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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요일1:1)

본문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 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한 사도는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의 신비에 깊이 압도되어 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서신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도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성 육신의 신비에 대한 깊은 반성과 그리고 감탄이 가득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요한일서의 주 제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의 신비에 대한 깊은 반성과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거기서 귀결되는 형제들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이단과 적그리스도에 관한 시비가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의 신비 그리고 그로 인한 구속에서 그 리고 거기서 흘러 나오는 성도들의 생활의 규범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심 주제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의 혹은 말씀에 성육신의 신비에 대한 반 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서 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람 되심에 대한 강조가 있지만 사도 요한의 글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사람 되심에 대한 신비에 대한 깊은 반성과 통찰이 계속되고 있는 글은 다시 없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요한서신은 아직도 연대 확정이 잘 되어 있지 않지 만 그렇게 일찍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대부분 그의 말년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자기의 주님이 승천하고 가신 후에 최소한 3140년 동안 그가 친기 만나고 배우며 그리고 그에게 서 구속을 만난 그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심에 대한 깊은 통찰의 반성과 그리고 그에 대 한 경탄 그리고 이어서 감사로 삼십여년 이상을 그의 생에 계속 해 왔습니다.
하나님 말씀 에 대한 이것은 그러니까 현대 학자들이 말하듯 새로운 사실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가져온 그 영광과 그의 구속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반성하 고 또 체험한 그 본래에까지 되돌아 가고 있습니다. 요한사도가 바로 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때도 통상적인 희랍 세계의 인사법에 의해서 내 가 지금 누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하는데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그와 같은 인사 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이 사도의 증거가 바로 육신으로 나타나신 말씀의 증거에 대해서 자 기의 깊은 심장에 몰두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말을 하고 그리고 이의를 증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서 그가 바로 자기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리고 전파하도록 책임받은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한 자기의 그 이해와 그리고 진리를 개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처 음에 부터서 시작이 처음에 편지의 형식을 겸하고 있습니다.누가 누구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을지어다하는 그와 같은 편지의 서식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습니다. 아마 혹시 그런 것은 요한이 갖는 그런 무식의 소치에 돌릴 수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편지 전체를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아들 혹은 말씀이 육신이 되 신 이 신비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 그러나 그걸 반성하고 이렇게 반추하므로 새로 운 철학적인 진리를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경탄이 계속되고 있을 뿐, 요한이 요한계시록에는 그래도 요한계시록이 무엇임을 말함과 동시에 편 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요한일서는 그와 같은 편지 형식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그것은 그가 편지의 형식을 몰라서 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혹은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 신비에 사로잡혀서 다른 것을 먼저 말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본문을 읽어 봅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 . 보면 문법적으로도 희랍어의 정상적인 문법의 배열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물 론 요한복음의 저자가 19세기 말엽 부터서 사도 요한이 아니라고 하는 시비가 많이 생겨서 (표시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본문이 증거하는 증거를 보면 사도요한의 글처럼 쉬운 문장들 로 계속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의 어법의 예로 계속 연결된 것이 그대로 여기 나타났다고 할 것입니다. 애초부터 있었던 것, 여기에 을 과거동사를 사용하므로 성육 신 하시기 이전까지 하나님으로 계속해 계셨음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에 정 관사를 붙이지 아니하므로 특별히 요한복음 1장 1절에 더욱 그러하지마는 이것이 고전적 용법, 즉
그러므로 이렇게 표시하므로 창세기 1장 1절의 브레쉬트와 대조되는 즉 하나님의 영원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초부터 있는 말씀, 영원부터 계셨던 분에 대한 지시 를 할 때에 우리의 시간내에 있는 사람이 그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태 초부터 라고 표시했습니다. 그러니 희랍인들의 영원적인 사상이 전혀 여기에 영향을 미치 지 아니했습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것 그렇게 하고서 다 한 다음에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 그러니까 전혀 정상적인 문법에 맞지 아니하지요. 태초부터 있었던 것, 그렇게 하고서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라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의태초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그 영원한 상태를 사람의 언어로 표시하므로 태초 라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것, 그리고 또 보통 정상 적인 문법이라면태초부터 계신 이 라 하고 그리고를 해야 맞을 것이지만 중성을 사용 했습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것,
