 쓰고 일회용 컵도 사용하며 지나치게 많은 쓰레기들을 버 리고 있습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환경 오염의 정화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진리로 바꾸는 사랑의 삶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과 함 께 역동적인 것이므로 우리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 속에 자리잡아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성경공부는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성경공부가 우리의 지식은 많이 향상 시켜 주는데는 크게 기여를 했지만 진리를 행하는데 까지는 이끌어 주지 못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가 배운 지식을 사랑으로 발동을 걸어 그것이 진리가 되게 하는 훈련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지식을 추구했지 진리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진리를 행하는 자, 사랑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불신과 증오로 얼룩진 사회 속에 사랑과 진리의 복음을 전하여 이 사회를 치료하여야 하겠습니다. 진리만이 이 사회 속에 퍼져 있는 거짓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진리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거짓과 어둠으로 덮 였던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아들이 들어오심으로 해서 그 거짓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리와 빛의 세계를 이룩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그리스도의 몸 인 교회가 이 사회 속에 성육신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희생 의 제물이 될 때 비로소 우리가 가진 복음이 진리가 되어 거짓들이 물러가 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지금 사랑도 진리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제 진리의 영 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셔서 우리를 변화시켜 사랑과 진리가 충만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 함을 통하여 사랑과 진리가 충만한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에 관한 연속 설교' 사랑과 순종 성경
본문:사 1:10-17, 요일 4:7-11 한 율법사가 와서 예수님께 "율법중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을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은 구약성경에서 원래는 따로 따로 있던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함께 묶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계명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잘못되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 지 이웃 사랑을 거기에 포함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평생 수도원에만 틀어박혀 성경 보고 기도하는 생활만 전념했던 것입니다. 수도원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치 아니하고 경건생활에만 몰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반대해서 고난당하는 이웃을 사랑하는데 몰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이 모순된 사회를 개혁하려고 뛰 어들어 활동하다 보니 과격해질 수 밖에 없고 폭력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 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웃 사랑을 위해 하나님을 등지고 만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한국 교회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60년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회 참여 를 부르짖으며 인권운동에 앞장 서온 교회가 있는가 하면 급격한 사회 변 동에는 아랑곳 없이 이기적인 신앙생활에만 몰두해온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름 아래서 세상이 버림받은 것이나, 세속에 대한 참 여의 이름 아래서 하나님이 무시되는 것은 똑같이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두 계명은 모두 지켜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 두 계명중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비교적 열심히 지켰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데는 한국 교회를 따를 교회가 없습니다. 주일 예배를 비롯해서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 구역 예 배, 성경 공부등 수 없는 집회에 많은 교인들이 열성적으로 참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 뿐입니다. 그 하나님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연결되지 못하 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 계명이 무시된 예배가 과연 진정한 예배일까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 사랑 계명도 온전히 지켜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계명을 함께 묶은 것은 그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온전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이사야 서에 보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시면서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 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변호하라"고 촉구하 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차라리 제사는 이제 고만 드리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오늘 살아 있다면 한국 교회를 향하여 "예배당에 모이는 집회는 좀 주리고 이제는 가 난한 이웃들을 좀 돌보라"고 촉구할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통행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통행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그 사랑은 강물처럼 흐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흐름은 보통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 교회로 부터 세상으로 흘러가는 일방통행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들도 물론 그 아버지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않고 그 아 들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무리 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서로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을 세상을 향해 흘려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 이 세상을 향해 흘러 나갈 때 비로소 사랑의 흐름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흐름이 계속될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사랑의 흐름을 막거나 역류(逆流)시킬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 하고자 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 고 그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만 집착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중단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다 면 너희가 받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가 우리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 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 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1:3-5)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킬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채 여전히 예배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모이는 교회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여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자신들 조차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흘려보낼 여유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내 가 너희들의 예배에 이제 신물이 난다. 예배는 그만했으면 됐으니 제발 너희들끼리라도 서로 사랑하여 하나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하나된 힘으로 세상을 향해 사랑을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예배드리러 예배당에 나왔다가 예배만 마치면 교우들과 아무 사귐 없이 그냥 돌아가 버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또 말씀을 통하여 위로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드리고 돌아가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최소한도 같이 앉아 예배드린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지 못한 다면 그가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예배는 반쪽 예배일 수 밖에 없고 반쪽 예배는 결국 예배가 아닙니다.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 태로든지 공동체의 사귐을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요. 