그런데 그리고 우리가 들었던 것, 앞에는 이라는 과거동사를 사용했는데 그 다음에 우리가 들었던 것할 때는 현재 완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완료를 사용하므로 그 냥, 물론 그냥 친히 그 입으로 나오는 말을 듣는 일은 지금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전 처럼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완료를 사용해서 그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전처럼 직접 생생히 울리는 음 성으로는 아니어도 다시 눈 감으면 그의 귀에 그리스도의 음성이 그대로 재생되어 들려오 고 있습니다. 그러니 현재완료를 사용하므로 들음이 끝난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이미 옛 날에 들었던 것을 지금도 반복해서 듣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 게 현재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 요한이 33년 동안 계실 동안 3년 따라 다니면서 그때 만 그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눈 감으면 그리스도의 음성이 생 생하게 들려 왔습니다. 아마 그렇게 계속적으로 요한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주의 음성을 들 을 수 있었기에 다른 복음서들에 나타나지 아니한 다른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을 포착하 지 못했던 것들을 포착해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 반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여기서 함과 사이에 태초부터 계신이가 성육신 해서 나타나신 진리를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우리가 들었다고 하는 것, 그 말 사이에 성육신 사건이 사건 그대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초부터 계신 이가 아니 영원부터 계신 이가 이제 우리 중에 나타나셔서 우리가 그에게 들었을 뿐만 아 니라 지금도 내가 그의 음성과 말씀을 듣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들로 친히 보았다. 우리의 눈으로 그냥 바라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바라보는 것이 육체안에 계신 주님 을 만지듯 바라볼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도 현재완료형을 씁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의 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하나도 변화되지 아니하고 하나도 사라지지 아니하고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만지듯, 손으로 만지듯 보는 것이야 주님의 승천으로 끝 났지만 지금도 눈 감으면 그의 눈에 그리스도가 그대로 나타나셔서 계속해서 말씀하신 거 를 자기의 눈으로 볼 수가 있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우리의 눈들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도 요한의 감탄이 있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그분을 우리가 들었고 그리고 보았다. 여기도 강조점이,
그런데 보는 데 있지 아니하고 말씀을 듣는 데 강조가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데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데 강조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들었었다고 하는 말이 보다 앞에 나와 있습니다. 구약 전통에, 구약의 종교에 있어서도 항상 하나님을 육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 니라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항상 구약의 종교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구속 을 우리를 위하여 친히 하실 것인가, 그리고 어떤 구속을 이루실 것인가를 그 약속을 계속 해서 성전 제사에서 선지자를 통하여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바로 구약의 교회에서 가장 중 요한 것은 항상 말씀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선포된 그 말씀,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 말씀에서 생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순서가, 우리 같으면 눈으로 보는 것이 나타난 것이 먼저 있을 것 같아도 주 의 성육신에서 나타나셨으니 우리 눈으로 본 것을 먼저 말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구약의 그 근본 정신을 따라서 우리가 들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뒤에에 나타나 있듯이 거기서 듣는 이가 바로 누구냐 생명의 말씀이다. 바로 구약에서 예언하고 약속하신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물론 선지자들이 선포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했습니다. 구약의 교회가! 또 모세오경도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고 기록한 것도 말씀으로, 다발야웨,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부터 시작해서 모든 선지자 를 통해서 그리고 케투빔, 그리고 시편과 잠언과 전도서를 통해서 욥기를 통해서 기록된 그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 했습니다. 구약의 종교는 성경의 종교는 말씀의 종교이고 듣는 종교입니다. 바로 그들이 들은 말씀이 무엇이냐 그 들은 말씀이 무엇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강생, 그로 인한 세계의 구속이 그것이 이스라엘이 들어오고 약속받으며 보 냈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강조가 보는 데 있지 아니하고 듣는 데 있다! 바로 현재 완료형을 사용하므로 구약의 선지자들과 모세가 선포하고 약속해 준 바 로 그 말씀 참 생명의 말씀을 우리가 들었다고 하는 사실, 구약이 성취됐다고 하는 사실을 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문장은 간단하여도 구약의 예언과 성취가 여기에 다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구약이 예언하고 약속한, 조상들에게 약속된 그 생명의 말씀을,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이 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를 문장 끝에다 갖다 놓으면서 바로 그 다음에 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구약 백성들이 들어 왔고 바라 온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바로 그 약속 된 구약의 말씀이 지금 사도 요한과 그의 동료들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내 가 들었다 가 아니라이라고 말합니다.내가 들었다 가 아니라우리가 들었다 고 말하므로 자기가 혼자 들은 것이 많은 나와 함께 된 사도들, 그리고 그를 따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들었음을, 그러니까 그냥 나 혼자 홀로 들은 그런 사색적인 사 변적인 말씀이 아니라 구약의 성취가 이루어진,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우리가 친히 들 었다고 합니다.우리가 들었다 고! 많은 증인이 있는 말씀의 주인 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우리 눈들로 바라 보았다. 지금 우리가 사도 요한의 눈에 그리스도를 만지듯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 기 문장에 우리의 눈들로 본 것, 그리고 여기서 이 문장 앞에 가 지 아니하고 문장 뒤에 와 있습니다.
그 어구의 뒤에 이! 그렇게 함으로 우리들이 친히 우리들의 눈으로 보았다. 우리들을 따라는 증인들, 열 두 사도와 120명의 그의 문도 들, 제자들이 함께 들었음을 함께 강조하고 있고, 그냥 한 두 사람이 본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친히 우리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을 다음에 갖다 놓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았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사도들의 특권을 아무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친히 보았다. 이 보았던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셨는데 사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루신 모든 행적들과 그리고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하시므로 모든 구속을 다 이루셨음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현재 완료를 말하므로, 그리고 지금도 눈 감으면 필름을 돌리듯 눈에 그리스도가 보인다. 그래 늘 사도 요한의 눈에는 그리스도가 항상 서 계셨습니다. 승천하신 후에도 사도 요한의 눈에 아직도 눈만 감으면 그리스도가 필름을 돌리듯 그렇게 나타나시고 나타나시고 또 보는 것 같다. 단지 손으로 못 잡을 뿐, 계속해서 그리스도가 그의 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아 직도 그의 마음으로는 그의 영으로는 지상에 와 계신 그리스도를 반복해서 보고 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를 쓸 때까지 최소한
3,40년이 지났는데도이라 고 쓰므로 한번도 그의 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아니했음을 여기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암시 보다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장이 또 재미 있습니다.그리고 우리 말로 주목하고,주 목하다는 말에거기는 aorist를 썼어요. 이제까지는 현재 완료 동사 를 썼는데, 주목했다는 말에는 aorist 단순과거를 사용하므로, 주목했다고 하는 말을 단순 과거를 사용했습니다.주목했다는 것도 현재 완료를 써야 되는데 , aorist를 썼어요. 자 aorist를 단순과거를 사용하므로 여기에 자신이 서 있습니다. 주목하는 일은 과거 일로 끝나 버렸습니다. 계속해서 더 많이 예사로 보지 말고 더 주목해서 보지 안했던고 하는 아쉬움이 이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냥 눈에 보듯 그렇게 주의해서 볼 것을 왜 그냥 예사로 어떤 때나 주 목해서 보지 않고 그냥 예사로 봐놨던고 하는 아쉬움이 여기에 서려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리 그리스도를 가까이 가 손으로 잡으로 더 주목해서 정말 이분이 하나님이셨는데 사람이 셨는가 하고 더 들여다 보고 들여다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이 로 표현 하고 어떻게 우리가 더 그렇게 범연히 보지 말고 조금 더 주의해서 정말 주목하고 뚫어지 게 봐 둘걸, 하는 아쉬움이 함께서려 있습니다. 그냥 눈으로 만 볼 뿐만 아니라 정말 이분 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 귀한 기적들을 행했을 때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하 고 다 고백했는데, 그때만 다 주목하고 반성할 것이 아니라 참으로 매번 매번 그랬을 걸, 하는 아쉬움이 이 문장에 들어 있습니다. 어찌해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를 만날 때마다 그 하나님을 경탄으로 감탄으로 주목해서 보지 못했던고!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범연해서 다시 볼 수 없는 그 기회들을 놓침에 대한 아쉬움과 일면의 한탄이 여기에 서려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주목해 보는 것, 한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주목해 볼 수 있었다고 하는 강조도 또 이 말에 함께 들어 있습니다.내가 주목해서 봤다. 그냥 본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반성하면서 봤다.그냥 본 것이 아니라 반성적으로 깊이 들여다 봤다고 하는 말을 이 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목해서 봤을 뿐만 아니라 뿐만 아니라 여기에 우리의 손들로 그를 만졌다. 거기도 또 aorist를 썼 습니다. 단순과거를 사용하므로 지금은 아무리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는 그와 같은 아쉬 움이 함께서려 있습니다. 어째 그때 많이 만져 볼 걸, 그때 좀더 계속해서 만져 볼 것을, 이분이 정말 하나님이셨는데 사람되어 오셨는데, 어떻게 우리 중에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되 어 오셔서 계실 수 있을까! 그렇게 감탄만 했을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만져 보고 만져 보면 좋았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여기에 서려 있습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범연히 범연히 그 냥 그냥 만져버리고 몇 번 만져 버리고 그쳤을까! 물론 사도 요한은 다른 사도들 보다는 더 그리스도를 많이 만질 수 있는 특권을 가졌던 사람 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어 보면 그가 친히 만찬 석상에서 그의 품에 기대 누워서, 우리처럼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지요. 