이런 공동체 안에 들어 오지 못하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진정 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그 사랑 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눈에 보이는 형제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사귐을 가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 구원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흘러 들어와 거기서 멈추어 버리고 말면 결국 썩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흘려 보낼 때 깨끗하고 맑은 사랑의 흐름이 내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흐름 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번 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한번 부어지면 영원히 무슨 보석처럼 내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역동적인 것입니다. 받은 사랑을 나누어 줄 때 또다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도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사랑을 부어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말씀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4:12)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계속 들어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받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지런히 이웃을 사랑하십시요. 하나님의 은총으로 병 낫기를 원하시면 자신을 돌아보아 남을 사랑하지 못했 던 죄를 회개하고 사랑을 부지런히 베풀어 보십시요.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베풀지 않고도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 은총에 응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사랑을 베풀어 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믿고 구원받았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넘쳐 흐르는듯한 감격을 맛봅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그 감격이 사라지고 덤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중요한 원인은 받은 바 사랑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우리 사이에서 조차 사랑을 느끼지 못 한다면 항차 다른 곳에서는 더욱 사랑을 베풀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굳게 닫힌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사랑도 받아들이고 또 내 속에서 사랑이 흘러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가운데 숨어계신 하나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므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하시고 구원하신 다음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만약에 그가 승천하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오래 계셨다면 사람들이 그만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예수님께 바칠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열 두 제자들 이 서로 사랑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저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만큼 우리가 그에게 사랑을 되돌릴 것을 요청하시지 않습니다. 그에게 돌릴 사랑을 이웃에게 돌릴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 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면서 그와같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여 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 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그렇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나의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다면 그가 사랑하시는 양떼들 곧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기 위해 이 땅에 머무시 지 아니하고 승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의 형상을 본뜬 어떤 우상도 만들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자신을 감추시기 위한 것입니다. 자 신을 감추시므로 우리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땅의 지극히 작은 자들 가운데 숨어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라고 예수님 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 은 이 땅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저들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위를 쳐다보며 하나님을 예배함과 동시에 내 작은 이웃들을 향해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 부터 아래로 흐르는 강물과 같 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길은 서로 사랑하 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우리에게 더욱 사랑을 넘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 사랑이 우리 에게서 멈추어 저수지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계속 이 사랑의 강물이 흘러가도록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이 사랑의 강물 이 흘러가지 못하도록 막았던 마음의 둑을 모두 헐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의 강물이 여러분의 가정에 넘치시고 그리고 이 교회 안에 차 고 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넘쳐 흐른 사랑의 강물이 지극히 작은 우리의 이웃들에게로 흘러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랑의 강물이 흐르도록 은총을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하나님께로 돌린다는 핑게로 이웃 사랑을 중단해서 안 됩니다. 사랑의 흐름에는 일방통행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서 흘러나는 사랑의 강물로 인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 성경
본문:고전 13:1-3 우리는 짧은 인생 즉 눈깜짝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봅니다. 처음에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열정을 가지고 목회생활을 했던 것을 바라보면서 가슴깊이 뉘위치는 것도 많았고, 부족했 던 모습이 많아 보입니다. 역시 사랑으로 목회를 해야 됨을 절실히 느낍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나타나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사랑이 없으면'이란 말이 세번 나옵니다. 예언자의 삶과 그들의 큰 믿음의 역사의 근원은 사랑입니다. 구제 또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결국 이 사회가 사랑의 결핍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적이며 절대성을 지니고 있고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사랑은 생사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말속에는 '관심을 갖는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보람있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사랑과 사랑의 결핍의 차이는, 전자는 정성을 다하지만 후자는 대강대강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 때문에 지는 짐은 가볍지만 사랑이 없이 지는 짐은 매우 무겁습니다. 사랑은 날 짜와 시간이 없으며 사랑을 하면 시간이 짧게 느껴집니다. 인생은 사랑으로 살 때 즐겁고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분명히 있고 이로 인하여 삶의 무한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매우 중요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을 주 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듯이 전세계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의 무가 되었습니다. 지난 5년간 우리 한국기아대책기구는 우리가 사랑으로 했기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발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할 때 우리는 모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큰 사랑을 가지고 전세계에 굶어죽어가는 우리 의 이웃에게 떡과 말씀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주님이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란 말씀에 귀를 기울 이시기를 바랍니다. 참다운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 사랑의 결핍에 걸리지 않았나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이란 말을 '사랑이 있으면'이란 말로 대치하 여 이겨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풀어 나가며 감싸주는 귀한 직분자들이 되시기 를 주님이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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