로마 사람들은 상을 이렇게 가운데 놓고 빙 둘러서 뒤로 기대 누워 가지고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바로 그리스도 앞에 자기 차례가 되어서. 베 드로가 저쪽에서그게 누굽니까하고 물으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요한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내가 떡에다가 청을 찍어서 준 바로 그가 나를 팔 자 이다다른 사람은 못 들었어요. 그렇게 만질 수 있었는데, 우리의 손으로 만졌다. 그 아쉬움이 있음과 함께 또 분명히 만져 보았는데, 그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셨다고 하는 강조가 이 문장 이 단어에 들어 있습니다. 친히 우리가 친히 그를 우리 손으로 만져졌다. 이 우리 손으로 만졌다고 하는 그 말로 그냥 그것 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 사도 요한 생존시 벌써 일어난 그노시스 주의에 대 한 반박이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요한 서신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그 노시스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우리 손으로 분명히 만졌다고 하는 우리 손으로 분명히 만졌었다. 우리 손들 로! 그냥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만졌었다고 표현하므로 그가 그냥 그노시스 주의에서 생각하듯 그렇게 영으로 영체로 나타난 분이 아니라 분명히 육체로 오신 분이었 습니다.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고 하는 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 그 문장 과 함께 앞에 있는 도 같이 둘을 aorist로 단순과거로 썼는데 그렇게 하므로 분명히 우리 눈으로 주목해서 볼 때 보이는 실체, 우리 손으로 만진 확실한 하나님 이 육체로 오신 분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손들로 친히 그를 만졌고, 거기 에는 가 앞에 있지요. 우리 손으로 친히 만졌습니다. 참으로 육으로 오신 하나님이셨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고서 마지막으로 결론 내리기를 참 생명의 말씀, 바로 그가 생명을 가져 오신 말씀, 바로 그 가 하나님의 생명이신 말씀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분이 이렇게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 가져왔음을 생명이 있음을 사도 요한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태초부터 서 영원부터서 계신 이가 이 땅에 오시니 우리가 친히 들을 수 있었고 그리고 우리가 들으 면서 구약의 모든 약속과 예언의 성취를 받았고 그리고 우리 눈으로 친히 바라보고 하나님 이 우리 중에 나타나심을 분명히 우리가 보아서 증명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목 해 보아서 그리고 우리 손으로 만져서 분명하게 뚜렷하게 구체적으로 우리 속에 와 계시는 오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왔다고 하는 사실을 이 문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 오늘 1절만 제가 여기서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원문으로 이 문장을 외워 오시기 바랍니다. ,, . 그러니 바로 여기서 또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의 아들 생명의 말씀 외에는 생명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노시스가 주장하는 그런 그리스도에게도 생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들에게도 참 생명은 바로 이렇게 오신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오신 그분 만이 생명이고 그분이 생명을 가져 왔 음을 강조하고 그 외에 다른 아무 데도 생명이 없음을 이 문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나타나심, 육체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만이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그냥 생 명이 아니라영원한 하나님의 생명 입니다. 여기에 다른 생명을 쓰지 아니하고 란 말을 쓰므로 하나님이 가지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생명, 물론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시니 사도들이 듣고 눈으로 보고 그리고 주목하고 그리고 친히 손으로 만져서 확실히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의 역사 중의 희귀한 인물이 아니라 이 사도의 강조는 태초부터서 계신 이가 계시니 바로 하나님이신 그 존재가 그냥 우리와 함 께 계실 때만 아니라 영원부터 하나님이셨던 이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생명의 말씀으로 나 타나셨다 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으로 영원부터 계신 이가 육체로 나타나심으로 만이 우리에게 생명이 왔고 바로 이분 안에서만 우리에게 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 만이 생명의 종교이고 기독교 만이 예수 그리스도 만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하고 참된 복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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